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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고려시대의 회화

고려 불화대전 - 700년만의 해후







ㅇ 전시유물 : 혜허(慧虛)필 <수월관음도> 등 108점

국내, 일본,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총 44개 처
  -. 일본 소재 고려불화 27점, 미국·유럽 소재 고려불화 15점, 국내 소재 고려불화 19점 등 61점,
  -.
중국·일본 불화 20점, 조선 전기 불화 5점, 고려시대 불상과 공예품 22점


고려불화는 잘 알려져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으로 손꼽힌다. 고려인의 높은 미적 수준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단아한 형태, 원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와 호화로운 금니, 흐르는 듯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선묘 등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미의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승화된 고려불교의 정신성과 고려인들의 숨결까지 함축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문화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이 특별전에는 고려불화 뿐만 아니라 동 시대인 중국의 남송~원대의 불화와 일본의 가마쿠라시대의 불화도 함께 출품되어 동아시아 불교미술 가운데 고려불화의 뛰어난 예술성을 폭넓은 시야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내에 소장된 고려불화 외에 일본・미국・유럽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려불화를 한 자리에 모음으로써 평소 한두 점 관람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고려불화 수십 점을 한눈에 비교하면서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센소지(淺草寺) 소장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지장보살도>, 오타카지(大高寺) 소장 <관경16관변상도> 등 출품작 상당수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특히 ‘물방울 관음’이라는 별칭을 가진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일본 현지에서도 공개하지 않아 일본 학자들조차 보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출품 기관은 국내의 삼성미술관 Leeum,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 나라국립박물관, 규슈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보스턴미술관, 프랑스의 기메박물관, 독일의 베를린동아시아박물관과 쾰른동아시아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박물관 등 총 44개 처에 달한다.

고려불화는 작품이 워낙 귀하기 때문에 한 곳에서 여러 점을 소장한 경우가 드물다. 총 44개 처에 달하는 국・내외 소장처와 협의하는 과정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많은 고려불화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어, 한국에 빌려주면 다시 돌려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소장자들을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하고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고 심지어 작품 운송을 코앞에 둔 시점까지 주저하거나 출품의사를 철회해 버리는 소장 기관도 있어 관계자들의 애를 태웠다. 한편 출품을 허락한 기관들은 ‘불화도 자기 고향에 한번은 가보고 싶을 것’이라는 말을 종종 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어렵게나마 국외 대여를 허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뒤 어느 때인가 흩어져 소장된 고려불화들이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특별전에서 함께 선보이게 되었다. ‘700년 만의 해후’라는 특별전의 부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처럼, 이번 전시는 고려불화들의 특별한 고향 나들이인 동시에, 우리 국민으로서도 평생 다시 만나기 어려운 반갑고 애틋한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의 구성은 주제별로 구분되어 있다.

제1부 ‘깨달음의 존재, 부처’에서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부처를 주존으로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정토신앙의 성행을 반영하듯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가 많다.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아미타삼존도>는 내영도來迎圖 형식, 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맞이하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관음보살이 허리를 굽혀 극락왕생할 사람을 연꽃에 태우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제2부 ‘중생의 구제자, 보살’에서는 불교 신도들에게 친근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주제로 한 불화들을 전시하였다.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은은한 녹색의 물방울 모양 광배 속에 서 있는 관음보살을 그렸는데, 관음보살의 자태는 늘씬하고 우아한 고려의 미인을 연상케 한다. 일본 단잔진자 소장 <수월관음도>에는 보타락가산의 암좌에 앉아 법을 구하러 온 선재동자를 맞이하는 관음보살의 엄숙하고 단아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3부 ‘수행자의 모습, 나한’에서는 고려 1235-6년에 그려진 <오백나한도> 연작을 선보인다. 현재 14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7점을 소장하고 있어 전 작품을 전시하며, 미국, 일본 등에서 대여한 3점을 더하여 총 10점이 전시되므로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의 대부분을 볼 수 있는 셈이다.

제4부 ‘이웃 나라의 불보살’에서는 고려불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중국과 일본의 불화들을 전시하여 당대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불교회화를 넓은 시야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1909년 코즐로프 탐험대가 하라호토에서 발굴한 12-13세기의 서하西夏 불화 3점은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품으로서,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와의 친연성을 통해 그 존재가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나 실물을 보기는 어려웠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번이 최초이다.

에필로그 격인 ‘전통의 계승’에서는 고려불화의 전통이 조선시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문정왕후가 1565년 회암사 중창시 발원한 400점의 불화 중 일부인 <약사삼존도> 2점도 전시된다.


<섬세함, 단아함, 화려함… '고려불화의 美'에 빠지다  - 한국일보 2010.10.11>



고려의 불교와 불교회화

후 삼국시대의 분열과 혼란을 918년 다시금 한반도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고려는 군소 호족들과 지식층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 정책을 실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사회 통합 이념으로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가 불교를 숭상하며 수도 개경에 10대 사찰을 건립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요시한 것과 대각국사 의천 등 많은 왕실과 귀족 가문 자재들이 출가하여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고려시대 불교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불교는 통일신라에서부터 시작된 각종 종파가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고 체제를 갖추어 국가 불교로서의 외적 성장 뿐 아니라 내적 발전도  함께 이루어 갔으며, 향도 등 각종 불교 결사의 활동으로 다양한 사회 계층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불고에 기대어 각자의 소망을 발원하였으며 사찰을 세우거나 경전, 불화를 조성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더하여 고려시대의 무르익은 귀족 문화와 세련된 취향은 고려불화와 같이 숙련된 기법과 귀한 재료. 오랜 시간의 정성과 노력을 요구하는 수준 높은 불교 미술품이 발달하는 배경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화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활발한 대외 교류를 통해 중국 송.원대 불화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160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실제 제작되었던 수많은 고려불화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이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미타불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을 통해 당시 유행했던 불교신앙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으며, 고려불화에 보이는 섬세한 기법과 높은 완성도는 고려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려불화는 불교가 국교였던 시대의 그림이다. 국가로부터 온갖 지원을 다 받아서 그린 그림일 것이다. 비단 바탕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했고, 문양과 윤곽선은 금가루를 아교물에 개어 사용했다. 섬세한 기법은 물론이고, 구도의 정신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그림이라 보는 순간 깊은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오늘날 고려불화로 알려진 그림은 일본에 105점, 한국에 12점, 그리고 미국.유럽에 16점이 전해지고 있다. 주로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고려 후반의 것들이 대부분인데, 아마도 거란의 침입, 몽고의 대란 등으로 그 이전의 그림들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종류별로 보면 탱화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 부석사 벽화 1점,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小屛 하나, 사경변상으로 되어있는 것 등이 있다.

1286년 제작된「아미타여래입상」, 동경 센소지(천초사) 소장의 「양류관음도」, 서구방이 1323년에 그린 「수월관음도」등은 고려시대 불교회화의 높은 수준과 독특한 성격을 특히 잘 보여준다.

고려시대 불화사들이 지향한 조형의지가 잘 표현된 이러한 불화들은 유연하고 곡선적인 자태와 금색, 청록 등 화려한 채색을 가지며 색을 뒷면에서 칠하여 앞으로 배어나오게 한 복채법을 사용하여 한결같이 유려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의습과 문양이 정교하며 자태가 단아하여 고려적인 특색을 짙게 풍긴다. 적색과 청색, 녹색의 극채색이 주조를 이루며, 밝은 빛을 주면서 동시에 장중한 느낌을 주는 금니를 베풀어서 금채의 반사에 의해 무한한 빛의 공간을 펼쳐주고, 이러한 빛의 반사효과로 해서 회화의 한계인 평면성을 극복해 낸다.


고려불화제작 기법

고려불화는 대부분 비단 바탕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하여 제작된다고 한다.
고려불화에 주로 쓰인 적색, 녹색, 청색은 각각 주사, 석록, 석청이라는 광물성 안료에서 나온 것으로 이들 안료는 원석을 가루 낸 뒤 맑은 아교물을 부어 여러 차례 거르는 방식으로 만들었단다. 금가루를 개어 만드는 금니도 고려불화에 많이 사용되었다한다.

안료 가루를 비단 위에 칠하기 위해서는 안료가 비단에 잘 붙을 수 있도록 접착제 역할을 하는 아교가 필요하다. 아교는 동물의 가죽 등에서 추출한 천연 접착제로 물에 녹여서 아교물을 만든 뒤 여기에 안교 가루를 개어 사용했다. 한편 바탕의 뒷면에 채색을 한 후 앞면에서 다시 채색하는 고려불화의 배채법은 깊은 색감을 살리고 안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 주어 고려불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 준다.




아름다움은 時空을 초월하고
염원은 生死를 뛰어넘는다.

겉으로 보이기엔 평범한 불화 같지만 그 불화를 들여다보면 작은 부처님의 모습들로 가득하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을까... 그리는 내내 바로 기도처럼 염원을 담아 낸 모습이 역력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런 명작을 소유하지 못하고 일본이나 외국이 대다수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결과에 대한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자기 자신의 문화나 미술품에 대해 몰랐고 경시했던 우리 자신이 아닌가 여겨진다.

임진왜란같은 격변기에 행해졌던 약탈과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등의 이유로 고려불화가 한국내에 존재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지만 , 고려불화가 소중하다고 의식을 했다면  애지중지 간직했을 것이고 국내에 상당수는 존재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홍준 교수 설명에 의하면 고려불화를 알아 준 것도 결국은 일본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도자기나 막걸리의 예 처럼)





고려불화는 원나라 침공으로 강화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부터 약 120년간에 걸쳐 제작됐다 (대부분 14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 이 짧은 시기에 제작된 그림은 전세계 160여 점밖에 남아있지 않는데다 그 중 10여 점만 국내에 있을 따름이다.

고려불화의 특징 중 하나는 색채다. 민병찬 전시팀장은 “동시대의 중국불화에 보이는 청색이 고려불화에는 보이지 않는 등 이웃나라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지역마다 나는 안료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붉은 빛만 해도 중국의 것은 조금 더 선홍에 가까운 반면, 고려의 것은 다소 어둡다. 조선 미술의 영향으로 한국의 미는 흔히 단순하고 검박한 것이 특징이라 알려져 있지만 고려불화는 눈에 띄게 화려하다. 특히 금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金泥)’로 표현한 영향이 크다. 중국이나 일본은 붉은 가사가 단색으로 표현되는 반면, 고려의 것은 당초문·모란문 등의 문양을 금니로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가사자락의 주름을 섬세히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요, 투명한 사라(紗羅·베일)에 직조된 무늬까지 그려 넣었다.

중앙박물관 미술부 배영일 학예연구사는 “물방울 무늬의 광배가 전신을 감싸 ‘물방울 보살’로 불리는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금니를 머리카락 한 올 짜리 붓으로 찍어 그렸으리라 추정될 정도로 그 섬세함이 극에 달했다”고 말했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보인다. 조선 전기까지 고려불화의 기법이나 도상이 전해지긴 하나 그 섬세함은 확연히 떨어진다. 고려불화의 발원문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임금은 하늘처럼 오래 사시고 왕비는 만년토록 오래 사시기를’이란 문구가 흔히 등장한다. 고려불화는 단순히 인간의 손이 그린 것이 아니었다. 호국과 성불의 염원이 그려낸 그림이었다.

(중앙일보 2010.10.12)


출처 : 즐거운 시간여행 / 한국의 美 / 그대에게 가는 길 /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문화 그리고 여행 


이외에도 상당히 여러군데서 발췌를 하여 일일이 다 적지를 못하였습니다.
부끄럽게도 남이 열심히 모아놓은 자료들을 허락도 없이 한 곳에다 최대한 모아보려했습니다.
자료를 모으다보니 상당히 공부가 되었고 다른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자위해 봅니다.
안타까운 모습도 너무 많이 보게되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제1부 ‘깨달음의 존재, 부처’


현존하는 고려불화를 주제별로 나누면 여래도, 보살도, 나한도, 경상변도 등으로 분류된다.
부처 그림은 비로자나불, 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아미타불도,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같은 정토계불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는 현세의 복락, 고난으로 부터의 구제, 극락왕생 등 현실적안 기원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부처를 주존으로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정토신앙의 성행을 반영하듯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가 많다.





비로자나불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62.0× 88.2 cm, 일본 후도인 소장

물방울처럼 생긴 원형 광배 안에 비로자나불이 한쪽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의 두광(머리둘레의 빛)과 법의(부처님의 옷)는 물론이고
'萬五千佛(만오천불)'이라 써진 윗부분과 화면 하단의 공간에는 수많은 화불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래 세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전같은 원형 안에 울긋불긋하게 그려진 얼굴이 바로 화불입니다.
'化佛(화불)'이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작은 여래의 모습으로 표현된 형식입니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스런 붓질이 들어갔는지 숙연해집니다. 
'만오천불'을 그리고자 했던 화공의 집념과 원력을 보고있자면...
비로자나불은 전 우주 어디에서나 빛을 비추는 참된 부처이며 화엄경의 주존불입니다.






비로자나삼존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23.0×82.0cm 독일 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가운데 대좌에 화엄경의 주존 비로자나불이 앉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양쪽에 서 있다.
이 그림은 금니(금물감)가 사용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
희게 보이는 부분은 거의 금니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비로자나삼존도로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불화라고 합니다.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16觀變相圖)


고려. 1323 비단에 색, 224.2×139.1cm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

이 작품은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그린 것으로 극락세계의 열여섯 가지 장엄한 모습을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면은 세로로 네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각 관을 나타내는 부분에는 붉은색 칸을 만들어 금니로 표기를 했습니다.
(금니는 고운 금가루를 아교풀로 개어서 만든 안료를 의미하고, 변상도는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서 묘사한 그림입니다)

물과 나무와 연못 등을 배경으로 부처와 보살의 정교한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졌습니다.




위 세부도의 하단 가운데 부분의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인이 왕비와 공주로
아마 이들의 시주로 이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겠느냐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루 만이라도 부처의 가르침을 행한 자는 마땅히
부처를 좇아 극락의 연꽃에 가리라.
수행이 적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말하지 말라.
만 개의 횃불도 지푸라기 불에서 나오는 것이니.

-<관경십육관변상도> 게송 중에서-


아미타여래 한분이 허공을 꽉 채우니
푸른 부처의 눈은 바다처럼 깨끗하네.
이처럼 가없는 부처의 모습을,
다만 白毫의 모습만 봐도 자연히 모두 보게되네.

-<관경십육관변상도> 게송 중에서-




미륵하생경변상도


고려후기, 1350 비단에 채색, 171.8×92.1cm 일본 지온인 소장


이 그림은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미륵불이 하생하여
세 번의 설법회를 열어 남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화면 중앙에는 의좌상(倚坐像: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형식)의 미륵 삼존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에 제석천, 범천 등의 천신과 십대제자, 십이신장 등이 크기를 달리해서 그려졌습니다.
아래쪽에는 두 용왕과 미륵불에게 귀의하는 왕족, 그리고 하단에는 사람들의 생활상
(가마를 메고 가는 사람들,
씨 뿌려 거두는 추수, 칠보가 떨어져 흩어져 있어도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모습 등 경전에 묘사된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삼국 이래 뿌리깊게 신앙되었던 미륵신앙은 미륵상생경에 의한 도솔천 왕생사상과 미륵하생경에 의한 용화수하성불의 이른바 메시아 사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은 극락왕생의 아미타 사상과 거의 흡사한 것이지만, 뒤의 것은 오랜 후세에 석가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미륵이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것으로, 가령 후삼국 때 궁예가 세상을 구제하러 강림한 미륵으로 자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당시까지 구제되지 못한 모든 대중을 성불시킨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도해한 것입니다. 일종의 교화용 경변상도이지만 본존 미륵불을 크게 클로즈업시켜 화면을 압도하도록 구성했기 때문에 예배용의 존상화적 성격에 가까운 그림입니다.


