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이집트 고대 투탕카멘 왕의 미이라 발굴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
3300년된 시신이 미이라로 발견된 당시, 대단한 뉴스 였으며 이후 일부 국가 세계사 교과서에도 등제 될 만큼 중요한 고고학적 가치를 인정 받았다. 지난 2005년, 미이라 발견후 근 80여년 만에 아래 사진과 같이 복원 되었다.
이집트 신왕국 (이집트제국) 제18왕조(기원전 1570년 - 1293년) 11대 파라오(왕의칭호) 투탕카멘은 9세에 파라온에 오른 뒤 불과 10년만인 19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고대 이집트 투탕카몬 왕은 신장이 167cm 작은 체구로 당시 발견된 왕관과 정확하게 골격이 맞다고 한다.
이제 본론인 이집트 고대 역사상 2번째 여왕에 해당하는 하트셉수트(Hat-shep SOOT) 여왕에 대해서 알아본다.
이집트 왕들의 계곡이라는 곳에 소제한 피라미드는 1903년 전문 도굴꾼들에 의해 중요 문화재는 이미 도난 당한 상태였다. 이미 중요 문화재는 도난 당하고 3년이나 지난 1906년에 미이라를 발견 했다고 한다.
당시 시신을 발견한 미이라가 안치된 일명,"널'에 문자가 쓰여져 있었으나 해독할 길이 없어 무명으로 박물관에 보관해 오던중 1구는 투트모세 1세 왕으로 또 다른 1구는 투트모세 2세 왕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투트모세 2세 아래에 다시 투트모세 3세의 미이라도 확인되었다.
1989년 2구의 여성 미이라를 또 다시 발견하고 역시 확인 작업을 한 결과 올해 하트셉수트 여왕의 미이라로 밝혀 졌다고 한다.
이야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이집트 고대 신왕국(이집트제국) 제 18왕조의 역대표를 살펴 본다.
(기원전 1570년 - 1293년)
-, 아흐모세 1세
-, 아멘 호테프 1세
-, 투트모세 1세
-, 투트모세 2세 (왕비,"하트셉수트 섭정)
-, 하트셉 수트 여왕 (투트모세 3세의 계모)
-, 투트모세 3세
-, 아멘호 테프 2세
-, 투트모세 4세
-, 아멘호 테프 3세
-, 아크나톤
-, 스멘크 카데
-, 투탕카멘 (1922년 미이라 발굴,2005년 단층 촬영으로 영상 복원)
왕조 소개는 투탕카멘 까지 하고 다음 이야기로 이어진다.
다음 이야기를 하기전에 먼저 잘 알고 있겠지만 피라미드에 관해서 언급를 하고 이어 갈까 한다.
이집트 역사속에 기록된 피라미드는 아시다시피 정 사각형 뿔꼴로 건축 되었으며
정파가 다른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자신의 사후에 안식처가 될 피라미드를 건설 했다고 이집트 역사는 전 한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유적 중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고고학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국왕,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사용했다는 가설이 있으나 극히 일부 학자들은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반대 의견을 제시 하기도 한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에 만 존재 하는것이 아니라 중국, 메소포타미아, 중앙아메리카 등 일부 다른국가에도 비슷한 형태의 피리미드가 있으며 우리 한국의 고구려 태왕릉과 장수왕릉도 일종의 피라미드 형태의 일종이라고 일부 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대형 피라미드는 10만명이 3개월 교대 방식으로 근 20여년에 걸처 지어질 정도로 오랜 세월과 많은 인력 및 자재 장비가 소요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제일 높이가 높은 문화재에 속하며 일부 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화재로 피라미드를 꼽기도 한다.
이집트에서는 1906년, 1922년, 1989년에 걸처 고대 왕족의 미이라를 발굴한다.
그간 이 글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한 결과 이집트에서도 문화재전문 도굴꾼들이 많은 유적의 유물들을 도굴해 갔다고 한다.
피라미드 역시 그들의 손이 이미 거처간 다음 미이라가 발견 됐는데 고대의 왕들도 후세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을 하고 흔히 말하는 본관 피라미드에는 자신들의 유골을 안치하지 않고 부속 피라미드에 주로 안장이 되어 있었다.
위 피라미드에서 보다시피 중앙 피라미드외에 작은 피라미드에서 투트모세 1세 왕족의 미이라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제 이집트 여왕 하트셉수트'의 미이라 발굴 과정에 관한 내용을 알아본다.
