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본 한·중·일 문화인류학 2] |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근대를 거치는 동안, 국경을 넘는 집단이주 경험을 통해 동북아 세 나라는 서로 음식문화를 주고받았다. 일본과 중국에 형성된 한인 이주자 공동체는 고유의 음식문화를 선보이며 ‘에스닉 푸드(ethnic food)’ 이미지를 심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중문화 교류와 관광 열풍은 ‘민족음식’의 옛 이미지 대신 ‘오늘날의 한국인이 먹고 즐기는 음식문화’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나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세 나라의 새로운 음식문화 공감대가 탄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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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머무는 곳은 일본의 남쪽 가고시마대학이다. 이곳에서 문화인류학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연구하는 중년의 구와하라 수에오 교수는 한국 드라마 중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을 가장 즐겨 보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 의 집에 초대받아 일본식 찌개인 ‘나베모노(鍋物)’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떡볶이’가 어떤 음식이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의 부인 역시 ‘떡볶이’이라는 음식이름을 알고는 있는데, 먹어보진 못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일대 유행을 하면서 그들은 한국인의 생활을 교과서가 아닌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을 통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은 1995년 베이징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다. 일명 ‘대발이’로 통하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중앙방송(CCTV)을 통해서 방영되자, 베이징의 지인들은 내게 한국 가정에서 아버지가 대단한 권위를 갖고 있음을 알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거나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다는 감상도 들었다. 심지어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실 때는 정면으로 잔을 들지 않고 머리를 옆으로 돌려서 마시는 모습을 보며 가히 공자가 다시 탄생한 기분이 들었다는 소회를 전하는 노인들까지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자국 내에서 소비하는 대중문화’로 여기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최근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것을 ‘한류(韓流)의 성과’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 말에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다국적 문화가 소비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21세기 사람들의 문화적 경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사람들이 요즘처럼 자주, 쉽게 상대방의 문화를 알게 된 때는 없었다. 중국 당나라 때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수많은 승려와 정치인, 지식인이 창안(長安)을 비롯한 남북 실크로드를 통해 만났지만, 결코 지금과 같은 수준이 아니었음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세기 말, ‘제국과 식민지’라는 양 극단의 정치적 상황에서 시작된 근대적 교류 역시 결코 ‘호혜적 관계’라고 규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비록 ‘경성(京城)’이라는 한 공간에서 생활했어도 재조(在朝) 일본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조선인을 지배했을 뿐이다.
1883년 임오군란을 통해 ‘한성(漢城)’에 온 중국인들은 오로지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챙기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오해와 질시는 서로를 ‘조센진’ 혹은 ‘왜놈’ 혹은 ‘지나인’이라는 천한 지칭어로 부르게 만들었다.
음식 역시 오해를 증폭시키는 매개물로 작용했다. 조센진의 마늘 냄새를 조심해야 한다는 1920년대 일본의 조선관광 팸플릿 경고문은 지금도 도쿄에서 회자된다.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는 일본인의 ‘쪽발이다운’ 경거망동을 지금도 한국인은 잘 참지 못한다. 땟국이 반질반질한 ‘되놈’이 만드는 청요리는 맛이 있지만, 그들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은 결코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가 1980년대까지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 런데 어느 날, 정확하게 말하면 2000년이란 시간축을 경계로, 한국인 삶의 ‘실재’를 들여다보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늘기 시작했다. 영화와 드라마로 대표되는 ‘한류’가 유행한 시점과 이러한 경향이 맞아떨어졌기에 더욱 한국 사회를 열광시켰다.