크게 2등분되는 화면의 상부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합니다. 상부 중앙에는 미륵불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불상 무릎 좌우로 두 협시 보살이 좀 더 크게 묘사되었는데 이 삼존은 삼각형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륵불 주위에는 보살중 10대 제자들이 좀 더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이 주위를 제석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미륵불의 머리 보주 위에서 올라간 광선이 허공으로 올라가 맴을 돌아 좌우 두 가닥으로 퍼져 나가는 곳에 구름 속에 싸여 있는 2층의 화려한 건물은 성불하기 이전에 거주하던 도솔천 궁이 분명하며 이 주위로는 상서로운 별과 달이 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이들 하늘 세계와 미륵불이 있는 지상세계를 흰 광선 모양의 둥근 광배가 분리시키고 있는데 불보살들이 발 아래의 청문대중과도 역시 구름으로 구획짓고 있는 점에서 당시 불화의 위계에 의한 계층적 구도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청문대중은 바둑판 모양의 지상에 좌우 대칭되는 구도로 묘사되었는데 오른쪽에는 남성, 왼쪽에는 여성이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꿇어앉은 남녀상과 머리를 깎고 있는 남녀상입니다. 꿇어 앉은 인물들은 2용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용왕과 용녀일 것이며 삭발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륜성왕과 왕비로 생각되고 기타는 신하들과 시녀들, 또는 미륵의 부모도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 장면에서는 삭발하고 있는 두 인물이 가장 크게 그려지고 있어서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은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난 후 전륜성왕 내외와 모든 신하 시녀 그리고 미륵의 부모를 위시한 일체 중생을 세 번에 걸쳐 설법하여 출가성불케 하는 내용을 도해한 것입니다.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고려시대, 123.0 x 57.0cm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고려 후기. 비단에 색, 100.5 X 54.2cm  일본 MOA 미술관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삼존도이다. 본존은 오른손 바닥을 내밀며 팔을 길게 뻗고
시선은 아래를 응시함으로써 왕생자를 맞이하는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아미타불과 보살의 얼굴은 경직되지 않고 생동감이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이는 시선 처리와
진행방향의 암시로 인해 마치 그림의 한 끝에 왕생자가 있는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고려불화가 육신부에 주선을 사용하는 데 비해 본존의 육신부에 주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점,
그리고 옷주름 표현에서 먹선 또는 한 단계 짙은 색선을 긋고 가장자리를 따라 가늘게 금니선을 덧그리는
관습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먹선 또는 한 단계 짙은 색선만 사용하였다는 점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또한 보통 고려불화에 그려지는 원형 문양이 원시적으로 형태만 원형으로 형성될 뿐 가장자리에 윤곽선이
그려지지 않는 데 비해,
이 불화의 원형 문양은 실제로 윤곽선을 돌리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도 훌륭하다.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비단채색, 103.0×68.0cm


이 그림은 연꽃을 밟고 서있는 아미타여래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역시 연꽃을 밟고 서 있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있습니다.






아미타삼존도


고려 후기. 117.3 x 60.2cm.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아미타삼존도


고려 후기. 111.2 x 50.9cm.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아미타삼존도


고려 후기, 비단에 색, 110.0*51.0cm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국보 218호


아미타불이 보살들을 거느리고 극락에 왕생할 사람을 맞이하러 오는 ‘내영도來迎圖’ 형식의 고려불화이다.
아미타불의 머리에서 뻗어나온 빛은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왕생자를 감싸면서
그가 아미타불에 의해 극락왕생의 길로 곧 인도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아미타불 앞으로 나와 왕생자에게 다가선 관음보살은 허리를 굽혀 그가 올라탈 금련화(金蓮花)를 내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서하西夏에서 그려진 아미타내영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관련성이 오래 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아래의 그림은 위의 그림과 주제와 구도가 아주 비슷한 서하의 그림이다. 이번에 같이 전시되었다.



▲ 아미타삼존내영도 서하西夏 13세기, 면에 색, 142.5*94.0cm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극락에 왕생할 사람을 맞이하러 오는 아미타삼존내영도이다.

나무 밑에 앉은 왕생자는 승려 차림으로 두 손을 합장하고 있으며,
그의 머리에서 마치 영혼과 같은 빛줄기가 위로 발하고 있다.

빛줄기 속에는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어린아이가 막 연꽃 위에 오르려 하고,
아미타불의 이마에서는 서기가 내려와 어린아이를 감싸고 있다.






아미타삼존도


부분도 (오른쪽 부분), 고려 1330년 비단에 색, 119.0 × 62.0cm 일본 호온지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아미타삼존도

고려 일본 가쿠린지(鶴林寺) 소장 중 도난. 일본 중요문화재


국내 절도범이 일본 효고(兵庫)현 가쿠린지(鶴林寺)에서 훔쳐 반입한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의 반환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법의 ‘선의취득’ 조항을 들어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아미타삼존도는 국내 반입 후 4~5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최종 구매자가 대구 어느 사찰에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기증받은 사찰은 도난당했다고 주장,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
붓다뉴스 2004.12.3)



日약탈 문화재 훔쳐 국내 반입 적발, 구속 기소

일본이 약탈해간 고려불화(佛畵)를 훔쳐 국내 반입한 문화재 절도사범이 한일간 수사 공조로 검찰에 붙잡혀 13일 구속기소됐다. 
무속인 김모(55)씨는 90년대 후반 어느 대학교수가 쓴 역사책에서 고려불화들이 왜구침탈이나 임진왜란, 일제시대 당시 약탈돼 
일본의 여러 사찰에 소장돼 있다는 내용을 보고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오기로 결심하게 됐다.

(중앙일보 2004.10.13)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

- 극락에 가길 기원하는 아미타불 -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파하는 부처로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쉽게 입에 올리게되는
법문의 부처입니다.
살았을 때 선행과 염불을 많이 한 사람은 임종할 때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로 맞이해간다는 '아미타내영도'입니다.



고려후기. 비단에 색. 190 *87.2 cm. 일본 교토 쇼보지(正法寺)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보존 상태가 좋아 당당하면서도 균형잡
힌 부처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 <아미타여래>의  붉은색 가사속에는 금니로 여러가지 연화원문을 세밀하게 그렸으며,
승각기에는 파도문을, 오른팔에 걸친 대의에는 운봉문을 그렸습니다.



佛像 배에 넣는 유물, 佛畵 뒤에도 붙였다

박은경 동아대 교수는 "일본 교토 쇼보지(正法寺) 소장 '아미타독존도'의 1999년 수리보고서에 따르면
화면 뒤쪽의 배접지를 제거하자 아미타여래상의 가슴 부근에 붙어 있는 종잇조각이 발견됐고,
거기에는 지름 10.6㎝ 크기의 원형을 중심으로 외곽에 보협인다라니경(經)이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었다"고 발표한다.

박 교수는 "복장물은 불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오장육부(五臟六腑)와 같은 것으로
이는 고려시대 불화가 불상처럼 예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위의 세부 그림과 함께 중국과 일본의 아미타여래도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도>, 중국 남송, 112,5×48.5cm, 일본 곤렌지소장 (좌)
<아미타내영도>, 일본 가마쿠라 시대, 159.4×84.5cm,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우)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

 


고려(高麗) 비단에 채색,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아미타불도


고려 후기 견본채색, 163×87cm, 일본 교쿠린인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화려하게 장식된 높은 연화좌 위에 설법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아미타불을 그린 작품
신체의 윤곽선은 붉은 선을 사용하고 음영을 주어 색감을 잘 살렸으며, 법의의 금니 문양도 매우 세밀하게 표현했다.

이 아미타불도는 일본에서는 석가모니불을 그린 그림으로 인식되어 일본에서 새로 그려진 문수보살도, 보현보살도와 함께
석가모니삼존도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삼존도를 보시면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도


아미타불도, 고려 후기, 비단에 색, 일본 교쿠린인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아미타팔대보살도 


고려 175.3 X 84.3  동경예술대학 대학미술관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173.1×91.1, 비단에 채색, 고려시대, 日本 京都 교토 조코지(淨敎寺) 소장

아미타여래가 여덟 보살을 거느리고 약간 오른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듯한 구도의 내영도이다.
얼굴은 약간 장방형이고, 입술
은 작게 묘사되어 있으며,
착의는 지장보살을 포함하여 모든 보살이 베일을 쓰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색채는 朱, 綠
靑, 群靑을 주조색으로 하였으나 몸체에는 금니를 사용하였고 윤곽선을 따라 朱로 약간 바림을 하였다.
문양은 본존의 가사
뿐 아니라 앞줄 네 보살의 베일에도 연화당초원문을 사용하였다.
몸체부분에 금니를 칠하고 모든 보살이 베일을 쓰고, 각 부
분에 치밀하게 문양을 묘사하고 있으며,
윤곽선 또한 확실하여 표현 의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상용에 이지러짐이 없고 배
색의 효과도 있어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제작시기는 작은 입술과 장식 과잉 등 형식화가 엿보여 14세기 중반으로 보여진다.
한편 관음보살의 왼발 옆에는 금니로 쓴
“佰全書”라는 명문이 있는데
여기서의 佰全은 이 그림을 그린 작가를 의미한다고 보이나,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
다.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두 보살이 있어서 이채롭다. 아마도 시주를 크게 한 인물일 것이란 분석이 있다.




아미타팔대보살도


아미타팔대보살도. 고려 1307년. 철 위에 금. 22.5 x 13.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석가여래도


고려후기 또는 중국 원, 비단에 색 217.8X112.7cm 미국 클리블랜드


높은 대좌에 앉은 석가모니불의 모습을 그린 불화
일본 세카도문고미술 소장<문수보살도>.<보현보살도>와 함께 삼존을 이루었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장식적 표현, 갸름한 얼굴, 긴 손톱 등이 독특한 인상을 준다

이 그림은 고려의 그림이 아니라 중국의 그림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약사삼존십이신장도(藥師三尊十二神將圖)


85.7×55.9, 비단에 채색, 조선시대 1477년, 일본 개인 소장

화면 중앙에는 높은 보단에 결가부좌한 약사여래가 있고, 그 아래 좌우에는 일광과 월광보살이 시립하였으며
다시 그 좌우측에 사천왕을 포함하여 모두 십이구의 신장이 배치된 전형적인 약사설법도 도상이다.

채색은 불은색과 녹청, 군청을 주조색으로 하면서 갈색계의 안료도 적지 않게 사용하여
변색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약간 어두운 듯 한 인상이다. 그러나 배색이 뛰어나고
금니의 사용이 효율적이며 더욱이 묘선이 유려, 섬세하여 매우 안정된 화취를 느낄 수 있다.

구도가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형상에 이지러짐도 거의 없는 화질이 뛰어난 완성도가 높은 보기 드문 우수한 불화이다.
특히 본존의 중심 문양이 당초원문이고 대좌나 그 앞의 불탁의 문양과 묘법 등이 고려불화가 연상될 만큼 유사하다.


이 그림은 화기에 의하면, 1477년 成宗의 누이동생인 明淑公主와 부마인 洪常이 발원한 것으로
이 외에도 “阿彌陀如來圖”, “熾盛光如來圖”, “觀音倚岩圖” 및 “觀音圖” 등을 함께 그렸다 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절대연대가 있는 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가장 빠른 지음원의
1465년 <觀經十六觀變相圖>보다 다소 늦기는 하지만, 특정 여래의 설법도로서는 유일한 15세기 불화이며
고려불화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초기를 대표할 수 있는 불화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이 그림은 고려불화의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조선적인 변모 또한 모색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초기 궁중화풍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사경변상도


고려 1334년, 34.0×11.5cm, 보물 제752호, 호림박물관 소장.

이 변상도는 충숙왕 복위 3년(1334)에 자선대부 장작원사였던 안새한이라는 사람이
부모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대방광불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사경한 책의 첫 부분이다.

그림은 화면 가운데에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그를 향해 합장하고 법문을 듣고 있는 보살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살들의 보관과 법의 등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필치로 정교하게 그렸고, 배경은 동일한 문양을 반복해서 채웠다.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경전들은 모두 필사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전을 베끼는 경서사의 공덕은 극히 강조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목판이 발달하면서 대부분의 수요는 판경이 담당하게 되므로 사경의 필요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제는 실용적인 면이 아닌 '경서사의 공덕'이라는 신앙적인 면만 강조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경들은 초호화판으로 만들어졌으니 글자는 금이나 은으로,
그림은 금니로, 바탕은 최고급 종이인 감지 같은 색지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화려한 사경들은 통일 신라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초호화판의 사경이 대량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사실, 고려의 호화판 사경들은 무수히 조성되었고,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연꽃 모양 향로 


고려 1077년 높이 14.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래(부처)의 의미와 분류

부처란 범어(梵語)의 Buddha(佛陀)에서 유래한 말이다. 또한 여래(如來,Tathagata ; 인고의 영향 없이 여여히 왔다가 여여히 갈 수 있는 존재)라고도 한다. 즉 각자(覺者)라고 의역하여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불(佛)은 곧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말이다.


(1) 석가여래(釋迦如來 :Sakyamuni).

샤가무니란 샤가(Sakya)족 출신의 성자(聖者)란 뜻이다. 인도 북부에 있던 카필라성(Kapila-vastu)의 별장인 룸비니동산에서 정반대왕의 태자로 태어나 29세까지 태자로서 세속에 묻혀서 생활하였고 출가 후에는 6년간의 고행 끝에 나이란자나(니련선하)강변에 있는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에서 성도(成道)하신 고다마싯달타(Gautama - siddhartha)가 곧 샤가무니이니 음역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하고 의역하여 대웅맹세존(大雄猛世尊)이라 한다.

그분은 자비와 지혜의 두가지 덕을 겸비하였고 도(道)를 깨닫고 널리 중생을 제도한 불교의 창시자인데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부처가 된 분이므로 석가여래를 응신불(應身佛) 또는 화신불(化身佛)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비로자나여래.아미타여래.약사여래 같이 인간 세계에 태어나지 않은 부처님도 있다. 이들 부처님들은 석가여래를 절대적인 부처로 믿는 소승교(남방 불교)에서 발전한 대승교(북방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들로서 법신불(法身佛)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본 여래는 석가여래 밖에 안계시므로 같은 상을 쓰되 손모양 만을 다르게 표현하여 부처를 구분하고 있다. 석가여래를 모시는 전각을 대웅전(大雄殿).대웅보전(大雄寶殿) 이라한다.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위치하나 간혹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나타나기도 한다.


(2) 비로자나여래(大日如來 :Mahavairocana)

비로자나여래는 마하비로자나여래(摩河毘盧遮那如來)라고 음역하고 대광명편조여래(大光明遍照如來)라고 의역한다. 이 부처는 전 우주 어디에나 빛을 비치는 참된 부처이며 석가여래는 지구상에 생을 받아 태어난 그분의 分身(분신)이라고 생각한다. 즉 부처의 진신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본체인 부처이고 그의 지혜의 광명은 주야의 구별이 있는 해보다도 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여래를 모시는 전각(殿閣)을 대적광전(大寂光殿).대광명전(大光明殿).비로전(毘盧殿).화엄전(華嚴殿)이라 한다. 불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불전이 클 경우 좌우에 아미타불과 석가불이 협시하는 이른바 삼신불을 모시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엄경의 주존불로 화엄종에서 주예배불로 존숭받아 크게 유행을 한 불상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 신라 이후 특히 9세기 중엽 경에 유행했다.


(3)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Amitayus,Amitabha)

아미타여래는 무량광여래(無量光如來)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라고 의역한다. 의역한 문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부처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무한한 세계에 까지 미치고 있으며 이 광명을 받은 자는 일체의 苦(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또 이 부처님는 지금도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에 계시면서 48가지의 큰 소원을 세워 중생을 대자비에 의하여 영원의 구원을 받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나무아미타불>을 외면 그 광명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여래를 모시는 전각을 무량수전(無量壽殿).수광전(壽光殿).극락전(極樂殿).미타전(彌陀殿)이라 한다.

정토사상의 발달과 함께 한국·일본·중국 및 서역까지 퍼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삼국통일시대부터 화엄종·법상종 등 여러 종파에서 섬겼으며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진다. 좌우 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나 시대가 지나면서 대세지보살 자리에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으며 또한 팔대보살을 봉안하여 군상(群像)을 이루는 예도 많다.


