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먹을거리史로 ‘장난’치지 말지어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전근대 시기 음식은 ‘근대’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통과하면서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옛날부터 존재한 음식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음식에 민족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국가나 민족 사이에서 특정 음식의 기득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명분 싸움의 하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역사나 정통성을 따져가며 음식을 먹지 않는다.
먹는 즐거움은 취향에 따라, 혹은 새로운 맛을 좇아 배가된다. 생명과 같은 음식을 두고 공연히 정통성이나 역사를 내세워 ‘장난’을 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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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년 가을, 매우 흥미로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대구의 모 신문사 기자였다. 그는 최근 대구에 ‘칭기즈 칸’이란 이름을 붙인 음식을 파는 식당이 몇 군데 생겼는데, 그 식당에 가면 몽골제국의 대제(大帝) 칭기즈 칸이 먹던 음식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음식이 정말 칭기즈 칸이 발명한 것이냐고 물었다.
이런 전화를 받으면 정말 난감하다. 음식문화를 연구주제로 거의 20년을 몰두해왔지만 특정 음식의 역사를 묻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특정 음식의 역사나 기원을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을까.
몽골공화국 울란바토르에서 목축학을 전공한 몽골인 바토르씨에게 ‘칭기즈 칸 요리’라는 것이 몽골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는 대뜸 화부터 냈다. 왜 몽골인의 역사적 영웅인 ‘칭기즈 칸 대제’의 이름을 음식에 붙였느냐는 것이다.
그는 ‘칭기즈 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에 와서 처음 알았는데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그 음식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거꾸로 내게 질문을 쏟아 부었다. “양고기를 즐겨 먹지도 않는 일본인들이 왜 그런 음식을 먹는지 아느냐”고.
한국인은 ‘칭기즈 칸’에 양고기를 넣지 않는다. 주로 쇠고기를 쓴다. 일본에서는 어떨까.
일본 ‘칭기즈 칸 요리’ 탄생 배경
내 친김에 인터넷에서 ‘칭기즈 칸 요리’라는 키워드를 쳐보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홋카이도신문(北海道新聞)’에 2003년 1월7일부터 11일까지 연재한 ‘탐험단이 찾아 나서다(探險團がたどる), 칭기즈 칸 이야기(ジンギスカン物語)’라는 기사였다.
남녀 기자 2명으로 탐험단을 조직,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음식인 ‘칭기즈 칸’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취재한 내용이다. 이 기사와 나의 다른 연구를 결합시켜 바토르씨 질문에 답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19 세기말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양모(羊毛)를 군복의 소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양을 키우지 않았으므로 양모를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수입했다. 그런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양모 수입이 쉽지 않았다.
결국 1918년 일본 정부는 양모를 자급하기 위해 ‘면양백만두계획(綿羊百万頭計劃)’이란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부터 홋카이도의 다키카와(川)·삿포로(札幌)·쓰키사무(月寒)와 시코쿠(四國)의 고치(高知) 등지에 전문적으로 양을 키우는 목장이 들어섰다.
양 모만을 이용하던 목장에서는 늙어서 쓸모가 없어진 양의 처리에 고심했고, 양고기를 식용으로 싼값에 팔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지배층에서는 공개적으로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서양 사람들처럼 육식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그때부터 각종 육식 음식이 개발됐는데 가장 인기를 모은 음식이 일종의 전골인 ‘규나베(牛鍋)’였다.
일본에서 ‘나베(鍋)’라고 하면 보통 우동이 담긴, 철모처럼 생긴 냄비를 가리킨다. 당연히 ‘요나베(羊鍋)’도 만들어졌다. 양고기는 거의 버리는 고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가격도 매우 쌌다. 그래서 일반 서민의 육식에 양고기가 한자리를 차지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칭기즈 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부국강병의 이미지
‘ 요나베’를 ‘칭기즈 칸’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뭘까. 일본은 1931년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에서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운다. 이후 많은 일본인이 중국에 갔다. 지식인들은 ‘만주철도주식회사’에 소속됐고 군인들은 관동군(關東軍)이 됐다. 사업을 하러 중국에 간 일본인도 많았다.
