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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월남전 기록


▣ 한국군 파병과 월남 ▣


과거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벌어진 모든 전란이 그러했듯이 월남전은 단순히 월남만을 적화하기 위한 지역전이 아니라 동남아 전역은 물론 세계적화를 획책하기 위한 서전적인 침략전인 것이다. 따라서 월남의 적화는 곧 한국의 안전보장과 동남아 전체의 안전보장에 위협을 주는 결과가 되므로 한국정부는 동남아 공존공영의 차원에서 국군파월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반공아시아 국가들의 결속된 반공태세와 협동정신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민족의 전통적인 의협심과 양심을 표명함으로써 국제적 신의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6.25동란 당시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구원해 준 우방 여러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한, 미, 월간의 경제적 유대를 통하여 조국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군장병에게 실전경험을 체득케하여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고 전국민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인식 시키게하는 지름길을 터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과 사명을 품고 월남전에 참가한 주월 한국군은 월남전의 특수성에 적응한 전략 전술 개념에 입각하여 면밀주도한 작전을 구사하였다. 즉, 월남의 지형적 특수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혼용하는 적을 양민으로부터 고립시켜 섬멸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사령관의 훈령아래 소부대 전술에 중점을 두고 점차적으로 대부대작전에 익숙케 하는 전략을 터득해 나갔다. 그리하여 모든 장병이 민사 심리전요원을 겸하여 두 나라 국민의 생활 관습과 풍속의 공통성을 이해 활용하여 그들과의 이민족적인 거리감을 없애는데 노력함으로서 월남정부의 통제지역을 확장하고 점차적으로 획기적인 평정의 폭을 넓히는데 빛나는 성과를 거두어 대한민국의 국위를 내외에 선양하고 국군의 실력을 만방에 떨치게 되었다.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한다는 문제를 놓고 국회에서는 야당이 월남 파병을 반대했고 국민의 여론도 이에 못지 않게 뒤끓었다. 한국의 귀중한 아들들을 타국의 전쟁터로 보내 목숨을 잃게 한다는 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파병안이 가결되고, 한국의 아들들이 월남으로 장도에 오를 때는 파병을 반대하던 야당인사는 물론 국민들 모두가 장병들의 무운을 빌며 환송의 대열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역사적인 거국적 환송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 월남전 파월경위 ▣

1963년 이후 월남내에서 베트콩들은 공격과 테러활동을 급증시켜 중남부 산악지역은 물론, 1번 도로를 포한한 각 평야지역까지 거의 그들의 손아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위기의 월남전을 회복하고저 월남정부는 우방국으로써 이미 공산주의의 침략을 받아 갖은 고초를 겪은 바 있고 자유세계의 도움을 받아 공산침략 세력을 격퇴시킨 많은 대공 경험을 가진 역사, 문화, 사회적풍습이 흡사한 동남아시아의 반공 보루국인 한국정부에 월남전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의해 한국정부는 1964년 9월 최초로 1개의 의무단과 건설지원단을 파병시켰다. 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월남국민에게 따뜻한 우의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와 의료지원단의 활동성과가 큼을 통감한 월남정부는 다시 1966년 2월 전투병력 증파를 한국에 요청하였다.



월남정부의 요청을 받은 우리 정부에서는 전투병력을 증파하는데 대한 국내외 정세와 특히 우리나라의 안전보장 문제를 중심으로 제반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고 1966년 2월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처 국회에 동의 요청을 하였다. 1966년 3월 10일 정부는 월남 증파 결의안을 제 55회 국회 제14차 본 회의에서 찬성 95, 반대 27, 기권 3으로 통과 전투부대를 파월하게 이르렀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년도별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총  계

인   원

 21,031

 41,809

 42,743

 45,729

 43,408

 42,349

42,602

 33,177

312,853




 


월남전과 한국군










월남전 참전 7개국 수뇌회담(1966.10)
월남전 참전국 7개국(월남, 미국,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타일랜드, 필리핀, 뉴질랜드) 정상들의 모습. 사진은 이들 정상 7명 외에 쿠엔 카오 키 월남 부통령의 모습이다.