(4)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sajyaguru-vaiduryaprabharaja)

약사여래는 동방유리광세계(東方瑠璃光世界)를 관장하며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고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 하는 등 12 큰 소원(十二大願)을 세워 중생의 질병이나 고난을 구제하려는 부처이다. 다른 여래와는 달리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약사여래는 신장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신장은 약사여래의 분신으로 12대원에 따라서 나타난 신장이라고도 한다. 또한 약사여래의 뒤에는 십이지상과의 연관이 생겨 12신장의 머리 위에 12지상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 여래를 모시는 전각을 약사전(藥師殿).약광전(藥光殿)이라 한다.


(5) 미륵불(彌勒佛)

메시아로서 널리 알려진 미래불이 곧 미륵불이다. 사회가 불안하고 나라가 혼란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지상낙원을 꿈꾸게 된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복음적인 부처가 바로 미륵불이다. 후삼국시대의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한 것을 단적인 예 이다. 미륵사상은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 등 미륵정토에서 유래하는데 조직화된 것이 법상종이며 통일신라 때부터는 이것이 미륵사상 및 미륵존상을 주재했다.

원래 불상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 미륵은 보살이었다. 이는 도솔천을 주재하는 보살로, 56억 7천만년 후가 되면 석가불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해서 용화수라는 나무 밑에 부처님의 모습으로 내려와 세번 설법하여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이라 불렀던 것이다. 미륵불상이 의자에 앉아 있는 의좌세의 불상과 입상인 경우 용화꽃 봉우리나 꽃가지를 든 용화수인을 짓고 있다. 그리고 협시보살은 청광과 신광 보살 등 삼존불이다.




이 외에도 부처는 여러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부처는 석가모니 한분 만이라고 할 수 없고, 그 외에 많은 부처가 생기게 되어 심지어 중생이 모두 부처라고 까지 생각하게 된다.

사실 경전에 있는 부처만 해도 7불(七佛).천불(千佛).일만삼천불(一萬三千佛)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므로 항하사(恒河沙:갠지스강의 모래) 만큼 많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의 교리가 점차 발전하면서 필요에 의해 경전의 수도 많아지고 경전마다 달리 많은 부처가 등장하는 것을 교리의 통일을 위해 하나의 절대자로 비로자나불이 우주의 중심에 계신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자인 비로자나불의 빛이 비쳐지는 곳마다 각기 다른 부처님의 세계가 생기고 각기 다른 부처님이 등장한다.

이를 가장 간단히 나타내는 예로 사방불을 들 수 있는데 부처님의 명칭은 여러 가지 경전마다 다르나 근래에 와서는 동방 약사정토, 서방 아미타정토, 남방 석가정토, 북방 미륵정토가 통설로 되어 있는 듯하다.




광배(光背)

부처의 초인성(超人性)을 형용하여 불신(佛身)의 배면(背面)에 광명을 표현한 원광(圓光). 머리 뒤의 원형의 것은 두광(頭光), 등 뒤에 있는 것은 신광(身光), 몸 전체를 싸고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것은 거신광(擧身光)이라고 한다.



명왕

불법, 즉 불교의 3요소의 부처님과 부처님말씀인 경전, 공부하시는 스님을 지키는 수호자 격의 존재입니다. 금강역사와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나 할까요..

사랑의 상징 애염명왕, 악귀와 같은 분노의 모습으로 교화하기 힘든 극악무도한 중생들도 교화시키는 부동명왕 등이 있습니다.



그 밖에 불교에서의 여러 호칭들을 살펴보면,

1. 천      부 : 호법신


2. 사대천왕 : 부처님이 계신 주실에 이르는 길목에서 불법을 수호함


3. 금강역사 : 부처님 나라를 지키는 신장


4. 10  나한  : 석가세존의 10대제자


5. 팔부신중(八部衆) : 고대 인도종교의 재래 신들이 불교에 포용되면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불법을 수호하게 된 여덟 종류의 외호선신인으로 천룡팔부라고도 한다. 아래와 같은 팔부중은 모두 실존하지 않는 신들이다.


    ① 용 : 인도에서 비바람을 다스리는 위력 있는 신
    ② 건달바 : 음악과 향기의 신
    ③ 제석천 : 하늘의 신
    ④ 아수라 : 지옥의 왕 아수라
    ⑤ 긴나라 : 사람과 짐승의 중간인 신성한 동물
    ⑥ 야   차 : 불교의 수호신
    ⑦ 마후라 : 뱀의 나라 왕
    ⑧ 가루라 : 새들의 나라 왕




● 부처와 보살의 차이

부처와 보살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부처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의 경지에 이른 분을 말하고, 보살은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사람이다.

부처와 보살을 구분하는 쉬운 방법으로 머리 모양을 살펴보면 된다.
부처는 곱슬머리('나발')에 상투('육계'라고 부른다.)가 있으며,
보살은 머리에 보관(보석으로 장식된 관)이나 두건을 쓰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하실때 햇볕이 뜨거워서
달팽이들이 올라가서 햇빛을 막아줬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 부처는

전임 부처로 부터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받은 분이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연등불에게 공양할 적에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지명을 받았으며,
석가모니의 살아 생전에 미륵을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였다.

현재 미륵은 부처가 인간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수행하는 도솔천에서 수행중에 있으며,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7천만 년 후에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으로 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한다.



<부처의 예시 :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 좌상>


2. 보살은

아직 수행중에 있는 사람이다. 석가모니 시절에는 보살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수행을 통해 일정 수준의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들을 아라한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아라한은 수행을 통해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자기 중심이라면, 

불교가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上求菩提 下化重生 :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보살의 임무랄까...)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소승(작은 수레를 탄다)이고,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은 대승(큰 수레)이다.
보살들은 모두 한 가지씩 서원(이것을 지키고서야 해탈을 하겠다는)을 세운다. 

예를 들어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들을 모두 구원할 때까지 해탈을 미룬 분이다.


<보살의 예시 : 마산광산사목조관세음보살좌상>

출처 : 당골네 사랑방



(*. 여기 설명에서 부처와 보살에 대하여 잘못 해석된 부분이 있네요.

보살은 석가모니이전 부터 개념이 잡혀 있고 정확히는 부처 앞에 나아가서 부처가 되기를 서원하고
부처로 부터 보살의 계를 받은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즉, 부처가 되는 것이 정해진 사람이죠.

아라한에 대하여서도 잘못 적힌게··· 아라한의 범주에는 부처님도 들어갑니다.
아라한은 해탈에 이를 지혜를 얻은 자를 말하기 때문이죠.

부처님의 자기 소개는 길기로 유명한데 앞부분만 적어보면 

'아라한 정등각···(후략)'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출처 : 클리앙 )







 제2부 '중생의 구제자 보살'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水月觀音圖」- 물가의 기이한 바위와 아름다운 풀, 커다란 둥근 두광(頭光)을 배경으로,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속이 훤이 비치는 얇은 비단으로 몸을 감싼 모습으로 한 보살이 앉아 있다.
보살의 뒤로 가녀리게 뻗어 있는 두 그루의 대나무, 바위의 한쪽 끝에 놓인 정병(淨甁)과
버들가지는 이 이가 자비의 상징인 관음보살임을 말해주고 있다.


보살의 시선이 머무는 물 건너의 언덕 위에는 한 어린 동자가 두 손을 공손히 합장한 채 서 있으니,
이는 관음보살로부터 한 마디 진리의 감로수(甘露水)를 얻기 위해 멀고 먼 길을 달려 온 선재동자(善財童子)라는 구도자이다. 


동자와 보살의 정감어린 시선이 맞부딪치고 이를 상징하듯 커다란 둥근 광배가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다음 순간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서, 동자는 또 다른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길을 떠날 것이다.



수월관음도는 관음 신앙의 유행에 따라 사찰의 원통전의 후불화 또는 극락전에 모시는 불화로 많이 제작되었다.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준말. 대승 불교의 위로는 진리를 찾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상 가운데 

중생 제도를 몸소 실천하는 자비의 화신. 즉, 중생의 갖은 고난에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모두를 구제, 

안락한 세계로 인도하는 구제자이니, 관음보살만큼 진심에서 우러난 친근감과 열렬한 환영을 받은 보살도 다시 없을 것이다.

수월관음도는 우리 나라에서 아미타도와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진 도상인데, 선재 동자, 암굴, 염주, 공양자, 

보주를 든 용, 한 쌍의 청죽 등의 표현은 다른 나라의 수월관음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보타락가산에 살고 있는 관음보살을 선재 동자가 방문하여 청문하는 장면을 소재로 한 도상이 널리 유행하였다. 

아마도 의상이 친견했다는 낙산의 수월관음을 도상화한 것이 계속 유행하였던 것 같다.


관음보살도 가운데 가장 많은 수월관음도는 관음보살이 바위에 걸터 앉아 화면의 왼쪽 아래를 응시하며,
주위에는 대나무와 정병이 있고, 발 아래에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 가장 일반적이라고 한다.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10*57.7cm  일본 談山神社(단잔진자)

이 수월관음도는 여러 수월관음도 중에서도 화려한 금니와 고운 색채가 

놀라울 정도로 잘 살아 있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전체적인 구성은 화엄경 입법계품 가운데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구도여행을 떠난 선재동자가 

28번째 선지식인 관음보살을 방문하여 대자비의 가르침을 받는 장면이 주를 이루고, 

우측 하단에 법화경 관음보살보문품에 등장하는 재난구제에 대한 내용을 나찰귀,
우산을 쓴 사람, 맹수와 독사에 쫓기는 모습, 도적에게 화를 당하는 모습, 목에 칼을 찬 모습,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 화마에 휩싸인 가옥, 배를 젓는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재난을 만났을때 관음보살을 부르기만 하여도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경전
『법화경』「관음보살보문품」의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서원을 가진다. 

특히 관음보살은 대자대비를 서원으로 하는 보살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을 찾아 깨달음을 얻어 가는 과정을 묘사했다. 





이 그림은 이번 고려불화대전의 포스터에 메인으로 등장하는 수월관음도입니다.

고려불화대전에는 10여점의 수월관음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 두점이 
일본 단잔진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과
아래의 "물방울 관음"으로 불리우는 일본 센소지가 소장하고있는 작품입니다.

이렇게 멋진 국보급 불화들을 모두 해외에서 소장하고 있다니 안타깝습니다.



  









혜허(慧虛) 스님의 물방울 수월관음도

일반적인 수월관음도가 바위에 걸터앉은 모습인 것과 달리, 이 수월관음도는
은은한 녹색의 물방울 모양 광배 안에 서 있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어 ‘물방울 관음’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관음보살이 딛고 선 연화좌는 물에서 솟아나 있으며, 물결무늬는 잔잔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움직임을 보인다. 
발치 앞에는 꽃묶음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앞에는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다. 

한 손을 들어 버들가지를 늘어뜨린 관음보살의 자태는 매우 우아하고 늘씬하여, 고려 미인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화면 오른쪽에는 ‘해동 승려 혜허가 그렸다(海東癡衲慧虛筆)는 명문이 남아 있다.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420x615mm, 일본 센소지(淺草寺)

일반적인 수월관음도가 암좌에 반가좌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이 수월관음도는 물방울 형태의 광배 안에 서 있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다.

관음보살이 딛고 선 연화좌는 물 속에서 솟아나 있으며,
물결무늬는 먹선으로 구불구불하게 그어 잔잔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결의 움직임을 나타냈다.
발치 앞에는 꽃묶음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앞에는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다.




관음보살이 양손을 가슴 앞까지 올려 한 손에는 정병을, 한 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 자세는
게간지, 조쿄지, 도쿠가와미술관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의 관음보살에서도 볼 수 있는 자세이다.

그러나 필선이 매우 가늘고 섬세하며 채색을 강하게 하기보다는 차분하면서도
단계적인 하이라이트 효과를 주려고 노력하는 점 등
표현상으로는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인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표현기법과 형태가 단순, 경직, 공예화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참고한다면,

필선이 세밀하고 존상의 형태가 늘씬하고 부드러우며 색채의 단계적인 변화를 살린
이 수월관음도의 제작 시기는
여타의 작품들보다 상당히 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연대는 없으나 이 수월관음도는 작품의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해동치납혜허필(海東癡衲慧虛筆)'이라는 명문을 통해
분명한 한국 작품임을 알 수 있고,
승려 화가인 혜허가 그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 고려불화의 기준작이다.


또한 기존 불화들의 화기에서 '筆'의 의미가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인지
혹은 단순히 '화기를 기록했다'는 의미인지 다소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 그림의 화기는 비록 기존의 의문을 분명하게 판가름해 줄 정도는 아니지만,
'筆'이 '그림을 그렸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혜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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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 그림을 버들잎을 의미한다고 해서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로 불리우는데 
우리도 이 수월관음도를 '물방울 수월관음도' 아닌 '양류관음도'라 불러야한다. 고 주장...

오두의 문화비평 -


   
일본 센소지에 보관되어 있는 모습(좌)과 전시회 때의 모습(우)이다.
보존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원래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것이 안타깝습니다.


<유홍준 교수의 평>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려불화대전-700년 만의 해후'에는 내 평생에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던 

일본 센소지(淺草寺) 소장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사진>, 일명 물방울관음이 출품되어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일본에 고려불화가 많이 있다는 사실은 1967년 구마가이(熊谷宣夫)가 '조선불화징(朝鮮佛畵徵)'에서 

그동안 막연히 송나라 불화라고 알려진 70여점이 고려와 조선 초기 불화라는 사실을 고증하고부터이지만 

혜허(慧虛) 스님이 그린 이 수월관음도만은 일찍부터 알려진 고려불화의 명작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1978년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에서 열린 '고려불화 특별전'에 52점이 선보인 것은 

한국미술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회에 물방울관음은 출품되지 않았다. 

그리고 1981년 아사히신문사에서 발간한 '고려불화'라는 초호화판 화집에서도 물방울관음은 촬영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도 처음에는 센소지가 출품을 거부했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의 존재 여부만이라도 확인시켜 달라는 요청에 간신히 응했는데 

이 불화를 꺼내 왔을 때 관장과 학예원이 작품에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마음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물방울관음은 과연 천하의 명작이다. 

법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온 선재동자(善財童子)를 수월관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는 그림으로 

오른손엔 버들가지, 왼손엔 정병을 들고 서 있는 자세가 고아하기 그지없고 관음은 신비롭게도 물방울(혹은 버들잎)에 감싸여 있다. 

본래 명작들은 사진 도판으로 익혀온 탓에 작품을 직접 보면 무덤덤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물방울관음은 달랐다. 

작품 앞에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숭고하고도 아름다워라 고려불화여!"라는 찬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들어가 하염없이 바라보다 마지못해 박물관을 나왔다. (조선일보 2010.10.21)



이 물방울관음의 사진과 글은 문화 그리고 여행 이라는 곳에서 퍼왔으며 그 곳에는 더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서구방의 「수월관음도」


서구방의 <수월관음도 水月觀音圖>, 1323년, 고려불화. 165.5cm×101.5cm, 일본 개인소장

서구방의 「수월관음도」는 왼편을 향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유연한 자세, 가늘고 긴 부드러운 팔과 손
가볍게 걸쳐진 투명하고 아름다운 사라, 화려한 군의, 보석 같은 바위와 그 틈새를 흐르는 옥류,
근경의 바닥에서 여기저기 솟아오른 산호초,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배경의 긴 대나무, 투명한 유리사발 안에 안치된 쟁반과 그것에 꽂혀있는 대나무 가지,
얼굴과 가슴 그리고 팔과 발에 그려진 황금빛 등도 이 시대의 불교회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며,
화려하면서도 가라앉은 품위 있는 색채, 섬세하고 정교한 의복, 균형잡힌 구성 등도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관음보살의 옆에서 달빛 사이로 비추이는 이것,
버드나무가 꽂혀있는 이 병이 바로 정병이다.






백의수월관음도


백의수월관음도. 고려1310년, 419.5cm×254.2cm, 일본 경신사(카가미진자) 소장

이 그림에 있었던 화기(畵記)에는 1310년 김우문이라는 사람이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써있었다고 한다.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40여일간 전시될때의 모습이다. (당시를 소개한 조정육씨의 블로그)


이 작품은 1310년 5월에 충선왕의 후궁인 김씨의 발원에 의해 8명의 화원이 조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수월관음도를 발원한 충선왕의 후궁 김씨는 고려 충렬왕 숙비였다가 다시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의 숙비가 된 여인이다.