1910년대 일본에서는 자신들이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주장이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조상들이 시베리아에서 말을 타고 일본열도에 왔다는 생각이다. 이런 인식은 한반도와 대륙침략을 합리화하는 데 적절하게 이용됐다.
일본의 근대화론자들은 ‘서양을 배우자’며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인이 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지만, 유럽은 일본을 아시아의 하나로 보았다. 거기에서 생겨난 스트레스가 1930년대 초반, ‘요나베’에 ‘칭기즈 칸’이란 이름을 붙이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만주 개발’을 위해 1920년대부터 꾸준히 중국 동북지역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광활한 대륙에서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감명 깊은 것이 유럽까지 한손에 거머쥔 ‘칭기즈 칸’이었던 것.
앞서 언급한 ‘홋카이도신문’의 연재물에서는 ‘부국강병’의 ‘일본 근대’와 ‘칭기즈 칸 요리’가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기사를 쓴 기자는 기름기가 흐르는 칭기즈 칸 요리를 먹으면 마치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한 칭기즈 칸이 자신을 품어주는 느낌마저 든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양고기는 쇠고기에 비해 누린내가 많이 나기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조리법이 필요했다. 홋카이도에서는 칭기즈 칸 요리 조리법으로 양고기를 각종 과일즙에 재워 하루 정도 절이는 방식이 채택됐다.
특히 사과·양파·귤 즙을 이용하면 매우 단맛의 양고기 요리를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을 숯불에 구워 먹는 방식이 생겨났다. 이에 비해 1930년대 도쿄의 양고기 전문점에서는 소금물에 절이는 방법을 썼다. 당시 자료를 보면 단맛보다는 짭짤한 맛이 양고기에 스며들어 마치 소금구이를 먹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에 비해 시코쿠의 ‘고치’에서는 쇠로 된 전골냄비에 양고기를 구웠다. 이 냄비는 1950년대 초반 ‘고치’의 칭기즈 칸 요리점에서 처음 도입했다고 알려진다. ‘홋카이도신문’ 기사에 따르면 2003년 92세의 나이로 생존했던 요시모토 겐지(吉本健兒)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1939년에 만주에 가서 사업을 하다 실패를 거듭하던 중, 종전으로 중국에 억류됐다가 1949년에 고향인 고치로 돌아왔다. 그 후 만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칭기즈 칸나베(成吉思汗鍋)’를 개발, 1953년 싼값의 양고기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을 열었다고 한다.
요사이 일본에서는 홋카이도나 도쿄, 고치와 같은 도시를 제외하면, 칭기즈 칸 요리를 먹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1950년대까지는 전후의 가난을 해결하는 데 양고기는 매우 적절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경제부흥의 단맛을 맛본 일본인들이 하급으로 여겨지던 양고기를 소비할 이유가 없어졌다.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그들의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99% 이상의 양고기를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에서 칭기즈 칸 요리의 소비가 그전만 못한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대구에서 ‘칭기즈 칸’이란 음식이 새로운 인기를 누린다고 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몽골이 마치 ‘민족의 고향’쯤 되는 양, 너무나 열심히 그들과 한국인의 닮은 점을 찾아다녔다.
심지어 몸에 있는 ‘몽골 반점’과 역사적으로 원나라와의 교류 경험을 내세워 무한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1920년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대륙풍’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에 ‘칭기즈 칸’ 이름이 붙은 음식도 한국식으로 만들어냈으니 그 ‘대륙풍’이 침략적 ‘부국강병’으로 가지 않을까 두렵다.
칭기즈 칸 요리는 역사가 조작된 음식은 아니다. 이에 비해 특정 음식의 역사나 기원을 언급하면서 역사적 시간을 가능하면 고대로 끌어올리거나, 아니면 그 기원이 아주 먼 곳에서 출발했다는 주장이 음식의 역사를 논하는 글에서 난무한다.
