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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6.25 한국전쟁

6.25와 한국전쟁사


※ 6.25전쟁 배경

1945년 2월 11일 일본군을 저지 하기위한 목적으로 미,영,러가 얄타회담 개최 
러시아(당시 소련)이 이회담에서 미국을 돕는 조건으로 권리 회복 약속.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을 포고한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하여 밀어닥치기 시작.

8월 10일, 일본은 연합국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러시아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하여각각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 
이때부터 정치적 구도가 38도선을 기점으로 북은 러시아의 공산화가 남은 미국의 민주화의 구도 형상이 발생

러시아는 1945년 10월 14일에는 김일성을 등장시키고, 
이듬해 2월 8일에는 이른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여 소위 ‘확보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작업에 들어갔다.

뒤늦게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소련)을 견제 하기위해 1945년 9월 7일에는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남한에 대한 군정을 선포

북한쪽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각도 인민위원회에 이어 1946년 11월에 실시한 
시, 군, 면 단위별 각급 지방 인민위원회의 위원들을 선출했다. 그리고 1947년 2월 중순‘임시’가 아닌 정식‘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 선거결과 1948년 5월 제헌의회가 구성됐다. 
초대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 김동원 의원이 선출됐다. 
제헌의회는 7월 12일 헌법을 제정한 후 7월 20일 이승만과 이시영을 각기 정·부통령으로 선출(민주주의 국가 수립)

1948년 말경부터 북한에서는 군사력 증강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이때부터 북한은 소련제 탱크와 기계화 부대를 중점적으로 편성하기 시작

1949년말 부터 러시아와 중국을 연합으로한 북의 남친 소문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짐, 
그러나 광복이후 제대로된 정부 수립이 미비한 상태와 당시 미국이 소극적 참여.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감행한 전면기습 공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3년 1개월 2일간이나 지속되면서 형용 불가능한 참화를 초래한 동족상잔의 전쟁 발생



A soldier of the ROK Army eating lunch in a war-destro​yed house in Munsan-ni, Korea,
as a field ration made in Japan for the ROK Army is shown unpacked.  July 17, 1951.


한국전쟁 Colour 현장 비디오 사진 [Youtube 동영상 6편]
한국전쟁 걸작사진전 [B급호러 Movie]
Remembering the Korean War, 60 years ago [The Big Picture]
LIFE紙가 공개한 한국전 당시의 서울의 생생한 모습 [고성혁의 역사추적]
한국전쟁 미군 기록사진 [울프독]
다시보는 6.25 한국 동란 60년전 [1]  [2] 
한국전쟁관련 사진 600여 장 - Picasa 
Photos of Korean War - 한 미군병사의 사진들
1950년 북한지역의 모습들
■ 6.25 전쟁과 일상들 <1>  <2>  <3>  <4>  <5>   6.25 당시 희귀사진 8장
6.25 동란 이후와 현재의 서울 풍경
6.25 전쟁때 희귀 전단 [삐라 모음]
미군을 잔인하게 묘사한 북한의 정치 선전화
60년대 판문점의 모습들

美軍의 6.25 (동영상) - 한국전의 발발에서 부터 휴전까지의 역사적 자료를 담은 매우 귀중한 영상
● 미군정 시절의 사진들




아! 6.25 (Posted by Koreanwar60)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기념 사업단
아! 6.25 전시회 현장의 생생한 모습
웹툰 6.25 이야기 - 환쟁이의 블로그

1부 남침과 낙동강 방어

   01. 비극을 알리는 신호 '폭풍'
   02. 준비된 도발
   0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04. 대한민국을 구한 춘천대첩
   05. 수뇌부의 무능 그리고 한강교
   06. 서울에서 지체한 북한군
   07. 위기에서 빛난 해군의 용전분투
   0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09. 침략자의 실책
   10. 예상보다 빨랐던 미국의 참전
   11. 스미스부대의 붕괴
   12. 어둠속에서 빛을 발한 승전보
   13. 미 제24사단의 굴욕
   14. 제17연대의 복수전 (화령장전투)
   15. 그냥 내어준 호남평야
   16. 누가 빠른가?
   17. 동해안의 지연전
   18. 맥아더의 의지
   19. 최후의 선택 낙동강
   20. 북한군의 기도
   21. 북한군의 8월공세
   22. 기회로 승화시킨 위기
   23. 포항에서의 일진일퇴
   24. 피로 지킨 다부동
   25. 그해 9월의 마지막 혈전
   26. 부산을 향한 마지막 발악