매 스미디어가 제공한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본 그들이 ‘떡볶이’란 음식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의 백설기나 신선로같이 ‘전통’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음식 이름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즐겨 보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는 이런 음식이 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서로의 속살이 드러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뉴커머, 자이니카, 김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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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본에 사는 한국인이나 조선인의 시각에서 보면 도쿄는 오사카와 분명 다르다. 오사카 시내에는 이른바 ‘자이니카’(‘재일 코리안’을 줄여서 부르는 말. 재일동포를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부르려고 하면서 생겨난 용어)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조선인촌이 있는 데 반해 도쿄 시내에는 그런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이 되면서 도쿄 시내, 그것도 번화가인 신주쿠와 가부키쵸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쇼큐안도리(職安通り)’에 100여 개가 넘는 한국음식점이 즐비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06년 여름에 만난 도쿄대학의 이토 아비토 교수는 한국의 ‘진도’를 40년 가까이 연구하고 있는 문화인류학자다. 그는 “쇼큐안도리의 이런 현상은 정말로 놀라운 변화”라고 했다.
실제로 그전에는 도쿄 시내에 자이니카의 집단 거주지가 없었다. 자이니카는 물론 외국인 거주지역도 별도로 형성되지 않았다. 도쿄는 에도시대부터 쇼군(將軍)의 직접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고, 근대 이후에도 일본적인 특징을 유지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토 아비토 교수는 ‘한국 사회는 일본에 비해 지역적 기반이 강력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러한 경향성은 일본의 자이니카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왜, 도쿄 시내 중심가의 한 거리가 한국음식촌으로 바뀐 것일까. 여기에는 오로지 김근희라는 한국인의 노력이 깔려 있다. 50대 초반의 김근희는 쇼큐안도리에서 가장 큰 한국음식 전문 슈퍼마켓인 ‘한국광장(韓國廣場)’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김근희 사장과 나는 1993년 겨울에 그가 운영하던 민박에서 첫 인연을 맺었다. 나는 그때 일본의 김치 붐을 조사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 마침 그가 운영하는 민박에 며칠 묵게 됐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김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민박은 지금의 도쿄 신오쿠보 역에서 쇼큐안도리로 통하는 골목 안에 있었다. 그 민박에서 첫 하루를 묵은 나는 이 집 마당에 가득한 김치 항아리에 맨 먼저 눈이 갔다. 1993년만 해도 일본에서 김치 붐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이때 김근희씨는 민박 앞 큰길, 지금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한국학생식당’ 자리에 조그만 한국음식 전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는 김치 전파에 미쳐 있었다.
대 단한 충격이었다. 그는 내게 가게 2층에 ‘한국음식문화연구소’를 건립하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일본인들은 ‘문화’라는 말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곳을 한국을 알리는 창구로 이용한다면 한국김치는 물론 한국음식 전부를 일본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지금 개념으로 말하면 이른바 ‘문화 마케팅 전략’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떻게 일본인들이 한국음식을 좋아하겠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김근희씨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식민지라는 불행한 상황에서 일본에 온 자이니카 1세대에 속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깊다. 그는 1981년 일본에 유학을 와서 명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마친 지식인이다. 1965년에 한일 수교가 이루어졌지만 한국 사회에서 식민지 경험의 그늘은 좀체 걷히지 않았다. 일본 사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실시되던 조선인에 대한 ‘국민화(國民化)’ 정책은 바뀌었고 자이니카를 외국인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195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 가운데는 식민지 경험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전 세대에 비해 좀 더 개방적인 사람도 많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가 증가하면서 유학이나 사업을 목적으로 일본에 온 후 아예 정착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들을 일본 내 자이니카 사회에서는 뉴커머(New Comer)라고 부른다. 김근희씨 역시 뉴커머에 속하는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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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는 에도시대 이래 철저하게 지역적 기반을 매개로 만들어진 인적 관계가 하나의 틀을 형성하는 운영체제에 묶여 있다.
에도시대의 맹주였던 쇼군 도쿠가와(德川) 집안은 불교의 사찰을 통해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 한 가족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했고, 신도(神道)의 신사(神社)로 하여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역적 활동을 통제하도록 했다. 각 지역은 ‘한(藩)’의 영주가 관리하며 세금을 대신하는 ‘물건’을 만드는 직인(職人) 집단으로 분업화되었다.
