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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세계사

WW2 - 총통의 소방수 - 발터 모델

august 의 軍史世界
 

1. 충성심 그리고 능력

제2차대전에서 비록 패했지만 전술작전 측면에서만 볼 때 독일은 전사에 길이 빛날 승리를 많이 거두었습니다. 

전력이 상대보다 앞서기 때문에 승리를 얻었다면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이고 훌륭한 전과로 치부될 수도 없지만 독일군의 전과가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상대보다 전력이 열세인 경우에도 불구하고 거둔 승리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전쟁 초기의 전과가 워낙 뛰어나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사실 군비만 놓고 볼 때 독일이 연합군을 압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


독일이 공세를 취하였던 1942년 이전의 대 프랑스전선이나 대 소련 전선에서도 독일의 전력이 프랑스-영국 연합군이나 소련군에 비해서 월등히 앞서지는 않았지만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수세로 몰려 후퇴를 하는 와중에도 때때로 역습을 가하여 상대를 황당하게 만들만큼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경우가 많았습니다.

 



[ 독일의 쇠퇴기에도 독일군의 전투력은 뛰어났습니다 ]


그 이유로 여러 가지가 거론 되지만 핵심은 독일군의 전투력이 경쟁국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투력의 대부분은 작전을 구사하던 지휘관들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독일은 경쟁국에 비해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참모조직도 훌륭하였습니다.

 



[ 독일의 지휘체계, 특히 참모조직은 역사도 깊었고 능력도 훌륭했습니다.
(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의 독일제국군 최고 지휘부 ) ]


제2차대전은 각개병사의 능력보다는 보유한 장비와 부대의 훈련량 그리고 작전구사 능력에 의해서 승패가 결정되는 전쟁이었습니다. 

때문에 전력의 상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동서양면전을 치루며 장기간 전쟁을 벌 일수 있었던 이유를 독일군이 보유하였던 지휘관들의 능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패전국임에도 독일의 명장들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 롬멜 ) ]


이전의 에피소드에서 소개한 만슈타인, 구데리안 외에도 제2차대전 당시 독일군은 전사에 길이 남을만한 명장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명장들은 군 지휘에 관한 소신이 한편으로는 너무 강고하여 종종 히틀러와 의견 충돌을 가져오고는 하였는데 이런 사유로 전쟁말기에 가서는 정치권력의 힘에 의해 타의로 군복을 벗게 되거나 숙청이 된 경우가 흔하였습니다.

 



[ 개인적으로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는 만슈타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 전쟁 후 회고록을 출판하였을 당시의 1956년 모습 ) ]


히틀러는 역사에 등장한 여러 종류의 폭군처럼 그 주변에 모여 사탕발림으로 아첨하는 무리들에게는 관대하였지만 진정한 고언에는 귀를 막아놓았습니다. 

때문에 충심으로 군의 입장에서 작전을 펼치려던 수많은 유능한 지휘관들을 자기 손으로 내치는 우를 범하였고 결국 이것은 연합군 승리의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 전쟁 중반이후 히틀러의 지나친 간섭으로 수많은 명장들이 군복을 벗습니다 ]


전쟁 말기 히틀러는 더욱 이러한 편집증이 극에 달하여 거의 독단적으로 작전을 펼쳐 스스로의 운명을 재촉하고는 하였습니다. 

여기에 편승하여 제3제국 말기에는 괴링, 카이텔, 요들 같은 정치 지향적 군인들만이 히틀러 주위에 많이 포진하여 오로지 예스맨의 역할만 하여와 작전을 그르치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 결국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 히틀러 주위에 남게 되었습니다 ]


이러한 지휘관들의 대부분은 그 만큼 총통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였는데, 이러한 충성심이 히틀러 개인에 대한 연모의 정인지 아니면 개인의 일신영달을 위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훌륭한 지휘관들 대신 많은 정치군인들이 제3제국의 최후까지 군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 충성심도 대단하였지만 능력도 뛰어났던 모델 ]


그런데 이러한 지휘관 중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만 놓고 평가하다면 늘 선두권을 다투었지만 작전 지휘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특이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종전시까지 직위에서 해임되지 않은 극소수의 야전 지휘관들 중 한명으로 이른바 총통의 소방수 ( Hitler's fireman ) 라 불렸던 모델 ( Otto Moritz Walther Model 1891~1945 ) 원수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2. 조약에서 살아남은 자


발터 모델은 1891년 1월 24일 독일 Saxony-Anhalt 의 Genthin 라는 소도시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군인을 동경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군인의 길을 꿈꾸던 그는 18살이 되던 해 사병으로 자원입대를 하였는데, 사병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여 장교후보로 발탁되었고 이듬해 중위로 임명됨으로써 본격적인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는 동원 자원들의 모습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서부전선에서 복무를 하였는데 1915년 철십자 훈장 1급 기장 Iron Cross 1st Class 을 수여 받았던 것으로 보아 훌륭한 전공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그는 중대장이던 1917년 심각한 부상을 입는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을 만큼 최전선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 모델은 지옥의 서부전선을 경험하였습니다 ]


종전 후 패전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 군비보유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병력은 총수에서 10만 명 이하여야 하고 장교는 4,000 명으로 제한하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직업군인들이 타의에 의해 군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제한은 오히려 이후 독일군이 정예화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종전 직후 연합군 감시단의 사찰을 받는 독일군의 모습.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행운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군무를 박탈당합니다 ]


상대적으로 참전 경험도 풍부하고 자질이 뛰어난 장교들과 하사관들만이 선별되어 군에 남게 되는데 이들은 히틀러가 집권하여 독일의 재군비를 추진 할 무렵 부대의 핵심 기간요원들이 되면서 급격히 팽창한 독일군의 중추를 담당하는 역할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모델도 이때 살아남은 군인으로 제1차 대전 후에도 군대에 남아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그 실력을 닦아왔습니다.