미스테리 속에 숨어있는 그시절의 자화상<상> <하>
1950년 6월 24일 0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경계령 해제의 연유는? - 군번 제1호로 유명한 이형근(李亨根) 예비역대장은 199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이른바 ‘6·25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 1950.6.25~28 가장 길고 처절했던 역사의 나흘(JP회고) - 중앙일보 [6·25 61주년 기획] <1>  <2>  <3>
-. 6.25 전쟁 관련 이상한점들... 장병의 절반이 휴가나 외출...
-.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백두산함의 대한해협 해전 (1950.6.25)  ■ 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대한해협전투   ■ (웹툰)
동해안 18포병대대의 진내[陣內] 혈전
한강철교는 알고있다(August) <1>  <2>  <3>  <4>  <5>  <6> <7>  <8> 
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 [1]  [2]  [3]  (채병덕 총참모장 2, 7사단장에 역습을 명령. 1950.6.26)
전반적인 전황을 고려하지 못한(후방에 충분한 기동 예비전력이 확보되지 않는 등) 채병덕 총참모장의 반격작전은 전선에 크나큰 파국을 불러 일으키고 결국 6월 28일,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사연은 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상>  <중>  <하>
■ 대한민국을 수호한 혈전, 춘천전투 <1>  <2>  <3>    ■ 호국의 干城(August)

■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계인주대령의 비겁한 도주 
최초의 반격대첩 '동락리전투'
한반도 최초의 전차전 (1950.7.10 전의전투)<상>  <하>

화령장 전투 (울프독)   ▷ 위기속의 낭보 화령장 전투(웹툰)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1950.7.17일과 7.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대표적 전투, 오산전투 (1950.7)   ■ 스미스부대의 오산전투(죽미령)
20세기 이후 전투 중 아무리 강한 나라도 순간의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과 함께 철저히 준비한 군대 앞에서는 아무리 첨단무기를 갖춘 군대라도 패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전투가 바로 1950년 7월 벌어진 오산전투(Battle of Osan)입니다.

전멸한 북 싸이카부대
해군의 해상 북진작전
포항의 학도병들 (웹툰) - 영화 '포화속으로'의 무대

전멸을 각오한 사투 '다부동 전투'
6·25 전쟁 중 가장 격렬한 전투는 바로 낙동강 방어 전선이 유지되던 1950년 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가 꼽힌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한국군과 북한군 양측이 사활을 건 대규모 격전을 벌이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 점령을 끝내고 통일을 경축하고자 했고, UN군과 한국군은 차후의 반격(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죠.


● 美, 1950년 9월 한국戰 핵사용 분석 착수 - 당시 美 극동 공군사령관 `전쟁 일기' 공개(2011.06.23 연합) 



2부 유엔군의 반격과 북진

   27. 운명의 그날 (인천상륙작전 1950.9.15)
   28. 맥아더의 집념 그리고 반대
   29.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이었나?
   30. 다시 쓴 상륙작전의 역사
   31. 낙동강아 잘있거라
   32. 감격적인 합류
   33. 치열했던 서울탈환 (9.28 수복)
   34. 38선 돌파에 대한 논쟁
   35. 감격스런 북진
   36. 북진 그리고 실책
   37. 적의 심장부를 향한 경쟁
   38. 전쟁 종결에 대한 전망
   39. 김칫국부터 마신 갈등










5000분의 1의 도박, 작전명 '크로마이트' (웹툰 6.25 이야기) [1]  [2]  [3]  [4]  [5] 
집념으로 이룬 반전, 인천상륙작전 <1>  <2>  <3>
여기가 아닌가봐 (인천상륙작전의 에피소드)
동굴에 매장된 '월미도 영웅들' 
경인가도의 북한 전차부대 몰살비화 

인천상륙작전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한 것은 실패라고 알고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무려 13일 이상 진격하면서, 낙동강에 있던 적의 주력이 퇴각한 이후에 서울 인천을 방어한 북한 18사단도 퇴각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 퇴각한 주력이 다시 중공군과 같이 밀고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명1.4후퇴.
또다른 이야기로는 인천상륙작전도 사실 그걸로 인해서 전세가 뒤집혔다기 보다는 그 시점에선 이미 북한군은 주력을 다 소진한 상황이었기에 낙동강 전선에서 밀고 갔어도 별 차이는 없었다더군요. 물론 시간은 훨신 단축되었지만, 그 대신 퇴로가 끊긴 북한군이 빨치산으로 후방에서 준동하는 부작용 또한 있었다고 합니다.

USMC(United States Marins Corps) in the Korean War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해병 사진)

6.25전쟁 당시 서울수복을 위한 한강도하 사진
■ 9ㆍ28 서울수복과 전선 절도 사건,  6.25 동란 중 발생한 “경찰관 의 銅線 절도 사건
서울 아현 고개의 6.25 전쟁 비사 (충정로 북한 저격병의 최후) - 울프독의 War History

■ 달콤했던 기억 그러나 과하였던 순간, 평양탈환 1950.10.19  <상>  <하>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면서 38선 인근까지 다가간 아군은 이곳을 넘어 북으로 내달리기 위해 조바심을 낼 정도로 상황은 반전되었고, 마침내 10월 1일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을 넘은 것을 신호탄으로 역사적인 북진이 개시되었습니다. 이때 평양탈환의 임무를 맡은 미 1군단 소속 1기병사단을 후속하여 우측에서 조공의 역할을 담당하며 북진에 참가한 부대가 국군 1사단이었습니다. 10월 19일 거의 동시에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대동강에 다다랐는데, 국군 1사단 예하 12연대가 미군보다 조금 빨리 선교리를 점령함으로써 제일 먼저 東평양을 점령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또한 국군 1사단 15연대가 본평양에 입성하던 시간과 거의 비슷한 19일 밤, 대동강을 건넌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 8연대도 김일성대학을 점령하며 평양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 8군의 우익을 담당하며 한반도의 정중앙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 2군단 소속 7사단이 진격 방향을 좌측으로 바꿔 평양으로 입성하자 전선 중앙이 순식간 텅 비어져 버렸고 이틈을 노려 북한군 잔당들이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평양탈환 후, 원 위치하였지만 우회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렇게 한 번 벌어진 틈은 이후 중공군이 침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10월 30일 평양 시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였지만 최전선의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던 중이었습니다.