특히 도시의 상가(商家)는 동일 직업집단끼리 상인조직을 구성하도록 해 상호 협력과 견제가 가능한 구조로 만들었다. 메이지(明治) 정부의 근대화 이후 각종 인적 관계는 ‘조합(組合)’이라는 근대적 조직을 통해서 더욱 강력하게 지역적 기반과 결합했다. 이로 인해 적어도 ‘신사’가 존재하는 지역의 상가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인적 관계 아래에서 철저히 조직적으로 운영됐다.
김근희씨가 쇼큐안도리에 가게를 열면서 주목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상인조직이었다. 그는 그들 조직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안정된 가게 운영을 하지 못할뿐더러, 지역사회에서 ‘이지메’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1세대 자이니카들이 일본 사회에 정착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시스템이었다.
스스로 일본 전문가를 자처하는 김근희씨는 쇼큐안도리에서 가게를 열고 얼마 되지 않아 현지 상인회를 찾아갔다.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이 상인회에 가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인회에서는 외국인이 가입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어렵다는 답을 내놓았다. 비록 ‘외국인등록증명’은 있지만, 그는 일본 사회에서 영원한 이방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수시로 찾아가 설득했고, 외국인이라는 특별대우에 걸맞게 회비를 현지인에 비해 더 많이 내겠다는 제안도 했다. 결국 그들을 설득시킨 김근희씨는 단순한 가입에 머물지 않고 상인회의 각종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태도에 감동받은 현지인들은 10년이 지나 그를 상인회 부회장 자리에 앉도록 해주었다.
도쿄 신오쿠보의 한국음식촌
2005 년 7월 초순, 도쿄의 우에노 역에서 전철을 타고 신오쿠보 역에 내린 나는 1993년 봄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신오쿠보 역사에 친근감을 느꼈다. 그러나 역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나오자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7월15일 초복’이라는 한글 안내판을 붙인 ‘한국가정요리-그린식당’은 그대로 서울의 어느 뒷골목을 연상케 했다. 비록 간판 디자인이나 이미지는 일본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곳에 몰려 사는 한국인들을 위한 안내임이 분명했다.
이 음식점을 지나자 ‘엘도라도’라는 가타가나 상호를 붙인 가게가 있었다. 길거리에 나와 있는 광고판부터 내부 물건들까지 온통 한국 배우들, 그중에서 남자 배우들 사진으로 가득 채운 가게였다.
아예 ‘한류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점포에는 한국어와 한국가요, 한국음식 등을 가르치는 강좌를 연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고객이 제법 많았다.
어학연수를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한 한국인 여대생은 “요사이 일본 여성들이 한국 남자배우들을 몹시 좋아해서 나도 의아할 정도”라고 했다. 주말이면 하루에 수백명의 손님이 오니 한류 덕분에 요사이 도쿄의 한국인들이 무척 행복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 국음식점과 민박집으로 가득한 골목을 빠져나오면 쇼큐안도리의 대로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금방 눈에 띄는 곳은 감자탕을 파는 식당이다. 온통 빨간색으로 장식한 간판부터 서울의 감자탕집과 닮았다.
신오쿠보에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식당뿐 아니라 어학연수를 온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한 식당과 민박집도 많다. 이곳에 갈빗집이나 실내 포장마차는 물론 한국식 가라오케까지 들어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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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의 주인공은 앞서도 밝혔듯 김근희씨가 운영하는 ‘한국광장’이다. 1990년대 초반 그가 한국식품 전문 슈퍼마켓을 열 때는 자이니카가 운영하는 한국식당의 주인들을 주고객으로 생각했다. 재료만이라도 한국 본토의 것을 사용한다면 맛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1세대 자이니카가 운영하는 한국음식점의 음식은 일본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때문에 뉴커머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이 점에 착안해 그는 한국에서 수입한 식재료를 제공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출발한 사업이 바로 지금의 ‘한국광장’이다.
