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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구한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영원(英園)

스러진 황실의 그림자는 쓸쓸하다


▲ 마지막 황태자 부부가 잠든 영원. 오른쪽 건너편에 황세손 이구 공이 묻혀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이 잠든 영원(英園)을 찾은 것은 지난해 11월 초순이었다. 경기 금곡의 홍유릉 담장의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자기 늦가을 단풍이 물든 나무가 늘어선 길이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 읽은 동화 '비밀의 화원'의 숨겨진 문을 열고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난 영친왕(1897~1970)은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도착하자마자 앰뷸런스에 실려 성모병원으로 향했다. 7년간의 입원 생활 끝에 임종을 맞으러 낙선재로 돌아온다. 1970년 5월 1일 영친왕은 한맺힌 일생을 마치고 끝없는 휴식에 들어갔다.


▲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영친왕 부부.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합장묘인 비공개 사적지 영원은 조선의 13개 원(園 왕세자·세자빈·왕의 부모가 묻힌 묘)중 마지막으로 조성됐다.

영원은 원임에도 무인석과 난간석을 조성해 왕의 예우를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잘 생겼지만 하체가 도무지 비례가 너무 안 맞을 정도로 아주 짧다. 상체가 3분의2, 하체가 3분의1이다.


▲ 영원 무인석과 문인석


무인석과 문인석을 보고 갑자기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생각나는 건 무슨 까닭일까. 황태자의 신분에서 평민으로 격하된 영친왕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짧게 머리 속을 스쳐갔다.

영친왕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오른쪽에 아직 떼가 뿌리를 내리지 않은 커다란 묘 하나가 비닐로 덮여있었다. 2005년 7월 작고한 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묘다. 저 영친왕 부부는 아들이 일본에서 숨져 돌아와 옆에 묻힌 것을 어떤 심정으로 봤을까.



황실에서 밀려난 의친왕

고종과 순헌 황귀비 엄씨 사이에 태어난 영친왕은, 순종이 등극하자 형 의친왕(1877~1955) 이강(李堈)이 있음에도 황태자로 책봉된다.

의친왕은 고종과 귀인 덕수 장씨 사이에서 고종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궁녀였던 장 귀인이 고종의 아들을 낳자 명성황후의 노여움을 사서 의친왕 모자는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 의친왕 이강과 의친왕비 김수덕


유일한 아들 순종이 병약해 후사를 걱정했던 명성황후가 1891년 의친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의화군에 봉했다. 궁에서 지내던 의화군은 17세이던 1893년 의친왕비 김수덕 여사와 결혼한다.

이듬 해 일본에 보빙대사(報聘大使)자격으로 파견되었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달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순방했다. 의화군은 조선의 왕자로 대외 특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등극했고 영친왕이 태어난다. 의친왕의 반일 감정을 잘 알고 있던 일제와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 귀비의 눈에 의친왕의 존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영친왕이 태어나자 엄비의 획책에 밀려난 의친왕은 18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미국 여성과의 연애설 등 모략이 끊임없이 고종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미국 유학 당시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교류를 나누었고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사는 조선인을 위해 써달라고 금일봉을 전해주기도 했다 한다.

1905년 귀국을 위해 일본 동경에 도착한 의친왕은 8개월이나 귀국을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귀국하라고 고종이 보낸 전보는 중간에 번번이 없어지곤 했다.

▲ 영친왕 생모 순헌 황귀비 엄씨의 양장차림.
1906년 4월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수제일은행 근처 여관에서 머물렀는데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맞기도 한다. 의친왕이 암살당할 뻔한 일은 무려 14번이나 된다 한다.

누가 보낸 자객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제의 소행인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귀국한 직후 대한제국 육군부장으로 임명된 의친왕은 부황 고종을 만나고 온 날이면 피를 토하며 통곡을 했고 일제의 야욕에 근심하던 고종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의친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술 마시고 기생을 부르는 등 위장을 펴지만 그 호방한 기상은 여전히 일제의 감시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의친왕이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잔치를 벌인다고 기생을 부르라 하면, 기생을 태우고 오는 인력거꾼은 독립군 밀사였고 의친왕과 밀사들은 골방에서 밀담을 나누곤 했다.

