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17 오전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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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원류 - 고리(稿離)국
한국인의三 大조상 민족-맥(貊),예(穢),한(韓),
일본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郞 )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 중의 하나가 “일본 국민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였다고 한다 .
이런 화두가 그런 대작가의 전매물만은 아니다.
퉁구스 족에 속해 있고 우랄 알타이 어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 한국 국민들도 우리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문제에 한번 관심을 가져 봤을 법하다.
이 의문이 일어나면 우리 모두는 일제히 심리적으로 북쪽을 올려다본다.
한반도 북쪽 저 광활한 대륙 어느 쪽에서 왔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보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수학 공식 같은 확실한 정답은 현재 없다. 아직 한국 민족에게 문자가 없던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역사나 고고학에 희미하게 단편 정보를 짜 집고 여기에 역사 기술적 분석력을 동원해서 추측 할 수밖에 없다. 그 것들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지금 학계에서 말하는 한민족(韓民族)은 아득한 옛날로 올라가면 세 종족으로 나뉜다.
먼저 한 반도 남단에 자리 잡고 살던 한(韓)족이다. 마한, 변한, 진한 ,이런 국가들이 이 민족에 속한다. 다른 종족으로 한반도 지나 북쪽과 요동 벌에 걸친 중국 동북 지방 서쪽에 살던 예(濊)족이다. 고조선이 이 종족이 세운 국가이다.
또 다른 민족으로 우리 민족의 주류인 북방계 민족이 대륙에서 이동 해 온 길목에 위치해 있었던 맥(貊)족이다. 중국 동북지방 동쪽, 즉 옛날에 있었던 부여와 고구려다. 그러니까 한민족은 예족과 맥족과 한족이 합친 민족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예와 한은 한 걸음 앞선 농경민족이었고 맥족은 비교적 늦게 까지 수렵민족이었다. 예족, 즉 고조선의 원류나 남쪽 한족, 진한 변한등의 원류까지 따지면 완벽한 답이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파악이 희미하게 나마 가능한 맥족 고구려의 원류부터 찾아 올라가 보자
고구려는 세 부족중 최강의 국력을 키웠던 강성대국이었다.
고구려가 맥족인 사실은 우리 민족의 최고의 웅장한 역사서 광개토 대왕비가 이렇게 증명해준다.
비문은 고구려의 지배종족이 맥이었다는 사실을 수묘인(守墓人)호구에 대한 부분에서 새로 들어온 한(韓)과 예(濊)에 대한 구절로서 지배민족인 고구려 자신이 맥족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맥족은 오랫동안 생존해 있었으면서 백제라는 또 다른 맥족의 파생 국가를 탄생시켰고 아시아의 강자 중국을 위협 할 정도의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기도 했었다.
관심 가는 몽골족의 뿌리
한국인들은 이들 세 개의 종족이 한반도에 자리 잡기 전 우리 민족의 주력이 내려왔을 맥족의 국가 북쪽 국경선 밖에 자리 잡고 있던 우리의 이웃인 몽골족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저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추측되는 선조를 가진 우리는 선조들이 자리 잡았던 옛 고구려 땅, 그 북쪽에 자리 잡은 몽골에 대해서 우리 선조와 운명을 같이 하다가 헤어진 민족이 아닌가하는 희미한 유대의식을 상식적으로 느껴왔다는 말이다.
이런 친척의식은 몽골족이 우리보다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한 언론이 보도 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솔롱고스- 무지개가 뜨는 나라, 한국을 말한다.-는 우리 사촌인데 잘 사는 사촌이 다른 사촌에게 잘 해줘야 한다.”
무엇보다도 몽골족은 세계에서 우리 한민족과 가장 많이 닮아있는 민족이다. 넒은 얼굴과 작은 눈, 높은 광대뼈는 두 민족 사이에 공통으로 발견되는 제일 흔한 신체적인 공통점이다.
항상 말해지는 순수 중국 민족에는 없다는 아기 엉덩이의 몽고 반점,고시레 풍속, 솟대, 흰옷, 서낭당---- 한 두 개가 아닌 몽골과의 공통점으로 우리와 몽골족은 뭔지 모르게 한민족의 원류에 대한 비밀을 가진 것으로 알아왔다.
