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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박정희시대

김신조 특수부대의 1.21 사태. 실록


김신조 특수부대의 1.21 사태. 실록




1967년 10월 초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康仁德(강인덕·북한국장,통일부 장관 역임·68) 중앙정보부 분석 과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서 제목은「최근 북한의 對南침투에 관한 분석-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

朴대통령은 보고를 들으면서 밑줄을 치고 때때로 메모를 했다. 결론 부분에 이르자 朴대통령은 한 문장에 밑줄을 두 번이나 치고 있었다.

「북괴는 내년부터 冬季작전에 돌입하여 본격적인 인민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는 부분이었다.

북한의 동계 게릴라 침투작전을 예상한 보고가 끝나자 朴대통령은 인터폰으로 『국방부 장관, 각 軍 참모총장들 다 들어오라고 해』라고 지시했다.

『康君, 이건 게릴라戰이라 중앙정보부 통제능력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좀 모이라고 했으니까 자네가 다시 한번 설명하게』

이날 오후 국방부 장관과 육해공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앞에서 康과장의 설명이 끝나자 朴대통령은 『내가 조만간 全軍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과 기관장들을 다 모아 놓고 對간첩작전 회의를 해야겠으니 자네는 이 내용을 설명할 준비를 하게』라고 했다.

대통령은 金聖恩 국방장관에게는 『국방부에 對간첩 작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할 테니 준비하시오』라고 했다. 「북한의 冬季 게릴라 침투 豫想報告」는 그때까지 중앙정보부에 속했던 對간첩 작전의 권한들을 대부분 국방부로 이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康仁德 과장이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것은 1967년 1월초 휴전선을 침투해 들어온 3인조 간첩을 체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들은 서울 시내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지내다 경찰의 불신검문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원조회를 하는 과정에서 특이점이 나타나 對共수사기관에 이첩된 경우였다.

康仁德 前 통일부 장관의 회고.

『세 명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지 않고 내려 왔습니다. 그저 서울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돈을 쓰다가 신분증만 몇 개 구해서 월북하라는 것이 전부였는데, 당시로서는 특이한 경우였지요. 특히 6.25 이후 겨울에 휴전선을 통해 3인조를 내려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눈밭에 발자국이 남기 때문에 북한은 극력 피하던 방식이었거든요. 「왜 내려 보냈나」하는 의문을 가지고 다각도로 분석해 보니 冬季작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겁니다』

5·16 당시 康仁德 해병대 중위는 전략정보관으로 해병대 사령부에 근무하다 중앙정보부에 차출된 경우였다.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군복을 벗고 분석국 과장, 부국장을 거쳐 1970년 12월 북한국장이 된 뒤 1978년에 퇴직했다 . 그는 매월 한 차례씩 북한 동향을 분석 보고하는 과정에서 朴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1967년 9월 초 金聖恩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북한이 게릴라 부대를 만들었다는 보고를 접했다.

金聖恩씨의 증언.

『9월 초쯤 방첩대장 尹必鏞(윤필용)이 해안으로 침투하던 공비를 생포해 심문했더니 이런 정보가 있더라면서 보고를 해 왔습니다. 「124군 부대」였지요. 정확한 규모나 위치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북한이 군사도발을 강화할 것이란 판단을 했습니다』

방첩대의 정보는 비교적 정확했다. 북한은 1967년 8월12일 민족보위성 정찰 국 직속의 對南 공작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124군 부대」란 명칭을 가진 이 집단은 2400명에 이르는 부대원을 300명씩 8개 基地(기지)로 나누어 對南 유격훈련을 시작했다. 각 基地는 남한의 일 개 道를 담당했으며 제 6기지는 경기도와 서울 지역을 담당했다.

이해 가을 제 6기지 부대원 중 정예요원 35명이 선발되어 서울 침공 계획 훈련에 돌입했다. 이 중 제1조 15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고 나머지 4개조(각 5명)가 각기 다른 목표를 동시에 타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제2조는 美대사관저를 습격하여 대사와 그 가족을 살해할 동안, 제3조는 육 군본부를 폭파해 將星들을 살해하고 제4조는 서울 교도소 정문을 폭파하여 죄수들을 탈옥시키며, 제5조는 서울 서빙고동에 있는 방첩부대의 간첩수용 소를 급습하여 간첩들을 구출해 함께 월북한다는 계획이었다.

훗날 생포된 인민군 金新朝 소위는 자신이 선발되었을 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임무가 실패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부대원들에게는 당과 수령을 위해 죽는 것이 최대의 영광이었으니까요』


1968년 1월6일 오전 10시,

朴正熙 대통령은 특별 기동차 편으로 강원도 원주역에 도착했다. 이날 야전군 상황실인 1군사령부 회의실에서 열린 「對간첩 非常治安회의」에는 丁一權 국무총리와 全 국무위원, 金炯旭 중앙정보부장, 任忠植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知事, 檢事長, 경찰국장 등 173명의 각급 기관장들이 참석했다.

개식사에서 朴대통령은 『북괴 만행을 봉쇄하고 무장 간첩을 섬멸하는 데 있어 유의할 일은 軍官民이 혼연일체가 되어 상호협조체제를 확립하여 汎국민적 對간첩작전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향토방위 법의 제정을 서두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 법을 잘 운용하여 지방 주민의 勝共정신을 강화하고 지역적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말했다.

