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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Nature

나무 이야기




'이름없는 들꽃, 이름없는 나무'

주변에서 흔히 보는 토종 식물을 우리는 흔히 이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들꽃과 나무에겐 모두 이름이 있다. 단지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다.

나무의 이름과 용도도 모른 채 나무를 사랑하고 자연과 국토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영남일보는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각종 나무 100여종을 선정,
국내 임산공학 분야의 대가인 경북대 박상진 교수(임산공학과)의 해설로
그 나무의 특징과 쓰임새, 얽힌 이야기 등을 연재한다.



1] 초피나무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여름 내내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푹 고아 만든 추어탕의 감칠 맛을 잊지 못한다.
문제는 비린내. 전라도 쪽에서는 된장을 풀고 경상도에서는 초피(조피, 제피, 쟁피, 죄피) 가루를 넣어 해결한다. 그래서 고즈넉한 시골동네의 밭둑에는 한두 그루의 초피나무가 심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가을에 종자를 따다가 절구로 빻아서 쓰며 까만 알갱이보다는 종자 껍데기에 향기가 더 있다. 깜박 초피가루 준비를 잊어버린 아낙은 잎사귀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도 비린내를 없애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초피나무는 조피나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산초나무가 이와 비슷해서 사람들은 흔히 혼동한다. 그러나 추어탕에 넣을 셈이라면 산초나무 열매로는 톡 쏘는 독특한 맛을 얻지 못한다. 산초나무에도 향기가 있으나 초피나무보다 훨씬 약하여 향신료로 쓸 때는 역시 초피나무라야 한다. 초피를 추어탕에 쓰는 것은 주로 경상도 지방이므로 산에서는 임금님 만나기 보다 어렵다. 반대로 전라도나 충청도 쪽으로 가면 초피나무가 오히려 더 많다.

어떻게 구분할까? 조금만 주의깊게 보면 금세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초피나무는 가시가 서로 마주나고 잎이 동그스름하며 가장자리가 잔잔한 물 결모양이다. 이에 비하여 산초나무는 가시가 어긋나며 잎은 끝이 뾰족해 지면서 길쭉하고 가장자리는 톱니모양을 하고 있다. 간단하게 구별해 가시가 마주나면 초피나무, 어긋나면 산초나무로 보면 된다.

초피나 산초는 가지 끝마다 한꺼번에 수 십 개씩 달리므로 다산(多産)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에서는 왕비의 거실을 초방(椒房)이라 하였으며 연산군이 궁녀를 자꾸 맞아들여 말썽이 나자 아부 잘하는 신하가 '산초 열 매가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다는 말이 있다'고 임금의 후궁 맞이를 옹호하였다.

한방에서는 건위제, 구충제, 염증약, 이뇨제 등으로 널리 사용한다. 또 최근에는 초피에서 O-157를 비롯한 비브리오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밝혀지고 있어 더더욱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다.



2] 물푸레나무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으로 물푸레나무라고 불린다. 실제로 가지를 꺾어 하얀 종이컵에 맑은 물을 받아 살그머니 담가보면 가을 하늘이 연상되는 맑고 파란 물이 우러난다.

동의보감에는 물푸레나무 껍질을 진피(秦皮)라 하여 눈병 약으로 쓰고 있는데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부으면서 아픈 것과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우려내어 눈을 씻으면 정기를 보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이 나무는 질기고 휨이 좋아 도리깨 등의 농사용 도구에 쓰였고 옛 서당의 훈장은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 회초리로 아이들의 게으름을 다스렸 으며, 죄인을 신문할 때 몽둥이로도 사용한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 예종때 형조판서 강희맹이 임금께 올린 글에는 '지금 사용하는 몽둥이는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죄인이 참으면서 조금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버드나무나 가죽나무를 없애고, 단지 물푸레나무만을 사용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다.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의 산간지방에서는 눈 속에 빠지지 않은 덧신으로서 설피를 만들어 쓰는 재료이기도 했다.

서민에게는 관청에 불려가 매맞을 때도, 고달픈 삶을 이으려 눈 위를 오갈 때도 애환을 함께 한 나무가 물푸레나무이었다. 오늘날에는 통쾌한 홈런을 날리는 이승엽의 야구방망이, 테니스채 등 운동구 재료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나 산 속의 작은 개울가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이다. 달걀모양으로 생긴 잎이 하나의 잎자루에 대여섯 개가 붙어있으 며 서로 마주난다. 열매는 길이나 너비가 싸인펜 뚜껑만 한데 주걱모양으로 날개가 붙어있고 한꺼번에 수십개씩 무더기로 달린다.

비슷한 나무에 들메나무가 있으며, 쓰임새는 거의 같다.



3] 붉나무 (鹽膚木,木鹽,五倍子樹)




나무이름은 붉은 단풍이 드는 나무란 뜻으로 붉나무가 되었다. 단풍이라면 단풍나무만 연상하지만 곱게 물든 붉나무의 단풍을 한번만 보면 왜 이름을 붉나무라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그 진한 붉음이 우리를 감탄케 하는 나무이다.

개화 이전의 우리네 서민들의 풍물을 그린 글에는 소금장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 만큼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생필품이었으며, 특히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나타나는 소금장수 한테서 잊지 않고 소금을 확보해 두어야만 하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봉상왕의 조카 을불(乙弗)은 왕의 미움을 받아 소금장수로 떠돌아다니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왕을 몰아내고 15대 미천왕(300~336)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소금장수 이야기이고 가장 출세한 소금장수이다. 그 만큼 옛날 소금장수는 없어서는 안될 '귀하신 몸'이었으며, 특히 더벅머리 총각 소금장수는 시골 처녀들을 가슴설레게 하였다 한다.

그런데 가진 소금은 바닥나고 소금장수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였을까? 바닷물을 정제한 소금을 구할 수 없을 때 대용으로 염분을 구하려는 우리 선조들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다. 특정의 벌레에서 염분을 얻는 충염(蟲鹽), 신나물을 뜯어 독 속에 재어두어서 얻는 초염(草鹽), 쇠똥이나 말똥을 주워다가 이를 태워서 얻는 분염(糞鹽) 등 이름만 들어도 소금을 얻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붉나무 열매에서 소금을 얻는 것이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이었다. 붉나무 열매는 가운데에 단단한 씨가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과육에 해당하는 부분이 가을이 깊어 갈수록 소금을 발라놓은 것처럼 하얗게 된다. 여기에는 제법 짠맛이 날 정도로 소금기가 들어 있는데 긁어 모아두면 훌륭한 소금대용품이 된다. 한자로 염부목 혹은 목염이라 하는 것은 붉나무의 열매가 소금으로 쓰인 것을 나타낸다.

또 붉나무에는 오배자(五倍子)라는 벌레 혹이 달리는 데 타닌을 50-70%나 함유하고 있으며, 가죽 가공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원인 동시에 약제였다. 붉나무에 기생하는 오배자 진딧물이 알을 낳기 위하여 잎에 상처를 내면 그 부근의 세포가 이상분열을 하여 혹 같은 주머니가 생기고 오배자 진딧물의 유충은 그 속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 주머니를 오배자라 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오배자 속의 벌레를 긁어 버리고 끓은 물에 씻어서 사용하는데, 피부가 헐거나 버짐이 생겨 가렵고 고름 또는 진물이 흐르는 것을 낫게 하며 어린이의 얼굴에 생긴 종기, 어른의 입안이 헌 것 등을 치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는 토산물로서 붉나무 벌레 혹을 생산하는 지역이 원주, 평창, 양양, 정선, 강릉이라 하여 약제로 널리 쓰였음을 짐작케 한다.

오늘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한낱 평범한 붉나무도 한때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영광의 세월을 말없이 되뇌어 보고 속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높지 않은 산자락의 양지 바른쪽이면 우리나라 어디에나 잘 자란다.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나무로서 크게 자랐을 때는 지름이 10여cm에 이르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 달리는 데 하나의 잎자루에 7-13개의 작은 잎이 서로 마주 보면서 붙어있다. 잎자루의 좌우에는 좁다란 날개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혼동하는 옻나무나 개옻나무는 잎자루에 이런 날개가 없으므로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금세 구분할 수 있다. 작은 잎은 타원형이며 끝이 차츰 뾰족해지고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톱니가 있다. 꽃은 암수 다른 나무이고 가지의 꼭대기에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달리고 8월에서 9월에 걸쳐 연한 노랑 빛의 꽃이 핀다. 꽃이 지면 속에 단단한 종자가 들어있는 열매가 지천으로 달리는 데 황갈색의 잔털로 덮여 있다. 익으면 맛이 시고 짠맛이 도는 흰빛 육질이 생긴다.



4] 싸리나무





싸리나무는 광주리, 바구니를 비롯한 생활용구에서 서당 훈장님의 회초리, 나아가서는 명궁으로 유명한 이태조의 화살대로 애용되는 등 옛 선조 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나무였다.

또 귀중한 쓰임새는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횃불의 재료이다. 요즘 TV의 역사극을 보면 기름 묻힌 솜뭉치 횃불이 등장한다. 그러나 들깨나 쉬나무 열매에서 어렵게 기름을 얻어 호롱불로나 간신히 사용하던 그 시절에 늘 솜뭉치에 쓸만한 기름은 아무리 왕실이라 하더라도 조달이 가능하지 않다. 소나무 관솔도 일부 사용하였을 것이나 싸리나무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성종이 죽자 연산 원년(1495) 장례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을 보면, "발인 할 때에, 도성에서 전곶까지는 사재감에서 싸리 횃불을 장만하여 노비에게 들리게 한다"하여 횃불의 재료로 궁중에서 널리 이용하였음을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훈련 나간 군인이 싸리나무를 모르면 생쌀 먹기가 일쑤였다. 싸리나무는 나무 속에 습기가 아주 적고 참나무에 막 먹을 만큼 단단하여 비 오는 날에 생나무를 꺾어서 불을 지펴도 잘 타며 화력이 강하고 연기마저 없으니 최첨단 군수물자이기도 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 산맥에서도 싸리나무로 불지피는 공비들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싸리나무는 20여종이나 되는데 모두 자그마하게 자라는 난쟁이 나무이고 가장 흔한 종류는 싸리와 조록싸리이다.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의 잎이 달리는데 작은 잎이 예쁜 타원형이면 싸리, 잎의 끝이 차츰차츰 좁아지는 긴 삼각모양이면 조록싸리이다.

어떤 연유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는 건물의 기둥을 비롯하여 구시(구유)와 목불(木佛)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유물이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승보종찰 송광사, 팔공산의 동화사 등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구시가 중생들의 눈길을 끈다.

오늘날 아무리 크게 자라도 사람 키 살짝인 작은 나무이지만 수 백년 수 천년 전에는 혹시 아름드리로 자란 것은 아닌가? 의심 많은 현대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식물학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구시를 비롯하여 싸리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무슨 나무인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하여 현미경으로 세포모양을 조사해 보았다. 예상대로 싸리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정이겠으나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도 흔히 사용한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던 느티나무를 처음에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5] 탱자나무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최 참판 댁의 설명을 보면, '사랑 뒤뜰을 둘러친 것은 야트막한 탱자나무 울타리다. 울타리 건너편은 대숲이었고, 대숲을 등지고 있는 기와집에 안팎일을 다 맡는 김 서방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라고 생울타리를 그려놓은 구절이 있다.

탱자나무는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예로부터 울타리로 널리 심었다. 충남 서산에는 사적 11호인 해미읍성이 있는데,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깊은 도랑을 파고 성벽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일명 탱자성이란 의미로 지성(枳城)이라고도 하였다. 강화도에 있는 천연기념물 78호와 79호의 탱자나무 역시 외적의 침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심은 것 중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자연상태 그대로 두면 더 크기도 하나, 대개 사람 키보다 살짝 높이로 키운다. 약간 모가 난 초록색 줄기가 길고 튼튼하며 험상궂게 생긴 가시가 쉽게 접근을 거부하는 듯 제법 위엄을 준다. 그러나 늦봄에 피는 새하얀 꽃은 향기가 그만이고, 가을이 되면 동그랗고 노란 탱자열매가 가까이 오지도 말라고 겁주는 가시에 어울리지 않게 일품이다.

중국의 고전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재상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을 때 안영의 기를 꺾기 위해 제나라의 도둑을 잡아놓고 '당신 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안영은 '귤나무는 회수(淮水)의 남쪽에서 자라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합니다(橘化爲枳).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고 응수했다.

동의보감과 본초도감에 보면 탱자열매는 피부병, 열매껍질은 기침, 뿌리 껍질은 치질, 줄기껍질은 종기와 풍증을 낫게 한다하여 모두 귀중한 약재로 쓰였다. 나 무 자체는 별로 쓰임새가 없을 것 같으나 북채를 만드는 나무로는 탱자나무를 최고로 친다. 소리꾼은 탱자나무 북채로 박(拍)과 박 사이를 치고 들어가면서 북통을 '따악'하고 칠 때 울려 퍼지는 느낌의 바다에서 희열을 맛본다고 한다.

중국 원산으로 경기 이남의 따뜻한 지역에 심고 있는 잎이 떨어지는 넓은잎 가시나무이다. 잎 모양이 독특하여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의 작은 잎이 붙어 있고, 또 잎과 잎 사이의 잎자루에는 좁다란 날개가 달려있다.

쓰임새는 생울타리이며, 제주도 등지에서는 귤나무를 접붙이는 밑나무이다. 험상궂은 가시와 초록색 줄기 및 잎자루의 날개가 탱자나무를 다른 나무와 구별해 내는 요점이다.



6] 산수유






봄을 알리는 전령은 나뭇가지에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잎과 꽃망울에 서 바로 달려온다. 음력설을 지나고 버들가지에 물이 올라 파르스름하게 변하여 갈즈음, 양지 바른 정원의 산수유는 벌써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른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닌 산수유다.

물론 산수유보다 먼저 꽃피는 매화도 있으나 채 2월에 들어가기 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므로 오히려 겨울 꽃에 가깝다.

잎이 나오기 전에 손톱크기 남짓한 작은 꽃들이 20-30개씩 모여 조그만 우산모양을 만들면서 나뭇가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집어쓴다.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으며 수십그루 또는 수백그루가 한데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꽃이 지고 주위의 짙푸름에 숨어버린 산수유를 잠시 잊어버릴 즈음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갸름한 오이씨처럼 생긴 예쁜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한다. 초록색으로 출발하여 만지면 금세 터져버릴 것 같은 해맑은 선홍색으로 익는다.

산수유는 꽃과 열매의 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한약재로서도 널리 쓰인다. 동의보감에 '산수유 열매는 정력을 보강하고 성기능을 높이며 뼈를 보호해 주고 허리와 무릎을 덮어준다. 또 오줌이 잦은 것을 낫게 한다'는 내용을 비롯해 산수유가 빠져서는 안될 탕약재의 종류만도 십여가지가 넘는다.

삼국유사의 제2권 기이(紀異)에 실려있는 신라 48대 경문왕(861-875)에 대한 설화를 보면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 이야기가 있다.

'경문왕은 임금자리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와 같아지니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 만드는 공인(工人)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에 도림사의 대나무 숲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불 때 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그 뒤에는 다만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이 났다'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열매가 줄줄이 땅을 향하여 매달려 있는 모양은 유별나게 귓밥이 긴 사람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며, 이때부터 벌써 이 나무를 약재로 쓰기 위해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산수유 꽃으로 찾아온 봄의 향취가 익어갈 즈음, 이보다는 조금 늦게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로 얽혀있는 숲 속에는 꽃 모양이 산수유와 너무나 비슷한 생강나무가 역시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간단하게 인가 근처에 심고있는 것은 산수유, 숲속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은 생강나무로 보아도 좋다.

키가 6-7m 자라고 가지가 퍼져 전체적으로 나무는 역삼각형의 모양을 만든다. 줄기의 껍질이 암갈색으로 비늘처럼 조금씩 벗겨져서 약간 지저분해 보인다.

산수유는 당초 약용식물로 심어 왔었으나 요즈음은 조경용으로 오히려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잎은 마주나고 끝이 점점 뾰족해지는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4-7쌍의 잎맥이 활처럼 휘어져 있고 뒷면 잎맥사이 에는 갈색 털이 촘촘하다.



7] 고로쇠나무






왕건의 고려 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827-898)는 백운산에서 좌선을 오랫동안하고 드디어 도를 깨우쳐 일어나려는 순간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엉겁결에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고 다시 일어나려 하였으나 이 번에는 아예 가지가 찢어져 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국사는 방금 찢어진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침 갈증을 느낀 터라 목을 축이기 시작하였다. 신기하게도 이 물을 마시고 일어났더니 무릎이 쭉 펴지는 것이 아닌가. 국사는 이 나무의 이름을 뼈에 이롭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라고 명명했고, 사람들은 그때부터 나무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 나중에 변하여 고로쇠가 되었다 한다.

3월초 경칩을 전후하여 지리산 줄기인 백운산 자락에는 전국에서 '고로쇠 물'을 마시러 사람들이 몰려든다. 나무의 굵기에 따라 다르나 한 나무에서 여러 말(斗)이 나온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로쇠 나무의 가지나 줄기의 꼭지에 있는 겨울눈은 봄기운을 제일 먼저 감지하고 나무의 각 부분이 깊은 겨울잠에서 어서 깨어나라고 옥신(auxin)이라는 전령을 파견한다. 뿌리까지 내려온 전령은 필요한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여 잎과 줄기로 보낼 것을 재촉한다. 뿌리의 세포들은 아직 채 녹지도 않은 땅 속에서 부랴부랴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열심히 위로 올려보내는 데, 사람들이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뽑아낸 것이 고로쇠 물이다.


얼마전 까지만 하여도 보기 흉하게 나무 줄기에 V자 홈을 파서 수액을 받아냈으나 요즈음은 직경 2-3cm의 구멍을 내어 채취한다. 시기는 3월초의 경칩전후 약 1주일 동안의 것이 가장 좋으며 위장병, 신경통, 허약체질 등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건강에 좋다면 잠자는 개구리까지 몽땅 먹어치우는 우리네 식성 때문에 고로쇠 나무도 세상에 태어난 후 최대의 시달림을 받고 있다. 고로쇠 물을 빼앗긴 나무는 한창 자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차츰 기력이 떨어져 한 여름에도 짙푸르기보다 오히려 노르스름한 잎사귀를 내놓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에 산림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로쇠 수액채취 지침'을 내 놓았다. '수액을 채취하는 구멍은 그루 당 1-2개를 뚫고 7-10일이 지난 후에는 채취한 구멍을 스티로폼이나 코르크 등으로 막아 균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 허가 없이 고로쇠나무 수액을 채취하면 산림법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내린다'고 협박에 가까운 알림판을 붙여보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고로쇠는 전국에 분포하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깊은 산 속에서는 아름드리로도 자란다. 가지도 잎도 정확하게 마주난다. 잎은 모양이 독특한데 물갈퀴가 달린 오리나 개구리의 발처럼 5-7개로 크게 갈라 지고, 개개의 발가락은 삼각형이다.

꽃은 암수 한나무로 5월에 연한 황록색으로 피우고, 열매는 프로펠러 같은 날개가 서로 마주보며 달리는 것이 특징이고 단풍나무의 한 종류이다. 목재는 단단하고 질겨서 체육관바닥 마루판으로는 최고급재이며, 운동기구, 피아노의 엑션 부분을 만드는 데도 없어서는 안되는 나무이다.



8] 측백나무






측백(側栢)이란 잎이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초강목에서는 밝히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고 납작한 비늘모양의 잎이 나란히 포개져 있어서 보통 침엽수와는 다르다. 꼭 옆으로 자란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측백이란 이름이 나무의 잎 모양과 어울린다.

측백나무의 고향은 어디일까. 약간의 논란이 있다. 중국이라는 주장과 우리나라에도 본래부터 자라던 나무라는 주장이 맞선다. 대체로 심지 않았는데도 자연적으로 자라면 그 지방을 나무의 고향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측백나무가 거의 절벽에 붙어 자라는 것을 두고 몇 몇 일본인 학자들은 '위쪽의 묘지에 심어둔 나무의 종자가 떨어져 사람이 갈 수 없는 절벽에 숲을 이루게 되었지만 본래는 중국 원산의 나무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애매한 논란에는 순수한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때로는 약간의 감정이 끼게 마련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하느님과 혹여 자기의 족보를 잘 외우고 있는 '양반 측백나무'밖에 아는 이가 없다.

중국의 주나라 때 임금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에는 측백나무를 둘레나무로 심도록 하여 소나무 다음으로 대접받는 나무이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실록에 실린 영조대왕의 묘지문(1776)에는'장릉(長陵)을 옮겨 모신 뒤에 효종께서 측백나무의 씨를 옛 능에서 가져다 뿌려 심으셨으니, 또한 임금의 효성이 끝이 없다'하여 묘소의 둘레나무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측백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선비의 절개와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나무다. 중종 34년(1540) 전주 부윤 이언적이 올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상소문에 '군자는 소나무나 측백나무 같아서 홀로 우뚝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지만, 간사한 사람은 등나무나 겨우살이 같아서 다른 물체에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는 이덕유가 당나라 무종에게 올린 고사를 인용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측백나무에 비유하여 간한 것이다.

측백나무는 석회암지대에 회양목과 같이 자라는 경우가 많으며 아름드리로 크게 자랄 수 있는 늘 푸른 침엽수이나 대부분은 관목처럼 자란다. 나무 껍질은 길게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회갈색이다. 줄기에 혹 같은 이상조직이 잘 발달하고 줄기도 울퉁불퉁한 경우가 많다. 가지가 옆으로 벌어지는 일반 나무들과는 달리 거의 수직으로 발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람이 늦고 나이를 먹으면 줄기가 잘 썩어버려 나무 자체로 쓰임새는 별로 없고 예로부터 향교나 양반집의 정원 및 생울타리 등으로 흔히 심었다.

대구시 동구 도동 향산의 측백수림은 천연기념물 1호다. 모두가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문화정책에도 불구, 1호가 지방에 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의 문신 서거정(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대구십경 중의 하나인 제6경으로서 북벽향림(北壁香林)이란 제목의 시가가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옛 벽에 푸른 향나무(측백나무) 창같이 늘어섰네 /사시(四時)로 바람 곁에 끊이잖는 저 향기를 /연달아 심고 가꾸어 /온 고을에 풍기게 하세'라고 번역하였다.

설악산과 오대산 등 높은 산의 꼭대기에는 아예 누워서 자라는 눈측백이 있다. 또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향기가 있고 잎이 넓은 서양측백은 미국에서 들여와 정원수로 심고 있다.



9] 목련(木蓮)






한자로 목련(木蓮)이라고 하여 연꽃처럼 아름다운 꽃이 나무에 달린다는 의미다. 찬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봄, 나뭇가지에 잎이 나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피어버리는 화사한 하얀 꽃이 이 나무의 특징이다.

꽃 크기가 어른 주먹만하고 꽃잎 하나 하나는 하얗다 못해 고고한 학의 날개 깃을 보는 듯하며 향기 또한 은은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우리 주변에 흔히 심는 목련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백목련을 두고 하는 말이며 토종 목련은 제주도에만 자란다.

목련의 겨울을 나는 모습도 좀 독특하다. 가지 끝마다 손가락 마디만한 꽃눈이 회갈색의 부드러운 털로 두껍게 덮여 있다. 겨울 동안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에는 안성맞춤의 구조다. 외투는 두툼하여도 봄을 느끼는 춘감대(春感帶)는 너무나 예민하여 봄기운이 막 찾아오려 할 때쯤 참지 못하고 벌써 꽃을 피워버린다.

꽃이 필 즈음에 꽃봉오리가 모두 북쪽을 향한다 하여 북향화(北向花)라 불리기도 한다. 과연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하는가? 자세히 관찰해 보면 겨울 꽃눈의 끝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비율이 반은 넘는 것 같다.

과학적인 명확한 근거가 없어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실향민들이 고향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이 꽃을 보고 북쪽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생각하는 대상으로 여기다 보니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싶다.

작고 자질구레한 꽃을 잔뜩 피우는 보통 꽃과는 달리 가지의 꼭대기에 1개씩 커다란 꽃을 피우는 고고함이나 순백의 색깔은 이 꽃의 품격을 말하는 것 같다.

동의보감에는 목련을 신이(辛夷)라 하여 꽃 피기 전의 꽃봉오리를 따내어 약재로 사용하였다. '얼굴의 죽은 깨를 없애고 코가 막히거나 콧물이 흐르는 것을 낫게 한다. 얼굴의 부기를 내리게 하고 치통을 멎게 하며 눈을 밝게 한다'고 쓰여져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 7년(서기48) 7월27일 아직도 총각인 임금을 딱하게 여긴 신하들이 장가 들 것을 권하자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짝을 얻는 것도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정돈하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가서 그들을 맞아 들였다. 배 안에는 아리 따운 공주가 타고 있었는데, 이이가 바로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으로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다. 꽃이 아닌 나무로서, 목련의 쓰임새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이고 나무 껍질은 연한 잿빛으로 거의 갈라지지 않는다. 잎은 넓은 달걀모양이고 어린아이 손바닥만큼 크다. 언뜻 보면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두껍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열매는 손가락 길이 만하고 주걱모양으로 휘어져 있으며 가을에 벌어지면서 매달리는 새빨간 씨가 독특하다.

목련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나 꽃이 피는 시기가 약간 늦고 꽃의 색이 보라빛인 것이 자목련(紫木蓮)이다.














9] 생강나무

한약에는 감초가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우리의 전통요리에 생강이 빠지면 제대로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 잎을 찢거나 어린 가지를 분지르면 생강 냄새가 나는 나무가 바로 생강나무다.

야외수업으로 산에 가면 나는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의 코밑에 생강나무 잎을 갖다대고 무슨 냄새가 나느냐고 짖궂게 물어본다. 한결같은 대답은 풀냄새란다. 입시 준비에 찌들은 요즘 여학생들이 부엌에 들어갈 짬이 없으니 독특하게 나는 생강냄새를 알 리가 없다.


이 나무는 기껏 자라야 키 5-6m에 팔뚝 굵기가 고작인 아담사이즈다. 그러나 봄에는 꽃과 새잎, 여름에는 독특한 모양새의 잎으로 이루어지는 녹음, 가을에는 열매와 단풍이 모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나무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가지가 아직 일어날 낌새도 보이지 않는 이른 봄, 숲 속 깊숙한 곳에서는 제일 먼저 생강나무가 샛노란 꽃을 피워 겨우 잠에서 깨어날려는 다른 나무들이 아이쿠 늦었구나! 하고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든다.

인가 근처에는 산수유, 숲 속에는 생강나무가 다른 어느 나무보다 빨리 꽃이 핀다. 회갈색의 나뭇가지에 잎도 나기 전에 조그마한 꽃들이 점점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양은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봄의 전령임을 자랑하는듯 하다. 그래서 품격 높은 매화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여 황매목(黃梅木)이란 이름도 얻었다.


꽃이 지고 새싹이 돋아날 때 즈음 이를 조심스럽게 따 모으면 바로 작설 차의 재료가 된다. 차나무가 자라지 않는 추운 지방에서는 차의 대용으로 사랑받아왔으며, 차(茶)문화가 사치스런 서민들은 향긋한 생강냄새가 일품인 산나물로서 즐겨왔다.

여름의 시원한 그늘나무로서의 역할을 거치고 나면 꽃을 보고 잊어버린 생강나무는 가을 단풍 때 다시 한번 우리의 눈길을 끈다. 곱게 물든 샛노란 생강나무 단풍은 푸른 가을하늘과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붉은 잎만이 아름다운 단풍이 아니라는 것을 생강나무 단풍을 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잎이 떨어진 가지에는 콩알 굵기의 새까만 열매가 달린다. 처음에 초록 빛이나 노랑빛, 분홍색을 거쳐 가을은 검은 빛으로 익는다. 옛 멋쟁이 여인들의 삼단같은 머리를 다듬던 머릿기름이 이 열매에서 나온다. 남쪽에서 만나는 진짜 동백기름은 양반네 귀부인들의 전유물이고 서민의 아낙들은 생강나무 기름을 애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지방에서는 개동백나무 혹은 아예 동백나무라고도 한다.

창경궁 경춘전 옆 낙선재 경계 담장 밑에는 생강나무로서는 거목이랄 수 있는 제법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왕비나 빈의 품계에 오르지 못한 이름없는 궁녀들은 동백기름을 얻어 멋 낼 차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니 아마 생강나무 기름으로 머리 단장하고 꿈처럼 찾아줄 임금님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전국 어디서나 자라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다. 나무 껍질은 갈라지지 않고 흰 반점이 있다. 잎은 어긋나기로 나며 계란모양으로 위 부분이 3-5개로 갈라지고 아기 손바닥만하다.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뒷면에 털이 있다. 암수가 딴 나무다.



10] 능수버들

가지가 아래로 운치 있게 늘어지는 큰 버드나무에는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이 있다. 봄에 새가지가 나올 때 적갈색인 것은 수양버들, 황록색인 것은 능수버들이다. 두 나무는 너무 비슷하여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구분이 어렵다. 어느 쪽인지 정확한 판별은 전문가의 몫이고 우리는 늘어지는 버들을 수양버들보다는 더 낭만적인 능수버들로 알고 있어도 크게 틀림이 없 을 것 같다.


능수버들은 경기민요 가락에 나오는 흥타령 천안삼거리를 연상하게 만든다.

'천안삼거리 흥/능수야 버들은 흥/제멋에 겨워서 흥/축 늘어졌구나 흥...'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능수버들의 모양새를 짐작하고도 남으며 어깨를 들먹일 춤판이 금세 벌어질 것 같은 감흥에 사로잡힌다.

천 안시 삼룡동에 있는 '천안삼거리'는 능수버들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한 홀아비가 능소(綾紹)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다가 변방의 군사로 뽑혀가게 되었다. 그는 천안삼거리에 이르자 어린 딸을 더 이상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주막에 딸을 맡겨 놓기로 했다. 그리곤 그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고 딸에게 이르기를 '이 나무가 잎이 피면 다시 이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어린 딸은 곱게 자라 기생이 되었으며 미모가 뛰어난데다가 행실이 얌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마침 과거를 보러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었고 서울로 간 그는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가 되었다. 박 어사는 임지로 내려가다가 이곳에서 능소와 다시 상봉하자 '천안삼거 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이라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였다.

마침 전쟁에 나갔던 아버지도 살아서 돌아와 능소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의 버드나무를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능수버들은 벌써 삼국시대부터 임금님도 좋아하던 나무였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 부여읍 남쪽에 있는 궁남지(宮南池) 를 일컫는다.

조선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보면 지금의 창경궁 영춘문 앞 도로 건너편과 종묘 쪽 궁내에 여러 그루의 능수버들이 보인다. 경복궁 경회루 옆에는 지금도 능수버들이 자라고 있으며 조선의 궁궐 여기저기에 많은 능수버들이 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활쏘기 명인이라면 윌리엄 텔이고 우리나라의 명궁이라면 태조 이성계를 꼽는다. 그 탓에 조선왕조 때는 임금이 참가한 활쏘기가 흔히 있었으며, 최고의 명궁은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을 맞히는 것이다. 말이 그렇지 엄지손가락 너비만한 능수버들 잎을 활로 맞힌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많은 버들잎 중에 어느 잎이 맞았는지 찾아내는 방법도 없다. 아마 그 만큼 정확해야 한다는 상징의 의미였을 것이다.

비슷한 나무에는 수양버들 외에 용버들이 있다. 용모양의 버들이란 의미인데 늘어지기는 마찬가지이나 어린가지는 물론 상당히 굵은가지까지도 용이 승천하는 그림처럼 꾸불꾸불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11] 개나리

봄의 아름다움은 노랑 빛에서 시작된다. 정원의 산수유, 산 속의 생강나무, 길가의 개나리에서 노랑나비, 노랑병아리 등에 이르기까지 노랑 빛의 느낌은 새 생명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 희망 바로 그것이다.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의 대명사 노란 꽃의 왕좌는 개나리다.


벚꽃으로 떠들썩하게 봄소식을 전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옛 봄의 전령은 개나리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남해안을 상륙하고 산따라 길따라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까지 온 나라를 노랗게 물들여 놓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개나리꽃은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앙증맞게 생긴 노란 꽃에 불과하지만 수백 수천 개의 꽃이 무리 지어 필 때 아름다움을 더한다. 정원에 개나리가 없다면 가지를 꺾어다 양지바른 곳에 그냥 꽂아만 두어도 잘 자라니 봄이 다 가기 전에 한 포기쯤 꼭 심어보자. 더욱이 개나리의 학명(學名)에 코레아라는 이름이 들어간 자랑스런 우리의 토종 꽃나무이다.

말나리, 하늘나리, 솔나리, 참나리 등 아름다운 우리나라 꽃에 '나리'란 이름이 들어간 종류가 많다. 이들은 개나리와 꽃 모양새가 아주 닮아 있다.

꽃이 져 버린 개나리는 쓰임새가 없는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가을에 달리는 볼품 없는 열매가 귀중한 한약재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개나리의 열매는 연교(連翹)라고 하는데 종기의 고름을 빼고 통증을 멎게 하거나 살충 및 이뇨작용을 하는 내복약으로 쓴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으로 보면 세종5년(1423) 일본사신이 연교 2근을 올린 적이 있고, 선조 33년(1599)에는 임금이 앓자 홍진이란 의사는 청심환에다가 연교를 넣어 다섯 번 복용하시도록 처방하였으며 정조 18년(1793)에는 내의원에서 연교를 넣은 음료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오늘날 잘 쳐다보지도 않는 개나리 열매는 한때 임금님의 건강을 지키는 약재로 쓰였으니 제법 대접을 받은 시절도 있었나 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이 떨어지는 작은 나무이다. 크게 자라도 사람 키를 조금 넘을 정도가 고작이고 땅에서 많은 줄기가 올라와 한 포기를 이룬다. 울타리로 심으면 아래로 늘어지는 가지가 꽃이 진 다음에도 멋스런 운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린 가지는 초록빛이나 차츰 회갈색으로 된다. 자세히 보면 작은 점 같은 숨구멍이 뚜렷하게 보인다. 잎은 마주나기 하며 긴 타원형으로 윗부분에 톱니가 있거나 때로는 밋밋하다.

꽃은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잎겨드랑이에 1-3개씩 핀다. 열매는 달 걀모양이며 편평하고 가을에 갈색으로 익으며 날개가 있다.

개나리와 비슷한 나무로, 세계적으로 한 종류 밖에 없으며 우리나라의 충북, 전북의 일부 지역에만 자라는 미선나무가 있다. 열매가 마치 부채를 펴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모양이므로 미선(美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른 봄 개나리처럼 잎보다 먼저 피고 흰빛 또는 분홍색으로 피며 은은한 향 기가 있다.



12] 진달래

산 넘어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을 완연히 느낄 즈음 동네의 앞산은 물론 높은 산의 꼭대기에도 온통 진달래꽃으로 뒤덮인다.

붉은 빛 깔이 조금 더 강한 분홍색의 꽃은 잎보다 먼저 가지마다 무리지어 피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예로부터 사랑을 노래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손님이다.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로 이어지는 소월의 시속에서의 정경처럼 진달래꽃은 너무나 정겨운 우리 강산의 우리 꽃이다. 북한의 영변 약산은 소월이 아름다운 시상을 얻던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핵 시설로 우리에게 더 다가오는 것이 안타깝다.

진달래는 한때 북한의 국화로 알려져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꽃빛과 함께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좋아했으며 과거 항일 빨치산 활동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련과 사촌쯤 되고 자기들 이름으로는 목란(木蘭), 우리 이름으로는 함박꽃나무가 북한의 국화 임이 최근에 와서야 알려졌다.

남부지방에서는 진달래란 이름보다 참꽃이 더 친숙하다. 가난하던 시절 에는 진달래가 필 즈음이 가장 배고픈 시기다. 주린 아이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먹고 허기를 달래서 진짜 꽃이란 의미로 참꽃이란 이름을 자연스럽게 붙였다.

식물도감을 찾으면 제주도에 참꽃나무가 있다고 적혀있기도 하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꽃'은 진달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린시절 진달래 꽃잎은 따먹어도 비슷한 철쭉은 연달래라 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선배 어린이' 들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 철쭉꽃에 독이 있다는 것을 용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 이름은 두견화(杜鵑花)다. 중국의 촉나라 망제(望帝)는 죽음의 직전에 이른 벌령이란 사람을 살려서 정승으로 중용하였다가 아예 나라를 빼앗기고 국외로 추방되는 비운을 당한다.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촉나라를 날아 다니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그 피가 진달래 가지 위에 떨어져 핀 꽃이 바로 두견화, 우리의 진달래꽃이란 것이다.