사람 키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크기. 그러면서도 그 지극한 화려 섬세함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최근 일본에서 엄청난 재력과 공력을 들여 이를 재현했는데, 도저히 그 맛을 따라갈 수 없었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가 100여 개. 그 중 80점 정도가 두루마리로 남은 탱화로, 대체로 14세기 것인데,
그 대부분이 일본에 있다. 이 불화는 왜 고려 불화가 일본인 수중에 남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1310년에 제작되었고, 1359년 왜구에 의해 약탈되었다.




사라에 금색으로 봉황과 구름문양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 세부도를 누르면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가 문득 바라보니,
그 산의 서쪽 산골짜기에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나무 숲이 우거지고, 부드러운 풀이 오른쪽으로 돌아 땅에 깔리고,
가지각색 아름다운 꽃을 찬란하게 장엄하였는데,
관자재보살이 깨끗한 금강석 위에 가부좌하고 앉아 계셨다.

- 華嚴經 入法界品 중에서 -


수월관음도는 『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보살의 가르침대로 행하기 위해 

53선지식을 찾아가서 보살도(菩薩道)를 배우는 내용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그 중 선재동자가 28번째로 찾아간 선지식이 보타락가산의 관세음보살이다.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은 인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이 곳에 머물면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전해진다. 

‘수월관음’이라는 뜻은 달이 높이 떠올라서 휘영청 밝은 가운데 관음보살이 물가의 벼랑 위에 앉아서 

선재동자에게 법을 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가미진자 수월관음도는 대부분의 고려 불화들이 규모가 작은 것에 비해 가로 254cm에 세로 430cm로 

한·중·일 세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하다. 에도시대(江戶時代)의 기록을 보면 

270cm에 500cm 였다고 되어 있어 현재 네 변이 조금 잘린 채 장황된 상태를 감안하면 

원화는 더 크고 장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관음보살이 화려하게 장식된 바위 위에 반가부좌한 자세로 부들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 

그 뒤로는 두 그루의 대나무가 서 있고 앞쪽 정병에는 버들가지가 꽂혀 있다. 


관음보살은 일반적인 수월관음도와 반대로 화면 왼쪽을 향해 앉아 있어서 선재동자도 오른쪽 하단에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수월관음도가 화면 오른쪽에 관세음보살이 앉아 있고 왼쪽 하단에 선재동자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이상은 조정육씨의 블로그에 있는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아래는 유마리(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씨가 조선일보(2009.10.16)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고려시대 대표작을 꼽으라면 불교회화와 청자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일반회화가 희귀하게 남아있는 상황에서 

160여 점이나 되는 고려불화는 그 자체가 모두 국보급 예술품으로서 당시 중국불화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만큼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보적인 미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불화의 백미는 수월관음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예가 지난 달 경남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특별전(4.30~6.7)에 

출품된 수월관음도(도판9 일본 경신사鏡神社 소장)이다. 


1310년(충선왕2)에 궁중의 여러 화원들이 이 수월관음도를 공동 제작하기 위해 거대한 한 폭(세로419cm 가로254.2cm)의 

비단을 사용하였다. 고려불화 중 가장 큰 대작大作인 동시에 왕실발원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수월관음도는 

숙비叔妃인 김씨의 발원에 의해 내반종사內班從事의 직책을 가진 궁중화가 김우문 등이 그렸으며, 

서구방이 단독으로 조성한 1323년 작作 수월관음도(일본 경도京都 천옥박고관泉屋博古館 소장)에도 내반종사란 직급이 보인다. 

따라서 이 두 수월관음도는 섬세한 필치의 명확한 형태묘사, 풍부한 금니의 사용, 아름다운 색채, 

치밀한 문양 등에서 궁중화원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충선왕의 총비寵妃였던 숙비는 언양군彦陽君 김문연金文衍의 여동생으로 과부였으나 1297년 충렬왕비인 원성왕후가 죽자 

그해 8월 세자(충선왕)가 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왕에게 바쳤으며 1308년 충렬왕이 죽은 후 충선왕이 숙비로 삼았다. 

이 수월관음도를 제작한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충렬왕 사후 1310년 특별주문에 의해 직조된 비단 크기라든가 여러 궁중화원이 

동원된 점으로 미루어 충렬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충선왕과 숙비 자신의 복福을 기원 했던 그녀의 권세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비단에색, 1630x847mm, 일본 나라국립박물관소장 


관음보살 우측에 투명한 받침 위에 먹선과 금선으로 윤곽선을 그린 정병을 배치하고, 좌측에는 두 그루의 

대나무를 배치한 점에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관음보살의 보관에서 나온 듯한 구름 위에 부처가 빛을 발산하며 서 있는 표현은 매우 독특하다. 


관음보살이 쓰고 있는 보관 부분은 탈락이 심해 화불이 그렸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보관의 아미타불이 구름을 타고 나타난 모습으로 표현된 것으로 추측되며, 

다른 수월관음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예이다.

관음보살의 윤곽선은 주선으로, 눈썹은 먹선으로 그렸다.
좌우로 치켜 올라가 사선이 된 눈과 수평으로 표현된 입술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어색하며, 

목의 삼도는 주선으로 표현하였다. 베일에는 흰색의 마엽문이 선명하고, 그 위에 S자형의 당초원문을 금니로 그렸다. 

군의에는 귀갑문을 촘촘히 그리고 그 위에 연화하엽문을 그렸다.

무릎을 꿇은 선재동자 앞에 펼쳐진 바다는 산호와 각종 꽃들로 채워져 있고, 바다에는 수파문(水波文)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 맞은편 하단에는 바다에서 여의주를 들고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역시 다른 수월관음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도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우리나라에 있는 3점의 수월관음도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3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1점이 추가되었다.)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192x598m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보물 926호

이 작품은 관음보살에 비해 배경이 되는 보타락가산의 비중이 비교적 큰 편이다.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있으며, 가슴에는 구슬장식을 늘어뜨렸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로 붉은빛이 감도는 염주를 길게 잡고 있다.
관음보살의 우측 바위 위에는 버느나무 가지가 꽂혀 있는 정병이 유리그릇 위에 놓여 있다.

관음보살의 좌측 후면에서는 길게 뻗은 청죽靑竹 두 그루가 서 있다. 관음보살이 밟고 있는 연화좌 옆에는 연꽃봉오리가 물에서 솟아 있고,
그 옆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으며, 붉은색의 산호가 자리하고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관에 걸친 사라는 흰 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마엽문 바탕에 봉황문과 당초원문을 금으로 그렸다.
치마에는 이중의 귀갑문 위에 연꽃과 연잎이 십자모양으로 교차된 연화하엽문을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채색, 묘선, 문양 모두가 고려불화의 기본적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작품으로 치밀하고 세련된 분이기를 지닌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이 수월관음도에는 관음보살이 사는 화려한 정토(淨土)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중앙에 표현한 관음보살은 바위에 왼쪽으로 비스듬히 걸터 앉아 선재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은 풍만한 얼굴과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으며, 가는 눈과 작은 입 등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인상이 풍긴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높이 쓰고, 몸에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옷과 화려한 팔찌·목걸이 등을 표현하였다.
등 뒤로는 한 쌍의 푸른 대나무가 보이고 바위 끝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꽃병이 있으며 그 주위를 둥근 광배(光背)가 둘러싸고 있다.
관음의 발 아래에는 붉고 흰 산호초와 연꽃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다. (문화재청의 설명)








보물 제1286호. 고려후기 비단에 색, 100.3 × 52.5 cm  우학문화재단소장
우학문화재단이 1994년 소더비 경매를 통해 구입 국내로 가지고 온 그림이다

고려 수월관음도상의 전형을 따르는 작품이다. 관음보살은 머리를 들고 있어 발 아래 선재동자에게 시선을 멎추지는 않고 있다.
전체적 윤곽은 먹선과 주선으로 그리고, 턱 아래로 이어지는 목에는 능형菱形(마름모모양)의 삼도가 선명하다.
좌우의 가슴과 상복부의 주름선은 주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손목에 유리구슬로 된 염주를 걸치고, 다시 엄지와 중지로 잡고 있다.
머리에서부터 늘어뜨린 사라에는 흰색의 마엽문이 선명하고, 그 위에 S자 형태의 당초문을 금니로 그렸다.

선홍빛의 치마에는 귀갑문 바탕에 연꽃과 연잎을 교차 배치한 연화하엽문을 비교적 큼직하게 그린 점이 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본과 유사하다.
관음보살 우측 바위 위에는 정병이 놓어 있고, 좌측 후면에는 대나무 두 그루가 배치되어 있다.
발 아래 선재동자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굽혀 관옴보살에게 예를 갖추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관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중생 앞에 나타나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수월관음도에는 그가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수월관음도는 관음보살이 오른발을 왼쪽무릎에 올린
반가좌 자세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선재동자를 굽어보고 있는 모습으로, 『화엄경』의 내용 중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관음보살의 등 뒤로는 한 쌍의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고, 앞쪽으로는 버들가지가 꽂힌 꽃병이 있으며
주위에 금가루로 원형을 그려 놓았다. 윤곽선과 세부 묘사는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베일의 바탕과 주름선은 백색으로 그린 다음 금가루에 아교를 섞은 금니로 겹쳐 그렸고 안쪽에는
고려문양의 특징인 연꽃덩쿨무늬를 원안에 넣었다. 입고 있는 치마는 붉은색을 칠하고 백색으로
거북등껍질 문양을 그린 다음 그 위에 먹선으로 덧그려 문양이 뚜렷하다.

이 그림은 1994년에서 1996년까지 보수작업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은 상태로 색채가 매우 양호하다.
전체적으로 안정되었고 고려 불화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수월 관음도의 시대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며,
섬세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설명)


<참고 : 유마리(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씨가 조선일보(2009.10.16)에 기고한 내용>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비단에색, 1062x548m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보물 1426호
태평양 박물관이 일본에서 구입한후 2005년에 보물로 지정을 받은 그림이다

보타락가산을 배경으로 한 고려 수월관음도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음보살의 시선은 선재동자를 향하고 있다.
관음보살은 통통한 얼굴에 정연한 이목구비와 턱 아래로 이어지는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다. 선재동자는 목에 장식을 하고
합장한 두 손에도 손목장식을 착용하고 있다. 관옴보살 우측 후면에 배치된 대나무는 안료가 탈락되었으나 흔적이 남아 있다.

선홍빛의 치마에는 귀갑문 바탕에 좌우로 연잎을, 상하로 만개한 연꽃을 배치한 연화하엽문을 시문하였다.
사라는 흰 선으로 마엽문을 표현하고, 그 위에 유려한 당초원문을 그렸다.
이러한 양상은 단잔진자(談山神社)본 쇼텐지(昇天寺)본, 하버드 아서 새클러 박물관본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관음보살 우측 바위 위에는 정병이 놓여 있는데, 정병은 흰색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하대와 중대 주구(注口)부분에
문양대를 두어 기하학적 문양을 시문하였다. 정병은 대부분 가채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수월관음도는 비록 조성연대와 작가가 명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변·퇴색과 수리 및 덧그린 흔적이 엿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 소재의 1323년 작 고려불화(서구방의 관음도)의 특징적인 화사한 색채와 세련되고 우아한 선을 구사한 인물 묘사 등
세부묘사에 있어서도 서로 유사한 점이 엿보여 예술성 높은 동일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면 구성이 충실하며 표현기법 역시 고려불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내에는 제대로 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가 2∼3점에 불과하다는 자료의 희소성, 나아가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두 점의
수월관음도와 비교하여도 질적인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재정보센터에 나와 있는 설명)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비단에색 1035x530 호림박물관

관음보살은 풍만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정연하게 표현되었고,
턱에서부터 가슴까지 이어지는 삼도에는 바림을 하여 볼륨감이 있다. 가슴과 상복부에도 같은 방식으로 바림하였다.
양손에는 흰 염주를 쥐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염주는 오른손에 들고 밑으로 늘어뜨린 모습으로 그리는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양팔을 의자에 앉은 자세로 양쪽에 놓고 염주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보관부터 발 아래까지 내려온 흰색의 사라는 탈락이 많아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위에 표현된 당초원문을 통해 사라를 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붉은색의 치마에는 선묘로 된 귀갑문 위에 연화하엽문을 비교적 크게 그렸다. 하단에는 기암괴석과 물결 위에 산호를 배치하였다.
선재동자는 합장을 한 채 관음보살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몸체에 비해 팔, 다리가 작게 표현되었으며 손목 장식을 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호림박물관 서울 강남 신사분관이 최근 입수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일반에 공개했다. 
14세기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세로 103.5cm에 가로 53.0cm. <<연합뉴스,2010.3.16 >>
 













수월관음도  고려 110.0X59.2  정가당문고미술관(일본)




일본 대덕사 소장의 수월관음도

 

고려 후기, 227.9cm×125.8cm, 비단에 채색, 일본 대덕사 소장의 <수월관음도>, 1323년.



이 수월관음도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그림에서 의상대사의 낙산사 전설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음보살앞에 포진해있는 공양(供養) 인물군상에 대해 '삼국유사'의 낙산 성굴설화에 의거해
용왕과 그 권속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관음의 발언저리 수면으로부터 솟은 연봉오리, 물가의 금모래, 홍백산호, 홍백환주, 공양화 등은 신비로움을 가미한다.

우측 하단에는 雙竹이 뻗어 존재감을 나타내며, 좌측 모서리엔 만개한 꽃가지를 부리에 문 靑鳥 한 마리가 

관음 쪽을 향해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포말을 일으키며 일렁이는 파도는 화면 2/3 높이까지 펼쳐져 있어 광활한 해면을 엿볼 수 있다.
우측 해수면 한켠에는 관음을 경배하는 선재동자가 연꽃잎 위에 떠있다.
한편, 해수면 위에 피어오르듯 瑞氣를 나타내고, 그 속에 供養人物群像이 관음을 향해 한쪽 방향으로 줄지어 다가가고 있다. 


이처럼 대덕사 작품에서 보이는 공양인물군상의 행렬은 전형적인 고려 수월관음도(암좌에 앉은 관음상과
이에 대응하는 선재동자를 묘사)와는 구분되는 이색적 도상으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과 더불어 2점만 존재한다.


출처 : 박은경(동아대·미술사)교수 <이례적 도상과 뛰어난 인물묘사…화엄과 법화의 융화>



진주자개는 전복조개 또는 가리비조개를 의미하였으며 그것은 그대로 '진주의 어머니'의 의미를 지녔다는 

그 '어머니(mother)'의 표현을 서양인들이 쓴데는 신화적인 바다의 여신 비너스를 의식한 때문이다. 

이러한 진주의 어머니 해신(海神)을 표현하여 해수관음보살로 표현한 것이다. 

진주자개 해신(海神)을 표현하면서 그 진주까지 표현한 것이 옥동자이다. 

그래서 해수관음보살상(海水觀音普薩像) 또는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을 그릴 때에는 

흔히 그 앞에 따로 진주자개의 진주처럼 따로 옥동자상을 그려넣었는데 그것이 선재동자(善財童子)이다.
(수월관음도에 대한 또다른 해석...
신라와 조개들의 신화)




미쓰이(三井) 기념미술관 전시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日 쇼군 소장품전에서…"최고급 명품 평가 입증"
(2014.10.20 조선일보)

700여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최상급 고려불화(佛畵)가 발견됐다. 일본의 개인 소장자가 소유하고 있던 

14세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도쿄 미쓰이 기념미술관 '히가시야마 보물의 미'전에 출품되며 세상에 나온 것이다.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16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유물이다. 


특히 달빛 아래 바위 위에서 반가좌(半跏坐)로 앉은 관음보살이 불법(佛法)을 일깨우는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는 

전 세계에 약 40점만이 남아 있을 정도로 희소성이 있는 그림이다. 


이 불화의 존재는 정우택 동국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 문화재계 인사가 최근 전시 소식을 듣고 달려가 확인하면서 알려졌다. 

새로 발견된 그림은 일본 다이토쿠지(大德寺)가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와 매우 유사하다. 