이 회의에 중앙정보부 康仁德 분석과장도 참석했다. 그는 석 달 전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참석자 전원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이번 1월부터 시작될 북한의 동계 작전은 종래와 다른 대규모 게릴라 작전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對간첩 작전시 각종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들어가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날 특히 朴대통령은 참석한 金炯旭 부장을 향해 중앙정보부의 越權(월권)행위를 거론하며 질타했다.

『서해 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나면 정보부가 해군을 지휘해서 해군 사령관 노릇을 하거나, 육지에서 공비가 나왔을 때는 해당 지역 中情 지부장이 軍 사령관 머리 꼭대기에 앉아 병력을 여기 배치하라, 저기 배치하라는 식으로 월권행사를 하는 모양인데 … 중앙정보부는 그런데 나가는 게 아니고 북괴의 정보를 수집해서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요. 앞으로 軍 작전에 정보부는 일체 개입하지 마시오』

이날 金炯旭 中情부장은 얼굴이 벌개져 회의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金聖恩 당시 국방부 장관의 설명.

『첫째, 朴대통령은 金炯旭이 지휘하여 수사한 「동백림 사건」이 심각한 외교문제를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知識人들을 고압적으로 수사하는 정보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합니다. 두 번째는 그 날 대통령도 지적 했듯이 對간첩작전이 벌어지면 현지에서 중앙정보부의 월권행위가 하도 심해 군인들이 작전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비 두 세명만 출몰해도 군, 경찰, 정보부, 방첩대 등이 서로 다른 명령 계통을 가지고 현지에서 대립하다 초기 대응을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공비가 나타날 경우 상황에 따라 비상경계령을 甲, 乙, 丙 세 가지로 분류하기로 했다. 甲種 비상령은 경찰력만 동원해도 되는 상황, 乙種 비상령은 군·경찰이 합동 대응해야 하는 상황, 丙種 비상은 전적으로 軍이 통제권을 가져야 하는 상황으로 구분했다.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으로 對간첩작전 기구를 2월 초까지 구성하기로 했다.
이 기구는 軍을 중심으로 경찰과 정보부가 협조하는 체제로 결정됐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 오후 6시 회의를 마친 뒤 헬기 편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원주회의」에 참석하고 돌아 온 康仁德 분석과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자신의 분석대로라면 북한의 동계침투작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전방에서는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답답해진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국방부에 나가 있던 정보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야, 들어오냐?』라고 물었다.
그때 마다 『아직 별 일이 없습 니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康과장은 속이 탔다.

이 무렵 金新朝가 포함된 124군 부대 35명은 각자 임무에 따른 반복 훈련을 거듭하며 출동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13일,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金正泰(김정태)는 공격 목표가 너무 분산되었다면서 기존의 계획을 수정, 공격목표를 청와대로 한정시키고 朴正熙 대통령만 살해하는 임무로 축소시켰다. 인원도 35명에서 31명으로 줄였다.

공격시점은 1월21일 20시 정각. 공격목표와 날짜가 정해지자 청와대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주요 지점별 공 격조를 나눠 훈련에 돌입했다. 청와대 습격 D데이에 임박해서는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대상으로 실전 연습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암살목표로 결정된 朴正熙 대통령은 1월15일 오전 10시부터 11시40 분까지 청와대에서 年頭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는 경제건설과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부문의 성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사물에 대해 긍정적이고 善意的 인 관찰과 비판을 하는 것이 제2경제(경제의 윤리적 측면)의 요체』라고 말 했다.

예정시간인 1시간보다 40분이나 길어진 이날 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여유있게 미소를 섞어가며 답변했던 朴正熙 대통령은 13개의 질문 중 꼭 한번 金正濂(김정렴) 상공부장관의 조언을 얻었을 뿐 정확한 통계수치를 들며 혼자서 답변했다. 朴대통령은 5·16 혁명 이후 4번째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對월맹정책에 대해서는 평소의 강경론을 다시 강조했다.

이날 오후 朴대통령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초도 순시를 했다. 오후 4시20 분부터 6시30분까지 재무부에서는 徐奉均(서봉균) 재무부 장관이 재무행정의 9大 목표를 브리핑하는 가운데 京釜고속도로 재원 조달 방안을 보고했다.


1968년 1월16일

朴正熙 대통령이 농림부, 건설부, 상공부를 연두순시하며 특용작물의 중점 지원, 서민 주택 건설에 주력하라고 각 부별로 지시를 하던 시각, 金新朝 일당은 한국군 26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에 개머리 판을 접을 수 있는 接鐵式(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 및 對戰車(대전차)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황해도 연산에 주둔한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자정 무렵 開城에 도착, 다음날인 17일 새벽 비무장지대內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곳에서 야간 침투를 위한 僞裝(위장)을 했다.

이날 국방부는 「原州 회의」에서 朴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따라 분산된 對간첩 작전을 일원화시키는 새 기구안을 마련해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새 기구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對간첩작전을 총지휘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중 앙협의회와 정책을 실천하는 대책본부를 두고 대책본부는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월17일 밤 8시,

무장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正面(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작, 10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 침투를 시작했다.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 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부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하는 特殊戰(특수전) 기술이다. 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한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金新朝를 포함한 무장공비들은 이미 훈련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야간 침투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속에서 상대방이 이 쪽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훈련이었다.

