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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청계천 개발 역사

청계천의 역사

청계천은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600여년 전(1394년)부터 백성들을 품고 흘렀던 곳이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北岳山)의 남쪽 기슭, 남산(南山)의 북쪽 기슭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분지의 모든 물이 한 줄기로 모여 내를 이루니 이것이 청계천이다. 길이 10.92Km. 최대너비 84 m로,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내이다. 


1800년 초 서울 청계천 지도.

청계천 유역은 총 면적 50.96㎢로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도성 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엔 하천을 경계로 북촌엔 문반(文班)이, 남촌엔 무반(武班)이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엔 북촌과 남촌의 완충지대로 서울 보통시민이 고단한 삶을 꾸려온 생존의 현장이기도 했다.

청계천의 역사와 변천(서울시청)


'청계천(淸溪川)' 이름의 유래

‘청계천(淸溪川)’이란 이름은 원래 ‘청풍계(淸風溪)’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청풍계는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 즉 지금의 청와대 서북쪽 북악산 바로 남쪽 기슭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던 말. 이곳에서 부터 냇줄기가 시작되므로 이를 ‘청풍계천(淸風溪川)’이라 하였는데, 이 이름이 줄어 ‘청계천(淸溪川)’이 되었다. 따라서, 청계천은 원래 지금의 청계천 상류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골짜기 시내만을 일컫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내는 한양의 중심가를 흐르는 지점에서는 따로 ‘개천(開川)’이라 불렀다. 이 내는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전곶교(箭串橋), 즉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남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 개천에는 수표교(水標橋), 오간수교(五間水橋), 광교(廣橋), 영미교(永尾橋), 관수교(觀水橋) 등 모두 24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서울 4대문 안의 한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서울시내의 북악과 인왕, 남산 등 여러 골짜기의 모든 물이 모여져서 중랑포로 빠져나가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내이다.

옛 문헌에
'이 하천은 서울 하수도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하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역수(逆水)하는 물기운이므로 한 나라 도읍지의 명당수(明堂水)가 된다'고 하였다
. 지금의 광교, 수표동, 관수동 등의 명칭은 모두 청계천과 관련된 이름이다.

태종 때부터 이 하천에 여러 차례 둑을 쌓고 폭을 넓히는 등 치수에 힘을 썼다. 일제 때 새로 생긴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 하듯이 이곳은
'하천을 수리하여 열었다'는 뜻에서 '개천(開川)
'이라 불렸다. 여기서 개천이라는 말이 하천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특히 세종 때 시작한 석축제방 공사가 영조 때 마무리되자, 임금이 친히 광통교에 나와 돈 20관을 다리 위에서 아래로 던져 아이들이 주워 갖게 하고 시를 지어 화답케 하였는데 이때
'개천을 끼끗이 치웠다'는 뜻의 '청개천(淸開川)"이라는 글귀가 그후
청계천(淸溪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005년 10월 1일 조선일보>


사실 청계천과 관련된 공사는 그 역사가 깊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공사는 조선 태종(1411년) 때 이고 이후 고종 때까지 청계천에서는 수시로 준설 공사가 이뤄졌으며 6·25전쟁 직후의 피폐한 상황에서도 하수도 개수 공사가 추진됐다. 청계천에서 잦은 준설, 복개 공사가 이뤄진 것은 하천 범람, 위생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조선 왕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청계천 공사와 관련된 역사를 알아본다.


▽ 조선시대

도성 내에 있었던 청계천은 주민 생활에 위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컸는데, 무엇보다 하천의 범람이 문제였다. 이 개천은 조선 왕조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의 자연 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지면 민가(民家)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汚水)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다.

1407년 서울의 하천이 범람하자, 근본적인 조치를 위해 1411년 11월 제3대 임금 태종이 개거도감(후에 개천도감으로 이름이 바뀜)을 설치하고 52,800명의 연인원을 동원한 대규모 개천공사(개거공사, 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때의 공사는 일부 구간의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히는 한편 돌과 나무로 제방을 쌓는 것이었다. 개천 역사가 종결된 후 개천도감은 그대로 행랑조성도감이 되었다.