작은 피라미드 안치실에 위 쪽에 "하트셉수트 여왕의 부친인 "투트모세 1세의 미이라가 안치 되어 있었고 하트셉 수트 여왕의 옆에는 자신의 남편이자 역시 투트모세 1세 부왕의 아들인 투트모세 2세가 안치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투트모세 2세 아래에 투트모세 3세 왕의 미이라을 발굴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안장 위치 확인은 1차 미이라 발굴후 수십년이 흐른 다음 바로 근방에서 다시 미이라가 발굴 될 정도로 은밀하게 안장이 되어 있어 1차 발굴 장소를 확인결과 위에 열거한 바와같은 배열 순서로 안장된 것을 확인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트셉수트 여왕과 투트모세 2세(왕)은 친형제 지간이 아닌가,,,,,,, 그랬다.
즉 어머니는 서로 다른, 속된 말로 배다른 형제지간 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투트모세 1세 왕은 본처가 있는 자신의 아들 투트모세 2세 왕에게 자신의 딸이자 배다른 여동생인 하트셉 수트,와 결혼시키고 이미 병색이 완연한 아들 투트모세 2세를 대신해서 자신의 딸이 대신 국사를 맡아 섭정을 하도록 했다고 이집트 역사는 적고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평소 가짜 수염을 붙이고 옷 차림도 남장을 했다고 한다.
결국 투트모세 2세는 형식적인 왕으로서 모든 국사는 하트셉수트 왕비가 국가를 운영 한 것으로 보인다.
투트모세 1세에 이어 파라오에 오른 투트모세 2세도 부왕의 사후 얼마되지 않아 이승을 하직하자 자연스럽게 여왕으로 등극한다. 원래 이집트 역사에 여왕은 없는 것으로 전해 오고 있었으나 고대에 이미 두 사람의 여왕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 한 바와 같이 2구의 여성 미이라를 확인하고 수년간 연구 끝에 확인된 내용은 미이라 1구는 약간 비대한 체격의 여성이었고 또 1구는 날씬한 체격를 가진 여성으로 판명이 되었다.
구전이나 일부 사학자들은 하트셉수트 여왕은 병사가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유는 계모밑에서 자란 투트모세 3세가 그 다음 왕으로 이어 진 것에 대해 추측성 사고로 지금까지 전해져 왔으나 미이라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골수암으로 사망했음을 확인했으며 당뇨성 질병도 가지고 있어 병사 한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위 사진에 보이는 함에 유일하게 치아가 발견이 됐는데 2구의 미이라 중에서 비대한 체격의 미이라에는 애초부터 치아가 발견되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바로 위 함에서 발견한 치아와 미이라와 결정적으로 일치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머지 1구의 미이라는 당시 여왕의 주치의 격인 여성 의사일 것으로 사료 된다고 연구에 참여한 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단계의 장기간 연구 끝에 결론를 내린것은 DNA 검사를 비롯하여 역사에 기술된 내용을 근거로 혈통에 관한 검사, 시대적인 상황을 근거로 한 복합적인 검사 등을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되었다고 이집트 고고학 및 전문가들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 학자인 보스턴 대학교 케스린 바드는 파라오의 미이라는 대부분 양손을 가슴부위에 + 자 형식으로 한 채로 발견되고 있으나 이번 판명된 미이라는 다소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어 왕족의 장례방식과 조금 다르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한 이집트 역시 왕족이 죽으면 곁에 있던 신하들의 시신도 같이 안장하는 전통을 감안하면 아직 확신을 하기엔 부족하다는 견해을 밝히고 있으나 대다수 학자들은 이번 하트셉수트 여왕의 미이라 확인을 믿고 있으며 향후 5년내로 투탄 카멘 왕 처럼 단층촬영 기법을 적용해 영상 복원를 할 것 이라고 한다.
이번 하트셉수트 여왕의 미이라에 관한 글은 "러시아 라이프뉴스"에 게제된 내용과 위키백과, 기타 웹사이트에서 인용한 것 임을 적는다. 그리고 내용중에 오기 또는 잘못된 기술이 있다면 지적하는데로 확인 과정을 거처 수정 할 것을 약속드리며 찿아 주신 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2008/10/24 오 전 3:31 | Middle East. | [세계를마당삼아]
http://kr.blog.yahoo.com/leesa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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