월남 참전국 정상회의 (66.10.25)
1966년 10월 25일 25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정일권 국무총리 월남방문(67.2.15)
정일권 국무총리가 월남전에 파병된 국군과 월남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공식 방문하였다.




월남 대통령 부대 표창(67.4.23)
주월 사령부는 1966년 8월 15일 전투부대의 효과적인 지휘와 연합군과의 밀접한 협조를 위하여 나트랑 지역에 야전 사령부를 창설하는 등 점차 많은 예하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사진은 월남대통령 명의로 주월 사령부에게 표창을 하는 모습이다.




파리 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68.5.13)
1968년 5월 13일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 휴전회담'이 열렸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많은 시일이 걸린 이후, 결국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베트남 남부 공화임시혁명정부의 4자간에 체결되었다.




태권도 신조를 선서하는 수련생(68.12)
한국은 군대이외에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여 많은 월남군인에게 태권도를 보급하였다.
사진은 태권도 신조를 선서하는 모습이다.








비둘기부대 환송식(65.2.5)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는 국방부 명령(육) 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 6명으로 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 원조본부단을 창설하였으며 예하 부대로서 유군 제 127공병대대 1이동경비대대, 제 801수송중대, 해병 제 1독립 공병중대를 핵심으로 편성된 부대이다. 사진은 1965년 2월 5일 경기 현리에서 주월 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는 모습니다.




비둘기부대 환송 국민대회(65.2.9)
비둘기부대(군사원조단)이 1965년 2월 13일 선발대 출발에 앞서 2월 19일 비둘기부대 환송 국민대회가 열렸다.




파월장병 환송장면(65.2.9)
비둘기부대(군사원조단)가 1965년 2월 19일 비둘기부대 환송 국민대회 후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이다.




월남국민들이 비둘기부대를 환영하는 모습
비둘기부대는 1965년 2월 13일 파월 제 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 도착하였고, 3월 16일 전 부대가 도착하였다. 비둘기부대는 파월 초창기의 어려운 환경속에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 학교, 진료소 공사와 태권도 교육 및 심리전 활동 등 주월 한국군의 개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
The Head quarters Republic of Korea forces in Vietnam 


주월 한국군사령부(이하 주월사령부)는
1965년 9월 25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16호에 의거, 서울 필동 합동참모본부에서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육군소장(수도사단장 겸임), 부사령관 이훈섭 육군준장이 부임.
국방부 지령 제12호에 의거, 사령부 선발대 16명이 월남[사이공]으로 출발하였으며,
뒤를 이어 10월 20일 사령부 94명, 수도사단 지휘 본부 40명, 계 134명이
월남 [사이공]으로 이동하여 주월 사령부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당시의 예하부대로는 전투부대인 수도사단(맹호), 해병 제 2 여단(청룡)과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지원단(비둘기) 및 해상수송분대(백구)를 총지휘하게된다.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중장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사령부(이하 주월사령부)는 1965년 9월 25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 16호(1965.9.20.)에 의거, 서울 필동 합동참모본부에서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장군을 임명하였다. 동일 국방부 지령 제 12호(1965.7.21)에 의거, 사령부 선발대 16명이 월남으로 출발하였고, 동년 10월 20일 사령부 94명, 수도사단 지휘부 40명 계 134명이 사이공으로 이동하여 주월 사령부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사진은 초대 주월 사령관 중장 채명신 모습이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 부대기에 대통령표창 수치기를 달다
주월 사령부는 지휘소를 개설할 당시 예하부대로서 수도사단, 해병 제 2여단과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지원단 및 해상 수송부대 총 병력 2만 1천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이 주월 한국군 사령부 부대기에 직접 수치기를 달아주고 있는 모습이다. 





청룡부대 (해병 제2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1965년 6월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해병 제2여단을 편성하였으며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해병 제2여단 결단식(65.9.20)
청룡부대(해병 제 2여단)는 1965년 6월 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 2 연대를 기간편성하여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사진은 1965년 9월 20일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결단식을 거행하는 모습이다.




청룡부대 환송식(65.10.3)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3일 출발하였다. 사진은 부대 출항을 환송하는 모습이다.




캄란만에 상륙한 지휘본부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9일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사진은 지휘본부가 먼저 상륙하는 모습이다.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는 청룡용사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9일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청룡부대는 1965년 12월 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66년 8월 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1967년 12월 22일에는 호아안으로 이동하였다.