민족의 역사적 신비감을 음식에 담으려는 이러한 노력들이 지난 100년 사이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음식에 대해서는 더욱 강렬하게 ‘역사 만들기’ 작업이 이뤄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중국어로 ‘더우푸(豆腐)’라 불리는 두부의 기원에 관한 논의다.
‘더우푸(豆腐)’의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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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 때 사람인 도곡(陶穀·?~970)은 그의 책 ‘청이록(淸異錄)’에서 당시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던 에피소드를 정리했다. 그 책에 두부를 만든 이가 한나라 때 사람인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BC 176~123)이라고 적었다.
유안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손자다. 그가 어떤 연유에서 두부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수많은 책에서 두부는 그의 발명품이라 따라 적었다. 최근까지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두부가 한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후의 문헌에 등장해야 옳지 않은가. 그러나 ‘청이록’에 두부의 이름이 나오기 이전 이와 비슷한 음식을 소개한 중국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책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부는 칭기즈 칸 요리와 달리 발명을 위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음식이다. 두부는 콩 속의 수용성 단백질을 추출해 그것을 소금물이나 석회를 녹인 물, 아니면 포도당 등을 넣어 응고시켜야 만들어진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복잡한 공정이 아닐 수 있지만, 1000여 년 전 사정은 달랐을지 모른다.
나는 두부의 발명은 중원의 북쪽에 살면서 유목을 하던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목민들은 우유를 이용해 치즈와 같은 젖산발효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 그들이 지금의 베이징 남쪽으로 본격 진출하기 시작한 때는 당나라 이후다.
특히 오대 때는 그들이 지금의 화북(華北)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원 사람들이 모두 남쪽으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결국 유목민과 농경민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 지금의 화북이다.
농경민들은 대두(大豆)를 이용해 간장이나 된장을 만들고 곡식의 하나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것을 삶고 빻아서 즙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유목민들이 가르쳐줬다. 그것이 바로 ‘두유’다. 두유를 그냥 먹으면 비린내가 많이 나서 소금을 쳐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 자연스럽게 두부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두부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도 송나라가 화북을 장악한 때와 일치하기에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북송 때의 문헌에 두부가 처음 등장했고, 이후인 12세기에 동북아시아 각지에서 두부와 관련된 문헌자료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북송 때 사람 도곡은 왜 두부의 기원을 한나라 때로 올려 잡았을까. 도곡은 지금의 산시(陝西)성 출신으로 북송 이전에 화북에 있었던 왕조인 후진(後晋) 때 관리를 지냈다. 그의 성은 원래 당(唐)이었는데, 후진의 임금 이름에 같은 글자가 있어 ‘도’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의 처지에서는 중원 사람이 세운 송나라는 정통성이 있지만 이전의 여러 나라들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결국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나라가 송나라와 연결되는 정통성을 지녔다고 생각했고, 한 고조의 손자인 유안에게 두부를 만든 명예를 안겨줬을 가능성이 크다.
‘만들어진 전통’ 논란
최 근 세계 인문학계에서는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 )이 주장한 ‘만들어진 전통(making tradition)’이란 문구로 인해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중에 상당히 많은 내용이 근대에 와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영국 왕실의 각종 행사 내용은 19세기 이전 앵글로색슨의 ‘전통’을 ‘계승’하여 지금까지 ‘지속’시킨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영국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이전의 여러 자료를 참고해 새로 디자인한 결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만들어진 전통’이라 일컬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등장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근대국민국가’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존재한 현상들을 확대시켜 거짓으로 그 역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앞에서 밝힌 두부의 기원과 관련된 논의는 ‘근대국민국가’ 이전에 행해진 ‘만들어진 역사’였다.