[ 나찌가 재군비를 선언하자 독일군은 급팽창하기 시작합니다 ]


그는 1934년 제2연대장을 거치는 등 야전부대의 지휘관으로써의 경험도 쌓았지만 제8관구 참모장을 거쳐 1938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4군단 참모장을 담당하여 주로 브레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세심한 성격에 잘 어울리는 보직이기는 하였지만 이후 지휘관이 되었을 때 세세한 작전까지 관여하여 그를 보좌한 참모들로부터는 오히려 평판이 좋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마치 독일군의 표본 같은 냉정한 모습의 모델 ]


* 프로이센 군대의 전통을 많이 승계한 독일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참모제도가 잘 발달되어 지휘부의 의사결정과 실행에 있어 기민함을 보인 뛰어난 군대였지만, 참모 생활을 오래 한사람이 지휘관이 되었을 경우는 부대 지휘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간섭하려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1차 대전 말기의 루덴돌프가 대표적이었고 모델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 독일 참모의 전형으로 전쟁 말기에 실질적인 최고 통수권자까지 올랐던 루덴돌프 ]


그는 제1차대전의 참전 경험도 있었고 베르사유 체제의 굴욕도 몸소 겪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의 자긍심을 고양하여 정권을 잡은 히틀러에게 열렬한 성원을 보내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나찌당에 가입하였는지의 정확한 여부가 불분명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강고하였다는 데에는 대부분 일치하고 있습니다.


[ 히틀러와 면담하는 모델 ]


또한 이러한 충성도는 마지막까지 그가 독일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동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엉뚱한 작전을 실행하거나 권력 주변부에 남아 사탕발림이나 하면서 시간이나 보내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하들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작전을 주로 펼쳐 참모진들의 불만과는 달리 부대원들로부터 평판은 좋았다고 전해집니다.




3. 참모에서 지휘관으로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전으로 제2차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모델은 제4군단 참모장으로 참전을 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폴란드 남부지역에서 작전을 펼칠 제4군단의 세부 작전계획 수립에 탁월한 업적을 보이게 되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곧바로 서부전선의 주력 야전군인 제16군 참모장으로 영전을 하게 됩니다.




[ 모델은 제4군단 참모장으로 제2차 대전을 시작하여 쉬지 않고 종전 시까지 야전에서 활동한 몇 안되는 독일 장성이었습니다 ]


독일 제16군은 1940년 대 프랑스전선이 발발하자 독일 침공군의 주역인 폰 룬드슈테트 ( 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1953 ) 가 지휘하던 A 집단군 예하부대로 편제되었는데, A 집단군의 선봉인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 Panzer Group Kleist ) 이 전선을 돌파하면 후속하여 즉시 전선을 인계받은 후 돌파구를 계속 확대하는 주요임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 제16군은 돌파구를 확대하는 중요 임무를 훌륭히 달성하였습니다 ]


제16군은 1940년 5월 룩셈부르크와 남부 벨기에를 거쳐 세당을 돌파하고 마지노선 북부를 차단함으로써 프랑스군을 양단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고 이러한 전과를 세밀하게 수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델은 1940년 9월 제3전차단장으로 영전함으로써 당대 독일 최고의 사단 급 부대를 지휘하는 경험을 얻게 되었습니다.


[ 서부전선 돌파의 분수령이 되었던 독일군의 뫼즈강 도하 ]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이 개시되자 모델의 제3전차사단은 맹장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 예하부대에 소속하여 모스크바진격의 선봉으로 맹활약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전과로 1941년 말 모델은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41장갑군단장으로 승진하여 부임하는데 지지부진한 모스크바에 대한 공략을 하루빨리 마무리 지으라는 중책이 신임 군단장에게 부여됩니다.


[ 방어진지 구축에 동원된 모스크바 시민들 ]


그러나 그가 제41장갑군단장으로 부임한 1941년 말은 최악의 혹한이 러시아 평원을 감싸기 시작하여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추위와 더불어 모스크바를 사수하려는 소련의 강력한 저항은 독일의 공세를 둔화시켰는데 모델은 이러한 상황 하에서 모스크바 서쪽 20 Km 까지 진격하는 괴력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도 영하 40도가 계속되는 12월이 되자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웠습니다.