1907년 순종의 등극과 함께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다. 한때 순종 대신 술주정뱅이로 소문난 의친왕을 즉위시키는 것이 거론됐지만 의친왕의 기상이 만만찮아 일 하기가 어렵다 해서 무산됐다.



부전자전 독립운동

의친왕의 독립운동 기록은 그동안 묻혀 있었으나 뒤늦게 하나 둘씩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1909년 경남 거창군에 가서 의병을 양성할 계획을 세운 것과 1919년 상해로 탈출을 기도하다 일제에 검거돼 실패한 일이다.

의친왕은 거창군에서 정태균(鄭泰均)을 만난다. 정태균과 함께 지방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의병단을 양성하려고 북쪽 사선대 근처 땅을 사들이다가 탄로나 일본헌병에게 호송돼 서울로 돌아온다.

▲ 의친왕 아들 이우 공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11월 10일 아침,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힌다. 의친왕 이강전하가 궁을 탈출한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동궁(寺洞宮)에 살던 의친왕은 비밀리에 상해의 독립지사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은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고 민족의 일체감을 모으려는 역할로 의친왕을 옹립하려 한 것이다.

의친왕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제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기차를 탔던 의친왕은 만주 안동(단동)에서 붙잡혔고 서울로 돌아와 총독관저 안에 감금된다.

제 아무리 일제라도 의친왕을 재판정에 세울 수는 없는 일. 황제를 잃은 조선 백성들에게 의친왕의 존재는 고종을 대신한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일명 '대동단(大同團) 사건'이라 하는 상해 탈출 사건은 일제에 의해 '의친왕 납치사건'으로 조작되고 말았다.

작년에 작고한 황세손 이우를 마지막으로 황태자 영친왕의 후손은 끊겼다. 현재 고종의 혈통은 의친왕 후손만 남아있다. 13남9녀를 둔 의친왕은 일본에 귀화한 맏아들 건(鍵)을 아들로 치지도 않았고 의친왕의 기개를 이어받은 아들이 둘째 우다.

얼짱 왕자로 화제를 모았던 우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일본여자와 결혼시키려는 일제의 압력에도 끝내 거절하고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한다.

일제가 망하기 바로 직전 일본에서 귀국한 우는, 일본으로 가라는 일제의 독촉에 딸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을 핑계대고 피하려 했으나 결국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얼마되지 않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일본군 군대로 출근하다 원폭에 희생되고 만다.


▲ 의친왕 묘


비석조차 없는 의친왕 묘


영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1881~1964) 합장묘에는 비석도 안내판도 없다. 옆에 있는 덕혜옹주의 묘에는 비석이라도 있는데 이곳은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만 서 있어 모르고 찾는다면 누구의 묘인지도 알 수 없다.


▲ 덕혜옹주 칼라복원 사진.


전쟁통에 먹을 것도 없이 고생하다 1955년 작고한 의친왕이 처음 묻혔던 곳은 이곳이 아니다.

전쟁 끝이라 사유지에 가매장되었던 의친왕은 서삼릉 한 자락 한양골프장 구석으로 옮겨져 묘비도 없이 방치되다가 의친왕비가 있던 현재의 금곡으로 이장된 것은 1996년이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씨가 갖은 노력과 고생 끝에 부모를 한 곳에 합장한 것이다.

이곳 금곡 홍유릉 경역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주인공이었던 고종과 순종, 영친왕, 의친왕, 황세손 이구,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덕혜옹주까지 잠들고 있다.

의친왕 묘에서 돌아 나오는 길목에 영원 재실이 사라진 왕조의 묵은 때를 껴안고 조선의 마지막 그림자처럼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영원 재실은 경종의 의릉 재실을 헐어내어 지은 것이다. 무슨 연유로 수백년 동안 의릉을 지키던 재실이 이곳에 와서 머나먼 마지막 후손의 재실로 둔갑했는지 내막은 모른다.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역사는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지만 주인공들은 잠들었다. 그리고 시간의 발자국은 지금도 어김없이 역사를 밟고 지나가고 있다.


▲ 영원 재실
ⓒ 한성희



덧붙이는 글/

위 자료사진은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 이혜원씨가 제공했습니다. 귀중한 자료 제공에 감사드립니다.

2006-03-09 12:1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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