10여 년 만에 엄청나게 변모한 김근희씨를 그의 사무실에서 대면했다. 그는 만나자마자 자신의 목표는 한국의 생활문화를 일본에 심는 것이라고 말했다. ‘룩앤필 코리아(look and feel Korea)!’를 슬로건으로 삼았다는 그의 태도에서는 예의 지식인 사업가다운 면모가 묻어났다.
이 슬로건이 오로지 김근희씨 개인의 감각적 판단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미국의 관광인류학자 롱 루시는, 세계가 지구촌화하면서 사람들이 자주 이문화(異文化) 여행을 할 수 있게 됐고, 그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경험이나 먹어본 현지 음식을 귀국 후에도 계속 소비하려는 의지를 보인다고 했다. 김근희씨의 ‘룩앤필 코리아!’는 2006년 일본의 한국 마니아들에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장면의 실제 장소에 가보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이미 1980년대부터 형성된 자국 내 ‘드라마 투어’ 이벤트에서 만들어졌다.
‘겨울연가’가 방영되자마자 그 인기를 예감하고 한류 전문잡지를 기획해 일본 최초로 무크지를 펴낸 교도통신사의 ‘BSfan’ 무크시리즈 편집장 구라모토 요시코씨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드라마 투어’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은 데 놀랐다고 했다. 그는 한국관광공사를 직접 방문해 그러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인들의 한국 관광은 대부분 남성 위주의 ‘기생관광’이었다. 그러나 1997년 홍콩이 중국대륙에 반환되면서 젊은 여성 직장인들이 쇼핑관광지를 홍콩에서 서울로 바꿨다.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온 기생관광 이미지가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적어도 ‘겨울연가’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무렵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외국은 한국이다. 그 과정에서 쇼큐안도리의 진면목은 여지없이 진가를 발휘했다. 한국에 직접 가지 않아도 한국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 한국 드라마나 영화와 관련된 각종 책과 캐릭터들을 살 수 있는 곳으로 쇼큐안도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조센진’의 ‘호루몬야키’
‘ 겨울연가’ 촬영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한국으로 관광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느낌을 지속시키고 싶을 때마다 쇼큐안도리를 찾았다.
연세대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일본 한류 전문가 히라타 유키에씨는 2004년 여름 도쿄에서 50대 일본인 여성 회사원과 인터뷰를 했다. 이 회사원은 한국음식도 만들어 먹고, 신오쿠보도 석 달에 한 번은 방문해 한류 상품을 사는 한편 한국요리를 사먹는다고 했다.
이렇게 신오쿠보에 있는 한국 관련 점포들을 찾는 주된 고객은 일본인임에 틀림없다. 24시간 영업하는 김근희씨의 ‘한국광장’ 역시 고객의 60% 이상이 일본인이라고 한다. LA나 뉴욕, 베이징 등에 형성된 ‘한인타운’과 신오쿠보가 다른 점은 현지 한국인을 주고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도쿄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데 있다.
사실 한국, 대륙중국, 일본 세 나라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다. 마치 서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지식에서나 일상에서나 종교에서나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전 세대에는 대부분의 공통 경험이 책을 통해 이뤄졌다.
한자를 매개로 이루어진 공감은 결코 일상생활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20세기 전반기의 불행한 경험이 상호 이해의 구체성을 더욱 멀어지게 했음은 불문가지다. 그 대신 상호 굳건하게 자리 잡은 것은 바로 ‘민족’이란 이름의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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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작된 일본 영화 ‘피와 뼈(血と骨)’에는 주인공 김준평으로 분한 기타노 다케시가 제주도 음식인 애저를 날로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금의 한국인들도 돼지고기나 그 내장을 날로 먹는 모습을 보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텐데,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들은 어떠했으랴. 필자도 2004년 제주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해 이 음식을 맛본 적이 있다.