[ 겨울이 되자 더 이상 독일의 진격은 어려웠습니다 ]


하지만 지휘관으로써 모델의 능력은 다음해가 되자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참모나 단위부대장으로 참전하여 공세작전을 펼칠 때는 모델뿐만 아니라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독일 지휘관들이 앞을 다투어 놀라운 전공을 세워왔지만 역설적으로 소련이 공세로 전환을 하자 모델의 독특한 능력이 본연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 동장군의 엄호를 받고 소련군의 반격이 개시됩니다 ]


그의 방어전은 압도적인 적의 공세를 지형지물 등을 이용하여 단지 지연시키거나 수성하는 것 같은 전통적인 개념의 방어 작전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하여 들어오는 적의 틈새를 노려 밀어붙여 괴멸시키는 공세적 방어의 형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델의 독특한 지휘 능력은 이후 독일의 여러 지휘관 중 그를 총통의 소방수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하였을 만큼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 독일의 진격이 둔화 되자 모델의 능력은 서서히 드러납니다 ] 


이것은 호트, 만토이펠, 롬멜같은 저돌적인 지휘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 이들이 공세시기에 알맞은 공격형 지휘관이라면 모델은 독일이 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방어형 지휘관이었습니다. 

그것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지 현지고수나 지연이 아닌 공세적 방어라는 파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41년 12월, 모델의 명성을 드높이게 되는 기념비적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4. 독일의 失期와 소련의 반격
 

바바로사 작전 초기, 신나는 진격만 계속하던 독일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몇 번의 실기를 하게 됩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그랬다는 것이지 그 선택의 결과가 이후 전쟁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전의 여러 에피소드에서도 몇 번 언급하였지만 독일은 진격도중 스몰렌스크 Smolensk, 민스크 Minsk , 키에프 Kiev 등지에서 대 포위섬멸전을 독일은 실시하여 무려 200만 이상의 소련군을 제거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 독소전 최초 3개월은 일방적인 독일의 승리였습니다 ]


그런데 이런 승리는 애초 소련 침공이전 준비한데로 진격을 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엄명에 전략적 후퇴를 하지 못하여 독일군 점령지역내 고립되어 이미 전의를 크게 상실한 소련군 패잔병을 소탕한 것에 불과합니다. 

히틀러는 물밖에 튀어나와 서서히 죽어가던 고기를 잡고자 너무 서둘렀고 임기응변으로 주력을 우회시키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 이미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을 소탕하는데 독일은 몰입합니다 ]


배후에 적을 남겨두고 전진한다는 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특히 키에프 공략을 위해 독일의 중부집단군 주력이 우회진격 하였던 것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었다라는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사가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우회공략으로 애초 목표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같은 전략적 목표물을 점령하는데 시간을 지연시키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 입속에 반쯤 들어온 키에프를 완전히 소화시키고자 독일은 주력을 우회시킵니다 ]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도 그러하였지만 쓰나미같은 진격이 한번 멈추고 전선이 고착화 되면 이를 차후에 돌파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계절은 상대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한 동절기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겨울에 러시아 평원을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라는 역사의 교훈을 잠시 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독일의 진격이 둔화된 틈을 타서 소련의 방어선이 강화됩니다 ]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을 고립시킨 후 즉시 포위 섬멸전을 실시하지 않고 일단 전선을 분리하여 전선을 서쪽으로 계속 몰아붙여 고립지역과 전선의 간격을 넓힘으로써 스스로 말라죽게 만들었던 예에서 보듯이 ( 관련글 참조 ) 독소전 초기 독일도 고립 되어 어차피 천천히 소탕해도 되는 적을 굳이 서둘러 섬멸하기 위해 주력의 방향을 틀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 것은 결국 독소전 초기 독일의 자충수였습니다.


[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독일 제6군 ]


결국 혹한이 다가오고 모스크바 바로 앞에서 진격이 멈추자 정신없이 몰리기만 하였던 소련은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1941년 12월 6일 소련군은 모스크바를 압박하는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취합니다.  이른바 제1차 르제프 전투 ( The 1st Rzhev Battles )가 개시 된 것이었고 소련은 모스크바 전방에 포진한 독일 제9군을 대 포위 섬멸하기 위해 르제프, 시쵸프카 Sychevka, 브야즈마 Vyazma 를 탈취하기 위한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 소련은 동장군의 엄호 하에 독소전 최초의 선제 반격에 나섭니다 ]


먼저 그동안 모스크바 북부를 방어하던 코네프 ( Ivan S. Konev 1897~1973 ) 지휘하의 칼리닌집단군과 쿠로츠킨 ( Pavel A. Kurochkin 1900~1989 ) 의 북서집단군 소속의 9개 야전군이 비테브스크 Vitebsk 와 스몰렌스크 북방을 향하여 전진을 개시하고 맹장 주코프가 지휘하는 서부집단군 예하 9개 야전군이 모스크바 남부에서 스몰렌스크와 브리얀스크 Bryansk 를 향하여 대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던 것입니다.


[ 동계전투와 관련하여 소련은 상대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좋았습니다 ]


이러한 대공세는 독소전쟁 개시이후 소련에서 취한 최초의 공세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모스크바를 향해 돌진하던 폰 보크 ( Fedor von Bock 1880~1945 )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최대한 멀리 밀어내고 아울러 레닌그라드를 압박하던 폰 레브 ( Wilhelm Ritter von Leeb 1876~1956 ) 지휘하의 독일 북부집단군과의 연결을 끓어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중 목표는 앞서 언급한대로 르제프에 방어선을 펼치고 있던 스트라우스 ( Adolf Strauss 1879~1973 ) 의 독일 제9군이었습니다.