이 그림은 ‘가장 완벽한 미학’이라 손꼽히는 작품이다.

정우택 교수는 "다이토쿠지 수월관음도와 도상이 매우 흡사하지만 용왕 등 공양자들을 더 크게 그려 강조했고, 

다이토쿠지 그림은 꽃을 물고 있는 새를 화면 왼쪽 꼭대기에 그린 반면 

이 그림에선 새가 정병 아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등 약간 변형됐다"고 했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다이토쿠지 그림과 이 작품은 같은 화공이 그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닮았다"며 "방금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소장품전이다. 

그는 건축과 예술에 탐닉해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를 꽃피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해당 쇼군은 1449-1473년에 재위했다고 한다. 해당 시기는 임진왜란보다 백년도 더 전이다)


정우택 교수는 "아시카가의 소장품이라는 건 당시에 이미 고려불화가 최고급 명품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소식에 네티즌은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대단한 발견이구나”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우리 문화 수준 엄청나네”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일본에 이런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있을까” 등의 반응을 보였다.



 수월관음도 [水月觀音圖]. 고려시대의 불화. 82.7×144.5㎝. 비단에 채색.
일본의 중요문화재. 일본 성중내영사 오쓰시 소장.
전형적인 고려시대 관음보살도의 도상을 갖춘 그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44.5㎝, 가로 82.7cm. 일본의 중요문화재. 일본 성중내영사(聖衆來迎寺) 오쓰 시(大津市) 소장.
바위 위에서 반가좌한 관음보살의 자세·배경 묘사·선재동자(善財童子 : 求道의 보살 이름) 등 

전형적인 고려시대 관음보살도의 도상을 갖춘 그림이다.

관음의 신체는 경전에서 언급한 대로 용맹장부과 같은 풍만한 얼굴과 건장한 신체, 의젓한 자세로 표현되어 있어
다른 관음도에서 보다 남성적인 면이 느껴진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과 더불어 흰색과 담홍색이 두드러진 배색법은
김우문필 관음도(金祐文筆 觀音圖, 1310년 작, 일본 鏡神社 소장)와 유사하다. 

특히 치마와 베일의 끝단 등에 흰색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땅에 무릎을 꿇은 채 합장 예배하는 선재동자의 자세는 

서구방필 관음도(徐九方筆 觀音圖, 1323년 작, 일본 泉玉博古館 소장)와 일본 원성사구장 관음도(願成寺舊藏 觀音圖) 외에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점이다.

이 관음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옷의 문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의 관음상은 대부분 세밀한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진 붉은색 치마[裳]를 입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치마에는 무늬가 없어 예외적이다. 또한 투명한 베일에 수놓아진 원문(圓文)은 보통 1종류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꽃잎을 3매 조합시킨 것, 연화의 꽃과 잎을 조합시킨 것, 당초를 역S자형으로 조합시킨 것 등 

3종류의 원문이 사용되고 있어 특이하다.


풍만하고 의젓한 장자풍의 자태와 흰색과 담홍색의 조화에서 오는 은은한 화면에서 우아한 고려 불화의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
그리고 선재동자의 모습과 문양이 독특한 불화로 고려수월관음도 중에서도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작 시기는 14세기 중엽 이후로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수월관음도. 고려4세기 세로 113.7㎝, 가로 55.3㎝
관음보살은 어둠 속의 빛처럼 앉아 있고 발치에는 예배하는 여러 중생들이 작게 묘사돼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수월관음도는 본래 찰스 스튜어트 스미스라는 사람의 컬렉션이었는데 사후에 

그의 유족이 1914년 기증한 것이다. 이 그림은 원래 일본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明治) 유신(維新) 때 정부는 토속신과 외래신을 구분하는 '신불분리(神佛分離)' 정책을 채택했고, 

이때 많은 불상(佛像)·불화(佛畵)·경전류들이 소각·파괴되었다. 

현재 구미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의 불교 미술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수월관음도도 오랫동안 일본 불화로 여겨져 왔던 것으로 보아 메이지 유신의 와중에 미국으로 흘러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불화는 대부분 극락세계나 지옥구제 같은 내용이지만, 그중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복을 주고 

고통과 재난에서 구제해주며 나아가 극락세계로 이끌어줄 뿐 아니라 불법을 구하는 수행의 방법까지도 암시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물에 비친 달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하여'수월관음도'란 이름이 붙여졌고, 현재 40여 점이 남아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수월관음도는 세로 113.7㎝, 가로 55.3㎝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천연안료와 금을 사용해 그렸다. 

관세음보살이 바위 위에 책상다리[半跏] 자세로 앉아 있고 그 앞에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淨甁)이, 

등 뒤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화면의 기본 구도는 일반적인 고려 수월관음도와 큰 차이가 없으나, 

아래에 한 무리의 공양자(供養者)들이 그려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채색과 문양은 고려불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아주 섬세하여 천의 짜임 무늬가 보일 듯 말 듯 투명하게 표현된 베일, 

원색을 사용했으나 거슬리지 않고 부드러운 붉은 치마, 마치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한 듯 몸체와 문양 등에 사용한 

금니(金泥) 등에서 화려함보다는 고결하고 수려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공양자를 그린 고려의 수월관음도는 희귀하여 일본 교토(京都) 다이토쿠지(大德寺)에 한 점 더 있는 정도다. 

이 그림의 제작시기는 다이토쿠지 수월관음도보다 조금 늦은 14세기 중반쯤으로 짐작되는데, 

공양자들을 맞이하는 관음보살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양자의 극적인 만남에서 느껴지는 

화면의 긴장감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이 그림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일본 이외 지역의 고려불화가 처음으로 국내에 공개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대표유물 / 정우택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 / 2009.06.29 조선일보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비단에색 980x550mm 독일 쾰른동아시아박물관


보타락가산을 배경으로 한 고려 수월관음도상의 전형을 따르는 작품으로, 화면 전체에 관음보살의 모습을 크게 그렸다.
전체적으로 먹선과 주색으로 윤곽을 잡은 관음보살은 이목구비가 선명하나, 목으로 이어지는 삼도의 표현은 희미하다.
왼손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오른손은 염주 대신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다이토쿠지(大德寺)본, 쇼텐지(昇天寺)본, 센오쿠하쿠코칸(泉屋博古館)본 등 일부 수월관음도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유형이다. 


수월관음도에서는 보통 버드나무 가지가 정병에 꽃혀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나, 도쿄국립박묵관 소장 <아미타삼존도>,
MOA미술관 소장 <아미타삼존도>와 같이 관음보살이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할 때는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양손에 들고 등장하기도 한다.

보관에서 발 아래까지 늘어뜨린 베일에는 마엽문 대신 흰색으로 격자문을 그리고, 그 위에 운문과 봉황문 등을 금니로 그렸다.
화면 좌측 하단에는 선재동자가 무릎만 약간 굽힌 자세로 관음보살을 응시하고 있다.
관음보살 좌측에는 빈 정병이 투명한 받침 위에 놓여 있으나 등 뒤에 일반적으로 배치되는 대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고려(高麗)후기, 비단에 채색, 105x580mm,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관음보살이 화면 가득히 부각되었다.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아름다운 장식을 걸치고,
손에는 일본 단잔진자(談山神社) 소장 <수월관음도>와 같이 투명한 염주를 손목에 걸고 있는데,
엄지와 중지로 다시 한번 잡아 여러 줄의 염주처럼 보인다.

화면 하단 향좌측에 합장한 채 관음보살을 응시하고 있는 선재동자는 측면관을 하고 있어 얼굴을 한쪽면만 표현하였다.
통통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정연하다. 목에는 능형의 삼도를 두었는데, 삼도를 주선으로 표현하고, 

그 주위에 바림을 하여 음영효과를 나타냈다.

단잔진자 소장 <수월관음도>와 조라쿠지(長樂寺) 소장 <수월관음도>에서는 주선으로 삼도를 표현한 반면,
이 작품에서는 주선을 긋고 바림을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가슴과 배 부분도 선묘로 표현하고 그 주위에 바림을 하여 볼륨감이 있다.

하단에는 관음보살을 찾아온 선재동자, 화려한 꽃다발, 붉은색의 산호를 배치하여 서로 조화를 이룬다.
관음보살의 뒤에는 청죽이 있으며, 기암괴석은 녹청색으로 채색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이 작품은 청죽과 버드나무 가지의 녹색이 다른 작품에 비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배영일)



 

교토 로산지(盧山寺) 소장, 고려시대 불화인 수월관음도. 견본채색. 


(교토=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일본 교토 소재 오타니(大谷)대학박물관에서 동국대박물관과 공동으로 마련한

'한국불교미술의 명품' 특별전에 출품된 교토 로산지(盧山寺) 소장 고려시대 불화인 수월관음도. 

견본채색. 고려시대 전형적인 도상이다. 다만 상부에 토끼라든가 계수나무를 묘사한 달이 표현된 사례는 

이것과 장락사본, 그리고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본을 포함해 3점에 지나지 않는다. 

구도 여행에 나선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을 담았다. << 문화부 기사참조 >> 2009.10.28





고려불화, 14세기 중반
일본 태산사에서 소장한 작품으로 현재 오사카시립미술관에 기탁돼 있다.





천수천안(千手千眼)관음도


천수천안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관음도. 고려 후기. 비단에 색. 93.8 x 51.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이다.
중생의 고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 가서 그 고통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는 분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한 번에 한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천 명의 중생을 동시에 살피고
어루만져주기 위해
천 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졌다. 그래서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이다.

물론 여기서 천 개란 단순히 천 개라는 뜻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다.
그러니 무한 중생을 보살핀다는 뜻이다.







관음지장보살병립(觀音地藏竝立)도

2008년 3월 일본 나고야에서 그림 한 폭이 발견되었다. 바로 ‘관음(觀音)?지장(地藏)보살 병립(竝立)도’다.
정우택 동국대 박물관장이 나고야에서 한국의 불화를 조사하던 중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600백년 만에 나타난 이 불화는 한국만의 독특한 회화작품으로
고려시대 후반과 조선시대 초에 우리나라에서만 그려진 것이다.

특히 관음보살상의 온몸을 덮은 천의(天衣)가 전신을 덮는 흰옷으로 표현된 것은 처음이며
지장보살의 두건과 가사 등
모든 부분이 정교한 선과 뛰어난 색감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불화의 종교적 가치뿐 아니라 미적(美的)가치 까지 높이 보게된 순간이었다.









수월관음도의 관음보살은 바위에 비스듬히 걸터앉고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 있습니다.
이 불화 속의 정병은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는데 물방울 관음 옆에 '국보 92호의 고려시대 정병'과
'관음보살좌상'이 함께 전시되어 불화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금동관음보살좌상 (14-15세기,고려말 ~조선초,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에는 좀 드문 윤왕좌의 금동관음보살좌상으로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서 매우 화려하다.

참고 : 관음보살과 정병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왼쪽과 오른쪽 위는 천수관음이 손에 든 여러 지물 중 금강령과 금강저입니다.
금강저는 벼락을 형상화한 제석천의 무기이며 금강령은 종과 금강저를 결합한 형태의 것이지요.

오른쪽 아래는 관음보살경상(고려)인데 경상은 동경의 면에 선각, 또는 묵서 등으로 존상(尊像)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나라 경상은 주로 원형이나 방형 등의 동판에 관음상, 보탑, 사천왕 등을 많이 새겨 넣었다.
이러한 경상은 일상생활용구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와 상징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합니다. 







새롭게 확인된 고려불화인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수월관음도’(왼쪽 사진·103.4×52.1cm)와

보스턴 미술관의 ‘지장보살도’(78.8×38.2cm).

두 작품 모두 수준 높은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정우택 동국대 교수 제공



국보급 3번째 ‘고려 결가부좌 수월관음도’ 美서 확인


700년의 세월을 품은 고려 관음보살이 머나먼 미국 땅에서 확인됐다.

고려불화는 전 세계에 160여 점밖에 알려지지 않아 국제 경매시장에서도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가치가 높다.


미국의 유명 미술대학으로 꼽히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의 미술관이

희귀한 고려불화 1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은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퍼졌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 고미술상을 통해 이 작품을 입수한 미술관 측은 처음엔 ‘수준 높은 중국불화’로 여겼다.

하지만 아시아 예술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심스레 고려불화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 교수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수월관음도는 약 46점만 알려졌는데 대부분 반가좌 형태이고

결가부좌는 일본 오카야마(岡山) 현의 조라쿠지(長樂寺) 소장품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딱 2점밖에 없는 것”이라며

“RISD가 소장한 작품은 보존 상태도 좋고 예술성도 탁월한 명품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 외에도 문화재청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또 다른 국보급 고려불화가 2점이 더 발굴됐다.

미 보스턴 미술관이 1911년에 구입한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반가좌 수월관음도’(1929년 구입)의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

두 작품 모두 14세기 중반과 후반 고려불화의 전형적인 양식이 훌륭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그간 고려불화는 일본에 130여 점, 한국과 미국에 10여 점씩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미국에서 더 많은 고려불화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프리어 미술관은 내년 말 이 프로젝트의 성과를 인터넷을 통해 전면 공개할 방침이다.

(동아일보 2014.07.09)








'결가부좌 수월관음도' 등 고려불화 3건, 美서 새롭게 발견


'결가부좌 수월관음도' (사진)등 국보급 고려불화 3점이 미국에서 잇따라 발견됐습니다.
 
이번 '결가부좌 수월관음도'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 미술관이 소장한 14세기 전반 작품으로,

이전 작품보다 규모가 크고 세부 묘사가 탁월한데다 보존 상태까지 양호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특히 고려불화 가운데 양다리를 함께 접고 앉은 '결가부좌 수월관음도'는 

지금까지 2점만 확인됐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이번 발견은 지난해부터 미 워싱턴 프리어 미술관이 우리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진행한 

'미국 고려불화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업'의 성과로, 또 다른 고려불화인 14세기 후반의 '지장보살도'와 

14세기 중반의 '수월관음도'도 이 사업을 통해 처음 확인됐습니다.
프리어 미술관은 프로젝트의 성과를 내년 말 인터넷을 통해 전면 공개할 방침입니다. 

<사진 = 동국대 정우택 교수 제공>

(BBS 깨침의 소리 2014.07.09)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입멸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 전에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입니다.
지장보살의 불화는 독자적으로도 그려지지만 지장삼존과 권속, 시왕(十王)과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평결을 받는 염라대왕도 지장시왕중에 한 명입니다.




지장보살삼존도(地藏菩薩三尊圖)


98.4×50.1, 비단에 채색, 고려시대 14세기, 개인 소장

보물 1287호 지장삼존도(地藏三尊圖·사진)는 고려 불화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위치에 있는 명작이다.
예배 대상으로서의 지장보살도가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된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지장보살은 원정형으로 기암 위에 반가좌를 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무독귀왕이 경상을 받들고 정면을 향해 

서 있으며, 왼쪽에는 도면존자가 긴 석장을 양손으로 잡고 지장보살을 올려다보고 있는 구성이다. 

이 그림은 삼존형식의 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기암괴석의 전후에 배치하여 

지장보살을 둘러싼 공간에 깊이를 표현하였고, 약간 떨어진 시점에서 전체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화면이 확장되어 보여 마치 지장보살의 위대함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한편 단정한 지장보살의 모습, 위엄을 갖춘 무독귀왕의 분위기 그리고 친밀감 있는 도명존자의 표정에는 근엄함이 엿보이고 

가사와 법의, 의복에 그려진 금니 문양 또한 다소 경직되어 보이지만 매우 섬세하다. 

지장보살의 왼쪽 가슴에 살짝 엿보이는 승기지의 금구장식 표현은 14세기의 고려불상과 불화에서 자주 보이는 것으로, 

이 그림의 제작 시기를 고려시대 후기 즉 14세기 중엽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본래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중생이 모두 구제될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포기하여 삭발한 스님이나 

두건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명부(冥府)의 세계를 주재하면서 염라대왕, 평등대왕 등 시왕(十王)을 거느리며 

저승에 온 자를 49일간 심판하여 천상의 자리를 배정한다. 절에서 49재를 지내는 근거가 여기에 있으며 이 때문에 

지장보살은 구복신앙의 대상으로 인기가 높았다. 


