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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해방이후시대

여순반란사건과 관련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익 경력에 대한 객관적 자료와 논의?

Q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 경력에 대해 궁금합니다. 1963년 대선 때 윤보선 후보측에서 사상논쟁에 불을 지피면서 처음 알려졌다고 하는데요. 당시 박정희의 여순반란서건 관련사실을 폭로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박 전 대통령의 좌익활동에 관련된 사실과 시대에 따라 그의 좌익 활동이 어떻게 사회에 받아 들여 졌는지 궁금합니다.


A 1

일단 이 부분에 대한 객관적 자료라는 것이 존재하지는 않을 겁니다. 연구한 학자들의 성향에 따라서 사료를 다르게 분석했기 때문에...

보수주의적 학자들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좌익경력에 대해서 누락시키거나 가족사적 흐름(박정희 전 대통령의 손윗형이 월북한 좌익운동가였습니다)에서 해석하곤 합니다.

반면 진보주의적 학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문제와 좌익경력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색깔맞추기를 한 권력지향적 인물론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하지요.

일단 실증적 사실은 그가 해방이후 남조선노동당의 군내 조직 및 연락담당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순반란이 일어난 직후 군내부에서 백선엽 장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일련의 숙군작업에서 발각되어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해지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군내 남로당 조직을 실토하면서 위기를 모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그의 좌익 경력이 문제가 되어 해임당하게 되고 이를 당시 장도영 장군이 구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구체적 자료에 대해서는 일단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서적(90년대 이후 출간물을 중심으로), 혹은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자료를 좀 찾아보셔야 할 듯 합니다. 인터넷 쪽에는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별로 없군요.

아울러 그의 좌익활동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 대해 간단히 덧붙인다면,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1963년의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승리한 지역분포를 살펴보면 좀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윤보선씨가 주로 대도시 위주의 개발지역에서 승리한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농촌을 중심으로 한 저개발지역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당시 좌익은 1958년의 진보당 사건 이후 정치의 중심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1960년의 5.16으로 완전히 설 자리를 잃은채 농촌지역으로 숨어들어간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대선 과정에서 이러한 군사정부의 지도자가 죄익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에 대해 그들은 크게 반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좌익청년들을 중심으로 해서 큰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내부적으로 이런 과정이 있었던데 비해 대외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익 경력은 상당한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실제로 군사쿠데타의 성공이후에도 미국은 군사혁명위원회를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기를 꺼렸고 결국 1960년 11월에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케네디를 방문해 자신의 반공사상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과의 문제에서도 초기에 상당히 이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었다는 비화가 전해집니다.


A2

그 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박 정희가 여순반란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에 앞서 이승만 정권을 탓해야 되는 면도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독일에 협조한 여성의 머리를 빡빡밀어 조리돌림하는 사진이 라이프지에 게제되어 있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당시 정권이 취약했던 이 승만은 일제 시대에 대부분 한국인을 말살하거나 일제의 앞잡이인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일제시대의 잔유물이 청산되지 않아 오늘날 독종 수구골통들을 양산시켰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여순반란 사건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요원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같은 만주 군관학교 출신 친일파의 구명운동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 선봉에는 후일 국회의장과 총리를 지낸 백선엽, 정일권등이 함께하며 그외 최규하를 비롯한 만주출신 일제의 앞잡이들이 정차관을 독점하게 됩니다. 최규하는 만주군관학교는 아니지만 관리를 양성하는 만주학교에 다닙니다.

특히 박정희는 교사를 하다가 나이가 많아 육사를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써서 일본인 관리를 감복시켜 육사에 들어간 이야기는 너무나도 큰 상식에 속하죠.

참고로 엊그제 읽은 뉴스의 부분 입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 해방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다. 몇몇 재중동포들이 기억하는 ‘마쯔모도’도 있지만 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의 두 이름은 시기와 성격에서 차이가 있다.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다음해인 1941년에 바꾼 것이다.

언론인 조갑제는 저서 ‘박정희’에서 “군관학교에서 한국인 생도들에게 1주일씩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시킨 것이다. 퇴교 등 명시적 협박은 없었으나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동기생들은 말한다”고 밝혔다.

이 이름엔 원래 박정희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목(木)은 박(朴)에서, 정은 정희에서 따온 것이라서다. 이처럼 강압적 분위기에서 원래 이름의 흔적을 남기며 창씨개명하는 게 그 시대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카모토 미노루’는 다르다. 우선 조선 이름 ‘박정희’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재일 언론인 문명자씨는 1999년 발간한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고 기술했다.

일본 백과 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기록돼 있다.

이와 관련 김병태(79) 건국대 명예 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며 일본군 고급장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했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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