그 맛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귀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는 현지인들의 말을 듣고 나니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동물 내장을 가리켜 ‘호루몬(ホルモン)’이라고 한다. 특히 자이니카 1세대들이 잘 먹는다고 해서 ‘호루몬’이라는 말은 조선인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였다.
곱창구이집이 즐비한 서울 상왕십리 곱창구이 골목은 지금도 한국인들이 내장구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반면 에도시대 일본인들은 공식적으로 육식을 할 수 없었다. 불교가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1871년 메이지 유신 4년째 되는 해 12월에 천황은 스스로 육식을 실시하고 금지령을 해제했다.
당시의 문명개화파들은 서양인이 튼튼한 육체와 발달한 지적 능력을 가진 것은 육식을 한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쌀은 자연친화적인 음식이고 일본인은 서양인에 비해 결코 야만적이지 않으므로 육식을 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만만찮았다. 그래서 20세기 초반까지 육식과 밀가루 음식을 일상적으로 먹는 일본인은 많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온 조선인들이 현지인이 먹지 않고 버린 소나 돼지의 내장을 구워 먹는 장면이 목격됐다. 육식이 완전히 보편화하지 않은 일본인들의 눈에 내장을 구워 먹는 조선인의 모습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더욱 심해져 조선인은 ‘호루몬’이라는 비하적인 표현으로 불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호루몬을 구워 먹는 ‘호루몬야키(ホルモン燒き)’가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소주로 몸을 추스를 때 내장은 가장 좋은 안주였다. 특히 내장을 꼬치에 꿰어 말아 숯불에 구워 먹는 ‘구시야키(串燒き)’는 단연 술안주의 으뜸으로 서민의 인기를 누렸다.
지금도 후지산 관광지나 마쓰리를 하는 신사 앞, 혹은 도시의 뒷골목 군데군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술집이 바로 ‘야키도리집(燒鳥の屋)’이다. 이 야키도리가 알고 보면 호루몬야키에서 진화한 음식이다. 자이니카 1세대의 흔적이 여기에도 남아 있는 셈이다.
호루몬야키와 함께 1930년대 자이니카 1세대에 얽혀 있는 이미지는 ‘야키니쿠(燒肉)’라는 고기구이를 통해 나타났다. 1930년대 후반 오사카의 조선인 거주지역에는 갈빗집(燒肉屋)이 도처에 있었다. 이들 가게에서는 갈비를 숯불에 구워 주 메뉴로 내놓았다.
재일교포 식품학자인 정대성은 “이 무렵 오사카의 조선식 요릿집에서는 냉면과 야키니쿠를 전문적으로 판매했다”고 2001년 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이들 식당이 개업한 후 2~3년도 지나지 않아 야키니쿠는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테이블 가운데에 불판을 놓고 손님이 직접 구워 먹도록 하는 조리법이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요즘처럼 ‘가루비(갈비)’나 ‘부루고기(불고기)’가 아니라 일본어 ‘야키니쿠’였다. 1세대 자이니카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국민이 되도록 포섭됐으므로 그들의 음식 역시 일본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2007 년 7월 초순 나는 신오사카가 바라다보이는 ‘히로쥬산혼마치(東十三本町)’의 술집 골목에서 호루몬야키를 판매하는 식당을 찾았다. 젊은이들이 술집 안팎에 서서 각종 꼬치구이를 안주로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도 오사카 시내의 조선인 거주지에는 야키니쿠를 판매하는 가게가 많지만, 그 풍미는 상당히 한국적으로 변했다.
‘ethnic’과 ‘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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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년대 이전까지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 혹은 조선인을 상징하는 음식은 마늘냄새에서 호루몬야키와 야키니쿠, 그리고 기무치로 이어졌다. 한국음식의 이미지는 이 정도에서 고정돼 있었다.
