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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인공위성사진과 함께 보는 서울 풍수 이야기

고성혁의 서울 풍수 이야기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19711
2005/08/30



위의 사진은 구글어스에서 편집한 서울의 경복궁의 인공위성 사진입니다.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한권의 책을 사보게 되었습니다. 육관 손석우도사의 "터"라는 책이었습니다. 93년도일 겁니다. 그때 심심풀이로 그냥 읽었던 책을 정확히 1년 후 다시 똑박또박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관 손석우 도사가 예언한 김일성의 죽음이 정확히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터"라는 책에서 육관도사는 김일성의 정기가 전주 모악산에서 받은 것인데 그 정기가 94년에 끝난다고 하면서 예언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덮어 두었는데 94년 한여름 속보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바로 김일성의 죽음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바로 육관도사의 예언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읽게 되었고 또 풍수라는 말을 되세겨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인공위성사진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그때 읽었던 내용을 인공위성 사진과 더불어 재구성해 볼려고 합니다.


이성계의 한양천도에 얽힌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설전을 재구성 해 보겠습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손때가 묻은 개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금으로 말하는 소위 '기득권층 타파" 로 여기고 새술은 새부대라는 슬로건 하에 천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을 다니면서 물색한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답사차 와서 처음 본 곳이 왕십리(往十理)였다죠. 여기서 10리를 더 가야 한다는 곳. 그래서 10리를 더 온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터라고 합니다.


주산은 삼각산(북한산)으로 잡고  바로 뒤는 북악산, 인왕산줄기는 우백호, 반대편은 좌청룡. 위의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습니다. (전문전 풍수가가 아니라서 전문용어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터를 잡는 과정에서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꿈 해몽을 잘 해주면서 百年之友가 된 무학대사와 역성혁명의 바람잡이이자 실질적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설전은 그 누구도 못 말릴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말빨이 더 쎈 유학자 정도전이 이기긴 이겼습니다. 지금도 말빨센넘이 이기지요)

그 말싸움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풍수사상의 근간인 주산을 근간으로 삼아 좌청룡 우백호를 토대로 남향의 배산임수지역이 항상 명당자리로 취급받습니다. 그와 아울러서 군왕은 항상 북쪽에서 남쪽을 보고 다스린다는 전통적인 음양사상까지 가미됩니다. (음양사상으로 볼때 북이 양, 남이 음)

그런데 우리의 도사님인 무학대사님이 딴지를 걸고 나왔습니다. 崇儒抑佛정책의 화신이자 당시 최고 실권자인 정도전에게 딴지를 걸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성계의 빽이 없었다면 딴지를 걸 수 없었겠지요. 보통의 중넘 같으면 벌써 댕그렁 했을터인데 빽이 빽인지라 정도전도 그렇게는 못하고 지금 누구가 좋아하는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아는 조선시대 초의 100분토론이 생방송되었습니다. 사회자는 이성계, 패널은 정도전과 무학대사였습니다.
 

사회자 이성계 : 지금부터  한양천도와 함께 도성 위치결정을 위한 100분토론을 방송하겠습니다. 패널은 정도전과 무학대사입니다. 서로들 인사 하시지요.

무학대사 : 안녕하십니까? 나무 관세음보살

정도전 : 어음.  (존심때문에 인사도 안받는다)

사회자 이성계 : 무학대사님 왜 딴지를 걸고 나왔는지 먼저 발제토론 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학대사 : 뭐 딴지라고 하면 섭하구요. 나무관세음보살. 다 군왕과 이 새로운 나라의 천년사직을 위함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한 610년정도 지나야 볼수 있는 한양부근 인공위성사진을 여러분에게만 특별히 먼저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괜히 도사가 아니라는 증거올시다.

짠~~~  인공위성 사진 등장.



보시는 것처럼 보면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다른 것은 다 좋습니다. 주산이 북한산하며 주작인 남산 그리고 한강수 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좌청룡과 우백호의 언밸런스입니다.

정도전 ;  잠깐만요.  지금 때가 어느땐데 또 풍수이야기입니까?  지금이 고려시대인줄 아세요? 지금은 새로운 조선시대입니다. 고려가 왜 망한줄 아세요. 바로 중넘의 요상한 짓거리 때문에 망했는데 지금 또 그 짓거리 한다는 겁니까?

무학대사 : 나무관세음보살. 사회자님 아직 저의 발언시간인줄 압니다만.

사회자 이성계 :  정도전님. 좀 있다가 발언하세요. 사회자가 호구는 아니잖습니까?