음력 3월3일의 삼짇날에는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봄을 맞는 마음으로 꽃전(花煎)을 붙여먹는 풍습이 있다. 화전이란 찹쌀가루에 꽃잎을 얹어서 지진 부침개를 말하는데,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는 비원에서 삼짇날 중전이 궁녀들과 함께 진달래꽃 화전을 부쳐먹는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청주에선 진달래꽃을 넣어 술을 빚고 두견주라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병에 걸려 휴양할 때 17세 된 딸이 꿈에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만든 술이라고 하며 진통, 해열, 류머티즘의 치료약으로 쓰였다. 진달래 꽃잎에 녹말가루를 씌워 오미자 즙에 띄운 진달래 화채 역시 삼월삼짇날의 절식(節食)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사람 키보다 조금 클 정도로 자란다. 손목 굵기 정도면 꽤 오래된 나무에 속하고 껍질은 매끄러운 회백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벌어진 깔때기형이고 가장자리가 5개로 갈라진다. 드물게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라 하여 아주 귀하게 여긴다.



13] 느릅나무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얻기 위하여 일부러 남천으로 뛰어 들어 빠졌던 그 다리의 이름이 유교(楡橋)이다. 곧 느릅나무 다리란 뜻이다. 몇년전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바로 그 다리로 짐작되는 나무다리를 남천가에서 발굴 했다. 재질을 알아보았더니 실망스럽게도 참나무였다고 한다. 아마 다리 옆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유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느릅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재로서의 쓰임새도 많지만 나무껍질은 한약재로 유명하다. 뿌리의 껍질은 유근피(楡根皮)라 하여 동의보감에는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위장의 열을 없애며,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불면증을 낫게 한다'고 한다. 나무껍질은 유백피(楡白皮)라 하여 역시 약재로 쓰일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속껍질처럼 예부터 흉년때 허기를 달래는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삼국사기 온달 장군 이야기에는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내용이 있다. 평강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온달의 집까지 찾아가서 시집을 가겠다고 청하였다. 눈먼 온달의 노모가 이르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서 귀인이 가까이 할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지 오래입니다" 라고 거절했다.

마침 산에서 내려오는 온달과 마주쳤다.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끈질기게도 온달의 초가집 사립문 밖에서 노숙하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혹시 온달을 부러워하는 이가 있다면 꿈을 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공주라는 신분에다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 온달 입장에서야 평생 평강 공주에게 큰 소리 한번 낼 수 있었겠는가.

전국 어디에나 자라고 잎의 밑 부분이 좌우 대칭이 안되고 어긋나 있는 것이 느릅나무 종류의 특징이다. 여러 느릅나무가 있으나 주변에서 흔히 보는 종류는 느릅나무와 참느릅나무다. 나무 껍질이 오래되면 흑갈색으로 세로로 깊이 갈라지며 잎이 크고 겹 톱니가 있는 것이 느릅나무, 나무 껍질이 오래되면 회갈색으로 두꺼운 비늘처럼 떨어져 나오며 잎이 메추리 알 크기 만하고 단순 톱니가 있는 것이 참느릅나무다.

열매는 크기가 손톱 만하고 종이처럼 얇은 데 한 가운데 납작한 종자가 들어 있어서 바람에 날아가기 쉽게 되어 있다. 모양이 동전과 비슷하여 옛날에는 동전을 유전(楡錢) 혹은 유협전(楡莢錢)이라고도 하였다.

박목월의 '청노루' 시에도 나오는 우리에게 낯익은 나무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 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

느릅나무에 봄이 찾아오는 모습이 눈앞에 잡힐 듯하다.



14] 벚나무

벚나무는 커다란 나무에 잎도 나오기 전, 화사한 꽃이 구름처럼 나무를 완전히 덮어 버리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하여 일주일 정도면 한꺼번에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이다.

동백이나 무궁화처럼 통째로 꽃이 떨어져 나무 밑에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벚꽃은 5개의 작은 꽃 잎이 한 장씩 떨어져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아간다. 그래서 벚꽃이 떨어지는 모양은 산화(散花)란 말이 어울리고 비슷한 어감의 산화(散華)는 꽃다운 나이에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와 비유한다.


벚나무는 천년을 거뜬히 넘기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는 달리 백수(白壽)를 채 넘기지 못하는 인간의 수명과 비슷하다. 꽃이 한꺼번에 피느라 정력을 너무 소모해 버렸고 유달리 갑각류 곤충의 피해를 받기 쉬운 탓이란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벚꽃의 느낌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행히도 이 아름다운 꽃이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그들이 사는 곳은 벚나무로 치장하였으며, 더욱이 우리의 전통 궁궐인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하고, 그도 모자라 벚나무를 줄줄이 심고 시민의 휴식처란 이름으로 꽃구경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벚나무로 상징되는 치욕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지울 수 없다.

벚꽃이 피는 나무는 벚나무,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능수벚나무 등 그 종류가 많다. 이들의 차이점은 암술대와 꽃자루에 털이 있느냐, 꽃잎 길이의 길고 짧음 등이 고작이어서 오랫동안 식물분류학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구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벚나무 심기의 최대 명분으로 삼는 제주도 자생의 왕벚나무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에 심는 벚나무나 보는 사람은 그냥 '벚나무'일 따름이다.

옛 문헌에 보면 벚나무와 자작나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다 같이 화(樺)자를 쓸 만큼 꽃에는 관심이 없었다. 꽃보다는 껍질의 이용이 더 중요 하였다.

벚나무 껍질은 화피(樺皮)라는 이름으로 활을 만드는데 필수품으로 들어 가는 군수물자이었다. 세종실록의 오례에 관한 내용 중에 '붉은 칠을 한 활은 동궁이라 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궁이라 하는데 화피를 바른다' 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간 효종은 그 때를 설욕하려고 대대적인 북벌 계획을 세우고 활을 만들 준비로 서울 우이동에 많은 벚나무를 심게 하였다.

벚나무는 꽃과 껍질의 쓰임새로 끝나지 않는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옛 목판(木板)인쇄의 재료로서 배나무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나무였다.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60%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최근 현미경을 이용한 과학적인 조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껍질이 세로로 갈라지는 것과는 달리 벚나무 종류들은 가로로 짧은 선처럼 갈라지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그래서 몽골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한 나무씩 베어 가까운 강을 타고 경판(經板) 만드는 곳으로 운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15] 살구나무

옛날 중국 오나라의 동봉(董奉)이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치료비를 받는 대신 의원앞 뜰에다 중환자는 다섯 그루, 병이 가벼운 환자는 한 그루의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동봉은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 숲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숲을 동선행림(董仙杏林) 혹은 그냥 행림이라고 불렀다한다. 그는 여기서 나오는 살구열매를 곡식과 교환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행림이라면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나타낸다.

왜 많은 과일나무 중에 하필이면 살구나무인가? 한방에서는 살구씨를 행인(杏仁)이라 하여 만병통치약처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살구 다섯 알을 따내 씨를 발라 동쪽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담가 두었다가, 이른 새벽에 이를 잘 씹어 먹으면 오장의 잡물을 씻어내고 육부의 풍을 모두 몰아내며 눈을 밝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도 200여 가지의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방법이 알려져 있어서 약방의 감초가 아니라 '약방의 살구'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살구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없어 풍년이 든다고도 하며 살구나무가 많은 마을에는 염병이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병원 앞에 살구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살구 보자'라는 뜻이라니 옛 사람들의 행림이나 오늘날의 살구는 무병장수의 진정한 바람을 다같이 살구나무와 병원과의 관계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살구나무는 중국에서도 재배역사가 오래된 과일나무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도 삼국시대 훨씬이전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역사기록에 흔히 등장한다.

살구꽃이 피는 시기를 보아 이상 기후인지 정상인지를 판단하였고 조선 태종 때의 기록을 보면 철따라 종묘의 제사에 올리는 제물로서 앵두와 함께 살구는 빠뜨릴 수 없는 과일이었다.

꽃과 과일로서만의 살구나무가 아니다. 깊은 산 속 고즈넉한 산사에서 학덕 높은 스님이 두들기는 목탁의 맑고 은은한 소리는 어디서 얻어질까? 몇가지 나무가 알려져 있지만 최고로 치는 목탁은 살구나무 고목에서 얻는다고 한다.

일제의 강제병탄 이후 처음 들어선 1920년대의 고무공장에는 처녀들이 발목이 약간 들어 날 정도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녔다 한다. 이를 두고 당시에 '공장 큰아기 발목은 살구나무로 깎았나 보다/ 보기만 하여도 신침이 도네!.../ 보기만 하여도 알딸딸하네!'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살구나무의 속살은 맑고 깨끗한 흰색이 특징으로 살짝 내보인 발목이 그렇게 섹스어필하였던 모양이다. 그 때 그 어른들이 환생하여 오늘의 거리를 보신다면 아마 기절하여 다시 돌아가실 것이다.

시골 집안이나 마을 주변에 흔히 심는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로 그렇게 크게 자라지는 않는다. 잎은 달걀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꽃은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잎보다 먼저 연분홍색으로 피며 꽃자루가 거의 없다. 열매는 지름 3cm 정도로 둥글며 털이 있고 초여름에 붉은 빛이 도는 노랑 색으로 익는다.



16] 복숭아나무

중국 진(陳)나라 효무제(376-396) 때, 무릉(武陵)에 살던 어부가 계곡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숲 속의 어느 동굴을 지나 복사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논밭이 넓고 먹거리가 풍족하며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남녀노소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지낸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려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세종29년(1447년)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숭아 숲의 경치를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3일만에 그림을 완성한 몽유도원도(夢遊 桃源圖) 역시 이상향의 모델을 복숭아 숲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에는 신선이 먹는 천도(天桃)가 있었다. 전설적인 신선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은 동방삭은 삼천갑자년, 즉 18만년을 살았다 한다. 또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먹기만 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천도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있다가 어느 날 9천년에 한 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 먹어 버렸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나중에 삼장법사가 구해 줄 때까지 500년 동안 바위 틈에 갇히는 호된 시련을 겪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과일 중에 복숭아는 신선이 즐겨먹는 과일로 묘사되고 복숭아 숲은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술잔, 고려 때의 청자연적 및 주전자, 조선시대의 백자연적 등에는 복숭아나무의 꽃, 잎, 열매가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고려 인종 원년(1123년)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왔다가 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의 귀족들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하였으며 피부를 희게 하려고 복숭아꽃 물이나 난초 삶은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민속으로는 특히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가 잡스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구실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무당이 살풀이할 때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활을 만들어 화살에 메밀떡을 꽂아 밖으로 쏘면서 주문을 외기도 한다.

세종 2년(1420년)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하며, 연산 12년(1505년)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숭아 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하여 왕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나무였다. 그래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사당이나 집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으며 제상의 과일에도 절대로 복숭아를 쓰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보면 복사나무는 그야말로 버릴 것 하나없는 약재이다. 복사 나무 잎, 꽃, 열매, 복숭아씨(桃仁), 말린 복숭아, 나무속껍질, 나무진을 비롯하여 심지어 복숭아 털, 복숭아 벌레까지 모두 약으로 쓰였다. 으스름 달밤에 복숭아를 먹는 것은 약이 되는 복숭아 벌레를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이다. 아무리 약이라지만 혹시 반 토막난 벌레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졌다면 먹기가 정말 끔찍하였을지 모른다.

꽃을 보기 위하여 개량한 복숭아나무에는 꽃잎이 여러 겹으로 된 만첩홍도가 가장 흔하다.



17] 자작나무

'닥터 지바고'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옛 영화를 보면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雪原)에 간간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의연히 맞서서 쭉쭉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한껏 자랑하는 나무 미인들의 군상이 바로 자작나무이다.

그녀는 남남북녀라는 말에 걸맞게 얼음이 꽁꽁 어는 추운 지방에만 자란다. 자작나무 껍질은 하늘을 날던 천사가 차디찬 겨울 산 속에 처절하게 서 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흰 날개로 나무의 등걸을 칭칭 둘러 싼 것 같다.


흰 껍질은 얇은 종이를 여러 겹 붙여 놓은 것처럼 차곡차곡 붙어 있으며 한장 한장이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또 여기에는 큐틴(Cutin)이란 일종의 방부제가 다른 나무보다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물이 스며들지 않고 부패나 좀이 먹고 곰팡이가 스는 것을 방지한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조건, 심지어 몇천년을 땅속에 묻혀 있어도 거뜬히 버틴다.
러시아는 자작나무 껍질에서 기름을 짜 가죽가공에 쓰는데, 이 가죽으로 책표지를 만들면 곰팡이와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1973 년에 발굴된 천마총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다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관 안쪽에 자작나무 껍질과 섬유를 대어 머리에 쓰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또 자작나무 껍질에는 초를 만드는 왁스 성분도 있어 잘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므로 촛불이나 호롱불 대신에 불을 밝히는 재료로도 애용되었다.

결혼을 화혼(華婚)이나 화촉(華燭)을 밝힌다고 하는 것도 자작나무 껍질의 불타는 성질과 관련이 있다. 자작나무란 이름도 껍질이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데서 따온 의성어이다.

나무는 껍질만큼이나 나무속도 거의 황백색으로 깨끗하고 균일하며 옹이 하나 없어 추운 지방의 서민들은 이 나무를 쪼개어 너와집의 지붕을 이었으며 죽으면 껍질로 싸서 매장하였다.

자작나무의 또 하나 큰 쓰임새는 수액(樹液)을 뽑아서 마시는 것이다. 곡우때 쯤 줄기에 구멍을 뚫고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파이프를 꽂아 물을 받아 마시면 위장병을 비롯한 잔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생명수를 인간에게 뺏기고도 의연히 서 있는 자작나무를 보고 있으면 흰 껍질 때문에 다가오는 처량함과 아울러 생명의 경외마저 느끼기도 한다. 자작나무가 없는 남부 산간지방에서는 거제수나무, 일명 거자수에서 수액을 채취하여 '곡우물'이란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시고 있다.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는 나무 껍질이 매우 비슷하여 혼동하기 쉽다. 우선 남한에서는 자연적으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없고 대부분 거제수나무이다. 잎 모양으로 보아서 자작나무는 거의 삼각형이며 잎맥이 6-8쌍인데 비하여 거제수나무는 타원형이고 잎맥의 수가 10-16쌍이므로 주의 깊게 관찰하면 구별할 수 있다.



18] 돌배나무

"배꽃에 달빛 내려 비추고 은하수 흘러가는 깊은 밤/한가닥 나뭇가지에 걸린 춘심(春心)을 두견새가 어이 알랴마는/다정도 병이련가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이다.


흐드러지게 피는 새하얀 배꽃 위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는 모습 을 보면 누구라도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여기에 배꽃 필 무렵 쌀로 빚는다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을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주상첨화(酒上添花)'이다.


배나무는 꽃으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숭아, 자두와 함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 조율시이(棗栗枾梨)에 들어갈 만큼 먼 옛날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만해 한용운이 1920년대에 쓴 '해인사 순례기'를 보면 환경(幻鏡)이란 스님은 가을에 돌배를 따두었다가 즙을 내어서 그릇에 넣고 밀폐하여 공기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두었다가 차로 만들어 먹었다 한다. 이 차는 돌배에서 이름을 딴 석차(石茶)라고 하며 수년을 두어도 그 맛이 조금도 변치 않는다니 한번쯤 만들어 먹어 볼만하다.

배나무의 목재는 은은한 황갈색에 재질이 골라 옛부터 여러 용도로 쓰였다. 대표적인 것이 벚나무와 함께 목판(木板)의 재료이다. 해인사 팔만대 장경판은 산벚나무 다음으로 돌배나무가 많이 쓰였으며 조선시대의 양반가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문집의 목판도 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배나무 세포는 배열이 고르고 물관의 크기가 적당하며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글자를 새기기에 알맞은 것.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양원왕 2년(546)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 연리(連理)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리란 나무와 나무를 맞붙여 묶어두면 껍질이 파괴되고 서로의 부름켜가 연결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다. 연리목이 알려지면 나라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 였고 백성들은 이 나무에다 빌면 금실이 좋아지는 것으로 알았다.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 인연이 많다. 왕업을 일으킬 꿈을 꾸고 토굴 속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에게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고, 즉위한 뒤에는 토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 하였으며 배나무를 손수 심었다.

전북 마이산의 은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86호 청실배나무는 태조가 명산인 마이산을 찾아와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싹이 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태조실록 총서에는 '백 보(步) 밖에 서로 포개어 달려있는 수 십 개의 배를 한 번에 쏘아서 손님을 접대하였다' 하여 활 솜씨 자랑에도 능수버들과 함께 배나무를 이용하였다.

그냥 우리가 배나무라는 것은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참배, 백운배나무, 문배나무, 청실배나무 등 엇비슷한 배나무 종류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 이다. 우리나라에는 금화배, 함흥배, 봉산배 등이 옛부터 토종 배로서 널리 알려졌으나, 일제 침략과 함께 들어온 개량품종들에 밀려 현재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 느티나무

시골 동네 어귀에는 어김없이 정자나무 한 그루가 초가 지붕과 어우러져 서정적인 우리 농촌 마을의 마스코트 역할을 한다. 이같은 정자나무는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년을 손쉽게 훌쩍 넘기는 장수목이다. 짧게는 조선왕조, 길게는 고려나 신라인과 삶을 같이 해오면서 민족의 비극도, 애달픈 백성들의 사연도 모두 듣고 보아오면서 오늘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는 나무가 바로 느티나무이다.

그래서 전설을 간직한 느티나무는 수없이 많다. 전북도 임실군 오수면에는 술에 취하여 잔디밭에 잠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견(義犬)을 기리는 '개나무'란 이름의 큰 느티나무가 자란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현고수(懸鼓樹)나무는 임진왜란때 의병대장 곽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느티나무의 목재는 나무 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깔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데다 다듬기도 좋다. 그러면서도 물관의 배열이 독특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갖고 있으며 큰 나무가 될수록 비늘모양, 구슬모양, 모란꽃 모양의 무늬와 함께 기름 끼가 약간 배어있는 듯한 광택도 있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다.

느티나무가 갖는 바깥모양의 고고함을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나무의 여러 가지 속 성질만을 종합해 보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나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의 황제'이다.

나무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들이 느티나무를 그대로 썩혀 둘 리가 없다. 경산 임당의 원삼국시대 고분과 부산 복현동 가야고분 및 천마총 관재,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초 화물운반선의 배 밑바닥 판자 등을 모두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건축재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의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은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이다. 또 흔히 스님들이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구시(행사때 쓰는 큰 나무 밥통), 기둥, 나무 불상도 사실은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정자나무로서 느티나무만 상상하여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둥그스럼하게 퍼지는 나무로만 알면 큰 잘못이다. 숲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여 자라는 느티나무는 곧바르고 우람하게 자란다. 그것도 적당히 자라다 그만 두 는 것이 아니라 키가 20-30m, 지름 너덧 아름은 보통이므로 임금님의 관재로도, 사찰의 기둥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이다.

산림청은 새 천년을 맞아 밀레니엄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하였다. 느티나무는 역사성과 문화성을 지니고 있으며, 새 천년동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장수(長壽) 나무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름만의 새 천년 나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느티나무가 되었으면 한다.



19] 조팝나무

조선후기의 고전소설 토끼전에서는 별주부가 육지에 올라와서 경치를 처 음 둘러보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하는 내용이 나온다.


4월말이나 5월초의 산기슭에는 지금도 조팝나무 꽃이 어디서나 흔하게 피어있으니 별주부가 토끼를 꾀어내던 그 시절에는 더더욱 흔한 꽃나무이었을 것이다. 자라의 작은 눈에도 육지에 올라오자 금세 눈에 뜨인 나무가 바로 조팝나무였던 모양이다.

왜 조팝나무인가? 한창 꽃이 피어 있을 때는 좁쌀로 지은 조밥을 흩뜨러 놓은 것 같다 하여 '조밥나무'로 불리다가 조팝나무로 된 것이다.

늦은 봄 잎이 피기 조금 전이나 잎과 거의 같이 굵은 콩알만한 크기의 새하얀 꽃들이 마치 흰 눈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수백 수천 개가 무리 지어 핀다. 하나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작은 꽃이 아니련만 무리를 이루므로 좁쌀 밥알에 비유될 만큼 꽃이 작아 보인다. 흰빛이 너무 눈부셔 언뜻 보면 때늦게 남아있는 잔설(殘雪)을 보는 듯도 하다.

그러나 조팝나무의 쓰임새는 꽃을 감상하는 것보다 약용식물로 이름을 날린다. 조팝나무에는 조팝나무산(酸)이라는 해열과 진통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며, 버드나무의 아세틸살리실산(acetyl salicylic acid)과 함께 진통제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aspirin)이란 이름은 아세틸살리실산의 'a'와 조팝나무의속명(屬名) spiraea에서 'spir'를 땄고 나머지는 당시 바이엘사가 자기회사 제품명 끝에 공통적으로 썼던 'in'을 붙여서 만들었다.

예 부터 조팝나무의 뿌리를 상산(常山) 혹은 촉칠근(蜀漆根)이라 하였는데, 동의보감에는 '맛은 쓰며 맵고 독이 있다. 여러 가지 학질을 낫게 하고 가래침을 토하게 하며 열이 오르내리는 것을 낫게 한다'하였다. 또 조 팝나무의 새싹은 촉칠(蜀漆)이라 하여 여러 증상의 학질을 고치는 데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종 5년(1423) 일본사신이 와서 상산 5근과 3근을 두 번에 걸쳐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서 궁중에서도 쓰이는 귀중한 한약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이다. 조팝나무는 사람 키 남짓한 높이로, 손가락 굵기만한 가느다란 줄기가 여럿 모여 집단으로 자란다. 어린 가지는 갈색으로 털이 있으며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유선형으로 양끝이 뾰족하다. 잎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이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꽃은 짧은 가지에서 나온 우산모양의 꽃차례에 4-6개씩 달리며 열매는 골돌이라 불린다.

조팝나무 무리에는 이외에도 꽃 모양과 빛깔이 다른 수십 종이 있다. 진한 분홍빛인 꽃이 꼬리처럼 모여 달리는 꼬리조팝나무를 비롯하여 작은 쟁 반에 흰쌀밥을 소복히 담아 놓은 것 같은 산조팝나무 등이 아름다운 꽃으로 우리의 산하를 수놓고 있다.



21] 등나무

나무는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피나는 경쟁을 통해 삶의 공간을 확보하 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다른 나무의 등걸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 어렵게 확보해 놓은 광합성의 공간을 혼자 점령해 버리는 폭군이다.

칡도 마찬가지로 선의의 경쟁에 길들여 있는 숲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사이의 다툼을 갈등(葛藤)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옛 조선조의 선비들은 등나무의 이와 같은 특성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였다. 중종 32년(1537) 홍문관 김광진 등이 올린 상소문에 "대체로 소인들은 등나무 덩굴과 같아서 반드시 다른 물건에 의지해야만 일어설 수 있는 것 입니다"라 하여 가장 멸시하던 소인배와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을 빚는 나무이든, 소인배의 나무이든 관념적인 비유일 뿐이고 등나무만큼 쓰임새가 많은 나무도 드물다.

잎은 아카시나무와 아주 닮았으나 더 뾰족하고 작으며, 한 여름의 뙤약 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준다. 5월이 되면 연한 보랏빛의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꽃나무로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보드라운 털로 덮인 콩 꼬투리 모양의 열매는 너무 짙푸른 등나무 잎사귀의 느낌을 부드럽게 해주는 액센트이다.

알맞게 자란 등나무 줄기는 지팡이 재료로 적합한데, 영조 41년(1764) 임금이 나이가 들어 걷기가 불편하자 신하들이 만년등(萬年藤) 지팡이를 바쳤다 한다. 덩굴은 바구니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이며 껍질은 매우 억세고 질겨 새끼를 꼬는데, 또는 키를 만드는 데도 필요한 나무이다.

등나무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등가구에 쓰이는 '등나무'이다. 이 등나무는 외떡잎 식물이며 attan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지방의 나무로 실제 등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쉽게 말하여 대나무와 가까운 집안인데 속이 꽉 차있고 거의 덩굴처럼 수십m씩 길게 자라는 것이 대나무와 다르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천연기념물 89호 등나무는 흔히 용등(龍藤)이라 하는데, 애처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시대 이 마을에는 마음씨 착한 두 자매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옆집에 늠름하고 씩씩한 청년이 있어 두 자매는 마음속 깊이 청년을 사모하고 있었다.

어느날 청년은 변방에 전쟁이 일어나 갑자기 싸움터로 떠나버렸다. 손 꼽아 기다린 보람도 없이 청년이 전사했다는 풍문이 두 자매의 귀에까지 들려오자 두 자매는 마을앞 용림이라는 연못에 몸을 던져버렸다. 다음 해 봄 전에 없던 등나무 두 그루가 연못가에 자라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죽었다던 그 청년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마을로 돌아왔다. 두 자매의 사연을 듣고 괴로워하던 그 청년도 어느 달 밝은 밤 연못에 풍덩 뛰어들어 버렸다.

다음해 봄이 되자 마땅히 타고 올라갈 나무를 찾지 못하여 바람에 흔들리기만 하는 두 그루의 등나무 옆에 한 그루의 팽나무가 갑자기 쑥쑥 자라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등나무는 이 나무를 의지하여 크게 자랐으며 사람들은 용림에서 자란 등나무란 뜻으로 용등이라 불렀다.



22] 모란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조지훈의 시 '고사(古寺)'에서처럼 모란은 봄이 무르익어 가는 산사(山 寺)의 대표적인 꽃이다. 화려하고 복스럽게 피는 모란은 예로부터 화왕(花王)이라 하여 꽃 중의 꽃으로 꼽았으며, 아름다운 여인을 흔히 모란꽃 같다고 하듯이 최고의 아름다움이었고 부귀의 상징이었다.

민화풍으로 그려진 모란도(牧丹圖)는 혼례용 병풍으로 쓰였으며 고려청자 상감의 꽃무늬, 분청사기의 꽃, 나전칠기의 모란당초(牡丹唐草), 수놓은 꽃방석, 와당(瓦當)의 무늬, 화문석의 밑그림까지 모란의 상징성을 살린 쓰임새는 끝이 없다.

설총은 모란에 비유한 화왕계(花王戒)라는 설화를 지어 후세의 임금이 덕목으로 삼도록 하였다. "꽃 나라를 다스리는 화왕은 찾아오는 많은 꽃 중에서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였다가 뒤에 할미꽃 백두옹(白頭翁)의 충직한 모습과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된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있다.

고려 예종17년(1122) 왕이 아끼는 신하들을 불러 모란에 관한 시를 짓게 하였는데, 시 잘 짓기로 명성을 날렸던 강일용은 그 날 따라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초고를 소매에 넣고 나가서 대궐 뜰 개천에 쳐 넣어 버렸다. 왕이 환관을 시켜 가져다가 보고, 다른 사람이 일등을 하였더라도 이는 옛 사람의 말한 바와 같이 "늙은이에게는 온 얼굴에 꽃 장식을 하더라도 서시(西施)의 절반 단장만 못하다"는 것과 같다고 그를 위로하여 돌려보냈다는 고려사 기록이 있다. 임금과 신하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미를 보 는 것 같다.

연산10년(1504) 모란 한 송이를 승지들에게 내려보내고 율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였으며, 팔도의 관찰사에게는 품종이 좋은 모란꽃을 올려보내라고 하였다. 연산군은 모란꽃을 각별히 좋아하여 가까이 있던 신하는 율시를 짓느라 머리 썩히고, 지방관은 모란이 혹시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 하였다.

이렇게 모란을 노래한 시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꽃이 모두 떨어져 가버린 봄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란은 사람 키 남짓하게 자라고 가지는 굵고 성기게 갈라진다. 작은 잎은 달걀모양인데 3-5개로 갈라지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대개는 흰빛이 돈다. 신라 선덕여왕(632-647)때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씨 3되를 함께 보내와서 처음 심게 되었다.

꽃의 색깔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용 중에는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등장한다. 조선 인조 23년(1646)에 일본은 '청, 황, 흑, 백, 적모란'을 색깔별로 보내달라고 하였으나 다른 색깔은 없다고 가장 흔한 적모란만 보내주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모란뿌리는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통을 낫게 하며 몸푼 뒤의 모든 혈병(血病), 기병(氣病), 옹창을 낫게 한다하여 여러 부인병에 쓰였다.



23] 보리수나무

우리나라 산길의 어디에서나 흔히 만나는 나무에 보리수란 이름을 달고 있는 나무가 있다. 갸름하게 생긴 잎의 뒷면에 아주 짧은 은빛 털이 촘촘 하여 마치 은박지같은 잎을 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이다.

이 나무는 석가가 득도하였다는 보리수(菩提樹)와 발음이 같아 불교신자들로부터 격에 어울리지 않게 대접을 받는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서 6년간에 이르는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석가가 도를 깨친 나무는 인도보리수로 서 아열대 지방에 자라는 뽕나무무리의 무화과 종류에 포함되는데 높이 30m, 지름이 2m정도나 되는 큰 상록수이다.

인도가 원산지이며 가지가 넓게 뻗어서 한 포기가 작은 숲을 형성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다. 이 나무를 불교에서는 범어로 마음을 깨쳐준다는 뜻의 odhidruama라고 하며 Pip pala 혹은 o라고도 하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자로 번역할 때 그대로 음역하여 보리수(菩提樹)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진짜 부처님이 도를 깨친 인도보리수는 추워서 자랄 수 없으므로 불교신자들은 대용 나무가 필요하였다. 이에 스님들은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피나무를 보리수란 이름을 붙여 널리 심기 시작하였다. 피나무 무리들은 단단하고 새까만 열매가 흔하게 달려서 염주로 쓸 수 있고 잎이 하트모양으로 인도보리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절에 보리수, 즉 피나무를 심기 시작한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사에 보면 명종11년(1141) 2월 '묘통사 남쪽에 있는 보리수가 표범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고려 초 이전부터, 아마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부터 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산에는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예로부터 '보리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연산군 6년(1499) '동백나무 5-6그루를 각기 화분에 담고 흙을 덮어 모두 조운선에 실어보내고, 보리수(甫里樹) 열매는 익은 다음에 봉하여 올려보내라' 하였다.

열매는 손가락 첫마디만 한데 앵두처럼 붉고 하얀 점이 점점이 있다. 간식거리로는 충분히 먹을 만하여 임금님에게 진상하였던 것이다. '보리(甫里)'라는 곳에서 나는 열매나무란 의미로 생각되며 오늘날의 보길도나 노화도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남쪽 섬 지방의 보리수는 세월이 지나면서 보리장나무, 보리밥나무로 이름이 변해버리고 육지에 있는 비슷한 나무는 그대로 보리수란 이름으로 남아 절에 있는 보리수와 혼동하게 되었다.

한편 모감주나무, 무환자나무 등 염주를 만들 수 있는 열매를 가진 나무 는 한자로는 흔히 보리수라고도 하여 나무이름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절에 심겨진 보리수는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그때 그 나무가 아니라 피나무 무리의 한 종류이다.



24] 불두화

메마른 사막의 선인장도, 진흙구덩이의 연꽃도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긴긴 인고의 세월을 말없이 기다린다. 꽃이란 바로 식물의 생식기관으로서 암수의 화합이 이루어져 씨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암수가 서로 움직여 짝을 찾을 수 없는 식물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운 자태에다 향기를 내고 꿀을 만들어 곤충을 꾀어야 수정이란 단계를 거칠 수 있다.


그런데 암술도, 수술도 갖지 않고 꽃잎만 잔뜩 피우는 멍청이 꽃나무도 있다. 자연적으로 생기기도 하며 사람이 이리 저리 붙이고 떼고 하여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이름하여 무성화(無性花)이다.

초 파일을 전후하여 대웅전 깊숙이 새하얀 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꽃나무가 있다. 사람 키 남짓한 높이에 야구공 만한 꽃송이가 저들 자신조차 비좁도록 터질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꽃나무가 바로 불두화로서 대표적인 무성화의 하나이다. 자라는 땅의 산도(酸度)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처음 필 때에는 연초록 빛깔이며 완전히 피었을 때는 눈부신 흰색이 되고, 꽃이 질 무렵이면 연보랏빛으로 변한다.

꽃 속에 꿀샘은 아예 잉태하지도 않았고 향기를 내뿜어야할 이유도 없으니 벌과 나비가 처음부터 외면해 버리는 꽃이다. 매년 5월이 돌아오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꽃을 피워야 할 계절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살아있는 꽃'이지만 아무래도 벌과 나비가 없는 불두화는 생명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서글픔이 있다.

다행이 그는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석화(石花)의 서러움을 조금은 면하게 되었다. 심은 곳의 대부분이 절간이고 꽃의 모양이 마치 짧은 머리카락이 꼬부라져 나발형(螺髮形)을 이루고 있는 불상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불두화(佛頭花), 혹은 승두화(僧頭花)란 분에 넘치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씨도 없는 불두화의 자손은 꺾꽂이나 접붙이기로 퍼져나가지만 자신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백당나무이다. 산지의 습한 곳에서 높이 약 3m 정도로 자라는 작은 나무인데 잎은 마주나고 끝이 3개로 크게 갈라져서 가장자리에 굵은 톱니가 있다.

꽃은 주먹만한 크기로 작은 우산을 펴놓은 것 같은 꽃차례로 둥글게 달 린다. 안쪽에는 암꽃과 수꽃을 모두 가지는 정상적인 꽃, 즉 유성화(有性花)가 달리고 바깥쪽에는 새하얀 꽃잎만 가진 무성화가 피어 있어서 달리 보면 전체 모양이 마치 접시를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백당나무에서 돌연변이가 생겼거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수꽃만 달리게 육종(育種)한 것이 바로 불두화이다.

북한에서는 백당나무를 접시꽃나무, 불두화를 큰접시꽃나무라고 부른다. 일찍부터 한글전용을 하여온 북한은 아름다운 우리말 식물이름을 많이 만들었지만 백당나무나 불두화가 북한이름보다 꼭 나쁜 이름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에 자라는 나무 중에 중대가리나무란 이름이 있는데 북한 이름은 머리꽃나무이다. 통일의 그 날이 오면 이런 이름들은 그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것 같다.



26] 이팝나무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얼마전이었다.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조선왕조시대에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하였다.


이팝나무는 이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꽃의 여러가지 특징이 이밥, 즉 쌀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팝나무는 키가 20-30m나 자라고 지름도 몇아름에나 이르는 큰 나무이면서 5월 중순, 아카시아 꽃과 거의 같이 파란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을 가지마다 소복소복 뒤집어쓰는 보기드문 나무다.

가느다랗게 넷으로 갈라지는 꽃잎 하나하나는 마치 뜸이 잘든 밥알 같이 생겼고,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꽃 모양은 멀리서 보면 쌀밥을 수북이 담아 놓은 흰 사기밥그릇을 연상하게 한다.

꽃이 필 무렵은 아직 보리는 패지 않고 지난해의 양식은 거의 떨어져 버린 보릿고개이므로 주린 배를 잡고 농사일에 열중하면 헛것으로도 쌀밥이 보일 정도로 힘든 계절이다. 이때 이팝나무 꽃은 쌀밥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꽃피는 시기가 대체로 양력 5월5.6일경인 입하(立夏) 무렵이어서 '입하 때 핀다'는 의미로 입하나무로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입하목'으로도 부른다니 발음상으로 본다면 더 신빙성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자연스럽게 붙여놓은 이름을 오늘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말하기는 어렵다. 둘 다 충분 한 이유가 있으며 더더욱 쌀 농사의 흉.풍년과 관계가 있으니 나름대로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경상북도 남부에서 전라북도의 중간쯤을 잇는 선의 남쪽에 주로 자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만도 8그루나 돼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에 이어서 네번째로 많은 나무다. 그러나 186호 양산 석계리 이팝나무는 1999년에 죽어 버려 현재는 7그루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시.도기념물, 보호수로 지정된 이팝나무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자목이나 신목(神木)의 구실을 하였으며 꽃피는 상태를 보고 한해의 농사를 점쳤다고 한다.

나이가 500년이나 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팝나무는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신천리의 천연기념물 307호이다.

이팝나무는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도 자라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쌀밥을 알지 못하니 눈이 내린 나무로 보아 눈꽃나무(snow flower)라 하였다.

어린줄기는 황갈색으로 벗겨지나 나이를 먹는 나무의 껍질은 회갈색으로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기하고 타원형이며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이며 표면에는 매끈한 광택이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의 모양이나 크기가 언뜻보면 감나무와 비슷하다. 열매는 콩깍지 모양이고 짙은 푸른색이며 9-10월에 익고 겨울까지 계속 달려 있다.