흔히 문화인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에스닉 푸드(ethnic food)’는, 근대 이후 국가 사이의 경계를 넘는 집단이주를 배경으로 생겨난 용어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출신 갱들이 활보하던 시절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민족적 이미지를 소비하는 센터 기능을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에스닉’이라는 용어에는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 섞여 있는 여러 민족이 가진 각각의 문화적 특질을 비교할 때 ‘ethnic’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에스닉 푸드’라는 용어를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민족음식’이 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느끼기에 ‘민족’이란 단어는 ‘national’의 의미가 강하다. 북한 사회에서 ‘민족음식’이라 하면 에스닉 푸드가 아니라 고유한 자신의 음식을 가리킨다. 이는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 잡았던 일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관광이나 직접 접촉의 경험보다는 오로지 ‘이미지’로만 다른 민족을 평가하던 시절, 한국인이나 조선인을 비하하는 매개물로 ‘민족음식’이 쓰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일본 사회의 외국관광 붐을 계기로 다국적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는 새로운 세대를 중심으로 상호 이해의 기반을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이미지로 자리 잡은 한국의 ‘민족음식’이 아니라, 실제 한국인의 생활에서 소비되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다시 말해 20세기 초반 일본에서 형성된 ‘근대적 민족음식’으로서의 한국음식에 대한 이미지가, 지금 일본에서는 급속도로 해체되고 있다.
베이징의 냉면집과 카오뤄
1993 년은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이듬해다. 이 무렵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동남쪽에 있는 류리창(琉璃廠)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조선 후기 수많은 실학자가 베이징에 오면 류리창의 서점에 들러 서양의 진기한 지식들을 섭렵했듯, 한국인들의 관심은 골동품은 물론 고전적(古典籍)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즐거운 노동을 하고 나면 대부분의 한국 관광객은 류리창 입구에 있는 베이징 ‘카오야(·#53671;鴨·오리고기구이)’로 유명한 ‘취안쥐더(全聚德)’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 식당의 길 건너 서쪽에는 조선 ‘카오뤄(·#53671;肉)’ 식당이 있었음에도, 그리로 발길을 옮기는 한국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원래 카오뤄는 옌볜(延邊)과 선양(瀋陽)의 조선 식당촌에서 그 조리법이 형성된 이후, 1980년대 개혁개방 바람을 타고 베이징에 들어왔다. 옌볜 방식은 양념이 달고 육질이 질긴 편이고, 선양 방식은 달지 않고 육질이 부드러운 편이다.
베이징에서 성공한 조선 카오뤄는 당연히 선양 방식이었다. 쇠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베이징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면 고기는 돼지고기처럼 부드러워야 하고 맛은 짜야 했다. 류리창 입구의 조선 카오뤄 식당을 찾는 고객은 예전부터 주로 한족들이었다.
1980 년대 초반 개혁개방이 이뤄지기 이전, 베이징 시민들은 위아래 따질 것 없이 국가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다수였다. 중국의 조선족 가운데 베이징에 살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의 대학교수와 소수민족 관련 정부기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뿐이었다. 이들만을 상대로 조선식당이 운영될 수는 없었다.
톈안먼 서북, 베이징 아동병원 교차로에 있는 ‘조선렁(朝鮮冷?)’ 식당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줄곧 그 장소에 있었지만, 마오쩌둥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 덕분에 생겨난 이 식당의 냉면은 서울식과는 다르다. 나는 1993년에 이 집을 찾은 적이 있는데, 비위생적인데다가 냉면 맛도 좋지 않았다. 당연히 베이징에 오래 산 한국인들도 이 냉면집을 잘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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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했으니 1990년대 초반 베이징에 오는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식당이 곳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대기업에서 직접 운영하는 대규모 한국식당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는 소자본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베이징 한국인 집단 거주지 근처에서 한국식당을 개업했다.
