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1 고성혁의 역사추적
1969년 3월 17일 한미연합훈련의 시초라 할 수 있는 FOCUS RETINA 공수훈련을 참관중인 박대통령과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
1. 한미연합훈련의 시작 FOCUS RETINA
한미연합훈련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것이 팀 스피리트훈련이고 그 다음이 작년까지 한 RSOI 독수리 훈련이다. 그 훈련이 올해부터는 KEY RESOLVE 훈련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최초 대규모의 한미연합 기동훈련인 FOCUS RETINA훈련에 대해선 군사메니아들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2008SUS KEY RESOLVE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미연합훈련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2. FOCUS RETINA 훈련 실시 배경
1969년 3월 17일 여주 인근에서 최초의 한미연합 훈련인 FOCUS RETINA훈련이 개시되었다
1969년의 3월은 한반도에선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긴장된 시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의 북괴 124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같은해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당시 우리의 안보환경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그런 사건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국 지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68년도에 당선된 닉슨의 아시아 정책은 강력한 반공정책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런 태도는 훗날 닉슨독트린으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일대 변환을 맞게 되었다.
레티나 훈련장을 시찰하시는 박정희 대통령
3. 미국 닉슨행정부에 압력을 넣은 박정희 대통령
이를 감지한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 행정부의 태도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미국에 대해서 방위공약 실천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결과 69년3월에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FOCUS RETINA 훈련이었다. 이 훈련의 핵심은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방위체제를 점검하고 신속한 기동력과 막강한 전력을 북한에 보여줌으로서 북한의 오판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시기는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기였으며 군사력은 북한이 한국보다 월등한 시기였다.
그리고 원래는 68년 11월에 연합훈련을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프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그 협상진행으로 인해 69년 3월에 훈련이 실시되었다.
이 당시 북한의 대남 군사적 목표는 속도전이라는 이름하에 전면남침을 통해서 미국이 참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달사이에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북한의 군사적 목표에 대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 생존훈련 과정 시범을 보이는 한국군 공수특전사와 미 82공정사단
4. 포커스 레티나 한미연합훈련 탄생
그 과제의 결과물이 1969년 3월에 실시된 FOCUS RETINA훈련이었다. 북한이 기습남침하더라도 미본토에서 긴급히 증원군이 파병될 수 있슴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계획이 가능한 것은 병력수송에 대형수송기인 C141이 투입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미 본토와 한국간의 1만3600㎞를 불과 30여 시간에 비행하여 완전무장한 병력 2500여명을 작전지역에 투입하는 사상 최장최대의 공수훈련이 FOCUS RETINA 훈련의 핵심이었다. 이런 작전의 기본골격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당시 미최정예 부대인 82공정사단이 이 훈련에 투입되었고, 한국은 공수특전단장 정병주(鄭炳宙)준장을 선두로 한 600명의 공수단이 여주 남한강 일대에서 일제히 낙하했다.
▲ 한미 연합 공수부대의 낙하훈련을 참관중인 박대토령과 유엔군 사령관 찰스 H본스틸 대장
이 장면을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자 유엔군사령관 찰스 H 본스틸 대장이 이 광경을 단상에서 함게 지켜 보았다. 이 훈련에 동원된 병력은 7000여 명에 달했으며 2700대의 차량과 2900t의 장비가 투입됐다.
그러나 이 훈련이 있은지 얼마 안있어 닉슨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박대통령은 69년 8월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과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그 분위기는 냉랭하기 이를데 없었다.
5. FREEDOM BOLT (주한 미 7사단이 철수하면서 연합훈련의 이름 변경)
이렇게 시작한 한미연합훈련인 포커스 레티나 훈련은 71년도에 이름이 바뀌었다.
FREEDOM BOLT로 명명된 한미연합훈련은 당시 월남전에 투입한다는 명분으로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키는 정책에 대한 한국정부의 불만을 달래려는 의미도 있었고, 미 7사단 철수에 따른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사전경고의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이름자체도 한미양쪽을 강하게 연결하는 BOLT개념이 들어간 FREEDOM BOLT이다.
▲ 창원 현대정공에서 M48탱크 개수작업을 시찰하고 있는 박대통령과 정주영회장
그러나 이 훈련의 이면에는 미7사단의 철수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여 7사단이 사용하던 잉여장비, 특히 M48 탱크등등은 한국에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게끔 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대통령은 자주국방이라는 의지를 굳히고 본격적인 무기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여기서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의 의미속엔 북한에 대한 경고메시지가 이외에도 내면적으로는 신속기동능력이 있는 미군이란 점을 내세워서 주한미군 감축의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이런 사례는 독일에서도 있었는데, 63년 10월 서독에서 1만8000명의 병력이 참가한 빅 리프트 공수 훈련이 있은 직
후 서독에서 미군 1개사단이 감축되었다.
6. 팀 스피리트 훈련 탄생
김일성 김정일 전쟁범죄 집단이 가장 두려워 한 훈련
닉슨독트린으로 말미암아 주한미군은 약 7000여명 감축되었고 박대통령의 자주국방의 기치아래 무기개발과 한국군 현대화 훈련은 가속화 되었다.
