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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청계천의 옛 다리들




청계천 본류에는 모전교(毛廛橋), 광통교,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오간수교(五間水橋), 영도교(永渡橋), 하랑교(河浪橋) 등 10여 개의 조선시대 다리가 있었다.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모두 철거됐고 일부 또는 전체가 남아있는 것은 광통교와 수표교뿐이다.


배다리

옛날 한양에는‘배다리’라는 마을이 여러 곳 있었는데, 이런 마을들 앞에는 대개 배다리가 놓여 있었다. '배다리’란, 배를 길게 다리처럼 이어 내를 건널 수 있게 만든 다리로, 이런 다리는 물이 불어날때 일시적으로 놓였다가 철거되는 일이 많았다.

청계천의 배다리 중 유명한 것으로는 지금의 중구 삼각동 근처, 지금의 청계천 4가 쯤의 것이다. 이곳에서는 처음엔 내를 가로질러 배를 엎어 놓고 통행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나무로 적당히 놓아 다리 형태를만들어 놓고는 했다. 나무로 놓은 후에도 계속 그 이름은 '배다리’였다.

근처 사람들은 이곳을 대개 ‘배다릿개’라고 했고, 아울러 근처의 마을 이름까지 ‘배다리’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한자로 ‘주교동(舟橋洞)’이란 지금의 서울 중구의 한 동 이름은 이배다리 때문에 나온것이다.

근처에는 이 다리 외에도 소경이 많이 왕래했던 ‘소경다리’(호경교, 새경다리), 염초청을근처에 두고 있던 ‘염초청다리’ 등이 있었으나, 이 배다리만큼 알려진 다리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내려간, 지금의 청계천5가 근처 오장동에도 배다리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배가 아닌 통나무 같은 것을 적당히 얽어 건너다니던 다리였다. <한국 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


수표교




水標橋 (馬廛橋.마전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8호
서울특별시 중구 장춘동 2가 197-7

한양의 도성 안에서 유명한 다리로는 ‘수표교’와 ‘광교’가 있었다. 서울지방 문화재 18호로 지정돼 있는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2가에 있었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겼다.

이 다리는 세종 2년 (1420년) 현재의 청계천 2가에 놓여졌으며, 1421년(세종3년)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水標가 세워지면서 수표교라 불려온 다리이다. 처음에는 牛馬市廛(우마시전)이 있던 곳이라 하여 馬廛橋(마전교)로 불리었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가 27.5m, 폭 7.5m, 높이가 4m 이다.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은 네모와 육모 기둥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마름모꼴로 교각을 배치하고, 그 위에 길이 4.5m나 되는 장대석을 걸쳐 놓았다. 좌우에는 돌 난간을 설치하고 바닥은 청판석을 4줄로 깔았다.

그리고 다리 밑 교각은 거대한 화강석으로 절묘하게 가설을 하였으며 교각기둥에는 주척 1자로 그 길이는 평균 21.5㎝의 간격으로 눈금을 새겨 놓았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部材는 연꽃봉오리, 연잎 등의 모양의 난간을 양쪽에 12개씩 갖추게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돌 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른 것이다.


영조 36년(1760)에 하천 바닥을 파내고 수표교 돌기둥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자를 새겨 준천(濬川)의 표준을 삼고 또 따로 수표석(水標石)을 세워 장마철에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수시로 적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수표교란 이 수표석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셔 놓았던 영희전(永禧殿)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들이 설날ㆍ한식ㆍ단오ㆍ추석ㆍ동짓날ㆍ섣달 그믐 등 여러 차례 이 교량을 건너 왕래하곤 하였다.

1959년에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하면서 종로구 신영동으로 잠시 이전되었다가 1965년에 현 위치(장충단공원)로 옮겨졌다.

이 다리의 서쪽에 있던 수표석주(手標石柱, 보물 제838호)도 이곳으로 다리와 함께 옮겼으나 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요청에 따라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 뜰 안으로 옮겨져 있다.