부분의 지장보살도는 독존상으로 표현되거나 20명이 넘는 권속(眷屬)들을 지장보살 무릎 아래에 밀집시킨 

상하 2단 구도로 지장의 권위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장삼존도는 많은 권속 중 오직 비서실장격인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둘만 거느린 간명한 구성이고 고려 불화로서는 예외적으로 

좌우 대칭에서 벗어난 동적인 구도를 하고 있다.

금강대좌 위에 반가부좌를 한 잘 생긴 스님 모습의 지장보살이 왼손에 여의주를 들고 있는데 그가 항시 지니고 다니는 

고리가 6개인 육환장(六環杖)이라는 지팡이를 도명존자가 받들고 올려다보고 있다. 

무독귀왕은 금으로 만든 경전합을 정중히 모시고 지장을 보필하고 있는데 화면 아래쪽에는 사자 한 마리가 

혀를 길게 내민 채 넙죽 엎드려 있다. 무언가의 스토리텔링이 있다. 엄격하고도 경직된 것이 불교 도상 체계인데 

어떻게 이처럼 능숙하게 구도를 변형시킬 수 있었을까? 


것은 아마도 높이 1m의 이런 아담한 고려 탱화(幀畵)들은 사찰이 아니라 권문세족(權門勢族) 저택의 원당(願堂)에 

모셔졌던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모든 유물은 그것의 생산과 소비 과정을 살필 때 

그 예술적 가치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출처 : [유홍준의 국보순례] [82] 지장삼존도  - 조선일보 2010.10.27





지장보살도


지장보살도, 일본 네즈(根津)미술관 소장, 106.8X45.5cm

이 작품은 눈에 익숙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시중에 복사본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지장보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좋고 작품도 짜임새있는데다 보존상태도 그만합니다.

지장보살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처럼 민머리 형태를 한 경우와 위의 작품처럼 두건을 두른 형태가 있습니다.
서 있는 입상일 경우 한손에는 석장을 들고 다른 손에는 보주를 올려놓는 예가 보통입니다.
좌상인 경우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배치한 삼존도 형식을 취한 경우도 있고 9존도를 그릴 때도 있습니다.





지장보살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84.5 × 36.8cm 미국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으며, 특히 법의에 그려진 금니가 화려하게 잘 남아 있다.

두건을 쓰지 않은 민머리형의 지장보살로 오른손은 석장을 잡고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올려 손바닥 위에
보주를 올려 놓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의 부촉을 받아, 그가 입멸한 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6도(六道)의 중생을 교화·구제한다는 보살입니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되기에 충분한 존재이면서도 지옥에 있는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하기 전에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을 하신 보살입니다. 그런 보살이기에 많은 분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을 때 지장보살님께 그 영혼을 부탁드리겠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이 크게 번성했습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이 아닐까요?
죽음 너머의 세계로 떠난 사람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49재를 통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장신앙으로 발전했겠지요. 지장보살은 절의 '지장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사라 안으로 금니로 꼼꼼하게 그린 문양을 보면...





지장시왕도


관음보살 다음으로 널리 신앙되었던 것이 지장보살. 혼자서 그려질 경우 대체로 한 손에 보주, 

다른 한 손에 석장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며 그의 권속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지옥의 열 명의 왕인 

시왕(十王) 등이 그려지는데 지장보살이 시왕과 함께 그려지는 그림을 지장시왕도라 한다.

사람이 죽은 후의 세계를 관장하는 보살로써 천, 인, 아수라, 아귀, 지옥 등 육도윤회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룬 대비의 보살이니 어찌 인기가 없다고 하겠는가.



지장시왕도. 고려 143.5cm× 55.9cm, 비단 채색, 일본 경신사소장




 


지장시왕도. 보물 1048호. 고려 13세기. 111.1×60.4cm, 호림박물관소장.

심하게 회손된 이 그림은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부 화면을 압도하는 지장보살, 하부 협시들
(사자와 판관, 시왕,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등)의 대각선적 배치로
지장보살에로의 시선 집중 효과를 주고 있다.



지장은 명부의 주존으로, 시왕(十王)을 거느리는 보살로, 안락한 정토의 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널리 숭배되었다. 이를 도해한 것이 지장도. 지장의 특징으로는 두건을 쓴 경우와 

승형의 머리인 경우가 있으며, 손에 석장과 보주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관음보살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보살이었다.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땅의 신'에서 유래한 보살이다. 땅이 만물을 생장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지장보살도 지옥에 빠진 중생을 소생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다. 특히 지장은 육도의 윤회나 

지옥에 떨어져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심판해서 구제해 주는 명부의 구세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지장시왕도


지장시왕도. 비단에 색. 고려 후기. 109.0 x 56.8cm. 독일 베를린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地藏圖


高麗, 14世紀 비단·彩色 / 104.0×55.3cm 寶物 784 號. 호암박물관


커다란 신광(身光)을 배경으로 앉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본존으로 하고, 사천왕(四天王),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도명화상(道明和尙)과 무독귀왕(無毒鬼王)[또는 염라대왕(閻羅大王)] 등이 시립한 지장보살도이다. 

지장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썼고, 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지만, 석장(錫杖)은 들고 있지 않다.

고려불화의 지장보살은 대부분 경전의 묘사와 달리 이 그림처럼 두건을 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중국 돈황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지장보살상이 나타나고 있어, 양 지역 미술문화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려의 지장상은 대부분 오른손에 보주를 잡고 왼쪽 발을 내리고 있으며, 석장은 갖고 있지 않고 

두건 밖으로 귀를 내놓고 있어, 돈황불화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화면의 네 귀퉁이에 있는 사천왕은 본존의 왼쪽에 서서 보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多聞天)을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지국천(持國天), 증장천(增長天), 광목천(廣目天)이 위치하고 있다. 비파, 용, 여의주, 산개(傘蓋) 등 

라마교 계통의 지물(持物)이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아직 전통적인 사천왕 도상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존을 비롯한 존상의 얼굴은 둥글고 양감이 풍부하지만 약간 세속화된 모습으로 14세기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일찍이 일본으로 유출된 작품으로, 1978년 나라[奈良]국립박물관과 야마토[大和]문화관에 연이어 

출품되어 수준높은 고려불화로 평가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호암미술관이 구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왕도 (제5 염라왕)


고려후기 비단에 색, 61.2 × 45.0 cm 미국 개인소장 


열 폭으로 이루어진 시왕도 세트의 일부.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왕을 한 폭에 한 명씩 묘사하는 형식의 시왕도로
자극적인 지옥 장면이 적은 편이다. 그림을 잘 보면 염라왕 앞에 동물들이 두루마리를 입에 물고 탄원서(?)를 올리고 있다.
지옥은 동물처럼 가장 약한 존재를 괴롭히는 인간이 벌을 받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왕도(제4 오관왕, 왼족, 61.2x45.0cm) 과 시왕도(제5 염라왕, ). 고려 후기. 비단에 색. 미국. 개인 소장.





지옥의 열 명의 왕 - 시왕(十王)


제 1 진광대왕
[예수시왕생칠경]에 의하면 秦? 대왕은 명도에서 망인이 죽은지 처음 칠일의 날을 관장하는 관청의 명관이다. 망인들은 자신이 지은 죄업에 따라 죽은 후 칠일 째 되는 날에 이 대왕 앞에 나아가 죄업의 다스림을 받는다. 刀山지옥을 관할한다. 도산지옥은 칼로된 산을 다니면서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하여 칼산이란 뜻이다.

제 2 초강대왕
진광대왕의 처소에서 재판을 받은 후 명도에서 망인의 2 주째 날 심판을 맡은 대왕님이시다. 초강이라는 강가에서 관청을 세우고 망인이 강을 건너는 일을 감시하므로 초강왕이라고한다. 나하진을 건너 초강왕의 처소에 다다른 죄인들이 겪게되는 지옥의 장면들을 묘사하고있다. 화탕지옥을 관할한다 .
 
제 3 송제대왕
명도에 살며 망인이 죽은지 3 주째 일을 관장하시는 대왕님 이시다. 대해의 동남 옥초석 밑의 대지 옥에 거주하고있다. 대지옥 안에 별도로 16 지옥을 두어 죄의 경중에 따라 죄인을 각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맡고있다. 한빙지옥을 (얼음 지옥) 관할한다.

제 4 오관대왕
명도에서 오형을 주관하는 왕으로 망인이 죽은지 4 주의 일을 맡아서 관찰한다. 업칭이라는 저울을 가지고 망자가 죽은지 4주만에 도달하면 살아생전에 지은 업의 무게를 달아본다고 한다. 오관왕도 원래는 도교의 인물로서 염라대왕 밑에서 지옥의 여러 일을 맡아 보았으나, 불교에 흡수되어 시왕중 네번째 왕이되었다. 인간의 생전에 관한 모든 업은 사후 오관왕 앞에서 심판을 받게된다. 검수지옥 (칼로 된 숲)을 관할한다 .

제 5 염라대왕
항상 금강경을 머리에 이고 계시며 저승에 가서 명경대 앞에 서면 살아서 한 모든 행동이 보인다고합니다. 시왕중 다섯 번째 왕으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열대왕님 중에 한분 이시죠. 염라대왕은 야마, 염마 등으로 불리며 망인이 죽은지 5 주째되는 날을 관장합니다. 인도 고대 신화에 나타나고 있는데, 죽음을 상징하는 신이 었다가 승격되어 저승 세계의 왕이 되었읍니다. 지옥의 천자로서 권속들을 거느리고 지옥을 지배하며 나아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합니다. 발설 지옥 (혀를 뽑는 지옥) 을 관장합니다.

제 6 변성대왕
망자가 죽은지 6주째에 심판을 하는 대왕이다. 앞의 오관대왕과 염라대왕 앞에서 업칭이과 거울의 재판을 받고도 죄가 남은 사람이 있으면 다시 지옥에 보낸다. 사람들에게 악을 폐지하게 하고 선을 권장하는 왕이다. 독사지옥을 관할한다.

제7 태산대왕
망자가 죽은지 7주째 쯕 49일날을 심판하는 대왕님. 염라대왕의 서기이며 인간의 선악을 기록하기 위해 죄인이 태어날 곳을 정한다고 한다.이 왕앞에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등 육도가 있어서 그 죄업에 따라 육도의 문을 열어 가게한다. 태산왕은 본래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도교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열대왕중에 일곱번째의 왕이 된것이다. 대애지옥(大碍地獄)을 관활한다.

제8 평등대왕
망자의 백일을 관장하는 왕으로 팔열지옥 팔한지옥의 사자와 옥졸을 거느린다. 공평하게 죄업을 다스린다 하여 평등대왕 또는 평정왕이라 한다.

제9 도시대왕
망자의 일년되는 날을 관장하는 왕이다. 도제왕 또는 도조왕이라고도 하며, 사람들에게 법화경 및 아미타경 공덕을 말해주는 왕이라고 한다. 철상지옥을 관활한다.

제10 전륜대왕
시왕중 마지막 왕으로 명도에서 망인의 삼년상 되는날을 관장하는 일을 맡고 있다. 2관중옥사를 거느리고 중생의 어리석은 번뇌를 다스린다. 최후로 오도젼륜대왕 앞에 이르러 다시 태어날곳을 정한다. 흑암지옥을 관할한다.








마리지천도(摩利支天圖)


97.9×54.5, 비단에 채색, 고려시대 14세기, 일본 개인 소장

이 그림은 보살형에 팔이 여덟 개이고, 각 손에는 지물을 들고 있는 특이한 도상이다. 지물은 탑, 금강저, 침, 

그리고 줄과 정병인데 이는 『대마리지보살경』에서 말하고 있는 마리지천의 지물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마리지천은 소의 경전인 『마리지천경』에 의하면 불꽃을 신격화한 것으로 장애를 없애고 이익을 얻게 한다는 신인데, 

고려시대는 국가가 어려울 때 마리지천 법회를 적지 않게 열었다 한다. 따라서 이 상을 일본에서는 

“준제관음”이라 부르나 마리지천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 그림은 1924년 京都美術俱樂部의 경매도록에 실린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으나 근년 다시 자취를 

드러낸 희귀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채색과 얼굴 표현은 물론 중심 문양이 당초연화문인 점 등 

고려시대 14세기 전반에 속하는 아주 귀중한 도상의 그림이다.







고려불화 ‘마리지천도’ 日서 첫발견 (문화일보 1999-12-29)

고려 불화(佛畵)로는 국내학계에 첫 보고되는 유형인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마리지천도(摩利支天圖)’가 

일본에서 발견됐다. 고려불화 연구자인 정우택(鄭于澤)성강문화재단 부설 한국미술연구소 부소장은 

일본 교토(京都)의 개인소장가가 갖고 있는 14세기 전반 고려 불화를 실물로 확인했으며, 불상의 팔이 

여럿인 점 등을 미루어볼 때 ‘마리지천도’로 보인다고 밝혔다. 


불화는 비단 재질에 가로 52.8㎝,세로 99.4㎝ 크기이며, 연화대좌 위에 정면으로 앉은 보살이 8개의 팔로 

보탑,칼,정병,연화 등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는 1백50여점으로 대부분 아미타여래,수월관음,지장보살 등을 담고 있으며 

마리지천도는 처음이다. 마리지천은 혼란스런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신이며, 

거란과 몽골의 침입을 받았던 시기에 많이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지천(摩利支天) - 마리지(摩利支)·마리자·마리지보살·마리지제바라고도 하며, 양염(陽琰)이라고 번역한다.
산스크리트 ‘marici’의 음역이다. 이름의 의미는 형상을 볼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는 뜻이다.
항상 해 앞에 있으며, 만약 이 신을 염(念)하면 일체의 재액이 사라지고 바라는 일이 성취된다고 한다.
 
밀교(密敎)에서는 무사의 수호신으로 삼아 그 형상을 조각해 놓은 것이 많다.
이 천신을 생각하며 손에 인계(印契:밀교에서 손가락을 짜 모아 제존의 덕을 표시하는 일)를 맺고
다라니를 외우면 몸을 감추는 은형법을 잘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 116.6 X 52.8, 일본 정가당문고미술관






보살(菩薩)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陀; Bodhisattva)의 준말로서 覺有情(각유정), 大士(대사), 高士(고사), 개사(開士)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보살 즉 각유정이란 뜻 속에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그 처음은 '깨친 중생' 둘째는 '깨치게 하는 중생' 그리고 세 번째는 '깨칠 중생'이 그것이다. 즉 중생은 중생이로되 이미 불법의 진리를 깨친 중생으로 하여금 깨치도록 유도하는 중생, 그리고 그와 같은 보살과 같이 우리들도 앞으로 깨치게 될 부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보살은 대승사상에서 유래되는 것으로서 위로는 보리 즉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이른바 대승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는 무수한 보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보살은 부처님이 되기전의 존재를 말하는것으로 석가모니는 전생이야기를 하거나, 또는 성도하기전에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불렀다.



1. 관세음(觀世音) 보살

관세음 보살은 광세음(光世音), 또는 관자재(觀自在) 보살이라고도 하나, 중생의 모든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그 괴로움을 없애준다는 뜻에서 관세음(觀世音)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인도 범어로 아발로키데스바라(Avalokitesvara)라는 말을 번역한 말이다. 관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한다는 말로 이 세상 모든 중생의 온갖 고뇌의 소리를 다 들으시고 관찰하여 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관세음 보살은 아미타불을 받들고 계신 분으로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풀어주는 분이라 하여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하고 대자 대비를 본원력으로 하시는 분이기에 대비성자(大悲聖者)라고도 한다.

관음 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 보살이나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그 외에 석가불의 협시 보살로서도 표현된다. 손에는 감로수(甘露水)의 정병(淨甁)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며, 정병 대신 연꽃을 잡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머리의 보관 중앙에는 반드시 아미타불의 화신, 즉 화불(化佛)을 좌상 또는 입상으로 나타낸다.