[ 소련의 맹공에 독일 9군은 고립됩니다 ]


소련의 선봉인 제22군과 제39군이 100Km를 전진하여 비테브스크 근처까지 내려오고 소련 제3공수군이 브야즈마 Vyazma 남부에 공수되자 순식간 독일 제9군은 배후가 절단 되고 완벽하게 포위 될 위험에 처하였습니다. 

비록 회프너 ( Erich Hoepner 1886~1944 ) 의 제4기갑군,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 폰 클루제 ( Gunther Hans von Kluge 1882~1944 ) 의 제4군이 남부에서 진격하여 들어오는 주코프의 서부집단군을 간신히 방어하고 있어 제9군에 대한 통로는 일단 확보하고 있었으나 결코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5. 총통의 명을 받들어


위기를 느낀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폰 보크는 전선을 축소하여 부대를 재편한 후 일단 겨울을 넘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히틀러에게 전략적 후퇴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의견에는 최 일선에서 부대를 지휘하여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스트라우스, 회프너, 구데리안 같은 예하 야전군 사령관들도 대부분 동조하였습니다.


[ 전략적 후퇴를 건의한 중부집단군 사령관 폰 보크 ]


그러나 모스크바를 코앞에 두고 후퇴한다는 사실을 용납 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노발대발하며 이들 지휘관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대답을 합니다. 

히틀러의 주장은 오로지 현지사수였습니다. 히틀러는 가장 위험에 쳐해 있던 제9군 사령관으로 평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모델을 승진시켜 임명하였고 현지로 부임시킵니다.


[ 모델 (左) 이 히틀러의 낙점을 받아 독일 9군 사령관으로 영전합니다 ]


1942년 1월 15일 스트라우스를 대신하여 사령관으로 부임한 모델은 도착하자마자 전선의 상황부터 시찰하였는데 상황이 상당히 나쁘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선봉인 제22, 29, 39군이 배후 100Km 까지 치고 들어왔음에도 그들도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 독일 9군에 대한 완전한 포위망이 완성되지 못하자 깊이 파고들어 온 소련군도 진퇴양난의 형국이 되었습니다 ]


비록 제9군이 반 이상은 포위당하고 현실은 암울해 보였지만 공세를 펼치고 있던 소련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진격 한 달 만에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소련 또한 50년만의 혹한이라는 1941년 겨울날씨가 커다란 장애물이었는데, 혹한으로 인하여 르제프를 외곽에서 포위하기 위해 멀리 진군하였던 소련군의 보급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 소련군도 혹한으로 인하여 보급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


히틀러의 옹고집으로 독일 제9군이 어쩔 수 없이 현지를 사수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되었지만 혹한의 기온은 동시에 소련 제22, 29, 39군 뿐만 아니라 르제프 남부에서 진격하던 소련 제5, 20, 33군의 선봉부대들도 더 이상 전진을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한 모델은 히틀러에게 현지를 사수 하겠다고 보고합니다.


[ 모델은 현지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총통에게 보입니다 ]


모델로부터 보고를 접한 히틀러는 대단히 흡족하여 제9군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고 배후의 통로를 확보한 제4군과 제4기갑군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악몽 같은 겨울이 서서히 끝나가기 시작하자 소련의 공격이 재개되었는데 이때는 제9군도 돌파를 허용하지 못할 만큼 참호를 깊이 파두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 겨울이 끝나가자 소련의 공격이 재개되었지만 진격이 어려웠습니다 ]


1942년 4월까지 장장 100여 일간 계속된 소련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제9군은 끄떡없이 현지를 사수하였고 이제 급해진 것은 소련군이 되었습니다. 

독일 제9군을 완전히 포위하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이를 무시하고 앞으로 더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르제프 남부에서는 제4기갑군과 제4군의 반격으로 소련은 점점 밀려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 르제프를 공격하였던 소련군은 일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


7월 2일 드디어 제9군은 참호를 박차고 나와 지난 6개월 내내 르제프를 압박하던 소련 칼리닌집단군의 제22, 29, 39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 Operation Seydlitz )

그와 더불어 반대편에 있던 제3기갑군이 협공을 가하였고 7월 12일이 되자 르제프를 포위하기 위해 남하하였던 소련군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6. 공세적 방어


모델이 지휘하여 르제프에서 이룬 놀라운 승리는 잠정적 패배를 공세적인 방어로 반전시켜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만큼 대단한 전과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패배가 확실해 보였고 이런 암울한 예상에 구데리안, 폰 보크, 회프너 같은 명장들이 동조하여 히틀러에게 후퇴를 건의하였을 정도였는데 이를 승리로 이끈 모델의 지휘력은 그만큼 훌륭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작전을 숙의하는 모델 (左) ]


august는 이 전투를 스탈린그라드전투와 비교하고 싶은데 비록 제9군이 완벽한 포위를 당하지 않아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되었던 제6군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곤란하지만 상황은 상당히 유사하였습니다. 

우선 르제프를 중심으로 소련에게 반 포위된 독일군은 제9군 외에 제4군, 제4기갑군 일부를 포함하여 약 25만에 달하였는데 이는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되었던 독일군 33만과 맞먹는 규모였습니다.