자- ! 여기서부터 몽골에 정통하신, 그 중에서 몽골의 역사의 전문가이신 전 강원 대학교 주채혁님의 논문과 중앙 대학교 박원길 교수의 저서에서 인용한 부분을 여기에 옮겨 싣는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출신지- 고리(稿離)국
한민족의 최초 남방 이동을 말해주는 기록인 고구려 건국의 시조 주몽(혹은 동명왕 또는 추모왕)의 기록은 한국과 중국의 8개 저서에서 보인다. 그 스토리는 이렇게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픽션으로 가득 찼지만 주몽이라는 연속극이 TV를 탄지가 얼마 되지를 안되어서 보신 분들은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주몽은 --------- 유화라는 여인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관계를 가져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주 영민했으며 커서는 활을 잘 쏘았다. 주몽의 뛰어난 능력을 시기한 지배세력들은 그를 죽이려 음모를 꾸미자 유화가 주몽에게 알려주자 주몽은 심복들과 같이 남쪽으로 도주하여 비류곡이라는 곡에 고구려를 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조명을 주어 볼 것은 8개의 사서에서 나타나는 주몽의 출신지역이다.
1. 고리(稿離))국-후한서(後漢書),논형(論衡),양서(梁書),위략(魏略)
2. 부여(夫餘), - 위서(魏書), 주서(周書),수서(隨書)
3. 북부여(北夫餘)- 광개토 대왕비
4. 동부여(東夫餘)- 삼국사기, 삼국유사
윗글에서 동부여나 북부여는 나라 이름이 아니라 부여의 지역 이름이거나 앞의 고리국이 있었던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보시다시피 북쪽 오랑캐인 고리국이라는 곳이 제일 많은 사서에 언급되어있다.
그렇다면 고리국이라는 곳이 어느 곳인가?
고리(稿離)-- 이것은 고대 몽골 족과 같이 북쪽에서 내려온 북방 민족의 한 뿌리다.
북한에 유학했었고 한민족의 원류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친 몽골의 학자 수미야바타르씨는 이 고리가 한때 몽골족의 한 지류였던 코리(KHORI) 족의 음역이라고 보여 진다고 했다.
코리 부족은 몽골의 AD 8세기경 몽골의 건국신화에도 나타난다.
몽골비사에서 말하는 원조 보돈차르의 어머니 아랑고아의 아버지가 코리 부족이었다고 하니 징기스칸의 외갓집 쪽과 코리족은 혈연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다.
몽골비사에 의하면 AD 8 세기경 코리 부족은 흑룡강 상류와 하류에 걸쳐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거주했었다.
후기의 연구에서도 이 지역에 고리국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부여가 길림 농안 장춘 지역에 있다고 했으니 북쪽에 있었던 이 지역은 부족국가 상태였을 고리국, 또는 고리 족이 살던 북부여(北夫餘)였을 것이 분명하다.
몽골의 구전 설화에 등장하는 코리
1992년 일단의 한국 몽골관계 학자들은 할힌골(골은 몽골어로 강을 뜻한다.)이라는 강이 보이르 호(湖)로 흘러들어가는 곳에서 지역 군수의 도움으로 잠수렌수렌이라는 촌로로부터 놀랄 구전 설화(說話)를 입수 할 수 있었다.
자세히 말하면 그때까지 한민족의 무대인 부여나 고구려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에서 한민족의 고대 자취가 발견 된 곳이다.
할힌골은 1939년 소련군과 일본군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던 지역이다. 일본은 이 전투를 노몬한 전투라고 부른다.
일대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넓은 초원지대이다.
왼쪽의 맨 아래 호수가 보이른 호. 푸른 색을 칠한 부분이 흑룡강의 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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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이 흘러들어가는 보이르 호수는 중국과 몽골의 국경을 이루는 경계선에 위치하며 몽골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이다. 길이가 40킬로미터, 폭이 21 킬로미터이다. 마치 조개 같은 모양으로 실제로 호수에 많은 민물 조개가 산다.
보이르호는 오르숀 강을 통하여 헐런호로 물을 흘러 보내는데 이 헐런호는 흑룡강의 상류로 흘러가는 지류로 연결되어있다.
그래서 결국 보이르호는 흑룡강과 통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호수 서식 어족(魚族) 이 흑룡 강 수계(水系)의
것들과 같다.
앞에서 말한 촌로가 사는 지역은 어로, 목축과 수렵등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중국이나 만주로 이동하는 길목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을 거쳐 지나갔었다.
흥안령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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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대리석으로 만든 석인상(石人象)이 하나 있다.
이런 지역 배경을 가진 지역의 촌로는 역사적 증언을 들려주어 방문한 한국 학자들을 적잖게 놀라게 했다. 노인은 말하였다.
