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1883~1955)
백색(白色)속에 찌든 서민(庶民)의 감정
평생을 몽마르뜨에서 살았고, 몽마르뜨를 그리며 결국 몽마르뜨에 묻힌 그는삶의 아픔과 흔적이 짙게 배어있는 구석진 골목의 적막한 풍광과 쓸쓸한 애상을 우수 깊은 백색으로 표현한 슬픈 백색의 화가이기도 하다.
눈 덮인 라팽 아질
르노와르, 드가 등의 그림속 모델이었던 그의 어머니,
사생아로 태어나 이미 10대때 알콜 중독자, 정신병자의 길을 걷게 된 위트릴로.
로뱅송의 선술집
그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을때, 대화요법으로 그린 그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몽마르트르 라셀가
모딜리아니와의 조우, 늘 술에 취해 거리의 하수구위에 쓰러져 살았던 방황과 격정의 나날. 그리하여 진정으로 아팠던 자만이 가질수 있는 그만의 색채, 우울한 백색.
미미 팽송의 집
평생을 몽마르뜨에서 살았고, 몽마르뜨를 그리며 결국 몽마르뜨에 묻힌 그는삶의 아픔과 흔적이 짙게 배어있는 구석진 골목의 적막한 풍광과 쓸쓸한 애상을 우수 깊은 백색으로 표현한 슬픈 백색의 화가이기도 하다.
아스니에르 마을의 거리
'파리를 떠난다면 기념으로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하고 묻는 비평가들에게 " 건물 회벽 한 조각을 가지고 가겠다" 라고 말했던 ........
코탱의 골목
나는 나의 작품이 시든 꽃내음을 풍겼으면 좋겠다.
황폐해진 사원의 꺼져버린 촛내음을 풍겼으면 좋겠다.
설사 내가 그린 가난한 집들이 현실에선 허물어져 버린다 해도 ......
"위트릴로의 말 중에서"
Chartres Cathedral
Church of Saint-Severin
Notre-Dame de Clignantcourt
Rue des Abbesses
Snow in Montmartre
Village Church
Windmills of Montmartre
프랑스 화가. 파리 출생.
사생아로 태어나 1891년 에스파냐인 미겔 위트릴로의 양자로 입적되어 위트릴로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르노아르, 드가의 모델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화가가 된 수잔 발라동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16살 또는18살이었다고 한다. 양복점에 다니기도하고 써어커스의 댄서가 되기도 하며 카바레를 출입하다가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화가로 성공하지만 교양없고 방종하며, 노상 위트릴로를 잊고 그녀 자신의 본능에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따라서 위트릴로는 고독에서 오는 어머니를 찾는 마음이 더 강했을 것이다.
위트릴로는 이목구비가 섬세하고 , 말수가 적고 신경질적인 아이였으나, 때로는 격렬하고 감정에 쫒겨서 난폭한짓도 했다. 나쁜 패거리와 어울려 10세에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그 후 직장에서도 한곳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였으며, 1899년에는 양아버지의 무지스의 권유로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마침내 알콜중독으로 1901년 입원 가료를 받아야만 하였다.
병원에서 대중요법으로 그에게 과해진 회화제작이 계기가 되어,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를 술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데생과 회화수업을 시키게 되고 이로서 위트릴로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작품은 자기 주변의 풍경화에 그쳤으며, 그림엽서에서 베낀 것도 많았다.
초기에는 몽마니 등 파리 교외의 풍경을 그리고(Montmany시절, 1901~07), 이어 인상파적인 작풍을 단기간 시도하였으나(인상파시절, 1907∼08), 가장 충실한 위트릴로 독자의 조형세계(造形世界)를 구축한 것은 30세까지의 한 시기였다(백색시대, 1908∼12). 음주와 난행과 싸우면서 제작한 이 시절의 작품은, 오래된 파리의 거리묘사에 흰색을 많이 사용하여 미묘한 해조(諧調)를 통하여 우수에 찬 시정(詩情)을 발휘하였다
그는 루소의 재능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켜 의도적으로 소박한 형식의 회화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위트릴로와 모딜리아니의 몽마르트신화는 유명한데, 위트릴로를 찿으려면 시궁창 도랑을 따라가다보면 어디엔가 처박혀 있을거라는 말이었다. 동네의 사람들은 위트릴로가 길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으면 그의 이젤을 걷어차곤 했기 때문에 그는 방안에서 자신의 동네를 찍은 엽서를 보고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
위트리로가 거리를 그리는 것은 생명을 잇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건물은 화려한 것이 아니라 구석이고 골목이다. 소박한 교회와 병원이다. 그는 그곳에서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서민의 역사와 슬픔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위트릴로는 우편엽서에 담긴 사진을 보면서 같은 모티브를 반복하는 그림을 그린다.
1923년에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바라바오" 의 무대장식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시작하였을 때 서명에는 모리스 발라동이라 썼으며, 모리스 위트릴로라 서명하게 된 뒤에도 발라동을 뜻하는 자를 서명 끝에 덧붙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였으며, 1901년에는 알코올중독으로 쇠약해져 요양소로 보내졌다. 이듬해 의사의 충고에 따라 어머니는 술을 끊게 하기 위해 그에게 강제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 뒤 그는 파리 교외나 몽마르트르 거리를 독자적 화법으로 그렸다. 1903∼1907년까지는 <몽마니시대>라 하여, 당시 그가 살았던 파리 교외 몽마니풍경 등을 단숨에 그리는 기법을 이용하여 짙고 거칠며 어두운 분위기로 표현하였으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다음은 <백색시대>로서, 흰 건물에 열중하여 재료에 회반죽을 섞어 벽의 감촉을 표현하였다. 집집마다 엷은 때가 묻은 희끄무레한 벽, 어둠침침한 파장(罷場)의 거리, 인적이 없는 거리, 쇠살문이 닫혀 있는 호텔, 교회 등 시정이 풍부한 그림을 그렸다.
1907∼14년의 이 <백색시대>야말로 모리스 위트릴로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시대이다. 음주벽은 여전하였으나 걸작품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그 뒤 <색채시대>가 이어져 광택이 나는 색채를 썼는데 특히 녹색을 강조하였다.
화상 조보르프스키(모딜리아니의 친구)를 통해서 어느정도 금전도 얻어썼다. 그 후 1913년 브로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으나, 코르시카 여행(12) 후 점차 색채가 선명해졌으며(다채시절, 12년 이후) 명성이 높아지면서 예전의 서정성이 희박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1921년 어머니 수잔발라동과 2인전을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시에 쇠퇴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말년의 25년 동안 건강이 회복되었고 명예까지 얻어 35년에는 수집가인 미망인과 결혼하여 생활도 안정되었으나 그의 작품에서 이전의 긴장도는 사라졌다.
만년에는 그의 작품의 찬미자인 벨기에 부인과 결혼하여 신앙심 두터운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며, 프랑스 남서부의 다크스에서 폐충혈(肺充血)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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