[ 르제프전투는 스탈린그라드전투와 맞먹는 엄청난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


소련은 르제프 공략을 위해 3개 집단군 예하 18개 야전군의 약 150만 명을 동원하였는데 이 또한 스탈린그라드의 Operation Uranus 때 소련이 동원한 25개 야전군으로 구성 된 4개 집단군의 200여만 병력과 비슷하였습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길이길이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반하여 제1차 르제프공방전은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독일에서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그런데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잊혀진 전투로 기록됩니다 ]


그 이유는 첫째, 독일 측 입장에서 볼 때 제1차 르제프 공방전과 비교 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수많은 승리를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르제프전투는 적극적 방어를 통한 소극적 승리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소련군을 괴멸시켰지만 전선을 1941년 겨울이 오기 전의 모스크바 공세수준 직전까지 돌려놓지는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르제프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전선은 고착화되었습니다 ]


당시까지만 해도 독-소전 중 소련에게 대패를 당할 뻔 한 상황에 놓였었다는 자체가 독일 위정자들이나 군부지도자에게는 치욕스런 일이었고 당연히 독일의 패배나 후퇴라는 것이 용인되거나 있을 수도 또한 있어서도 안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놀라운 방어전이 의외로 빛을 발하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놀라운 승리만 경험하였던 독일에게 피 말리는 방어전 자체가 치욕이었습니다
( 독소전 초기 독일에게 생포된 소련군 포로 ) ]


소련의 경우는 더한데 그 이유는 압도적 병력으로 공세를 펼쳤으면서도 엄청난 패배를 하였다는 사실자체가 치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련은 고의로 내용을 감추고자 하였는데 이 전투에 대한 사료가 상당히 부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일부로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알았지만 소련연방의 해체 후 밝혀진 자료에도 그 내용이 명백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 치욕스런 결과를 소련은 애써 은폐하였습니다 ]


소련은 이 전투로 약 65만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추정되는데 반하여, 방어자였던 독일은 30만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전투 결과는 6개월 후 스탈린그라드에서 반면교사가 되었는데 독일은 자만을 하여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아 자멸의 길로 빠져들었고, 소련은 철저한 준비를 통하여 회심의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 총통의 소방수라는 찬사를 얻은 모델 ( 손을 들고 있는 이 ) ]


모델은 이 전투결과 방어전의 대가, 총통의 소방수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음과 동시에 대장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그 승진속도가 독일군내에서 최고로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의 후퇴를 용인한 1943년까지 제9군사령관으로 이 지역을 훌륭히 방어하여 냈고 그 공로로 오크 잎 기사십자 ( Swords to the Oak Leaves of the Knight's Cross )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7. 모델의 시련


그런데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모델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1943년 3월 남부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소련군의 방심을 틈타 회심의 일격을 가하여 하르코프 Kharkov에 집결한 뽀뽀프 ( Markian Mikhailovich Popov 1902~1969)의 전차군을 포함한 무려 20여개 사단으로 구성 되어진 4개 야전군을 붕괴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올립니다. ( 관련글 참조 )


[ 하르코프 전투로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의 치욕을 순식간 복수합니다 ]


흔히 제3차 하르코프전투 The 3rd Battle of Kharkov 로 알려진 이 전투의 승리로 독일은 하르코프와 벨고르드 Belgorod 를 재점령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쿠르스크 Kursk 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돌출부가 전선에 형성됩니다. 

만일 이 돌출부를 양단하여 독일이 재점령하면 전선을 200 Km 이상 축소시킴과 동시에 독일의 전력을 회복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됩니다 ]


히틀러는 이곳을 점령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는데 바로 성채작전 Operation Citadel 입니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OKH 주도로 기안한 이 작전은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협공으로 쿠르스크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주공은 남부집단군의 제4기갑군과 중부집단군의 제9군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작전은 기안단계부터 OKH 외에도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참여로 작성되었습니다.


[ 또 한 번 러시아평원에서 대 결투가 예고되었습니다 ]


이 때 많은 갑론을박이 오고갔는데 가장 논쟁이 심했던 부분은 공세시기였습니다. 

만슈타인을 비롯하여 즉시 선공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소련의 방어태세가 완비되기 전에 공세를 펴는 것이 작전의 성공확률이 높다고 주장하였던 반면, 확실한 공세준비를 완료한 후 ( 특히 5호 전차 같은 신형전차의 배치가 이루어진 이후 ) 공세를 취하자는 의견도 주장되어 팽팽히 대립되었습니다.


[ 만슈타인 (左) 을 비롯한 일부는 즉시 공격을 주장하였습니다 ]


이 때 공세시기를 연기하자고 주장하였던 대표주자가 모델이었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모델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 기간 동안 첩보에 의해 독일의 작전을 간파한 소련이 방어선을 공고히 한 후 오히려 선공을 하였습니다. 

이 바람에 독일은 막상 작전이 개시되자 돌파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전술적으로 독일이 우세를 보였음에도 스스로 공세를 포기하여 전투가 종결되었습니다.