27] 철쭉

봄의 끝자락 5월 중하순에 들어서면 소백산, 지리산, 태백산 등 전국 높은 산꼭대기에 군락으로 자라는 철쭉은 분홍빛 꽃모자를 뒤집어쓴다. 산기슭의 큰 나무 그늘부터 바람이 생생 부는 높은 산의 꼭대기까지 어디에나 잘 살아갈 만큼 철쭉은 생명력이 강하다.


진달래와 철쭉종류(철쭉, 산철쭉, 영산홍)는 꽃 모양이 비슷하여 관심 있는 이들도 혼란스러워한다. 우선 진달래는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나오므로, 꽃과 잎이 같이 피는 철쭉 종류와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철쭉은 가지 끝에 작은 주걱모양으로 매끈하게 생긴 잎이 너댓장 돌려 나며 꽃빛깔이 아주 연한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흰 빛깔에 가깝다. 그래서 남부지방에서는 색이 연한 진달래란 뜻으로 '연달래'라고도 한다. 산철쭉은 잎 모양이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에 버들잎처럼 길고 갸름하게 생겼으며 꽃빛깔은 붉은 빛이 많이 들어간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붉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영산홍(暎山紅)은 영 복잡하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주로 개량하여 보급되는 나무이나, 분류학의 체계가 거의 완전히 잡혀 있는 오늘날도 영산홍만은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교과서에도 적혀 있을 정도다.

모양새는 산철쭉과 비슷한 품종이 많아 서로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들은 갸름한 좁은 잎사귀에 진달래처럼 생긴 꽃이 피는 자그마한 나무가 산에 자라면 산철쭉, 정원에 심어진 것은 영산홍으로 아는 수밖에 없다.

옛 사람들은 철쭉을 척촉( )이라하였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철쭉 척( )자에 머뭇거릴 촉( )자를 썼다 하며, 또 다른 이름인 산객(山客)도 철쭉꽃에 취해버린 나그네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의 부인 수로(水路)는 신라 제일의 미인이었다. 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따라나선 수로부인은 천길 절벽에 매달린 철쭉을 따 달라고 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위험하다고 거절하자 지나가던 노인이 몰고 가던 암소를 팽개치고 절벽에 기어올라 철쭉꽃을 따다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동국이상국집에도 철쭉에 대한 시가 실려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철쭉, 영산홍, 일본철쭉이 서로 뒤섞여 여러 번 기록되어 있고, 강희안의 양화 소록에는 세종23년(1441) 봄에 일본에서 철쭉 두 화분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영산홍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산림경제에도 일본 철쭉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 심고 가꾸는 영산홍이 기록처럼 적어도 조선 왕조 이전에 일본에서 수입된 꽃나무인지, 아니면 우리의 산에 흔히 자라는 산철쭉이나 철쭉을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철쭉꽃에는 마취성분을 포함한 유독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양(羊)이 철쭉을 잘못 먹으면 죽기 때문에 양척촉(羊 )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본초도감에 적혀 있으며, 음력 3-4월에 꽃을 따서 말린 것을 약으로 쓴다.



28] 찔레꽃

숲의 가장자리나 돌무더기가 많은 양지 바른 곳에 늦은 봄이면 가느다란 줄기가 길게 늘어지면서 새하얀 꽃이 달리는 가시덩굴이 있다. 목련꽃처럼 너무 크지도, 조팝나무 꽃처럼 너무 작지도 않은 찔레꽃은 5장의 꽃잎에 펼쳐지는 백옥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꽃의 질박함이 유난히도 흰옷을 즐겨 입던 한민족의 정서에도 맞는 우리의 토종 꽃이다.


찔레꽃은 해맑은 햇살을 좋아하지만 우거진 숲속에서도 조그만 틈만 있으면 꿋꿋이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낸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라는 흘러간 유행가가 있다. 고향산천과 아련한 유년의 추억을 그림처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그러나 찔레꽃은 붉게 피지 않는다. 아마 해당화 꽃을 찔레로 착각한 작사자의 탓일 것이다.

가난한 집의 어린이들은 찔레꽃을 꽃으로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배 고픔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였다. 보릿고개를 아는 이라면 봄에 돋아나는 연한 찔레순의 껍질을 벗겨 먹었던 일이 아픔으로 남는다. 가벼운 단맛이 있어서 아이들한테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고 요즈음의 눈으로 본다면 비타민과 각종 미량원소가 들어 있는 찔레순은 어린이의 성장발육에 큰 도움이 된다.

찔레꽃이 필 무렵에는 모내기가 한창인 계절이다. 안타깝게도 이 중요한 시기에 흔히 가뭄이 잘 든다. 그래서 특히 이때의 가뭄을 '찔레꽃 가뭄'이 라고도 한다.

가을철에 굵은 콩알 크기로 빨갛게 익는 열매는 귀엽고 앙증맞을 뿐만 아니라 영실(營實)이라하여 약으로 쓴다. 동의보감에는 '맛이 쓰고 시며 악성종기, 부스럼, 성병이 잘 낫지 않을 때나 두창(頭瘡), 백반병 등에 쓴 다'고 하였다.

열매를 소주에 담가서 만든 황금빛의 찔레술(營實酒)은 적당히 신맛이 있다. 꿀이나 설탕을 가미하면 풍미도 일품이며, 향내가 좋아 진귀한 약술이 된다. 비타민 C가 풍부하며 신장병, 월경불순, 설사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찔레 뿌리도 열매와 마찬가지로 약제로 쓰인다.

서양에서는 찔레뿌리로 만든 담배파이프가 유명하다. 최고급 남성용품의 대명사로 꼽히는 던힐의 창업주 앨프리드 던힐(A.Dunhill)은 35세 때인 1907년 런던 듀크가(街)에 담배 가게를 열면서 찔레뿌리로 아름답게 수가공 (手加工)한 파이프를 만들어냄으로써 명성을 떨치는 계기를 잡았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키가 2m정도이나 가지 끝이 밑으로 처져서 덩굴 모양을 한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작은 잎이 5-9개로 이루어진다. 작은 잎은 메추리알 크기만 하고 타원형이며, 양끝이 좁고 길이 2-3cm로 톱니가 있다. 빗살 같은 톱니를 가진 탁엽이 잎자루와 합쳐진다. 꽃은 새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차례로 달리고 5월부터 피기 시작하 며 지름 2cm정도로 흰빛이나 연분홍 빛으로 핀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맛을 주는 조경수로 적당하나 찔레를 담장에 올리면 상을 당한다고 하여 생울타리로는 심지 않는다



29] 때죽나무

오월 중순이 지날 즈음, 층층이 뻗은 자그마한 나무 가지의 짙푸른 잎사귀 사이에 새하얀 꽃들이 2-5개씩 뭉쳐서 줄줄이 아래로 매달려있는 꽃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바로 이름도 귀여운 때죽나무이다.


개개의 꽃은 엄지 첫 마디만하고 작은 종(鐘) 모양으로 앙증맞게 생겼다.

절에서 흔히 보는 동양의 범종과는 달리 윗부분은 원통형에 가깝고 입이 크게 벌어진 서양 종의 모양이다.


다섯 장의 새하얀 꽃잎으로 감싼 노랑 수술은 끈을 매달아만 놓아도 산들바람으로 부딪혀 금세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질 것 같다. 그래서 영어로는 'snowbell'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꽃들이 하늘을 향하여 태양을 마주보고 '나 얼마나 예뻐요?'하듯 뽐내는데 여념이 없으나, 때죽나무 꽃은 치마꼬리 살짝 잡고 생긋 웃는 수줍은 옛 처녀 마냥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어 있다. 멀리서는 백옥 같은 꽃잎의 옆모습밖에 볼 수 없으니 꼭 앞 얼굴을 보고 싶은 이는 나무 밑에 들어와서 살짝 쳐다보라는 뜻이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면 크기가 손가락 첫 마디만하고 아래위가 약간 뾰족한 열매가 처음 달릴 때는 초록색으로 시작하여 갈색으로 익어가는 모양이 너무 귀엽고 깜찍하다. 여기에는 유지(油脂)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예부터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은 북쪽지방에서는 등유나 머릿기름으로 이용 되었다.

열매나 잎 속에는 사포닌을 주성분으로 하는 마취성분이 들어 있어서 이를 찧어 물에 풀면 물고기는 순간적으로 기절해 버린다. 간단히 고기잡이에 쓰였으나 사람도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구토를 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최근 오염환경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식물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때죽나무는 공해물질의 배출이 많은 공장 가까이서도 잘 자라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예쁜 꽃과 열매를 감상할 수 있고 공해에도 잘 견디는 때죽나무에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 볼만하다.

때죽나무의 속살은 너무 해맑고 깨끗하며 세포의 크기와 배열이 거의 일정하여 나이테 무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유빛 아름다운 피부 만을 곱게 내보인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빗물을 깨끗이 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가로수로 적당한 나무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버즘나무, 은단풍, 튤립나무 등 외래종 나무심기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때죽 나무처럼 청초한 흰 꽃과 귀여운 열매, '몽당비'처럼 자르지 않아도 적당한 크기로 자라는 등 가로수로 알맞은 '토종 우리나무'가 얼마든지 있다.

쪽동백나무는 때죽나무와 같은 무리에 속하는 친형제 나무이다. 옥령화(玉鈴花)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때죽나무와 비슷하지만 잎 모양과 꽃이 달리는 차례가 다르다. 잎은 거의 둥글고 크기가 손바닥을 편 것만 하며 꽃은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20여개씩 달리는 것이 쪽동백나무, 잎은 타원형이고 작으며 꽃은 2-5개씩 달리는 것이 때죽나무이다.



30] 함박꽃나무

꽃 모양이 한약재로 널리 쓰이는 작약, 즉 함박꽃과 너무 비슷하여 나무에 피는 '함박꽃'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함박꽃나무와 목련(木蓮)은 식물학적으로도 한 식구이고 꽃이나 잎 모양이 매우 닮았으며 주로 산 속에 자라므로 흔히 함박꽃나무는 산목련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함박꽃나무, 그들의 이름으로는 목란(木蘭)임이 알려졌다. 목란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에 처음 발견하였으며 이름도 없었는데 60년대 후반 직접 목란이란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그 이후 목란은 귀중한 나무로 취급 받았으며 91년 4월에 공식적으로 국화로 지정했다. 김일성 저작집 16권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목란이란 꽃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향기도 그윽하고 나뭇잎도 보기가 좋아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하여 심기를 장려한 것 같다.

김일성과 연관이 있는 북한의 대형 건축물에는 대부분 목란꽃 문양이 들어있다. 금수산 의사당 밑바닥, 혁명사적지를 비롯하여 95년 8월에 판문점 북측지역에 세워진 김일성의 친필비석에도 그의 사망 당시 나이를 상징하는 82송이의 목란꽃이 새겨져 있다 한다.

또 각종 공문서의 바탕에는 우리나라가 무궁화 그림을 넣는 것처럼 목란 꽃이 연하게 깔려있고, 평양 창광거리에서 최고시설을 자랑하는 종합연회장도 목란관이다. 가극 '금강산의 노래'에서도 목란은 꽃 중의 꽃으로 숭상하고 있다.

그 러나 김일성이 처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신격화의 일단일 따름이고 산목련, 함백이, 개목련, 함박꽃나무란 이름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무이다. 자라는 곳이 인가 근처가 아니라 깊은 산 계곡이므로 사람들 눈 에 잘 띄지 않았을 따름이다.

목란이란 원래 목련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으나, 이제는 북한이 이미 붙여둔 이름이니 함박꽃나무와 함께 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목련은 꽃이 먼저 핀 다음 잎이 나오나 함박꽃나무는 잎이 다 펼쳐진 다음 꽃이 핀다. 꽃은 늦봄에서 초여름에 새 가지 끝에 달리며 6장의 하얀 꽃잎으로 둘러 쌓인 수술은 붉은 빛을 띤 보라색이다. 자칫하면 크다란 초록색 잎사귀에 묻혀 심심해져 버릴 하얀 꽃에 악센트를 주며 꿀을 따는 벌을 위하여 은은한 향기도 내뿜는다.

꽃은 당당하게 하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는 모양은 소복 입은 청상과부의 조심스런 몸가짐에서 풍기듯 깔끔하고 정갈 한 느낌이다.

전국의 산골짜기 숲 속에 자라는 작은 나무로서 키가 7-10m, 굵기는 발목 굵기 정도가 고작이다. 줄기는 여러 포기가 나와 비스듬하게 자라는 경우가 흔하고 껍질은 회색이며 갈라지지 않는다. 잎은 어린아이 손바닥만하고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31] 앵두나무

이름으로 앵도나무와 앵두나무 양쪽을 다 쓴다. 그러나 한자 이름에서 온 앵도(櫻桃)나무가 더 맞는 이름이다. 또 열매는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새가 복숭아와 비슷하기 때문에 앵도(鶯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잘 익은 앵두의 빛깔은 붉음이 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바로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빨간 입술과 흰 이를 아름다운 여인의 기준으로 삼았던 옛 사람들은 예쁜 여인의 입술을 앵두같은 입술이라 하였다.


흔히 우리는 사람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고 입술은 관능의 창이라 한다. 표면에는 자르르한 매끄러움마저 있으니 작고 도톰한 입술이 촉촉이 젖어있는 매력적인 여인의 관능미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조선초기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세종이 앵두를 좋아하였으므로 효자인 문종은 세자시절 경복궁 안 울타리마다 손수 앵두를 심고 따다 바쳤다. 세종이 맛보고 '다른 곳에서 바친 앵두가 맛있다 하여도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느냐'고 무척 흐뭇해하였다고 한다.

성종25년(1492) 철정이란 관리가 임금께 앵두를 바치자, '성의가 가상 하니 그에게 활 1장을 내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 관리는 연산3년(149 6)에도 또 임금께 앵두를 바쳐 각궁(角弓) 한 개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억! 억! 하는 돈을 내놓고도 권력자의 눈 밖에나 하루아침에 망해버린 어느 기업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앵두 한두 쟁반에 임금님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그 때그 시절을 부러워 할 것 같다.

앵두는 단오 전후 모든 과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익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제물(祭物)로도 매우 귀하게 여겼고, 약재로도 쓰였다. 동의보감에는 '중초(中焦)를 고르게 하고 지라의 기운을 도와주며 얼굴을 고와지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하며 체하여 설사하는 것을 멎게 한다'고 하였다.

또 앵두나무 잎은 뱀에게 물렸을 때 짓찧어 붙이고, 동쪽으로 뻗은 앵두 나무뿌리는 삶아서 그 물을 빈 속에 먹으면 촌충과 회충을 구제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앵두나무는 수분이 많고 양지 바른 곳에 자라기를 좋아하므로 동네의 우물가에 흔히 심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린 한 많은 옛 여인네들은 우물 가에 모여 앉아 시어머니로부터 지나가는 강아지까지 온 동네 흉을 입방아 찧는 것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유행가 가사처럼 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 초, 소문으로만 듣던 서울로 도망칠 모의(?)를 한 용감한 시골 처녀들의 모임방 구실을 한 것도 역시 앵두나무 우물가이었다.

중국 화북 지방이 원산지이고 사람 키를 조금 넘기는 정도로 자라는 작은 나무이다. 어린 가지에 곱슬곱슬한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모양 이며 가장자리에 가는 톱니가 있고 손가락 길이 정도이다. 4월에 잎보다 먼저, 또는 새잎과 거의 같이 엄지손톱 만한 꽃이 새하얗거나 연분홍색으로 1-2개씩 모여 핀다.



32] 산딸나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들어 권할이 없어 그를 서러워 하노라."


조선 중기의 문신 임제(林悌, 1549-1587)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부임 하는 길에 황진이의 묘를 찾아 읊조린 시 한 수이다.

산딸나무는 붉은 흙이 그냥 보이는 야산에 자라지 않는다. 지리산 달궁 계곡이나 무주구천동 등 '청초 우거진' 깊은 산골의 숲 속에서 다른 나무들에게 시달리면서 자란다. 온통 초록의 바다 속에서 산딸나무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눈 씻고 보아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녹음이 짙어 가는 초여름에 들어서는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예쁜 스타처럼 사람들을 눈부시게 한다. 진한 초록의 잎새로 호위를 받으면서 새하얀 꽃이 마치 층을 이루듯이 무리 지어 피므로 멀리서 보아도 청초하고 깨끗한 자태를 금세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등 흔히 보는 꽃들은 대부분 꽃잎이 5개씩 달리는 것 과는 달리 산딸나무 꽃잎은 4장이 달린다. 엄밀히 말하면 순수한 꽃잎이 아니라 잎이 변하여 꽃잎처럼 보일 따름이다.

이들은 크기가 엄지손가락만 하고 처음에는 연초록이나 완전히 피면 새 하얗게 되며 꽃이 질 무렵에는 끝 부분이 붉은 자주빛으로 변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트모양으로 두 장씩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십자가(十字架) 모양을 이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쓰인 나무는 무엇일까. 믿음에 가까이 가지 못한 보통사람들은 쓸데없이 이런 일에나 관심이 많다. 올리브나무일 것이라고도 하나 우리나라의 산딸나무와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어로 산딸나무를 포함한 층층나무 무리를 Dogwood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 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굵은 산딸나무 목재를 켜서 대패질한 나무표면을 보면 이 나무가 예수님과 감히 관련을 지울 만큼 성스러운 나무인지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살은 트레이드마크인 하얀 꽃잎을 연상할 만큼 맑고 깨끗하다. 꽃과 나무결 모두 해맑은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듯한 품격 높은 나무이 다.

중부 이남에 자라는 큰 나무로서 숲 속에서는 한 아름이 넘게 자라기도 한다. 가지 퍼짐은 사촌뻘 되는 층층나무를 닮아 층을 지어 수평으로 뻗어 나간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으로 나이를 먹어도 갈라지지 않고 매끄러우며 큰 얼룩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잎은 마주 나고 갸름하게 생겼으며 달걀크기 만하다. 잎맥이 활처럼 휘어서 잎 끝으로 몰리는 형태이며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잔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가을이 되면 우리가 흔히 먹는 딸기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가 진분홍색으로 익는다. 달콤하고 육질이 많아 먹을 수 있다. 산딸나무라는 이름은 이 열매의 모양이 딸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단단하고 질기므로 방적용 북의 재료를 비롯하여 농기구, 자루, 망치, 절구공이 등으로 쓰였다.



33] 밤나무

여름의 발걸음이 차츰 빨라지는 6월 중순쯤 윤기 자르르한 초록 잎이 달린 큰 나무에 잿빛 가발을 쓴 것 같은 밤꽃은 산자락에서 쉽게 눈에 띈다.


꽃이 한창 피어 있을 때 코끝을 스치는 꽃 냄새는 향기로움으로 가득 찬 다른 꽃들과는 달리 살짝 쉬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맡으면 시큼하기도 한 묘한 냄새가 난다.

바로 인간 생명의 근원인 남자의 정액냄새와 영락없이 같단다. 그래서 이 냄새를 부끄러워한 옛 부녀자들은 밤꽃이 필 때면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욱 근신하였다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고 꿀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밤꿀을 생산하는 꽃이기도 하다.

밤 속에는 전분과 단백질이 풍부하고 달큼함을 느낄 만큼의 당분도 들어 있어서 예부터 식량자원으로 재배를 장려하였으며 낙랑고분 및 가야고분에서도 밤알이 출토된 바 있다.

밤은 제물(祭物)로서도 중히 여긴다. 밤알이 보통 3개씩 들어 있으므로 후손들이 출세의 대명사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3정승을 온 집안에서 나란히 나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보다 구체적인 해석은 밤이 싹이 틀 때의 모양에서 찾는다. 밤 껍질을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 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는 까닭에 밤나무는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는 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밤송이는 '고슴도치야 게 섰거라' 할 만큼 완벽해 보이는 방어구조를 갖고 있다. 날카로운 침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안에는 두껍고 단단한 껍질로 싸고 그 안에는 또다시 떫은맛이 잔뜩 든 안 껍질이 있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방비를 하고도 벌레침입을 억제하는 물질을 껍질에 살짝 섞어두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생밤을 치다 보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밤벌레에 사람들은 질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밤을 수확할 무렵부터 껍질에 붙어 있던 벌레 알이 보관 과정에 부화되어 껍질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진한 소금물을 만들어 4~5일 담가두었다가 꺼내어 얼지 않는 음지에 모래와 함께 묻어두면 다음 해 까지도 밤벌레 공포 없이 보관할 수 있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조상숭배의 상징성 때문에 사당의 위패(位牌), 제상(祭床) 등 조상을 숭배하는 기구의 재료로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가장 널리 쓰였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지름이 두세 아름까지 이르기도 한다. 경산 임당의 신라초기 무덤에서 밤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관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더 널리 쓰인 것 같다.

갸름하고 길쭉하게 생긴 잎 가장자리의 톱니 끝은 짧은 침처럼 생겼다. 꽃이나 밤이 아직 달리지 않은 숲 속의 밤나무는 상수리나무와 잎 모양이 비슷하여 찾아내기 어렵다. 밤나무는 녹색의 엽록소가 잎 가장자리 침 끝까지 들어있어서 침이 파랗게 보이는데 비하여 상수리나무의 잎 침에는 엽록소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연한 갈색으로 보인다.



34] 모감주나무

녹음이 짙어 가는 6월말이나 7월초가 되면 화려한 꽃으로 우리를 유혹하 던 나무들은 짙푸른 잎으로 뒤덮여 지난 꽃 세월은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이때쯤 진한 노랑꽃이 임금님의 왕관을 길게 장식하는 깃털 마냥 우아하게 꽃대가 올라와 자그마한 꽃들이 줄줄이 달리는 나무가 바로 모감주나무이다.

따가운 여름 태양에 너무 바래버린 듯 모감주나무의 꽃은 노랑꽃이라고 하기 보다 오히려 고고한 금빛에 가까워 동화 속의 황금궁전을 연상시키는 꿈의 꽃이다.


꽃대의 아래는 길이가 한 뼘이나 되는 잎자루에 아카시아 잎 마냥 작은 잎이 10-15개 씩 다닥다닥 달려있다. 가장자리에는 크고 깊은 톱니가 나 있는 잎이 약간 탁한 푸르름을 갖고 있어서 금빛 꽃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작열하는 여름 태양과 경쟁하듯 버티고 있던 수많은 황금 꽃은 수정이 되고 나면 세모꼴 초롱모양의 앙증맞은 열매가 익어 가는 가을과 함께 크기를 부풀려간다. 햇달걀크기 만큼이나 부풀려지면 얇은 종이 같은 껍질이 셋으로 길게 갈라지면서 속에는 금빛 꽃과는 엉뚱하게 새까만 씨앗 3개가 얼굴을 내민다.

굵은 콩알만하고 윤기가 자르르한 이 씨앗은 완전히 익으면 돌처럼 단단해진다. 만질수록 손때가 묻어 더욱 반질반질해지므로 염주(念珠)의 재료로 안성맞춤이다. 그것도 감질나게 몇 개씩 달리는 것이 아니라 54염주는 물론 108염주도 몇 꾸러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매달린다.

모감주나무의 씨앗은 금강자(金剛子)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금강이란 말은 금강석의 단단하고 변치 않은 특성에서 유래되었겠으나 불가(佛家)에서는 깨달은 지덕이 굳고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 숙종4년(1099) 임금은 상자사(常慈寺)에 머물면서 금강자와 수정염 주 각 한 꾸러미를 시주하였다 하고, 조선 태종6년(1406)에는 명나라 사신 이 금강자 3관을 예물로 바쳤다 하며 태종9년(1409)에도 기록이 있다. 이 처럼 예부터 왕실에서도 사용하는 귀중한 염주 재료임을 알 수 있다.

염주를 만드는 구슬은 피나무 열매, 무환자나무 열매, 율무, 수정, 산 호, 향나무 등도 사용하나 금강자 염주는 큰스님들도 아끼는 귀한 애장품이었다.

모감주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서 우람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나무는 아니지만 단아한 가지 뻗음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잎, 황금 깃처럼 솟아오른 금색 꽃, 초롱 속의 새까만 열매, 가을에 만나는 루비빛 혹은 연노랑 단풍 등 다른 나무가 엿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도로 옆이나 공원 녹지대의 조경수로 흔히 심는다.

옛날 중국에서는 임금에서 서민까지 묘지의 둘레나무로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정해주었는데,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으면 모감주나무를 심게 할 정 도로 품위 있는 나무이다.



35] 자귀나무

초 여름의 숲 속에서 짧은 분홍 실을 부챗살처럼 펼쳐 놓은 자그마한 꽃들이 피어 주위를 압도하는 꽃나무가 있다. 길쭉길쭉한 쌀알처럼 생긴 잎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깃털모양으로 촘촘히 달려있는 모양도 특별한 나무가 바로 자귀나무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소가 특히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무 혹은 소쌀나무라고도 한다.


자귀나무란 자는데 귀신같은 나무를 줄인 이름인가?.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상당한 근거가 있다.

초등학교 앞 노점 판의 인기품목이었던 미모사(신경초)를 건드리면 금새 벌어져 있는 잎이 닫혀버리는 모양을 기억하 고 있을 것이다. 이는 광합성을 할 때 이외에는 잎을 닫아 버려 날아가는 수분을 줄여보자는 대책이다. 자귀나무는 경망스럽게 건드리는 정도로 일일이 반응은 아니하고 긴 밤이 되어야 서로 마주 붙어 정답게 깊은 잠이 들어 버린다.


재미있는 것은 50-80개나 되는 작은 잎이 짝수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상대를 찾지 못한 홀아비 잎이 남지 않는다. 따라서 합환수(合歡樹) 혹은 야합수(夜合樹)라 하여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뜻으로 정원에 흔히 심는다. 그러나 대낮에는 두꺼운 구름이 끼여 아무리 컴컴해도 잎이 서로 붙지 않는다. 자귀나무 잎의 수면운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절제된 부부생활을 하라는 깊은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도 모른다.

옛날 중국의 두양이라는 선비의 부인은 말린 자귀나무 꽃을 베개 속에 넣어 두었다가, 남편의 기분이 언짢아 하는 기색이보이면 조금씩 꺼내어 술에 넣어서 한잔씩 권했다. 이 술을 마신 남편은 금세 기분이 풀어졌으므로 부부간의 사랑을 두텁게 하는 신비스런 비약으로서 다투어 본받았다 한다.

또 겨울이 되면 콩꼬투리처럼 생긴 긴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수없이 달리는데, 세찬 바람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옛 양반들의 귀에 꽤나 시끄럽게 들렸나 보다. 그래서 여설수(女舌樹)란 이름도 붙여 두었다. 물론 조선조 제일의 석학 퇴계 이황마저 '무릇 여자란 나라이름이나 알고 이름석자나 쓸 줄 알면 족하다'고 일갈하여도 무방하던 시절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껍질은 합환피(合歡皮)라 하여 동의보감에 보면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근심을 없애서 만사를 즐겁게 한다고 한다. 또 민간에서는 갈아서 밥에 개어 타박상, 골절, 류머티즘에 바르면 잘 듣고 나무를 태워 술에 타서 먹으면 어혈 등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황해도 이남에 주로 분포하며 그렇게 크게 자라지는 않으나 깊은 산 속에서는 키가 10여m에 이르기도 한다. 나무껍질은 갈색바탕에 녹색이 들어 간 색깔인데 나이를 먹어도 흉하게 갈라지지 않고 다만 작고 동글동글한 숨구멍만 촘촘히 생긴다. 잎자루는 가지에 어긋나기로 붙어 있는데, 큰 잎 자루에서 또 한번 더 갈라져서 두 번 갈라진 셈이 된다. 줄기가 굽거나 약 간 드러눕는 모양이어서 목재로서의 큰 가치는 없다.



36] 자두나무

열매가 진한 보라색이고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하여 자도(紫桃)라 하다가 자두가 된 것이다. 순수 우리말 이름은 오얏이고 한자명은 이(李)이다.


옛 사람들은 복숭아와 함께 봄에는 오얏 꽃을 감상하면서 시 한수 읊조리고, 여름에 들면서 익은 열매를 따먹는 과일나무로서 모두의 사랑을 받아왔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史書)에는 꽃피는 시기로 이상기후를 나타내는 기록이 여러번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시가(詩歌)로 실린 것만도 20여회나 된다.

자두나무는 본래 우리나라에 자라던 나무가 아니고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수입나무이다. 시경(詩經)에 보면 중국에서도 주나라 시대에는 꽃나무로서 매화와 오얏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옛 말에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말을 쓴다. 즉 오얏의 열매가 달린 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얏 밭은 우리 주변에 흔하였으며 남에게 조금도 의심 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선비의 꼿꼿한 마음가짐을 내 보이기도 한다.

고려 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는 그의 예언서 도선비기(道詵秘 記)에, 500년 뒤 오얏 성씨(李)를 가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이후는 한양에 오얏나무를 잔뜩 심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베어버림을 반복함으로써 왕기(王氣)를 다스렸다 한다. 그러나 이런 조치의 보람도 없이 이성계가 이룬 조선왕조는 500년의 영화를 누리게 된다.

조선왕조가 특별히 오얏나무를 왕씨의 나무로서 대접한 적은 없으나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는 오얏 꽃은 왕실을 대표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하였다. 1884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작된 우정사업은 1905년 통신권이 일본에 빼앗길 때까지 54종의 보통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이 보통우표에는 이왕가(李王家)의 문장인 오얏과 태극이 주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화우표(李花郵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의 백동으로 만든 화폐에도 표면의 위쪽에는 오얏꽃, 오른쪽에는 오얏나뭇가지, 왼쪽에는 무궁화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명 나라의 서광계(徐光啓.1562-1633)가 지은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의하면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나 보름날에 오얏나무의 가지 틈에 굵은 돌을 끼워 두면 그 해에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하는 '나무 시집보내기' 풍속이 있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대추나무를 대상으로 시집보내기를 한다.

인가 부근에 과일나무로 심고 있으며 줄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커다란 낙하산 모양을 이룬다. 잎은 달걀크기로 어긋나기하고 끝이 차츰 좁아지며 가장자 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봄에 새하얀 꽃이 잎보다 먼저 피며 보통 3개씩 달린다. 열매는 둥글고 밑 부분이 약간 들어간 모양으로서 여름에 자주빛으로 익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자두는 대부분 개량종이고 진짜 중국원산의 옛 오얏은 보기 어렵다.


37] 피나무

배비장전은 위선적이고 호색적인 양반을 풍자한 조선후기 소설로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결코 여색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처에게 장담하고 제주도로 떠났던 배비장이 그곳 기생 애랑에게 홀딱 반해 버린다.


애간장을 태우다 겨우 같이 잠자리에 들 무렵, 남편으로 위장한 방자의 호통에 놀라 피나무 궤짝 속으로 들어갔다가 발가벗고 동헌 마당에서 헛 헤엄치는 망신을 당한다. 이처럼 피나무의 주요한 쓰임새는 궤짝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궤짝 역시 대부분 피나무로 만들어졌다. 기록으로도 정조원년(1776) '피나무를 판목으로 쓰기 위하여 몰래 베는 일 이 많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 외 불경을 얹어 두는 상(經床), 밥상, 교자 상, 두레반을 비롯하여 산간지대에서는 굵은 피나무의 속을 파내어 독으로 쓰기도 하였다.


또 바둑판의 재료로도 유명하다. 비자나무나 은행나무보다는 조금 못하 지만 바둑돌을 놓을 때 표면의 탄력성과 연한 갈색이 바둑판의 재료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굵은 피나무는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 때에 모조리 잘려나가고 요즈음은 바둑판을 만들만한 굵은 나무가 거의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피나무 바둑판'을 팔러 다니는 장수가 있다. 열대지방에서 나는 아가티스(agathis)란 나무로 만든 가짜 피나무 바둑판이 대부분이다.

피나무 껍질의 섬유는 질기고 길어서 밧줄이나 삿자리, 각종 농업 도구에서 어망까지 섬유자원으로 대단히 귀중하게 이용하였다. 피나무란 이름은 껍질(皮)을 쓰는 나무란 뜻에서 유래되었고 영어로도 basswood라 하여 같은 의미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며 아름드리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나무 껍질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회갈색으로 세로로 얇게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넓은 달걀모양이며 크기는 어린아이 손바닥만하다. 모양새는 끝이 갑자기 뾰족해지고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간 예쁜 하트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예리한 톱니가 있다.

꽃은 초여름에 연한 노랑 빛으로 피고 향기가 강하며 많은 수술이 밖으로 튀어나와 독특한 꽃 모양을 이룬다. 꿀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꽃은 밤나무, 싸리 등과 함께 꿀을 따기 위한 밀원식물(蜜源植物)로 예부터 사랑 받아 왔다.

피나무는 열매가 달리는 모양이 너무나 이색적이다. 길이가 손가락 대여 섯 마디쯤 되고 마치 헬리콥터의 날개를 닮은 긴 주걱 모양이다. 주걱의 가운데쯤에 굵은 콩알만하고 갸름한 열매를 가느다란 대궁에 매달고 있다. 이런 모양은 익은 다음 주걱과 함께 떨어졌을 때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한 피나무 선조의 혜안이다.

열매의 안에는 윤기가 반질반질한 새까만 열매가 들어 있다. 예부터 절에서는 염주를 만드는 재료로 귀하게 쓰여 왔고, 피나무의 잎 모양이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인도보리수와 매우 비슷하여 절에 심겨진 피나무는 대부분 '보리수'로 알려져 있다.

피나무라고 불리는 무리에는 우리나라만 하여도 9종이나 있는데, 너무 비슷하여 일반인이 그 종류를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38] 뽕나무

예부터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농업과 함께 농상(農桑)이라 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 고구려 동명왕 때와 백제 온조왕 때 농상을 권장하였고, 초고왕 때는 양잠법과 직조법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한다. 1933년에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에도 뽕나무 재배 기록이 있다.


고려 때에도 누에치기를 권장하였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례(親蠶禮)가 거행되었으며, 또한 잠실(蠶室)이라 하여 누에를 키우고 종자를 나누어주던 곳을 따로 설치할 만큼 나라의 귀중한 산업이었다.

세종 5년(1423)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는 '뽕나무는 경복궁에 3천590그루, 창덕궁에 1천여 그루, 밤섬에 8천280그루로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기록대로라면 궁궐이 온통 뽕나무 밭이었다고 짐작된다. 이를 증명하듯이 오늘날 경복궁 안에 아름드리 뽕나무가 남아 있기도 하다.

뽕나무는 단순히 잎을 따서 누에치기에만 쓰인 것은 아니다. 열매인 오디를 상실(桑實) 혹은 상심(桑 )이라 하는데, 이를 건조시켜 한약재로 쓴다. 이뇨 효과와 함께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강장작용이 있으며 기타 여러 질병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뽕나무 껍질도 상백피(桑白皮)라 하여 약으로 쓴다. 열매의 즙액을 누룩과 함께 섞어 발효시킨 술을 상심주(桑 酒)라 하며 정력제로 쓰인다고도 한다.

뽕나무에는 흔히 보는 늘푸른 겨우살이가 아니라 귤잎 모양의 낙엽성 '꼬리겨우살이'가 드물게 자란다. 이를 상상기생(桑上寄生)이라 하는데, 광해 9년(1616) 전라 좌수사 이홍립이 2근을 진상하였다. 임금은 신하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이홍립의 벼슬을 올려 주었고 품질을 감정한 의사 손몽상도 동반(東班)에 임용하였다.

꼬리겨우살이 한 두 근에 벼슬은 물론 신분이 변할 정도로 임금도 귀중하게 여기던 약재였다. 최근에는 오래된 뽕나무 그루터기에서 자라는 상황(桑黃)버섯을 비롯하여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 그 자체도 바로 약재로 쓰일 만큼 뽕나무는 양잠에 필요한 나무일 뿐만 아니라 약나무로 각광을 받고 있다.

뽕나무는 작은 나무로 알기 쉬우나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지름 1m가 넘는 아름드리가 된다. 겉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안 껍질이 노란 것이 특징이다. 잎은 갸름하며 밑은 심장모양에 가깝고, 끝은 꼬리모양으로 길고 뾰족하며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잎에 따라서는 가끔 깊게 패어 있어서 한 나무에 모양이 다른 잎이 같이 달려있다.

나무의 속은 황색 빛을 띠고 있어서 독특한 정취가 있고 단단하며 질기고 잘 썩지 않는다. 경산시 임당동에는 삼국이 자리를 잡기 전에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출토된 나무 관은 직경이 1m가 넘는 뽕나무로 만들었다.

뽕나무 무리에는 잎의 끝이 점점 뾰족해지는 뽕나무와 거의 비슷하나 잎의 끝이 꼬리처럼 긴 산뽕나무가 있으나 구분하기가 어렵다.