이후 세종 때에는 도성의 개수와 방수, 방화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수성금화도감이 설치되었고 성종 때에는 개천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수해에 대비했다.

한편 개천은 최적의 자연적인 하수도이기도 했다. 조선초기 그 용도를 둘러싼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대에 개천의 용도는 하수도로 낙착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인구의 증가와 자연재해 빈발이라는 상황에서 개천이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되는 근본적인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서울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여 하수량 자체가 늘어났고 백악과 남산 일대의 수목이 땔감용으로 남벌되고 일부가 경지로 개간됨으로써 토사의 유입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영조 때에는 준천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영조는 1760년 2월 20만 연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준천사업은 하천을 준설하는 동시에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하고 양안에 석축을 쌓는 행태로 진행된 이 공사에 동원된 인원은 지금의 청계천 복원사업에 동원된 연인원과 맞먹는다. 이 공사로 인해 구불구불하던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 하였다.


이후 준천은 정부의 재정 곤란 속에서도 순조, 고종때에도 2~3년마다 한번씩 정례적으로 실시되어 1908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1910년대 우리나라 땅을 거머쥔 일제는 그 초기에 이 내를 '청계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행하였다.



일제 강점기

1908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한 마지막 준설이 시행된 후 1918년까지 10여 년간 준천은 한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일제가 청계천을 악의적으로 방치했다가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지배의 중추를 과거 조선과 대한제국의 중심부로 이전할 준비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부터였다.

1918년 25만 여 원의 경비를 들여 비로소 준천에 착수한 것은 '경성'의 하수문제를 해결한다는 기능적 의미 외에 조선 지배의 중추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 둔다는 의미도 갖는 것이었다. 이후 청계천 준설공사는 수시로 시행되었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면서 조선의 농촌 과잉인구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고 농촌을 떠난 농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청계천 제방에도 무허가 임시 건물이 빼곡이 들어찼다. 그리하여 천변은 서울의 대표적 인구 밀집지역으로 부상했다.

천변에서 특히 심각했던 것은 위생문제였다. 장마가 지면 침수되는 가옥이 부지기 수였고 전염병이 돌면 바로 전 시가를 휩쓸었다. 집중호우라도 내리면 청계천 하수가 주거 밀집지역으로 바로 역류하였다. 서울 주민의 사망률은 청계천에 가까운 곳에 거주할 수록 높았다.

도심 한복판을 흐르면서 경관면이나 위생면에서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개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은 '복개'였다.

개천을 복개하려는 최초의 계획이 수립된 것은 대한제국기의 일이었다. 1895년 내부령 제9호로 종로 가가의 철거와 도로확장계획이 발표되었고 곧 종로에 전차부설공사가 시작되었다.

1909년에 황토현 절개공사로 얻어진 토사를 이용하여 황토현 구간 일부를 메운 일이 있었지만 이것이 청계천의 본격적인 복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청계천을 복개하여 그 터를 이용하려는 계획은 1926년에도 수립되었다. 대광교에서 주교정까지를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서 33,000㎡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 곳에 택지와 상가 위락시설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계천을 복개할 경우 홍수시에 배수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기각되었다.

청계천 처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이후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설정하고 경성을 그 중심에 놓으면서부터였다. 이른바 '대경성 계획'이라는 것이었는데 1934년의 시가지 계획령을 계기로 서울의 전반적 개조에 대한 구상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청계천의 전면 복개 구상은 1935년 최초로 발표되었다. 당시 경성부의 마치다 토목과장은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로 만들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놓는 구상을 발표했다. 대경성 계획으로 영등포를 비롯한 1군 8면이 새로 경성에 편입될 경우 당시의 시설만으로는 늘어나는 교통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민간의 교통수단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군부의 교통수요였다. 용산, 영등포 공업지대에서 생산되는 군수물자를 만주로 신속히 이송하기 위해서는 경성-의주간, 또는 경성-원산 간 도로와 철도의 보완이 필요했고 토지수용비가 필요없는 청계천을 새로운 도로, 철도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재정 문제를 내세운 조선 철도국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1936년에는 광교와 삼각정 사이를 우선 복개한다는 안이 마련되어 1937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광화문 우체국-삼각정 간을 복개하고자 하였다. 이와 동시에 1939년에는 복개 후 청계천을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려는 안이 마련되었다. 또 1942년부터는 삼각정 동쪽 지역의 청계천을 개수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청계천의 전면 복개안은 1940년 일제가 확정해 놓은 것이었지만 전쟁에 쫓기던 일본이 이를 완수하기란 불가능했다.
일제가 지배하던 기간 중에 복개된 구간은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통교까지의 구간에 불과했다.