[ 모델은 공세시기를 연기하자는 측의 대표주자였습니다.
( 제작 막바지 단계에 있던 5호전차를 투입하는 것도 공세연기의 이유였습니다. 
Panther는 쿠르스크전투에서 데뷔하게 되는데 독일의 기대가 컸습니다 ) ]


비록 모델이 지휘하던 제9군은 쿠르스크전투에서 포니리 Ponyri 까지 진격하여 로코소프스키 ( Konstantin Konstantinovich Rokossovskii 1896~1968 ) 가 지휘하는 소련 중부집단군을 양단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선전을 하였음에도 전사에 소련 측 승리로 나와 있는 것처럼 전투는 독일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이런 결과에 대해서 독일군 내부에서 비판이 오고갔는데 결국 작전 개시시점을 잘못 판단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대부분의 비난이 모델에게 쏟아졌습니다.


[ 모델의 제9군은 포니리까지 진격하였으나 공세는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모델을 히틀러는 오히려 더욱 중용하였습니다. 

1944년 3월 만슈타인이 남부집단군을 전략적으로 후퇴시키자 이에 격노한 히틀러는 명장 만슈타인의 군복을 벗겨 버리고 그 후임으로 모델을 원수로 진급시켜 영전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은 롬멜 다음의 독일군 최연소 원수기록인데 그만큼 엄청난 고속승진이었습니다.


[ 모델 (左) 에 대한 총통의 신뢰는 깊었고 계속 중용됩니다 ]


사실 이런 이면에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 정도 작용하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델이 실력에 비해 출세운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1944년 6월 중부집단군이 와해 직전에 몰리자 방어전에 재능을 보였던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까지 겸직을 함으로써 북부집단군지역을 제외한 동부전선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8. 동부전선의 방패


1944년 6월 이후는 사실 독일의 패배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독일이 공세로 나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더욱이 미국과 영국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서부전선에 제2전선을 구축하여 놓았기 때문에 독일은 동부전선의 방어선을 더욱 축소시켜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 미국과 영국은 西유럽에 제2전선을 구축합니다 ]


결국 상대적으로 멀리 있는 남부집단군을 축소하여 전선을 단축시켰는데 이것은 반면 독일 본토와 가까운 북부집단군의 중요성이 대두됨을 의미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그가 신임하는 모델을 본토 방어의 핵심인 북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하였고 이 때 모델은 방패와 칼 작전 Operation Shield and Sword 으로 명명한 방어계획을 히틀러에게 제안하여 승인을 받습니다.


[ 모델은 후퇴작전을 입안하여 히틀러에게 승인을 받습니다 ]


이 작전은 비록 후퇴는 하되 적의 허점이 보이면 반격을 하여 적을 압박하고 그 만큼 후퇴시기를 조절하여 독일의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핵심은 후퇴였는데 그 동안 히틀러가 수 많은 지휘관들을 해임하였던 첫 번째 사유가 후퇴였을 만큼 히스테리 한 반응을 보였던 이전에 비한다면 히틀러도 이제는 전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거나 아니면 모델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후퇴에 대해 히스테리 한 반응을 보였던 히틀러도 모델의 제안은 수용합니다 ]


결론적으로 모델이 지휘한 동부전선의 방어 전략은 상당히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1944년을 기점으로 이미 소련과 독일의 전력비는 거의 5 : 1 수준까지 벌어졌고 그 격차는 계속 확대되고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소련은 계속적인 보충으로 소모량을 능가하는 부대편제를 유지하였지만 독일은 부대가 소모되면 더 이상 보충할 자원이 없었습니다.


[ 소련의 물량공세를 독일이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


독일의 부대와 장비는 서류상에서나 존재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는 소련의 진격을 거의 1년 가까이나 붙잡아 두었다는 것은 모델의 방어 전략이 상당히 훌륭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 입니다. 

다음은 모델이 방어전의 귀재라는 사실이 나타난 예 중 하나입니다.


[ 모델의 방어 전략은 상당히 훌륭하여 소련의 진격을 둔화시켰습니다 ]


44년 8월 1일까지 소련군이 동프로이센 24km 지점까지 육박했고 독일 영토가 소련의 눈앞에 가시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선봉에 서서 베를린을 향해 맹공을 가하던 부대가 라드지프스키 ( Aleksei Ivanovich Radzievskii 1911~1979 ) 의 소련 제2전차군 이었는데 공명심에 사로잡혀 후속부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진군을 하다 곧 연료가 바닥나게 되었습니다.


[ 후퇴 중에도 반격을 가하여 소련 제2전차군을 우주로 날려 보내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 파괴된 T-34를 점검하는 독일군 ) ]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퇴의 와중에 있던 모델은 반격을 감행하여 제2전차군을 괴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물러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뒷심을 발휘합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모델을 " 동부전선의 수호자 " 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곧바로 클루제원수를 대신하여 모델을 B집단군사령관 겸 서부전선총사령관에 임명을 합니다.


[ 모델이 서부전선 방어의 총책으로 부임합니다 ( 돌격하는 미군 ) ]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지휘관을 서부전선으로 보낸 이유는 히틀러가 동부전선보다 서부전선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히틀러의 의견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1944년 8월 기준으로 본다면 독일은 동부건 서부건 모두 수세에 있었습니다. 동부전선도 모델이 일단 급한 불을 끄기는 하였지만 소련군이 독일 영토 바로직전까지 진격해 왔고 상황이 기적적으로 반전 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9.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


1944년 8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연합군의 진격으로 독일은 프랑스에서 퇴각하여야 할 지경까지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동부전선도 소련군이 독일 코앞까지 왔지만 프랑스에서 물러난다면 그 다음은 바로 독일이었습니다. 