중원의 한인(漢人)이 세운 송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짓된 사실을 기록에 남겼을지도 모른다. 홉스봄의 주장처럼 근대에 만들어진 전통이 다수라면 적어도 중국에서는 이전부터 이러한 경향이 존재했음을 ‘유안의 두부 발명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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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경제성장과 베이징올림픽 개최에 들떠 있는 중국인들은 세계의 모든 음식이 원래 중국에서 발명됐다는 주장을 활발하게 개진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 전공 교수인 왕런샹(王仁湘)은 술을 만드는 누룩곰팡이도 한나라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와인도 당나라 때 그 제법을 중국식으로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당나라 때에는 와인을 주로 서역(西域)에서 수입했다. 당연히 그 양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당 태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와인을 만드는 데 관여했고, 마침내 와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제의 욕구를 충족시킨 이후 잠시 유행했을 뿐 와인은 더 이상 전체 사회를 관통하는 술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일찍이 중국과학사를 정리한 영국의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은 중국에서 이뤄진 위대한 발명은 모두 황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됐다고 했다. 당나라 와인 또한 니덤이 말한 ‘황제를 위한 과학’이었던 것이다. 단지 와인이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의 현상과 무조건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비빔밥과 ‘골동반’
2005 년 10월 전주시에서 열린 ‘전주한식포럼’에 참석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전주대 송화섭 교수가 전주 한식(韓食)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비빔밥의 발생설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소개했다. 그는 전주 남문시장에서 시장사람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에서 전주비빔밥이 시작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객석에 앉은 외식업 종사자들이 이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전주비빔밥이 세계적인 명물이 돼가는 중인데, 어떻게 시장음식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항의였다. 한 외식업체 사장은 적어도 전주비빔밥이 조선시대 임금님이 드시던 음식이라는 논증 정도는 해줘야 지역대학의 교수로서 자격이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뜯어고쳐서라도 임금님의 수라상에 특별히 비빔밥이 올라갔다고 해야 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게다.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고 있는 비빔밥의 정통성을 전주에서 확보해야 한다는 바람이 그 항의에 담겨 있으리라. 하지만 전주비빔밥의 기원을 그의 바람처럼 기록한 역사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비빔밥의 한자어는 ‘골동반(骨董飯)’이다. 중국 명나라 때 사람 동기창(董其昌·1555~1636)이 쓴 ‘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이란 책에서는 분류가 되지 않는 옛날 물건들을 통틀어 골동이라 부른다면서, 이 뜻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혼합해 조리한 국을 ‘골동갱(骨董羹)’이라 하고, 밥에 여러 가지 음식을 섞어서 익힌 것을 ‘골동반(骨董飯)’이라 한다고 했다.
주목할 점은 ‘골동십삼설’에서 설명한 골동반은 한국의 비빔밥처럼 잘 지어진 밥에 여러 가지 재료를 비벼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먼저 여러 가지 재료와 곡물을 함께 넣어 섞은 다음에 밥을 안친다. 아마도 ‘콩나물밥’이 그 책에서 말한 골동반의 한 종류이고, 중국에서 ‘차오판(炒飯)’이라 하는 볶음밥이 여기에 해당될 듯하다.
한국의 과거 문헌에서 골동반이란 음식 이름이 적힌 책은 1890년대에 쓰여 1910년대에야 세상에 알려진 필사본 ‘시의전서(是議全書)’가 있다. 이 책에는 한자로 ‘골동반’이라 쓰고, 한글로 ‘부밥’이라 적었다.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나물을 볶아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달걀을 부쳐서 골패짝 크기로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하게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달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상에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분 명히 중국의 ‘차오판’과는 그 재료를 섞는 방법이 다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익힌 밥과 다른 재료를 먼저 비빈 후 그 위에 고명으로 지진 달걀과 완자를 올려서 내놓는다는 데 있다.
전북대에서 일본문화를 가르치는 임경택 교수는 1990년대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유학생활 중 그가 일본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비빔밥을 대접했는데, 아무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시의전서’에 나오듯이 미리 모든 재료를 비벼놓았는데, 이것을 본 일본 친구들이 음식이라기보다는 쓰레기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규슈의 ‘돌솥비빔밥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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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년 10월,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시 외곽에 있는 한 백화점 3층 식당가에서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한 일본 여성이 나무로 짠 사각통 뚜껑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식기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무슨 음식인지 살펴보니 한국에서 자주 보던 돌솥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흰 달걀 하나와 비닐 팩에 담긴 고추장도 놓였다. 그 여성은 너무나 익숙하게 달걀을 깨서 돌솥에 넣고 고추장도 뿌렸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들고 돌솥 안의 밥과 재료를 비볐다.