이외에 백의관음(白衣觀音), 양유관음(楊柳觀音 = 水月觀音), 11면관음(十一面觀音), 성관음(聖觀音), 33관음(三十三觀音),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準提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다양한 관음이 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각 중생의 수준에 알맞은 모습으로 변해서 제도(普門示現;보문시현)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관음 보살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대세지(大勢至) 보살

대세지 보살은 줄여서 세지보살이라고도 하며 득대세지(得大勢至), 대정진(大精進)이라고 번역된다. 대세지란 말은 지혜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3도(三途;지옥,아귀,축생)를 여의고 위 없는 힘을 얻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대세지 보살이 발을 디디면 삼천 대천 세계와 마군(魔群)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근본 대의를 자비와 지혜로써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불교를 간략하면서도 단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아미타불의 바른편 보처(補處) 보살로 이마 위에 보배병을 얹고 계신다. 따라서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慈悲門)과 지혜문(智慧門)이 있는데, 이 가운데 관음은 자비문을 대세지는 지혜문을 각각 표시함으로써 이 양대 보살이 불교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보살이라 하겠다. 관음이 자비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면 대세지는 지혜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 즉 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비치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여의게 하고 무한한 힘을 주므로 대세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관음보살이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나타내는 데 비하여, 대세지 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머리의 보관내에 보배병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을 하기도 한다. 연꽃의 의미는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이미 성불한 것을 뜻하며, 그리고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는 차이가 있다. 또 합장의 수인(手印)은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아 가는 것을 뜻한다.


3. 문수(文殊) 보살

문수 보살은 문수사리(師利) 또는 문수시리(尸利)라고도 표기되는 보살로서 묘덕(妙德), 묘수(妙首), 묘길상(妙吉祥)으로 번역된다. 즉 석가모니불의 왼쪽에 위치하여 석가불의 지혜를 상징하는데 머리에 5계( ;상투)를 맺고 바른손에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꽃 위에 지혜의 그림이 있는 청련화를 쥐고 사자를 타고 있다. 이미 성불하여 용존상불(龍尊上佛).대신불(大身佛).신선불(神仙佛)이라 하며 또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 여래(普見如來), 현재의 북방 세계의 환희장마니보적 여래라고도 이름하고, 오대산(청량산)에서 1만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한다.

문수 보살의 형태는 문수 5지(智)라 하여 5계( )를 맺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대일여래의 5지(智)를 상징하는 것이다. 대체로 조각상에서는 다섯 가닥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는 오른손은 지혜의 칼을 쥐거나 왼손으로는 푸른 연꽃을 지니기도 한다. 그 좌대(坐臺)는 연화대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청사자(靑獅子)를 이용하여 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4. 보현(普賢) 보살

보현 보살은 문수 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또는 비로자나불을 협시하는 2대 보살의 한 분이다. 문수 보살이 석가모니불의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맡음에 대하여 보현 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오른쪽에 위치하여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고 있는 보살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3덕 가운데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역시 행덕이다. 문수 보살이 대지(大智)의 상징이라면, 보현 보살은 대행(大行)의 상징이다. 대체로 보현 보살의 형상은 연화대 위에서 합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손에는 연꽃을 쥐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문수 보살이 사자를 타는 데 대해, 보현 보살은 코끼리를 타게 된다.


5. 지장(地藏) 보살

지장 보살은 지지(持地), 묘당(妙幢)이라고도 한다. 도리천에서 석가 여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가 중생들의 근기(根機)를 관찰하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의 6도(六道)윤회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주고,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인도하여 극락 세계로 이끌어 주는 보살이다. 관음보살이 현실의 죄나 고통을 없애주는 보살이라고 한다면 지장보살은 사후의 육도윤회나 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구제해 주는 보살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은 성불이고 모든 중생의 성불을 부처님이 보장했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자신의 성불을 포기한 채 지옥의 고통을 받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을 때까지 영원히 보살로 남아 중생 구제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한 대원(大願)의 본존(本尊)이요 비원(悲願)의 상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한 뒤로부터 미륵 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뭇 중생을 교화하는 분으로 도리천에서 석가여래의 부촉에 따라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한다고 한다.

지장 보살의 형상은 머리를 깎은 민머리 아니면, 머리에 가운형 두건을 쓰고 있다. 가사(袈裟 ; Kasaya)를 입고 연꽃을 들고 있으며 또는 바른 손에 보배 구슬(보주 寶珠)을 들기도 한다. 혹은 석장(錫杖)을 짚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동자(童子)를 안은 지장 보살도 있다.

지장보살이 짚고 있는 석장은 유성장(有聲杖), 성장(聲杖), 지장(智杖), 덕장(德杖)이라고도 불리는데, 스님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지팡이로 비구의 필수 도구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형태는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붙어 있고 여기에 조그만 쇠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는 모양인데, 이 쇠고리의 수에 따라 4환장(四環杖), 6환장(六環杖), 12환장(十二環杖) 등으로 불린다.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인도에서는 산이나 들에 다닐 때 뱀, 독충을 쫓기 위해서 이것을 울리면서 걸었다고 하지만 법회와 걸식할 때에도 사용한다. 또한 석장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지물의 하나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주는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준말로서 사람의 뜻대로 어떠한 물건이든지 다 얻게 해 준다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진 구슬이다. 보주는 또한 악을 제거하고 혼탁한 물을 맑게 하며, 재난을 없애는 공덕이 있다고도 하고, 법(法, 진리)이나 불덕(佛德)에 비유되기도 한다. 마갈어(摩竭魚, 바다에 살며, 두 눈은 해와 같고, 입을 벌리면 어두운 골짜기와 같아서 배도 삼키고 물을 뿜어내는 것이 조수와 같다는 상상의 물고기)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도 하며, 제석천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부서지면서 떨어진 것,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가 변한 것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보주는 지장보살 말고도 여의륜관음, 마두관음도 지니고 있다.

한편, 지장 보살은 명부(冥府)를 주재하는 소위 시왕(十王)을 거느리게 하는 바 각 시왕이 주재하는 지옥(地獄)은 다음과 같다.


제 1 진광 대왕 ; 도산(刀山) 지옥
제 2 초강 대왕 ; 화탕(火湯) 지옥
제 3 송제 대왕 ; 한수(寒水) 지옥
제 4 오관 대왕 ; 검수(劒樹) 지옥
제 5 염라 대왕 ; 발설(拔舌) 지옥
제 6 변성 대왕 ; 도사(毒蛇) 지옥
제 7 태산 부군 ; 대애(大碍) 지옥

제 8 평등 대왕 ; 거해(鉅解) 지옥
제 9 도시 대왕 ; 철상(鐵床) 지옥
제10 오도전륜 대왕 ; 흑암(黑暗) 지옥


6. 제(諸) 보살

이외에도 수많은 보살들이 있어 팔만 사천 보살을 말하기도 하나, 우리 나라에서는 형상을 모시고 받드는 보살들은 대개 이상이라 하겠다. 천수경에서 나오는 천수 보살, 여의륜 보살, 대륜 보살, 관자재 보살, 정취 보살, 만월 보살, 수월 보살, 군다리 보살, 십일면 보살 등의 명호는 모두 관세음 보살의 덕화를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들이라 하겠다.

인로왕(引路王) 보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아 극락 세계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일체청정대해중(一切淸淨大海衆) 보살..... 모든 보살을 통틀어 부를 때 쓰는 말이다.










극락의 영원한 안락속에 모든 새생명이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아미타불도,

극락으로 오는 중생을 기다리다 못해 앞장서 허리를 굽혀 맞이하는 내영도...

달빛이 물에 비친 듯한 그림자 세상이라도 그속에서 고통받는 중생도 구제하겠다는 수월관음,

지옥에서 벌 받는 자가 한명이라도 남아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

바로 천상과 극락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고려불화전이었습니다... 


조정육씨의 블로그에서 옮긴 말입니다.




 



문화유산을 보는 눈

보살의 `시스루 패션`… 700년전 섬세美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Ⅱ - 아, 아름다워라 고려 불화여::
문화일보 2005.3.31


고려불화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 무렵부터로 얼마 안된 일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활약한 미술사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유고를 모은 ‘한국미술사급(및) 미학논고’ 중 고려시대 그림에 대해 쓴 글에서도 고려불화로 소개된 

것은 일본 도쿄 센소지(淺草寺)에 소장된 혜허(慧虛) 스님이 그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한 점뿐이었어요. 

나머지는 영주 부석사와 예산 수덕사의 벽화 등과 그 밖에 전해들은 내용들에 관한 것입니다.


“고려불화는 섬세하고 화려하다”거나 “섬려하기 그지없다”는 중국 원나라 곽약허(郭若虛)와 탕구(湯垢)의 평가에서 보듯 

문헌기록을 통해 국제적인 평가를 받은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은 알려졌어도 우리가 실물로 본 것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일본의 미술사가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가 1967년 ‘조선학보’ 제44집에 실은 ‘조선불화징’이란 글을 통해 

고려 및 조선초기 탱화 70여점이 일본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73년 동주 이용희 선생이 일본 속의 한국그림을 찾는 탐방기를 ‘한국일보’에 연재했는데, 

이번 강의의 제목 ‘아, 아름다워라 고려불화여’는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당시글의 제목이에요.


마침내 1978년 일본 나라(奈良)현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서 52점의 탱화와 17점의 사경변상도(寫經變 相圖)가 출품된 

‘고려불화 특별전’이 열려 고려불화가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동시에 대대적인 각광을 받는 전기가 됐습니다.


1981년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에서 ‘고려불화’라는 두꺼운 화집을 발간하고 같은 시기 중앙일보사에서도 

‘한국의 미’시리즈 중 하나로 ‘고려불화’편을 냈지요. 그 후 일본 규슈대에서고려불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우택 동국대 교수가 1997년 펴낸 ‘고려시대의 불화’가 현재 가장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려불화는 현재 일본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160점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우리에겐 제대로 된 게 한 점도 없었어요. 

그러나 1980년대 호암미술관이 두 점을 구입한 뒤 지난해 태평양박물관이 사들인 것을 포함해 현재 9점 정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고려불화는 일본 가가미진지(鏡神寺)에 있는 큰 탱화(높이 419.5㎝, 폭 254.2㎝)를 제외하면 대개 높이가 120~180㎝, 

폭이 100~120㎝ 정도되는 작은 두루마리(권축·卷軸) 그림이에요. 따라서 고려시대 사찰에서 어떤 특정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총 160여점 중 화기(畵記)가 있어 연도와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20점 정도지요.


고려불화는 1286년 만들어진 니혼(日本)은행 소장품 등 몇 점을 제외하면거의 모두 14세기 전반(1300~135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문신귀족과 무신귀족이 각각 고려의 지배층이던 시기에 화려하게 꽃핀 청자와 상감청자처럼 고려불화도 중국 원나라 간섭기 

지배층이었던 권문세족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권문세족들이 가문의 안녕을 바라며 당시 사찰에 지어놓은 

개인 원당(願堂)격인 암자에 걸어놓기 위한 특수한 형식으로 나온 게 고려불화란 것이지요.


고려불화가 일본에 많이 있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주문으로 수출됐을 가능성과 함께 고려말 왜구와 임진왜란 때 많이 

유출됐기 때문이며, 정작 일제강점기에 약탈된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지옹인(知恩院)과 사이후쿠지(西福寺) 같이 일본 교토를 중심으로 한 명찰들에 주로 소장돼 있는데, 제사용 초상화 등이 

100년, 200년이 지나 벌레가 먹고 습기가 차서 떨어지게 되면 새로 임모본(臨摸本)을 만든 뒤 불태워 없애버리는 우리와 달리 

일본에선 개칠(改漆) 외에는 고쳐 써온 전통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고려불화가 남게 된 것이에요.


불교와 관련된 그림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것으로 755년 만들어진 호암미술관 소장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에 실린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가 있습니다.


불경을 쓰는 형식 중 하나로 12세기가 돼서야 나오는 아코디언 접듯이 접게 된 첩(帖)의 형태가 아니라 두루마리 형태인 게 

특징인데, 맨 앞에 경을 수호하는 의미로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 같은 수호신상과 보상당초화문이 그려져 있지요. 

변상이라고 하는 것은 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바꿨다는 뜻입니다.


맨 마지막 부분에 제작 연대(1006년)와 함께 첫 번째와 두 번째 교정자의 이름이 기재돼 있는 감지(紺紙)에 금물로 쓴 

‘대보적경’이나 현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직지심경’과 ‘훈민정음’ 등을 보면 우리가 활자매체와 언어에 대해 각별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주변국 문화이면서도 강력한 문화력을 가질 수 있는 토대였음을 자부할 수 있게 되지요.


12세기 이후로는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서 7권짜리 ‘묘법연화경(법화경)’과 ‘대방�ㅊ蘆�側旅�80권본을 금물로 쓴 

사경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중 법화경을 금물과 은물로 써서 7층 보탑을 그린 일본 교고고쿠지(敎王護國寺) 소장 

‘법화경서사 보탑도’는 참 끔찍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비천상 등 일부 도상을 제외하고 지붕골 등 7층 보탑 전체가 

법화경 글씨로 이뤄진 이 작품을 보면 한국인이 규모가 작다거나 정치함이 부족하다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게 되지요. 

부석사와 수덕사 같은 고려시대 절에 일부 남아 있는 벽화와 강진 무위사의 조선초기 벽화는 고려시대 벽화 수준을 

역추적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족족자 형태로 된 고려불화의 도상은 전부 구복(求福)과 관련된 아미타신앙에 국한된 것이 특징이에요. 

‘아미타여래도’와 관음보살을 그린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이 대종을 이루 며, ‘정토삼부경’ 중 ‘관(觀)무량수경’과 미륵이 

중생을 제도해나가는 과정을 설명한 ‘미륵하생경’의 그림이 변상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경우 ‘단독상’과 관음·세지보살을 거느린 ‘삼존(三尊)상’, 8대 보살을 모두 거느린 

‘구존(九尊)상’에다 이들이 다시 각각 좌상과 입상으로 표현돼 모두 6가지 유형으로 그려지면서 당시 인기를 끌었지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3세기 말에 그려진 니혼은행 소장 ‘아미타여래상’과 달리 14세기 전반에 그려진 고려불화들은 

도상과 연꽃 등의 문양이 고려식으로 변형된 것이 특징입니다.


1306년(충렬왕 32년)에 그려진 일본 네즈(根津)미술관 소장 ‘아미타여래상’ 화기에는 당시 부자간 왕위 다툼으로 

원나라에 불려간 충렬왕과 충선왕, 충선왕의 왕비 등 세 전하가 하루 속히 귀국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권문세족의 문화 속에서 나와서 그런지 고려불화의 도상 중 얼굴부분은 인상이 하나같이 권위적인 게 특징입니다. 

다른 것은 다 마음에 드는데 굉장히 근엄하고 상하구도도 엄격하게 짜여 있는 얼굴은 제 마음에 안들어요.


또 초본(밑그림)을 놓고 윤곽을 그린 다음 채색하고 문양을 넣는 작업 등이 철저하게 분업으로 이뤄진 고려불화의 제작 

특성상 옷주름은 물결을 치는데 문양은 아무런 변화없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고려불화가 거의 몇가지 패턴으로 

계속해서 그려진 내력이기도 하지요.


모든 중생의 구제를 자임한 지장보살 외의 모든 보살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협시보살은 부처님 무릎 위로 머리가 

올라오지 못하게 그려집니다. 속살이 투명하게 비치는 보살들의 ‘시스루(Seethrough)’ 패션이나 모자를 썼을 때 앞 머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팔(八)자로 날리는 맵시까지 표현해 낸 섬세함도 대단하지요. ‘아미타삼존도 ’의 입상은 대개 정면보다 

4분의 3 방향의 측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호암미술관 소장 ‘아미타삼존도’는 세지보살 대신 지 장보살을 그려 구복신앙의 정수만 모아놓은 그림으로 고려불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물방울관음’으로도 불리는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 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일이 없고 

단지 사진만 전할 뿐입니다.


고려불화중 최고의 인기품목은 남인도 바다에 면한 보타락가산에 앉아 반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수월관음과 

그 앞에서 선재동자가 물음을 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있는 청자정병이 함께 나오는 

수월관음도의 정형은 1323년(충숙왕 10년) 내반종사(內班從事) 서구방(徐九方)이 그린 일본 스미토모(住友)은행 소장품이에요.