이들은 美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과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바다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海水가 滿潮(만조)때마다 밀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海水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들이 침투로로 선정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선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誤認(오인)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舊型(구형) 철조망이었기 때 문이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의 증언.

『1967년은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 그때까지 휴전선 철책이란 휴전 당시 남북한 군인들이 직접 설치한 원형 철조망 서너 가닥이 전부였습니다. 새빨갛게 녹이 슬대로 슬었고, 가끔씩 보수공사를 한다고 갈아주기는 했지만 인적이 드문 비무장지대에다 예산부족으로 改修할 생각을 못했지요. 이것을 美 국방성에 부탁해 자재를 공급받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철책선을 만든 겁니다. 이 공사는 그 해 겨울, 2 49km의 휴전선 全지역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단 미군 지역 4km 정도만 제외되었지요』

美 2사단측은 鐵柱(철주)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對敵하려는 한국군의 대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1968년 1월18일 오전 5시,

은밀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지쳐 있어 이날 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假眠(가면)상태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들어온 시각에 朴正熙 대통령은 연두순시에 여념이 없었다.
1월18일에는 외무부, 문교부, 공보부 에 들러 1968년도 시정방침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1월19일,

與野 총무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국회가 2월 중순까지 空轉(공전)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은 법무 국무 교통 등 3개 부처를 순시했다. 그는 국군장병의 처우개선, 호남선 複線化(복선화)계획 촉진 및 호남지방 고속도로 계획을 수립할 것을 관계부처에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바로 그 시각,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禹聖濟(우성제·현 파주경찰서 보안계장)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 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이었어요. 한 눈에 공비라고 알아 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禹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禹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 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 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말을 붙여왔다.

金新朝(現 충남 예산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 습니다』

禹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로 주며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거야』라고 위협했다.

禹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힐끗 돌아 보니 깜깜한 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를 하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丹陽 禹씨 종가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19일 밤 9시경.


국가간의 전투력은 戰場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金新朝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계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뭇군 禹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前方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對간첩 작전능력도 6·25 이후 별로 改善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金新朝와 30명의 무장공비 목격 사건은 禹씨 4형제에 의해 1월19일 밤 9시 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30분 경이었다. 對간첩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 세 시간이 지난 자정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군들이 동무들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오게 만들어 주겠다」며 혹독한 훈련을 시켰거든요』


1월19일 오후 8시경

禹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金新朝 일당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이란, 약 30㎏의 짐을 진 重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이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 위에서만 가능 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金新朝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머리 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20일 토요일 새벽 두 시 경,

전화 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康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康仁德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 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金新朝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眞寬寺( 진관사)를 통과했다.
오전 6시경엔 북한산 碑峰(비봉)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없이 全力질주를 해낸 것이다.


1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金聖恩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30분경, 金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正熙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랑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건널 수가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最多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해 동안 전방지역 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월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砲艦(포함)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12일에는 중부산악 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여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분 간 엄호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
9월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었고
동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속도가 완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金聖恩 국방장관은 그 순간까지도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지난해와 유사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짐작했을 뿐 청와대가 목표 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이날 오전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을 전화로 불러내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서울 외곽에 집중 배치토록 지시했다.

6·25 당시 해병 전투단장(여단장)으로 한국군 1사단 지역이던 문산 지역에서 美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金聖恩 장관은 金新朝 일당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당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었다.

金 前 장관은 당시 자신의 추론이 어긋나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金新朝 일당이 나무꾼들을 풀어 준 지점에서 서울 眞寬外桐(진관외동)의 眞寬寺(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眞寬寺를 거쳐 北漢山 碑峰의 僧伽寺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 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1968년 1월20일 토요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의 병력배치 상황을 보기 위해 金聖恩 장관과 朴鐘圭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청와대 정문까지 내려왔다.

이틀 후 월남을 방문하기 위해 전날 청와대에 들러 朴대통령에게 보고차 인사를 했던 崔宇根(최우근·육사3기) 수경사 사령관이 청와대로 달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복 차림의 朴대통령이 정문에 서서 수경사 30대대 병력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후부터 朴대통령은 감기를 앓아야 했다.

崔사령관의 인사를 받은 朴대통령의 얼굴엔 긴장감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곁에 섰던 朴鐘圭 경호실장이 『정보부장보다 빨리 오네?』하며 농담을 했다.

오후 2시경,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金載圭(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되어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공비들이 이미 통과한 다음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공비들은 자신들이 놓아준 禹씨 형제들의 신고보다 빨리 포위망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에게 『주간에는 정밀 수색을 실시해 흔적을 찾고 야간에는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金聖恩 장관과 점심을 함께 들며『임진강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라며 아쉬워 했다.

金장관은 오후 2시경,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접했다. 받아 보니 북한산 북쪽 자락의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및 흘린 듯한 음식물 약간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철통 같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 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朴대통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보분석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이때 金聖恩 장관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결정을 내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로 蔡元植(채원식) 치안국장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 甲種 비상을 걸도록 하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월6일 「原州회의」에서 결정된 비상 경계령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甲種 경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이무렵 무장간첩들은 북한산 僧伽寺 아래 기슭에 모여 휴식에 들어갔다.
계획대로라면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까지 가 있어야 했다.

