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귀비의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한복판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 망국의 한을 담고 있는 사적지다. 사적지로 지정되는 바람에 주변 개발이 제한돼 인근 주민들에게 눈엣가시로 미움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휘원에 들어서면 작은 능을 연상시키는 정자각과 작은 숲이 함초롬히 숨어있다. 이곳은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이 서려 있어 슬픔이 묻어나오고 있다.
영휘원은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가 잠든 곳이고, 숭인원은 엄 귀비의 아들이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맏아들 이진(1921~1922)의 무덤이다.
명성황후가 있던 옛 홍릉 경역에 있는 두 원은 지금은 1만6000여 평에 불과하지만 한 때는 이 주변 전부가 영휘원 영역이었다.
엄 상궁과 아관파천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실질적인 국모역할을 했던 엄 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철종 5년(1854) 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왕후의 시위상궁이 된다.
못생기고 뚱뚱했다 전하는 엄 상궁은 후에 황귀비가 된 후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양정의숙과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못생긴 궁녀에 불과했던 엄 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샀고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엄 상궁이 32세 때의 일이다.
궁녀 나이로서는 늙은 편에 속했던 엄 상궁의 어떤 점이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가진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그녀의 두뇌와 지략을 의지했던 듯싶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명성황후에게 엄 상궁이 내쫓긴 지 10년 후인 때였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 상궁이 있었다.
엄 상궁은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 출입을 했다. 일본의 서릿발 같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두 채의 가마로 궁을 드나들며 경계를 늦췄던 엄 상궁은, 1896년 2월 11일 대담하게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을 가마에 태우고 러시아 공관(아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 사건이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은 엄 상궁이 러시아 공관과 친러파, 친미파와 은밀하게 연결하며 계획하고 실행했던 대사건이었다. 최대의 볼모였던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으로 탈출해버리자 일본은 당황했다.
조선을 두고 강대국들이 벌이던 치열한 쟁탈전에서 고종을 확보한 러시아와 미국이 득세하게 됐고 고종의 아관파천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됐다.
이듬해,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 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들을 낳는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 상궁은 황귀비로 책봉된다.
이 아기는, 순종이 등극하자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1897~1970)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이 등극하자 자손이 없는 순종은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고, 영친왕은 황태자가 되자마자 11살의 어린 나이로 동경으로 볼모로 끌려간다.
영친왕의 비운은 여기서 출발한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 귀비와 고종은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가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비는 1911년 7월 20일(양력) 58세로 눈을 감는다.
고종과 순종실록은 일제가 편찬한 기록이라 신빙성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순종4년 7월 2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영친왕이 급거 귀국하지만, 일제는 장티푸스로 사망해서 보면 안된다고 접근을 막아버려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도 볼 수 없었다.
홍릉 경역으로 장지를 정하고 죽은 지 열흘 뒤인 8월 2일 엄비의 상여가 대궐을 출발하자 고종과 영친왕은 영성문 밖에서 곡을 한다. 엄비를 의지했던 고종의 충격과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으리라.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품을 떠난 뒤 꿈에 그리던 어머니의 죽음을 맞은 영친왕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날 오시에 하관을 한 엄비는 영휘원에 잠들게 되고 장례를 마친 지 3일 후인 8월 5일, 영친왕은 일제의 재촉으로 다시 동경으로 떠난다.
고종(1852~1919)은 9남 4녀를 두었지만 성장해서 혼인한 아들은 명성황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순종(1874~1926), 귀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6남 의친왕(1877~1955), 순헌황귀비 엄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 영친왕(1897~1970) 세 명이 전부다.
영친왕 맏아들 이진의 의문사
일제는 영친왕을 약혼녀 민갑완과 강제로 파혼하게 하고, 일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1920년 정략결혼시켰다. 황실의 후손을 끊으려는 일제는 일본 어의에게 불임녀라고 판정받은 마사코와 결혼시키지만 1921년 8월 18일 아들 진(晉)이 태어났다.