아, 이럴 수가! 1990년대만 해도 비벼놓은 비빔밥을 쓰레기에 비유하면서 입에 대지도 않던 일본인들이 어떻게 스스로 비벼서 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가. 더욱이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이 너무나 익숙하게 숟가락으로 밥을 퍼 먹다니. 나는 그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실례를 무릅쓰고 그 맛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맛있다.” 이름이 ‘아유미’라는 그는 아직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단다. 하지만 가고시마 시내에 있는 한국음식점에서 이 비빔밥을 먹어본 이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밥과 반찬을 함께 ‘비빈다’는 행동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돌솥에서 지글지글 익는 밥에 각종 반찬과 날달걀, 그리고 매운 고추장을 함께 비비는 그 자체가 매우 재미있단다. 그렇다면 ‘카레라이스’를 먹을 때도 이렇게 비비면 맛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아유미는 난색을 표했다. 어떻게 카레라이스를 비빔밥처럼 비빌 수 있느냐며, 그것은 먹을 수 없단다. 일본인들은 카레라이스나 덮밥을 먹을 때 한국인처럼 마구 비비지 않는다. 접시에 담긴 그 상태에서 마치 칼로 두부를 자르듯 ‘스푼’으로 구획을 지어가며 먹는다.
내친김에 한국의 일본음식점에서는 ‘회덮밥’이란 것을 판매하는데, 그것도 일종의 ‘사시미 비빔밥’이라고 설명해주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놀라워하며 어떻게 ‘사시미’로 비빔밥을 만들 수 있느냐고 강하게 항변했다.
2000년 여름,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음식을 전문적으로 체험하기 위한 여행단이 서울에 왔다. 그들이 김포공항에 내려서 가장 먼저 맛본 음식은 회덮밥이었다. 그들은 하얀 밥 위에 올려진 ‘사시미’에 놀라워했고, 거기에 초고추장을 뿌려 마구 비벼 먹어야 한다는 설명에 질색을 하며 먹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솥비빔밥은 회덮밥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을 준다. 이윽고 나도 이 비빔밥을 주문해서 먹어보았다. 콩나물·고사리·시금치·김치·쇠고기구이 등의 반찬이 올라간 모양이 한국에서 보던 돌솥비빔밥 그 자체다. 더욱이 뜨거운 돌솥에서 지글지글 익는 비빔밥은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국인 입맛에는 그다지 우수한 돌솥비빔밥이라 보기 어렵다. 특히 날달걀이 섞이면서 밥이 죽처럼 돼버렸다.
이 비빔밥을 판매하는 식당의 상호는 ‘이시야키비빔밥안녕(石燒ビビンバ あんにょん)’이다. 체인점으로 운영되는 이 식당의 본사는 규슈의 후쿠오카(福岡)에 있다. 전화로 문의하니 사장도 직원도 모두 일본인이라고 한다.
1997년부터 외식업을 시작했는데, 2005년에 한국 대중문화와 음식이 유행해서 ‘안녕’이란 브랜드를 만들고는 각종 돌솥비빔밥은 물론이고 냉면까지 판매한다고 했다. 돌솥과 숟가락, 고추장은 한국에서 수입하지만, 나머지 재료는 모두 일본산을 쓴다.
통화한 직원은 규슈에만 점포가 16곳 있고, 규슈 외의 지역엔 50곳이 넘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콩나물도 규슈의 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것을 구입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가고시마 슈퍼마켓에는 한국식 비빔밥을 조리하는 데 쓰이는 콩나물을 따로 팔고 있었다. 그 맛도 한국의 콩나물에 버금갈 정도다.