39] 가죽나무

경상도와 일부 전라도 지방에서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라고 부르고, 표준말의 가죽나무는 개가죽나무라고 부른다. 가죽나무란 이름은 가짜 중나무란 뜻의 가중나무에서, 참죽나무는 진짜 중나무란 뜻의 참중나무에서 유래된 것이다. 채식을 하는 스님들이 나물로 먹던 참죽나무와 비교하여 이름만 비슷하고 먹을 수 없다는 뜻으로 가죽나무라고 하였다.


세종14년(1432) 봄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들이 임금님께 감사의 글을 올린 내용에는 "가죽나무 같은 쓸모 없는 재질로 남다른 은혜를 입었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습니다"라 하였고, 성종20년(1489)에는 김흔이란 이가 "가죽나무처럼 쓸모 없는 재목이 천지의 큰 은혜를 입어 자라날 수 있게 되었으니 감격한 마음을 뼈에 새긴들 어찌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가죽나무는 재질(材質)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형편없는 나무는 아니며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과장하다 보니 죄 없는 가죽나무가 도마 위에 오른 것 같다. 그래서 가죽나무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이 아니라 아무데나 팽개쳐진 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으나 그 강인한 생명력은 종자로, 뿌리로 왕성하게 뻗어 웬만한 빈터가 생기면 가죽나무는 군말 없이 모여들어 자라기 시작한다.

인가 근처라면 자라는 곳을 가리지 않고 모양새도 제법 품위를 갖추고 있어서 요즈음은 가로수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경복궁 건춘문 앞의 가로수는 지름이 거의 한 아름이나 되며 자태가 웅장하여 기록에 있는 것처럼 쓸모 없는 나무가 아님을 실증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들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록이나 자람새로 보아 적어도 수백년 전에 중국에서 온 나무이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이며 어릴 때는 갈라지지 않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거의 흑갈색으로 진해지고 얕게 세로로 갈라진다.

가죽나무의 잎은 한 대궁에 여러 개가 달리며 아주 큰 톱니가 2-3개 생겨있다. 이 톱니의 끝을 만져보면 딱딱한 알맹이가 만져지는데, 이름하여 선점(腺點)이라고 하며 간단히 사마귀라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가죽나무에서 나는 약간 고약한 냄새의 근원지가 바로 이 사마귀이다.

필자는 가죽나무의 사마귀를 만지는 촉감이 너무 좋아 보기만 하면 습관적으로 잎사귀를 떼어내어 살살 비벼본다. 죽어서 가죽나무 목신(木神)에게 혼이 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나쁜 손버릇을 고쳐야할 것 같다.

가죽나무와 참죽나무는 식물학적으로는 한참 거리가 있는 나무이나 생김새가 아주 비슷하다. 잎에 사마귀가 달리고 나무껍질이 갈라지지 않는 것이 가죽나무,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일정한 간격으로 얕게 나 있으며 이 순신 장군 갑옷 같은 껍질을 가진 것이 참죽나무이다.



40] 왕버들

왕버들은 가지가 굵고 튼튼하며 버드나무 종류이면서도 거의 늘어지지 않는다. 가느다란 가지가 길게 늘어져 산들바람에도 하늘거리는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과는 사뭇 다르다. 왕버들은 수백년을 거뜬히 살 수 있으며 아름드리로 자라고 모양새가 웅장하여 우리나라에 자라는 30여종의 버드나무 가운데 왕으로 꼽힌다. 왕버들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버들의 임금님'은 숲 속에 들어가서 다른 잡스런 나무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아예 개울가, 호숫가 등 유난히 물이 많은 곳만을 선택하여 어릴 때 빨리 자라버림으로써 다른 나무들을 압도한다. 그래서 하류(河柳)라는 이름도 생겼다.

왕버들은 습기가 많은 곳, 때로는 거의 물 속에 잠긴 채로 수 백년을 넘게 삶을 이어 간다. 그래서 나무 속이 잘 썩어 버리고 줄기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경우가 많다.

구멍 속에 잘못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죽어 버린 곤충이나 설치(楔 齒)류에 들어있던 인(燐)의 작용으로, 비 오는 여름날의 밤에는 아름드리 왕버들의 줄기에서는 푸른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름하여 도깨비불이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가 다 그러하듯이 왕버들의 푸른 도깨비도 무섭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전혀 잔인성이 없고 장난이나 심술을 부 려도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과는 친숙한 귀신이었다. 그래서 왕버들의 또 다른 이름은 귀류(鬼柳)이다. 좀 위압적인 왕버들이란 이름보다 도깨비버들 혹은 귀신버들이라 하여도 재미있을것 같다.

삼국유사 제5권 혜통 스님 이야기를 보면, 신라 효소왕(692-702)이 즉위 하여 아버지인 신문왕의 왕릉을 닦고 장사 지내러 가는 길을 만들기 시작 하였다. 선대의 공신인 정공(鄭恭)의 집 앞 왕버들이 길을 가로막고 섰으므로 관리들이 이것을 베려고 했다. 이에 정공은 "차라리 내 목을 벨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고 거절하였다.

이 말을 들은 효소왕은 크게 노하여 정공의 목을 베고 그 집을 흙으로 묻어 버렸다. 나무 하나에 목숨까지 버렸으니 나무사랑이 지극한 것인지, 아니면 무모한 탓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1938년에 간행된 '조선의 임수(林藪)'라는 책을 보면 경주에는 '정공의 왕버들' 이외에도 계림, 오릉,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의 천경림(天鏡林) 등 역사적인 유래가 있는 곳에 어김없이 왕버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경치가 빼어난 유원지나 경승지의 하천가에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자라는 곳이 많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버들만도 4그루나 된다.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서 한 아름이 훨씬 넘게 크게 자랄 수 있다. 가지가 크게 벌어지고 줄기는 비스듬히 자라는 경우가 많아 물가의 조경수로 제격이다. 나무 껍질은 나이를 먹으면 회갈색으로 깊게 갈라지고 작은 가지는 황록색으로 팥알만한 겨울눈이 달린다. 잎은 긴 달걀모양이며 새순 이 돋을 때는 주홍색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적이다.



41] 팽나무

팽나무는 느티나무, 은행나무와 함께 오래 살고 아름드리로 크게 자라는 정자나무로 유명하다. 늦봄에 자그마한 팽나무 꽃이 지고 나면 금세 초록색 열매가 달리고 가을에 가서는 붉은 끼가 도는 황색으로 콩알만한 크기로 익는다. 가운데에 단단한 핵이 있고 주위에 약간 달콤한 육질로 싸여 있어서 배고픈 옛 시골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왜 팽나무란 이름이 생겼을까. 옛 아이들은 초여름의 파란 팽나무 열매를 따 모아 작은 대나무 대롱의 아래위로 한 알씩 밀어 넣고 위에 대나무 꼬챙이를 꽂아 오른손으로 탁 치면 공기 압축으로 아래쪽의 팽나무 열매는 팽-하고 멀리 날아가게 된다. 이름하여 '팽총'이라고 하는데, 이에 쓰인 나무란 뜻으로 팽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팽나무에서 느끼는 어감은 날랜 토끼가 잡히고 나면 부리던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의 팽에 연관 지워지는 것이 다. 한때 우리의 정치현실과도 맞아 떨어져 권력에서 밀려나기만 하면 흔히 '팽'당했다는 말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나며, 특히 바닷가 항상 소금바람이 부는 곳에도 끄떡없다. 그것도 두툼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수 백년이 되어도 울퉁불퉁하게 갈라지지 않는 얇고 매끄러운 껍질을 갖고 용케 버틴다. 곰솔과 함께 내염성(耐鹽性)이 강하여 바닷가에 심고 가꾸는데 가장 적합한 나무이다.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 넓은 평야 가운데에는 내륙지방으로는 드물게 팽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듯이 황목근(黃木根)이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1948년 마을 기금을 털어 827평의 논을 그 앞으로 등기해 주면서 이름이 필요하였다. 이 팽나무는 연한 황색 꽃이 피고 가을에는 노란 단풍이 들므로 '황'이란 성을 따고, 나무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목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98.99년도에는 연속하여 1만440원씩의 종합토지소득세를 부과하였는데 한 번도 지방세를 체납하지 않은 모범납세자(?)라 한다. 예천군에는 석송령과 함께 세금내는 나무를 두 그루씩이나 가지고 있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며 전체모양은 타원형이고 작은 달걀크기 정도이다. 잎의 끝은 갑자기 짧고 뾰족해 진다. 잎맥은 톱니의 끝까지 뻗지 않고 휘어버리는 특징이 있으며 잎맥의 수도 3-4쌍 밖에 되지 않는다. 잎의 가장자리에는 약간 둔한 톱니가 있는데 잎 길이의 2분의 1 위쪽에만 톱니가 있는 것이 특징이고 톱니가 아래까지 내려오면 풍게나무라고 하는 다른 나무이다.

팽 나무의 쓰임새는 운동구나 각종 기구를 만드는 정도이다. 남.서해안의 따뜻한 지방에만 자라며 팽나무의 사촌쯤 되는 푸조나무가 있다. 잎의 표 면은 거칠고 뒷면은 짧은 털이 있으며 작은 잎맥은 7-12쌍으로 팽나무 보다 훨씬 많다. 잎 모양은 팽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잎맥이 톱니 끝 부 분까지 닿는 것이 다르다.



42] 쉬나무

중국의 한약재에 오수유(吳茱萸)가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 수유란 뜻이나, 우리나라에는 오수유가 자라지 않았으므로 모양새가 거의 비슷한 쉬나무에서 나라 이름인 '오'를 빼고 그냥 수유나무라고 부르다가 쉬나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북한 이름은 아직도 '수유나무'이다.


특별히 우리나라의 쉬나무와 중국의 오수유를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조선오수유라 한다.

쉬나무는 경상도 일부 지방에서는 소등(燒燈)나무라고도 부른다. 즉 소등은 횃불을 뜻하니 이 나무의 열매에서 기름을 짜서 불을 밝히는 나무란 의미이다.

19세기 후반 석유가 들어오기 전에는 밤에 불을 밝히는 재료로 소나무 옹이 부분의 관솔, 들깨, 아주까리 등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쉬나무는 아무데서나 커다랗게 잘 자라면서 유지(油脂)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열매를 지천으로 매달고 있어서 동백나무나 때죽나무와 함께 기름나무로 아껴왔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20년 생의 쉬나무 한 그루에서 일년에 10kg이상의 열매를 채취할 수 있다 한다.

조선시대 양반은 이사를 가면 쉬나무와 회화나무의 종자는 반드시 챙겨 가는 것으로 전한다. 쉬나무 열매에서 짠 기름으로 등불을 밝혀 가면서 공부를 해야 하고, 회화나무는 가지의 뻗음이 단아하고 품위가 있어서 학자의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중국 원산의 오수유는 좋은 약용나무이므로 오수유를 따로 재배하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에는 오수유는 오직 경주에만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경상도 경주부의 특산물이라 하여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오수 유 종자를 가져다 경주일대에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오수유의 열매는 주로 통증 치료제로 쓰이며, 동남쪽으로 뻗은 뿌리에서 채취한 껍질은 기침과 설사 치료제로, 오수유 잎은 음낭이 켕기고 아플 때 소금에 볶아서 싸맨다는 재미있는 처방도 있다.

오수유는 쉬나무와 모양새가 거의 같으나 작은 잎의 개수가 약간 많고 잎 뒷면에 털이 있으며 열매가 둥근 것이 차이점이다. 쉬나무는 주로 인가 부근에 자라며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이다. 오래되면 아름드리 굵기가 되고 키도 10여m가 넘는다. 나무 껍질은 고목이 되어도 갈라지지 않고 회갈색으로 매끈하다. 어린 가지는 적갈색이고 동그란 숨구멍이 발달한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새날개의 깃 모양으로 7-11개의 달걀 크기 만한 잎으로 이루어진다. 암수 딴 나무로서 기름을 짜는 열매는 암나무에만 달린다. 한 여름에 거의 흰빛에 가까운 연한 노랑꽃이 무더기로 피어 수많은 열매가 달리게 된다. 꽃은 많은 꿀을 가지고 있어서 꿀을 따는 나무로도 가치가 있다.

열매는 10월에 붉은빛으로 익고, 속에는 타원형의 쌀알 굵기 남짓한 새 까만 종자가 들어있다. 열매는 예부터 기름을 짜서 등유로 쓰였으며 머릿 기름, 피부병의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43] 소태나무

음식의 간이 맞지 않아 너무 짜거나 쓴맛이 나면 흔히 소태맛 이라고 한다. 알려진 그대로 소태나무는 지독한 쓴맛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과 수목채집을 가면 소태나무만은 그냥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배울 때처럼 나란히 붙어 있는 잎을 하나씩 따서 나누어주고 어금니로 꼭꼭 씹어보라고 한다. "애, 퉤퉤!"하고 온통 난리가 날 때 즈음 비로소 "이게 바로 소태나무"라고 일러준다.

아무리 물로 헹궈도 1-2시간은 족히 입 속에 쓴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한번 그 '쓴맛'을 보게 되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나무이다.


쓴맛의 근원은 콰신(quassin) 혹은 콰시아(quassia)라고 부르는 물질 때문이다. 잎, 나무껍질, 줄기, 뿌리 등 소태나무의 각 부분에 고루고루 들어 있으나 줄기나 가지의 안껍질에 가장 많다. 콰신은 위장을 튼튼히 하는 약제, 살충제, 또는 염료로도 사용하였으며 맥주의 쓴맛을 내는 호프 대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동생을 보고도 좀처럼 젖이 떨어지지 않은 아이 엄마는 소태나무로 즙을 내어 젖꼭지에 발라둔다. 사생결단으로 엄마 젖에 매달리던 녀석도 소태 맛에 놀라 쉽게 떼어놓을 수 있었다. 얼마 전만 하여도 도시의 엄마들은 말라리아의 특효약인 키니네나 심지어 마이신까지 사용하였으나 소태나무 즙은 아이에게 해롭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위장을 튼튼하게까지 하 니 그야 말로 일석이조이다.

본초도감에는 봄, 가을에 채취하여 껍질을 벗겨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위장염에 쓰거나 화농, 습진, 화상을 비롯하여 회충구제에도 쓰인다고 하 였다. 민간약으로 건위제, 소화불량, 위염 및 식욕부진 등 주로 위장을 다 스리는 약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소 태나무는 우리 주변에도 비교적 흔한 나무로서 소태골, 소태리 등의 지명이 들어간 지역은 소태나무가 많이 자랐던 지역으로 짐작된다. 우리나 라 어디에나 잘 자라며 한때 껍질을 벗겨 섬유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위 에 큰 나무를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소태나무로서는 유일하게 안동시 길안면 송사동 길안초등학교 길 송분교 뒷마당에 자라는 천연기념물 174호로 지정된 소태나무는 지름이 거 의 한아름이나 되는 거목이다.

소태나무의 어린 가지는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의 매끄러운 바탕에 황색의 작은 숨구멍이 흩어져 있고 가지는 흔히 층층나무처럼 층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잎은 작은 달걀모양으로 한 대궁에 12-13개씩 붙어있고 가지에는 어 긋나기로 달린다. 암수 딴 나무로서 꽃은 초여름에 피며 황록색의 작은 꽃 이 둥그스름한 꽃차례에 여럿이 모여서 핀다. 열매는 콩알만하고 초가을에 붉은빛으로 익는다. 가을의 노란 단풍이 아름답다.

소태나무를 찾아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잎을 따서 조금 씹어보는 방법이다. 비슷한 나무에 독성을 가진 잎은 없으니 소태나무의 그 지독한 쓴맛을 기억 속에 남겨둔다면 인생을 살아가다가 당하는 진짜 쓴맛과 중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44] 산딸기

여류시인 노천명은 산딸기를 유난히 좋아한 것 같다. 수필집 '산딸기'가 있고 그녀의 대표 시 '남사당(男寺黨)'에서도 산딸기가 나온다.


"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은반지를 사주고 싶은/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처녀야!/나는 집시의 피였다.../노새의 뒤를 따 라/산딸기의 이슬을 털며/길에 오르는 새벽은/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 리처럼/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처럼 산딸기는 이웃마을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야산의 오솔길 옆 어디에나 흔한 나무이다. 말이 나무이지 허리춤 남짓한 키로 자라며 가지가 늘어지기도 하여 풀인지 나무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래도 배고픔을 달래주는 딸기를 조랑조랑 매달아 사람이나 산짐승 모두가 고마워하는 나무이다.

산딸기란 특정 나무이외에도 딸기나무 무리에는 복분자딸기, 곰딸기, 멍 석딸기, 줄딸기 등 20여종이 있다. 이들은 종(種)이 다른 별개의 나무로서 모양새의 차이를 보면, 산딸기는 줄기가 붉은 갈색이며 거의 곧추서고 잎은 보통 셋으로 갈라져서 한 잎자루에 한 개의 잎이 달린다.

반면에 복분자딸기는 줄기가 마치 밀가루를 발라놓은 것처럼 하얗고 덩굴이며 잎은 한 잎자루에 3-5개가 달린다. 열매가 익으면 까맣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줄딸기는 복분자딸기 비슷하나 줄기의 하얀색이 덜하고 잎도 훨씬 작다. 곰딸기는 줄기에 가느다란 가시가곰의 다리처럼 털북숭이로 붙어있다. 멍석딸기는 멍석을 깔아놓는 것처럼 땅바닥을 기어 자라므로 쉽 게 구분할 수 있다.

복분자(覆盆子)딸기는 정력제로 유명하다. 열매를 먹으면 오줌발이 너무 세어 요강을 뒤집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동의보감에도 복분자 는 "남자의 정력이 모자라고 여자가 임신되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또한 남자의 음위증을 낫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 기운을 도와 몸을 가볍게 한다" 는 기록이 있다. 전북 고창군에서는 1997년부터 민속주로 복분자딸기술을 만들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복분자딸기와 산딸기는 흔히 같은 나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약으로 쓰려면 구분해서 쓰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동의보감에는 산딸기의 한자이름인 산매가 아니라 복분자로 분명히 적혀 있기 때문이다.

세종12년(1429) 궁내의사 노중례의 청에 따라 예조에서는 중국의사를 초빙하여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약재를 감정하게 했다. 후박 등 열 가지는 합격하였으나 복분자 등은 중국약재가 아니라서 비교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중종34년(1539)에는 "내관이 오늘 아침 복분자를 따기 위하여 후원에 들어갔더니 어떤 중이 숨어 있기에 붙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여러가지 고사로 볼 때 복분자는 우리 고유의 약제임을 알 수 있고 임금님도 궁중에 심어놓고 즐겨먹는 과일이기도 하였다.



45] 엄나무

엄나무와 음나무 둘 다 쓰이나 가시가 엄(嚴)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 라는 엄나무가 특징을 더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엄나무는 물갈퀴가 달린 오리발처럼 생긴 커다란 잎과 위압적인 가시가 특징이다. 잎의 크기나 모양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하나 가시가 있다는 뜻으로 한자이름은 자동(刺桐)이며 해동목(海桐木)이란 이름도 역시 오동나무 잎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름은 개두릅나무이다. 봄에 새싹이 돋아날 때 두릅나무처럼 엄나무의 새순은 식도락가의 입맛을 돋우는 나물로 각광을 받는다.

옛 우리의 선조들은 흔히 가시가 듬성듬성한 엄나무 가지를 문설주 위에다 가로 걸쳐놓은 관습이 있다. 잡귀의 들락거림을 막기 위함이다. 귀신을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조의 전형적인 양반의 정장 차림(?)으로 상정해 놓고 보면 엄나무 가시에 펄렁이는 도포자락이 쉽게 걸리게 마련이다.

엄나무 껍질은 해동피(海桐皮)라 하여 알려진 한약재이다. 고려 문종 3 3년(1079) 가을 송나라에서 백 가지의 약품을 보내왔는데 여기에 해동피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는 전라도, 제주도, 평안도의 토산물로 되어 있다.

동의보감에 보면 '허리와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과 마비되고 아픈 것을 낫게 한다. 이질, 곽란, 옴, 버짐, 치통 및 눈에 핏발이 선 것 등을 낫게 하며 풍증을 없앤다'고 하였다. 그 외 민간약으로도 엄나무는 널리 쓰이는 약나무이다. 옻닭과 마찬가지로 엄나무 닭도 한 여름의 보양 식품으로 알 려져있다.

나쁜 역귀를 몰아내는 나무이면서 여러 가지 약재로 귀히 여겨온 엄나무는 행운을 가져오는 길상목(吉祥木)이다. 그래서 집안에 엄나무 연리목(連理木)을 만들어 두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지고 만복이 깃들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4-5년생의 어린 엄나무 두 그루를 구하여 한 걸음 정도 떨어 지게 심는다.

뿌리가 완전히 내린 다음, 두 나무의 껍질을 약간 긁어내고 탄력성이 있 는 튼튼한 비닐 끈으로 묶어두면 두 나무가 한 나무되는 연리목이 만들어 진다.

엄나무의 목재는 황갈색을 띠면서 가느다란 줄무늬가 들어있어서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나이테를 따라 커다란 물관이 딱 한 줄로 분포하는 것이 다른 어느 나무와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엄나무만의 특징이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하지도, 오동나무처럼 너무 무르지도 않은 적당한 강도를 갖고 있으며 아름다운 무늬마저 있다. 가구를 만드는 재료나 조각재, 악기재 등 쓰임새가 고급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활엽수로서 지름이 두세 아름에 이를 수 있다.

나무 껍질은 흑갈색으로 불규칙하게 세로로 갈라진다. 어릴 때는 가시가 촘촘하게 달리나 직경이 커지면 차츰 가시가 없어진다. 암수 한 나무이고 7-8월에 걸쳐 우산 모양의 꽃차례에 황록색의 작은 꽃이 수 없이 달린다.

꽃에는 많은 꿀을 함유하고 있어서 토종꿀 따는 나무로 심기도 한다. 열매는 10월에 콩알처럼 검게 익는다.



46] 배롱나무

뙤약볕이 너무 진하여 햇빛에 잘 달구어진 푸른 나뭇잎마저도 늘어져 버리는 한 여름의 어느 날, 여름 꽃의 대명사 배롱나무 꽃은 비로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배롱나무는 제멋대로 아무 곳에나 둥지를 틀지 않는다. 조용한 산사(山寺)의 앞마당이나 이름난 정자의 뒤뜰 등 품 위 있는 길지(吉地)에 사람이 심어 주어야만 비로소 자라기 시작한다.


진 분홍빛 꽃이 가장 흔하고 연보라 꽃도 가끔 있으며 흰 꽃은 비교적 드물다. 가지의 끝마다 원뿔모양으로 마치 커다란 꽃 모자를 뒤집어 쓴 듯이 수많은 꽃이 핀다. 콩알만한 꽃봉오리가 나무의 크기에 따라 수백 수천 개 씩 매달려 꽃필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살포시 꽃봉오리가 벌어지 면서 6-7개의 꽃잎이 수평으로 뻗어 나오고 바글바글 볶아놓은 파마머리 마냥 온통 주름투성이 꽃잎을 내민다.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이 타고난 주 름을 펴줄 것으로 기대하는 지도 모른다.

배롱나무는 잠깐 피었다가 금세 져버리는 대부분의 꽃들과는 달리 여름에 시작하면 가을이 무르익어 갈 때까지 석 달 열흘도 넘게 핀다. 그래서 다른 이름은 백일홍(百日紅)이다.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하여 나무백일홍, 한자 쓰기 좋아하는 이들은 목(木)백일홍이라고 한다.

과연 백일을 피어있는 것인가? 꽃 하나 하나가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꽃들의 피고 짐이 계속되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꼭 같은 꽃이 피어있 다는 착각일 따름이다. 먼저 핀 꽃이 져버리면 여럿으로 갈라진 꽃대의 아래에서 위로 뭉게구름이 솟아오르듯이계속 꽃이 피어 올라간다.

원산지인 중국에서 처음 들어올 때는 연보라빛 꽃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중국이름은 자미화(紫微花)이며 당나라 때 중서성(中書省)에 많이 심어놓아 양귀비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현종은 아예 자미성이라고 불렀다 한다.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이나 강희안의 양화소록 등 우리의 옛 기록에도 역시 자미화이다.

옛부터 선조들이 즐겨 심어 왔으며, 오늘날도 꽃의 명성을 잃지 않는 곳이 여럿 있다. 소쇄원, 식영정 등 조선 문인들의 정자가 밀집해 있는 광주 천의 옛 이름은 배롱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자미탄(紫薇灘)이다. 그 외에도 고창 선운사, 다산초당과 이어진 강진의 백련사,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경주 서출지(書出池) 방죽의 배롱나무 등이 유명하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 피는 특징말고도 껍질의 유별남이 사람들의 눈길 을 끈다. 오래된 줄기의 표면은 연한 붉은 끼가 들어간 갈색이고 얇은 조 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해 보인다.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배롱나무만의 특징이다.

발 바닥이나 겨드랑이의 맨살을 보면 간지럼을 먹히고 싶은 충동을 느끼 듯이 배롱나무 줄기를 보고 중국사람들은 자미화 이외에, 파양수라 하여 간지럼에 부끄럽다고 몸을 비꼬는 모양과 비유하였다. 우리도 충청도 일부 지방에서는 '간지럼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껍질의 매끄러움에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진다고 '원숭이 미끄럼 나무'로 이름을 붙였다.



47] 서어나무

서어나무를 일컫는 한자말에 서목(西木)이란 말이 있다. 왜 나무 이름이 서목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에 있는 나무란 뜻인데 우리말로 읽으면서 서나무, 서어나무가 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서어나무는 장끼 울음소리가 지척으로 들리는 앞산에서도, 나무꾼의 도끼질이 산울림으로 울려 퍼지는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너무나 흔히 만나는 평범한 나무이다.

그러나 오래된 서어나무 줄기는 그 특별한 모양새 때문에 한 번 보면 좀 처럼 잊을 수 없다. 대부분의 큰 나무 줄기는 둥근 원통형이나 이 나무는 회색의 표면이 울룩불룩하여 마치 보디빌딩으로 잘 가꾸어진 운동선수의 근육을 보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 나무가 자라는 지역을 남해안 및 섬 지방을 포함하는 난대림, 백두산을 비롯한 개마고원지역의 한대림, 그 외의 지역은 온대림으로 나눈다. 온대림은 다시 온대남부, 온대중부, 온대북부로 나누며 서울지방을 포함한 중부지역이 온대중부에 해당한다.

서어나무는 참나무종류와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나무로서 '서어나무 대(帶)'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넓은 지역에 걸쳐 자랄 만큼 많은 서어나무가 있다는 의미인데, 실망스럽게도 쓸모가 그렇게 마땅치 않은 나무이다.

우선 줄기를 잘라 놓고 보면 둥그스름한 원형이 아니라 아메바를 보고 있는 듯 울룩불룩 제멋대로이다. 공예품을 만들기에도 판자로 쓰기에도 부적합하다. 뿐만 아니라 나무는 건조가 어려우며 잘 썩기까지 한다.

방직용 목관(木管),피아노의 엑션, 운동구 등에 소량으로 쓰일 따름이다. 표고 골목으로도 쓸 수 있으나 참나무 보다 버섯이 덜 나와 잘 쓰지 않는다. 결국은 나무 쓰임새의 최하등급인 '땔나무(火木)'로 떨어질 수밖 에 없다.

전북 완주군 운주면 화암사의 주요 부속건물인 우화루(雨花樓)를 개축할 때 나온 불구(佛具)의 일부가 서어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어나무 중에는 가장 품격 높은 쓰임새인 것 같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아름드리로 자랄 수 있으나 큰 나무가 흔치 않다. 긴 타원형 모양의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처음에는 붉은빛이 돌다가 차츰 초록빛으로 변한다. 잎의 끝은 꼬리처럼 길어지고 밑 부분은 약간 오목하며 가장자리는 이중톱니가 있다. 가을의 노란 단풍도 껍질의 독특함과 함께 산 속의 가을 정취를 한층 북돋워 준다.

암수 한 나무로서 꽃은 잎보다 먼저 봄에 피며 열매는 까끄라기 없는 보리이삭처럼 생겼으나 밑으로 처지며 듬성듬성 벌어져 있다.

서어나무 종류에는 이외에도 개서어나무, 분재로 많이 이용하는 소사나무, 까치박달 등이 있다. 서어나무와 개서어나무는 매우 비슷하여 구분이 어렵고 소사나무는 남쪽 섬 지방에 주로 자라며 잎이 가장 작다. 까치박달은 회갈색의 줄기에 동그란 숨구멍이 생겨 있고 잎맥의 수가 16-20쌍이나 되어 서어나무의 10-12쌍보다 훨씬 많은 것이 차이점이다.



48] 다릅나무

다릅나무는 동네 뒷산의 약수터길이나 산딸기 무성한 야산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조금 깊은 산 우거진 숲 속에서 만나는 나무다. 잘 보 이지 않으니 유명한 나무의 반열에는 들지 못한다.


매화처럼 품격 있는 꽃을 가진 것도, 오갈피나무처럼 한약재로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요, 느티나무처럼 좋은 나무라는 명성이 온누리에 알려진 것도 아닌 '숲 속의 은둔자'라고나 할까.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고 반드시 좋은 나무는 아니다. 허명무실(虛名無實)에 실망하기 쉬우나 다릅나무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이만큼 쓸모가 많은 나무도 흔치않다.

우선 뿌리혹 박테리아를 가지고 있는 콩과식물이라서 자람이 까다롭지 않다. 햇빛을 좋아 하긴 하나 어지간한 공간만 있으면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자란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라는 낙엽수로 키가 20여m, 지름이 두세아름에 이르기도 하는 큰 나무이다. 나무 껍질은 적갈색으로 세로로 조금씩 말려 있으면서 갈라지지 않고 매끄러워서 마치 작은 종이마름을 만들어 수 없이 붙여 둔 것 같다. 그래서 껍질만 보고도 '아! 저기 다릅나무'라고 초보자 도 금세 찾아 낼 수 있다.

아 카시아 잎과 너무 닮아 언뜻 보아서는 구분이 어렵다. 작은 잎은 타원 형으로 끝이 갑자기 짧게 뾰족해지는 것이, 약간 오목해지는 아카시아 잎 끝 모양과의 차이점이다. 옛 사람들은 물푸레나무와 비슷하다하여 개물푸레나무라고도 하였다. 꽃은 원뿔모양으로 위로 향하며 7월에 하얀 꽃들이 모여서핀다. 콩꼬투리 모양의 열매는 가을에 익는다.

다릅나무의 속살은 너무나 특징적이다. 통나무를 가로로 잘라 볼 때, 가장자리에 색깔이 좀 연한 부분을 전문용어로는 변재(邊材)라고 하며 반대로 가운데 색깔이 진한 부분은 심재(心材)라 한다. 다릅나무는 변재가 연한 황백색이고 너비가 좁으며 심재는 짙은 갈색으로서 그 차이가 너무 뚜렷하다. 변재를 돌출부로 하고 심재를 밑바탕으로 조각을 하면 색깔과 명암의 차이가 명확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호랑이, 곰 등의 동물형 상이나 장식용 나무그릇이나 병을 만드는 재료로 많이 쓰인다.

또 느티나무나 물푸레나무처럼 지름이 큰 물관이 나이테의 한쪽에 몰려 있는 환공재(環孔材)라서 아름다운 무늬는 기본이다. 심재에는 잘 썩지 않은 물질이 충분히 들어 있어서 보존성도 좋다. 따라서 조각재 말고도 기타, 가구제작용 목재, 여러 가지 운동구 등 없어서 못쓰는 나무이다.

옛 사람들이 나무의 이런 좋은 특징을 모를 리가 없다. 일산의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의 3천년 전 토탄층(土炭層)과 비슷한 시기의 광주 문흥리 유적, 대구 칠곡 신라시대 유적에서도 다릅나무가 출토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선조들도 아껴온 나무임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제주도에는 다릅나무와 비슷하지만 한 대궁에 달린 잎의 수가 더 많고, 크기가 보다 작은 솔비나무가 우리나라 특산 종으로 자라고 있다.



49] 말채나무

독특한 특징을 가진 나무는 분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관심있는 일반인이나 쉽게 알 수 있어서 편리하다. 말채나무는 나무껍질이 진한 흑갈색이고 세로로 길쭉길쭉한 두꺼운 조각으로 깊게 그물모양으로 갈라져 있어서 숲 속에서도 간단히 찾아낼 수 있다.


경 복궁을 복원하면서 수정전(修政殿) 앞에 자연적으로 자라고 있던 70- 80년 생 말채나무를 잘라내자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문화재청에서는 궁궐의 건축물 가까이 나무를 심지 않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해명하였다.

첫 째로 임금을 해치려는 자객이 나무에 숨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둘째로는 대문과 건물의 일직선상에 나무가 있으면, 문 밖에서 보았을 때 그 뜻이 한가로울 한(閑)이 되어 왕조의 번영이 막힌다는 의미로 받아 들였다. 셋째로 담 안쪽의 가운데에 나무가 있으면 곤란할 곤(困)의 뜻이 되어 이 또한 왕조의 앞날이 암담해진다고 여겨 나무를 심지 않았다. 그러나 경복궁에는 지금도 다른 어느 곳보다 말채나무가 많이 남아있다.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는 천년 묵은 요술 지네들이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떼로 몰려와서 곡식들을 모두 먹어 치웠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늘 배고프고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해, 지나가던 한 젊은 무사가 동네 사람들의 걱정을 듣고 독한 술 7동이를 빚어서 마을 어귀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였다. 보름달이 뜨자 예년처럼 7마리의 큰 지네가 나타나 곡식을 먹기 전에 맛있는 술맛을 보더니 정신없이 마시고는 모두 잠들어 버렸다.

이때 무사가 나타나 술 취한지네의 목을 모조리 베고, 가지고 다니던 말채를 땅에 꽂아 놓고 '말채가 여기 있는 한 다시는 지네의 습격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채는 봄이 되자 싹을 틔워 크게 자라났고 과연 무사의 말대로 지네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말채 에서 자랐다하여 말채나무라 하였고, 지금도 말채나무 가까이에는 지네가 범접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말채나무란 이름은 봄에 한창 물이 오를 때는, 가느다랗고 낭창낭창 한 가지가 말채찍으로 안성맞춤이어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도 알려 져 있다. 우리는 흔히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하여 달리는 말에 채찍을 하듯이 한창 잘 나갈 때 더욱 분발하라는 뜻으로 쓴다. 말채나무 채찍의 요긴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유 신독재가 온 나라를 짓누르고 있던 70년대 중반, 지역안배라는 명분으 로 지방의 어느 대학총장을 갑자기 문교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크게 감복 한 그는 대통령의 연두순시 서두에 "이 둔한 말에게 채찍질을 가해 달라" 고 둔마가편(鈍馬加鞭)을 빌어서 재직 기간 내내 '둔마장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전국 어디에서나 아름드리로 잘 자라는 낙엽수 큰 나무이다. 잎은 마주 나기로 달리고 타원형이며 차츰 끝이 뾰족해진다. 잎 뒷면은 흰빛이 돌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맥은 4-5쌍이다. 초여름에 흰 꽃이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많이 핀다. 열매는 둥글고 가을에 까맣게 익으며 말랑말 랑한 과육(果肉)으로 둘러싸인 속에 단단한 종자가 들어 있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50] 층층나무

   

뙤 약볕이 내려 쪼이는 한여름의 등산은 숲이 우거진 계곡을 타고 올라가 산마루를 넘어 다시 계곡으로 넘어가는 길을 잡는다. 산마루에 앉아 시원 한 솔바람으로 땀방울을 날려보내면서 넘어온 계곡을 내려다보면 가지가 층층으로 달려있는 나무가 우뚝우뚝 솟아있다.

한 마디마다 규칙적으로 가지가 돌려가면서 가지런한 층을 이루어 옆으 로 뻗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층층나무이다. 그냥 '층층이', 아예 계단나무 라고도 한다. 모양새가 너무 독특하여 한번 보면 잊어버릴 염려가 없다.

전 국에 걸쳐 흔히 자라는 낙엽활엽수 큰 나무로서 키가 20m, 지름이 한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키의 자람이 주위의 다른 나무보다 훨씬 빠르고 쑥 쑥 올라오면서 가지가 넓게 퍼진다. 혼자서 태양광선을 독차지하겠다는 놀 부 심보를 가진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나무를 '숲 속의 무법 자'란 뜻으로 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섬뜩하게 폭목(暴木)이라 부른다.

층 층나무는 소나무와 전나무처럼 저희들끼리 모여 떼거리로 자라는 법이 없다. 제살 뜯어 먹기 식 동족(同族)간의 경쟁을 피하고 다른 나무를 제압 하려니 외톨이로 한 나무씩 자라야 경쟁에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특함이 얄밉다.