정도전 : 지송^^

무학대사 : 다시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좌청룡과 우백호의 언밸런스가 무언고 하니 바로 이것입니다. 그 줄기의 장단과 고저를 우백호가 인왕산줄기에서 그 기가 꺽기는데 비해서 좌청룡은 죽 이어져 나갑니다. 즉 우백호의 기운이 좌청룡의 기운보다 약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무릇 우백호는 長子(맏이,적통자)를 뜻하며 좌청룡은(次子)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맏이를 뜻하는 우백호보다 次子를 뜻하는 좌청룡이 더 實하다는 것은 그 기운상 나라의 변고를 많이 가져오게 됩니다. 자연의 순리상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야 정상이고 불은 물을 만나면 꺼져야 하는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오히려 반대가 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좌청룡의 기운보다  우백호의 기운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릇 물과 기운은 높은데서 낮은데로 양에서 음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양이라고 할 수 있는 우백호가 음이라고 하는 좌청룡보다 약하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사회자 이성계 :  뭐 그렇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도성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의 재기를 했으니까 대안까지도 말씀하셔야 시청자분들도 납득할 텐데 대안은 무엇입니까?

무학대사 : 참 좋은 질문 하셨습니다. 제가 괜히 도사가 아닙니다. 그럼 다음의 사진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사진은 내가 도사라서 볼 수 있는 겁니다. 무려 600년을 앞서서 보는 것이니까 죽더라도 발설하면 안됩니다. 정말 천기누설이 되니 꼭 비밀은 지켜야 합니다.

짠 사진 2 등장



무학대사 :  바로 남향대신에 왕궁을 동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존 경복궁터에서 지금의 명륜당 터쪽으로 옮겨서 동향으로 짓는다면 기존의 좌청룡맥은 신우백호가 되고 새로운 좌청룡이 생기는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동향으로 왕궁을 짓는다면 새로운 조선은 천년사직을 보장받을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공위성 사진으로 보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회자 이성계 : 그럼 지금부터 정도전님 발론해 보세요.

정도전 :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지금은 고려시대가 아닙니다. 새로운 조선시대입니다. 중넘들이 설치던 고려시대가 아니란 거죠. 고려가 왜 망했습니까? 위화도 회군땀시 고려가 망한게 아닙니다. 바로 중넘들의 뻘짓거리땀시 망한겁니다. 풍수지리 잘 보고 그것대로 한 고려가 망한건 멈니까? 그렇게 믿는 풍수지리로 본다면 고려가 망하면 안되죠. 안그래요?

글구 개경에서 왜 돈들여 가면서 한양으로 천도 합니까? 바로 중넘들하고 고려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은것 보기 싫고 또 그 기득권을 없애고 또 고려를 망해먹은 불교의 잔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혁의 의지와 사상인 유교이념을 구현하여 새시대를 열고자 함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또 중넘 말을 또 들어야 합니까?

무학대사 : 나무 관세음보살. 사회자님. 인신공격성 발언은 자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 이성계 : 정도전님. 인신공격성 발언은 강퇴요건이오니 자제바랍니다.

정도전 : 쩝~  글타면 에헤 ^ㅅ^ 그러니까  지금와서 새술은 새부대에 담고 과거사를 청산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다시 꼴텅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무학대사 : 나무관세음보살.  신고 들어갑니다.

사회자 이성계 : 정도전님 꼴텅은 금지어입니다. 경고 1회.

정도전 : 버릇이 되서리. 지송. 그러니까 무릇 임금은 북쪽에서 남쪽을 보고 다스리는 것이 고래로 부터의 전통이자 또 그렇게 해야 위엄이 섭니다. 동향을 보고 마주 한다는 것은 일반 백성도 그렇게 안합니다. 또  집값도 동향보다는 남향이 더 비쌉니다. 동촉하여 주시옵서서. (사족 : 글고 동향이면 아침에 늦잠자기도 힙듭니다.)

사회자 이성계 ; 그럼 외국의 사례는 어떻습니까?

정도전 : 아직까지 왕궁이 동향인 경우는 없는 줄 아뢰옵니다. 게다가 이미 설계가 끝난 마당에 지금와서 다시 설계하면 추가비용도 들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새 왕궁에 입주가 그만큼 늦어 집니다. 늦어지게 되면 지긋지긋한 개경에서 그만큼 더 머물러야 하고 또 대출이자하고 공기 늘어나는 것 만큼 공사비도 늘고 그만큼 개혁의 힘이 분산됩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우리는 임진나루에서 수구세력이자 꼴텅인 왕씨넘들을 무참히 수장까지 시키고 왔습니다.   다 새로운 조선의 개혁을 위함인데 지금와서 수구 꼴텅인 중x말을 다시 듣는 다는 것은 개혁의지의 후퇴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모(이성계를 사모하는 모임)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통치기반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서서. 그리고 사이좋은 왕자님들이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왕자님들에게 대한 모략이 아니옵고 무엇이란 말이옵니까?