金新朝 목사 의 증언.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4일 동안 강행군했기 때문에 지쳐버렸던 것이죠. 원래 루트는 다음날인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악산을 타려면 공격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허리까지 눈이 쑥쑥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고 더 이상 산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산 하나를 둔 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碑峰에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밤 金聖恩 국방부장관은 저녁 늦게까지 朴대통령과 환담했다.
朴대통령은 감기가 조금 심해지는 듯 밤이 깊을수록 기침을 자주 했다고 한다. 金장관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남동 공관으로 돌아왔다.


1월21일 일요일 오전,

金聖恩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곧바로 출근해 任忠植 합참본부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지도를 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金炯旭 정보부장이 드나들었지만 對간첩 작전권이 국방부로 이첩되고 사건 성질상 자신이 개입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별 말이 없었다는 것이 金聖恩 前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1968년 1월21일밤 8시경,

朴正熙 대통령은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강한 체질이어서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던 朴대통령은 저녁 식사 후 드물게 감기약을 먹고 9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 시각, 北漢山 碑峰 밑에서 마지막 공격 캠프를 차린 金新朝와 무장공비 30명은 조용히 개인 장구류를 챙긴 뒤 눈 덮인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자 기관단총, 소련제 TT 권총, 수류탄 10발 및 對전차 수류탄 2발, 실탄 300발 그리고 대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방한모 차림에 한국군 군복이었으나 소련군式 장외투에 검은 농구화여서 어딘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추위와 어둠이 이를 가려주었다.


밤 9시30분,

이들은 산길을 내려와 내리막인 일반 도로로 접어들었다. 접철 식 AK소총과 수류탄을 숨긴 외투가 밖으로 불룩했다.
이들은 행군하는 군인 처럼 2열 종대를 갖추고 침묵 속에 움직였다. 반짝이는 것은 눈동자뿐.

金新朝 목사의 회고.

『생각해 보세요. 1개 소대가 휴전선을 넘어 4일 동안 한번도 걸리지 않고 서울까지 온 겁니다. 중간에 나무꾼을 살려두어 경계령이 펴진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남한의 경찰이나 군인들을 한번도 겁낸 적이 없었습니다 . 지난 4일간의 경험도 우리가 그들을 비웃는 계기가 되었지요. 검문을 당한다 해도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영화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범함 뒤에는 한국군의 약한 戰力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碑峰에 숨어 있을 동안 이들은 세부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침투, 습격, 탈출조 등 3개 조로 나누어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 었다고 한다.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 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그동안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을 걸어 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습격조는 목표에 따라 네 개조로 세분되었고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습격하여 朴대통령을 살해하고, 2조는 청와대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에 침입하여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전원 살해한 다음 도피 및 탈출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청와대 1층 습격을 맡은 2조 조장이 金新朝 인민군 소위였다. 이들이 세검정 길을 2열 종대로 걸어갈 무렵 서울 시내는 甲號 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뜸해 있었다. 이 괴한들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李珏鉉(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이었다. 그는 정제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무전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李서장은 구평동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세검정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는 괴한들을 목격하고 즉시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서울시경에 보고했다. 그 직후 李서장은 스리쿼터에 6명의 형사를 태우고 괴한들을 쫓아가 대열 선두에 차를 세웠다.

『당신들 뭡니까』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데 참견 말라』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자 李서장은 차를 타고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밤 10시경,

자하문 고갯길로 방향을 돌린 괴한들은 누각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와 청와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고개 아래 30여m 쯤엔 당시 종로구 청운 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있었고 그 담을 끼고 종로경찰서 관할의 자하문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날 검문소에서 근무하던 종로 경찰서 수사 2계 朴泰安(박태안), 鄭鍾壽(정종수) 형사가 언덕길을 내려오는 괴한들을 발견하고 검문소 밖으로 나왔다. 괴한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은 바 없었다.

『당신들 뭐요』

『너는 뭐냐』

『종로서 형사다』

『우리는 CIC 방첩대원들인데 특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서장에게 알렸는데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우리는 너희와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알려거든 너희 서장에게 물어보라』

공비들은 조금 전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썼다. 함경도 억양이 묻어 나왔다.

공비들은 긴장해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외투 속에 숨겨진 총구가 드러나는지도 몰랐다.
朴형사는 살짝 드러난 총구를 순간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들이 경기도 북쪽에서 신고된 공비들이란 직감을 했다. 곁에 섰던 鄭형사가 朴형사의 눈치를 보고 예삿일이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두 형사는 서로 거리를 좁혀 이들과 맞섰다. 그러자 공비들은 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열이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두 형사는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게 「불신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이 나타났다」고 무전 보고를 한 뒤 저만 큼 가고 있는 이들의 앞을 달려가 가로 막았다.

『거, 신분증 좀 봅시다』

『신분증 같은 거 없어』

『우리나 당신들이나 비슷한 수사기관에 있는데 피차 고생하는 처지에 서로 신분을 밝히는 게 좋지 않습니까』

『우리 신분을 알려면 계속 따라오면 될 것 아니야』

자하문을 내려가 효자동에 이르면 육군 방첩대 본부가 위치하고 있어 딱히 이들의 말에서 거짓말임을 발견해 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지리를 확실하게 익히고 들어 온 공비들이었다.