맹호부대 (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수도사단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14일과 6월26일 2차에 걸친 월남공화국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 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965년 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맹호부대 결단식(65.10.12)
수도사단(맹호부대)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 14일과 6월 26일 두 차례에 걸친 월남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동년 8월 13일 국회 동의를 얻어 파병하게 되었다. 사진은 1965년 10월 12일에 열린 맹호부대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기를 전달하고 있다.




수도사단 환송식(65.10.12)
국내에서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 12일 여의도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이 열렸다.




맹호 26연대 및 십자성 부대 환송(66.4.15)
1966년 4월 15일 맹호 26연대 및 십자성 부대가 많은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고 있다.




퀴논에 상륙하는 증파부대 환영식(66.4.22)
1966년 4월 22일에 월남 퀴논에 도착하는 맹호 26연대 부대원들.





백구부대 (해군 수송전대)-바다의 제왕
The Naval Transport Group

주월 한국군 파월초기부터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해군의 활약은 지상군들의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와 의료및 대민지원사업 및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매콩강에서 활약하는 백구부대

주월 한국군 파월초기부터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해군의 활약은 지상군들의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 의료 및 대민지원사업,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백구부대 함정
백구부대는 창설함과 동시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 직할대로 승격, 해상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이공항에 정박한 백구부대 LST
처음에는 LST 한 척으로 비둘기부대에 편입되었으나, 부대 창설 이후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사진은 사이공항에 정박한 백구부대 LST 601과 LST 602





십자성부대 (제100군수 사령부)

The 100th Logistic Command


최초 파월 전투부대인 맹호사단과 청룡부대가 파월됨에 따라 이들 전투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군수지원을 위하여 국본 일반명령(육) 제31호에 의거, 1965년 9월1일부로 강원도 흥천에서 수도사단 예하부대로서 군수지원사령부를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에 이범준 준장이 부임하였다.

파월이후 백마사단을 비롯한 추가부대가 증파됨에 따라 국본 일반명령(육)제22호에 의거, 1966년 6월1일부로 군수지원사령부를 100군수사령부로 개편, 수도사단으로부터 예속해제, 육군본부에 예속과 동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배속하게 되었다.





100 군수 주력부대 나트랑 상륙(66.9.7)
군수지원 사령부는 맹호 및 청룡의 군수 지원을 위하여 국본 일반 명령(육) 제 31호에 의거창설되어, 홍천에서 교육훈련 후 1965년 10월 7일에 1진 10월 24일에 2진이 각각 퀴논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1966년 5월 15일 군 지원부대로 승격되어 주월 한국군 사령부로 배속 1966년 6월 1일 부대 명칭을 제 100 군수 사령부로 개칭하여 사령부를 퀴논에서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100 군수 사령부 창설기념식(66.11.12)
1965년 11월 12일 100군수 사령부 창설기념식 사진이다. 초대사령관 이범준 준장이 기를 받고 있다.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The 9th Division (White horse)


보병 제9사단(백마)사단은 1950년 10월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에 의거, 서울에서 창설, 예하부대로서는 제 28연대가 대전, 제29연대가 공주, 제30연대가 청주에서 각각 창설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포병사령부가 광주에서 편성되었다.








백마부대 결단식(66.8.27)
1966년 8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백마부대 결단식의 모습이다.




백마부대 국민환송대회(66.8.27)




백마부대 선발대 월남상륙(66.8.9)
8월 말 정규부대 파월에 앞서 선발진이 1966년 8월 9일 월남에 도착하였다.




백마부대 지휘부 월남도착
제 9사단(백마부대)는 월남정부의 전투병 증파를 위한 공식 요청이 있은 후, 1966년 2월 28일 국무회의 의결, 3월 10일 국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파월하게 되었다. 사진은 월남에 도착한 백마부대 지휘부.





월남전 기간 동안 많은 주요 인사들 및 군 장성들도 월남을 방문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육군참모총장 김용배대장 방문(65.11.10)
1965년 11월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대장이 전장 일선을 방문하여 야전 시설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 백마사단방문(66.10.13)




박대통령 맹호부대 순시(66.10.21)
박정희대통령은 1966년 10월 참전국 정상회담이후 월남을 방문 국군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사진은 맹호부대를 방문하는 모습.