오늘날 장충동에 옮겨져 있는 수표교를 보면 매끈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엮어 놓았고, 돌 난간도 아름답게 꾸며 놓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교량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자연재해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던 도성 사람들에게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대피하도록 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한 교량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엔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시작해서 지금의 무교동 사이에 7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리가 이 수표교였다.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여러 다리를 모두 없앴으나, 이 다리만 살려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놓은 데는 그러한 미적(美的) 가치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모양을 가진 점 등에서 매우 귀중한 과학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이 교량과 얽힌 이야기로는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장통방에 있던 여염집에서 문 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으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리고 김두환이 어렸을 때 거지생활한 곳이 바로 수표교 밑이라고 합니다.
청계천 복원공사때 복원되지 않는 것이 좀 아쉽지만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광통교


1953년 광통교 주변의 모습                                                 

수표교와 쌍벽을 이루던 다리엔 ‘너븐다리’라고도 불리던 ‘광교(廣橋)’가 있었다.
‘광교’는 달리 ‘광통교(廣通橋)’라고도 했는데, 이 이름은 ‘큰 광교’와 ‘작은 광교’를 통틀어 일컫던 말이었다.

큰 광교는 종로구 서린동에, 작은 광교는 남대문로 1가에 있었다. 모두 청계천에 놓인 다리임에는 틀림없으나, 큰 광교는 남산 쪽에서 내려오는 지류에 놓인 반면에 작은 광교는 북악과 인왕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지류에 놓여있었다.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대광통교,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광통교, 「수선전도」에서는 대광교(大廣橋) 등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같은 다리를 나타내는 말이며, 일상적으로 대광교 혹은 광교라고 불러왔다.

특히 옛부터 서울에서는 큰 다리로 알려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대보름날에 종루(鐘樓)의 인경 소리를 듣고 열두 다리를 밟으면 한 해 동안 내내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

그래서, 해마다 보름달이 뜨기만하면, 서울사람들이 모두 나와 인경 소리를 들어가면서 밤을 새워 이 다리들을 밟았었다.

태종 10년(1410) 여름에큰 장마가 져서 청계천이 범람했는데, 그 때까지 흙으로 된 다리였던 광교가 무너져 버렸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처음엔 흙으로 적당히 만들어 놓았던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다리는 한이 서린 다리다.

신덕왕후가 낳은 형제들 때문에 왕좌에 오르지 못할 뻔한 태종은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이 죽은 뒤에 광통교를 흙다리에서 돌다리로 개축하면서 신덕왕후의 능을 지키던 신장석 (神將石)을 뽑아다 교각으로 썼다.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고통을 받으라는 뜻이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얘기 해보자면 이 다리에 놓여진 돌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황화방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고 당초 묘에 썼던 돌들을 옮겨 다리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였다.

왕비의 묘에서 잘 다듬어진 돌들을 다리를 건설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조선초기의 정치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에게 넘겨 주려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는 사건인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다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당시 이방원의 강씨에 대한 미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광교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어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즉 닭과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나무를 파는 가게, 갓을 파는 가게,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파는 가게, 부인들의 패물과 가락지등을 파는 가게, 신발을 파는 가게,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 칠 목기와 장롱을 파는 가게, 잔치 때 그릇을 세 놓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솜을 파는 가게, 말총, 가죽, 초, 실, 휴지, 책등 잡화를 파는 가게, 말안장, 등자, 굴레등을 파는 가게, 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항상 광통교 주위에 모여들어 생필품을 팔고 사곤 하였다.

1958년 광통교를 복개한 이후 다리의 돌에 새겨진 문양을 볼 수는 없지만 매우 정교한 구름무늬와 당초(唐草)무늬, 그리고 한가운데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에 관을 쓴 신장상(神將像)을 돋을새김한 돌들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문양의 돌을 복개된 청계천 내부로 들어가면 아직도 그래도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조흥은행 앞에 옛다리를 축소복원한 모형이 있다.