전 근대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근대 이후 상업화한 음식은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면서 그 취향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무한한 ‘진화(進化·evolution)’를 거듭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뉴욕이나 베이징이나 도쿄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 비빔밥은 그 진화의 최첨단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의 한국음식점에서도 돌솥비빔밥이나 철판비빔밥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한다. 중국 베이징에서도 한국음식점에서 판매하는 돌솥비빔밥의 인기는 단연 김치를 앞선다.
진화해도 변치 않는 ‘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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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에서 돌솥비빔밥이 유행하기 시작한 때는 전주비빔밥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끈 시기와 같다. 1981년 서울 명동에 진출한 전주의 ‘전주중앙회관’에서 전라북도 장수에서 생산된 곱돌 그릇에 비빔밥을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돌솥비빔밥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전주중앙회관 측은 1969년에 ‘전주곱돌비빔밥’을 전주에서 판매했다고 밝힌다. 진위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지역의 명물인 곱돌을 이용해 새로운 비빔밥을 만들어낸 창조력은 높이 살 만하다.
원래 비빔밥은 상에 내기 전에 아예 비벼놓거나, 아니면 유기나 자기로 만든 큰 양푼이나 국 대접에 온갖 재료를 담아서 냈다. 지금도 전주에 있는 한식당에서는 돌솥보다 유기에 담아서 판매하는 집이 제법 많다. 유기 대접에 유기 수저를 들고 비빔밥을 먹으면 왠지 지위가 격상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돌솥비빔밥에 비해 ‘재미’가 적은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 이후 삼겹살이나 심지어 매운탕을 먹고 난 후에 남은 양념에 김치와 참기름을 넣고 즉석 볶음밥을 만들어 먹는 한국인이고 보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재미가 돌솥비빔밥 유행을 이끈 비결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비빔밥의 진화’라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진화’란 말 그대로 새로운 개체들이 스스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은 고전적인 비빔밥에서 최근에는 멍게를 주된 재료로 만든 멍게비빔밥까지, 비빔밥 종류를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여기에 밥뿐만 아니라 국수를 고추장에 비빈 비빔국수나 낙지볶음에 밥을 넣고 비빈 것까지 취향에 따라 만들기만 하면 새로운 비빔밥이 탄생한다.
그러나 생물의 진화나 문화적 진화에는 반드시 변하지 않는 ‘원소’가 있게 마련이다. 비빔밥 진화의 조리학적 최소 원소는 끼니가 되는 밥에 양념을 넣고 ‘비빈다’는 데 있다. 만약 밥과 여러 가지 재료를 뜨거운 철판에 올려놓고 볶으면 그것은 비빔밥이 아니라 볶음밥이다.
앞에서 말한 즉석 볶음밥이 비빔밥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솥비빔밥 역시 너무 뜨거우면 볶음밥이 된다. 볶음밥으로 가기 전에 돌솥의 뜨거운 기운이 사라지기에 비빔밥의 자격을 유지한다.
변하지 않는 비빔밥의 또 다른 원소는 밥과 함께 섞이는 재료들이다. 그것이 육회든 구운 불고기든 아니면 나물이든 밥과 어울려 상승작용을 할 때만 비빔밥은 비빔밥답다. 이때의 핵심은 쌀밥이다. 비빔밥의 부재료는 단지 밥맛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쌀밥 맛이 좋지 않으면 비빔밥 맛도 결코 좋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비빔밥은 적어도 10가지 이상의 음식재료가 들어가서 종합된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영양학적 가치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울러 각종 반찬의 복합적인 맛이 쌀밥의 낱알에 붙어서 입속에 가득할 때 침에서 나오는 아밀라아제(amylase)가 비빔밥을 더욱 달게 만들어준다. 당연히 고추장도 쌀밥과 반찬 다음에 오는 양념에 지나지 않는다. 고추장 대신 ‘조선간장’을 넣어도 밥과 반찬만 맛있으면 일품의 비빔밥 맛이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비빔밥의 역사적 유구함이나 영양학적 우수성을 밝히려고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진화의 기본 원소를 분명히 알고, 다양한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서두에 나는 일본의 칭기즈 칸 요리가 냄비를 이용한 나베(鍋) 음식에서 진화한 음식이라고 밝혔다. 한국에도 알려진 일본의 ‘샤브샤브’ 역시 중국의 ‘솬양러우(?羊肉)’에서 진화한 음식이다. 1952년에 오사카의 한 음식점 주인이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40년대 초반에 중국 만주에서 군복무를 했는데, 그때 솬양러우를 알았다. 그 후 귀국해 신선로와 비슷한 냄비를 만들고, 여기에 쇠고기를 넣어 익혀 먹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샤브샤브다. 샤브샤브는 국물이 끓는 소리에 착안해 만들어낸 말이다.