압록강을 팔아먹은 인간들


혜산진에서 바라본 압록강

 

 

 


3부
중공군의 개입과 반격


   40. 낯선 군대의 등장
   41. 중공군의 준비되었던 참전
   42. 예상하지 못한 적의 공세
   43. 만용의 대가
   44. 비호산에서 빛난 칠성
   45. 수렁으로 빠져 들어간 최종공세
   46. 죽음의 계곡
   47. 후방을 향한 공격
   48. 미련없이 내어준 평양
   49. 흥남 철수작전
   50.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
   51. 통한의 1.4후퇴 (1951.1.4)
   52. 예상을 벗어난 위기
   53. 알려지지 않은 적
   54. 철군이냐 확전이냐
   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56. 다시 한강으로
   57. 간파된 적의 약점
   58. 다시 앞으로 나가다
   59. 결전의 장소로 떠오른 지평리
   60. 용기로 얻어낸 대승
   61. 도살작전과 절단작전
   62. 다시 탈환한 서울 (3.15 수복)
   63. 다시 38선으로
   64. 어디까지 진격할 것인가
   65. 거인의 퇴장
   66. 다시 서울을 노린 중공군
   67. 적을 좌절시킨 서부전선의 혈전
   68. 굴욕 그리고 그것을 막은자
   69. 두려움을 극복하다
   70. 매봉 및 한석산 전투
   71. 예견된 대전투
   72. 국군을 노린 공세
   73. 피의 공세가 개시되다
        (중공군의 6차공세와 벙커힐전투)
   74. 아군의 실책과 북한군의 무능 (현리전투)
   75. 국군 3군단 최후의 날 (오마치)
   76. 운두령에서의 역전타
   77. 최대의 패배를 감수한 중공군
   78. 국군 제6사단의 와신상담
   79. 용문산의 승전보 (파로호전투)
   80. 불승불패의 전략
   81. 개시된 휴전회담



운산 전투(평북 1950.11.1~2)의 미 포로 대학살
중공군의 첫 대패 - 수동의 터널전투
전투초반 중공군 1개사단이 장진호 입구에서 미 해병 연대에게 대패한 전투.
평북 덕천전투(1950.11.26~27)의 패배와 '철원 승일교' 그리고 박승일 대령의 최후 행방은?
장진호전투(1950.11.27~12.13, 미해병 1사단 3여천명 사망) 패배로만 볼 수 없다.<上>  <下>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있다. (위키백과)

-. 장진호전투 그래픽과 함께 간략한 소개    -. 장진호전투를 아십니까?   -. 장지호전투 사진들   
-. 미 해병들의 횡재 - 장진호 목제소    -. 장진호전투 사진 몇 컷
-.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1>  <2>  <3>  <4> 
-. 전설로 남은 이야기, 장진호 전투 <1>  <2>  <3>

크리스마스의 기적 - 흥남철수작전 (1950.12.12~12.24)
또 하나의 인도주의 작전 (서부 진남포 철수작전 1950.12.5)

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 밸리 전투<上>  <中>  <下>    ● 한국 참전 영국군 추모비의 슬픈 유랑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기술 (쏘련의 제트전투기 MIG-15의 참전)
■ 1951년 1월, 문경대첩 <1>  <2>

잊혀 질 수 없는 전투, 제2차 인천상륙작전 (1951.2.10)

지평리전투와 프랑스부대의 사이렌   ■ 지평리의 영웅들(웹툰)
한국판 벌지 대전투(지평리전투)<1>  <2>  <3>   ■ 용기로 얻어낸 대승, 지평리전투 <1>  <2>  

너무 싱거운 2차 서울 탈환 (1951.3.15)
1950년 9월의 1차 수복작전이 수만 명에 달하는 적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한 후 이뤄졌던 데 반해, 2차 수복작전에서 보병 제1사단은 불과 3명의 적을 사살하고 거의 저항없이 서울을 탈환한다.

■ 영연방군의 전설, 임진강-가평전투 <1>  <2>  <3>
고립방어전의 성지 임진강변의 설마리와 영국군 글로스터대대자유로의 귀환(웹툰)
[임진강 전투] 1951년 4월 임진강(설마리)전투에서 영국군 제29여단(영국 글로스터·얼스터·퓨실리어, 아이리쉬 후사르스, 벨기에 대대 등 5개 대대)은 적성-설마리-동두천으로 돌파하려는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해 아군의 주력부대들이 안전하게 철수하고 서울방어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특히 소속 글로스터(Gloucester)대대 652명 중 전사 59명, 포로 526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생존자는 67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의 공로로 부대는 "영광스러운 글로스터"(The Glorious Glosters)로 칭송 받았으며, 미 트루먼 대통령 부대훈장, 영국 최고훈장을 수상한 바 있다.