그러나 그 출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국인 주방장과 관리자를 직접 베이징으로 불러와야 했으므로 물가 차이에 비해 식당 운영비는 서울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옌볜에서 온 조선족들은 이 부분을 하나의 틈새로 생각하고 파고들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적어도 2000년 이전에 베이징 서북쪽 교외에 있는 중국언어문화대학 근처의 우다오커우(五道口)라는 동네는 조선족 상인들이 운영하는 이른바 ‘조선식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몰려 살던 한국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값싼 조선음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맛은 서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에 비해 베이징의 중심 도로인 창안제(長安街) 주변의 고급 한국식당의 음식 값은 서울과 거의 비슷했다. 한국인과 조선인, 중국인의 합작을 통해 법적인 안정성과 서울의 음식 맛을 유지하면서도 저렴한 인력 운영방식을 채택하는 한국음식점도 생겨났다. 1996년을 전후해 베이징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음식점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하는 듯했다.
그러나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베이징의 한국음식점 가운데 한국인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업체들을 조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순식간에 많은 한국음식점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전까지 베이징의 대형 한국음식점은 한국인에게만 의미 있는 곳이 아니었다.
중국인 중에서도 1인분 가격이 30달러 안팎인 한국 갈비요리를 몇 인분씩 시켜 먹고 100위안짜리 인민폐가 가득한 가방을 카운터에 내보이며 계산하기를 즐기는 이가 많았다. 이들에게 당시의 고급 한국음식점은 음식 맛을 즐기기보다는 부를 과시하는 장소로 애용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음식에 대한 베이징 사람들의 관심은 이전에 비해 급격히 커졌다. 하지만 한국음식이 곧 ‘카오뤄’라는 베이징 사람들의 인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미 조선족을 통해서 이해한 조선음식의 연장에서 1990년대 말 베이징의 한국음식점을 이해했을 뿐이다.
중국인 중에서도 한족은 자신들의 문화적 경계를 대단히 넓게 설정한다. 오랜 세월 한족과 비(非)한족을 구분해왔지만, 동시에 손쉽게 한족으로 포섭해버리는 능력도 뛰어나다.
20세기 들어서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가 되어버린 조선족에 대해, 한족은 단지 ‘한어(漢語)’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광의의 중국인으로 포섭해버렸다. 그러니 한국음식을 외국음식으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음식은 조선음식의 연장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조선한국’ 음식점, 한나산
2006 년 5월, 나는 중국 중앙민족대학 조선문학과에서 전임강사로 있는 조선족 박승권씨와 함께 베이징시의 가장 바깥을 빙둘러 난 제6순환도로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외관이 마치 중세 유럽의 궁전 같은 이 건물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사우나와 각종 게임을 할 수 있는 복합 레저센터다.
이 건물의 주인은 박승권씨와 같은 대학 같은 과 동문인 30대 중반의 조선족 장문덕씨다. 입구에서는 경찰관 비슷한 제복을 입은 젊은 청년 둘이 거수경례를 하고, 1층에는 예전 경복궁 앞 중앙박물관 로비를 능가하는 규모와 시설을 갖췄다. 약 20분을 1층 로비에서 기다린 후 간신히 장문덕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내 가 그를 만나려 한 이유는, 그가 2002년부터 베이징 ‘조선한국’ 음식점의 으뜸으로 자리 잡은 ‘한나산(漢拿山)’이란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었다.
독자는 잠시 내가 사용한 ‘조선한국’이라는 용어가 매우 생소할 것이다. 이 식당의 음식은 결코 한국음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옌볜의 조선음식도 아니다. 두 음식의 특징을 복합했다고 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이다.