1922년 4월 26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생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겸 동경에서 귀국했다. 영친왕이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고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한 후 처음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들 영친왕 부부는 5월 12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전날인 11일, 어린 아기인 진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돌연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고 독살일 거라 했지만 공식발표는 배앓이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피가 절반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다 해서 독살했다는 설과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진위는 지금도 알 수 없고, 황실에 태어난 죄로 어린 아기가 잔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남았다. 그리고 지금 숭인원에서, 나라를 빼앗긴 황실에 태어난 이 죄 없는 어린 영혼의 비극은 무덤을 보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순종은 이를 슬퍼하고 애석히 여겼고, 어린 아기지만 왕실의 전통을 깨고 특별히 왕자의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게 했다. 불행한 어린 아기 진은 5월 17일 할머니 곁에 묻혔다. 영친왕 부부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담고 18일 동경으로 떠났다.
첫 아들을 잃은 영친왕 부부에게 유산이 거듭되고 마침내 1931년 얻은 아들이 지난 7월 작고한 마지막 황손 이구 공이다.
이구 공은 아버지 영친왕이 잠든 홍유릉 경역의 영원 바로 곁에 묻혔고, 형이었던 진은 할머니 곁에 잠들어 대한제국의 몰락을 보여주고 있다.
숭인원의 석물은 아주 작으며 문인석의 모습은 전통 문인석과 달라 일본인의 손에 제작된 게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일제에 강점당했던 시대에 태어나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너무도 어린 나이에 죽은 이진은 당시 황실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어린 왕자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멸망을 생각하다가 석양이 비치는 정자각을 바라본다. 숭인원 정자각 방풍판은 묵은 칙칙한 적갈색을 띠고 있다. 흘러간 세월임을 말해주듯 겹겹이 묻은 시간의 흔적이 정자각 곳곳에 드러났다. 그러나 황실의 비극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
▲ 순헌 귀비 엄씨의 무덤. 원은 왕릉과 달라서 석물이 작고 무인석이 생략되며 무덤 규모도 작다. 석양과 석호도 절반으로 줄어 양쪽에 한 쌍씩 4마리가 서 있다. |
서울 한복판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 망국의 한을 담고 있는 사적지다. 사적지로 지정되는 바람에 주변 개발이 제한돼 인근 주민들에게 눈엣가시로 미움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휘원에 들어서면 작은 능을 연상시키는 정자각과 작은 숲이 함초롬히 숨어있다. 이곳은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이 서려 있어 슬픔이 묻어나오고 있다.
영휘원은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가 잠든 곳이고, 숭인원은 엄 귀비의 아들이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맏아들 이진(1921~1922)의 무덤이다.
명성황후가 있던 옛 홍릉 경역에 있는 두 원은 지금은 1만6000여 평에 불과하지만 한 때는 이 주변 전부가 영휘원 영역이었다.
엄 상궁과 아관파천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실질적인 국모역할을 했던 엄 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철종 5년(1854) 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왕후의 시위상궁이 된다.
▲ 영휘원 |
못생기고 뚱뚱했다 전하는 엄 상궁은 후에 황귀비가 된 후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양정의숙과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못생긴 궁녀에 불과했던 엄 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샀고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엄 상궁이 32세 때의 일이다.
궁녀 나이로서는 늙은 편에 속했던 엄 상궁의 어떤 점이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가진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그녀의 두뇌와 지략을 의지했던 듯싶다.
▲ 영휘원에 있는 우물. 이곳에 빠져 자살한 사람이 있어 폐쇄했다 한다. |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명성황후에게 엄 상궁이 내쫓긴 지 10년 후인 때였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 상궁이 있었다.
엄 상궁은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 출입을 했다. 일본의 서릿발 같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두 채의 가마로 궁을 드나들며 경계를 늦췄던 엄 상궁은, 1896년 2월 11일 대담하게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을 가마에 태우고 러시아 공관(아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 영휘원 석물. |
이 사건이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은 엄 상궁이 러시아 공관과 친러파, 친미파와 은밀하게 연결하며 계획하고 실행했던 대사건이었다. 최대의 볼모였던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으로 탈출해버리자 일본은 당황했다.
조선을 두고 강대국들이 벌이던 치열한 쟁탈전에서 고종을 확보한 러시아와 미국이 득세하게 됐고 고종의 아관파천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됐다.