[가평 전투] 가평전투는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 영연방 제27여단(영국 미들섹스대대, 호주 왕실 제3대대, 캐나다 제2보병대대,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이 가평천 일대에서 이들의 침공을 결사 저지해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었으며, 서울-춘천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데 크게 공헌한 전투이다. 이후 호주 왕실 제3부대(3RAR: Royal Australia Regiment), 캐나다 제2보병대대(2PPCLI: 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훈장을 수상했다.



3군단 최후의 날과 유재흥




4부 전선의 교착과 휴전

   82. 시작된 줄다리기
   83. 뜨거운 감자, 개성
   84. 고지 쟁탈전의 시작
   85. 무적해병의 신화
   86. 희생을 필요로 한 고지전투
   87. 피로 얼룩져간 능선
   88. 너무나 혹독한 댓가
   89. 또 다시 재현된 악몽
   90. 피로 얻은 승리 그리고 교훈
   91. 파로호를 장악하다
   92.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93. 전혀 새로운 난제
   94. 해방구가 되어버린 포로수용소
   95. 휴전반대로 얻고자 한 것
   96.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7차 대공세)
   97. 멈추어진 전쟁
   98. 전쟁이 남긴 것
   99. 세계에 영향을 끼친 전쟁
   00. 끝나지 않은 전쟁

  


귀신잡는 해병신화 '도솔산 전투'   ■ 도솔산 전투(웹툰) <1> <2> <3> <4> <5> <6>
1951년 6월 북한군 2개 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이곳을 미군의 정예 5연대가 공격했지만 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자, 이어 투입된 부대가 한국군의 해병대 1연대. 해병대는 허를 찌르는 대규모 야간 공격과 1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도솔산 일대 24개 목표 진지를 모두 탈환해 내고야 말았다.


도솔산전투의 24개 목표와 펀치볼


■ 남한 포로가 지켜 본 승호리 철교 폭격(1952.1.15)

불굴의 감투정신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白馬高地)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철원 북방 395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한국구 제9 보병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약 10일 동안의 혈전 끝에 고지를 굳건히 지켜낸 승전(勝戰)입니다. 제9 보병사단이 이 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중공군 참전 이후 걸핏하면 야습과 인해전술에 말려들어 연전연패를 면치 못했던 한국군이 마침내 적의 전술을 간파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해내고 반격에 성공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피로 쓴 신화, 백마고지전투 <1>  <2>  <3>





6.25전쟁 연표 I (1950.6.25~9.15)
6.25전쟁 연표 II (1950.9.16~12.31)
6.25전쟁 연표 III (1951.1.1~6.30)
6.25전쟁 연표 IV (1951.7.1~12.31)
6.25전쟁 연표 V (1952.1.1~12.31)

전쟁직전 남.북 전쟁 지휘부
전쟁직전 육군의 편성 및 배치

※ 전쟁 발발시 남.북 전력비교  <I>  <II>

6.25전쟁 포로사건 일지 1편 (1950~51년)
6.25전쟁 포로사건 일지 2편 (1952년)





-. 메뚜기로 시작한 도전의 역사 (한국 공군의 창설 과정)
   ▷ 한국전쟁 때 우리는 이 전투기로 북괴군과 싸웠다.... (무스탕...)
-. 국군 유일의 기갑연대 예하 장갑대대의 M-8 정찰장갑차의 활약 (국군 기계화부대의 시초)
-. 전차 육탄 공격은 어떻게 했을까? - 울프독의 War History

-. 길목에 남겨진 역사 (미군과 인천항)
-. 음지에서 승리를 이끈 사람들 (전쟁 노무자들)
-. 미군의 전사자유해 발굴 (전장정리조)
-. 그녀의 이름으로 불려진 고지 (Jane Russel 고지)
-. 한국 전선의 마리린 몬로 [울프 독] Marilyn Monroe's Visit to Korea
-. 돌출부에 대한 단상 (강원도 고성지역의 점령과 백선엽장군 & 알레이 버크제독)
-. 6.25때 강화도를 사수한 특공대원들의 분노
-. 항명으로 팔만대장경 지켜낸 두 군인  - 동영상 및 인터뷰   아름다운 항명(웹툰)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1>  <2>  <3>  <4>  <5>  <6>  <7>  <8>  <9>  <끝>

6.25전쟁 참전으로 중국은 무엇을 얻었나
... 또한 중국이 6.25 한국동란으로 이익 본 것 중에는 오늘날 시짱 자치구라고 불리는 티벳 지역을 중국 영토로 완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것도 있다. 중국은 당시 한반도 전란에만 신경쓴 게 아니라 국토의 동서 양 끝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렀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참전의 진짜 이유 - 중국군 기밀 인용 ‘한국전 논문’ … 11년 옥살이 추이 박사
마오쩌둥은 언제든 자신의 정권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스탈린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10여차례에 걸친 스탈린의 파병압박과 당시 만주지역에 득세하고 있던 친소파들을 소진시킬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신중국 재건의 지원을 소련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중국으로선 참전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6.25전쟁시 참전국들의 활약상