“저 석인상의 동쪽에는 고려 사람이, 서쪽에는 몽골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곳 할힌골에는 살고 있는 고려인과 몽골인은 서로 내왕이 잦았고 서로 혼인을 하였다.
예컨대 초원에서 양부족의 여자들이 오줌을 누다 만나면 몽골 여자들은 왼쪽 손을, 고려 여자들은 오른쪽 손을 들어 흔들어 서로간에 우의를 표시했다.
고려인들은 할힌골에 성을 쌓고 살았다. 그 성의 페허가 남아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곳에 오랜 세월 살지 않고 동남쪽으로 이동해갔다.”
한국 학자들은 이곳에서 여러 가지로 의미 심상한 단서들을 발견했다.
몽골에서는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달랐다.
먼저 중국과 국경이 있는 몽골의 최 동단(東端)인 여기서는 1920년 몽골이 독립 할 때까지 한국(또는 조선)을 고올링고스라고 불렀다. 고올리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때까지 솔롱고스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더해서 몽골학자에 의하면 이 지역의 주민들은 신체적인 조건이나 각종 풍속이 몽골에서 한국인들과 가장 유사하다고 한다.
한국과 몽골 학자들에 의한 이 할힌골 일대에 대한 탐사와 조사가 92년도, 그리고 93년,94년 여러 곳에서 실시되었다.
여러 유적 중에는 95년 6-8월까지 실시한 이루어진 숨팅토이롬고올리 성읍터에 발굴에서는 고구려 석실 무덤 2기와 벽화 고분을 발굴하여 도깨비 무늬 숫막새 기와등의 고구려 유물이 많이 나왔었다.
고구려가 최대 강성할 때도 고구려 영토 북방의 경계선(흥안령) 밖일 수 있었던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리의 유적이 고구려의 것과 거의 같은 특징을 가졌다는 것은 고리와 고구려가 강한 유대가 있었던 관계임을 입증한 것이다. (몽골족은 성을 만드는 일이 드물다)
쉽게 말한다면 고리와 고구려는 같은 민족이라는 추측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발표한 고리국의 정체
북한 역사학계는 1970년 고리국을 맥국의 하나이고 이들 민족이 기원전 상기 보이르 호수가 있는 홀른보이르 평야에서 이들이 흑룡강과 그 아래 눈강 사이의 지역으로 대 부족 이동을 이룬 시기는 BC 5-3세기경으로 보고 부여와 고구려가 모두 이 때 이동한 고리족 다시 말하면 맥족의 후손들이 갈라져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북쪽의 학설에는 수령 우상 숭배 사상과 비논리적인 공산주의 이론 차용의 악습이 있어서 대체로 저평가 되곤 했는데 95년에 한국으로 객원교수로 왔던 한국학 연구소장 백웅진 박사가 위의 학설은 북한 고고학계가 직접 발굴한 결과에 기초했고 그들의 주장이 일정한 학문성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신빙성이 있음을 뒷받침해주었다.
눈강은 대흥안령 북쪽에서 발원하여 흑룡강의 아래에서 흘러가다가 제일 송화강과 합류하여 흑룡강의 중하류로 흘러든다. 그 사이의 삼각형의 지역이 북한 학자들이 말하는 지역이 된다. 이곳에서 수직으로 아래쪽에 옛 부여가 위치한 지역인 길림과 장춘 지역이 있다.
앞의 지도 다시 참조한다. 노란 색칠 한 부분이 북부여 또는 고리국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아마르 강은 흑룡강의 러시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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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 기록은 고리국 또는 북부여를 대체로 서주시기(BC12 - BC 8세기)경 이미 이 지역에 이주해 와서 백금보 문명이라는 한 미니 문명을 만든 부족으로 보기도 한다.
하여튼 부여와 고구려가 있기 전 몽골족가 헤어진 고리국이 씨족, 또는 부족 국가 형태로서 흑룡강 중류와 상류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북한이 말한 지역도 여기에 속한다.
후세에 이곳은 고리국이거나 북부여( 광개토대왕비)라고 부른 지역이 되었다.
(여기서 중국 역사학계에서 이곳이 탁발, 또는 실위 족이라고 불리는 족속이 살았다는 것은 너무 복잡해지므로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대흥안령과 외흥안령 사이에는 아주 내왕하기 좋은 저지대로서 흑룡강의 중류가 흘러 지나가는 지역이다.