숲 속의 나무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우리 인간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 런 얌체 녀석들은 그리 흔치 않고 대부분의 나무들은 적당히 경쟁하여 필 요한 수분과 태양광선을 나누어 가지면서 사이 좋게 살아간다. 그 중에는 아예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하고 큰 나무에 가려진 음지의 환경을나름대로 적응하는 나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늘에 살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박 쥐나무는 작은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손바닥 만큼씩이나 되는 커다란 잎을 달고 있다. 어쩌다 잠깐 들어오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보겠다는 몸 부림이 너무 애처롭다.

층층나무의 어린가지는 겨울이면 붉은 빛이 강하다. 나무껍질은 지름이 거의 한 뼘이나 될 때까지는 갈라지 않고 매끄러운 회갈색이나, 나이를 더 먹어 가면 진한 회색의 얕은 세로 홈이 생기면서 갈라지고 때로는 흰 얼룩 이 생기기도 한다.

목 재는 안팎의 구별이 없이 연한 황백색이며 나이테가 잘 보이지 않고 나무질이 치밀하다. 이는 층층나무 목재의 물관이 크기가 일정하고 나이테 마다 고루고루 분포하기 때문이다. 나무 세포가 모여 있는 상태가 글자를 새겨 넣기에 알맞다. 그래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새기는데 산벚나무, 돌배나무와 함께 몇몇 경판재로 선택되는 영광을 갖기도 하였다. 요즘은 깨끗한 나무 속살의 특성을 살려 작은 나무인형을 만드는데 귀하게 쓰인다 고 한다.

잎 은 사촌나무인 말채나무나 산딸나무가 마주보기인 것과는 다르게 어긋 나기로 달린다. 달걀모양이고 표면은 초록빛이며 뒷면은 흰빛으로 가장자 리는 밋밋하다. 잎맥은 6-9쌍이고 잎자루는 붉은빛이 돈다. 늦봄에서 초여 름에 걸쳐 햇가지 끝에 흰색이 도는 작고 편평한 우산 모양의 꽃이 흐드러 지게 핀다. 열매는 둥글며 가을에 붉은빛에서 검은빛으로 익는다. 산새의 좋은 먹이가 된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51] 참나무

   

참 나무는 어느 한 종(種)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토리가 달리 는 '참나무 무리'의 여러 종류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집합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겨울에 낙엽이 지며 잎의 모양이 밤나무 잎처럼 날렵하고 길쭉 하게 생긴 상수리나무와 둥그스름하고 비교적 큰 잎을 가진 신갈나무, 갈 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및 떡갈나무의 6종을 '참나무'라고 간단히 말한다. 그러나 이 녀석들은 정조관념이 별로 없어 종 사이에 교배가 잘 되므로 잡종(雜種)이 많아서 더더욱 혼란스럽다.

6 종의 참나무 종류는 엄밀하게 땅이 나누어진 것은 아니다. 대체로 구획 을 정해두고 살아간다. 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나 동네 뒷산에는 상수리나 무와 굴참나무가 터를 잡았고, 경쟁자는 많아도 땅 힘 좋고 습기 많은 계 곡에는 졸참나무와 갈참나무가 버티고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악착스럽지 못하면 좋은 자리를 빼앗기게 마련이다. 남 은 땅은 바람불고 메마른 산 능선과 산꼭대기 밖에 없다. 어쩌다 만나는 떡갈나무와 함께 이런 곳에 신갈나무가 텃밭을 일구고 있다. 산을 오르다 가 잠깐 고개바람에 땀을 식히는 산마루나 야호를 외치는 정상의 능선에서 만나는 참나무는 거의가 신갈나무이다.

참나무 무리는 우리나라 어디에나 가장 흔히 자라는 나무이며 높이 20- 30m, 지름 두 세아름에 이를 수 있는 큰 나무이다. 나무질은 단단하면서 질기고 쉽게 썩지도 않으므로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선조들이 가장 많 이 쓰던 나무의 하나이었다.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우리의 선조들은 참나무로 만든 움막집에서 생활 을 영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점말동굴을 비롯한 신ㆍ구석기 시대 유 적에서 많은 참나무가 출토되고 있다.

건축재로서 해인사대장경판전의 기둥, 선박재로서는 완도 어두리 화물 운반선의 외판(外板), 관재로서는 의창 다호리 가야고분 및 낙랑고분 관재 의 일부가 모두 참나무 종류이었다.

그래서 참나무란 이름은 나무들 중에는 가장 재질이 좋고 진짜 나무란 뜻의 '참'나무이다.

삼 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의 정사(正史) 기록을 보면 참 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배고픔을 달래주는 구황식물(救荒植物)로서 임금 이 직접 시식을 할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다. 흉년이 들수록 도토리가 더 많이 달리는 나무의 특성이 바로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참나무 종류는 꽃이 피어 서로 교배가 되는 시기가 봄 가뭄이 오기 쉬운 5월쯤이다. 햇빛이 쨍쨍한 맑은 날이 계속되면 꽃가루가 쉬이 날아다녀 수 정이 잘 되고 가을에 많은 열매가 달리는 '도토리 풍년'이 온다. 반대로 비가 자주 오면 농사는 풍년이 들어도 이 녀석들의 꽃가루는 암꽃을 영 찾 아갈 수가 없어서 도토리는 흉년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조화치고는 참 기 막히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도토리의 수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던지 고려말 윤여형(尹汝 衡)이 지은 상율가(橡栗歌)를 읽어보면 내용의 구구절절이 우리를 가슴아 프게 한다.

도 톨밤 도톨밤 참 밤이 아니련만/ 어느 누가 도톨밤이라고 이름지었나/ 차보다도 쓰디쓴 맛에 거무주죽한 빛깔/ 그래도 주린 배 채워보려는데 이 런 것도 없구나.../ 나무덩굴 붙잡고 날마다 원숭이처럼 재주 부리네/ 뙤 약볕 한나절 내내 주워도 광주리에도 차지 않아/ 쭈구려 앉으니 주린 창자 가 꼬르륵 꼬르륵하네.../ 계곡에 울려 퍼지는 남녀의 신음 소리, 아! 괴 롭고 슬프구나

경북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52] 상수리나무

   

참나무 종류 중에서 가장 흔히 만나는 것이 상수리나무이다. 북한에서는 참나무라면 우리처럼 참나무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상수리나무 를 일컫는 말이다. 남북한 어디에도 잘 자란다.

상 수리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유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간 선조의 수라상에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도토리묵을 자 주 올렸다 한다. 맛을 들인 선조는 환궁하여서도 도토리묵을 좋아하였으므 로 늘 수라상에 올랐다 하여 '상수라'라 하였는데 나중에 상수리가 되었다. 상수리(도토리)가 달리는 나무란 뜻으로 상수리나무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황해도의 은율과 송화 사이에 구왕산이 있고 그 중 턱에 구왕굴이라는 석굴이 있는데, 예부터 전란이 일어나면 임금이 흔히 피란하였다 한다. 언젠가 양식이 떨어져 임금님에게 수라도 올릴 수 없게 되자 산 아래 사는 촌로가 기근을 이겨내는 양식이라면서 도토리밥을 지어 바쳤다. 이렇게 임금을 살려냈다 해서 그 굴을 구왕굴(求王窟), 산은 구왕 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후 도토리를 상감의 수라상에 올렸 다 하여 '상수라'라고 했고 상수라가 상수리가 된 것이라 한다.

상 수리나무를 포함한 참나무 종류의 열매를 부르는 이름에 약간의 혼란 이 있다. 상수리나무 열매만을 상수리라고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참나무 열매는 모양이 수종간에 엇비슷하여 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 이 엄밀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참나무 종류의 열매를 통틀어 '도 토리'라 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상수리', 경상도에서는 꿀밤이라한다.

상 수리나무와 아주 비슷한 나무에 굴참나무가 있다. 두꺼운 코르크가 발 달하는 굴참나무 껍질은 예부터 비가 새지 않고 보온성이 좋아 지붕을 이 는 재료로 사랑받아 왔다. 고려 충숙왕 16년(1329) 봄 왕은 사냥을 위하여 천신산 밑에 임시 거처할 집을 짓고 관리들에게 '지붕은 무엇으로 덮으면 좋은지를 물었다. 관원들은 굴참나무(樸木) 껍질이 제일 좋다고 대답하였 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굴참나무 껍질을 채집하게 하여 매우 고통을 받았 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옛 멋을 살린답시고 장식용으로 쓰기 위하여 굴참나무 껍질을 인 정사정 없이 홀딱 벗겨버린다. 창졸간에 나신(裸身)이 된 굴참나무는 고려 때와는 달리 몰지각한 백성들에 의하여 오히려 나무 자신이 고통스러워한 다.

얼 마 전까지만 하여도 깊은 산골의 너와집은 흔히 굴참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이었다. 이런 집은 굴참나무의 껍질(皮)로 만들었다하여 굴피집이 라고 부른다. 그래서 굴피집의 재료가 굴피나무 껍질이라고 흔히 잘못 알 고 있다. 굴피나무는 이름만 굴참나무와 비슷할 따름이지 코르크 껍질과는 인연이 먼 전혀 다른 나무이다.

상 수리나무와 굴참나무는 잎이 좁고 긴 타원형이고 가장자리에 짧은 침 같은 톱니가 있으며 침에 엽록소가 없어서 회갈색이다. 상수리나무의 잎 뒷면은 연한 녹색이고 껍질은 세로로 약간 깊게 갈라지나 코르크가 발달하 지는 않는다. 반면에 굴참나무는 잎 뒷면이 희끗희끗한 회백색이고 코르크 가 두껍게 발달한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52] 떡갈나무

   

참나무 종류 중에서 둥그스름하고 비교적 큰 잎을 가진 나무는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4종이다. 이들 중 가장 흔한 것이 신갈나 무, 다음이 졸참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의 순서이다.

모 양새를 잠깐 살펴보면, 신갈나무의 잎은 잎자루가 거의 없이 가지에 바로 붙어있고 잎의 밑 모양이 사람의 귓밥처럼 약간 늘어져 있다. 떡갈나 무는 신갈나무와 전체적인 잎이 매우 비슷하나 더 크고 더 두꺼우며 잎의 뒷면에 갈색 털이 촘촘하다. 때로는 특징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일반인들이 진짜 떡갈나무를 찾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갈 참나무는 언뜻 보아 신갈나무 잎 같으나 1-2cm정도의 잎자루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졸참나무는 졸(卒)이 뜻하는 것처럼 잎 크기가 가장 작고 가장자리에 안으로 휘는 갈고리 모양의 톱니가 다른 참나무 종류와 구별되 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 들 4수종 중 떡갈나무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참 나무 종류의 분류 체계를 잘 알리 없는 일반인들은 참나무 종류의 대표주 자로서 떡갈나무를 내세운다. 대중적인 영향이 큰 유명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에서도 '떡갈나무'는 진짜 떡갈나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참나무 종 류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외국의 시나 소설을 번역할 때도 원문에 분 명히 oak라 하여 어느 특정 참나무를 가르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떡갈나무로 번역해 버린다.

그 렇다면 떡갈나무는 과연 참나무의 대표로서 부끄럽지않은 자격을 갖 추었는가. 그렇지 않다. 다 자라면 다른 참나무들은 아름드리가 훨씬 넘지 만 떡갈나무는 덩치가 가장 작아 기껏 지름 한 뼘이 고작이다. 또 어디에 서나 쉬이 만나는 다른 참나무에 비하여 좀처럼 만나지지도 않는다. 떡갈 나무를 만나기는 임금을 쳐다 보기만큼이나 어렵다.

크고 두꺼운 잎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참나무를 대표하기에는 아무래도 자격 미달이다.

참나무 종류 중에 어느 한 나무를 대표선수로 선택할 양이면 적어도 떡 갈나무는 제외하여야 할 것이다. 참나무 종류의 종을 일일이 구분할 수 없 을 때는 그냥 '참나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우 리 조상들은 흔히 새로 난 떡갈나무 잎에 떡을 싸서 쪄 먹었으므로 떡 갈나무란 이름이 붙여졌다. 도톰한 잎의 뒷면에 갈색의 짧은 털이 융단처 럼 깔려 있어서 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하는데는 안성맞춤이고 독특한 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떡갈나무 잎은 같이 살던 미생물이 살균작용을 한다고도 한다. 냉장고속에 이 잎을 넣어 두면 불쾌한 냄새를 막을 수 있는 탈취제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나 소문과는 달리 별로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본사람들은 단옷날 떡갈나무 잎에 싼 떡을 먹기 좋아하는 풍속이 있다. 그래서 얼마 전 까지만 하여도 떡갈나무 잎을 따서 삶고 찌는 가공과정 을 거쳐 일본에 수출함으로서 농촌의 중요한 소득 품목으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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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사시나무

   

전 래민요에 나무 이름을 두고 '덜덜 떨어' 사시나무, 바람 솔솔 소나무, 불 밝혀라 등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칼로 베어 피 나무, 죽어도 살구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그렇다고 치자 치자나무, 거짓없다 참나무 등 재미있는 노래 가사가 있다.

크게 겁을 먹어 이빨이 서로 부딪칠만큼 덜덜 떨게 될 때 우리는 흔히 사시나무 떨 듯이 떤다고 한다. 왜 허구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사시나 무와 비유될까? 사시나무 종류에 속하는 나무들은 다른 나무보다 몇 배나 가늘고 길다란 잎자루 끝에 작은 달걀만한 잎들이 매달려 있다. 자연히 사 람들이 거의 느끼지 못하는 미풍에서 제법 시원함을 가져오는 산들바람까 지 나뭇잎은 언제나 파르르 떨게 마련이다.

영어로도 'tremble tree'라 하여 우리와 같이 역시 떠는 나무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일본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산명(山鳴)나무, 즉 산을 울게 하 는 나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이름에 떤다는 뜻은 넣지 않았다. 다만 일반 백성들은 묘지의 주변에 둘레나무로 사시나무를 심게 하였다. 죽어서 도 여전히 벌벌 떨고 있으라는 관리들의 음흉한 주문일 것이다.

사시나무는 모양새가 비슷한 황철나무를 포함하여 한자이름은 양(楊)이 며 껍질이 하얗다고 백양(白楊)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버드나무 종류와 가 까운 집안간으로서 둘을 합쳐 버드나무과(科)라는 큰 종가를 이룬다.

백 제무왕 35년(634) 부여에 궁남지(宮南池)를 축조 할 때 '대궐 남쪽 에 못을 파고 사방 언덕에 양류(楊柳)를 심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복원하면서 궁남지에는 온통 능수버들만을 심었다. 양류에 는 버들만이 아니라 사시나무도 포함되어 있으니 조금은 다양한 조경을 하 여도 좋을 것 같다.

중 부 이북에 주로 자라는 낙엽활엽수로 지름이 한 아름정도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나무 껍질은 회백색으로 어릴 때는 밋밋하며 가로로 긴 흰 반점 이 있다. 나이가 많아지면 얕게 갈라져서 흑갈색이 된다. 잎은 뒷면이 하 얗고 가장자리에 얕은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꽃은 암수 딴 나무로서 봄 에 잎보다 먼저 핀다. 열매는 긴 원뿔모양의 삭과(삭果)로 봄에 익으며 종 자에 털이 있다.

동의보감에 사시나무 껍질은 '각기로 부은 것과 중풍을 낫게 하며 다쳐 서 어혈이 지고 부려져서 아픈 것도 낫게 한다. 달여서 고약을 만들어 쓰 면 힘줄이나 뼈가 끊어진 것을 잇는다'고 하여 주요한 약제이기도 하였다.

사 람들은 사시나무라는 좀 생소한 이름보다 흔히 백양나무라고 부른다. 수입하여 심고 있는 은백양이나 이태리포플러는 물론 외국의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작가나 나무를 수입하는 업자들도 원어 'aspen'을 사시나무가 아 니라 백양나무로 일컫는다. 그러나 백양나무란 정식 이름이 아닌 사시나무 종류의 속칭(俗稱)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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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닥나무

   

흔 히 된발음으로 딱나무라고 한다. 나뭇가지를 분지르면 '딱'하고 소리 가 나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으련만 왜 이 나무만 '딱나무'가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다. 닥나무의 목질부가 쉽게 꺾어지는 것과는 달리 껍질에는 인피섬유(靭皮纖維)라는 질기고 튼튼한 짧은 실 모양의 세포가 들어있다.

이들은 종이를 만들기에 다른 어떤 나무보다 질이 좋아 우리나라 옛 종 이는 거의 닥나무로 만들어졌다.

기 원전 170년쯤 전한(前漢)시대부터 중국에서 사용되던 종이가 우리나라 에 언제 들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으로는 610년에 고구려의 담징 이 일본에 제지기술을 전수했다는 일본서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6-7세기에 상당히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증적 자료로는 1938년 일본에서 발견 된 신라의 민정문서(755년쯤으로 추정)가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고 려에 들면서 종이의 쓰임새는 한층 넓어졌고, 고려인들이 만든 종이는 기술이 탁월하여 중국에서조차 고급종이로 귀하게 여겼다. 공양왕 3년(13 91)에는 닥나무 껍질로 저화(楮貨)를 만든것이 최초의 지폐로 알려져 있 다. 조선에 들면서 제지산업은 더욱 활성화되어 세종 2년(1420) 지금의 세 검정 부근에 관영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종이를 만들었 다.

종 이 제조는 예로부터 중요한 산업으로서 원료인 닥나무의 확보가 시급 한 문제이었다. 닥나무를 백성들에게 재배하도록 권장하였으나 태종 10년 (1410) 승정원의 상소문에 "대소 민가에 닥나무 밭이 있는 자는 백에 하나 둘도 없다"고 하여자원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정에서는 재래종 닥나무의 재배 독려에 그치지 않고 세종 29년(1447) 전라.충청.경상도 감사에게 왜닥나무(倭楮, 지금의 산닥나무)의 종자를 수 입하여 널리 심도록 하는 등 좋은 원료 확보에 정성을 기울였다.

닥 나무 가꾸기는 일반 백성들에게만 권장한 것이 아니다. 정조 17년(1 792) 비변사는 "닥나무를 심는 것은 원래 중들의 업(業)이었으나 삼남 지 방의 사찰이 모두 황폐해지면서 닥나무 밭도 묵어버렸습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핍박받던 스님들은 오래 전부터 닥나무 재배를 강요당한 것으로 보 인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며 작은 관목처럼 보이나 자르지 않으면 지름 20여c m에 다다르기도 한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이며 거의 갈라지지 않는다. 잎 은 어긋나기하고 달걀모양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표면은 거칠다. 잎에 따라서는 두세 군데가 움푹 패고 한 나무에 달걀모양 잎과 팬 잎이 같이 달린다. 암수 한 나무로 늦봄에 꽃이 피며 암꽃은 씨방에 실같은 암 술대가 있다. 열매는 여름에 공처럼 둥글고 주홍색으로 익는다.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 종류에는 이밖에 모양새로는 거의 구분이 안되는 꾸지나무가 있다. 또 가지가 3개로 계속 갈라지는 삼지(三枝)닥나무와 싸 리 비슷하게 생긴 산닥나무는 모두 고급 전통한지를 생산하는 나무이다.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재료일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에 보면 열매와 잎 은 모두 약재로도 널리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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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다래나무

   

이맘때쯤이면 지리산 실상사 입구에 가면 '고무반티(재생플라스틱 함지 박)'에 손가락 굵기 만한 검푸른 열매를 수북이 담아놓고 지나가는 관광객 을 유혹하는 아줌마들이 있다.

맛 만 보고 가라는 꾐에 못 이기는 척하고 몇 알을 입 속에 넣어보면 달 큼한 맛에다 깨알처럼 씹히는 씨앗까지 감칠맛이 일품이다. 이것이 바로 머루와 함께 야생과일의 대명사 다래이다. 단맛이 잔뜩 들어 있는 목화의 풋열매를 다래라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달다'에서 다래의 이름이 유래 한 것으로 보인다.

다래는 그냥 생식하는 것 외에도 과일주를 담그면 달콤한 맛 때문에 먹 기가 좋고 비타민 C와 타닌 등이 함유되어 있어 피로회복.강장.보혈.불면 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꿀에 넣고 조린 다래정과(正果)는 우리의 전통과자로서 지체 높은 옛 어른들의 간식거리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에는 '심한 갈증과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는 것을 멎게 하며 요결석을 치료한다. 장을 튼튼하게 하고 열기에 막힌 증상과 토하는 것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곡 우를 지나 나무의 생리활동이 왕성한 시기에 사람들은 다래나무의 수 액도 뽑아먹는다. 굵어야 팔뚝 남짓한 다래나무 줄기에서 물을 뽑아내는 것이 귀찮다고 아예 덩굴을 싹둑 잘라버린다. 여기에는 마치 깊은 상처를 입어 피가 용솟음 치듯이 수액이 넘쳐흐른다. 보고 있으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 너무 섬뜩하여 마음 약한 사람은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래나 무 수액채취는 제발 삼갔으면 한다.

우리나라어디에서나 숲 속에 자라는 덩굴나무로 길이 10m를 훨씬 넘고 팔뚝 굵기에 이르기도 한다. 어린가지에 잔털이 있으며 숨구멍이 뚜렷하고 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타원형으로 크기는 갓난아이 손바닥만하다.

잎 표면은 갈색으로 광택이 있으며 뒷면은 연한 초록빛이고 가장자리에 는 바늘모양 톱니가 촘촘하다. 암수 딴 나무로서 꽃은 여름에 흰빛으로 피 고 마치 작은 매화꽃과 같이 생겼다.

다 래나무 종류에는 이외에도 개다래와 쥐다래가 있다. 둘 다 다래나무와 는 달리 잎이 마치 백반병(白斑病)이 든 것처럼 흰잎이 띄엄띄엄 섞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에서 개다래의 열매는 끝이 뾰족한 것이 쥐다래와의 차이점이다. 개다래는 달지 않고 혓바닥을 톡톡 쏘는 맛이 있어서 약용으 로 쓸 따름이지 먹지는 않는다.

수 입하여 재배하고 있는 키위(kiwi)도 다래의 한 종류이다. 언제부터인 가 키위를 참다래라고 부르고 있어서 우리 산에 자라는 다래는 억울하게도 하루아침에 모두 가짜가 되어버렸다. 키위는 키위라고 그대로 부르고 참다 래는 우리의 다래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다래나무와 족보는 멀지만 잎이나 덩굴의 모양이 매우 비슷하여 혼동하 기 쉬운 노박덩굴이 있다. 다래나무는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짧은 바늘처 럼 촘촘한데 반하여 노박덩굴은 물결모양 톱니인 것이 차이점이다. 물론 딱딱하고 샛노란 노박덩굴의 열매를 보면 다래와의 차이점을 금세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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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마가목

   

마 가목은 삭풍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높은 산의 꼭대기 근처에 터를 잡 고 산다. 메마른 땅과 찬바람을 원래부터 좋아하였을 리는 없고, 평지에 심어보면 잘 자라는 것으로 보아 경쟁자에게 차츰 밀려서 쫓겨난 '비운의 나무'일 것이다.

그러나 근래 이 나무에도 햇빛이 들기 시작하였다. 꽃과 열매, 잎의 모 양새까지 산꼭대기로 쫓아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나무이기 때문이다.

우 선 생김새부터 알아보자. 마가목은 오래된 것이라야 키가 7-8m에 지 름 한 뼘 남짓에 지나지 않는 나무이다. 나무껍질은 거의 갈라지지 않고 적갈색으로 약간 반질반질한 감이 있다. 잎은 전체적으로 아카시아 잎처럼 생겼으나 작은 잎 하나 하나는 뾰족뾰족하며 가장자리에는 날 세운 겹 톱 니가 있다.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한창 녹음이 짙어갈 즈음 하얀 꽃이 떡살을 여 러 개 늘어놓은 것처럼 무리 지어 핀다. 녹색 잎과 흐드러지게 피는 흰 꽃 들이 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나무의 품위를 한층 높여준다. 꽃은 향기롭고 벌이 좋아하는 꿀샘이 풍부하여 벌꿀을 따는 식물로도 손색이 없다. 여름 이 끝나 가는 8월 말쯤이나 9월초에 때 늦게 울릉도에 들어간 관광객들은 가로수로나 성인봉의 등산길에 굵은 콩알 크기의 붉은 열매를 나무 가득히 달고 있는 마가목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게 된다. 육지에도 마가목을 여 기 저기서 볼 수 있지만 울릉도의 성인봉이 마가목 자생지로 유명하기 때 문이다. 콩알 크기의 빨간 열매를 한 송이에 수백 개씩매달고 무게를 이 기지 못하여 주렁주렁 늘어진 모양은 짙푸른 후박나무 잎새와 어우러져 흔 히 말하는 '환상의 명콤비'를 이룬다.

잎과 꽃, 열매 모두가 아름다운 나무, 그래서 세계적으로 80여종이나 되 는 마가목은 일찍부터 관상 가치에 눈을 뜨고 개발하여 유럽, 중국, 미국 에서 우리가 수입하는 마가목 종류도 상당수 있다.

마 가목이란 이름은 새싹이 돋을 때 말의 이빨처럼 힘차게 솟아난다고 마 아목(馬牙木)이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마가목은 정공등(丁公 藤), 남등(南藤)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동의보감에 실려있는 설명으로 보아 서는 마가목과 같은 나무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민간약으로 마가목의 열매와 껍질이 여러 가지 약효를 가진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열매는 말려 두었다가 달여서 복용하거나 술을 담가 먹기도 한다 . 몇 년 전 근거 없이 마가목이 성인병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잘리고 껍질 이 홀랑 벗겨지는 수난을 당한 슬픈 과거도 있다. 최근 북한에서는 마가목 으로부터 '마가목산'이라는 호흡기질환 생약치료제를 개발하여 크게 호응 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 리가 흔히 마가목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진짜 마가목과 당마가목을 비 롯하여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작은 잎의 숫자가 9-13개이고 잎의 뒷면이 앞면과 마찬가지로 그냥 녹색이면 마가목, 작은 잎의 숫자가 13개를 넘고 잎 뒷면이 흰빛이 돌면 당마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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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회화나무

   

당 나라 때 안녹산의 난으로 궁궐이 점령 당하여 옥에 갇힌 왕유는 응벽 지(凝碧池)라는 시에 "회화나무 낙엽 지는 궁궐은 쓸쓸한데 /응벽지 언덕 에는 주악 소리만 들려오누나"라고 읊조렸다. 중국의 궁궐에 널리 심는 나 무임을 짐작할 수 있고, 우리나라의 왕궁에도 창덕궁의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중 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상서로운 나무의 하나로 매우 귀히 여겼다. 주 나라 때 조정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삼정 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을 상징할 정도로 귀한 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관리가 벼슬을 얻어 출세한 후 관직에서 퇴직할 때면 기념으로 심는 것도 회화나무였다고 한다.

회 화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 그 꽃을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괴(槐) 의 중국 발음이 '회'이므로 회화나무 혹은 회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 나 느티나무도 흔히 괴목이라하여 옛 문헌에서는 앞뒤 관계로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이름은 학자수(學者樹)이고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 sc holar tree라고 쓴다. 나무의 가지 뻗은 모양이 멋대로 자라 학자의 기개 를 상징한다는 풀이도 있다.

회화나무는 약간의 논란이 있으나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시기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해론(奚論)이 "백제의 침공으로 성이 함락되자 회화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 시대 이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래서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 함께 전설이나 유래가 전해져 오는 회화 나무 노거수(老巨樹)를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충남서산 해미 면 읍내리의 해미읍성(사적 제116호)내에 자라는 약 600년 된 회화나무는 조선 말기 병인사옥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죽였으 므로 교수목(絞首木) 또는 호야나무 등으로 불려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밖에 고궁이나 서원, 문묘, 벼슬하던 양반 동네에는 어김없이 회화나무 가 심겨져 있다.

흔히 말하는 남가일몽(南柯一夢)도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꿈속에 괴안국 (槐安國) 태수가 되어 호강을 누리다 어느 날 꿈을 깨어보니, 바로 자기 집 뜰의 회화나무 밑둥 아래의 개미나라를 갔다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 활엽수로 지름이 두세 아름, 키가 수십m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어 린가지는 잎 색깔과 같은 녹색이 특징이며 나이를 먹으면 나무 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아카시아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으나 끝이 점 점 좁아져서 뾰족해진다. 꽃은 가지의 끝에 여러 개의 원뿔모양 꽃대에 복 합하여 달리며 늦여름에 연한 노랑꽃이 핀다.

본초강목에는 회화나무 종자, 가지, 속껍질, 진은 치질이나 불에 덴 데 쓰인다 하였고, 특히 꽃은 말려서 고혈압, 지혈, 혈변, 대하증 등에 널리 이용 되었다. 꽃에 들어있는 루틴(rutin.일명 비타민P)이라는 물질은 모세 혈관을 강화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하였다. 솥에 꽃을 달여 나오는 루틴의 노란 색소로 물을 들인 한지에 부적을 쓰면 효험 이 더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열매는 염주를 길게 꿰어 놓은 모양이고 종자 가 들어 있는 부분이 잘록잘록하여 매우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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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주팝나무

   

한림별곡에 '조협나무에 붉은 실로 붉은 그네를 매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고려 이전부터 인가(人家) 가까이 흔히 심었던 나 무임을 알 수 있다.

한 자 이름은 조협목이고 조협나무를 거쳐 주엽나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주염나무 혹은 쥐엄나무라고 도 한다. 쥐엄이란 쥐엄떡(인절미를 송편처럼 빚고 팥소를 넣어 콩가루를 묻힌 떡)에서 유래된 말이다. 열매가 익으면 속에는 끈끈한 잼 같은 것이 있어서 먹으면 달콤한 맛이 나므로 쥐엄떡과 비유되어 이런 이름이 생긴 것으로도 이야기한다.

주 엽나무의 가지에는 가시가 없어도 굵은 줄기에는 흔히 험상궂게 생긴 가시가 붙어있다. 대학 구내의 주엽나무에는 별나게 가시가 많다. 한창 나 이의 젊은이들은 언제나 힘이 남아돌아, 버티고 서있는 학내의 나무가 아 니꼬운지 이유도 없이 '2단 옆차기'가 잘 들어간다. 여자친구한테 딱지라 고 맞는 날이면 회갈색의 매끄러운 껍질이 만만해 보이는 주엽나무가 그들 의 화풀이 희생양이 된다.

살아있는 삼라만상은 잘못도 없이 매맞으면 반격을 가할 궁리를 하게 마 련이다.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다른 나무와는 달리 주엽나무는 매우 효과적인 대책을 세운다. 다시는 발을 올려보지도 못하게 줄기의 일부가 변하여 사슴뿔처럼 생긴 무시무시한 가시를 만들어 낸다. '이 녀석아! 이 래도 또 발길질 할래?'라고 겁을 주어 버린다.

이 가시는 꼭 외부 자극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모든 주엽나무에 반드시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아주 귀하게 여긴다. 한자로 조각자 혹은 조협 자 라고 하는데, 동의보감에 보면 부스럼을 터지게 하고 이미 터진 때에는 약 기운이 스며들게 하여 모든 악창을 낫게 하고 문둥병에도 좋은 약이 된 다고 한다.

주엽나무의 열매는 조협, 열매의 씨는 조각자 혹은 조협자라 하여 동의 보감에는 '뼈마디를 잘 쓰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하며 구규(九竅)를 잘 통하 게 하고 가래침을 삭이고 기침을 멈추게 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에도 여러 지방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주엽 열매를 오래 전부터 약으로 사용하였다.

전국에 걸쳐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서 키가 20여m, 지름은 한 아름까지 굵어진다. 대부분의 나무가 나이를 먹으면 껍질이 세로로 깊게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나 주엽나무는 매끄러운 줄기가 특징이며 가끔 예리 한 가시가 달린다. 잎은 어긋나기이고 아카시아 잎처럼 생겼으며, 작은 잎 의 가장자리에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특징적인 것은 잎자루에 마주보기 로 붙어있는 잎이 대부분의 다른 나무들은 홀수이나 주엽나무는 짝수이다. 꽃은 초여름에 황록색으로 피고 열매는 가을에 길이가 거의 한 뼘에 이 르고 너비 2-3cm의 비틀어진 큰 콩꼬투리의 열매를 맺는다.

주엽나무와 줄기 및 잎의 모양은 매우 비슷하나 열매의 꼬투리가 비틀리 거나 꼬이지 않으며 가시가 더 굵은 것을 조각자나무라 하여 원래 한약제 로 쓰는 별개의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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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산사나무

   

산 사나무의 잎은 가장자리가 깊게, 때로는 얕게 율동적으로 잎맥을 가운 데 두고 비대칭적으로 퍼져 있다. 대개의 나뭇잎이 갸름한 달걀모양이거나 작은잎 여러개가 서로 마주보며 달려있는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고 어떻게 보면 정돈되지 않은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산사나무는 복잡한 설명을 듣 지 않더라도 잎을 한번만 보아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산사나무의 북한 이름은 무슨 나무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찔광나무이다. 우리는 한자이름인 산사목(山査木)에서 따온 이름이고 북한은 지방사투 리를 그대로 쓰는 경우이다.

5 월에 막 들어설 즈음, 산사나무는 위가 편평한 우산모양의 꽃차례에 동 전만한 꽃이 십여개씩 모여 달린다. 연초록의 신록과 하얀 꽃이 그야말로 함박 웃는 여왕의 입모습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질 만큼 계절과 잘 어울리 는 꽃을 달고 있다.

여 름을 지나 가을의 초입에 채 들어가면 앙증맞은 아기사과처럼 생긴 열 매는 새빨갛게 익기 시작한다. 어린이들의 구슬 크기 만하고 흰 얼룩점이 있는 열매는 띄엄띄엄 몇개씩 감질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수백수천개씩 새빨간 구슬모자를 뒤집어쓴 것 같다. 초가을에는 초록빛 잎 사이에서 얼 굴을 내밀다가 가을이 깊이 가면서 잎이 떨어지면 붉은 열매사이로 쳐다보 는 가을하늘과 퍽 잘 어울리는 열매이다.

모양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열매는 산사자(山査子)라 하여 이것으로 빚은 산사주(山査酒)는 잘 알려진 약용 술이다. 잘 익은 산사열매를 깨끗 이 씻어 응달에서 말린 다음, 주둥이가 큰 병에 담고 3배정도의 소주를 부어 뚜껑을 꼭 닫는다. 서늘한 곳에서 6개월 이상 두어 술이 익으면 체에 걸러 건더기는 건져내고 맑은 술은 다른 병에 옮겨둔다. 신맛이 약간 있고 떫은 맛을 느끼게 하나 조금씩 마시면 위장에 좋다고 한다.

동 의보감에 보면 산사나무 열매는 '소화가 잘 안되고 체한 것을 낫게 하며 기가 몰린 것을 풀어주고 가슴을 시원하게 하며 이질을 치료한다'고 하여 소화기 계통의 약제로 쓰였다. 또 가을에 잘 익은 열매를 따서 씨를 발라내고 햇볕에 말린 다음, 종이봉지에 넣고 잘 봉해서 습기 없고 통풍이 잘 되는 장소에 매달아 두고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하였다.

조 선 순조 원년(1800)에 임금의 몸에 발진이 생기자 의관에게 '인동 두 돈쭝과 산사자 한돈쭝으로 차를 만들어 들여라'고 하였고, 또 순조 2년에 는 '산사자를 가미한 가미승갈탕(加味升葛湯)을 올리고 중궁전에는 산사차 와 함께 가미강활산(加味羌活散) 한 첩을 올렸다'고 한다. 임금님과 왕비 모두 홍역의 증후가 있기 때문이었다.

남부 일부 및 섬지방을 제외한 거의 전국에 걸쳐 분포하며 높이 6m 정도 로서 굵기는 한뼘 정도까지 자란다. 나무껍질은 어릴 때는 매끄러우나 나 이가 들면서 세로로 갈라지고 회갈색이다. 어린 가지에는 가시가 있다.

산사나무 종류는 유럽에도 널리 분포한다. 'May flower'라고 부르기도 하며 잎과 꽃, 열매에는 약리작용을 하는 유효성분이 있어서 강심제 등으 로 쓰이기도 한다.

경북대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61] 무궁화

   

한 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전송가에서 여주인공 안나 카슈피가 "무궁 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 ..."라 고 잔잔히 노래하는 장면이 있다. 무궁화는 이처럼 삼천리 강산을 휩쓴 동 족상잔의 비극 속에서도 평화의 꽃으로 만발하기를 기다리고 바라는 우리 의 나라꽃이다.

멀리는 중국의 요순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 등장 하며 신라 때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도 근화지향(槿花之鄕)이란 말이 들어있다. 근화나 목근(木槿)으로 불리던 이름은 고려때 비로소 무궁 화(無窮花)란 꽃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 이 꽃 은 꽃피기 시작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피고 지는데/ 사람들은 뜬세상을 싫어하고/ 뒤떨어진 걸 참지 못한다네/ 도리어 무궁이란 이름으로/ 무궁하 길 바란 것일세..."라고 하였다.

