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 塔, Tower of Babel)은 구약성경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탑이다. 창세기 11장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인류가 쓰는 동일한 언어와 이에 따른 일종의 타락과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
유다 왕국 멸망으로 국민들(유대인)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끌려간 바빌론 유수 기간에, 바빌론의 에테멘앙키를 보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에테멘앙키는 신전탑으로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건축 재료인 벽돌은 원형 경기장이나 교각 등 다른 건축물을 짓는데 이용되었다.
'바빌론 포로(기원전 586~538)'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야훼 신을 경배하는 민족적인 종교로 형성된 것이 유대교로서, 그때부터 그들은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돈'이란 뜻이라고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bab(문,門)와 el(신,神)의 합성어라는 견해도 있다.
'바벨 탑' 이야기는 구약성서 창세기 제11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바벨 탑은 바빌론 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지구라트(신을 제사하는 성탑)와 관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유적으로 보이는 바벨탑은 90미터 사방에 90미터 높이로 세워져 있는데 구약성경에서는 '느부갓네살'로 기록되어 있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완성한 신바벨론의 바벨탑으로 알려져 신빙성을 갖는다. (출처: 위키백과)
에테멘앙키 (수메르어: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신전)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신 중 하나인 마르두크에게 헌정된 고대 바빌론의 지구라트였다. 오늘날 이라크 바그다드의 남쪽으로부터 90 킬로미터 (56 mi) 떨어진 곳에 폐허로 남아있다.
여기서 나보폴라사르의 비문이 새겨진 실린더(원통형 비문)가 1880년대에 발견되었으며, 2개가 남아 있다. 나보폴라사르왕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첫번째 왕(625-605 BC)이다.
(출처: 위키백과)
구약성서에서의 바벨(Babel)탑
바벨탑은 구약성서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전설 상의 탑이다.
창세기 11장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인류가 쓰는 동일한 언어와 이에 따른 일종의 타락과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사방으로 날리도록 하자."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바빌론)이라고 불렀다.
— 창세기 11장 1-9절 (공동번역)
(사진 설명) Engraving The Confusion of Tongues by Gustave Dore (1865).
바벨탑과 종교 의식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느부갓네살)가 완성한 신바빌론의 바벨탑에서는 매년 태양의 신과 달의 신에게 제사가 행해졌는데, 그 제사 의식은 성과 관련된 의식으로써, 남녀 사제간의 교합이 함께 행해졌다.
먼저 여자들이 바벨탑의 각 방에 들어가서 발가벗은 상태로 애곡을 하면, 남자들이 그 방을 들어가서 맘에 드는대로 선택해 교합을 한다. 그렇게 한번 마친 후에도 또 애곡을 할 수도 있고, 집으로 갈 수도 있는데, 문제는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하는 여인은 그 기간이 끝나도록 애곡을 할 수밖에 없게되어 후에는 법을 바꿔서 일정기간 애곡을 해도 선택받지 못하면 스스로 귀가 할 수도 있도록 법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받지 못한다는 것은 신에게 선택 받지 못했다는 뜻이 되고, 또 신의 선물인 임신을 할 수 없다는 뜻에서 여인에게는 매우 치욕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울기를 계속함으로써 선택을 받은 후에 나오려고 했고, 또 이런 의식을 즐기는 여인은 계속해서 울면서 그 의식과 함께 즐길 수도 있는 의식이기도 했다.
이것이 '담무스의 애곡'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담무스의 환생을 위한 애곡이었지만, 실상은 그 방에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과, 여인이 울 때 생기는 충분한 분비물로 남자와의 교합이 원만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또 담무스에게 신의 아들을 달라는 기도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 담무스(Tammuz)
이 신은 풍요의 여신인 ‘이쉬타르(Ishtar)’의 남편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환상 속에서 여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북문에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이 우상신 담무스를 위하여 우는 것은 히브리의 제4월(태양력의 6∼7월) 제2일에 생겼으므로 이 달을 유대인들은 ‘담무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에스겔 8:14)
바벨론 신화에서 담무스가 죽어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것은 여름의 뜨거운 열에 식물이 시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쉬타르가 통곡하면서 지하로 내려가 담무스를 지상으로 데려오면 자연이 소생한다고 하여 매년 4월 2일(태양력으로 6~7월) 제사가 있었다.
담무스의 애곡과 여신 이난나(이슈타르, Ishtar)
담무스라 기록되어있는 이 신은 고대세계에서는 아주 이름 높은 존재였다. 본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부터 목동의 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농사의 신으로 풍요를 관장하는 존재로 숭앙받던 이 신은 두무지(Dumuzi)라 불렸고 여신 이난나(Inanna)가 그의 아내이다.