어느 한쪽도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던 상황이었는데 모델을 "동부전선의 수호자" 라고 칭송하면서도 굳이 서부전선으로 보내 방어전을 펼치라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연합군이 독일근처까지 접근해 왔을 정도로 서부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


august 개인적으로는 아마 이 시점에서 히틀러가 정치적인 고려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전 후 히틀러의 부관이었던 귄셰 ( Otto Gunsche 1917~2003 ) 와 집사였던 링 ( Heinz Linge 1913~1980 ) 의 진술을 바탕으로 하여 사학자 에베르 von Henrik Eberle 와 마티아스 Matthias Uhl 가 공저하여 출간한 Das Buch Hitler 에 따르면 이점을 유추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저의 해석이지 정답은 아닙니다.

 



[ Das Buch Hitler 표지 ]


이미 독일과 소련의 동부전선은 전쟁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둔 살육전이었습니다. 때문에 제네바협약 같은 허울 좋은 문구는 없었고 오로지 상대에 대한 증오심만 남아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곧 패배는 대량학살과 같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었고 더구나 승리가 확실해 보이는 1944년 후반기에 소련이 공세를 멈추고 독일과 휴전이나 정전을 할 가능성도 전혀 없었습니다.

 



[ 승리를 목전에 둔 소련이 강화에 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


이에 비한다면 서부전선은 정치적인 타협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독일 측에서 생각 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동부전선에 비해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 범죄 행위가 상대적으로 적어 군사작전 외 보복가능성도 적었습니다. 

때문에 바다를 건너온 미국이나 영국이 자국이 아닌 유럽대륙에서 전쟁을 벌일 때 의외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여 전투를 멈출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 반면 서부전선은 정전의 가능성도 엿보였습니다 ]


그렇다면 노르망디 상륙 후 별다른 저항 없이 진격을 하던 연합군을 최대한 막아내어 제1차 대전 당시의 참호전과 같은 상태로 서부전선을 고착화한다면 연합군도 독일의 완전한 점령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이때 프랑스를 비롯하여 독일의 서유럽 점령지역을 연합국 측에 양보하면 서부전선에서 휴전을 가져 올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 이역만리에서 참전한 미군의 전투의지를 독일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


그리고 서부전선의 주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린다면 소련의 공세도 방어해 낼 수 있을 것이고 최악의 상태로 가정되는 소련의 보복을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마치 제1차대전말 소련과 휴전을 하여 동부전선을 정리한 후 서부전선으로 전력을 투입하였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모델은 서부전선에서도 방패가 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8월 중순 현지에 부임합니다.

 



[ 1944년 말 전선 상황이 1940년과 비슷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히틀러가 방어전의 대가인 모델을 서부전선으로 보내놓고 황당한 일을 벌입니다. 

1944년 말을 기준으로 서부전선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연히도 1940년과 상당히 비슷하였습니다. 서부전선의 북부는 영국이, 남부는 미국이 주로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틈새를 노려 연합군을 양단시키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히틀러는 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히틀러는 1940년의 재방송을 원하였습니다 ]


그는 1940년 그의 부대가 아르덴을 돌파하였던 제3제국 영광의 역사를 재현하여 보고자 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다시 한 번 아르덴을 기습 돌파하여 서부전선 연합군의 주력을 절단시켜 분쇄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이 그나마 보유한 최후의 예비와 전략물자 그리고 부대들을 이 계획에 동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중에는 동부전선에서 고군분투하던 몇몇 핵심 부대들의 이동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0. 최후의 명령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적극적 방어를 통한 전선안정이 주특기였던 모델은 히틀러의 이러한 생각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독일에게는 전쟁초기와 같은 공군세력이 없었고 가용 할 수 있던 장비와 병력도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5배나 많은 적들을 훌륭히 막아내고 있던 동부전선의 병력을 돌린다는 것도 말도 되지 않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히틀러의 망상으로 독일 최후 예비들이 무모한 작전에 동원됩니다 ]


하지만 모델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히틀러의 망상과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공세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고 방어전의 명장인 모델에게 공격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였습니다. 

사실 히틀러가 공세를 계획하였다면 모델보다 오히려 공격전에 능한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같은 다른 지휘관을 기용하여야 했습니다.


[ 공격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모델보다 다른 인물을 기용하는 것이 타당하였습니다.
( 공격전의 맹장인 롬멜은 1944년 10월 강요에 의해 자결하였습니다. ) ]


하지만 이때 들어 히틀러는 눈도 귀도 머리도 모두 닫아놓은 상태여서 오로지 자신에 대한 충성심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을 예상하였던 것은 아마도 히틀러 하나밖에 없었을 정도로 무모하였지만 모델은 작전이 계획되고 변경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자 결국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이라 일컫는 벌지전투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이 개시되었고 커다란 돌파구가 형성되었습니다 ]


1944년 12월 개시된 벌지전투는 결국 남아있던 독일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놓고 한 달도 되지 않아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굳이 이 전투의 의의를 찾는다면 연합군의 공세를 6주정도 연기시켰으나 독일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는 말로 정리될 만큼 작전의 구상부터 실행까지 한마디로 터무니없었던 계획이었습니다.