그 러나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자리 매김을 한 것은 구한말 애국가 가사가 만들어질 때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시작된 질곡의 근세를 살아온 세대들은 무궁화가 바로 애국의 상징이었고 삼천리 강산이 무궁화 꽃으로 덮이는 이상향을 그리기 도 하였다. 해방이 되어 정부가 수립되고 자연스럽게 무궁화는 나라꽃으로 정해지면서 국기봉이 무궁화의 꽃봉오리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아울러 정부 와 국회 포장이 무궁화 꽃 도안으로 채택되었다.

무궁화는 사람 키를 조금 넘는 높이에 팔뚝 굵기가 고작인 작은 나무이 고 가지가 잘갈라져 포기처럼 되는 경우가 많다. 잎은 엄지손가락 길이에 달걀모양으로 깊게 3갈래로 갈라지며 어긋나기로 달린다.

꽃 은 5장의 커다란 꽃잎이 서로 반쯤 겹치기로 펼쳐져 작은 주먹만하게 피며, 꽃잎 안쪽에는 짙은 붉은 색 무늬가 생긴다. 무궁화는 새벽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에는 벌써 오므라들기 시작하고 이틀 정도면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여름에 피기 시작하면 늦가을까지 거의 3-4개월이나 피는 셈인데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수 많은 품종이 있고 장려하는 종류만도 20여종이 넘는다. 색깔로 본다면 분홍색, 보라색, 흰색이 있으며 홑꽃과 겹꽃도 있다. 원산지가 중동, 인도, 중국남부라는 등 논란이 있으며 본래 우리 땅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종 나무가 아니라 수입나무이다.

불 행히도 나라 꽃 무궁화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꽃의 순서를 매겨 보았더니 장미, 국화, 백합에 이어 겨 우 4위를 차지하는데 불과하였다 한다. 꽃이 질 때가 지저분하고 하루살이 꽃이며 우리 나무도 아니고 진딧물이 많다는 등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여서 나라꽃이란 막강한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무궁화 심기를 그렇게 달가워하 지 않는다.

북한은 진달래에서 함박꽃나무로 나라꽃을 바꾸었고, 중국도 모란에서 매화로 바뀌었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사람들이 좋아하면서도 우리 모두 가 공감하는 나라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62] 작살나무

   

고기잡이에 쓰이는 작살은 삼지창 모양의 날카로운 쇠붙이에 단단한 나 무막대를 꽂아서 쓴다. 또 무슨 일이 잘못되어 아주 결딴이 나거나 형편없 이 깨지고 부서질 때 우리는 작살난다고 한다.

작 살나무는 이와 같은 '작살'이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의 가지는 정확히 서로 마주나기로 달리고 중심가지와의 벌어진 각도 가 60-70도로 약간 넓은 고기잡이용 작살과 모양이 너무 닮아 있다. 작살 나무는 거의 박달나무와 맞먹을 만큼 무겁고 단단하여 작살로도 쓸 수 있 을 것처럼 보이나 나무로 만든 작살은 물의 부력 때문에 사용하기가 어렵 다. 그래서 직접 이 나무로 작살을 만들어서 '작살나는' 나무가 된 것이 아니라 작살을 닮은 가지 뻗음에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우 리나라 어디에서나 만나는 작은 낙엽수이며 일본과 중국에는 있으나 서양에는 없는 동양의 나무이다. 다 자라도 키가 2-3m에 불과하여 크기로 서는 나무세계의 피그미족에 속한다. 일찌감치 종족의 한계를 잘 알아서 습기 많은 계곡 부근을 요람으로 선택하였으므로 덩치 큰 나무들에 가려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도 별로 개의치 않고 잘 자란다.

잎 은 거꾸로 세운 달걀모양으로 마주나기하며 지극히 평범한 모양이라서 잎 모양만으로 다른 나무와의 구별이 어렵다. 숲 속의 초록이 한 여름의 햇빛에 차츰 바래가는 7월 중순에서 8월에 걸쳐 작살나무 잎의 겨드랑이에 는 연 보랏빛의 깨알같은 꽃들이 핀다. 그 자리에는 지름 4-5mm의 작고 앙증맞은 열매가 수십개씩 옹기종기 매달린다. 처음에는 평범한 녹색으로 시 작하나 가을이 깊어가면서 아름다운 보랏빛 열매로 차츰 변하여 간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고운 보랏빛 색깔이 우리나라 특유의 코발트빛 가을 하늘과 너무 잘 어울린다. 낙엽이 져버린 앙상한 가지에 찬바람이 휘몰아 쳐 달린 것이라고는 모두 훑어버릴 때까지 열매가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한자로는 자주(紫珠)라 하여 열매가 바로 보라구슬 임을 말하고, 일본이름에도 보랏빛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다. 같은 나무를 두고 우리 만 작살이라는 좀 삭막한 이름을 가진 셈이다.

조 그만 정원이라도 가진 분들이라면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작살 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가을에 종자를 따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봄에 심으면 된다. 열매가 보랏빛이 아니라 하얀 흰작살나무도 원예품종으로 개발되어 있다.

작 살나무 무리에는 이외에 좀작살나무와 새비나무가 있으며 서로 비슷하 나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구분해 낼 수 있다. 작살나무는 잎의 가장자리 전부에 톱니가 있으나 좀작살나무는 잎의 가장자리 2분의 1이상에만 톱니 가 있고 열매는 '좀'이 붙은 의미처럼 지름이 2-3mm로 작살나무보다 작다.

흔히 심는 것은 주로 좀작살나무이다. 새비나무는 작살나무와 거의 같으 나 잎의 표면에 털이 있고 주로 남해안의 섬 지방에 자란다.

경북대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63] 머루

   

고 려시대의 가요인 청산별곡에 '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 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고 하였다. 강원도아리랑 에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산중의 귀물(貴物)은 머루나 다래, 인간의 귀물은 나 하나라...'하여 머루와 다래는 예로부터 산 속 깊숙이 자라는 야생과일로 사랑을 받아왔다.

머루 는 힘들여 가꾸지 않더라도 얼기설기 나무 덩굴을 이루고 알알이 열 매를 매단다. 그래서 복숭아나 자두처럼 집 앞에 심어놓고 풍류를 즐기는 양반들의 간식이 되는 귀족과일이 아니라 머루는 아무나 먼저 본 사람이 임자이다. 배고픈 서민들이 양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마음놓고 따먹을 수 있는 고마운 서민의 과일이었다. 열매가 너무 많이 달려 먹기에 부담스 러우면 머루주를 담아 약용으로 마시기도 하였다. 어린 새순이나 연한 잎 을 나물로 먹었으며 줄기는 단단하고 탄력성이 좋아 지팡이 재료로도 애용 되었다.

우리가 흔히 머루라고 부르는 나무는 머루 이외에도 왕머루, 까마귀머루, 새머루, 개머루가 있다. 특히 머루와 왕머루는 아주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렵다. 잎의 뒷면에 적갈색 털이 있는 것은 머루이고, 털이 없으면 왕머 루이다. 그러나 실제로 산에서 이 둘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우리 나라 산에는 왕머루가 훨씬 많으니 우리가 그저 머루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은 왕머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머 루와 포도는 생김새에서도 짐작이 가듯이 친형제나 다름이 없다. 머루 의 잎이 5개로 얕게 갈라지는데 비하여 포도는 3-5개로 얕게 갈라지는 것 이 주요한 차이점이다. 그래서 머루를나타내는 한자에 영욱( ), 목룡(木 龍)이라는 말이 있으나 재배하는 포도(葡萄)와 엄밀하게 구분하여 쓰지 않 았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인 포도는 유럽에서 개량하여 기원전 3천년부터 벌써 심기 시작하여 인류최초의 재배과일이다. 우리나라에 포도가 들어온 시기 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의 와당(瓦當)이나 전(塼)에 흔히 포도 무늬 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을 통하여 삼국시대 이전에 벌써 들어온 것 으로 생각된다. 고려때 이색의 목은집에 포도가 비치기도 하며 조선조에 들면서 과일로 재배되기도 하였으나 그리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포도가 일반화 된 것은 개화이후이다.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포도 알에 얽힌 꿈을 보는 듯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 혀...'라고 읊조리고 있다.

동 의보감에 나와 있는 포도의 설명에 보면 '열매에는 자줏빛과 흰빛의 2가지가 있는데 자줏빛이 나는 것을 마유(馬乳)라 하고 흰빛이 나는 것을 수정(水晶)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쓰임새는 '뼈마디가 쑤시고 저리는 병(습비 濕痺)과 임질을 치료하고 오줌이 잘 나가게 하며 기를 돕고 의지 를 강하게 하며 살찌게 하고 건강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 포도뿌리는 '달여 그 물을 마시면 구역과 딸꾹질이 멎고 임신한 후 태기가 명치를 치밀 때에 마시면 곧 내려간다'하였다. 설마 요즈음처럼 화 학비료에, 농약에 찌든 포도뿌리를 달여 먹으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63] 광대싸리

   

광 대란 연극, 판소리, 곡예 등을 직업으로 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며 흉내를 잘 내고 재담을 잘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광대싸리는 언뜻 보아 나무의 모양새가 싸리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바로 광대처럼 싸리나무 흉내를 잘도 내었다고 광대싸리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북한 이름은 '싸리버들옻'이다.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마 신성 한 노동계급의 하나인 광대를 불경스럽게 나무 이름에 붙일 수 없어서 이 나무가 속하는 대극과의 북한 명칭인 버들옻과(科)와 싸리를 합성한 이름 인 것 같다.

우 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자라는 작은 나무이고 키가 2-3m에 손가락 굵 기가 고작이나 드물게는 발목 굵기에 이르기도 한다. 잔가지가 많으며 끝 이 밑으로 늘어진다. 메추리 알 보다 약간 큰 긴 타원형의 잎이 어긋나기 로 달리고 앞면은 진한 녹색이며 뒷면은 흰빛이 돈다.

싸리나무는 하나의 잎자루에 3개씩 잎이 달리는 3출엽(三出葉)이 특징이 나 광대싸리는 잎이 하나씩 달리므로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아무리 싸리 흉내를 잘 내었어도 금세 찾아 낼 수 있다.

어린 싹을 나물로 먹기도 하며 민간약으로는 소아마비의 후유증을 치료 하는 데도 쓰인다.

그 러나 가장 큰 옛 쓰임새는 화살재료였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쓰는 전 통 화살은 흔히 산죽으로 불리는 조릿대, 신이대, 이대 등으로 만든 대나 무 화살이었다. 산죽은 종류에 따라 함경북도까지 분포하나 추운 지방으로 갈수록 품질이 나빠져싸리나무와 광대싸리를 대신 사용하였다.

광대싸리는 다른 이름으로 서수라목(西水羅木)이라고도 한다. 두만강이 동해로 빠지는 끝자락, 지금은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나진.선봉지구에 서수라(西水羅)라는 곳이 있다. 조선 세종 때 북동방면의 여진족 습격에 대비하여 개척한 육진의 출발점 경흥(慶興)땅이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 충지인 서수라를 지키는 군사들은 대나무 화살이 아니라 주로 광대싸리 화 살을 사용하였으므로 '서수라의 화살'에 쓰는 광대싸리가 바로 서수라목이 된 것이다.

고구려 미천왕 31년(330)에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광대싸리 화 살을 주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광 대싸리나 싸리나무를 화살대로 쓴 반면에 통일신라와 고려로 이어지면서는 주로 대나무 화살을 사용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신라 경명왕2년(918)에 후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축 하하고 공작부채와 죽전(竹箭)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 뒤편으로 돌아가면 작은 개울에 아담한 돌다리가 걸쳐있고 바로 건너는 독재정권시절의 유명한 '30경비사' 입구가 보인다. 그 바로 옆에 궁궐 내에서는 가장 큰 광대싸리가 겁도 없이 자리 잡고 있다. 권력이 총 구가 아니라 화살에서 나오던 시절에는 꽤나 대접을 받았을 것이나 지금은 그냥 '잡목'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26] 석류

   

중 국의 한 무제 때인 기원전 126년 장건(張騫)은 13년간에 걸친 서역(西 域) 순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석류를 처음 가져왔다. 이후 중국에 널리 퍼졌고 아름다운 꽃과 독특한 열매 때문에 수많은 시가(詩歌)의 소재가 되 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동국이상국집에 등장하고 고려자기의 문양으로 도 쓰인 것으로 보아 고려 초 이전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석 류꽃은 꽃받침이 발달하여 몸통이 긴 작은 종(鐘)모양을 이루며 끝이 여러 개로 갈라지고 6장의 꽃잎이 진한 붉은 빛으로 핀다. 이런 꽃모양을 보고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은 '짙푸른 잎사귀 사이에 피어난 한송이 붉 은 꽃(萬綠叢中紅一點)...'이라고 노래하였다. 석류꽃의 아름다움이 오늘 날 우리가 흔히 뭇 남성 속의 한 여인을 말하는 '홍일점'의 어원이 된 것 이다.

석류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은 아이에서 어른까지 차츰 커져가는 음낭과 크기나 모양이 닮았다. 석류꽃과 열매의 이런 특징들은 다산(多産)의 의미 와 함께 음양의 상징성이 있어서 옛 여인들의 신변 잡품에 여러가지로 쓰 였다.

조 선시대 귀부인들의 예복인 당의(唐衣), 왕비의 대례복, 골무, 안방가 구 등에 석류문양이 단골 메뉴로 들어갔다. 또 비녀머리를 석류꽃 모양으 로 새긴 석류잠(石榴簪)을 꽂았는가 하면 귀부인들이 차고 다니던 향낭(香 囊)은 음낭을 상징하는 석류열매 모양으로 만들었다.

석류는 중국이나 우리의 역사 속에만 등장하는 꽃이 아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Exodus 28장33절)에는 대제사장이 입을 예복의 겉옷 가장자리에 석류를수놓고 금방울을 달았다는 내용이 있다. 포도와 함께 석류는 성서 에도 여러번 등장하며 솔로몬 왕은 석류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종교화(宗敎花)에서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로서 묘사되기도 하며 15세기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 보티첼리의 '성모의 석류'의 소재가 되 기도 한다.

인도의 전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자기 새끼를 1천명이나 가진 마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잔인하게도 사람들의 아이를 보기만 하면 거 침없이 잡아먹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엄마들은 부처님에게 달려가 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부처님은 수많은 마귀의 새끼 중에 딱 한 마리만을 골라 몰래 숨겨버렸다. 마귀는 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매면서 비로소 그 많은 자식 중에 단 한 마리를 잃었어도 마음의 쓰라림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는 아이들을 잡아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새끼를 돌려주면서 부처님은 아이 대신 석류를 먹도록 했다는 것이다.

석류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여 남부지방에 잘 자라며 높이 3-5m의 작은 나무이다. 가지가 많이 나오고 잎은 마주나며 잎자루가 짧다. 꽃은 5-6월 에 가지 끝의 짧은 꽃자루에 1-5개씩 달려 대부분 암꽃과 수꽃이 함께 핀 다. 열매는 얇은 칸막이가 된 6개의 작은 방이 있으며 종자는 새콤달콤한 독특한 맛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먹을 수도 있고 청량음료의 재료로도 사 용된다. 동의보감에는 목안이 마르는 것과 갈증을 치료하는 약재로 석류가 쓰인다고 한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66] 단풍

   

계 절은 우리에게 풍경의 변화로 다가오거나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에서 금세 알아차린다. 겨울을 바람으로 만난다면 가을은 아무래도 나뭇잎의 색 깔 변화와 함께 마주한다. 평지에는 늦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금강산의 바위틈새기 단풍나무들이 온통 붉어져 이름마저 풍악산(楓嶽山)으로 불려 지면서 설악산을 거쳐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타고 파도처럼 밀려 내려온다. 내장산에서 그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가을을 마감하면서 온통 우리의 산은 살아있는 수채화가 된다.

꿈 많은 소녀의 책갈피에서는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소년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가 있고, 아름다운 내일을 그리는 청춘에게는 내년의 푸르름을 연상하면서 가버리는 한해를 아쉬워하는 것이 단풍잎이다. 비에 젖은 후줄근한 단풍잎에서 고개 숙인 장년의 서글픔을 읽게 되고, 청소부 의 빗자루 끝에 이끌려 쓰레기통으로 미련 없이 들어가버리는 도시의 단풍 잎에서 노년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자기만 갖는 단풍의 느낌이 있게 마련이다.

단 풍이 생기는 과정을 잠깐 알아보자. 잎의 엽록소에 붙어 있던 단백질 이 아미노산으로 변하면서 함께 생성된 당(糖)이 가을엔 뿌리로 옮겨간다. 가을밤 기온이 떨어지면 당 용액이 약간 끈적끈적해져 뿌리까지 못 가고 잎에 남아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anthocyanin)과 황색계통의 카로틴(ca rotene) 및 크산토필(xanthophyll)로 변한다. 이들 성분에 따라 붉은 단풍 혹은 노란 단풍이 들고 참나무처럼 갈색 단풍은 더 복잡한 생화학적인 반 응으로 만들어진다.

단풍은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준비로 애지중지 키워온 잎에다 떨켜 를 만들어 과감하게 잘라버린 것이다. 냉엄한 자연의 법칙이지만 섬뜩하기 까지 하다.

가 을 단풍으로 대표되는 단풍나무 종류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나무를 포 함하여 약 20여종이 있다. 이들은 독특한 색깔의 단풍 이외에도 가지나 잎 이 정확하게 마주보기로 달리며 열매는 시과(翅果)라 한다. 잠자리 날개처 럼 생겨서 종자가 바람에 멀리 날아 갈 수 있도록 한 설계이다. 단풍나무 종류에 따라 날개의 크기나 마주보는 각도가 다르다.

흔 히 말하는 단풍나무는 잎이 5-7갈래로 깊게 갈라져 갓난이 손바닥을 펼친 것처럼 생긴 나무이다. 이와 아주 비슷한 나무에는 당단풍이라 하여 단풍나무보다 잎이 조금 더 크고 가장자리가 덜 깊게 갈라지며 9-11갈래인 것이 다르다. 또 당단풍은 보다 추운 지방에 자라므로 높은 산의 단풍은 대부분이 이 나무이다.

단풍나 무 종류는 단풍을 감상하는 것으로 용도폐기가 되는 나무가 아니 다. 옛날에는 가마, 소반 등에 이용됐고 요즈음은 피아노의 액션 부분을 비롯하여 테니스 라켓, 볼링 핀으로 쓰이며 체육관의 바닥재로는 최고급품 으로 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일부도 단풍나무 종류로 글자를 새겼다.

단풍나무가 가장 대접을 받는 나라는 캐나다이다. 꼭 단풍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목재로서, 시럽으로서 쓰임새가 나라의 국부(國富)에 크게 기 여하므로 아예 국기에 설탕단풍을 밑바탕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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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화살나무

   

이 름처럼 나뭇가지에 화살의 날개 모양을 한 얇은 코르크가 세로로 줄줄 이 붙어 있어서 화살나무는 누구라도 쉽게 찾아낸다. 흔히 보는 사철나무 와 화살나무는 가까운 집안이다. 화살나무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라 서 상록수인 사철나무와는 촌수가 먼 것 같지만 꽃이나 열매모양이 거의 비슷하여 한눈에 집안간임을 알 수 있다.

코 르크날개는 왜 달고 있을까? 나지막한 키에 새순이 맛있고 부드러워 산토끼 등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기 쉬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설계로 생 각된다. 우선 지름 5mm 정도의 얇은 날개를 보통 4개씩 달고 있으니 본래 보다 훨씬 굵어 보여 먹으려는 동물들을 질리게 만든다. 날개의 코르크성 분은 수베린(suberin)이라 하여 탄소를 22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식동 물이 좋아하는 전분이나 당분이 전혀 없으며, 퍼석퍼석하여 씹으면 소리만 요란하고 맛이라고는 '너 맛도 내 맛도' 없다. 야들야들한 먹이만 좋아하 는 녀석들이 양분도 없는 화살나뭇가지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은 너무나 당 연한 일이다. 머리 좋은 조상이 기막힌 유전자 설계를 해준 덕분에 화살나 무는 날개를 갖지 않은 형제나무들 보다 훨씬 많이 살아남았다.

한자 이름은 귀전우(鬼箭羽)라 하여 귀신의 화살 날개란 뜻이고, 혹은 위모(衛矛)라고도 하여 창을 막는다는 의미가 들어있어 모두 화살나무의 날개를 두고 한 말이다.

날개의 코르크는 한약재로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에는 '헛소리를 하고 가위 눌리는 것을 낫게 하며 뱃속에 있는 충을 죽인다. 월경이 잘나오게하고 대하, 산후어혈로 아픈 것을 멎게 한다'하여 주로 부인병에 쓰였다 한다.

사람 키보다 조금 더 자라는 정도의 관목이다. 잎은 마주나기로 달리고 타원형으로 크기는 달걀넓이만 하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이른 봄에 나오는 새순은 나물로서 먹을 수 있다.

가 을에 빨갛게 물드는 단풍은 색이 너무 고와서 진짜 단풍나무가 시샘할 정도다. 늦봄에 황록색의 작은 꽃이 피고 나면 가을에 콩알만한 열매가 황 적색으로 익는다. 열매껍질은 넷으로 갈라지고 가운데에서 긴 끝에 새빨간 육질로 쌓인 종자가 매달린다. 속에 들어있는 진짜종자는 하얗다. 특이한 모양의 날개와 가을의 붉은 단풍, 아름다운 주홍색의 루비 같은 열매를 감 상하기 위하여 정원수로 빠지지 않는다.

화살나무와 잎, 꽃, 열매 등의 모양은 거의 같으나 날개만 달리지 않는 종류에 회잎나무가 있다. 삼신할머니가 화살나무에 붙여 주었던 날개를 깜 박 잊어버려, 모양새는 꼭 같으나 한쪽은 회잎나무라는 다른 이름을 달게 되었다.

화 살나무와 모양이 약간씩 다르나 크게 보아 같은 무리에 넣는 나무에는 참회나무, 회나무, 나래회나무, 참빗살나무 등이 있다. 이들 서로간의 구 분은 열매로만 가능하며 열매가 둥글고 5개의 능선으로 갈라지면 참회나무, 5개의 짧은 날개가 있는 것은 회나무, 4개의 긴 날개가 있고 날개 끝이 약간 휘면 나래회나무, 열매에 날개가 없으며 4개의 능선이 있으나 거의 벌어지지 않는 것은 참빗살나무이다.

경북대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68] 담쟁이 덩굴

   

돌 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 줄기, 심지어 매끄러운 벽돌까지 가리지 않고 붙어서 자라는 것이 덩굴나무이다. 줄기에서 잎과 마주하면서 돋아나는 공 기뿌리의 끝이 작은 빨판처럼 생겨서 아무 곳에나 착 달라붙는 편리한 구 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담장을 잘 올라가는 덩굴나무란 긴 이름이 줄 어서 담쟁이덩굴이 되었다. 한자 표현은 돌담에 이어 자란다는 뜻으로 낙 석(洛石)이라 하였다.

동의보감에는 '작은 부스럼이 잘 삭아지지 않는 데와 목안과 혀가 부은 것, 쇠붙이에 상한 것 등에 쓰며 뱀독으로 가슴이 답답한 것을 없애고 외 상과 입안이 마르고 혀가 타는 것 등을 치료한다'고 하며 잔뿌리가 내려 바위에 달라붙어서 잎이 잘고 둥근 것이 좋다고 한다.

현 대식 건물에 담쟁이덩굴이 뒤덮이면 한결 고풍스러워 보인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을 담쟁이덩굴로 감추면 건물의 품위도 올라가고 여름에는 햇빛을 차단하여 냉방비를 30%는 줄일 수 있다 하며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버려 빛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권장할만 하다.

미국이 자랑하는 단편작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가난한 화가 지망생인 존시는 폐렴에 걸려 죽어가고 있으면 서 이웃집 담쟁이덩굴의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기의 생명도 다한다고 생각 한다. 비바람이 휘몰아친 다음날 틀림없이 나목(裸木)으로 있어야 할 담쟁 이덩굴에 마지막 잎새가 하나 그대로 붙어있는 것을 보고 다시 삶의 의욕 을 갖게 된다. 기운을 차린 존시에게 친구 수우는, 그 마지막잎새는 불우 한 이웃의 늙은 화가가 밤을 새워 담벼락에 그려 넣은 진짜 이 세상의 마 지막 잎새임을 일러주는 내용이다.

담 쟁이덩굴 잎은 가을이 되면 단풍나무 시샘하듯이 붉은 단풍이 아름답 다. 그러나 이 단풍은 단번에 잎을 떨어뜨리게 하는 '떨켜'가 잘 생기지 않으므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겨울에 들어서야 모두 없어진다. 그래서 오 헨리의 마지막잎새는 담쟁이덩굴의 잎으로는 적당한 비유가 아니었다고 부 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담쟁이덩굴이 다른 물체에 붙어서 자라는 것을 보고 비열한 식물로 비하하였다. 인조 14년(1636) 김익희란 이가 올린 상소문 에 '빼어나기가 송백(松柏)과 같고 깨끗하기가 빙옥(氷玉)과 같은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빌붙기를 등나무나 담쟁이같이 하고 엉겨붙기를 뱀이나 지렁이 같은 자는 반드시 소인일 것이요'하여 담쟁이덩굴은 등나무와 함 께 가장 멸시하던 소인배와 비유하고 있다.

오래된 줄기는 회갈색인데 발목 굵기 정도로 자라기도 한다. 잎은 어긋 나기로 달리고 넓은 달걀모양이며 끝이 3개로 깊이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 나 얕게 갈라지기도 하여 모양이 여러 가지이다. 잎의 크기는 아기 손바닥 만하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고 잎자루가 매우 길다. 꽃은 암꽃 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에 황록색으로 핀다. 열매는 작은 포도알처럼 달리고 하얀 가루로 덮여 있으며 검은빛으로 익어서 포도와 집안간임을 금 세 알 수 있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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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금으로부터 약 2억5천만년전, 우리 인류는 아직 태어날 꿈도 꾸지 않 았던 아스라이 먼 옛날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터를 잡기 시작한다. 그동안 몇 번이나 있었던 혹독한 빙하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생물이 흔적도 없 이 사라져 버렸는데도 의연히 살아남은 은행나무를 우리들은 '살아있는 화 석'이라고 부른다.

은행이란 이름은 씨가 살구(杏)처럼 생겼으나 은빛이 난다하여 붙인 것 이다. 때로는 거의 흰빛이므로 백과목, 심어서 종자가 손자대에 가서나 열 린다 하여 공손수(公孫樹),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 하여 압각수(鴨脚樹)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은 행잎은 독특한 모양새와 가을에 보는 노란 단풍의 정취만 아니라 잎에 서 추출한 에끼스로 여러 종류의 신약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혈액순환제로 유명한 기넥신, 징코민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열매는 노랗게 익으며 말랑말랑한 과육은 심한 악취가 난다. 우리가 먹는 것은 종자이고 종자껍 질이 은빛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만 자란다. 본래의 고향은 중국이고 불교의 전파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짐작만 할 뿐 언제부터 우리의 친근한 나무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년을 넘기고도 여전히 위엄이 당당할만큼 오래 사는 나무로 유명하다. 전국에는 800여그루의 은행나무 거목이 보호되고 있는데 500살정도는 명 함도 못 내민다.

살 아온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다른 나무가 갖지 못하는 태고의 신비를 고 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특별함이 있다. 우선 나무를 잘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포 속에는 독특하게 머리카락 굵기의 10분의 1정도 되는 작디작 은 '보석'이 들어 있다. 수산화칼슘이 주성분인데 현미경 아래서 영롱한 빛을 내어 은행나무에 또 하나의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명륜당의 은행나무와 곽재우 장군 생가의 은행나무 등에는 유주(乳柱)라 하여 여인의 젖무덤을 연상하는 특별한 혹이 생기기도 한다.

꽃은 봄에 잎과 함께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나무에서 핀다. 바람에 실린 꽃가루가 암꽃까지 날아가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꽃가루는 진기하게 도 머리와 짧은 수염같은 꽁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물의 정충처럼 스 스로 움직여서 난자를 찾아 갈 수 있다.

이를 알리 없는 홍만선은 산림경제에 은행나무는 암수 종자를 함께 심는 것이 좋고 그것도 못 가에 심어야 하는데, 이유는 물 속에 비치는 그들의 그림자와 혼인하여 종자를 맺는 까닭이라 하였다.

흔히 은행나무는 잎이 활엽수처럼 넓적한데 왜 소나무와 같이 침엽수에 넣느냐고 의문을 나타낸다. 엄밀히 말하여 은행나무는 침엽수라고 하기에 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나무의 세포모양을 보면 침엽수와 거의 같고 오직 한 종류밖에 없으므로 편의상 침엽수로 분류할 따름이다.

나무 색은 연한 황갈색을 띠면서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예부터 고급 나무로 널리 이용되었다. 바둑판, 가구, 상, 칠기심재 등으로 사용되었고 불상을 비롯한 각종 불구(佛具)에도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70] 감나무

돌담으로 둘러쳐진 사립문, 마당 구석의 감나무 한 두 그루, 나지막한 초가집이 옛 우리 농촌의 풍경이다. 가을이 되어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리 고 지붕 위에 달덩이 같은 박이 얹혀지면 짙어 가는 가을의 풍성함이 돋보 인다. 더더욱 수확이 끝난 감나무 가지 끝에 한 두개씩 까치도 먹고살라고 남겨 놓은 '까치밥'은 우리 선조 들의 따뜻한 속마음을 보는 것 같다.

감에는 타닌이 들어있어서 단감이 아닌 이상 그대로는 먹기 어렵다. 껍질을 벗겨 말린 곶감(乾枾)으로 먹거나 따뜻한 소금물에 담가 삭히기도 하 고 아예 홍시를 만들기도 한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곶감은 몸의 허함을 보하고 위장을 든든하게 하며 체한 것을 없애준다. 또 주근깨를 없애주고 어혈(피가 모인 것)을 삭히고 목소리를 곱게 한다'고 하였으며 '홍시는 심장과 폐를 눅여주며 갈증을 멈 추게 하고 폐와 위의 심열을 치료한다. 식욕이 나게 하고 술독과 열독을 풀어주며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을 멎게 한다'고 하여 감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중요한 약재였다.

민간에서는 감이 설사를 멎게 하고 배탈을 낫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 는데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이유는 바로 타닌 성분인데 수렴(收斂)작용이 강한 타닌은 장의 점막을 수축시켜 설사를 멈추게 한다. 과음한 다음날 아 침 생기는 숙취의 제거에도 감은 좋은 약이 된다. 이는 감속에 들어있는 과당, 비타민C 등이 체내에서 알코올의 분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갈중이' 혹은 '갈옷'이라 부르는 옷을 무명에 감물을들 여 만든다. 감물이 방부제 역할을 하여 땀 묻은 옷을 그냥 두어도 썩지 않 고 냄새가 나지 않으며 통기성이 좋아 여름에는 시원할 뿐만 아니라, 밭일 을 해도 물방울이나 오물이 쉽게 붙지 않고 곧 떨어지므로 위생적이다. 갈 옷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중국 남쪽에도 갈옷을 입은 흔적 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고의 지배를 받던 고려 충렬왕 때 전래되었던 것으 로 추측된다.

감나무의 쓰임새는 과실만에서 끝나지 않는다. 목재가 단단하고 고른 재질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굵은 나무 속에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것을 먹감 나무(烏枾木)라 하여 사대부 집안의 가구, 문갑, 사방탁자 등에 장식용으 로 널리 이용되었다. 또 골프채의 머리부분은 감나무로 만든 것을 최고급 으로 친다.

열대지방에도 감나무 무리가 자라고 있으나 과일을 맺지는 않는다. 이 중에서 흑단(黑檀, ebony)이란 나무는 마치 먹물을 먹인 것처럼 새까만 나 무이다. 그 독특한 색깔 때문에 멀리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침상가구에서 오늘날 흑인의 얼굴을 새기는 조각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고 급가구재, 조각재이다.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열매가 달리지 않을 때는 구별에 약간 어려움이 있 으나 감나무는 잎이 두껍고 작은 손바닥만하고 거의 타원형이다. 고욤나무 는 잎이 조금 얇고 작으며 약간 긴 타원형이다. 고욤은 작은 새알 만한 크 기인데 먹을 육질은 별로 없고 종자만 잔뜩 들어 있어서 식용으로는 잘 쓰 지 않고 감나무를 접붙일 때 주로 밑나무로 쓴다.

경북대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71] 오동나무

   

대중가요 오동동 타령은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로 시작되고,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이나 백낙천의 시에도 가을의 오동나무를 노래하였 다.

옛 사람들은 붉게 물드는 단풍을 보고 가을을 느낀 것이 아니라 커다란 오동잎에 투덕투덕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를 듣고 가버리는 한 해를 아쉬워 한 것 같다.

잎 은 타원형이나 흔히 5각형이 되기도 하며, 크기가 나뭇잎 한 장으로 어른의 얼굴 전체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랗다. 1천여 종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나무 중에 이보다 더 큰 잎사귀를 갖는 나무는 없다. 바람에 찢어 지기 쉽고 벌레가 눈독들일 이 커다란 잎사귀를 왜 갖고 있을까? 남보다 더 많은 햇빛을 받아 더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몸집 을 불리겠다는 속셈이다. 그래서 오동나무는 15-20년이면 쓸 만한 재목이 된다. 짧게는 40-5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나 되어야 겨우 '나무 구실'을 하는 보통의 다른 나무들이 눈 흘기고 질투할 만하다.

자 람이 빠른 나무는 대체로 단단하지 못하여 쓸모가 없다고 한다. 그러 나 이런 말은 적어도 오동나무와는 무관하다. 1년에 나이테 지름이 2-3cm 나 되는 초고속 성장을 하지만 세포 하나하나를 쓸모있게 만들어 넣을 수 있는 오동나무의 능력은 그야말로 '슈퍼 트리'이다. 그래서 자람의 속도에 비하여 훨씬 단단한 나무가 된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도 적고 잘 썩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 성질까지 있다. 당연히 쓰임새가 넓어서 장롱, 문 갑, 소반, 목침, 상구(喪具) 등 생활용품에 오동나무가 쓰이지 않은 곳이 없다. 더더욱 악기를 만들 때공명판의 기능은 다른 나무들은 감히 넘볼 수도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가야금, 거문고, 비파 등 우리의 전통악기는 오동나무라야만 만들 수 있다.

명종 15년(1559) 영천 군수 심의검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향교의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더 죄를 주자는 논 의가 있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아 간신히 면하였다. 현종 11년(1670)에도 남포 현감 최양필이 거문고 만들 재목으로 향교의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파 직 당한 기록이 있다. 가야금 만들기에 적합한 오동나무는 향교에 주로 있 었는데, 고급 관리들이 이를 탐내었다가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가문의 영광 인 벼슬마저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세 종 28년(1445)의 실록기록에는 '왕비의 상제(喪制)에 세자는 위가 둥 글고 아래는 모가 지게 한 오동나무 지팡이를 쓴다'고 하였다. 그래서 얼 마 전까지만 하여도 오동상장(喪杖)이라 하여 모친상에는 오동나무 지팡이 를 쓰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이 렇게 쓰임새가 많은 오동나무에 대한 옛 사람들의 사랑이 각별하여, 동(桐)이란 이름이 들어간 가짜 오동나무가 여럿 있다. 벽오동(碧梧桐), 자동(刺桐.엄나무), 유동(油桐), 의동(倚桐.이나무), 야동(野桐.예덕나 무), 개오동 등 오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무들도 잎만 비슷하면 모두 오동이란 접두어나 접미어를 하사받는 영광을 얻었다.

오동나무 종류에는 오동나무와 울릉도 특산인 참오동나무가 있으나 거의 구분이 안되고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주로 참오동나무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72] 벽오동

   

벽 오동나무는 봉황과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상서로 운 새로 기린.거북.용과 함께 봉황은 바로 영물(靈物)이며, 덕망 있는 군 자가 천자의 지위에 오르면 출현한다고 한다. 그밖에 뛰어나게 재주가 있 는 사람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이는가 하면 고귀하고 품위 있고 빼어난 것 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봉황은 식성이 꽤나 까다로운 새여서 벽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 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대나무는 50-60년 만에 어쩌다 꽃이 피니 식성이 고상한 것은 좋으나 자칫하면 굶어죽지 않 을까 걱정스럽다.