오간수교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로서 오간수문이란 조선초기 도성을 쌓을 때 청계천의 물줄기가 도성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지점에 있었던 다섯개의 수문을 말한다. 조선 개국 초기에 세워진 흥인지문(興仁之門ㆍ동대문) 옆 오간수교는 원래 성벽의 수문(水門)이었다.

수문은 동대문(흥인지문)과 광희문을 잇던 성곽의 하부에 설치돼 있었다. 처음에는 3칸이었으나 5칸으로 증축되었다. 1908년, 동대문 주변 성곽을 헐면서 오간수문도 같이 헐었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이 마저도 이후에 헐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2003년 발굴조사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그 터를 사적 제 461호로 지정하였다.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을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라 불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

이 다리는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마전교와 오간수다리 사이에는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하상을 준설하고 여기에서 나온 흙들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다.



영도교



숭인동 234번지와 상왕십리 748번지 사이 현 동묘(東廟, 숭인동 22번지)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이다.

동대문 옆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서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이 다리의 교통량은 몹시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은 절의 중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전관교)와 함께 이 곳에 돌다리로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규모가 크고 특징이 있었으리라 보인다.

한편 이 다리에 얽힌 전설로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세조 4년, 1458) 그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 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을 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진다. 그 후 정순왕후 송씨는 지금의 청룡사 새절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현 숭인동 17번지)에 들어가서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불도(佛道)에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도교의 돌다리는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에 이 때 없어졌다 한다. 그 뒤 나무다리가 놓여졌으나 가끔 떠내려 갔는지 그 옆에는 ‘띠엄돌’이라고 해서 개천 바닥에 돌을 띠엄띠엄 놓아서 이것을 밟고 건너게 한 때도 있었다.


장통교



중구 장교동(長橋洞) 51과 종로구 관철동(貫鐵洞) 11 사이의 청계천(淸溪川)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다. 이번 청계천에 만든 다리는 이름만 그대로 딴 다리로 세워졌다.

현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인 장통방(長通坊)이 있던 자리라 하여 장통교란 이름이 붙었다. 다리 근처에 긴 창고가 있었다 하여 장창교(長倉橋) 또는 이 다리 근처에 ‘장찻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하여 이 부근에서는 ‘장찻골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원명은 중부 장통방에 있던 다리이므로 장통교, 혹은 줄여서 장교라 하였다.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의 8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내리는 창동천과 회현동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소광통교에서 만나고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하여져 이 다리 앞에서 청계천의 본 물줄기와 합하여 진다. 따라서 장통교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삼각주를 이루어 넓은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며,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인으로서 개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劉大致)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었다.


청계천 옛다리 사진 무더기 발견
1937년 일본의 문화재 기술자 스기야마 노부조가 스즈카케출판부의 월간지 <사적과 미술>에 쓴 ‘서울의 돌다리’라는 글에 청계천의 본류와 지류에 있던 17개 다리의 사진 35장이 실린 것으로 확인됐다. (스기야마 노부조)

이번에 발굴된 청계천 다리들의 사진은 이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청계천의 다리들의 실제 모습과 양식은 물론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변형된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모전교



무교(武橋)’, 즉‘모전다리’라고했던, 지금의 서울시청 근처(무교동)의 다리도 시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리였다.

원래 옛날에 토산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어서 ‘모전다리’라 하고, 이를 한자로는 따로 ‘무교(武橋)’라 하였다.
‘모전다리’를 ‘모교’라 하지 않고, ‘무교’라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쪽 청계천의 지류에 놓인 다리 역시똑같이 ‘모전다리’로, 그것이 이미‘모교(毛橋)’라는 다리 이름으로 되어 있어,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 그 ‘모’라는 음과 똑같지않은 ‘무(武)’자를 붙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 이름도 ‘모교동’이 아닌‘무교동’이된것이다.