그러나 형사들은 직감을 믿었다. 두 형사는 공비들과 숫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자신들은 권총 한 정 없는 상태여서 진땀이 흘렀다.

다시 공비들의 대열이 움직였다. 두 형사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대열 맨 뒤에 따라가는 공비에게 말을 걸면서 자하문 고갯길을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5분경,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 내리막길에서 두 형사는 무장공비의 대열 맨 뒤에 걸어가던 부대장격인 金春植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金春植은 朴형사에게 『당신 경상도 말씬데, 고향이 어디요?』하고 물었다.

朴형사가 『대구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우리 친척집도 대구인데…』 라며 말을 흐렸다.

朴형사는 이들과 농담까지 주고 받으며 시간을 끌어 보려했으나 기다리던 증원 부대는 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괴한들은 자하문 고개를 넘어 오는 원효여객 60번 버스를 세웠다.

朴泰安씨의 회고.

『무장공비가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못 잡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공비들은 이미 7∼8명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극성스럽게 저지하기 시작하자 隊長인 듯한 자가 부하들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두 명이 이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고, 미치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 공비들의 목표가 청와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버스에서의 시비가 끝나자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나 청와대로 꺾어지는 커브 쯤에서 맨 뒤에 가던 金春植에게 朴형사가 끈질 기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金春植은 어느 새 대열과 7∼8m 떨어지게 되었다 .

朴형사는 속으로 「이놈 한 놈만이라도 잡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밤 10시10분.

朴형사는 길이 꺾어지는 쪽으로 공비들이 빠지면 연락을 받고 달려 올 증원 부대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공비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이르자 鄭형사와 함께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프차는 괴한들의 대열 앞에 멈춰섰다. 전진하던 대열도 멈칫 했다.

헤드라이트가 이들의 몰골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는 동안 차에서 당당한 체구의 사나이가 내렸다. 崔圭植 종로경찰서 서장이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을 밝혀야지요.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아무 것도 아니오. 우리는 CIC 사령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오』

『여기는 내 담당구역입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는 아무도 못 지나가요』 2조 조장 金新朝는 대열 중간에 서 있다가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 추는 가운데 崔圭植 서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저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남침 후 처음으로 당황했다고 한다.

공비들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을 때 崔圭植 서장 뒤로 시내 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길을 가로막은 지프차 뒤로 멈춰섰다. 공비들은 버스를 국군의 지원 병력인 줄로 착각했다. 잠시 후 또 한 대의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나오다 앞 차량이 멈춰 서 있자 급정거를 했다.

공비들은 연이어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는 외투 속의 총과 수류탄을 더듬었다.
그 순간 崔圭植 서장과 시비가 붙었던 공비가 외투 속에서 총을 꺼내 崔서장의 가슴을 향해 연발 사격을 가했다.

『드르륵, 드르륵』

『국방군 출동이닷!』

1·21 사태의 첫 희생자가 된 당시 36세의 崔圭植 서장은 가슴에 세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밤 10시15분경이었다.

총성이 나기 무섭게 공비들이 일제히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세 발의 수류탄이 작렬했다.

버스에 타고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金亨基(김형기·17)군과 회사원 洪裕敬(홍유경·29)씨가 수류탄 파편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고 버스 차장 金貞子(김정자·18세)양은 오른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공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국군인 줄 알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열 뒤에서 부대장 金春植과 말을 걸었던 두 형사가 金春植을 쓰러 뜨렸다. 朴형사는 오른손으로 金春植의 목을 죄면서 왼손으로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머리를 내려쳤다. 졸지에 돌멩이로 머리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金春植을 朴형사는 수갑으로 채워 生捕하는 데 성공했다.

멀리서 동료가 경찰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공비들은 도망가면서 두 형사를 향해 총을 쏘았다. 鄭鍾壽 형사가 쓰러졌고 朴泰安 형사는 왼쪽 귀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鄭형사는 며칠 후 병원에서 숨졌다).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퍼지자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대대장 全斗煥 중령 ) 병력들이 즉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한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는 「틀렸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휘부가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순간 휴전선에서 청와대까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고 뭐고 다 없어졌고 동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겁니다. 청와대고 작전이고 없었어요. 불과 5분 정도 교전한 것 같은데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던 겁니다. 일부는 오던 길을 거슬러 세검정 쪽으로 튀었고 일부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을 탔고, 저는 경복고등학교 뒷담을 넘었지요. 인왕산을 타고 北으로 가려고 말입니다』

인민군 소위 金新朝는 동료들이 많이 택하지 않은 루트를 골랐다.

자하문을 넘어 세검정쪽으로 도망가려던 공비들은 뒤따라 내려오던 시내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미리 대피한 상태여서 피해는 없었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두 대의 버스에도 수류탄과 기총소사를 해대며 도망쳤다. 밤 10시30분경이었다.

야간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은 성공했지만,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 가며 유격전을 벌인 것만큼 어리석은 非정규전 사례도 없을 것이다.


