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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삼국시대의 회화

삼국시대의 회화에 관하여

삼국시대는 우리 나라가 국가적인 형태를 갖추고 문화가 안정을 이루었던 시대인 만큼 회화나 조각, 공예, 건축 등 각 방면에 걸쳐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회화 분야에 있어서 선사시대의 그림들과는 달리 채색(彩色)을 써서 표현하는 본격적인 형태의 그림이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의 회화는 단순한 감상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의 그림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무덤의 내부를 장식하거나, 사찰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 또는 그릇이나 장신구에 장식하는 공예화 등이 있었다. 물론 비단에 그려 감상적인 목적으로 그려진 것도 있었을 것이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썩어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재료상의 취약점으로 인하여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벽화나 칠기 조각, 도기(陶器)에 그려진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삼국시대의 여러 나라는 문화가 발전하면서 각각 서로 다른 특색을 드러내게 된다. 거대한 고분 문화를 발전시켰던 고구려는 선명한 색채와 유려한 선을 간직한 고분 벽화로 찬란했던 당시의 문화를 전해주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은

적석총(積石塚)과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주를 이루는데, 넓은 판석을 쌓아 고분을 만든 석실 봉토분에서 벽면에 회칠을 하거나 직접 그림을 그린 벽화가 발견된다. 고구려의 고분 중 현재 벽화가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고분은 70여 기나 된다.

고구려의 벽화 고분은 수도였던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현인 통구(通溝)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북쪽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 고분들은 위치나 규모, 벽화의 내용으로 보아 왕족이나 당시의 지배층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고분은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4세기에서 5세기 초의 전기와 6세기경의 중기, 7세기경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4세기 ~ 5세기 초)의 대표적인 고분은 안악 3호분(安岳3號墳)을 비롯한 덕흥리 고분(德興里古墳), 감신총(龕神塚)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고분은 시신이 놓인 널방 이외에 앞방과 곁방이 있으며, 이들 방을 연결시켜주는 연도(羨道), 말하자면 널길이 있는 구조이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주인공의 초상화와 생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데, 불교적인 영향이 곳곳에 보인다.

중기(6세기 경)의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무용총(舞踊塚)을 비롯하여 각저총(角抵塚), 쌍영총(雙楹塚) 등을 들 수 있으며, 전기에서 볼 수 있었던 곁방이 없어지고 앞방과 널방의 두방무덤이 주종을 이룬다.

벽화의 내용도 주인공의 초상 위주에서 벗어나 풍속화적인 요소가 많고, 불교적인 취향이 짙어졌다. 내용이나 소재에서도 한결 수준이 높아졌고, 고구려적인 성격이 분명해졌다.

후기(7세기 경)의 고분은 강서대묘(江西大墓), 강서중묘(江西中墓)진파리 1호분(眞坡里1號墳), 통구 사신총(通溝四神塚) 등이다.

널방과 널길만을 갖춘 단칸방 형태로 되며, 벽화의 내용은 다양한 인물 풍속화가 없어지고, 네 벽면에〈사신도(四神圖)〉가 주를 이룬다. 이들 〈사신도〉는 필치가 활달하고 생동감이 넘쳐 고구려인의 기개를 한껏 보여주고 있다. 또한 수목(樹木)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져 그림의 수준이 한층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고분 벽화는 당시의 회화 수준만이 아니라 생활상, 사상의 변화, 우주관 등을 총괄하여 고구려 문화의 발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회화는

남아 있는 양이 적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몇몇의 예로 보아 고구려에 못지 않은 훌륭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회화 유적은 공주 송산리 6호분의 벽화,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 그리고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공예품에 그려진 그림이 있다.

백제의 무덤은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분(塼築墳)이 많은데, 6세기 전반경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송산리 6호분은 네 벽에 〈사신도〉가 있으며 남쪽벽 주작 위에는 일상(日像)과 월상(月像)이 그려져 있다.

이 〈사신도〉는 벽돌 위에 대체적인 윤곽을 따라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사신도〉를 그렸는데, 그 그린 수법이 특이하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세부의 모습은 거의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그림은 아니지만 부여의 절터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文塼)은 벽돌에 판형으로 찍어낸 도안적인 형태의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삼산형(三山形)의 토산(土山)과 누각, 고승, 수면 등 산수화의 요소들을 두루 갖춘 것으로, 백제의 회화 수준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

 

신라의 회화 작품은

백제보다도 더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신라의 고분은 대부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자갈과 흙을 산처럼 쌓아 만들기 때문에 벽화를 그릴 만한 벽면이 없다.

그렇지만 가야 지방인 고령의 고아동 고분과, 순흥의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에서 회벽에 그린 벽화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고분 벽화의 형식이 이 지역에까지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회화의 단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를 들 수 있다.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우리말로 "다래", 한자말로는 장니(障泥),영어로는 mudguard 라고 하는 것에 그려진 것이다. "다래"란 말안장 하단에 매달아 말이 달릴 때 흙탕물이 튀는 것을 막아주는 기구다.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 실로 누비고 둘레에 가죽을 대서 만든 아주 고급스러운 재질에 하늘을 나는 듯한 말을 그린 것으로, 왕의 위엄을 과시했을 것이다.

칠기나 공예품에 그려진 문양을 통해서도 회화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조선시대 도화서에 해당하는 궁중의 그림을 담당하는 채전(彩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에 전해오는 솔거에 대한 기록들로 미루어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 계통의 채색화가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예가 없어 정확한 실체를 알 수는 없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회화는 수나라,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4세기에서 5, 6, 7세기로 갈수록 더욱 다양한 갈래에 풍부한 내용, 발달된 표현 양식을 띠고 있어서 삼국의 회화가 통일 신라로 이어져 더욱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대천화랑  http://www.daechonnet.co.kr/home/koreanart/004.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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