[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독일은 패전하였습니다. ( 벌지전투에서 노획된 쾨히니스 티거 ) ]


이에 따라 히틀러는 국면전환을 위해 해임하였던 폰 룬드슈테트 원수를 모델대신 서부전선총사령관에 재기용하였지만, 패전에도 불구하고 모델에게는 B 집단군사령관직을 계속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만큼 모델에 대한 히틀러의 신뢰는 대단하였고 히틀러에 대한 모델의 충성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 패전에도 불구하고 모델은 계속 중용되었습니다 ]


하지만 이제 독일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부대나 장비는 서류에만 존재하였고 남은 병력도 노인이나 애들뿐이었습니다. 

제3제국 전성기 때 하늘을 지배하던 루프트바페나 막강 기갑부대는 상상에서나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모델은 B 집단군을 이끌며 본토방어에 임하였으나 전쟁은 삼국지에서처럼 장군 혼자 적진을 휘젖고 다니면서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 전쟁 말기 서부전선의 독일군 포로. ( 어떻게 생각한다면 동부전선 포로들보다는 행운아였습니다 ) ]


1945년 4월 모델이 지휘하던 B 집단군은 연합군에게 2중, 3중으로 포위를 당한 상태로 괴멸될 위기에 쳐하였습니다. 

방어전의 귀재라는 모델도 장비도 없고 물자도 없고 쓸 만한 병력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항전은 쓸데없는 희생만 야기 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패잔병 같은 33만의 B 집단군에게 최후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 "


[ 모델의 묘 ]


부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달한 모델은 탈출을 시도하다 연합군에게 체포되기 직전인 1945년 4월 21일 래팅겐의 숲에서 자결을 합니다. 사실 그가 도망갈 곳도 없었습니다. 

독일군 원수는 항복하지 않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전통을 충실히 따라 자신의 입으로 항복을 하지 않고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름 후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합니다.

 

11. 최후까지 군인의 길을 가다


모델이 히틀러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히틀러 또한 마지막까지 그를 신뢰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충직한 나찌 당원이었는지 그리고 많은 전쟁 범죄행위에 가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모델이 괴링, 요들, 카이텔과 같은 정치군인들과 달랐던 점은 권력핵심부에서만 맴돌지 않고 야전에서 시작하여 야전에서 끝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 모델은 전쟁 내내 히틀러의 신뢰를 받았지만 괴링 같은 정치군인은 아니었습니다 ]


만일 종전 후 살아 있었다면 여타 지휘관들처럼 전범 재판을 받아 형을 살거나 아니면 히틀러와의 관계 때문에 사형까지 당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휘하던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정도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지 않아 쓸데없는 사상을 막아내고는 하였습니다. 특히 수세에 몰린 방어전은 많은 피해를 동반하기 마련인데 모델이 이러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 많은 독일의 장성들이 종전 후 전범으로 처벌받았습니다 ]


이런 이유 때문에 모델은 화려한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한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모델의 전투는 복싱으로 따진다면 아웃복싱, 야구일 경우 스몰볼에 해당하는데 이런 경기는 관람자입장에서는 사실 재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며 재미로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는 공격을 통한 최종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열세인 부대를 이끌고 비참한 패배는 지연시켰습니다.


[ 모델은 최종 승리자는 아니었지만 되도록 비참한 패배는 막았습니다 ]


결국은 패배를 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총통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던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작전을 펼칠 때 실기하여 독일에게 회복 할 수 없었던 패배를 불러왔던 것과 비교하면 패배를 당하지 않고 성공적인 지연을 펼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독일 6군 지휘부 ]


그는 또한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죽음으로써 그의 책임을 다하려 하였고 독일군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수많은 독일 장성들이 항복을 하거나 체포되어 전후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자기변호를 하는데 바빴지만 그는 그러한 굴욕을 겪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부하들을 먼저 생각하여 부대를 해산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았습니다.


[ 전후 많은 독일 장성들이 그들의 책임을 변명하기 바빴습니다 ]


그가 비록 총통의 소방수라는 별명처럼 히틀러와 궁합이 잘 맞았는지는 몰라도 만일 히틀러가 아닌 다른 자가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어도 그는 충성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군인은 당연히 국가에 충성을 하여야 하지만 설령 독재자라 하더라도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의무도 있기 때문입니다.


[ 사실 야전의 군인들은 정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조차 사치입니다 ]


모델은 자살을 하였기 때문에 전후에 생존하였던 여러 지휘관들처럼 후세에 알려줄 자선전과 같은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전사나 생존하였던 사람들에 의해 회고된 내용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본인의 의사이상으로 과대평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 모델은 그의 책임을 다한 군인중의 군인입니다 ]


어쩌면 내성적인 성격으로 잘못된 명령임을 알면서도 적극적인 항변을 하지 못하고 돌쇠처럼 상부의 명령을 받아들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 내내 권력핵심부에서 맴돌지 않고 야전에서만 활약했던 예만 보더라도 히틀러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일신의 영달과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모델은 결코 화려하지도 않으면서도 최후까지 묵묵히 자기자리를 지킨 군무를 천직으로 알던 군인중의 군인이었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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