70년대는 전체적으로는 북한보다 열세의 군사적 상황이었지만 이 당시 한국군의 지휘관은 상당부분 월남전의 실전 경험이 있었고, 국가안보가 최우선의 국가목표였다. 때마침 1975년 월남의 패망은 전 국민에게 안보가 생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 84년 팀스피리트 훈련 당시 미군의 M60탱크
그러다가 76년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한번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은 완전히 왕따 취급받았고 실제적으로도 약 1200여명 철수에 그쳤다.
이런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정책 때문에 또다시 한미연합훈련의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것이 바로 팀스피리트 훈련이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의지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 후 레이건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팀스피리트 훈련은 한미양군 약 20만명이 동원되는 아시아 최대의 군사 기동훈련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아마 이당시가 한미 양군의 전술적 차원에서 가장 차이가 없었던 때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군에겐 월남전 실전경험 지휘관과 더불어서 대간첩작전으로 생긴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비나 기술적으로는 미군에 비해 열세지만 군지휘 기동전술등 세부분야에선 서로의 노하우를 주고받는 명실상부한 동맹군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80년대는 86, 88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준비로서 미국의 한국중시정책은 그 어느때 보다 높았다.
아마도 이당시 레이건-대처-나카소네-전두환의 자유진영 라인은 2차대전당시 루즈벨트-처칠-드골로 연결된 자유진영 라인 다음으로 그 연결성이 굳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78년 T/S 당시 훈련장을 방문한 박대통령
88년 T/S 당시 미군은 험비를 본격적으로 전술 운영하기 시작했다
82년 T/S 당시 B52에서 기뢰를 투하하고 있다.
볏짚으로 위장한 미군 M60-A5 탱크
여주일대에서 기동훈련중인 한국군
팀 스피리트 훈련기간 동안 북한 역시 전국 비상령이 발동되어서 군단급 기동훈련이 벌어졌다.
이것은 북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94년 김일성이 죽기직전 김영상대통령의 방문을 수락한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의 팀스피리트 훈련과 서독에서의 나토 기동훈련과 미국의 스타워즈계획은 결과적으로 구 소련이 몰락하게 된 연결고리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팀 스피리트 훈련과정에서 한국군은 미군의 신개념 전술과 신형무기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미군 역시 월남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현재와 같은 미군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준비를 하게 된 계기가 팀스피리트 훈련이었다.
80년대 팀스피리트 훈련때 까지만 하더라도 한미양군의 상호보완적 훈련이 가능하였으나 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이 중단되고 92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전을 치루면서 완전히 차원이 다른 미군이 된 현재 한미 양군의 합동훈련은 그 차이가 워낙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현재 C4I체제가 확립되고 실전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미군과 아직 준비단계의 한국군이 발맞추어 합동훈련을 한다는 것은 다분히 보여주기 위함이 더 크다 하겠다.
7.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과 RSOI훈련 개시
Reception, Staging, Onward Movement, and Integration
한.미합동군사훈련인 전시증원연습(RSOI)은 한반도 유사시 전개될 미군증원 전력의 이동과한국군의 지원 절차 등을 익히는 연례 연습.
그러나 이 훈련은 93년 김영상정권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 팀스피리트 중단 배경엔 북한 핵위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칼루치가 대북특사로서 북한과 핵동결 협상을 할때 북한의 요구중에 하나가 팀스피리트 중단이었고 그것을 한미양국은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이후 북한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2006년 2차 핵위기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한미양군의 팀스피리트 훈련만 없어지게 된 셈이었다. 이전에는 북한과 한국내 반미단체의 주장은 팀스피리트 중단이었는데, 이것을 달성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주한미군철수 주장을 표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8. 럼스펠트 독트린과 주한미군 감축
부시2기 행정부와 노무현정권의 불협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때마침 럼스펠트 독트린으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대두되는 과정에서 노무현 행정부내 반미자주파의 득세는 아주 손쉽게 미군이 한국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6년이후 12,500명의 주한미군 철수는 7사단 철수이후 가장 대규모이다.
9. 전작권 전환과 KEY RESOLVE
노무현 정권이 미국과 협의한 전작권전환은 한미연합사 해체를 합의하였다. 한미연합사의 전력이 어느만큼 큰지를 안다면 그렇게 쉽게 할 사항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결정이 되고 말았다.
그 전작권전환 협상이 이루어 진후 한미연합 훈련의 이름이 또한번 바뀐 것이 올해 진행되고 있는 KEY RESOLVE 훈련이다. 이름 그대로 [결심의 열쇄]라는 의미에서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미연합훈련의 지나온 역사를 서술해 보았다. 무기체계와 스펙외에도 이런 일련의 역사를 알아야 더 의미있겠다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한미연합훈련의 역사에 대한 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이 없기에 아는 한도내에서 서술해 보았다
힘이 없이 외치는 자주는 고립일 뿐이다. 동맹의 가치, 특히 주변에 중국과 일본이 있는 가운데 우리에게 미국이라는 동맹의 가치를 새삼 되세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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