보이른 호수쪽뿐만 아니라 흑룡강 연안에 따라 살았던 코리족이 이 이동하기 좋은 지역을 따라 남하했을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인 민족 이동로이기도 하다.
즉 몽골지역에 살던 부족들이 옛 만주 지역으로 들어설 또다른 대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몽골족과 갈라진 코리족이 통과하거나 거주했던 지역일 수가 있다.
주채혁 교수는 이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가 한민족의 이동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키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전문가이신 두 교수 분들의 저서에서 인용한 학설을 소개하였다. 다시 내 나름대로 다른 여러 저서에서 수집한 정보로 보완하여 한 번 정리해본다.
식량 확보 수단이 결정한 두 민족의 진로.
나는 여기서 보이르 호 연안에 사는 오늘날의 몽골족들이 양이 아니라 소를 키운다는 설에 관심을 둔다.
한민족이나 몽골족은 바이칼 호수 남안에서 살다가 신석기 때인 1만 3천년전에 남하하는 민족 이동을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바이칼은 코리족 활동 무대의 북서쪽 방향에 있다.
이 남하한 민족들은 몽골족이니 코리족이니 하고 구별이 없이 몇 천 년 동안 지금 몽골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살길을 찾아 더 멀리 흩어지고 분리돼 살면서 점점 분화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나는 코리족이 몽골족과 헤어져 흑룡강이나 구 만주 쪽으로 이동한 이유를 당시의 먹는 문제와 결부시켜 봐야 한다고 본다.
목축을 전문으로 했던 종족인 몽골족은 더 목축하기 좋은 몽골 초원 쪽으로 이미 흩어져 들어갔을 것이다.
코리족은 가장 동쪽의 몽골족과 같이 있다가 동쪽 구 만주쪽으로 더 이동해 들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바이칼 호수에서 남진한 몽골계의 민족중에 최고로 동진한 부족이 코리족이다.]
그 때 이 맥족 또는 코리족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수렵과 채집 그리고 내륙 민족 답지 않게 어업으로 먹고 살았었다.
( 어업은 나중에 흑룡강 연안에 살던 흑수 말갈들이 이어 받는다)
흑룡강은 이동하기 좋은 교통로 였었고 또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사는 식량의 보고이다.
평소에는 이동에 작은 보트를 썼을 것이고 겨울에는 결빙한 강위로 썰매를 이용했을 것이다. 러시아 민족의 시베리아 개발사를 읽어보면 겨울의 결빙한 강처럼 더 좋은 고속도로는 시베리아에 없었다.
[이때 코리 족은 이동이나 어업에 동물의 기름으로 방수처리를 한 가죽 보트나 북미 인디언들이 썼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 비슷한 것이 이용된 듯하다.-이런 형의 보트가 세종이 파저강 유역의 여진을 토벌한 기록인 서정록에 묘사되어 있다.-]
이래저래 지리적으로 이동이 편리한 흑룡강 양안으로 인구가 퍼지게 된 구조였다.
더구나 수렵민족이라면 흥안령이라는 동물의 낙원에도 또 관심을 가졌다고 본다. 흥안령은 남북 1,500키로의 긴 산맥이지만 평균 높이가 1,0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산세가 완만하다가 해야 할까? 알프스처럼 험하지도 않고 히말라야처럼 높지도 않다. 도처에 지나가기 좋은 고갯길이 있었을 것이다. 산을 넘어서 반대편 구 만주 평야로 나가는 것은 하루 길도 되지 않는다.
흥안령 산록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알아 주는 야생의 천국이었다. 산맥 양 산록에는 동물들이 시글시글한 천연의 엽장들이 있었다.
이 두 흡인력있는 요소가 코리족이 몽골족과 흩어져서 몽골 초원이 아닌 구 만주 쪽으로 더 동진하여 이동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대흥안령 북단 대백산- 단군이 내려왔다는 태백산과 이름이 비슷한 것이 어쩐지 호기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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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 흥안령 넘어 흑룡강과 그 아래 눈 강 사이에 점점 모여든 코리족은 씨족 또는 부족 국가를 꾸렸고 인구도 늘리기 시작했다.
코리족의 농경 민족화
추운 한대의 민족이 남쪽으로 움직이는 민족이동은 있어 왔지만 구 만주 지역에서도 고리국 -→부여 →고구려→ 백제의 순서로 남하했던 것은 이런 수렵민족이 더 생산적인 농경민족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여기서도 되풀이 됐을 듯하다.