국별 유엔군 파병 및 전사자 규모
국 명 파병자수(명) 전사자수(명)
미국
1,600,000
36,492
영국 56,000 1,177
캐나다 27,000 516
터키 14,936 1,005
호주 8,407 346
필리핀 7,500 120
태국 6,326 136
뉴질랜드 5,350 41
네덜란드 5,320 124
콜롬비아 5,100 213
그리스 4,440 186
프랑스 3,760 270
벨기에 3,590 106
이디오피아 3,518 122
남아공 900 37
덴마크 630
노르웨이 623 3
스웨덴 380
인도 346
이탈리아 185
룩셈부르크 89 2
유엔군 총계 1,754,400 40,896





■ 에티오피아
    -. 그때 그가 다시 왔었다. (마라톤의 영웅 아베베의 참전과 1966년 한국육상대회에 참전)











6.25전쟁 중 일어난 에피소드들


YTN의 한국전쟁 60주년관련 기사

전쟁터로 간 소녀 해병
"우리 친구가 야 우리 지원하자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진짜 그럼 나도 지원할까 해서 지원했지 그래서 그냥 어머니는 기절하시고..."

중국-타이완 한국전에서 격돌
육군정보부대 인천18지구대 서울-차이니즈 지대

타이완으로 간 중국포로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포로가 된 2만 여 명 가운데 만4,000여 명이 타이완행을 선택했다.

미군 실종자 가족 '생사만이라도'
6.25 전쟁에 참가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은 미국 전역에 8,000명이 넘는다. 60년이 흐른 지금, 실종자의 부모는 대부분 숨졌고 형제 자매들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미국, '잊혀진 전쟁'을 알리다
미국에서 6.25 전쟁은 흔히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전쟁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있다. 

호주군, 가평을 기억한다
가평 504 고지는 1951년 1차 춘계공세 당시 중공군이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호주군 700여 명은 10배에 달하는 중공군을 맞아 사흘에 걸쳐 백병전을 벌였고, 이에 미군은 강력한 수비벽을 만들어 서울이 적에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호주에는 '가평'이란 이름의 길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중국, 호주 총리의 6·25 기념식 참가도 문제 삼나




-.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 3.8선 돌파후 무제한 쾌속 전진과 개고기의 추억
-. 개전당일 문산 32연대 1대대의 탄약불출 에피소드
-. 박격포와 57mm무반동총 (이봉조선생의 '분대장' 중에서...)
-.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슈레이만과 아일라_김은자씨의 이야기)
-. 지리산계곡의 까마귀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김지회와 비운의 여인 조경순 이야기)
-. 여순사건의 어느 교장 '송욱'
-. 보도연맹의 정체를 증언한다.
   보도연맹이란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거나 전향한 사람들을 모아 정부가 조직한 단체이다.
-. 두 간호 여고생의 적진 탈출 1 천리 [울프 독]   <1>  <2>  <3>
-. 구국의 영웅, 소년 전차병
-. 워커 중장의 비극과 불운
-. 남북 포로 조우(遭遇)때 생긴 돌발 상황

■ 백인엽대령의 희생정신 - 사단장을 역임한 후 다시 연대장으로 임명된 백선엽장군의 동생 백인엽 대령
개전 직전에 발발한 여수·순천 제14 보병연대 반란사건 당시 제12 보병연대를 지휘해 진압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후에 수도사단장에 임명된 백인엽대령은 8월 한달 동안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인 안강~기계 방면에서 포항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온 북한군 제 12사단과 766유격대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해당 지역을 사수한다. 이 북한군 부대가 바로 영화 '포화 속으로' 에서 학도병들이 포항여중에서 결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던 부대이다. 그리고 크로마이트 작전, 즉 인천상륙작전에 스스로 사단장에서 강등하여 한국군 보병 제17연대의 연대장으로 참가하게 된다.

김일성이 펼친 논리적 오류
1950년 12월 만포 북방 3km에 위치한 별오리에서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를 소집합니다.
남침 이후 6개월간의 작전 실패 요인을 결산하고 앞으로의 당면과제를 제시하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의 목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일성이 6·25 전쟁의 남침 작전 실패 책임을 김책·전우·김무정·김일·김열 등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 떠넘겨질 수 있는 책임을 회피함과 동시에 당 내부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군사·정치적 혼란을 타개하고자 ...