장 문덕씨는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중국의 조선족 중 수재에 속했다. 그러나 그가 입학한 해가 바로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듬해다. 그는 이내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 관광객 가이드를 하던 형과 함께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업을 크게 확장하기에는 베이징 사람들의 수입이 많지 않았고, 한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한국식당들과 경쟁하기에는 서울 맛을 그대로 낼 자신이 없었다. 이때 그가 착안한 것이 한국식당의 메뉴와 인테리어를 흉내 내면서도 결코 한국식당만큼 비싸지 않은 식당이었다. 한나산은 2001년 베이징에 1호점을 낸 후, 2002년에 4곳, 2004년에 10곳, 2005년에 16곳에 분점을 개업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각 부위를 제공하는 ‘카오뤄’와 함께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반찬은 김치, 콩나물, 조림 등 한국식당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식당을 장식하는 이미지는 매우 한국적이다. 여자 종업원들은 드라마 ‘대장금’으로 익숙한 조선시대 궁녀의 상징 당의(唐衣)를 입었다. 혹시 모든 종업원이 조선족인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대부분은 한족이라고 한다. 조선족을 종업원으로 쓸 경우 인건비나 서비스 면에서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는 경험을 장문덕씨는 갖고 있었다. 20 대 후반의 남녀 중국인 손님은 돌솥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집의 인상이 어떠냐고 물었다. 값이 베이징의 보통 식당과 비슷하지만, 인테리어가 깨끗하고 종업원들의 서비스 태도도 매우 좋고, 맛도 좋단다. 이렇듯 중저가의 한국식당에서 텔레비전에서 본 한국음식들을 먹을 수 있으므로 자주 온다는 이야기였다. 2006년 베이징에서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는 대단했다. 베이징의 최첨단 지역인 중관춘(中關村)의 비빔밥 전문점에서는 일요일마다 비빔밥 만들기 경연대회를 여는데, 참가자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한국음식이 베이징 사람들에게 하나의 ‘에스닉 푸드’로 이해되어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그보다는 경제 성장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특수가 맞물려, 이른바 ‘신파이베이징차이(新派北京菜·새로운 베이징 음식)’의 하나로 일부 한국음식이 차용된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이 점은 도쿄의 ‘겨울연가’ 마니아들도 마찬가지다. 김근희씨 부인이 운영하는 도쿄 쇼큐안도리의 ‘한국학생식당’은 실내가 드라마에 나오는 분식집과 똑같다. 이곳에서 떡볶이나 닭발조림을 안주로 한국 소주를 마시면서 드라마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일본의 대중문화 연구자인 이와부치 이사오이치는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지역사회에서 매스미디어에 의한 문화적 혼합이 전개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즉 20세기 내내 진행된 미국식 대중문화의 형식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고착화하면서, 상호간에 문화적 접근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 대장금’은 결코 음식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아니다. 2005년 7월에 만난 일본 NHK의 ‘대장금’ 담당 PD는 그들이 이 드라마를 방영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오로지 주인공 여성의 성공과 사랑의 스토리 때문이라고 했다. 음식이라는 소재가 시청자층을 넓힐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전통음식이 좋아서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가 높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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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 ‘대장금’이 외국에서 인기를 얻은 결과 오히려 한국 내부에서 더 많은 ‘전통’ 담론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결코 유익한 문화적 현상이 아니다. ‘전통’은 역사에 실재한 것이기보다는 최근에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민족’이란 이름을 내세워 한국음식을 ‘전통화’하는 데 정부와 지식인들이 앞장선다. 배용준을 좋아하는 일본인 마니아들은 결코 한국을 소비하러 한국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배우 배용준과 그의 드라마나 영화를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한국에 올 뿐이다.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근대적 이미지로 포장됐던 ‘민족음식’이 해체되고 있다. 그 대신 각자가 소비하는 음식은 한 사람의 ‘시민’을 상징하는 매개물로 자리 잡아간다. 음식문화로는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를 표현하기 어렵게 됐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그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 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이 곧 절호의 기회다. 많은 외국인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접한 보통 한국 시민의 생활 그 자체와 그들의 음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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