다른 곳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무지는 본래 사람이었다. 수메르의 역사기록에는 두무지라는 이름으로 두 명의 왕이 등장한다. 하나는 대홍수 이전에 천여 년 동안 자신의 지역을 통치했던 이고, 다른 이는 우르크 제 1 왕조에 속하는 이로서 현명하고 뛰어난 통치로 인해 당대에 이름이 높은 왕이었다 한다. 지상에서의 뛰어난 두무지의 공덕은 결국 그를 신의 위치로까지 격상시키게 되었다. 신화에 따르면 물의 신이기도 했던 엔키(Enki)가 두무지의 뛰어남을 높이 사 그를 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줬다고 한다.
신의 위치에 오른 두무지는 이난나라는 여신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본디 이난나(이슈타르)는 수메르의 최고신인 아누(Anu)의 배우자였었다. 하지만 풍요로움과 전쟁을 상징하는 이 여신은 대중적으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두무지의 아내가 된다. 그렇게 해서 신들의 성스러운 결혼(hieros gamos)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신비롭고 성스러운, 그리고 지극히 신화적인 신들의 결혼을 통해 고대인들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매우 중요하고도 절실한 삶의 이해를 제공받게 되었다. 즉 두무즈와 이난나의 결혼과 죽음, 부활은 당시 농업의 일상을 도식화, 신화화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사람들은 농사일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고 있었던 것이다.
수메르가 멸망한 뒤 바빌론 왕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들의 인기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이 두무지에서 담무즈(Tammuz)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설에 의하면 담무스가 40세 때에 멧돼지에게 받혀 죽었다고 한다. 담무스(Tammuz)는 죽임을 당한 후 저승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내 이쉬타르(Ishtar, Easter)가 애곡함으로 인하여 그는 봄에 신비하게 소생하였다고 한다.
"농작물의 성공과 사람들의 다산을 보증하기 위하여" 이쉬타르의 슬픔을 통한 담무스의 부활을 해마다 극적으로 나타내었다. 매년 남자와 여자들은 이쉬타르와 함께 담무스의 죽음을 슬퍼하여야 하고 그녀의 은총과 은전(恩典)을 새롭게 얻기 위해 신의 이 귀환을 축하하여야 했다. 새로운 식물이 싹트고 나올 때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구세주가 저승에서 나와 겨울을 끝마치게 하고 봄이 시작되게 하였다고 믿었다.
알렉산더 히슬롭은 40일이 (담무스가 세상에 산 1년을 하루로 해서) "담무스를 애곡하기"위해 따로 정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대에는 이 40일 동안 그의 은총을 새로이 얻고자 하여, 즉 그가 지하 세계에서 나와 봄을 시작하도록 자기에게 매질하는 것으로 여겨 지켰다.
이러한 것을 준수하는 것은 바빌론인뿐만 아니라 페니키아인, 이집트인, 멕시코인, 그리고 얼마 동안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조차도 알려지게 되었다. 히슬롭은 "이교도들 가운데서 이 사순절이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조차도 이교도의 해마다 봄 축제의 가르침과 의식들을 받아 들였다. 이는 에스겔이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겔 8:14)고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이 일년 중 봄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 4세기의 교회가(지금은 본래의 신앙으로부터 너무나 먼 길로 떨어져 나갔지만) 이교도의 봄 축제를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영 백과 사전은 이 침투에 관하여 "그리스도교는 많은 이교 의식들과 봄 축제 관습들을 그리스도의 큰 축제일에 합병시켰다."고 말한다.
이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의 스토리는 담무스 이전에도 이미 고대 중근동 지역의 대부분에서 신들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 도식은 너무도 익숙하고 또 만연되어 있었던 종교적 상징이기도 했다. 가나안의 바알이 그랬고, 그리스의 아도니스(Adonis), 이집트 애굽의 오시리스(Osiris)가 그랬다. 바벨론에서 기원했던 담무스 숭배는 앗수르, 수리아, 베니게, 지중해 연안의 일대로 확산되었다.
참고 : 부활절(Easter)의 유래, 그대 누구를 위하여 애곡하는가?
<참고>
바알과 아세라 / 성전 안에 있던 남창(男娼)의 집 미동(美童)
발굴된 바알(Baal)상과 풍요의 여신 아세라(Asherah)상
그리스 로마 신화 속 꽃미남 아이돌 '아도니스(Adonis)'
아도니스(Adoni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청년 사냥꾼이다.