▲ 순헌 귀비 영휘원 | |
ⓒ 한성희 |
이 아기는, 순종이 등극하자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1897~1970)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이 등극하자 자손이 없는 순종은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고, 영친왕은 황태자가 되자마자 11살의 어린 나이로 동경으로 볼모로 끌려간다.
영친왕의 비운은 여기서 출발한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 귀비와 고종은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가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비는 1911년 7월 20일(양력) 58세로 눈을 감는다.
▲ 영휘원 경역 주변에 옛 흔적은 사라지고 빌딩이 즐비하다. |
고종과 순종실록은 일제가 편찬한 기록이라 신빙성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순종4년 7월 2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영친왕이 급거 귀국하지만, 일제는 장티푸스로 사망해서 보면 안된다고 접근을 막아버려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도 볼 수 없었다.
홍릉 경역으로 장지를 정하고 죽은 지 열흘 뒤인 8월 2일 엄비의 상여가 대궐을 출발하자 고종과 영친왕은 영성문 밖에서 곡을 한다. 엄비를 의지했던 고종의 충격과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으리라.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품을 떠난 뒤 꿈에 그리던 어머니의 죽음을 맞은 영친왕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그날 오시에 하관을 한 엄비는 영휘원에 잠들게 되고 장례를 마친 지 3일 후인 8월 5일, 영친왕은 일제의 재촉으로 다시 동경으로 떠난다.
고종(1852~1919)은 9남 4녀를 두었지만 성장해서 혼인한 아들은 명성황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순종(1874~1926), 귀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6남 의친왕(1877~1955), 순헌황귀비 엄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 영친왕(1897~1970) 세 명이 전부다.
▲ 숭인원 |
영친왕 맏아들 이진의 의문사
일제는 영친왕을 약혼녀 민갑완과 강제로 파혼하게 하고, 일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1920년 정략결혼시켰다. 황실의 후손을 끊으려는 일제는 일본 어의에게 불임녀라고 판정받은 마사코와 결혼시키지만 1921년 8월 18일 아들 진(晉)이 태어났다.
1922년 4월 26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생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겸 동경에서 귀국했다. 영친왕이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고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한 후 처음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 9개월 짧은 생을 살고 죽은 영친왕 맏아들 이진의 숭인원. |
이들 영친왕 부부는 5월 12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전날인 11일, 어린 아기인 진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돌연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고 독살일 거라 했지만 공식발표는 배앓이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피가 절반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다 해서 독살했다는 설과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진위는 지금도 알 수 없고, 황실에 태어난 죄로 어린 아기가 잔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남았다. 그리고 지금 숭인원에서, 나라를 빼앗긴 황실에 태어난 이 죄 없는 어린 영혼의 비극은 무덤을 보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순종은 이를 슬퍼하고 애석히 여겼고, 어린 아기지만 왕실의 전통을 깨고 특별히 왕자의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게 했다. 불행한 어린 아기 진은 5월 17일 할머니 곁에 묻혔다. 영친왕 부부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담고 18일 동경으로 떠났다.
▲ 숭인원의 문인석은 일본풍으로 전통 문인석과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창경궁 지킴이 진정임씨가 문인석 크기를 가늠하고 있다.) |
첫 아들을 잃은 영친왕 부부에게 유산이 거듭되고 마침내 1931년 얻은 아들이 지난 7월 작고한 마지막 황손 이구 공이다.
이구 공은 아버지 영친왕이 잠든 홍유릉 경역의 영원 바로 곁에 묻혔고, 형이었던 진은 할머니 곁에 잠들어 대한제국의 몰락을 보여주고 있다.
숭인원의 석물은 아주 작으며 문인석의 모습은 전통 문인석과 달라 일본인의 손에 제작된 게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일제에 강점당했던 시대에 태어나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너무도 어린 나이에 죽은 이진은 당시 황실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어린 왕자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멸망을 생각하다가 석양이 비치는 정자각을 바라본다. 숭인원 정자각 방풍판은 묵은 칙칙한 적갈색을 띠고 있다. 흘러간 세월임을 말해주듯 겹겹이 묻은 시간의 흔적이 정자각 곳곳에 드러났다. 그러나 황실의 비극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
2005-12-28 14:28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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