베이징 겨울 풍속 ‘솬양러우’
사 실 솬양러우에 쓰이는 냄비는 지금의 중국어로는 ‘훠궈(火鍋)’라고 한다. 중국 북제(北齊·550~577)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동으로 만든 그릇으로 입이 넓고 가운데가 비었는데, 이름을 동찬(銅?)이라 부른다. 얇고 가벼워서 불에 음식을 익히기 쉽다”고 했다.
그러나 훠궈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청나라에 들어와서다. 청나라 위안메이(袁枚·1716~1797)가 쓴 ‘수원식단(隨園食單)’(1715)에는 훠궈가 당시 민간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많이 사용된다고 적었다. 심지어 청나라의 건륭(乾隆) 황제는 530개의 훠궈를 차린 궁중연회를 열기도 했다.
하 지만 요즘 베이징 사람들이 하듯이 얇게 썬 양고기 조각을 펄펄 끓는 국에 넣고 살짝살짝 데쳐 먹는 방식은 냉동고의 등장과 함께 새로 생겨났다. 중국의 동북지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겨울에 얼어버린 양고기를 가능한 한 얇게 썰어서 솬양러우를 만들어 먹었다. 이제는 세계인이 즐겨 먹는 일본의 ‘스시’ 역시 냉장고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유행한 음식이다. 1930년대가 되어서야 일본인 중에서 지금과 같은 스시를 먹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점은 일본인 학자 다수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 지만 내가 연구한 바로는 스시의 원형인 나레즈시는 중국의 고대 문헌에도 곧잘 등장한다. 한자로 ‘해(?)’라고 적은 음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지금도 먹을 수 있는 한국의 가자미식해와 비슷하다. 2000년 국내 한 방송 프로그램에도 소개됐듯, 한국인 학자 중에는 나레즈시가 한반도의 가자미식해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만약 그의 주장을 따른다면 일본 스시의 원조는 한반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이처럼 우리가 아는 수많은 전근대 시기의 음식은 ‘근대’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통과하면서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옛날부터 존재했던 음식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음식에 민족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국가나 민족 사이에서 특정 음식의 기득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명분 싸움의 하나로 생겨났다. 유기에 담은 비빔밥은 ‘전통’이고 돌솥비빔밥은 ‘가짜’라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더욱 다양한 비빔밥이 생겨나야 한다.
사람들은 결코 역사나 정통성을 따져가며 음식을 먹지 않는다. ‘먹는 즐거움’은 취향에 따라, 혹은 새로운 맛을 좇아서 배가된다. 공연히 생명과 같은 음식을 두고 정통성이나 역사를 내세워, ‘장난’을 치면 안 된다.
이런 면에서 나는 ‘더우푸’의 조작된 역사를 비난한다. 이에 비해 날마다 지구촌 여기저기서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는 한국의 비빔밥에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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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하 ● 1962년 경남 마산 출생 ● 서강대 사학과 졸업, 한양대 석사 (문화인류학), 중국 중앙민족대학 박사(민족학) ●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부교수 ●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규슈 지역 음식문화 현지조사 진행 중 ● 저서 : ‘음식전쟁 문화전쟁’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음식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역사’ 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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