밤 10시 40분경

세검정 길과 북악산 일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대대 병력들이 투입되어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30대대 병력이 현장에 투입될 무렵, 경복궁 옆에 주둔하던 30대대 연병장에서는 대대장 全斗煥 중령과 작전주임 張世東 소령의 지휘하에 81mm박격포 10여 문에서 조명탄이 날아 올랐다.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혔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 15분부터 30분 사이 총성이 여러 차례 울린 시각, 朴正熙 대통령은 감기약을 먹고 잠을 자다 깨어났다. 朴鐘圭 경호실장이 제일 먼저 달려왔고 崔宇根(최우근) 수경사 사령관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와 상황을 보고했다.

비슷한 시각, 金聖恩 국방부 장관도 총성을 듣고 국방부에 비상전화를 걸었다.

청와대 부근에서 交戰中이란 보고를 받은 金장관은 즉시 차를 타고 청와대로 달려왔다. 朴正熙 대통령은 점퍼 차림으로 집무실로 내려와 있었다. 金장관이 보니 대통령은 경황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金장관, 내가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자다가 일어났는데 말이야. 거 참, 이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 올 줄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소?. 고약한 놈들. 뭐 못하는 짓이 없구먼. 그렇게 파괴하더니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 왔구먼』

『저도 놀랐습니다. 각하. 괴뢰군 놈들이 神이 아닌 이상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두 사람은 전쟁을 겪은 군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수행하던 경호원들이 보아도 무척 대담했다고 한다.

청와대 밖 하늘은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훤하게 밝아 있었다.

尹必鏞 방첩대장은 金聖恩 국방부 장관에게 戰果와 피해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 자하문에서 최초 총격전이 벌어져 종로경찰서장이 피격당해 순직했으며, 한 명은 생포했고 현재 청와대 외곽으로 몰아내며 추적중이라는 내용이었다.

朴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崔圭植 총경이?』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崔圭植 총경은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중 6·25를 만나 종합학교 31기생으로 임관했다. 5·16 당시 소령으로 복무중 혁명정부로부터 충청북도 경찰서 정보과장으로 발령받아 경찰에 투신하게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釜山市警 정보과장을 거쳐 1966년 8월 용산경찰서 서장으로 승진했다. 1년 뒤인 1967년 10월27일 종로 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아 근무중 참변을 당했다.

崔圭植 총경의 순직을 가슴 아파한 또 한 사람은 2층 부속실에서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앉아 있던 陸英修 여사였다.

이날 밤, 경호실에서 등화관제를 요구해 제2부속실의 洪晶子(陸英修의 조카) 비서관은 불도 켜지 않은 2층 복도를 오가며 陸여사의 심부름을 했다. 총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陸英修는 극도의 침착성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5·16 혁명하던 날 이모님 인상과 참 비슷했어요. 총성이 나자 어느 새 옷(한복)을 갈아 입고 서재 겸 집무실이있던 방으로 가셔서 촛불을 켰지요. 경호관들이 오가면서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崔圭植 총경이 순직했다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崔圭植 총경이 용산 경찰서장에서 종로 경찰서장으로 1년 만에 부임하게 된 것은 陸英修 여사의 칭찬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실했던 崔총경은 부산시경 정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아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부산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용산서장으로 발령받아 상경했다.
 
陸英修 여사가 崔총경을 눈여겨 본 것은 해외 순방이나 큰 행사 때 깔끔한 복장에 절도 있는 행동으로 일선 경찰들을 지휘하는 모습에서였다고 한다 . 그 후 관내에 청와대가 포함된 종로 경찰서장으로 발령받게 하는 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망인 劉貞和(유정화·67)씨에 따르면 남편 崔총경은 서울 용산으로 올라 와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종로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은 뒤로는 너무 바빠 부산대학교 교수들이 상경해서 논문 지도를 했다고 한다. 1968년 1월12일 崔圭植 총경은 부산대학교로부터 논문이 최종 통과되어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는 축하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9일 뒤 자하문 언덕에서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미망인 劉여사는 그해 2월26일 부산대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남편을 대신해 졸업식장에 참석, 학위를 받았다.

陸여사의 조카 洪晶子 비서관의 회고.

『그날 밤 이모님은 눈물을 참 많이 흘렸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崔총경의 죽음이 마치 자기로 인해 벌어진 것은 아닌지 자책하는 듯이 슬퍼했지요. 새벽 2시쯤 되자 「전화를 해야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라며 수화기에 손을 얹고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종로 경찰서에 전화를 하셨어요.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시면서 울먹이셨지요』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청와대로 속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와대 쪽에서는 李厚洛(이후락) 비서실장, 金詩珍(김시진) 정보비서관 등이 정부쪽에서는 丁一權(정일권) 국무총리,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 申稙秀(신직수) 검찰총장, 金玄玉(김현옥) 서울시장, 李洛善(이낙선) 국세청장 등이 달려 왔다.

각료들은 朴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던 중 『총성이 난 이상 시민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진상 발표를 신속히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난 朴대통령은 라디오를 켰으나 사건은 여전히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申範植 청와대 대변인을 불 러 『왜 방송이 늦어지고 있나』면서 『중계방송 하다시피 소상하게 보도해서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간첩 수색에 국민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보도 관제는 22일 오전 7시를 기해 해제되었다.