나는 코리 족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농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서 농사, 또는 농경이라는 먹거리 마련의 혁명적인 수단이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것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는다.
학설은 다르지만 대개 지금의 페키니아라고 부르던 지역에서 7-8000년 전에 비로소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농사의 생산성은 채집이나 수렵이나 목축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인류가 다른 포유류를 앞질러 폭발적으로 인구를 불려가기 시작 한 것은 이 농사를 발견하고 나서 부터이다.
나는 보이른 호수에 살고 있는 지금도 살고 있는 몽골족이 몽골인의 전매특허인 양이 아니라 소를 키우고 있음에 주목한다.
코리족도 양이 아니라 소를 키웠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소를 키워서 식량으로 쓰느니 그 힘으로 농경을 하면 몇 배나 남는 식량을 얻을 수가 있다.
앞에서 코리 족에서 부여족이 갈라져 나왔다고 했다.
소를 데리고 농사짓기 좋은 더 따뜻한 남쪽으로 남하한 코리족이 농사라는 생산수단으로 인구가 급팽창하자 이동 생활 대신 정착 생활을 하게 되자 자연적으로 부여라는 국가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고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고 더 많은 인구를 가질 수 있는 따뜻한 기후를 찾아 이동하던 코리족의 남하는 고구려를 거쳐 백제에 의해서 한반도 남쪽에 와서야 매듭을 지었다.
[양이 아니라 소를 기르던 민족이라면 농사가 가능한 남쪽으로의 남진 본능은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나중에 이 본능은 밭농사보다도 생산성이 훨씬 더 우수한 벼농사 가능 지역의 영토 확장 전쟁으로 발전한다. 광개토 대왕의 비문도 북쪽 보다도 남쪽 공략쪽에 훨씬 더 많은 부분이 기술되어있다.]
고리국과 부여와 고구려의 경우
그러면 코리족 출신이라는 주몽과 고리국과 부여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부여는 건국되었지만 북쪽의 코리국은 멀기도 하거니와 너무 띄엄띠엄 있어서 부여에 의한 통치력도 미치지 못해 북부여라 불리며 독립국도 아니고 예속국도 아닌 과거의 부족 국가 형태를 느슨하게 유지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대로 북부여가 국가가 아니라 코리족이 살던 지역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닌 상태다. 단지 같은 민족이니까 고리국의 부족이 대국 부여에 대해서 신속하는 형태의 교류는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주몽 전설에 나오는 주몽이 부여에서 제거 당할 위기에 처하자 남으로 도주해서 비류곡에 고구려를 세운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스토리는 너무 짧고 모호해서 추리를 해볼 수밖에 없다.
고리국 출신, 다시 이야기 하자면 변방의 주몽이 같은 민족이 만든 나라라 해도 타국인 부여에 와서 남들의 시기를 받아 출세한 사실과 제거 당할뻔한 사연에 유의하자. 그리고 주몽의 활솜씨가 비범하다는 사실도 주목하자.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하위 문화권에 속한 변방의 인재가 더 문명된 중국의 심장부에 들어와서 출세를 한 경우는 거개가 다 그가 가진 무(武), 즉 군사적인 재능 때문이었다.
수렵민족인 변방의 고리국 출신인 주몽이 제도가 잘 정비된 부여의 권력 써클에 머리를 내밀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가진 군사적인 재능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가 공을 세워 진급을 하게 되고 힘도 가지게 되면 주변에 고향에서 따라 나선 인재들이 모이게 된다. 주몽은 이런 고향의 인재들을 받아 들여 육성했을 것 같다.
그는 이들을 규합해서 뭔가를 꾀하다가 발각 당하자 미리 내통해둔 심복이 관할하는 비류수 지역으로 도주해서 이곳의 토착 세력을 수하에 넣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했다고 보는 것은 결코 무리한 추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이 심복이 이미 현지 유력자들을 다 포섭해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만리장정으로 탈출했을때도 그곳이 이미 공산주의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거사를 해치운 주력 세력은 주몽뿐만 아니라 그의 수하가 모두 고향인 고리국 출신임은 나라 이름을 구려(句麗)로 했었고 광개토 대왕비에서 그의 출신을 굳이 밝힌 것에서 느껴진다.