한국전쟁을 미국이 'Korean Conflict(한국분쟁?) or Police Action(경찰행동?)'으로 표현한 의미는?
1980년 이전까지 미국에서 보는 전통적인 시각을 보면 김일성은 스탈린의 꼭두각시로서 공산주의를 대표하여 대리전을 수행했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국가가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장소에 일어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충돌..즉 'Conflict'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로 쓰던 '동란'이나 '사변'도 비슷한 시각에서 쓰이던 단어 입니다.  김일성 집단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고 소련의 사주를 받아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난리'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Korean Conflict은 '한국분쟁'이 아닌 '6.25동란', 혹은 '사변'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왜 'Police Action'이라고 표현했느냐? 이것은 미군이 참전할 시 소련도 같이 참전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국제사회로 부터 참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트루만 행정부의 고민이 담긴 단어 입니다. 만일 미군이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을 대 놓고 떠벌여 대면 미국내부의 반대여론도 두려워 지고 무엇보다 소련이 참전할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북한을 국가가 아닌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려는 세력'으로 규정한 흔적이 보입니다. 지금도 외신에서는 유엔군의 평화유지활동을 'Police Action'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유엔군이 '경찰'이 되지는 않지요. 이것은 '평화유지활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정부에 국가가 아닌 괴뢰도당이 침공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미군이 참여한다는 명분을 뜻 합니다.

*,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법적으로 `전쟁'이라는 지위를 획득한 것은 한국전이 48년이나 지난 1998년이었다.




6.25전쟁 중 사용되었던 무기들


1951년 진해 전시육사와 그레이하운드 차륜장갑차


-. 6.25 한국전에 등장했던 전차들 [슈트름게슈쯔의 밀리터리와 병기]
-. 6.25 전쟁의 수호신 M26 '퍼싱' 중전차
-. 6.25의 또 다른 영웅, M46 "패튼"
-. 6.25 전쟁의 영웅, M1 개런드
-. 한국군 최초의 전차, M36 "잭슨"
-. 한국군과 미군의 주력 기관총, M1919A4
-. 공포의 폭격기, 하늘의 제왕 B-29
-. 하늘의 구급차, 벨 H-13 "수" 헬리콥터 [上]  [下]
-. 서울수복의 상륙 돌격 장갑차(LVT-3C)
-. 한국전의 미스테리 크롬웰 전차.


-. 6.25 한국전에 개입했던 중국 공산군의 전차
-. 북한군의 주력 분대기관총-DP
-. UN군의 제공권을 뒤흔들어 놓은 미그 15
-. 자유를 향한 북한 조종사의 비행 - 노금석 상위 미그15 몰고 귀순 (1953.9.21)
-. 아군을 위협한 'KS-12 대공포'







도올 김용옥 [역사를 말한다] - 한국전쟁, 동아시아 30년 전쟁
한국 현대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내용





6.25 그 후의 이야기들









-. DMZ 넘어간 6명의 미 탈영병
-. 국군 포로 김 진수씨의 50년 북한 억류기 - 아오지 탄광 폭파해버린 국군 포로들의 봉기 [울프 독]








■ 박정희 대통령과 한미동맹의 역사
■ 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한 박정희대통령의 유품

월남전 파병(1964.9 ~ 1973)





-. 60,70년대 무장공비들의 소련제 기관단총 PPS-43

■ '남침용 땅굴' (제1~4땅굴)  




●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오마이뉴스)

    1. 1949년 군사재판 
        좌익혐의로 무기징역... 재심서 '구사일생'
    2. 춘천 8연대 시절
        형님 친구 꾐에 빠져 남로당 가입
    3. 누가 살려줬나
        '박정희 리스트'로 고구마 캐듯 수사
        김창룡이 '구명'제안, 백선엽이 결심
    4. 만주행의 비밀
        긴 칼 차고싶어 만주 간 '교사 박정희'
    5. 군관학교·일 육사 시절
        "목표 위해 죽음 불사할만큼 성실"
        우등 성적으로 4년만에 '황군' 소위 
    6. 만주군 장교 시절
        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7. 1965년 한일협정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 박정희 ‘혈서’(1939)와 친일가요 ‘혈서 지원(1943)’
         만주군관학교 시절

    *. 백선엽-박정희-이승만 ‘3인방’의 인생유전
    *. 박정희의 부인들    

■ 이진삼 의원의 1967년 '北응징보복 작전'
-. 이진삼 의원의 1967년 '北응징보복 작전'의 재구성 [유용원의 군사세계]
-. 이진삼의원 인터뷰 - 몇십배 응징받을 수 있다는 점 北이 알게 해야 도발 막는다


1968년 1.21사태
-. 김신조 특수부대의 1.21 사태. 실록 - 유용원의 군사세계
-. 생생하게 전해 들은 김신조의 청와대 기습사건(1968.1.21) - 고성혁
-. 박 전 대통령, 1 ·21사태 이틀 후 공군에 북한 124군부대 보복 지시 - 권성근 [당시 공군 작전사령관]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10.30) 

◀ 무참히 살해당한 이승복일가.









8.18 도끼만행사건 (1976.08.18)  [위키백과]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은 대한민국에서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북한에서는 8.18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으로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조선인민군 군인의 도끼에 맞아 즉사한 사건이다. 그 미루나무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오래전부터 자라온 나무로서 남과 북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는 데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은 월남전에서 실전을 경험한 많은 병력과 최신예 무기를 다량 구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번이 통일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때마침 그 사건이 터졌는데 초기에 미 포드정부는 월남전 후유증으로 강경대응을 자제하였고 우리정부에 압력을 가합니다.

