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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박물관, 유적

파로스 섬의 등대



파로스 섬의 등대


파로스 등대는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 외항의 파로스 섬에 건설했던 거대한 등대로 피라미드나 바빌론의 공중정원들과 같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다.

파로스 등대는 뚜렷한 지형지물이 없는 밋밋한 아프리카 해안에서 야간 항해의 큰 랜드마크가 되었다.



파로스 등대


건립 시대는 프토레마이어스 왕조의 2세 때이다.
설계와 건축은 그리스인 소스트라토스였다.

수많은 노예와 나일강 상류에서 실어온 화강암으로 12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등대는 그 크기가 엄청났다.

등대는 각기 형태와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 구조 부분은 사각형으로서 55.9미터의 높이, 중간 부분은 8각형으로서 27.45미터, 맨 윗 층 부분은 7.30미터이다.
그래서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117미터이다. 이 높이는 현대의 40층 높이 빌딩과 꼭 같다.



파로스 섬  등대 상상도


야간의 등대는 거울로 빛을 증폭해서 먼 43킬로의 먼 바다에서도 그 불빛을 볼 수가 있었다.
등대는 건설 뒤에 온갖 폭풍우와 화재와 22번의 지진등 여러 간난신고를 겪으면서도 1600년이나 되는 세월을 꿋꿋이 살아남았었다.

1165년도에 이 등대를 찾아 갔었던 무어인 지리학자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등대는 단단한 적색 화강암 바위위에 건설되었고  몰타르가 아니라 납을 녹여서 쌓은 돌들을 일일이 연결했다고 하니 그 견고함에 이해가 간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 수없었다.
등대는 몇 번의 피할 수 없는 재난을 겪었다.

776년 맨 꼭대기 부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파괴되었다
그 뒤로 등대는 8각형 중간 부분의 위에 등댓불을 설치해서 등대로 사용하였다.

950년과 956년, 2회에 걸쳐서 8각형 중간 부분의 외벽에 큰 금이 갔다.

그 금이 건물의 안전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8각형의 중간 부분은 어쩔 수없이 다 해체해서 철거해야했다.
이 중간 부분의 해체로 등대의 높이는 22미터나 줄어들어 버렸다.

마모의 단계를 거쳤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3백년의 세월이 흐르고 유명한 명군 사라딘의 통치시대가 왔다.

그는 파로스 등대의 대 수리와 복원 계획을 세웠다.
만약에 천재지변이 없었다면 영명한 군주였던 그는 결단성있게 업무를 추진해서 파로스 등대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로스 등대는 1303 8월8일, 지중해 동부를 뒤흔드는 대지진으로 허물어져 버렸다,

잔해가 일부 남았었지만 그 백 년 뒤에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 왕 콰이트 베이는 폐허의 남은 돌들을 이용해서 파로스 등대 자리에 요새를 세웠다.



파로스 등대자리에 건축된 콰이트베이 요새


지진으로 바다 속에 추락했던 등대의 잔해들은 1962년 발견되었다.
1994년 바다 밑의 정밀 조사가 행해졌는데 2,200여개의 큰 돌들과 스핑크스 같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파로스의 크기도 놀랍기도 하지만 건축연도가 기원전[BC]283년이라는 점,역시 놀랄만하다.

이때 한반도에는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 같은 나라는 출현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알렉산드리아같은 도시조차 형성되지 않았었다. 그때는 고조선 시대인데 그 수도인 왕검성의 위치마저 아리송하다.

거대한 규모와 함께 건축시기를 보면 파로스의 등대는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서 존경[?]을 받을만한 위대한 건축물이다.

등대가 건재시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서 옥상의 테라스에 올라가 바다 구경을 했다.
옥상에서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장사치들도 있었고 등대 주변에는 찾아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가도 있었다.



중세 시절에 그린  알렉산드리아 항구


그러나 이렇게 유명했던 등대에 관한 기록은 진기할 정도로 소량이다. 특히 불빛을 쏘는 제일 높은 층에 관한 기록은 아예 없다. 외부의 생김생김에 대한 것 모양에 대한 기술만 있을 뿐 내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할 지경이다.

등대가 많이 쇠락해진 후에는 아래 부분을 군대의 막사로 썼다니까 내부도 상당히 넓었겠는데도 내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등대가 최후의 지진으로 무너지고 폐허로 변한 뒤 20여년이 다 되어서 아랍의 유명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두 번 방문한 일이 있었다.



기독교 성화인 듯. 뒤에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로 보인다.


이븐 바투타는 평생의 30년간을 여행으로 보낸 직업 여행가이다.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동방견문록]을 보이 스카우트 봄 소풍 정도로 보이게 하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여행한 아랍의 여행가이다.

그는 중국과 인도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는 죽기 전 긴 여행기를 남겼으나 사람들에게 망각되었다.

4백년 뒤인 1808년 아랍탐험가 [시쩬]에게 발견되어 그 진가가 세상에 알려지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번역되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다.

이븐 바투타는 1329년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방문했던 길에 파로스의 등대를 찾아갔었다.
이 때는 이미 1303년 대지진으로 등대가 거의 파괴되고 사반세기가 지나서였다. 하지만 등대의 아랫 부분은 그런대로 원형을 많이 유지했었던 것 같다.

이븐 바투다는 이렇게 그의 여행기에 이렇게 썼다.

항구 쪽에서 파로스 등대로 가보았더니 등대의 벽은 이미 무너져 버렸다.

등대는 하늘 높이 솟은 방형 건물로서 문은 지상에 나있다.
문 앞에는 문 높이의 건물 한 채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나무판을 가로 질러 놓아 문으로 통하게 하였다.
나무판만 치우면 속수무책이다.

문안에는 등대지기가 앉을 자리가 하나있고 등대 내부에는 방이 꽤 많다.
등대내 통로의 너비는 각각 9[약 2m]쉬브르 이고 벽두께는 10[약 2.3m]쉬브르이며 등대 네 변의 너비는 각각 140[약 32m]쉬브르에 달한다.

등대는 높은 언덕위에 서있는데 시내까지의 거리는 1파르싸흐[약 6.24km]이다.



파로스 등대  상상도


등대는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길쭉한 육지에 세워져있고 바다는 성벽에 잇닿아 있다.

그래서 육지에 있는 이 등대로 가려면 시내 쪽에서 가야만 한다. 육지와 파로스 등대는 화강암으로 만든 육교로 연결되어있다. 등대와 연결된 지대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시의 전속 묘역이다.

1349년에 내가 마그리브로 돌아가는 길에 이 등대에 다시 한 번 들렀더니 등대는 이미 폐허가 되어 들어 갈 수도, 문까지 오를 수도 없었다.

나쉬르 왕이 그 맞은 편에 같은 모양의 등대를 세우려고 기공은 했으나 그의 사망으로 완공은 못했다.



발굴된 토기 파로스 등대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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