▽ 광복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는 정치적 혼란기로 건설 전반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시 하수로는 거의 방임 상태였으며 하수로 유지사업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재정 상태였다. 이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참화를 당하였고, 12,400m의 하수로 시설도 피해를 보았다.

청계천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전후하여 근 10년간을 방임상태로 두어 토사의 매몰이 극심하였다. 이에 1949년에 광교에서 영미교까지 연장 13Km를 3개 공구로 분할하여 9월 30일 동시에 하도 개수공사를 착수하였으며, 1950년 3월중에 준설을 완료하여 계획하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해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든 건설사업이 중단되었으며, 1950년 170만 명이었던 서울시 인구가 1951년에는 불과 60여만 명에 이르러 계획적인 하천 개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3년 환도한 이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현실적으로 하천정비와 복개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4년에는 5,256만 환을 투입하여 청계천을 포함한 하수도 개수를 추진하였고, 1955년에는 광교 상류의 135.8m의 청계천 암거공사를 실시하여 일제강점기에 종로구 계동에서 광교 사이의 일부를 복개한 후 첫 번째 복개공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 5월 25일에 착공하여 196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당시의 청계천 복개공사는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측)까지 시내 한복판을 가로 흐르는 길이 2,358.5m, 폭 16∼54m의 청계천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였다. 이 방대한 공사는 완성되기까지 총 16억 6,170만 환의 공사비가 소요되고 연 24만 2천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 후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제2청계교까지의 구간이 복개되었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되었다. 복개된 청계천의 위생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청계천 양안에 차집관거 공사를 1984년에 착공하였으며, 1992년에는 하수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하수도 재정비사업이 실시된 바 있다.

청계천에 대한 복개공사가 완료된 이후 복개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상가가 밀집하고, 교통량이 폭주하면서 도심에서 외곽으로 진행하는 새로운 도로의 신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도로 위에 새로이 고가도로가 만들어졌다.

서울시내에서 고가도로가 제일 먼저 가설된 것은 1968년에 준공된 아현 고가도로이다. 서울시에서는 아현 고가도로 건설의 경험을 살려 청계고가도로 공사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8월 15일 공사에 착공하여 1971년 8월 15일 완성되었다. 총 연장 5,650m에 도로 폭이 16m에 이른다.

1967년 청계고가도로 건설에 앞서 이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진행되었고 그 자리에 거대한 건물군이 들어섰다. 바로 세운상가였다.


1976년에는 동대문운동장 주변의 월남민 밀집지대에 대한 재개발이 단행되었다.




청계천 복개공사

청계천은 복개되고 판잣집은 헐리고



8·15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청계천의 유지 관리에 힘써왔다. 청계천은 옛날에도 지금과 같이 4대문안을 흘렀지만, 6·25 전만해도 이 청계천 물은 그리 검지는 않았었다. 청계 이름 그대로 맑은 시내였다.

그러나, 6·25를 전후해 보기에 흉칙할 정도의 모습을 보이며 시내 한가운데를 흘렀다.
서울시는 이러한 청계천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하여 덮어 버리기로 결정, 1958년 부터 복개공사에 착수하였다.





복개 당시 청계천변과 다리 밑에는 바라크(병영)라고 불리는 판잣집, 토막집 등 무허가 불량주택이 1천여 가구 이상 들어서 있었고, 청계천은 일대에서 버린 갖가지 오물로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로 오염이 극에 달해 있었다.