그 때 우리정부는 판문점도끼만행이라고 사건을 명칭화하며 신문에 북한군이 아서대위의 등에 도끼찍는 사진을 내보냅니다..미국유명신문들도 당연히 내보내고 미여론은 사람으로서 할짓이 아니고 두명이 비겁하게 등뒤에서 도끼로 자국민을 죽이는 사진에 경악합니다. 포드정부도 여론에 밀려 강경대응으로 취하나 비선으로는 우리정부에 전쟁은 절대불가라고 통보합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공병대로 위장한 공수부대를 조직(1공수) 미루나무제거 작업에 보내고 문제가 된 북한초소들을 공격 완파시킵니다.. 이에 김일성은 진짜 전쟁발발 위협을 느끼고 절대 응전불가를 명하고 몇 시간뒤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하여 6.25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김일성의 사과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정부도 미국측의 요청으로 수락합니다. 그 후에도 대치상태는 1년정도 계속 유지됐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은 전쟁을 원했으나 역사상 가장 멍청한 정부로 뽑히는 포드정부는 반대했으므로 우리나라 단독으로 전쟁하기는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당시 대치상황]

전쟁 가상하고 주한미군 가족들 일부철수 명령. - 수도권지역은 K16비행장과 오산비행장으로 집결,
북한 원산 앞바다 12해리 영해선까지 미항모 진출, 함재기 이륙해서 12해리선을 따라 위력시위,
휴전선상공 한미공군 F4, 공대지 무장달고 비행중 / 수원~강능선을 따라 B52 폭격기 폭격준비중,
한국군 훼바지역 부대들 휴전선 인근으로 북진배치 / 
주일 미공군 가네다, 오끼나와 주둔 미해병 한반도 이동 준비중.
6.25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김일성의 사과성명을 발표. 우리정부도 미국측의 요청으로 수락.

더 자세한 토론은 ▶ Bemil 1Bemil 2



아웅산 폭탄테러 (1983.10.9)  [위키백과]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폭탄테러사건이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 김동휘 상공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순직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사건 직후 대통령 전두환은 공식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 미얀마서 24년째 복역 아웅산테러 주범 강민철 - “남·북 어느 곳도 가기 싫다”  [2007.4.24 문화일보]
강씨는 사건 후 테러사실을 자백해 종신형을 받고 미얀마의 교도소에서 24년째 복역중이다. 당시 범인 3명 중 1명은 현장에서 도주하다 사살됐으며 나머지 1명은 사형을 선고받은 뒤 처형됐다. - 2008.5.18일 사망


KAL858기 폭파사건 (1987.11.29)  [위키백과]

◀ 김현희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大韓航空 858便 爆破事件, Korean Air Flight 858 Bombing)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가 1987년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사건이다. 사건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의한 공중폭발로 결론짓고 사건조사를 마쳤다. 북한은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있었지만, 2008년 10월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정부발표.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보잉 707기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으로 자살 하고, 김현희는 남한으로 압송하였다.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
수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각에서는 사망자들의 시체 미발견등으로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
-. 블랙박스가 발견되지 않음 (안기부에서 일부를 폐기하였다는 설 주장)
-.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고 사망자 시체, 유품이 발견되지 않음
-. 국가안전기획부(現 국가정보원)의 빠른 수사 종결처리
이에 대해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 규명위원회가 조사를 하여, 2006년 8월 그리고 2007년 10월,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조작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1987년 11월 29일 승객 115명을 태운 KAL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방콕과 최후 교신 뒤 실종.
1987년 12월 11일 KAL기 잔해 물체를 발견하였으나, 12월 15일 미국방성은 KAL기 잔해가 아니라고 보고.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실시. 안기부 주관으로 하치야 마유미 신상확인 조사 착수.
1988년 1월 15일 어느 한 여성이 TV기자 회견을 통해, 자신의 이름은 김현희이며,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와 대통령 선거 혼란 야기, 남한내 계급투쟁 촉발을 위해 KAL858기를 폭파하였다고 발표.
1989년 2월 3일 서울지검은 김현희에 대해 살인죄, 항공기폭파치사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
1990년 3월 27일 김현희에 대해 대법원의 사형선고.
1990년 4월 12일 김현희에 대한 사면 조치
1991년 6월 2일 김현희는 수기집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를 발간.
1992년 7월 1일 김현희는 수기집 《사랑을 느낄때면 눈물을 흘립니다》를 발간.
1997년 12월 28일 전직 안기부 직원과 김현희 결혼.
2004년 3월 23일 국가정보원은 KAL기 의혹을 제기한 책 《파괴공작》의 출판사 창해 대표에게 10억원 손해배상 소송 제기.
2004년 5월 22일 ~ 23일 KBS는 〈KAL858기의 미스터리〉를 방영하여, 수사결과에 대한 거짓부분을 밝힘.
2004년 6월 28일 법원은 국가정보원의 《파괴공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 판결.