두 개의 ‘모전다리’가 서로 가까이 있어 이를 구분해 부를 필요가 있을 때는 세종로 쪽의 것을 ‘웃모전다리’라 했고, 이 무교동쪽의 것을‘아래모전다리’라했다. 아래모전다리(지금의 시청 앞 근처)에 있었던 ‘군기시(軍器寺)’라는 관청은 병기, 깃발, 융장들의 일을 맡는 곳이었다. <한국 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무교동 사이의 네거리에 있던 청계천의 옛 다리이다. 부근에 토산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어서 ‘모전다리’즉 모전교, 모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원래는 태종 12년(1412) 종묘입구 서쪽의 개천을 석축(石築)으로 방축하고 동쪽을 목작방축(木作防築)할 때 석교로 조성하였다. 당시는 신화방동구교라 불렀으나 영조 연간(年間)에 작성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分界之圖)에는 모전교로 기록되어 전한다.




태종 12년인 1412년 지어진 신화방동 입구교의 이름이 모전교로 바뀌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신화방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최초 건립 시기는 불분명하다. 모전교라는 이름은 영조 때인 1760년 나온 <준천사실> 이후 일관되게 나온다.

이번 사진에서 나타난 모전교를 보면 형식은 널다리(형교)이며, 난간 쪽으로 다리너비가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장통교나 중학교에서 볼 수 있는 이런 형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인지, 일제시대의 양식인지 확실하지 않다. 문화재 전문가인 손영식 선생은 “멍엣돌 위에 돌을 얹은 뒤 난간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며 “돌다듬 수법이나 난간기둥의 모습으로 볼 때 일제시대에 확장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밝혔다.

모전교는 또 다리기둥(교각)이 길이 방향으로 3줄인데, 오른쪽 두 기둥은 옛 양식을 보여주는 돌 구조물이나, 왼쪽 다리기둥은 교각 사이가 넓고 콘크리트 재질로 보여 원래 3줄이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스기야마의 글에는 “하천이 한쪽으로 넓어져 다리에도 덧붙여진 콘크리트 부분이 있고, 오래된 쪽은 그대로인 것 같다”고 돼 있다. 서울시의 발굴 조사에서 양쪽 호안의 석축이 발굴됐다.


하랑교




중구 입정동(笠井洞)과 종로구 장사동(長沙洞)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를 이번에 복원했다.

현재의 청계3가 센추럴 호텔 앞쪽에 있었던 다리로, 주변에 하랑위(河浪尉. 임금의 사위)의 집이 있었다고 해서 하랑교, 하교로 불렸으며, 주변에 화류장롱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고 해서 화류교(樺榴橋)로 부르던 것이 변해 하리굣다리, 하교(河橋), 화교(花橋)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서울시에서 나온 <서울의 하천> 등 대부분 자료에서는 일제 때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적어도 1937년까지는 돌다리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에 나타난 하랑교의 모습은 역시 널다리 형식이며, 장통교나 모전교와 마찬가지로 멍엣돌 위에 돌을 추가해 난간을 확장한 형식을 띠고 있다. 하랑교의 다리기둥은 사진으로 보면 돌로 만들어진 부분이 최소 9줄이며, 스기야마의 글에는 “다리 양끝이 콘크리트로 보강됐다”고 돼 있다. 서울시의 발굴 조사에서 기초석과 돌다리 이전의 나무다리 흔적이 확인됐으며, 다리기둥은 길이 13줄, 너비 5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효경교




세운상가 동쪽 아세아 전자상가 앞쪽에 있었던 다리로 원래 이름은 주변에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살아서 소경다리,맹교(盲橋)였으며, 이것이 효경교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줄여서 효교라고 하고 영풍교라고도 불렀다.

세운교, 세경교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세운상가에서 딴 것이다. 세운교가 세워진 장소는 조선시대 효경교(孝經橋)가 있던 자리이다. 세운상가 옆 아세아전자상가 동쪽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통교와 함께 다리 밑에 거지들의 움집이 많아 매년 음력 12월에는 왕이 관리를 보내 살피고 쌀과 포를 줘 얼어죽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서쪽 다리기둥의 한 곳에 ‘정사금영개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며, 영조의 준천 뒤 한 정사년에 금위영에서 이를 고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기야마의 글에는 “늘어난 하천 너비에 맞추기 위해 양끝에 콘크리트를 더했다”고 씌어있다.