어 쨌든 벽오동나무는 봉황이 앉는 나무이어서 옛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어온 행복한 나무의 하나이다.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는 옛 시조 에,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내가 심는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밤중에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빈 가지에 걸려있네'라고 하였다. 태 평성대를 몰고 온다는 봉황새가 벽오동나무에 내려않기를 기원하는 애절한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식어버린 임금의 사랑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라는 해석도 한다.

그 래서 나라를 정말 사랑하였거나 적어도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여야 하 는 선비들은 그들의 모임방인 서원이나 사랑채의 앞마당에 한두 그루의 벽 오동이 필요하였다. 더더욱 이 나무의 고향이 중국이고 두보의 시에도 등 장할만큼 중국시인들의 작품에 오르내렸으니 모화(慕華)사상에 물든 선비 들이 이 나무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중부이남 지역에 심고 있으며 한 아름을 훌쩍넘길 수 있는 큰 나 무로 자란다. 잎은 어른 손바닥을 편만큼이나 크고 3-5갈래로 갈라진다. 초여름에 이르러서는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노란 빛의 작은 꽃들이 수없이 달린다.

가 을로 접어들면 익어 가는 열매의 모양이 너무 신기하다. 작고 오목하 여 마치 조그마한 장난감 보트처럼 생긴 껍질(心皮)의 가장자리에 쪼글쪼 글한 콩알 크기의 열매가 3-4개씩 붙어있다. 건드리면 금세 톡! 떨어질 것 처럼 불안정하게 보이지만 껍질이 바람에 멀리 날아가도 땅에 닿을 때까지 는 꼭 붙어있다.

벽오동 나무는 잎이 크며 오동나무와 잎이 매우 닮아 있고 줄기의 빛깔이 푸르기 때문에 벽오동(碧梧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벽(碧)자는 벽공이라 하듯이 하늘빛에 가까운 색이나 벽오동의 줄기는 녹색이 더 강하 다. 북한에서는 청오동이라 하는데, 훨씬 친근감이 있고 한자로도 청오(靑 梧) 혹은 청동목(靑桐木)이라고 하니 벽오동보다는 청오동이 더 어울린다.

옛 문헌에는 벽오동이라고 명확하게 오동나무와 구분하여 쓰지 않고 그 냥 오동(梧桐)이라고 하였다. 본초강목에서와 같이 오동은 벽오동을 말하 고, 동(桐)은 오동이라 하여 따로 설명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문헌에 는 그 구분이 엄밀하지 않았다. 빨리 자라고 악기재로 쓰이며 잎 모양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한 벽오동나무를 옛 선비들이야 복잡하게 따로 구분할 필 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는 벽오동나무와 오동나무는 사돈의 팔촌도 넘는 거의 완전한 남남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74] 모과나무

   

모 과란 나무에 달린 참외라는 뜻의 목과(木瓜)에서 온 것이다. 잘 익은 노란 열매가 크기는 물론 모양마저 참외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다. 울 퉁불퉁하게 생긴 열매의 모양을 요리조리 아무리 둘러보아도 역시 뭇 과일 중에 가장 못생겼다. 그래서 흔히 사람의 생김새, 특히 남자를 두고 좀 제 멋대로이면 모과같다는 표현을 쓴다. 옛날 영아 사망률이 두 자리 숫자에 맴돌던 시절, 우리 할머니들은 태어난 손자가 모과처럼 못생겨도 좋으니 제발 살기만 해달라고 '울퉁불퉁 모개야, 아뭇다나 굵어라'고 자장가를 불 러 주었다.

사 람을 바깥모양만 가지고 평가할 수 없듯이 모과는 그 생김새와는 달리 은은한 향기가 매혹적일 뿐더러 귀중한 한약의 재료로도 널리 쓰인다. 첫 서리를 맞고 뼈만 남은 나뭇가지에 외롭게 매달린 모과를 몇 개 따다가 서 재에라도 놓아두면 두고두고 그윽한 향기에 취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는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면서 배가 아픈 위장병에 좋으며 소 화를 잘 시키고 설사 뒤에 오는 갈증을 멎게 한다. 또 힘줄과 뼈를 튼튼하 게 하고 다리와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낫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민간약으로도 널리 쓰여 각기병, 급체, 기관지염, 토사, 폐결핵은 물론 기침을 심하게 하는 경우와 신경통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중 국이 고향인 모과나무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는 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스님이 금귤과 모과, 홍시를 손님들에게 대접하였다'는 내용이 있어서 적어도 고려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실제로심고 재배한 기록은, 세종10년(1428년) '강화부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어 습도가 높아 초목의 성장이 다른 곳보다 나 은 편이오니 모과 등의 각종 과일나무를 재배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다.

임 금이 병들었을 때 약제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선조 때도 몇 번 있었 으나 광해군 원년(1608년)의 기록은 흥미롭다. '나는 본시 담증(膽症)이 있어서 모과를 약으로 장복하고 있다. 그런데 충청도에서 쌀을 찧는다고 핑계를 대고 한 개도 올려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속히 파발을 띄워 상납하도록 독촉하여서 제때에 쓸 수 있게 하라'는 내용이다.

임금이 잡숫는 모과가 떨어져 직접 교지를 내린 것도 그렇고, 하필이면 멀리 충청도의 모과를 보내라고 독촉한 것도 이채롭다.

모 과에는 사포닌, 플라보노이드류, 비타민C, 사과산, 구연산 등이 풍부 하며 향기가 좋아서 모과차나 모과주로 애용되고 있다. 깨끗이 씻은 모과 를 하룻밤쯤 그늘에 말린 다음 껍질째 얇게 썰어서 모과 2개 분량에 소주 1리터 비율로 담가 밀봉하여 2개월 정도 두면 된다.

모과나무는 중부 이남에서 주로 재배하고 있는 나무로서 키가 10여m에 달하기도 한다. 어린 가지에 털이 있으며 2년생 가지는 자갈색의 윤기가 있다. 오래된 줄기는 껍질이 비늘조각으로 벗겨지면서 매끄럽고 윤기가 흘 러 다른 나무와 구별되는 독특한 운치를 가지고 있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침처럼 뾰족한 잔 톱니 가 있으며 떡잎이 있으나 일찍 떨어져 버린다. 동전크기의 꽃은 연분홍색 으로 늦봄에 피며 1개씩 가지 끝에 달린다.





개오동

   

본 래의 나무보다 격이 떨어지거나 비슷하기는 하나 다른 나무일 때 흔 히'개'자를 앞에 붙인다. 개머루, 개다래, 개산초, 개벚나무, 개살구나무, 개박달나무, 개비자나무, 개서어나무, 개옻나무 등 잠깐 생각해 보아도 개 가 들어간 나무는 10가지가 넘는다. 개오동나무는 잎이 오동나무 잎처럼 크고 꽃마저 닮았으니 오동나무와 무슨 '깊은 사연'이 있지 않나 오해를 살만도 한데 사실은 오동나무 가(家)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오동나무보다 못한 나무, 오동나무처럼 생겼으나 아닌 나무라고 알려진 것 자체가 개오동나무로 볼 때는 개자를 머리에 뒤집어 쓴 만큼 억울한 노 릇이다.

한 자 이름은 재(梓) 혹은 목각두(木角豆), 때로는 추(楸)라고도 하는데 재와 추는 가래나무를 나타낼 때도 있다. 북한 이름은 향오동나무이다. 본 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개오동나무였는데, 1992년 어느 날 김일성 주석 이"향기가 좋고 모양도 아름다운 나무를 왜 하필이면 개오동으로 부르는 가?앞으로는 향오동나무로 부르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한다.

들 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이 원산으로 중부 이남에 심는 낙엽 활엽수로 키가 20m, 지름이 한두아름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나뭇가지가 굵고 수가 적으므로 겨울에 보면 좀 엉성해 보이고 작은가지에는 잔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잎은 마주나거나 돌려나고 넓은 타원형으로 어른의 손 바닥을 완전히 편 만큼이나 넓다. 대개 3-5갈래로 얕게 갈라지고 갈라진 조각은 끝이 뾰족하다. 가장자리에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꽃은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에 가지 끝의 원뿔모양의 꽃차례 에 넓은 깔때기모양의 꽃이 여러개 달린다. 꽃은 연한 황색이고 안쪽에 짙 은 보라색 반점이 있으며 끝이 얕게 5개로 갈라지고 가장자리는 물결모양 으로 주름이 잡힌다.

꽃이 진 다음 바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는 데, 굵어질 생각은 하지도 않고 땅을 향하여 무한정 길어지기만 한다. 그것도 하나씩이 아니라 여러 개가 모여 달리며 지름이 딱 연필 굵기만 하고 길이는 한 뼘이 넘는다.

때 로는 두 뼘, 세 뼘(60cm)에 이르기도 하여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열매 이다.삭과의 한 종류인데 다이어트에 생명을 거는 아가씨들이 부러워할'빼 빼로'이다. 빼빼 열매는 다음 해에 다시 꽃이 필 때까지도 달려있어 겨 울에도 개오동나무는 금세 알아 볼 수 있다. 긴 열매가 길이로 갈라지면서 명주 같은 털을 단 종자가 나온다. 열매는 이뇨제로서 신장염.부종.단백뇨 등에 쓰인다. 아울러서 나무의 속껍질은 신경통.간염.황달.신장염 등 각종 염증약으로 처방한다고 알려져 있다.

개오동나무는 자람이 빨라 목재는 가볍고 연하다. 그러나 큰 물관세포가 나이테의 한쪽에 몰려 분포하는 환공재(環孔材)이므로 무늬가 아름답다. 오동나무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중 국에서 들어온 개오동나무 외에 1905년 평북 선천에 있던 선교사가 미 국에서 들여온 미국 개오동나무를 우리는 꽃개오동나무라 한다. 두 수종 모두 모양이 매우 비슷하나 꽃개오동나무는 잎이 갈라지지 않고 꽃이 흰색 이며 종 모양의 꽃 안쪽에 2개의 황색 선과 자갈색 반점이 있다.





75] 팥배나무

   

붉 은 팥알 같은 모양으로 달리는 열매가 마치 먹는 배를 닮았다는 뜻으 로 팥배나무란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실제 나무의 모양새나 열매의 생김 새가 배나무와는 사실 거리가 있다. 팥알나무라고 하였다면 더 정확한 이 름이 아니었나 싶다. 비슷한 이름에 콩배나무가 있는데, 굵은 콩알만한 크 기의 열매는 누가 보아도 틀림없이 배를 닮아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팥 배나무는 늦봄에 편평한 우산모양으로 작은 꽃들이 무리 지어 핀다. 이때의 새하얀 꽃도 우리의 눈길을 멈추게 하나, 역시 가을열매를 보아야 팥배나무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 팥알보다 약간 크고 붉은 열매가 10여m 가까운 제법 큰 나무에 수 천 개, 때로는 수 만개씩 매달린다. 잎이 거의 떨어진 나뭇가지사이에 파아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긴 열매자루를 달고 있는 팥배 열매가 갖는 아름다움은 가히 환상적이다. 높다랗게 달려있고 맛이 시금털털하여 잘 먹지는 않으므로 열매는 배고픈 산새와 들새들이 독 차지한다.

팥배나무의 한자이름은 감당(甘棠)이라 하는데, 본초도감의 설명을 보면 중국의 감당과 우리의 팥배나무와는 거리가 있고 오히려 콩배나무에 더 가 깝다. 그래서 당이(棠梨), 두이(豆梨)란 이름도 있다. 지금의 중국수목도 감에는 팥배나무를 화추(花楸)라 하여 전혀 다른 이름을 쓰고 있다.

중 국의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편에 보면 연나라의 시조인 소공(召 公)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다.귀족 에서부터 농사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적절하게 일을 맡김 으로써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그는 지방을 순시할 때마다 팥 배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판결하거나 정사를 처리하며 앉아서 쉬기도 하였 다. 그래서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그의 치적을 사모하여 팥배나무를 기르 고 흔히 감당이란 말을 넣어 시를 지어서 그의 공덕을 노래했다.

시 경(詩經)의 감당(甘棠)에도 '소공이 멈추신 곳이니 싱싱한 팥배나무를 자르지도 꺾지도 휘지도 말라'라는 시가 있다. 동국이상국집 '접과기(接果 記)'에도 '옛사람들도 소공이나 한선자(韓宣子)를 잊지 못하여 감당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잘 가꾸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숙종 원년(1674) 임금은 '남쪽 나라의 사람들이 팥배나무 자르기를 아까워 하였다'라는 시제(詩題)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한 것은 사기의 고사를 본 딴 것이다.

전 국에 걸쳐 자라고 참나무, 서어나무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산 어디에 서나 흔히 보는 나무이다. 껍질이나 잎에서 붉은 색 염료를 얻을 수 있다 하며 자람이 곧바르고 나무의 성질도 좋은 편이라서 간단한 기구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겨 울에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키가 10-15m에 이르기도 한 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달걀모양으로 처음에는 표면과 뒷면 잎맥 위에 털 이 있으나 점차 없어진다. 잎맥이 뚜렷하고 가장자리에는 불규칙한 이중톱 니가 특징이다.



76] 호두나무

   

호두나무의 원산지는 페르시아, 오늘날 이란을 비롯한 중동지역이다. 중 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종자의 모양이 오랑캐 나라에서 들어온 복숭아 열매를 닮은 나무란뜻으로 호도(胡桃), 호두나무가 되었다.

호 두나무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 유 청신(柳淸臣)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묘목과 열매를 가지 고 와 지금의 천안 광덕사에 심은 것이 시초라 한다. 그러나 한림별곡을 보면 '당당당 당추자(唐楸子)'란 가사내용이 있고, 태종 15년(1414)의 기 록에도 '당추자'란 말이 나온다. 당추자란 당나라(618-907)의 추자, 즉 호 두란 뜻이니 삼국시대 때 들어온 것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호두에는 지방유(脂肪油)와 단백질 및 당분을 비롯하여 무기질, 망간, 마그네슘, 인산칼슘, 철, 비타민 등이 들어있는 보양식품이라서 예부터 널 리 심었다.

비슷한 종류에는 호두나무 이외에 흔히 추자(楸子)라고 부르는 가래나무 가 있다. 자라는 지역은 호두나무가 중부 이남이며 가래나무는 반대로 중 부이북의 주로 추운 지방이다.

가 래는 호두와 비슷하나 약간 길고 좀 갸름한 열매를 달고 있다. 호두나 무가 수입종인 데 비하여 가래나무는 우리나라에 본래부터 자라던 토종나 무이다. 약 3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일산 신도시 지표조사 때도 가야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함안산성(山城) 유적지에서도 우리의 옛 생활 터에 는 가래가 빠지지 않는다.

고 려 숙종 6년(1101) 평안도 평로진(平虜鎭)관내의 추자 밭을 떼어내어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가래나무로 생각되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천안군의 토산물에 추자가 들어있다. 이 때 의 추자는 호두나무로 보아야 한다. 또 경상도에서는 추자란 바로 호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호두와 가래를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 용하지 않아서 옛 문헌을 읽을 때 약간의 혼란이 있다.

호두나무 종류는 열매를 식용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는 나무가 아니다.

옛 중국에서는 임금의 시신을 넣는 관을 재궁(梓宮)이라 하여 가래나무 로 만들었다 한다. 오늘날에도 질이 좋은 나무라고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 으며, walnut이라는 이 나무는 최고급 가구를 만드는 데 빠지지 않는다.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서 호두나무는 주로 경기도 이남에 심고 가래 나무는 중부이북의 산에 자란다. 둘 다 나무 껍질은 어릴 때는 연한 잿빛 이고 밋밋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세로로 길게 갈라진다.

잎 은 한 개의 잎자루에 작은 잎이 여러 개 달리는 복엽(複葉)인데 잎의 모양과 달리는 개수로 서로 구분한다. 작은 잎의 수가 7개 이하이고 잎 모 양이 약간 둥근 타원형이면서 가장자리에 톱니가 거의 없으며 열매가 둥글 면 호두나무이다. 작은 잎의 수가 7~17개 정도이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 으며 열매는 양끝이 뾰족한 달걀모양이면 가래나무이다.

동의보감에는 호두와 가래 모두 부스럼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인다고 기 록되어 있다.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77] 사철나무

   

'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 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 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포르노 시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영화 '거짓말'의 원작자 장정 일의 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의 일부이다.

이 처럼 사철나무는 서민들 옆에서 추운 북쪽지방이 아니면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흔한 나무이다. 사시사철 푸른 잎을 달고 있어서 사철나무란 이 름이 붙었다. 그래서 사철나무란 어느 정해진 한 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 라 잎이 늘 푸른 상록수의 순수 우리말로 포괄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사철 푸른 잎을 가지고 있는 나무도 사실은 꼭 같은 잎이 항상 그대로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잎이 떨어지는 시기가 다른 나무처럼 가을에 이르 러 한꺼번에 모두 떨어지는 것이 아닐 따름이지 조금씩 잎을 갈아치운다.

사철나무는 잎은 이름 봄, 아직 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연초록의 새 잎이 일제히 돋아나고 묵은 잎은 서서히 떨어지므로 항상 푸르게 보인다. 꽃말 '변함 없다'처럼 사철나무는 언뜻 보아 항상 그게 그거다.

철철이 유행 따라 날쌔게 옷 갈아입는 멋쟁이가 아니라 수수한 푸른 옷 을 맨날 입고 있다. 자고 나면 업그레이드 생각해야 하는 컴퓨터시대를 살 아가는 우리들에게 한결같은 사철나무야말로 마음의 고향이요 안식처다.

사철나무의 잘 나가는쓰임새 하나는 생울타리다. 여럿을 뭉쳐 심어도 싸움질 없이 의좋게 잘 살고, 주인 마음대로 이리저리 가지치기를 하여도 새로운 싹을 여기저기 뻗어내어 잘 자라주기 때문이다.

조 선시대 전통 양반가옥은 외간 남자와 바로 얼굴을 대할 수 없도록 만 들어 두는 문병(門屛)이라는 나지막한 담이 있다. 여기에는 돌담보다 흔히 사철나무 생울타리를 만든다. 이는 남향으로 지어지는 건물배치에서 본다 면 사철나무 문병은 햇빛 때문에, 들어오는 손님은 안채가 잘 보이지 않으 나 안채에서는 바깥의 손님이 얼마나 온지 몰래 알아 볼 수 있어서 좋다.

중 남부지방에 자라며 겨울에도 푸르다하여 동청목(冬靑木)이란 이름도 있다. 사람 키 보다 조금 크게 관목처럼 자라는 것이 보통이나 때로는 키 4-5m, 지름 10여cm에 달하기도 한다. 잎은 마주나고 두꺼우며 타원형으로 작은 달걀크기만 하고 양끝이 좁다. 잎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표면 에 윤기가 흐르며 짙은 초록빛이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 에 갸름한 꽃잎 4개가 정확히 마주보면서 둥글둥글한 꽃이 핀다. 열매는 굵은 콩알만하고 붉은 끼가 도는 보라색으로 익는다. 늦가을에서 겨울이 되면 열매껍질은 넷으로 갈라지고 가운데에서 길다란 실에 매달린 빨간 종 자가 나타난다.

비슷한 수종에 줄사철나무가 있다. 사철나무와 생김새가 같으나 줄기가 나무나 바위를 기어오르는 덩굴식물이다. 이외에도 잎에 백색 줄이 있는 것을 은테사철, 잎 가장자리가 황색인 것을 금테사철이라 한다.





78] 녹나무

   

이 글거리는 열대의 햇빛 아래 짙푸름을 자랑하는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아름드리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나무가 녹나무이다. 한자 이름 은 장(樟)이며 예장(豫樟), 향장목(香樟木) 등으로 불린다. 높이가 40-50 m, 지름은 장정 열 사람이 팔을 뻗어 맞잡아도 될 만큼 둘레가 15m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나무의 하나이다. 원래 자라는 곳은 열대와 아 열대이며 일본이나 중국의 양쯔강 남부에 거대한 나무가 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섬지방은 녹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북단 경계의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녹나무는 크게 자라고 목재는 비교적 단단하며 물 속에서 잘 썩지 않으 므로 옛부터 배를 만드는데 널리 쓰였다. 1991년 진도 벽파리라는 옛 항구 의 갯벌에서 길이가 19m, 중앙 지름이 자그마치 2.3m나 되는 녹나무로 만 든 송.원대의 중국 통나무배가 발굴되었으며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같은 시기의 무역선에서도 선체의 격벽(隔璧)이 녹나무였다.

일본서기에 보면 그들의 잡다한 시조신의 한 사람인 스사노 오노미고도 는 신체 각 부위의 털을 뽑아 여러 가지 나무를 만들었는데, 눈썹의 털로 녹나무를 만들고 배를 만드는데 쓰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녹나무 자원이 많은 탓도 있겠으나 선박에는 물론 여러 용도로 쓴다. 그들이 자랑 하는 백제관음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불상은 녹나무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체적인 선박재로 사용한 예는 없으나 거북선을 비롯 한 우리 전함의 외판을 보강하기 위한 재료로 녹나무가 가장 적당하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녹 나무는 배를 만드는이외에도 여러 쓰임새가 있다. 고려 원종 14년(1 273) 원나라에서 황제의 용상을 만들 향장목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10여년 뒤인 충렬왕 9년(1283)에는 특별히 탐라도의 향장목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다. 유럽까지 정벌하여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왕국을 만들었던 원나라 임금의 용상을 만든 재료가 될 만큼 녹나무는 우량재이다.

목 재에는 장뇌향(樟腦香, Camphor)이라는 일종의 방충제를 함유하고 있 어서 녹나무로 만든 옷장은 좀이 옷을 갉아먹지 않으므로, 예로부터 고급 가구재로 쓰였다. 의약용으로는 강심제로 쓰이고 무연화약의 제조 등 공업 원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제 주도에서는 육지에서의 복숭아나무와 마찬가지로 녹나무를 집안에 심 지 않는 풍습이 전해온다. 녹나무가 있으면 귀신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또 녹나무 잎은 예로부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갑자기 위급한 환자가 생 기면 녹나무 잎이 깔린 온돌방에 눕히고 불을 지핀다. 강심제로 쓰이는 장 뇌가 나와 환자에게 충격을 주므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긴 타원형인데 윤기가 있고 두꺼우며 가장자리에 톱 니가 없거나 희미한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어린 가지는 황록색이고 윤 기가 자르르하며 어긋나기로 달린다. 어릴 때는 붉은 빛이 돌므로 봄부터 여름까지 전체가 특이한 붉은 빛으로 보인다. 잎맥은 아래쪽의 3개가 가장 뚜렷하게 보이고 뒷면은 약간 희끗희끗하다. 열매는 콩알 크기 남짓하고 처음에는 초록색으로 달려 있다가 가을이 되면 흑자색으로 익는다.



79] 후박나무

   

어 마어마한 재산을 미련 없이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버리고 훌쩍 이 세상 을 떠난 대원각 주인김영한 할머니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어느 신문은,"99 년 11월16일 오전 10시30분 경기 고양시 벽제화장장. 만추의 끝자락,붉은 단풍잎과 손바닥 두 개 크기의 후박나무 잎새를 밟으며..."라고 묘사하였 다.

이는 진짜 후박나무가 아니라 일본목련이다. 일본에서는 자기네 특산의 일본목련을 한자로 후박(厚朴) 혹은 박(朴)이라고 하고 진짜 후박나무는 중국이름 그대로 남(楠)이라고 한다. 일본목련을 수입하여 들여올 때 후박 나무로 번역하여버린 조경업자들 탓에 2개의 후박나무 혼란은 상당히 널리 퍼져 치료가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후박나무는 벽제에도 자라는 가짜 후 박나무 일본목련이 아니라 따뜻한 남부지방의 대표적 상록수인 '진짜 후박 나무'이다.

나무의 껍질은 후박피(厚朴皮)라 하여 한약재로 애용되었다. 덕분에 후 박나무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인가 가까이 있는 후박나무는 돈에 눈 먼 사 람들의 손에 껍질이 홀랑 벗겨지는 극형을 받고 모조리 죽어 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상당수가 후박나무로 만든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꽤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를 제 외하면 큰 나무는 구경하기 어렵다.

한 약재는 주로 중국의 약재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으나 후박나무는 우 리나라가 개발하여 사용하는 토종 향약(鄕藥)이다. 세종 5년(1422) "중국 에서 생산되지 않는 향약인 단삼,방기, 후박, 자완 등은 지금부터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 12년(1429) "중국 의사 주영중이 우리나라 향약을 검사한 결과 합격된 약재는 후박 등 열 가지이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유명한 호박엿이 옛날에는 '후박엿'이었다 고 전해진다. 후박껍질을 넣어 약용으로 후박엿을 만들어 먹었으나 언제부 터인가 호박엿이 되었다 한다. 만약 '울릉도 후박엿'으로 계속 전해졌었다 면 울릉도에는 후박나무 구경도 어려울 뻔하였으니 호박엿으로 변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후박껍질은 배가 부르고 끓으면서 소리가 나는 것, 체하고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을 낫게 하며 위장을 따뜻하게 장의 기능을 좋 게 한다. 또 설사와 이질 및 구역질을 낫게 한다"하여 위장병을 다스리는 대표적인 약재였다.

남 해안, 울릉도, 제주도 및 남쪽 섬지방에 널리 자라는 늘 푸른 큰 나무 로서 서민의 애환을 말없이 지켜볼 수 있었던 흔한 나무의 하나였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이며 아름드리가 되어도 흉하게 갈라지지 않고 매끈한 모양 을 그대로 유지한다. 잎은 짧은 잎자루에 어긋나기하며 잎맥이 비교적 뚜 렷하다. 전체 잎 모양은 긴 타원형이고 가장자리에 톱니도 없어서 언뜻 보 면 감나무 잎처럼 생겼다. 꽃은 원뿔모양으로 잎겨드랑이에 나며 많은 황 록색의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열매가 달리는 대궁은 붉은 빛이 특색이 며, 열매는 다음 해 7월에 흑자색으로 익는다.



80] 백송

   

무 엇이든 모양이 독특하면 금세 눈에 띄게 마련이다. 백송도 한번 보기 만 하면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그 모양새가 특별나다. 조금 오래된 나무 껍질은 얼룩덜룩 흰 무늬가 섞여 있어서 흑갈색의 칙칙한 다른 나무와 달 리 너무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백송(白松), 또는 백골송(白骨松) 이라고도 하며 한글 전용을 하는 북한이름은 '흰소나무'이다.

이 나무는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의 중북부에 걸쳐 자라는 나무이다. 우 리나라에는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하여 처음 심겨지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생장이 지극히 느리고 옮겨심기가 어려운 나무로 예부터 귀하게 여겨왔다. 따라서 큰 나무는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 구내에 있는 천연기념물 8호 재동 백송은 구한말의풍 운아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집권과정을 지켜본 나무이다. 조 대비(신정왕 후.1808-1890)는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 대비가 되었다가 철종으로 이어 지자 대왕 대비로 올랐다. 조 대비의 친정 집이 있던 재동에, 왕실의 후예 이긴 하나 난봉꾼이 돼버린 이하응이 자주 드나들었고 조 대비와도 자연스 럽게 인연을 갖게 되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조 대비는 이하응의둘 째아들(고종)을 즉위하게 하여 대왕 대비로서 수렴청정을 맡았다. 차츰권 력이 흥선 대원군에게 넘어가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정복 고의 은밀한 계획이 바로 이 백송이 지켜보는 사랑채에서 진행됐다. 이무 렵 백송 밑동이 별나게 희어져 흥선 대원군은 성사를 확신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백송의 색깔이평소보다 더욱 희게되면 길조로 여기고 있다.

서 울 통의동 천연기념물 4호 백송은 비교적 최근인 1990년 7월17일 거창 한 이름이 붙은 태풍도 아닌 한 순간의 돌풍에 맥없이 넘어져 삶을 마감하 고 말았다. 당시까지 살아있던 백송 중에는 이 나무가 600여년이나 된 가 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져 왔는데 국민대학 김은식 교수가 나무의 몸통을 정밀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300살 남짓하였다고 한다. 노거수의 나이는 이 처럼 '고무줄 나이'라서 믿을 것이 못된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공교 롭게도 이 백송은 한.일병탄이 되던 1910년부터 갑자기 생장이 거의 멈추 다 시피 하였다가 해방된 45년 이후부터 서서히 정상을 되찾았다고 한다. 바로 일제강점기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억울함을 백송도 알았든지 아예 자 라지 않은 셈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신비롭다.

바 늘잎 늘 푸른 나무로서 굵기가 한아름씩이나 자라는 큰 나무이다. 껍 질의 흰 얼룩이 특징이나 어릴 때는 오히려 푸르스름하며 상당히 나이를 먹어야만 백송의 특징이 나온다. 잎은 소나무 2개, 잣나무 5개와는 달리 3개씩 모여나기하며 잎의 단면을 잘라보면 삼각형을 이룬다. 암수 같은 나 무이며 꽃은 봄에 피고 솔방울은 이듬해 가을에 익는다.

백송의 영어이름은 'white pine'이 아니라 'Lace-bark pine'이다. 껍질 에 얼룩이 생겨 있는 특징을 더 중요시하여 '얼룩소나무'로 보았기 때문이 다. 진짜 white pine은 스트로브잣나무를 가리킨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81] 회양목

   

회 양목은 경북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에 걸치는 석회암 지대에 주 로 자란다.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회양목이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옛 이름은 황양목(黃楊木)이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회양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손톱크기 남짓하면서 도톰한 잎사귀가 사시사철 달리는 자그마한 나무이 다.

대 체로 사람 키 남짓한 크기가 고작이나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키가 4-5m에 이르기도 한다. 생명력이 왕성하여 사람들이 기분나는 대로 이리저 리 잘라대어도 금세 가지를 뻗어낸다. 기본형인 둥근 모양에서 날아가는 새 모양까지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다듬어도 한마디 불평이 없다. 그래서 널따란 잔디밭의 가장자리나 고급주택의 오솔길을 보기좋게 장식하 는 나무로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옛 쓰임새는 이런 조경수가 아니라 연약해 보이는 자그마한 줄기 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태종10년(1410) 점을 치는 도구로 황양목을 사용하 기로 결정한 내용을 비롯하여 태종13년(1413)에는 의정부에서 호패법을 의 논하여 4품 이상에는 전부터 사용하던 녹각 대신에 황양목으로 바꾸어 쓰 도록 하였다. 세종25년(1443)에는 동궁을 출입하는 표신(標信)을 황양목으 로 만들게 하였다.

이 후 조선조 중.후기에 들어와서는 고급 목판활자의 재료로 많이 쓰이면 서 수요가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36년(1603) 춘추관에서 실록판각에 쓸 주자가 부식되어 새겨서 보충하려는데 황양목이 매우 부족하다 하였고,정조20년(1796)에는 정리주자(整理鑄字)를 완성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내용 중에 '임자년에 황양목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자를 새기 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회양목은 이 외에 도 도장을 새기는 도장나무로도 유명하다. 관인이나 옛 선비들의 낙관도 대부분 이 나무이다. 또 빗, 장기 알 등으로도 널리 쓰였다.

오 늘날 정원수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정도의 작은 나무가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오를 만큼 귀중하게 쓴 이유는 무엇인가? 회양목 은 다른 어떤 나무도 갖고 있지 않은 독특한 세포구조를 자랑하기 때문이 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물을 운반하는 물관세포가 크고, 나무를 지탱해주 는 섬유세포는 작다. 그러나 회양목은 물관과 섬유의 지름이 거의 같은 유 일한 나무이다. 물관의 지름이 0.02mm 정도로 0.1-0.3mm나 되는 다른 나무 보다 훨씬 작고, 나이테 전체에 걸쳐 고루 고루 분포하므로 나무질이 곱고 균일하며 치밀하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구하기 쉽고 가공하기 쉬우면서 마 치 상아나 옥에다 글자를 새겨둔 것과 다름이 없는 뛰어난 재료이다.

또 황양목이란 옛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노르스름한 나무 색이 고 급재료로서의 품격에 어울린다. 그러나 회양목은 크게 자라지도 않고 또 자람의 속도도 너무 늦어 큰 목판이나 많은 양이 필요할 때에는 쓸 수 없 다. 이럴 때는 벚나무나 배나무를 회양목 대신 쓴다.

경북대 .sjpark@knu.ac.kr">임산공학과교수.sjpark@knu.ac.kr





82] 겨우살이

   

남 의 눈치 안보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흔히 얌체라 고 한다. 인간사회의 얌체족이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을 속이듯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멍청한 박새가 한 계절 내내 헛고생하게 만드는 새 나라의 얌체다. 나무나라 제일 얌체는 누구일까? 나무의 생태를 조금 아는 이라면 오래 생각할 것 없이 겨우살이라고 할 것이다.

겨 우겨우 간신히 살아간다 하여 겨우살이, 겨울에도 푸르므로 겨울살이 가 겨우살이로 되었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한자로 동청(凍靑)이라고 하 니 겨울살이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주로 참나 무 종류의 큰 나무 위 높다란 가지에 붙어 자라는 '나무 위의 작은 나무' 로서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까치집이다. 모양은 풀 같지만 겨울에 어미나 무의 잎이 다 떨어져도 혼자 진한 초록빛을 자랑하는 늘푸른 나무로 분류 된다.

가 을이면 굵은 콩알만한 노오란 열매가 달린다. 가을 햇살에 비치는 열 매는 영롱한 수정처럼 아름답다. 열매는 속에 파란 씨앗이 들어있고 끈적 끈적하며 말랑말랑한 육질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산새 들새가 숨 넘어 가게 좋아하는 먹이다. 배불리 열매를 따먹은 산새가 다른 나뭇가지에 앉 아서 콧노래와 함께 '실례'를 하면 육질의 일부와 씨앗은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배설된다. 마르면서 마치 방수성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단단하 게 가지에 고정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끄떡없이 씨앗을 보관할 수 있 는 철저한 얌체 유전자 설계를 해둔 것이다.

알맞은 환경이 되면 싹이 트고 뿌리가 돋아나면서 나무껍질을 뚫고 살 속을 파고 들어가 어미나무의 수분과 필수 영양소를 빨아먹고 산다. 그래 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든지 잎에서는상당한 양의 광합성을 하여 모자라는 영양분을 보충해가면서 삶의 여유를 즐긴다.

사 시사철 놀아도 물 걱정, 양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세찬 겨울바 람이 아무리 몰아쳐도 겨우살이는 흔들흔들 그네 타는 어린이처럼 마냥 즐 겁다. 땅에다 뿌리를 박고 다른 나무들과 필사적인 경쟁을 하는 어미나무 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 터질 노릇이다. 뽑아내 버릴 수도, 어디다 하 소연할 수단조차 없으니 고스란히 운명처럼 당하고만 살아간다.

우 리나라에서는 특별히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나 미국이나 유럽 에서는 크리스마스 축하파티가 열리는 방 문간에 걸어 놓고 이 아래를 지 나가면 행운이 온다고 생각한다. 또 마력과 병을 치료하는 약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겨우살이가 붙은 나무 밑에서 입맞춤을 하면 반드시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 국 어디에서나 자라며 가지는 Y자처럼 두 갈래로 계속 갈라지고 끝에 두개의 잎이 마주나기하며 가지는 둥글고 황록색이다. 키가 1m에 이르기도 하나 대체로 50-60cm 정도로 가지가 얼기설기 뻗어 까치집 모양을 한다. 잎은 피뢰침처럼 생겼고 진한 초록빛으로 도톰하고 육질이 많으나 다른 상 록수처럼 윤기가 자르르 하지는 않다. 꽃은 암수 딴 나무로 이른봄 가지 끝에 연한 황색의 작은 꽃이 핀다.

겨우살이 종류에는 이외에도 남쪽 섬의 동백나무에 주로 기생하는 동백 나무 겨우살이를 비롯하여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꼬리겨우살이 등이 있다. 겨우살이 종류는 모두 약재로 쓰였으나 뽕나무에 기생하는 꼬리겨우살이를 상상기생(桑上寄生)이라 하여 특히 귀중한 약재로 이용하였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83] 오리나무

   

"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두메산골 영(嶺) 넘어 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서정시인 김소월의 시'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처럼 오리나무는 두메 산골짝, 산새도 쉬 어넘어가는 고갯마루 등지에서 사람들과 애환을 같이 한 흔한 나무이었다.

옛날 사람들이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로 5리에 한 나무씩 심어서 오리나 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슷한 이름에 10리마다 심었다는 시무나무가 있다. 몇 천년이 가도 썩지 않은 화분(花粉)을 분석한 결과, 안압지 주위에는 오리나무가 심겨져 있었으며 전국의 습한 지역 대부분에 는 오리나무가 널리 자라고 있었다. 오늘날 습지로 남아있는 서울 둔촌동 자연 늪, 울산 정족산의 무제치늪 등 늪의 주변에도 오리나무가 많아 습한 땅을 좋아하는 나무임을 알려주고 있다.