키프로스의 왕 키니라스와 누구든 한눈에 반하게 할 만한 미모를 가진 그의 딸 뮈라(스미르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탐무즈와 동일시된다.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아도니스의 연인이자 대모였다.
아도니스는 커다란 야생 멧돼지를 사냥하다 멧돼지에 물려 죽는데 이때 아도니스가 흘린 피에서 아네모네가 피어났다고하며, 아프로디테가 흘린 눈물에선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아도니스가 죽자 아도니스를 지하세계의 왕비인 페르세포네가 독점하게 되자 이에 아프로디테가 반발하며, 두 여신은 다시 싸우게 된다. 이에 다시 제우스가 두 여신을 중재해 6개월은 아프로디테와 보내며, 나머지 6개월은 페르세포네와 보내게 된다. (이야기가 상당히 생략되어 있는데 아래의 참고 사이트를 보시길..)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의 탐무즈
탐무즈와 이슈타르 - 인니나
활달한 대지의 여신 이슈타르-인니나(이하 이슈타르)가 식물과 생명의 성장의 신인 자신의 형제 탐무즈를 격렬하게 사랑했다는 신화가 있다. 탐무즈는 천상의 낙원에서 자라고 있는 에리다 나무 아래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가축의 무리에게 풀을 먹이고, 천상의 짐승뿐만 아니라 지상의 짐승들에게도 한낮의 쨍쨍한 태양으로 보살펴주고 있었다.
이슈타르는 그와 사랑에 빠졌고, 탐무즈는 이슈타르에게 자신의 남성적인 힘을 과시하려고 멧돼지 사냥을 나갔다가 멧돼지의 날카로운 어금니에 받혀 죽어서 명계를 다스리는 이슈타르의 자매 에레슈키갈에게 간다. 이에 슬픔에 빠진 이슈타르는 직접 명계로 내려간다. 에레슈키갈은 명계의 법칙에 따라 이슈타르의 옷을 벗긴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질투한 에레슈키갈은 이슈타르를 가둬놓는다.
한편 지상에는 사랑과 성욕의 여신이 명계에 내려가자 남자들과 여인들의 성욕이 없어져 세계의 인구가 줄어든다. 제물을 바치고 신들을 존경해줄 존재들이 사라질까 두려워진 신들은 에레슈키갈에게 이슈타르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이슈타르는 탐무즈의 부활을 요구한다. 신들의 중재 끝에 겨울동안은 탐무즈가 명계에서 에레슈키갈과 머무르고 봄에 다시 부활하여 이슈타르와 함께 머무르기로 했다.
탐무즈 숭배
수메르인은 매해 봄마다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탐무즈의 부활제를 올렸다. 그들은 탐무즈를 성장의 신으로서, 대지의 여신이 탐하는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서 숭배했다. 이러한 풍년제 기간에는 모든 아내가 자신의 남편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남자와도 잘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인정받고는 자유롭게 사랑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하나 남편 이외의 남성의 정액은 밖으로 흐르게 하여 스스로 임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출처: 위키백과
현재 기독교의 십자가는 원래 기독교의 표가 아니라 갈대아와 이집트의 문자로 신비의 타우(Tau)란 글자였다.
이것은 담무스(Tammuz)란 이름의 머릿글자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라틴(Latin), 타우(Egyptian), 갈보리(Calvary), 켈틱(Celtic), 성 안드레(St. Andrew), 그리스(Greek), 말타(Maltese) 십자가 등으로 여러 형태로 사용되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십자가는 이교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십자가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상징"이었다(갈3:13).
니므롯을 신격화한 바알의 상징물인 오벨리스크 역시 마찬가지로 이교의 산물이다. 뉴욕 센트럴 공원과 런던에서 볼 수 있는 이 주상은 성 베드로 광장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데, 이것들은 주상이 가장 발전돼 있던 이집트로부터 옮겨 온 것들이다.
성 베드로 성당의 기둥들을 평면도로 보면, 다이애나 신전을 모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남자의 성기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헬라폴리스에 있는 여신 신전의 현관에는 기둥들에 대한 비명이 이렇게 적혀 있다. "나 디오니수스(Dionysus)는 나의 계모인 여신에게 이들 음경들을 헌납하노라."
카톨릭 모교회의 위치인 바티칸은 원래 "점으로 예언하는 곳"(Vaticinia)으로서 바티카누스(Vaticanus)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출처 : 크리스천월드 - 로마 카톨릭의 기원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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