자하문 부근에서 交戰(교전)이 있기 직전인 1월21일 오후 10시 10분경, 蔡元植 치안국장실 무전기로 긴급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검동 고갯길에서 이상한 옷차림의 군인 30여명이 술에 취해 청운동 쪽으로 내려가고 있음」

蔡국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교전이 끝난 뒤였고 도로에는 수류탄으로 반파된 버스가 팽개쳐져 있었다. 길바닥엔 崔圭植 종로경찰서장의 시체와 아직 숨이 붙은 鄭鍾壽 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朴泰安 형사가 생포한 金春植을 지키고 있었다.

蔡국장은 朴형사와 생포 공비를 차에 태워 근처 효자동 파출소로 데려 갔다가 다시 蔡국장 차로 치안국으로 이동했다.
시간은 21일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뒤로 젖힌 양 손에 수갑이 채워진 金春植은 머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소매 없는 등산용 조끼를 입고 양 옆구리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조끼 앞가슴엔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을 만들어 위, 아래 두 줄로 네 발씩 모두 여덟 개의 수류탄을 넣고 흔들리지 않게 실로 누벼놓았다.

蔡元植 국장은 金의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내고 양 옆구리의 주머니에서 휴대용 식량과 주머니 칼을 찾아냈다. 蔡국장은 칼날에 쓰인 글을 보더니 곁에 서있던 朴형사에게 보여주었다. 「Made in Japan」이라고 쓰여 있었다. 직원들은 蔡국장의 무장해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朴형사도 蔡국장을 돕기 위해 金이 입은 조끼 양 옆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 바로 그때 蔡국장이 소리쳤다.

『엎드려!』

몇 초후 「꽝!」하는 폭음과 함께 金春植의 복부는 산산조각 나고 치안국 복도는 피범벅으로 변했다.

朴泰安씨의 회고.

『그때 蔡국장은 조끼 윗줄의 수류탄 네 발을 모두 제거하고 아래쪽의 수류탄 세 번째 것을 제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류탄은 낚시줄 같이 가는 선으로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을 물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겁니다. 蔡국장이 세 번째 수류탄을 제거하는 순간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이 뽑혀 올라온 것이죠』

蔡국장은 안전핀이 뽑힌 채 조끼에 달려 있는 수류탄을 보면서 공비를 복도 한쪽으로 힘껏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때문에 무장해제를 지켜보던 직원들과 朴형사는 파편상도 입지 않았다. 대신 복도와 수사과장실 유리창이 박살나면서 벽면 전체가 피범벅이 되었다.

生捕(생포)된 간첩이 爆死(폭사)로 사라져 버렸다.

蔡국장은 차를 타고 나와 종로경찰서를 들러 직원들을 격려하고 치안국 감찰계장 金德中 총경을 임시 종로 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자정 무렵 蔡元植 치안국장은 청와대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丁一權 국무총리, 李澔(이호) 내무부장관 등과 군 장성들이 속속 청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이 누런 연기를 흘리며 빛을 발하는 가운데 화약 냄새가 청와대 주위를 애워싸고 있었다.

蔡국장은 청와대를 지나 세검정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과 공비들의 격전이 있은 직후 신문, 통신, 방송사 기자들도 취재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한 시간여가 지나는 동안 사방으로 튀어 달아난 공비들로부터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자정 무렵 각 언론사는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기자들을 철수시켰다.

곳곳에 군인과 경찰들이 검문을 하는 중에 중앙일보 孫石柱(손석주·61세· 現 M&R대표) 사회부 기자와 張洪根(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만하장(現 올림피아 호텔) 부근에 신문사 깃발을 단 지프차를 세워 두고 검문소 통과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프에 무전기가 없어 본사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에 남아 있던 중이었다.

군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려는 孫, 洪 두 기자에게 『죽고 싶으냐』며 위협해 시비가 일었다.

蔡元植 치안국장은 순찰中 무전을 통해 파주 부근에서 교전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출발을 서두르는 순간에 군인들과 시비가 붙은 두 기자를 발견했다 . 蔡元植 국장은 현장을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들을 불렀다.

『어이! 기자. 이리 와!』

『아, 蔡국장님이십니까. 중앙일보 사회부 孫石柱 기잡니다』

『당신, 나하고 파주에 갈 수 있겠어? 교전중이라는데도?』

『당연히 가야죠』

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기자는 차에 오를 준비부터 했다.
이들을 태운 蔡국장의 차가 구파발을 지나 경기도 벽제 부근에 도착했을 때 蔡국장의 차량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한 놈 잡았습니다. 홍제동 파출소로 연행중입니다』

즉시 서울로 차를 돌렸다. 당시 홍제동 파출소는 30사단(사단장 許準 준장)의 임시 작전 지휘본부가 설치된 곳이었다.

시간은 22일 새벽 3시를 넘어 서고 있었다.

蔡국장과 두 기자가 파출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30사단 군인들이 민가 부근에서 생포한 공비 한 명을 파출소로 끌고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공비의 허리춤과 웃옷을 잡고 있었기에 국방색 군복 상의는 몇 군데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검은 목면 바지는 앞 단추가 열린 채 무릎까지 흘러 내린 상태였다.

사진부 張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몇 장을 찍은 뒤 밖으로 튀어 나갔다.
軍에 의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여서 언제 필름을 빼앗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몇 평 안되는 파출소는 일순간 사람들로 붐볐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 경찰, 中情요원들로 복작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孫기자가 공비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김신조다. 스물일곱 살이다』

―주소와 계급은.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이 살고 있다』

―남파 목적이 뭐야.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밤 8시에 공격을 개시해 5분 만에 끝낸 후 청와대 車를 뺏어 타고 문산 방면으로 도망하기로 했다. 이것이 잘 안되면 비봉 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몇 명이 왔어?