박대통령 100군수 사령부 순시(66.10.21)




육군참모총장 김계원대장 방문(66.12.5)




정일권 국무총리를 환영하는 월남국민(67.2.15)
월남전 기간동안 많은 주요 인사들이 월남을 방문 우리 국군을 위로하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사진은 1967년 2월 15일 정일권국무총리가 월남에 도착했을 때 뜨겁게 환영하는 월남 국민들의 모습.




정일권 국무총리 일행 백마부대 순시(67.2.15)




맥나마라 미국방장관 수도사단 방문(67.7.9)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여사 환자위문(68.11.26)




오작교작전

오작교작전은 1967년 3월 8일부터 5월 31일간에 맹호, 백마 양 사단을 투입하여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1번 국도의 개통을 시도한 작전이다. 작전 결과 수도사단이 위치한 퀴논과 9사단이 위치한 투이호아로 연결하는 1번 국도의 개통과 월남주민 약 73,000 명을 적 통치로부터 해방시켰다.




오작교 작전에서 맹호, 백마 양 지휘관 상봉(67.4.18)




42일간의 작전을 마치고 맹호, 백마용사가 상봉하는 광경
1번국도의 개통을 시도한 작전이었던 오작교작전 중 맹호, 백마부대 용사들이 상봉하는 모습이다.




헬리콥터로 피란민 후송
오작교작전 중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하였는데 국군은 이들을 헬리콥터로 후송하였다.




적의 은거지를 돌격하는 용사
오작교작전 중 용감하게 돌격하는 우리 용사의 모습





은마부대 (공군 지원단) - 하늘의 보라매
The Aerial support Group

주월한국군사령부 공군지원단은 자유세계 안전과 보호를 위한 자유우방군의 일원으로 월남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주월한국군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1966년 6월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를 설치하여 수행하던 전술 항공지원 업무와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수송 지원업무를

1967년 7월1일 C-46 미 항공기 파월을 계기로 보다 효율적인 작전지원과 부대운영을 위하여 분산되어있는 모든 기능을 통합운영코져 공군지원단이 창설되었다.





은마부대 창설(67.7.1)

주월 한국군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6년 6월 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을 설치하였다. 그 후 항공지원대의 전술 항공 지원 업무와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 수송지원 업무를 흡수하여 공군지원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사진은 공군지원단인 은마부대 창설 모습으로 1967년 7월 1일 탄손누트 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은마부대는 4대의 C54기를 주축으로 월남전에서 공중수송의 지원활동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결단식를 가졌다.




최초로 파월된 C-46수송기
공군지원단 창설의 계기가 된 것은 최초로 파월된 C-46수송기의 등장이었다.





홍길동작전

홍길동작전은 1967년 7월 9일부터 8월 26일까지 맹호, 백마 2개 사단을 투입, 주월 한국군 전술책임지역을 위협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한 선제공격이었다. 작전 결과 적의 상부지휘 체제와 전투능력을 파괴하였다.




홍길동 작전 도중 헬리콥터에서 한 병사가 랜딩하는 모습이다.




홍길동 작전 도중 동굴을 수색하는 백마용사




홍길동 작전 도중 28전투단이 작전중 노획한 장비(67.7.20)






68년도 계획서에 서명하는 한,미,월 군 수뇌(67.12.1)
1967년 12월 1일 야전사령부에서 열린 한.미.월남 군 수뇌부 회의. 1968년도 연합작전계획에 서명하고 있다.




베트공 통치구역을 벗어나 한국군 지역으로 피난하는 월남인들
1968년 구정을 앞두고 약 4만명의 병력으로 케산의 미 해병기지를 포위하는 동시에 베트콩과 월맹군은 월남의 14개성 주요도시에 대해 소위 구정공세를 취하였다. 사진은 이러한 구정공세의 혼란속에서 베트콩 통치구역을 벗어나 한국군 군사지역으로 피난오는 월남인들의 모습이다.