 







■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江陵地域武裝共匪侵透事件)
1996년 강릉시에 북한 특수부대가 상어급 잠수함으로 침투한 사건이다. 이들은 한국군에 의해서 생포 내지 사살로 소탕되었지만, 북한 민중들의 식량난 해소를 위한 식량지원으로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던 남북한관계가 외교관계가 침체되었다.

 

사건일지(위키피디아)

1996년 9월 18일 A.M. 1:00분경 강릉시 강동면 동해고속도로상에서 택시기사 이진규(이후 1억 5천 가량의 포상금 지급)가 거동이 수상한자 2명과 동해상 해안가에 좌초된 상어급 잠수함 1척(길이35m,폭3.8m,무게300t )을 경찰에 신고 하였다. 좌초된 잠수함은 북한의 소형 잠수함으로 확인됨에 군,경,예비군 합동으로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수색,소탕 작전중 잠수함과 도주로 주변에서 중화기인 대전차 로켓을 비롯하여 M-16,AK소총,정찰용지도등 유류품 367종 4380점을 노획하고 조타수 이광수 (31세)를 생포하였다. 또 9월 18일 오후3시45분 아군이 공비의 예상 도주로를 헬기를 통해 수색하던 중 청학산 부근에서 무장공비의 사체 11구를 발견했다 이 것들은 동승했던 총책 인민군 대좌이하 정찰조원들에 의해 잠수함 좌초책임을 물어 사살한것으로 추정되는 사체들이였다. 

나머지 도주한 잔당을 추적한 끝에 정찰조장,잠수함장 13명을 발견 교전 끝에 사살하였으나 (강원도 괘방산,단경골,칠성산,보광동,왕산면 지역등에서 공비와 아군간의 교전 끝에, 그러나 안타깝게 무장공비 2명은 北으로 탈출한다) 아군 11명 , 경찰,예비군 각 1명 민간인 4명 도합 17명이 피살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국방부 결과 발표 실제로 더많이 죽음, 실제 사망자는 기밀이라 한다)  이후 10월 3월~9월까지 실시된 노인산 작전, 10월 9일 ~ 11월 3일 실시된 오대산 작전 , 11월 4~5일 연하동 작전으로 나머지 무장공비는 모두 색출,사살 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또 20여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그 후..  / 잠수함 무장공비 출신 이광수씨
-.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체험담


강릉 무장공비 침투 당시 MBC 9시 뉴스데스크



■ 北 임진강 무단 방류로 참변 [2009.09.06]
9월 6일 새벽 북한 황강댐의 기습 방류로 인해 임진교 부근에서 야영중이던 6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

 
시간대별 상황 설명과 남북한 관통하는 북한강, 임진강,한탄강의 댐

北 황강댐 통해 1억t 이상 흘려보냈다
북한군의 수공을 벌써 잊었나?










천안함 침몰사건  [위키백과]  [천안함 Story]  




2010년 3월 26일
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격침되어 침몰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병사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천안함의 침몰에서 인양, 조사 발표까지 대한민국 사회와 주변국의 관심을 끌었으며,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언론과 각계 인사들을 통해 다수의 가설 또는 의혹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남남갈등'이 깊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 '그것이 알고 싶다'로 돌아 본 천안함 미스터리. [이정환닷컴]
-. 천안함, 동북아 흔든 ‘지정학적 사건’ - [MB 3년, 한반도와 동북아] 냉전회귀 넘어 열전 방불케
-. 천안함사건 요약 - 천안함 Story
-. 천안함 침몰사건 ‘첫 재판’ 모두진술 프레젠테이션 (서프라이즈 / 신상철 / 2011-08-22)



■ 북한의 연평도 민간인 포격 만행   [위키백과]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에 북한이 대한민국의 대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한 사건이다. 이에 대한민국 국군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80여 발의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측과 북측의 군인 7명이 전사하였으며, 민간인도 2명이 사망했다. 남북간의 교전중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한국 전쟁 이후 이번이 처음으로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중국을 제외한 각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규탄했으나, 북은 남측에 책임을 넘기며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천안함 사건 이후로 벌어진 것으로 남북간의 갈등이 더 심화되었으며, 연평도 주민들은 대부분 섬을 떠나게 되었다.

-. 연평도 포격사태 보고서 [Bemil의 군사고문관] 
-. 북, 연평도 막장 포격의 속셈은?  [울프 독]
-.

정부의 대처는 너무나 무능했다.
-. MB, “北이 연평도 도발했을 때 못때린게 천추의 한 된다" - 2011.06.24
YTN이 보여주던 당시 지하벙커 화면에는 MB가 의자에서 좌불안석하며, 저거 어떻게 할 수 없어를 연발하고, 보좌관들은 우왕좌왕하더군요. 그 후에 기사를 보니 민간 보좌관들은 지금 당장 폭격하자하고, 군관련 보좌관들은 않된다 했다하네요. 어떻게 된게 강경 입장이어야할 군관련자들이 민간인들 보다 못한 안보관을 가지는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 직접 실행해야할 군인과 말로만 강하게 떠들어도 되는 사람은 다를수 밖에요. 당시 안보라인의 핵심 보좌관들은 대다수가 군 면제자들이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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