사진에 나타난 모습은 전형적인 널다리의 모습이며, 다리 양쪽 가에 낮은 난간이 설치돼 있다. 다리기둥은 길이 방향으로 10줄이 확인되나 서울시의 발굴조사에서는 길이 13줄, 너비 최소 3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하랑교와 마찬가지로 발굴 조사에서 기초석이 확인됐다.


마전교



청계5가 네거리 동쪽 방산시장 앞에 있었던 다리로 태종 때는 창선방교, 성종 때는 태평교라고 불렀으나, 말·소 시장이 옮겨오면서 영조 때부터 마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순조 이후로는 태평교와 마전교가 섞여 사용됐으며, 말·소 시장이 낮에 열리므로 오교라고도 불렀다. 세종 때에는 수표교 주변에 있던 말·소 시장이 도성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한양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이 다리의 일부분만 보여주고 있으나, 역시 널다리 형식이며 멍엣돌의 끝이 둥글게 처리돼 있고 난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계천 발굴조사에서는 몇 개의 석재만이 발견됐고, 기초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청계천 사람들


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유흥가로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왈자(曰子) 들이었다.

왈자란 기술직 중인, 경아전(京衙前, 각사 서리, 대가의 겸종), 액예(掖隸, 대전별감, 무예별감), 군교(軍校, 포교 등 하급군인), 시전상인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상업이 번창한 서울 도심 부에서 술집과 기방을 주름잡던 중간계층이었다. 그리고 기방에서 이들을 상대하는 기생 또한 청계천에서 활동 하고 있는 주요 구성원이었다.

왈자들은 직역에 따라 각각 거주지역을 달리하였다. 상류에서부터 지역별로 거주 하고 있는 청계천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선 광통교를 중심으로 상류 '우대'에는 각 관아에 소속된 서리 등 경아전들이 거주하였으며, 장통교, 수표교 어름의 중촌에는 중인들이, 효경교 아래 아래대에는 군교(軍校)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우대, 즉 상촌(上村)에 살고 있는 경아전의 대표적인 부류는 서리(胥吏)들이었다. 이들은 육조, 한성부, 비변사, 선혜청, 내수사 등 관아에 소속되어 문서의 처리, 등사(謄寫), 업무연락을 맡거나, 고급관리나 종친의 심부름을 하였다.

이들은 해당 관아의 실무담당자로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실용서를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시문(詩文)을 익혀 양반사대부 계층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직임(職任)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누렸으며, 한편으로는 협객(俠客)이 되어 시전 상인들과 함께, 술집과 기방, 도박장 등 유흥가를 휩쓸고 다녔다. 


광통교 부근의 다동, 상사동은 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시전의 상인들이 살았다. 오늘날 청계천이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청계천 주변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청계천 주변에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거리 쪽으로는 점포를 내고, 그 뒤쪽에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살림집을 마련하였다. 상인들 또한 조선후기 상권의 독점, 중국·왜와의 중개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권세 있는 양반들과 어울리며,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시전상인들은 서린동과 다동(茶洞) 일대와 상사동(想思洞, 지금의 청진동과 종로 1가 사이) 일대에 특히 많이 거주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신분상으로도 다른 지방의 상인들과는 달리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원래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조선시대의 신분체계로 볼 때 상인은 가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살고 있는 시정상인만은 경아전과 같은 중인의 지위있었으며, 실제 상업적인 부를 기반으로 경아전이 되기도 하였다.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 물품의 거래가 활발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청계천 지역은 자연 도성내의 대표적인 유흥가가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서울은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소비적 유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주사(酒肆, 술집)와 기방(妓房)이 번창하고 도박 따위가 성행했던 것이다.