사회자 이성계 : 무학대사님  반론해 주시죠

무학대사 : 나무관세음보살. 저는 전문가입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보는 전문가입니다. 내가 괜히 인공위성사진까지 보여주는 줄 아세요. 바로 전문가이기 때문에 600년 후에것 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겁니다. 정도전님은 저에게 비한다면 아마추어도 아닙니다. 미래를 보는 눈을 정도전님은 없습니다. 그저 공자왈 맹자왈 밖에 더합니까? 저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이지 뻥카를 말하는 거 아닙니다.

정도전 :  사회자님. 지금 무학대사는 저에게 인신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전문가와 아마추어라는 전형적인 이분법 논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탕질로 발전할 수 있으니 주의주시기 바랍니다.

무학대사 : 뭐가 이분법 논리입니까?  사실을 말하는 건데

사회자 이성계 : 무학대사님 인신공격 하지 마시구요. 다들 진정하세요. 이러다가 사이트 망해요. 자 그럼 이상으로 토론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이멜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결과는 말빨 더 쎈 정도전의 뜻대로 갔습니다. 당시의 개혁논리의 승리였지요.

그러나 희안하게도 역사는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흘러갔습니다.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건국이라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던 정도전은 결국 이성계의 5번째 왕자 이방원에 의해서 목이 댕강하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정도전의 정확한 시신과 묘는 어딘지 모르고 있습니다.

또 조선의 왕들은 역대로 장자 상속이 별로 없었습니다. 단명하거나 반정으로 엎어지기 일수 였습니다. 게다가 더 아이러니 한것은 임금뿐만 아니라 이렇한 것은 민간에게도 그대로 그 기운이 전해졌다는 겁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예로 든다면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임금포함)들 보면 장자보다는 차자이하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 현재도 잘되는 집안(기업)을 보면 장자상속 보다는 차자이하의 상속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의 집안은 어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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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터 이야기

이글은  2000년 12월 14일 게재된 글임을 감안하여 읽어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게재일:2000-12-14/한국경제신문(시리즈/연재)

[최창조의 '風水산책'] (3) '이제 청와대 터에 희망을 가져보자'


나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청와대 터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그 골자는 일제가 조선 왕국의 수도인 서울의 정룡(正龍) 북악산이 생기를 내뿜는 결정적인 장소, 즉 용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짓고, 용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 총독 집무처인 중앙청을 지음으로써 용의 목을 누르고 입을 틀어막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곳 주인들의 말로 또한 비참했음이 "땅은 거짓도 없고 용서도 없다"는 풍수 금언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라 자주 인용해 왔다

청와대가 지어진 것은 1927년 제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라는 자 때였다. 그의 서울 도착은 강우규열사에 의하여 피로써 막을 열었다. 조선 총독을 한번 더 한 그는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자신보다 더 파쇼적인 젊은 장교들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만다.

청와대의 첫 거주자가 피로 시작하여 피로 끝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사이토의 뒤를 이은 제4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는 군 장교 시절부터 돈을 좋아해 '배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위 야마나시 총독 독직사건에서 5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입건, 구속되었다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말하기도 지겹다. 이제 간단히 다음 자들의 말로를 정리하자.

5대는 3대 사이토가 다시 맡았으니 더 말할 것이 없고,

6대 우가키 가즈시게는 2차대전이 끝난 후 공직추방령에 의하여 1953년까지 은퇴했다가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병으로 의정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사망.

가장 악랄했던 총독 7대 미나미 지로는 2차대전 후 전범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고 수감, 1954년 질병 때문에 풀려났으나 다음해 병석에서 사망.

8대 구이소 구니아키는 연합군의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지목, 1948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옥사.