관세음보살의 전신을 감싼 흰 사라를 단순하게 흰색으로 칠하지 않고 미세한 흰선을 무수하게 반복적으로 그어 속살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패션이 되도록 표현하기 위해 들어간 공력과 섬세함은 고려불화가 당시 세계미술사에서 당당하게 

1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모든 명작의 공통점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것인데, 고려불화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 다이도쿠지(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는 동해 용왕과 의상대사의 낙산사 전설이 담겨 있는 게 특징입니다.


여의주와 육환장을 손에 든 ‘지장보살도’의 경우 단독상 외에 명부의 구세주답게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사천왕, 범천과 제석천, 시왕(十王), 판관과 사자 등 권속들을 거느린 도상이나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만 협시한 삼존도 등으로 그려졌지요.


인도 마가다국 빈비사라왕 부자의 갈등과 부처님이 일러준 극락세계에 도달하는 16가지 방법을 설명한 ‘관무량수경’서품 

변상도는 고려불화 중 가장 내용이 많고 화려합니다.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해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하생경’ 변상도와 함께 

그림에 담긴 건축과 병풍 등의 세부 내용들은 단순한 불화를 넘어 고려시대 풍속화로서의 의미도 크지요.


우리는 고려시대 하면 청자만 얘기하며 문화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14세기 전반기 고려사람들이 이룩한 불화는 당시 세계문화사 속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품목입니다. 

프랑스의 기메박물관과 독일의 베를린미술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 세계 유수 박물관에서 

고려불화를 소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제3부 ‘수행자의 모습, 나한’


'나한(羅漢)'이란 불제자로서 수행 끝에 최고의 단계인 아라한과를 얻어 

일체의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얻은 성자(聖子)를 말한다. 

Arahan, Arhat; Paragon of Spiritual Practitioners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 ; arahan)의 줄임말로 덕 높은 고승을 통틀어 아라한이라고 한다.
보살과는 달리 주로 실존인물로 부처의 직제자나 바로 아래 단계로 깨달은 고승들에게 붙이는 이름이어서
수많은 나한들이 있지만 십육나한, 오백나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나한들에 대한 신앙은 불교의 성행과 더불어 스님들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크게 성행하게 된다.
923년 태조가 양나라에 보낸 사신 윤질이 5백 나한상을 가지고 귀국하여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한 이후
1053년 문종은 신광사에서 나한재(羅漢齋)를 베풀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거나
국왕의 장수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농사를 위한 기우제의 목적으로 행해졌다.




석가삼존십육나한도(釋迦三尊十六羅漢圖)


高麗 14世紀 비단·彩色 .93.0×46.2 삼성미술관 리움


나한(羅漢)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깨달아 모든 번뇌를 끊고 참지혜를 얻은 성자(聖者)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비를 기원하거나, 도적을 물리치기를 비는 등등 여러 목적을 갖고 '나한재(羅漢齋)' 를 많이 행하였다.
이런 행사 때에 나한을 그린 그림이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석가여래,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삼존(三尊)과 16나한이 합쳐진 그림이다.
대원광을 배경으로 석가가 연화대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고,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는데,
각각 원형의 두광을 갖고 있다. 본존은 둥근 무늬가 그려져 있는 가사(袈裟)를 입었고, 왼쪽 어깨에 띠로 묶는 

매듭이 있으며, 좌우의 문수와 보현은 각각 연꽃 한 송이씩을 손에 쥐고 있다.

나한들은 화반(花盤)과 지팡이 또는 연꽃을 들고 있거나, 입을 가리고 웃기도 하며, 보자기 위에 서 있기도 하는데,
이들 다양한 모습의 나한들은 개성적이고 자연스러운 자세와 표정을 짓고 있다.






십육나한 중 첫 번째 나한 '빈도로존자상'


 




이 그림은 남송시대 그려진 16나한도로 대만의 고궁박물관, 일본의 상국사에 보관된 국보급 회화이다.
2점이 실전된 14폭이다.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오백나한도는 석가여래의 제자 500명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나한(또는 아라한)’은 공양받아 마땅한 자, 공양으로 복을 심는 밭, 진리에 상응하는 자,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난 자, 더 배울 것이 없는 자 등으로 불린다. 나한으로는 

석가모니의 제자인 십대 제자가 유명하며, 이들은 석가설법의 청중이며 불법의 전수자로서 성격을 띤다.

고려시대에는 나한 신앙이 성행하여 나한재(羅漢齋)가 자주 개최되었고, 나한상과 나한도도 많이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 나한재를 개최한 목적은 대체로 나한의 신통력을 빌어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전란이 예상될 때마다 열리는 등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그 외에 가뭄에 비가 내리기를 빌거나 국왕의 장수를 빌기 위한 나한재가 열리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미국과 일본 등에 나누어 소장된 〈오백나한도〉의 화기에는
나한의 힘을 빌어 국가의 평안과 국왕의 장수를 빌었던 당시 사람들의 기원이 반영되어 있다.





일본 교토 지은원(知恩院)에 있는
오백나한회상도(阿羅漢得果宴儀會像圖)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고려불화 ‘오백나한회상도’를 돌려 달라.”

고려 시대의 국가적 숭불 정책과 불교 신앙의 성행은 자연히 스님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나한 신앙도 

성행하였다. 국가적으로 거대한 나한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왕의 행차가 빈번했던 보제사의 금당은 나한을 주존으로 

모시는 나한보전이었다고 한다. 16나한, 오백나한 등 나한도도 무수히 그려졌지만,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고려는 국난이 있을 때 나한재(羅漢齋)를 올려 밖으로는 외적을 방어하고 안으로는 국태민안의 치세로 500년 동안 

통일 정부를 지켰다. 이러한 불교사상 유일의 고려불화, 오백나한도(阿羅漢得果宴儀會像圖)가 지금 일본 교토 

지은원(知恩院)에 보관 돼 있다고 한다. ‘나라 지키기 불교도 총연합회’는 고려 불교의 이 같은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에 있는 오백나한도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이 약탈해 가 416년 동안 보지 못하게 돌려주지 않고 있는데, 2003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개관기념으로 전시계획을 세우고 일본에 있는 그 작품을 빌려와 전시를 하고 돌려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강 이봉호는 국가적 수치라 여기고 사진을 입수해서 원형대로 복원하여 공개행사를 하고 있고, 

나라 지키기 불교도연합회는 그 작품을 반환해야한다는 취지에서, 이 사실을 온 겨레에 알리고 작품이 돌아올 때 까지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한다고 한다.





금석문연구가인 이봉호씨가 복원한 阿羅漢 得果宴儀會像圖 (아라한 득과연의회상도)

아라한연의회상도_원본.zip


그는 이 작품을 그리다 보니 '오백나한도'라는 명칭이 그림과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을 '아라한 득과 연의회상도(阿羅漢 得果 宴儀會像圖)'가 오히려 적합할 듯하다고 했다.
아라한이 득과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의 모습이라는 의미다. (자세한 내역은 여기로)


일본 지은원에 있는 오백나한도는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속에 약 2, 3cm 크기의 오백나한이 깨알같이 그려져 있다.
토굴 속에서 명상에 잠긴 나한, 치열한 참선 수행으로 마른 몸에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털북숭이가 된 나한, 

토론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나한들, 시원한 강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나한, 개울가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쪼그리고 앉아 승복을 빨아 헹구는 나한, 경전 꾸러미와 법복 옷가지를 둘러매고 수행에 

들어가려는 스님들의 행렬, 까마귀에게 모이를 던져주는 노스님 등의 모습은 소박한 스님들의 일상이자 

소우주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고려 대몽항쟁시기의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오백나한도의 화기(畵記)에는 '인병을 빨리 멸하게 하시고(隣兵速滅)', '국가가 평안하게 하시고(國土平安)',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토록 하여 주시길(令壽萬年)' 기원하는 등 국가와 국왕을 위한 축문이 적혀있었습니다.

을미(乙未)년이나 병신(丙申)년에 그렸다는 간지(干支)명이 있었는데
을미년은 몽고병이 내침한 시기인 1235년이고 병신년은 그 다음해인 1235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품된 오백나한은 원래 득도한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가로 45cm 세로 65cm크기에 각각 500폭으로 그린
일련의 작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와 일본 미국 등지에 16점만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엄숙한 영계(靈界)의 분위기에서 그려진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모습이 하나같이 평온하고 자비로운 모습이라면
자연이나 일상적 분위기에 그려진 나한의 면면은 고뇌하는 모습입니다. 그 처절한 모습이 마치
잔인무도한 몽고병을 물리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려 강도시기의 군신, 군민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오백나한 중 제31 왕상존자



오백나한도 중 제31 왕상존자, 54.5×40.5, 비단에 채색, 고려시대, 개인 소장

오백나한도 가운데 하나인 제31왕상존자의 그림으로, 자세는 앞서의 혜군고존자와 마찬가지로 약간 오른쪽 측면을 향하고
암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구성요소는 아래쪽에 신발만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 매우 단조롭다.
그러나 가사의 묘법이 거의 같으며 바위의 표현 역시 소위 이곽파 화풍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의 화기 부분이 거의 잘려나가 제작시기 및 목적을 단정할 수 없지만
화풍으로 미루어 보아 1235,6년에 그려진 일련의 오백나한도 가운데 한 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보필은 하였으나 비교적 형상이 뚜렷하고 특히 바위의 수묵적 묘법을 가장
잘 전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중 제백칠십 혜군고존자(第百七十 慧軍高尊者)
고려(高麗), 세로 : 54 cm / 가로 : 37.3 cm,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측면으로 앉아 있는 나한을 그린 작품이다.
큼직한 얼굴에 짙은 눈썹, 큼직한 눈과 입, 매부리코 등이 장자풍의 얼굴과 더불어 자비스럽고 후덕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다.
근엄하면서도 온후한 기풍이 넘치는 고승(高僧)의 모습이다. 넓은 가슴에 듬직한 체구를 하고 있다.

가사를 입었는데, 그 옷주름이 바람에 휘날리듯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옷주름이 번잡하지 않으며 옷깃, 소매끝 등에
짙은 먹칠을 하여 농담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두 손을 모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선정인(禪定印)의 수인(手印)은 고승의 명상하는 자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나한은 넓은 바위에 앉아 있다. 뒷편에 보이는 작은 바위 위에는 향상(香床)에 받쳐진 향 그릇이 있다.
어깨 뒤로 암벽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신체의 윤곽선이나 각 의습선이 단순하면서도 먹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수묵 초상화(水墨肖像畵)의 전통과도 관련된다.

이 그림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함께 전해지는 나한도 중 제427존자의 후기에 의하면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 전해오던 것인 듯하다. 이곳 지방 귀족들의 발원에 의해 시주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백나한도 중 제234 상음수존자, 고려 후기, 55.1cm×38.1cm, 비단 채색, 일본 개인 소장.




오백나한도 중 제464 세공양존자, 고려 1255-6, 비단에 옅은 색, 52.7x40.5cm,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아래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오백나한도이다.



오백나한도 중 제153 덕세위존자 조선, 1562, 비단에 색, 44.5 x 28.4cm, LA카운티박물관








 







 












세 번 절하고 고개 들어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


센소지 주지가 수월관음도를 펼쳤다
물방울 안에 서있는 관음보살 유려한 자태에 절로 나온 찬탄
세 번 절하고 합장을 했다 화려함과 우아함
그동안 우리가 잊었던 고려 문화의 정수였다


나는 10여년 전 호암갤러리에서 개최한 '고려국보전'에서 고려불화를 처음 만났다. 보관(寶冠)을 쓰고 사람 키의 두 배를 훌쩍 넘는 4m 길이의 관음보살의 웅장한 자태에 압도됐다. 그것도 이음매 없이 한 폭의 대형 비단에 그려져 있는 게 신비로웠다. 오른팔에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걸쳐져 우아함을 더한 사라(베일)며, 불도를 구하는 선재(善才)동자에게 보내는 보살의 자애로운 시선까지….

그것은 고려 충선왕 왕비였던 숙비가 8명의 궁정 화가를 동원해 700년 전인 1310년에 그린 '수월관음도'였다. 나는 이 불화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일본에서도 한 해 38일만 공개한다는 사가현 가가미진자(鏡神社)의 그 그림을 내 눈에 담고 아로새겼다. 금니(금가루)로 장식된 고려불화의 화려하고 우아하며 또한 섬세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 전통문화의 특징을 과연 '소박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후 우리 문화의 정수라고 하는 고려불화가 왜 고국을 떠나 이토록 외국에 흩어져 있는 것인지에 대한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2년 전 내가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에서 고려불화 특별전을 하자고 했다. 고려불화는 지금 전 세계에 남아있는 게 160여점가량인데 국내에는 고작 10여점만 있을 뿐이다. 일본에 130여점, 미국과 유럽에 1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간혹 외국에서 고려불화를 몇 점 들여와 특별전을 연 적은 있었으나 많은 작품을 한데 모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외국에 있는 소장자나 박물관들이 얼마나 협조해줄지 걱정부터 앞섰다.

우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프랑스의 기메 박물관 등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이들 박물관에는 한국실이 있는데다 협조 관계가 있어 흔쾌히 보내주겠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아직 한 번도 원본을 내보인 적 없는 작품이 있는데다, 절에 있는 고려불화들은 '신앙 대상'이지, '관람 대상'이 아니라며 쉽게 응하지 않았다. 결국 관장인 내가 직접 일본까지 가기로 했지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일본 나고야 도쿠가와 미술관은 대여는커녕 관람조차 어렵다며 방문을 사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도쿠가와의 '대망(大望)'이란 소설이 많이 읽힐 정도로 유명하다"고 인사하자, 도쿠가와 후손인 관장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아미타 팔대 보살도'등 2점을 보내달라 했는데 1점은 보관상태가 나쁘다며 화엄경을 대신 내주기로 했다. 이것은 우리가 알지도 못했던 유물이었다.

고려불화 명품 중의 명품을 갖고 있는 도쿄의 센소지(淺草寺)를 찾아갔다. 이곳의 '수월관음도'는 일본 내에서도 좀처럼 공개하지 않아 한국인으로 실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지 스님이 내어 온 수월관음도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세 번 절한 다음 무릎을 꿇고 합장했다. 물방울 광배(光背) 안에 서 있는 관음보살 앞에 찬탄이 절로 나왔다. 관음보살이 딛고 선 연화좌는 물속에서 솟아나 있었고 물결무늬는 먹선으로 잔잔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결을 보여주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처럼 힘 있고 세밀하고 유려한 선, 고구려를 이은 고려가 내게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주지 스님은 "불교 신자냐"며 묻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이렇게 경배할 정도라면 그림을 보내줘도 소중하게 다룰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절에서는 "한국에서 문화재 환수 분위기가 있어 잘못하면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불안해했다. 일본 정부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도쿄국립박물관이 보증을 서줘 700년 만에 현해탄을 건너오게 됐다. 보물 중의 보물 수월관음도가 고향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불화는 그 기원을 서하(西夏)로 보고 있지만 그동안 서하시대 진품을 본 학자들은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소장한 서하시대의 '아미타내영도(來迎圖)'를 특별히 요청했고, 마침 우리 박물관에서 기획한 한국미술 특별전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열려 유물 귀국 때 아미타내영도를 만나는 행운도 따랐다. 마침내 44개 박물관·미술관에서 보내온 60여점의 고려불화로 고려불화대전을 열 수 있었다.

고려불화전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한국 문화의 특징이 검소함, 소박함이 아니라 오히려 화려함과 우아함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흔히 한국문화의 특징을 소박과 검소함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역동성과 색채감, 백제 금동대향로의 정교함과 우아함, 신라 금관의 섬세함과 균형감을 떠올려 보자. 삼국시대의 이러한 전통이 고려로 이어져 화려하고 우아한 고려불화와 고려청자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많은 고려불화가 외국에 나가게 된 이유로는, 일부는 왜구가 약탈해가기도 하고 일부는 일본의 요청이나 구입을 통해 넘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G20 정상회의의 첫날 리셉션과 만찬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게 된다. 세계 각국 정상 33인은 한국 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고려불화도 함께 감상할 기회를 갖는다면 그 화려함과 우아함, 섬세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조선일보 20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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