길거리 곳곳에는 주막 깃발이 펄럭이고, 술과 매음을 영업종목으로 하는 색주가(色酒家)가 성업 중이었다. 속칭 '군칠(君七)이집'이라 불리는 한 술집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산적 따위를 팔았고, 밤에는 주등(酒燈)을 켜놓고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다동, 상사동 지역은 지금의 청진동과 서린동(남)이 기방촌(妓房村)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색주가(色酒家)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비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심 그룹은 당연히 기녀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문직업인이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노비와 같은 천인이었으나 이들이 상대하는 남자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에서부터 하급관리, 시전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였다. 기녀들은 남자들을 접대하는 직업의 성격상 아름다운 용모는 물론, 가무와 시문에도 능하였다.


장통교, 수표교 어름은 중촌(中村)이라고 하여 중인(中人)들이 거주하였다. 조선시대 중인이란 경아전(京衙前)·역관(譯官)·의관(醫官)·천문학관(天文學官)·화원(畵員)·사자관(寫字官) 등 기술직 관료들로 요즈음으로 말하면 외교관, 의사, 천문학자, 화가 등 전문직업인이었다.

중인들 중에서도 청계천 주변 중촌에는 특히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이 많이 살고 있었다. 역관은 승문원(承文院)이나 사역원(司譯院)에 소속되어 중국, 왜, 여진 등과의 외교에서 외교문서의 작성, 통역을 담당하는 실무담당자로서 외교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역관들은 중국 사행을 통하여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따라서 역관출신 중에는 거부가 많았다. 한 예로 조선 숙종 때 역관 변승업(卞承業)의 경우 역관 무역을 통해서 축척한 부를 바탕으로 고리대금업을 했는데, 대출총액이 50여만 냥이나 되었다고 한다. 변승업은 다방골(茶房洞)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는 한때 '다방골 변부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의관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에 소속되어 병자의 치료와 의약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특히 내의원 이나 전의감에 소속되어 임금을 비롯한 왕족, 고급관료를 치료하는 의관의 경우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의관들은 의료서비스와 도성 내 약재 판매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편이었다.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銅峴)에는 약재를 판매하는 약종상이 밀집해 있었다. 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약재는 반드시 구리개에서 매매되었는데, 이 일대의 약재의 독점적 판매권을 가진 것이 바로 의관들이었다.


관이나 의관들 중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은 물론 학문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양반들과 직접 교유하기도 하였으며, 근대화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역관 오경석(吳慶錫)의원 유홍기(劉鴻基, 大致)가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 김옥균, 유길준 등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불러 서구의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교육하는 등 개화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효경교(지금의 청계 4가 아세아전자상가, 구 아세아 극장) 아래 도성 동남쪽과 왕십리 일대는 '아래대', '하촌(下村)' 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에는 군교(軍校)라고 하는 하급 군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이곳에는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 치안과 수도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군영(軍營)들이 많이 위치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대부분 이곳에 속된 직업군인들로 아래대에 하급군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것 역시 주변의 지리적인 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하급 군인들은 직업군인으로 일정한 급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만성적인 재정부족 으로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상업과 수공업을 허락하였는데, 군인들은 이곳에서 채소를 재배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근교농업으로서 자가 소비의 목적이 아닌 도성 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채소를 판매하기 위한 상업적 영농이었다.

훈련원 근처는 배추의 지배지로 유명하여 여기서 나는 배추는 '훈련원 배추'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또한 성밖의 왕십리는 무와 미나리의 재배지로 유명하여 '왕십리 미나리장수'란 말도 생겨났다.

하급군인들의 수공업 역시 활발하였는데, 특히 훈련도감 소속 공장의 일부는 근무 이외의 시간에 각종 수공업제품을 제작 판매하여 수공업과 상업으로 진출하였다.

청계천 사람들은 상류 양반사대부 계층이 아닌 시전상인, 역관, 의관과 같은 기술직 관료, 하급군인과 기생, 거지와 같은 조선시대 신분구조상 기층을 이루는 중하층 사람들로서, 이들은 청계천뿐만 아니라 서울의 기층문화 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이었다.

기사제공 :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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