마지막 9대 아베 노부유키는 미군 하지 중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는 수모를 겪은 후에, 치사하게도 자기 책임 아래 있던 일본인들의 귀환을 뒤로 하고 자신의 아내와 손자 두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짐을 가득 실은 80t짜리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폭풍을 만나 물건을 다 버린 뒤 부산으로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친일문제연구 제5집, '조선총독 10인' 참조)


대한민국 수립 후 청와대 주인들의 뒷얘기는 다들 알고 있는 일이니 새삼 거론하여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객사했고 윤보선은 어쩐 일인지 국립 현충원에 묻히기를 거부하는 예외를 치렀지만 사실 그는 실권자가 아니었으니 집 주인이라기보다 세입자라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정리한 일본인 총독들의 말로와 비교해 보면, 누구라도 이거 뭐가 잘못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 본관은 사이토 총독이 터를 잡은 그곳이 아니다. 지금은 흔히 구본관이라 불리는 곳으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본관은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과연 청와대 터는 문제가 많은가? 결론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구본관은 북악산 정맥(正脈)에서는 약간 벗어난 곳으로 북악의 기를 본격적으로 받을 자리가 아니었다. 사실 북악의 기는 대단한 강기(强氣)다. 웬만한 사람이 견딜 자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정맥에서 벗어났으니 잘된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풍수의 정혈법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치명적인 혈(穴)일수록 정확하게 찾아 침을 꽂아야지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오히려 크게 해를 입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청와대는 여러가지 시설물들을 정리하거나 이전하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그 근본 취지는 "자연친화적이고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청와대로"라는 것이 될 듯 싶은데, 정말 잘 된 일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청와대 근처에서 다녔기 때문에 누구보다 기억이 선명하거니와 청와대 쪽으로는 솔직히 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너무나 권위주의적인 터잡기와 공간 배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북악 정상에 있던 군 시설물은 정리되었고 청와대 서쪽에 있는 칠궁은 내년 5월이면 일반에 공개되기 위하여 공사가 진행중이다.

칠궁은 영조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처음에는 육상묘라 부르다가 후에 격을 올려 육상궁 또는 육궁으로 변했고 나중에 왕비는 아니지만 왕이나 왕자를 낳은 후궁의 신위를 모시면서 칠궁이 된 곳이다.

서울 살면서도 칠궁이란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여하튼 칠궁이 개방되면 사람들이 몰려들 테고 이것은 청와대 터의 강기를 눌러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엉뚱한 얘기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혼을 눈앞에 둔 어떤 부부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파경을 막아보려 했다. 상담전문가도 만나보고 정신과 전문의도 만나보고 친구나 친지의 조언도 들어봤지만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였다.

그 때 한 풍수사가 이 부부의 침실을 보고 "침대를 저렇게 놓았으니 잉꼬라도 헤어질 수밖에 없겠다"고 충고했고 그 부부는 침대를 옮긴 후 금실이 좋아졌다는 홍콩 풍수의 한 얘기다.

이것은 풍수가 환경심리학적으로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제 예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무척 어렵다. 이제 나는 청와대 터의 나쁜 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풍수적으로 밝힘으로써 국민들에게 풍수의 환경심리적 효과를 내보고자 또 다시 청와대 터 얘기를 꺼낸 것이다.

풍수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받아들인다.

땅은 그저 무대일 뿐이다.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각본일 터이고 그 위에서 일을 꾸려 나가는 사람은 배우이다. 무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무대가 좋은 것이라고 해서 엉터리 배우들이 비윤리적 각본을 가지고 공연을 한들 좋은 연극이 될 까닭이 없다.

반대로 훌륭한 배우들이 인간적인 각본을 가지고 연기를 한다면 비록 무대의 품격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을 연극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나라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닌 모양이다.

은행이나 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나 후배들 얘기를 듣다보면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문화평론가 고길섶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대로 우리는 지금 "오른 손에 핸드폰, 왼 손에 깡통"을 든 형국이다.

대통령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나라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일 것이다.

대통령이 일하며 살고 있는 청와대는 이제 국민의 정부라는 표방 그대로 일반에게 다가서 있으며 그 터가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던 풍수적 결함은 본관의 이전, 권위주의적 시설의 철폐와 정리, 과감한 개방, 특히 대통령 개인의 강인한 인기(人氣)와 인동초(忍冬草) 같은 삶의 역정이 쌓아올린 역동성으로 극복될 것이다.

본래 청와대 자리는 논을 비롯하여 습기가 많은 땅이었다. 좀 잡술의 냄새가 풍기는 얘기지만 수생목(水生木)이라 본관 건물은 나무로 지었다면 좋았을텐데 시멘트로 지어져 있다.

하지만 시멘트를 금으로 친다면 금생수(金生水)가 되니, 이것은 결국 나무로 지으면 사람이 땅의 덕을 보지만 철근 시멘트 건물은 반대로 사람이 땅을 조절하는 형세가 된다.

청와대의 주인 대통령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모두들 희망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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