『31명이 국군 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넘어 온 게 언제야?

『16일 평양에서 출발했다』

―무기는?

『수류탄,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열 개와 탄알 300개 씩을 가져 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 군관(장교)이다』

―현재 기분은?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젠 겁도 안 난다』

孫기자는 金新朝의 윗주머니에서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의 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내용의 삐라를 발견했다.
잠시 후 金新朝는 앰뷸런스에 실려 방첩대로 끌려갔다.

金新朝가 체포된 곳은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였다.


1월22일 새벽 1시 30분경,

자하문 밖 세검정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30사단 공병대 소속 車章錫 이병은 세검천 위쪽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내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M1소총 자물쇠를 푼 車이병은 검은 그림자를 조준하려 애썼다.

야간사격은 총열 끝에 붙은 가늠쇠도 잘 보이지 않아 빗나가기 일쑤다. 車이병의 사격도 빗나갔다.
괴한은 세검천 변 외딴 집 옆에 있는 바위로 몸을 숨겼다.
두 시간 반 전에 경복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 쳤던 인민군 소위 金新朝였다.

『한 놈 나타났다!』

소대장 朴源造(박원조) 소위와 소대원들이 달려 와 포위망을 쳤다.
朴소위가 플래시로 바위 쪽을 비춰보니 짚단 더미 사이로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 을 보았다. 수하를 위한 암구호를 외쳤다.

『피아노』

『……』

『피아노』

『……』

대꾸가 없자 병사들이 바위 주변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순찰중이던 周喜俊 (주희준) 소령이 트럭을 끌고 와 헤드라이트로 괴한이 숨은 바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괴한은 그때서야 짚더미를 헤치고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안 그러면 쏜다!』

괴한은 주먹쥔 왼손 안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렸다. 안전핀이 빠진 채 땅바닥을 구르던 수류탄은 군인들과 괴한을 초긴장 속으로 몰았다 .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임을 감지한 한 병사가 뛰어나가 수류탄을 차 버리고 괴한을 생포했다.

현장에서 몸수색을 한 결과 괴한의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참깨 섞은 엿 두 개, 말린 오징 어 한 마리,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약품과 30cm짜리 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물이나 흙 속에 몸을 은폐할 때 숨을 쉬기 위한 호흡용 파이프였다.

나머지 공비들 중 일부는 세검정 부근 民家 쪽으로 튀었다.

21일 밤 11시경 홍제동 쪽으로 달아나던 공비 한 명은 지붕을 타고 도망가다 지붕이 내려 앉아 그 집 부엌으로 떨어졌다. 잠을 자던 李翔來(이상래·당시 65세)씨와 아들 容瑄(용선·당시 31세)씨 등 가족 5명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몽둥이로 괴한에 달려 들었다.

이들이 괴한과 몸싸움을 하던 도중 괴한의 몸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나와 가족들은 비로소 무장공비임을 알게 됐다.

李씨 가족 중 한명이 30여m 떨어진 홍제동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늑장 출동을 하는 바람에 공비와 격투를 벌이던 아들 容瑄씨는 공비가 쏜 권총에 복부를 맞아 숨졌다. 신고를 받고도 즉시 출동하지 않은 홍제동 파출 소장은 며칠 뒤 파면되었다.

자하문 경복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 첫 교전을 벌이고 학교 담을 뛰어넘은 공비는 金新朝뿐 아니라 5명 가량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몰려 다니며 교장 사택으로 뛰어 들어 마당에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집안의 유리창이 박살 났다. 폭음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수위 鄭四永(정사영·당시 45세)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밤 11시30분 경에는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자가 유탄에 맞아 숨지는 등 이날 밤 우리측은 崔圭植 서장과 민간인 6명 등 모두 7명이 사망했고, 朴泰安 형사 등 3명의 경찰관과 민간인 한 명이 부상했다.

공비를 쫓던 수경사 30대대는 22일 오전 8시경 北岳山에서 3명, 오전 11시쯤 다시 한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22일 오전까지 첫 교전에서 金春植을 포함한 다섯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한 명(金新朝)을 생포했다.


1월23일 오후 1시쯤

북한산에서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된 이후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 나갔다.

이 무렵 생포된 金新朝를 심문했던 방첩대에서는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金新朝에게 북한 전역에 걸친 부대 위치와 金新朝 자신이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게 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들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만났다. 첩보기를 띄워 항공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金 前 장관의 증언.

『오산 비행장에서 첩보기 SR-71이 이륙하더니 서해안에서 곧바로 北上하다가 평양 부근에 이르러 우회전하더군요. 그리고 원산까지 통과하는 데 정확 히 3분이 걸립디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항공사진으로 김신조가 그린 건물과 비교를 해 봤는데 정확했습니다』

방첩대의 조사와는 별도로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 수색대는 1월30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27명을 사살하고(자폭 포함) 金新朝 한 명을 생포했으나 우리측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공비 세 명 중 한 명은 2월 중순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 지 두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지었다.


출처: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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