백마부대 작전지역을 순시하는 최대명 소장(68.6.7)
야전사령부에서는 일선 작전지역을 수시로 순시하였다. 사진은 백마부대 작전지역을 순시하는 최대명 소장의 모습이다.




신,구임 주월 한국군 사령관 티우 월남 대통령 방문(69.4.30)
신,구임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이.취임식 전날인 1969년 4월 30일 티우 월남 대통령을 예방하였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 신구임 취임식(69.5.1)
1969년 5월 1일 주월 한국군 사령관 이.취임식이 여러 요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주월 한국군 부대기 인수인계(69.5.1)
주월 한국군 부대기를 1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이세호 장군에게 넘겨주고 있다.




연합지역 심사분석회의(69.10.28)
야전사령부는 1968년 6월 1일 주월 사령부 작편 320에 의거 장교 59명과 사병 36명으로 주월 한국군 사령부 야전 지휘소를 개편, 야전 사령부를 나트랑시에 창설하였다. 사진은 야전사령부 주관으로 열린 연합지역 심사분석회의 모습이다.




주월 한국군 주요 지휘관 및 참모일동(70.1.23)
주월 한국군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맨 앞즐 가운데가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




박정희대통령 이세호중장에게 태극무공훈장 수여(70.4.9)
박정희 대통령이 주월 한국군 2대 사령광 이세호 중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훈장병 훈장수여식




이세호사령관 맹호부대 순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인 이세호 장군이 맹호부대를 순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0-1호 작전은 1970년 4월 22일부터 5월 16일까지 한국군 전술책임지역 밖에 위치한 투이호아 서북 40Km지역인 폭탄주변, 쑤이카이 계곡 일대의 월맹군 13대대, 베트콩 96대대에 대한 선제포착 섬멸작전이다. 작전 결과 적의 후방 생산시설, 지휘통신시설 파괴, 심리전 근거지 파괴 등과 1번 및 6번 도로의 위험을 제거하였다.




사진은 작전 도중 백마공수 특전부대 용사가 로프을 이용 랜딩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장병들이 베트콩의 은거지를 수색하고 있는 모습이다.




작전 도중 밀림에서 경계중인 병사들의 모습이다.




독수리 70-1호 작전에 투입되는 병사를 격려하는 이세호사령관(69.5.3)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하는 포병의 위용




전단을 살포하여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이다.




밀림수색 작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




작전중 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이다.
이 작전의 전과는 적 사살 545, 포로 13, 개인화기 301, 공용화기 40, 무전기 14 등이다.




작전 종료 후 큰 전과를 올린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아동복지센터에 참석한 티우 대통령 및 이세호 사령관
우리 군은 100명의 베트콩보다 1명의 양민을 우선보호한다는 인식하에 작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민 봉사와 공사작업은 부대 주둔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사진은 비둘기부대기 완공한 아동복지센터에 참석한 티우대통령 내외및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이다.





비둘기부대가 완공한 푸토아면 사무소 준공식에 참석한 이건영 부사령관의 모습이다.




재월교포 가옥 입주식 모습이다.




월남노래 경연대회에서 훈시하는 박노영 참모장
우리 군은 자체적으로 월남노래 경연대회를 열어 월남인에게 좀 더 다가가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창군기념작전에서 노획한 물품을 보는 티우 대통령
월남 국민에게는 한국군이 큰 힘이 되었다. 사진은 창군기념작전에서 노획한 물품을 둘러보고 있는 월남 티우대통령의 모습이다.




월남신문회관 개관식(70.1.10)
월남신문회관 개관식에 참석한 티우대통령과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이다.




사이공 외곽 환산도로 기념탑을 순시하는 신상철대사(69.7.11)
우리 부대가 완공한 사이공 외곽 도로 기념탑을 순시하는 신상철 대사와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이다.




비둘기부대에서 준공한 어린이 놀이터(70.2.11)
우리 군은 100명의 베트콩보다 1명의 양민을 우선보호한다는 인식하에 작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민 봉사와 공사작업은 부대 주둔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각 학교와 자매결연를 맺고 또한 각지역에 어린이를 위한 시설을 준공하는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다. 사진은 비둘기부대에서 준공한 어린이놀이터 모습이다.




맹호부대가 준공한 퀴논 문화센터(6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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