청계천변의 판자집 1961.8.1 /연합                                      복개를 위해 청계천 주변 판자촌 철거. 1960.10.29 /연합


서울시는 환경 정비와 도로 확장의 명분을 걸고 이들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고, 대대적인 하천 복개공사에 들어갔다. 물론, 철거민들과의 공방도 만만치않았다. 철거민들은 미아리, 상계동, 봉천동등 서울시가 산허리를 잘라 택지로 조성한 산동네로 뿔뿔이 흩어져갔다
.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 5월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 앞)까지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대한 공사는 완성되기까지 총 16억6170만 환의 공사비가 소요됐고 연인원 24만2000명이 동원됐다.

19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와 주교(舟橋) 사이를 완공하여 너비 50 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고 61년 말에 완성, 길이 2400m, 폭 50 m의 간선도로가 생겼다.




1960년 8월 5일의 청계천 복개 공사의 모습. /연합                 청계천 복개공사 (64.5.29). /연합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6권에 실린 모습이다.


그 후 동대문의 오간수교∼제2청계교 구간이 복개됐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됐다.
마장교까지 길이 6천m의 복개도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복개 공사가 일단락되어 청계천 일대가 도로로 쓰이고있던 1967년 8월8일 김현옥서울시장은 이곳 청계천 복개 도로 위에 모두 35억 원을 들여 신촌로터리에서 용두동을 잇는 고가도로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도로는 그리 좋은 것이 못된다는 일부 여론에 밀려 당초 계획에서 조금 축소된 채 삼일빌딩 옆에서부터 신설동 구간이 1차로 완공된 채 끝나버렸다.




                                                                                        1969년 4월 17일 서울 청계천 3ㆍ1고가도로 모습. /연합




청계천 복원공사
2003년 7월 1일 ~ 2005년 9월 30일

2003년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원공사’는 청계천 고가도로와 복개도로가 건설된 지 수십 년이 지나 더는 보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노후됐기에 이명박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시절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 9월 30일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2003년 7월 1일, 1955년 광교 상류지역을 복개한 이래 48년 만에 덮었던 청계천을 다시 여는 공사가 시작되어 2005년 6월 1일에 처음으로 청계천에 물을 흘리는 통수식을 가짐으로써 대부분의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2005년 10월 1일 공식개통 함으로서 2년3개월에 걸친 청계천 대공사가 막을 내렸다.



南大門路 1街 朝興銀行 본점 옥상에서 바라본 淸溪川 復元工事 着工 이전과 이후.

撤去工事 着工 하루 전인 2003년 6월 30일 淸溪高架道路의 모습(왼쪽).
河川 復元을 위한 굴착과 다리 공사가 한창인 淸溪路(가운데).
復元工事 完工을 한 달 앞두고 시원스럽게 뚫린 淸溪川주변.


조감도






청계천 복원 공사전의 高架道路와 주변 모습



청계천 광교부근 복원전                                       청계천 공사의 주인공 이명박 서울시장이 지난 5월25일 
                                                                                       청계천 일대를 방문해 공사 현황등을 점검하고 있다.



                                                                                       2003년 6월 복원공사 직전의 청계고가와 황학동 벼룩시장.


공사 착수 및 한창 공사중인 모습


2003년 7월 1일 서울 광교 청계고가 시작점에서 열린 복원공사 기공식과 한창 철거중인 2003년 7월 30일의 모습.


이런 다리가 22개나 건설된다.



청계천 복원도중 문화재 발굴.






청계천 복원 후...


청계천 복원공사 이후 서울시가 처음으로 공개한 청계천 일대 항공 사진.

길과 길이 만나 마을이 되고 길과 물이 만나 나루가 된다. 길과 물과 사람이 만나 도시를 이루었으니 다시 태어난 청계천이 서울을 싣고 흐른다. 복원된 청계천은 도시환경 개선은 물론 주변 상권 발달로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 청계광장 쪽에서 바라본
새 청계천 야경.



청계천 개장하던 날

출처 : http://www.imno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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