고구려 건국의 여러 기록은 주몽이 마치 몇 명의 충실한 부하들만 데리고 무인 지경의 신천지에 내려가서 건국 했던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신화와 같이 모호한 기록에서도 그가 동반하고 남하한 부하들 이름과 현지에서 포섭한 유력자들의 이름은 다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부여를 탈출할 때 주몽은 이미 이들 심복들이 하위 지휘관으로 있던 대부대의 지휘관임을 암시한다.
( 박원길 교수는 이들 이름이 중세 이전의 몽골어 흔적이 강하게 있다는 글을 썼었다. 언어 분화가 아직 안될 그 때 코리족의 언어는 몽골어와 대단히 비슷했으리라고 본다.)
이들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서 현지 유력 세력들을 계속 규합하여 병력을 크게 늘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리 초인들이 횡행하는 신화의 세계를 고구려 건국에 대입하려 해도 주몽이 대부대를 이끌지 않았으면 부여의 추격이나 현지 토착세력의 제압이 불가능 한 것은 물론이고 통치와 치안 유지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무력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건국과 부여 모반이 치밀한 계획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가 건국의 터로 선택한 홀본성이 동이(東夷) 땅에서 가장 넓고 명마가 많이 나며 오곡이 잘되는 곳이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성을 먹이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농사’가 잘 되는 곳을 그가 의도적으로 선택했다는 말이다.
또 사람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없는 ‘명마’가 많이 난다는 말은 이미 이곳에 동원가능한 상당한 무장 세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홀본성으로 추정하는 오녀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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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여에서 최고의 땅을 기반으로 모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는 말이 될 것이다.
코리족의 코리는 결국 고구려(高句麗)의 구려(句麗)라는 이름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있던 고리라는 한문과 다른 이유는 한자를 쓰지 않았던 코리 족의 발음을 중국인들이 각각 들리는대로 멋대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고리라는 명칭 외에 비슷한 여러 한문 표기가 있다.
구려라는 한문은 나라를 열고 제도를 만들고 한자를 채용한 코리를 당사자인 고구려가 스스로 표기했기 때문일 듯하다.
우리는 구려라는 이름으로 발음하지만 그 먼 옛날 발음으로는 코리에 더 가까운 발음이 있었을 듯하다.
앞의 고(高)는 대한민국의 대(大)와 같이 높임말이라느니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고씨라서 그렇게 했다느니 하는 여러 설이 있다.
전한과 후한 중간에 왕위를 찬탈해서 짧게 다스렸던 다소 엽기적인 왕망이라는 사람은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 고구려를 하구려로 부르게 한 사건도 있었는데 하여튼 ‘고’짜는 좋은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 왕 때부터 간단히 줄여서 고려라고 불렸고 충북 중원군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에 이 줄인 명칭이 기록되어있다.
이렇게 해서 같은 맥족인 부여는 고구려가 접수했고 예족인 고조선은 중국이 점령하여 한사군을 열었다가 이 역시 고구려에 합쳐져서 맥족으로 통일되었다.
고려는 다시 왕건에 의해서 계승되어서 세계에 "Korea"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한반도 남단의 한(韓)족은 백제와 신라에 흡수되고 고구려가 중국에 접수 당한 뒤 중국인들이 통상 해 왔던 대로 통일 신라가 있던 좁은 지역을 옛 한(韓)으로 부르다 보니 우리는 한민족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맥(貊) 족은 해외용 명칭을, 한(韓)족은 국내용 명칭을 남겨 놓았다고 해야 할듯하다.
고구려 건국에 보태 준 것 없었던 중국의 억지 주장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2천년의 세월 동안 이런 명칭의 전래와 사용에 잠잠하다가 요새 와서 갑자기 딴지를 거는
억지에는 비상식성이 느껴진다.
2000년간의 한중관계에서 중국이 주장하는 대로 고구려가 자기들의 지방정권이었고 한국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논리가 타당하다면 힘이 막강했었던 그들의 조상에 의해서 왕건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그 이름을 그대로 쓰겠다고 했을 때 이미 시비를 걸었어야 했다.
코리족이 흑룡강 북쪽에 자리 잡고 그 후손들이 천신만고를 다하여 고구려를 건국했을 때, 중국 즉 한족(漢族)이 보태 준 것은 요새 말로 십 원 한 장 없었다. 그리고 한족은 그 뒤 계속 고구려 민족 생존을 위협하는 훼방만 놓았을 따름이다.
내 것은 물론 내 것, 네 것도 물론 내 것이라는 19세기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는 중국 민족 내재의 섬뜩한 대국주의가 머리를 드는 것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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