오 리나무는 옛 사람들이 나막신을 만드는데 흔히 이용하였다. 소나무도 흔히 쓰였지만 오리나무를 더 좋아하였다. 아주잡록(鵝洲雜錄)에는 나막신 이 선조33년(1600) 남방에서 들어와 전국에 퍼졌다 한다. 우리나라 나막신 이 일본 나막신과 달리 통으로 만들어진 모양이 네덜란드 나막신과 아주 닮아 있다. 그래서 하멜 일행이 우리나라에 머문 효종4년(1653)에서 14년 간에 걸쳐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 외 탈의 재료, 특히 하회탈은 꼭 오리나무로 만든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게도 200년 된 오리나무로 만든 하회탈을 선물하였다 한다. 경남 창 원시 다호리에서 출토된 가야초기 고분에서 나온 칠기심의 재료도 오리나 무였다. 가볍고 연한 듯 하면서도 질기고세포의 크기가 들쭉날쭉하지 않 아 나무 공예품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었다.

나무 자체만 아니라 껍질이나 열매에 포함된 타닌을 이용하여 붉은 색이 나 흑갈색으로 물을 들이는 천연염료로 쓰였다. 한자 이름 적양(赤楊)은 붉은 물감이 나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전 국 어디에나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큰 나무로서 지름이 한 아 름에 이르기도 한다.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서 공중질소를 고정하 므로 웬만큼 척박한 땅에도 잘 자랄 수 있다. 그래서 흘러내리는 토사를 고정하는 사방(砂防)사업에는 빠지지 않는다.

나무 껍질은 흑갈색이며 잘게 세로로 갈라져 굵은 비늘모양이다. 잎은 양면에 광택이 있는 긴 타원형으로 뒷면 잎맥 겨드랑이에 적갈색 털이 모 여난다. 잎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열매는 작은 솔방울 과 아주 닮아있고 겨울을 지나 이듬해 잎이 다 필 때까지도 그대로 달려있 다.

예로부터 쓰임새가 많았던 진짜 오리나무는 자꾸 잘라 써버렸으므로, 요 즈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오리나무는 둥근 잎을 가진 물오리나무나 물갬나무가 대부분이다. 진짜 오리나무보다 나무의 성질이 훨씬 못하다.

중 부이북의 좀 추운 지방에는 두메오리나무란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나 무가 있다. 고향이 두메산골이 아닌 나무가 어디 있으련만 이 나무에만 두 메란 접두어를 붙인 사연이 궁금하다. 약간 건조한 지역이나 옛날에 황폐 하였던 지역에는 일본에서 들여와서 심어둔 사방오리와 좀사방오리가 자란 다. 오리나무와 잎 모양이 비슷하나 잎맥의 수가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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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황칠나무

   

우 리의 전통 칠은 옻나무 진에서 얻어지는 옻으로 짙은 적갈색을 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지금은 없어져 버린 칠 공예의 한 기법으로 황금빛이 나는 황칠(黃漆)이 있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황금의 빛을 낼 수 있는 황칠은 바로 황칠나무에서 얻어진다. 황금으로 도금한 것 같다하여 아예 금칠(金漆)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황칠은 중국 쪽에 더 잘 알려졌다. 계림지(鷄林志)라는 고문헌 에, '고려 황칠은 섬에서 나고 본래 백제에서 산출된다. 절인(浙人)은 신 라칠이라고 부른다'하였으며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백제 서남해에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하여 삼국 시대부터 귀중한 특산물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황칠을 직접 구하기 어려웠던 발해는 서기 777년 사신 사도몽을 보내어 일본 황칠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고 려에 들어서는 원나라에서 황칠을 보내 달라는 요구가 여러 번있었다. 원종 12년(1271) 왕은 '우리나라가 저축하였던 황칠은 강화도에서 육지 로 나올 때 모두 잃어버렸으며 그 산지는 남해 바다의 섬들이다. 그런데 요사이는 역적들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으니 앞으로 틈을 보아서 가져다가 보내겠다. 우선 가지고 있는 열 항아리를 먼저 보낸다. 그 역즙(瀝汁)을 만드는 장인은 황칠이 산출되는 지방에서 징발하여 보내겠다' 하였으며 이 어서 충렬왕 2년(1276)과 8년(1282)에는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황칠을 가 져다 주었다.

조선왕조 때는 정조 18년(1794)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 중에 '완 도의 황칠은 근년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도 추가로 징수하는것이 해 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 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 다.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규제하여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황칠은 이와 같이 200여년 전만 하여도 널리 재배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백성들이 심기를 꺼려하여 차츰 맥이 끊겨 버렸 다. 최근 전통 황칠을 다시 살리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남 부 지방의 해변과 섬 지방에 자라는 늘푸른 넓은 잎 큰 나무로 키가 15m에 이른다. 껍질은 갈라지지 않아 매끄럽고 어린 가지는 초록빛이며 윤 기가 난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처음에는 3-5개로 갈라지나 나이가 먹으면 긴 타원형에 톱니가 없는 보통 모양의 잎만 남는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6월에 흰빛으로 피며 타원형의 열매는 30~40여개씩 공처럼 모여 달리 고 10월에 검은빛으로 익는다.

이 나무에는 우리나라 천 여종의 나무에서 오직 자기만 갖고 있는 '수평 수지구(水平樹脂溝)'라는 세포가 특징이다. 황칠이 고귀한 만큼이나 나무 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황 칠은 음력 6월쯤 나무줄기에 칼로 금을 그어서 채취한다. 매우 적은 양이 나오며 처음에는 우유 빛이나 공기 중에서 산화되어 황색이 된다. 황 칠을 하면 금빛을 띠고 있으면서도 투명하여 바탕의 나뭇결을 생생하게 보 여준다. 금빛을 더욱 강하게 내기 위하여 먼저 치자 물을 올린 다음 황칠 로 마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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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인동덩굴

   

인 동덩굴은 추운 지방에서는 겨울 동안에 잎이 떨어져버리나, 따뜻한 남 쪽 지방으로 내려가면 때늦게 돋아난 잎이 파랗게 그대로 겨울을 넘긴다. 그래서 추운 겨울을 참고 이겨낸다는 뜻으로 인동(忍冬), 풀이 아닌 나무 종류지만 때로는 인동초(忍冬草)란 이름으로 부른다.

인동덩굴의 이런 특성은 흔히 핍박받는 정치인에 비유된다. 야당총재 시 절의 김대중 대통령은 "나는 혹독했던 정치 겨울 동안 강인한 덩굴 풀 인 동초를 잊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 인동초가 될 것을 약속 합니다"라고 자신의 인생역정을 인동덩굴에 빗대었다.

인 동덩굴은 인류의 미술 발달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식물이다. 보통 덩 굴이 비꼬여 뻗어나가는 모양의 무늬를 흔히 당초(唐草)무늬라고 하는데, 이런 무늬에 쓰이는 대표적인 식물이 인동덩굴이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의 로터스(lotus)무늬에서 유래되어 희랍, 인도를 거쳐 중국과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주요 건축물은 물론 벽화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예로부터 너무나 널리 쓰인 무늬이다. 고구려 강서대묘의 천장 굄돌과 발해의 도자 기 그림을 비롯하여 와당(瓦當), 백제 무령왕의 관식(冠飾), 말다래로 쓰 이는 천마총의 천마도 둘레에도 역시 인동무늬가 들어있다. 고려와 조선에 들어서도 여전히 인동무늬는 널리 쓰였다.

순수 우리말은 겨울을 살아서 넘기는 덩굴이란 뜻으로 '겨우살이넌출'이 나 문헌의 기록은 한자로 쓸 수 있는 인동, 혹은 금은화(金銀花)로 많이 불렸다. 꽃이 처음 필 때는 흰색이었다가 며칠 지나면 노랗게 된다. 그래 서 피는 시기가 똑 같지 않은 인동덩굴의 꽃은 노란 꽃과 흰 꽃이 섞여있 다. 흰 꽃을 은꽃, 노랑꽃을 금꽃으로생각하여 금은화라 하였다. 이외에 도 노옹수(老翁鬚)와 통령초(通靈草)로 불렀으며 금은등, 노사등, 밀보등, 좌전등이라고도 하니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름이 많다. 영어 이름은 꽃 모양에 빗대어 'trumpet flower'라고 한다.

꽃핀 인동덩굴은 노랗게 변한 꽃잎을 따다가는 그늘에 말려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인동차(茶)가 된다. 향기에다 멋을 즐길 수 있는 차인데 사실은 귀중한 한약재이다.

고 려 의종 20년(1166)에 환관이 임금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금은화를 대 령하였다하며 조선 정조 10년(1785) 앓아 누운 세자에게 인동차를 올려서 "세자의 피부에 열이 시원하게 식고 반점도 상쾌하게 사라졌다"고 한다. 또 순조 14년(1813) 의관이 임금을 진찰하고 "다리에 약간 부기가 있는 듯 하므로 인동차를 드시게 하였다"는 등 임금이 애용한 약용차이다.

그 러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애민편 관질(寬疾)을 보면 유행하는 돌 림병에 금은화 처방이 나오고 본초강목에도 오싯병(五尸病)이라는 무서운 병을 고치는 약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서민들의 질병 치료에도 늘리 쓰였 다. 그 외에 여름철 청량음료로 이용되거나 신장에 좋다는 인동술을 만들 기도 한다.

우 리나라 어디에나 자라며 줄기가 길게 뻗어 다른 물체를 왼쪽으로 감으 면서 올라가서 넓게 퍼진다. 잎은 마주나기하고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5-6월에 피고 2개씩 쌍을 이루어 잎겨드랑이에 달리며 향 기가 있다. 꽃 통은 가늘고 길며 끝에서 2개로 갈라져 뒤로 젖혀지고 털이 촘촘히 나있다. 열매는 둥글며 가을에 검게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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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개암나무

   

정 월 대보름의 세시풍속에 부럼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호두, 가 래, 은행, 밤 등의 단단한 열매를 깨무는 관습인데, 1년 동안 무사태평하 고만사가 뜻대로 되며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기원한다. 요즈음은 잘 알려 져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개암도 끼인다. 개암 열매는 달고 고소하며 맛이 그만인데다 껍질이 단단한 것이 부럼에 들어가는 이유이다. 우리의 전래 동화인 혹부리영감 이야기에도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치는 때에 맞춰 개암 을 깨물었다가 소리가 너무 커서 들키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고 려사 지(志)의 길례대사에 보면 '제사를 지낼 때 제 2열에는 개암을 앞에 놓고 대추, 흰떡, 검정떡의 차례로 놓는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 에 들어오면서 연산 때까지도 밤과 함께 제수의 필수품으로 쓰였고 세금으 로도 거둬들였다. 그 후는 개암이 제사에 쓰였다는 기록은 없고 중종.명종 실록 등에 우박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작은 것은 개암이나 콩알만하다'는 내용 정도이다. 그나마 인조 4년(1626) 이후는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를 보아 오늘날 개암을 거의 쓰지 않은 것과는 달리 조선조 중기까지만 하여 도 먹는 열매로서 널리 애용되었던 것 같다.

전국 어디에서나 자라며 잎이 떨어지는 넓은 잎 작은 나무로서 키가 4~ 5m가 고작이다. 잎은 넓은 타원형인데 어린 아이 손바닥만하고 끝 부분이 약간 뭉툭하면서 몇 개로 갈라지며 잔 톱니가 있다. 3월쯤이면 한 나무 에 암꽃과 수꽃이 같이 핀다. 약간 뾰족뾰족한 붉은 색 암꽃은 가지 끝 에 새순처럼 핀다. 열매는 도토리처럼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새알보다 조 금 작은데,잎처럼 생긴 받침으로 귀중품을 곱게 싸듯이 둘러싼다. 처음에 초록색이던 열매는 익어가면서 갈색으로 변하여 딱딱해진다.

개 암나무의 열매는 한자로는 진자(榛子) 혹은 산반율(山反栗)이라 하여 '구황촬요(救荒撮要)'나 '증보산림경제'에는 흉년의 먹거리로 개암이 빠지 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보면 '개암나무 열매는 기력을 돕고 장과 위를 잘 통하게 하며 배고프지 않게 한다. 또 식욕이 당기게 하고 걸음을 잘 걷게 한다'고 하여 약재로도 귀중하게 쓰였다. 개암에는 지방유, 단백질, 당분 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군것질거리로도 쓰였다. 밤과 맛이 비슷하면서도 더 고소하다. 강장 효과가 있어 몸이 허약하거나 식욕부진일 때 먹으면 좋고 눈을 밝게 해주는 성분이 들어 있다.

또 기름을 짜서 식용유로 쓰거나 등잔불을 밝히는 기름으로도 쓰였는데, 북부지방 일부에서는 잡귀를 쫓아내는 의미로 특별히 첫날밤의 신방에 개암기름 불을 켰다고 한다. 개암은 우리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 서도 식용유로 널리 쓰고 있다.

요 즈음의 산에서 흔히 만나는 개암나무는 앞에 설명한 진짜 개암나무가 드물고 참개암나무가 더 많다. 참개암나무는 개암나무와 잎의 크기는 비슷 하나 갸름한 달걀모양이며 잎의 윗 부분에 큰 겹톱니가 생기고 잎의 끝은 갑자기 꼬리처럼 뾰족해진다. 열매의 모양은 씨가 들어있는 부분이 굵고 통처럼 생겼는데 착 달라붙은 스판 바지를 입은 미녀의 볼기짝에서 흘러내 린 각선미를 연상케 한다. 작은 받침 잎으로 열매를 감싸는 진짜 개암나무 와는 전혀 다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87] 계수나무

   

중국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항아(姮娥)는 불사약을 가지고 달나라로 도망 가서 달의 신이 된다. 처음 두꺼비로 알려졌다가 차츰 계수나무와 옥토끼 가 살고 있다는 지금의 전설로 바뀌었다.

우 리 조상들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계수나무 아래서 떡방아 를 찧고 있는 토끼의 모습을 아련히 그리면서 천년만년 오순도순 평화롭게 사는 이상향을 상상하며 살았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은 혼란스 러우면서도 달나라 이야기는 어른이고 어린이고 모두의 낭만이며 꿈이었 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 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라는 윤극영의 동요는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였다. 그러나 19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면서 동요에서처럼 계수나무도, 옥토끼도 정말 서쪽나라로 멀 리 가버렸다.

한자로 계(桂) 혹은 계수(桂樹)라고 하는 계수나무는 쓰는 이에 따라 달 라지는 '이상한 나무'이다. 민화에 토끼와 함께 등장하고 동국이상국집을 비롯한 시가집에 나오는 계수나무는 실제의 어느 나무라기보다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는 막연한 동경의 나무일 따름이다.

세 종 16년(1432)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이 임금님께 올린 감사의 글을 보면 "외람되옵게도 저 구름 사이의 계수나무 가지를 꺾게 되어, 궁궐에서 이름이 불리게 되고..."하는 내용이 있다. 이는 더 없이 높은 곳에 있는 계수나무가 벼슬을 얻었을 때의 상징나무이었음을 말한다. 대부분의 옛 계 수나무는 이처럼 여러 가지 의미가 부여된 상상의 나무로만 존재한다.

다음은 한약재나 향신료로 쓰이며 중국남부에서 실제로 자라는 계수나무 이다.

톡 쏘는 매운 맛을 내고 껍질을 벗겨 계피(桂皮)로 쓰는 계피나무(cass ia)와 한약재로 주로 이용되며 약간 단맛과 향기가 있는 육계(肉桂)나무 (laureirii)가 있다. 이들의 껍질 시나몬(cinnamon)은 향신료로 유명한데, 나무 이름에 한 자씩 들어가 있는 '桂'자 때문에 이 또한 계수나무가 되었 다.

그리 스 신화에 나오는 하신(河神)의 딸 다프네(Daphne)는 아폴론에 쫓기 다 다급해지자 나무로 변해버린다. 중국 사람들이 이를 번역할 때 월계수 (月桂樹)라 하였다. 한편 유럽남부지방에서 자라며 'Noble laurel'이란 실 제의 나무도 다프네와 같은 월계수란 이름을 붙였다. 잎을 향료로 사용하 며 승리의 표시로 월계관을 만드는 이 나무와 다프네의 월계수 역시 '달나 라에서 자라는 계수나무'로 알려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계수나무란 이름으로 만나는 나무는 계피나무와 월계수는 물론 달나라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개의 나무이다. 일제강점 기인 1900년대에 수입하여 심기기 시작한 일본의 나무로서 그들 말로 '가 쯔라'가 대부분이다. 계수나무 종류는 일본 계수나무 외에 중국 원산의 한 종류가 더 있다.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 큰 나무로서 높이 20m, 지름 1m에 이른다. 나무 껍질은 갈색이고 세로로 얇게 갈라진다. 잎은 작은 손바닥만한 크기에 거 의 완벽한 하트형이 특징이다. 표면은 초록빛, 뒷면은 흰빛이며 가장자리 에 둔한 톱니가 있다. 잎자루는 붉은 빛이 돌고 마주나기하며 가을에는 노 란 단풍이 아름다워 중부 이남에서 관상용으로 흔히 심는다. 꽃은 암수 딴 나무로서 각 잎의 겨드랑이에 한개씩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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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대추나무

   

계 획 없이 주위사람에게 돈을 빌려 여기 저기 빚이 걸리면 "대추나무 연 걸리듯 한다"고 말한다. 겨울 대추나무는 잔가지가 많고 가시까지 달려 빚 쟁이에게 줄 돈 뭉치처럼 걸핏하면 연이 잘 걸렸던 탓이다. 그 만큼 인가 근처에 흔히 심었고 열매에서 나무까지 쓰임새가 너무나 광범위하다.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부적을 만들어 지니면 불행을 막아주고 병마가 범 접할 수 없는 상서로운 힘을 갖는다고 믿었다. 이는 나무가 벼락을 맞을 때 번개의 신이 깃들여져 잡귀가 달아나며 나무의 색깔이 붉고 가시까지 달렸으니 못된 귀신이 범접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재앙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단단해지기까지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벼락은 수분 많은 키다리 나무의 몸체를 순간적인 전기의 도체(導 體)로 이용하였을 따름이지 나무 재질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벼락 을 맞지 않아도 너무나 단단한 대추나무에 벼락까지 맞았으니 더더욱 단단 해지지 않았겠느냐는 착각일 따름이다.

전 해오는 우리의 세시풍습에 가수(嫁樹)라 하여 말 그대로 '나무 시집보 내기'가 있다. 설날이나 보름에 Y자로 벌어진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남근 을 상징하는 적당한 돌을 힘껏 끼워 둔다. 지름이 커지면서 나무껍질이 눌 리게되어 영양분들이 다른 줄기나 뿌리로 가는 것을 막고 과일 쪽으로 많 이 가라고 이런 풍속이 생겼다. 선조들의 기막힌 경험과학은 오늘날 환상 박피(環狀剝皮)라 하여 과일을 많이 달리게 하는 한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나무에 달리는 열매 중에 대추만큼 쓰임새가 넓은 열매도 없다. 설기떡 과 증편을 비롯한 떡, 계절 음식인 절식(節食), 별식으로 먹는 찰밥, 십전 대보탕 등 대부분의 탕제(湯劑)에도대추가 빠지지 않는다. 그 외 염병이 나돌 때 대추를 실에 꿰어 사립문에 걸어두는 것이나 대추씨앗을 입에 물 고 다니게도 한다. 이것은 붉은 대추가 귀신을 물리친다고 여긴 때문이다.

폐 백 드릴 때 신부가 펼친 치마에 시부모가 대추를 던져주는 것도 대추 나무처럼 아들 딸 많이 낳으라는 염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금처럼 던진 것이 아니었다. 세종17년(1435) 1품으로부터 서민들까지의 혼례의(婚 禮儀)에 이르기를, 폐백을 드릴 때 "신부가 시아버지께 절하고, 올라가 대 추와 밤이 담긴 소반을 탁자 위에 드리면, 시아버지가 이를 어루만진 다음 에 시중드는 이가 들여간다"고 하였으며 시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에 대추나무를 심기 시작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이나 중국의 시 경이나 주역에 벌써 대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심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나 조선조의 왕실 제사에 대추는 빠지지 않으며 오늘 날 제사상의 앞줄을 차지하는 조율시이(棗栗枾梨)의 첫 과일이다.

왕안석의 조부(棗賦)에 보면 대추나무에 네 가지 득이 있다고 했다. 심 은 해에 바로 돈이 되는 득, 한 그루에 많은 열매가 여는 득, 나무의 나무 질이 단단한 득, 귀신 쫓는 득이 그것이다. 대추나무의 특징을 잘 나타낸 말이나 열매가 당년에 달린다는 것은 과장이고 3-4년은 기다려야 한다.

북한의 아주 추운 지방 이외에는 전국에 걸쳐 자라는 낙엽활엽수로 키가 10-15m, 지름이 거의 한 아름에 이를 수 있는 큰 나무이다. 비슷한 종류로 는산에 관목상태로 자라는 한약이름 산조인(酸棗仁)이라는 묏대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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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동백나무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 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 었오."

60 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대부분 꽃은 질 때 꽃잎이 한 장 씩 떨어지나 동백꽃은 꽃 전체가 통째로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짓밟힌 순결을 상징하며 노래처럼 사랑에 배신당한 비련의 여인과 비유되기도 한다. 프랑스 뒤마의 소설 춘희(椿姬)는 원래제 목이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너무나 유명해진 비올레타가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보아 서양인 들에게도 동백은 역시 비극의 꽃이었다.

동 백나무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늘푸른나무로서 다른 나무들이 활동 을 멈추고 겨울넘기기에 여념이 없는 1-2월에 벌써 진초록 바탕에 타는 듯 붉은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래서 동백꽃은 예부터 시조나 노래가사의 단 골메뉴이었다. 멀리는 동국이상국집에 동백화(冬栢花)라는 제목의 시가 실 려있으며, 고려 충숙왕 때는 채홍철이란 이가 동백나무 노래를 지어 죄를 면하였다 한다. 조선왕조 때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라 하여 뭇 시인 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근세에는 미당 서정주와 신석정의 시에서 동백꽃이 상징하는 슬픔과 아픔을 읽게된다.

동백나무는 흔히 숲을 이루어 자란다.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여수 오동도,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지, 해운대의 동백섬 등 알려진 숲이 많다. 꽃이 질 때면 이런 곳의 개울은 온통 동백꽃잎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버린 다. 붉은빛이 주는 섬뜩함에서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하여도 힘겹게 살아 가던 동백마을 사람들의 삶을 읽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겨 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는 어떻게 꽃가루받이를 할까? 추운 겨울 동안 벌, 나비와 같은 곤충들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동백나무의 꿀 을 좋아하는 아주 작고 귀여운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게 해줘 이름도 생소한 조매화(鳥媒花)라 한다. 자기만 살겠다고 처절한 싸움질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생관계이 다.

동 백나무의 목재는 연한 황갈색을 띠면서 나무질이 고르고 단단하여 얼 레빗, 다식판, 장기알, 농용기구 등 다양한 생활용구의 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열매에서 짠 기름으로는 어두운 밤 등불을 밝히고 옛 여인들의 삼단 같은 머릿결을 윤기 나고 단정히 하는데 쓰였다. 단종 2년 (1453) '동백기름은 지금부터 진상하지 말도록 하라'하였고, 중종 4년(15 09) '창고에 납입하는 지방의 짙은 황색의 유동기름과 동백기름은 모두 줄 이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동백기름은 이처럼 왕실에서조차 아껴 쓰는 고급 머릿기름이었다.

자라는 곳은 해안을 타고 서쪽은 대청도, 동쪽은 울릉도까지 올라오나 주로 남쪽의 해안에 분포한다. 5-6m남짓의 적당한 크기로 자라므로 아름드 리 나무처럼 위압적이지 않아 좋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갸름한 타원형이고 가장자리에는 물결모양의 잔톱니가 있다. 잎 표면은 짙은 초록빛이며 뒷면 은 황록색이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으며 겨울에서 초봄에 걸쳐 피 고 열매는 9-10월에 굵은 밤알 크기만하게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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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갯버들

   

따 뜻한 바람에 귓불이 간지럽게 느껴질 즈음이면 겨우내 꽁꽁 얼었던 대 지는 살짝 봄향기를 풍긴다. 먼 산에 아지랑이가 가물거리고 실개천의 얼 음장 밑으로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면 냇가 양지녘에 는 보송보송 귀여운 털 꽁지를 조랑조랑 매다는 녀석들이 있다. 은색의 하 얀 털이 저녁 노을에 반짝이기라도 할라치면 봄의 개울가는 요정들의 잔치 터 같다. 이들이 바로 버들강아지 혹은 버들개지라 부르는 갯버들의 꽃, 봄의 전령들이다. 산 속의 생강나무, 들판의 산수유가 아직 노란 꽃잎을 선도 뵈기 전부터 설쳐대는 부지런함 덕분에 오늘날 여기저기에 살아 남을 수 있었나 보다. 요즈음은 꽃꽂이 여인의 손끝에서 삭막한 아파트 안방으 로 봄 향기를 전해주기도 한다.

강가의 물이 들락거리는 '개'에 잘 자란다하여 개의 버들이 갯버들이 되 었다. 이름 그대로 강이나 개울가를 비롯한 습지를 좋아한다. 아예 물 속 에서도 숨막히지 않고 생명을 이어간다. 많은 가지가 올라와 커다란 포기 를 만들고 평생을 자라도 사람 키를 넘기기가 어려운 땅딸보나무다.

초봄에 막 자란 어린 가지는 연한 초록색을 띠고 있으며 자세히 보면 황록색의 털이 나 있다. 차츰 짙은 녹색으로 변하고 털도 없어진다. 잎은 길다란 피뢰침 모양이고 뾰족한 잎들이 어긋나게 가지에 달린다. 뒷면에는 부드러운 털이 덮여서 하얗게 보인다. 버들강아지 속에 들어있던 깨알같은 씨는 성긴 솜털을 달고 다른 버드나무처럼 봄바람 따라 이리저리 날아다닌 다.

여 름철에 비가 흠씬 내려 불어난 물살에 뿌리의 흙이씻겨 내려가 버리 면, 실지렁이 모양의 잔뿌리가 곧잘 드러난다. 이 곳은 체 같아서 물에 떠 내려오던 작은 나뭇가지와 이파리에서 산 속의 온갖 잡동사니까지 모두 걸 려든다. 그래서 쓰레기를 치워주고 물에 녹아있는 질산태 질소와 인산을 흡수하여 수질을 정화하는 작은 공장이기도하다. 그뿐이 아니다. 이름도 아련한 버들붕어, 버들치, 버들개 등 우리의 토종물고기들은 모두 갯버들 뿌리 속을 숨어 살 수 있는 안식처로 쓴다.

갯 버들과 비슷한 종류로서 선조들이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널리 쓰인 키 버들이 있다. 다른 이름으로 고리버들이라 하며 쉽게 휘고 질긴 가지를 엮 어서 옻상자(고리), 키, 광주리, 동고리, 반짇고리 등을 만들었다. 고리버 들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특히 고리장이 혹은 유기장(柳器匠)이라 하 여 백정과 함께 가장 멸시받는 계급으로 분류된다.

고 려사 최충헌(1149-1219) 조에 보면 '압록강 국경지대에 살고있는 양수 척(楊水尺)은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여 이주시킨 사람들의 후손이다 . 수초를 따라서 유랑 생활을 하면서 사냥이나 하고 버들 그릇을 엮어서 팔아 먹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대체로 기생은 근본이 고리장이 집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리장이가 천민이 된 것은 줄잡아도 천년 은 넘는 것 같다.

갯버들과 키버들은 모양이 비슷하나 어린 가지에 털이 있고 잎은 항상 어긋나기로 달리는 것이 갯버들, 털이 없고 가끔 마주보기로 달리는 잎이 섞여 있으면 키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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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귤나무

   

귤 이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사기(古事記) 라는 일본 역사책에는 '서기 60년경 다지마 모리란 이가 제주의 감귤을 가 지고 왔다'하였으며 고려사지에 '백제 문무왕 때인 476년 탐라에서 지역특 산물로 헌상했다'는 내용이 있어서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주도에 서 재배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때에는 팔관회에 귤을 쓴 것을 비롯하여 조선조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기도 하였다.

세조 원년(1455) 제주도 안무사에게 보낸 공문에는 '금귤과 유감(乳柑) 과 동정귤(洞庭橘)이 상품이고, 감자(柑子)와 청귤(靑橘)이 다음이며, 유 자와 산귤(山橘)이 그 다음이다'고 하였다. 귤의 종류는 이외에도 당귤(唐 橘).왜귤(倭橘), 황감(黃柑) 등 여러 이름이 등장한다. 이처럼 수 천년을 이어오던 제주도의 우리 밀감은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백성들은 자르 고 뽑아 버렸다. 좋은 품종은 거의 없어지고 1911년에 일본에서 수입한 온 주밀감이 오늘날 우리의 밀감으로 자리매김한 현실이 안타깝다.

옛 날에는 귤이 너무나 귀한 과일이라서 백성들은 감히 구경도 할 수 없 었으며 임금님도 끔찍이 아꼈다. 중종19년(1524) 임금이 황감을 한 쟁반씩 내리고 '설중황감(雪中黃柑)'이란 제목의 시를 지어 바치라고 한다. 귤 한 쟁반이 10여 개 남짓할 것인데 임금님께 바치는 시를 짓느라 머리 썩히고 한쪽씩이나 제대로 맛보았는지 의심스럽다.

명 종 2년(1547) 홍문관 교리 이원록이 사표를 내고 어머니의 병 바라지 를 떠나려 하니, 임금이 밀감 40개를 노모에게 주라고하였다. 임금님이 신하에게 하사하면서 쩨쩨하게(?) 한 궤짝도 아니고 귤 40개를 세어서 주 라고 할 만큼 귀한 과일이었음을 엿보게 한다.

명종 19년(1564)부터는 제주도에서 귤을 진상하면 성균관의 명륜당에 모 인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뒤, 유생들을 시험하는 황감제(黃柑製)를 매년 시행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하나로서 황감과(黃柑科)라고 하여 조선 후기까지도 있었다.

동 의보감에는 귤껍질은 '가슴에 기가 뭉친 것을 풀리게 하고 입맛이 당 기게 하며 소화를 잘 시키고 이질을 멎게 한다. 구역질을 멈추게 하며 대 소변을 잘 보게 한다. 가래를 삭혀주고 기침을 낫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 어서 먹고 난 껍질도 버리지 않았다.

늘 푸른 작은 나무로서 키가 5m정도까지 자란다. 줄기는 가지가 많으며 나무 껍질은 갈색으로 잘게 갈라진다. 잎은 흔히 보는 사철나무 잎처럼 생 겼는데, 자세히 보면 잎자루에 가느다란 잎이 또 붙어 잎 두 개가 하나의 잎 대궁에 이중으로 달려있는 셈이다. 이런 모양을 이름하여 단신복엽(單 身複葉)이라 한다. 귤이나 유자와 다른 나무와를 구별짓는 중요한 특징이 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달걀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여름의 초입에 들면 흰빛으로 피 며 짙은 향기가 있다. 가을에 둥글고 노란 열매가 익는다.

귤과 유자는 비슷하나 가지에 가시가 없고 열매가 단맛인 것이 귤나무, 가지에 가시가 있고 열매는 신맛인 것이 유자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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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청미래덩굴

   

산 넘고 물 건너 평평한 땅이 조금만 있으면 사람들은 오순도순 모여 산 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을 것, 입을 것 서로 바꾸어야 하니 더우나 추우 나 산길을 수없이 넘어 다닌다. 청미래덩굴은 사람들이 잘 다니는 산속 오 솔길 어디에서나 만나는 흔하디 흔한 우리 산의 덩굴나무이다. 청미래덩굴 은 경기도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 전라도에서는 맹 감나무 혹은 명감나무다.

젖살 오른 돌잡이 아이의 얼굴 마냥 잎은 둥글 납작하고 표면에는 윤기 가 자르르하다. 길다란 잎자루의 가운데나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한 쌍의 덩굴손은 끝이 도르르 감겨 있다. 손끝에 닿는 대로 나무나 풀이나 닥치는 대로 붙잡고 '성님! 나도 같이 좀 삽시다'고 달라붙는다. 그러고서는 갈고 리 같은 작은 가시를 여기 저기 내밀어 자기 옆으로 사람이나 동물이 지나 다니는 것을 훼방놓는다. 나무꾼의 바지가랑이를 찢어놓고 그도 모자라 속 살까지 생채기를 만들어 놓는가하면 친정나들이 아낙의 치맛자락을 갈기갈 기 벌려놓는 심술을 피우기도 한다. 화가 난 사람들이 낫으로 싹둑 잘라 놓아도 돌아서면 새 덩굴을 잔뜩 펼쳐서 약을 올린다. 가시가 만만치 않아 일본인들은 아예 '원숭이 잡는 덩굴'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미래덩굴은 이 처럼 몹쓸 식물만이 아니다. 여러 가지 좋은 일도 많이 한다. 어린잎을 따 다 나물로 먹기도 하며, 다 펼쳐진 잎은 특별한 용도가 있다. 잎으로 떡을 싸서 찌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오랫동안 쉬지 않으며 향기가 배어 독특한 맛이 난다.

부산 자갈치시장을 비롯한 재래시장에는 한때 여기저기서 들리던 떡장수 의'망개- 떠억' 외침이 이제는 지나간 세대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줄 기는 땅과 닿는 곳에서 바로 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처럼 땅속을 이리저리 뻗쳐나가는 땅속줄기(地下莖)를 갖는다. 굵고 울퉁불퉁하 며 마디마다 달려있는 수염 같은 것이 진짜 뿌리이다. 이 부분에 어떤 원 인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가끔 굵다란 혹이 생기는데, 토복령(土茯岺)이라 한다. 속에는 흰 가루 같은 전분이 들어 있어서 흉년에 대용식으로 먹기도 하였으며, 선유량(仙遺糧) 혹은 우여량(禹餘糧)이란 이름도 갖는다.

그외 주요한 쓰임새는 약재이다. 옛 사람들이 문란한 성생활로 매독에 걸리면 먼저 토복령 처방부터 시작하였다하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피를 맑게 하며 해독작용도 있다 한다.

봄 의 끝자락에 이르면 잎겨드랑이 덩굴손의 옆에는 긴 꽃대가 올라와 우 산모양 꽃차례를 펼친다. 노란빛이 들어간 풀색 꽃이 모여 피고 동그란 열 매가 달려 가을에는 빨갛게 익는다. 속에는 황갈색의 씨앗과 주위에는 퍼 석퍼석하게 말라버린 육질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빨간 열매가 썩 지 않아 매달린 채로 겨울을 넘겨 다음해 봄이 되어도 그대로다. 줄기의 뻗음이 멋스러워 꽃꽂이 재료로 그만이다.

먹을 것이 없던 옛 시골 아이들은 '망개 열매'가 신맛이 지독한 파랄 때 부터 눈독을 들인다. 빨갛게 익으면 그 쬐끔의 달콤한 맛을 보려고 오가며 가끔 입 속에 넣어본다. 항상 조금 더 맛있고 씹히는 부분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유년을 보낸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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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매화나무

   

"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 즉도 하다마는 / 춘설이 하 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조선시대의 가사집 청구영언에 실려있는 매화타령의 첫머리이다. 매화나무는 이처럼 봄기운이 채 찾아오 기도 전에 눈발의 흩뿌림에도 아랑곳없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이다.

꽃피는 시기만으로도 너무 일찍 핀다하여 조매(早梅), 겨울에 핀다 하여 동매, 눈 속에도 핀다하여 설중매, 종류에 따라 봄기운이 완연할 때 피는 춘매까지 매화를 두고 부르는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성급한 매화로부터 시작하는 꽃 소식은 숨을 돌리느라 잠깐 쉬었다가 금세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 목련으로 이어지고 개나리, 살구꽃, 벚꽃, 복숭아꽃으로 맺음을하 면 봄이란 계절이 훌쩍 우리를 떠나가 버린다.

중 국의 쓰촨(四川)성을 원산지로 하는 매화는 시나 그림의 소재로서 고 향 땅에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도 사랑은 식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대무신왕 24년에 "8월, 매화가 피었다"는 기록 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와 가까워진 나무이 다.

옛 그림의 소재로서 사군자화의 첫 번째인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빠질 수 없는 꽃나무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사대부계층에 까지 사군자화를 많이 그렸다. 김홍도의 매작도(梅鵲圖)를 비롯하여 조선 중.후기 화가들도 매화는 즐겨 그리는 단골 메뉴였다.

매 화나무는 기품 있는 꽃의 모양새와 향기만을 감상하는 꽃나무로 끝나 지 않는다. 열매는 매실이라 하여 쓰임새가 넓은 과일나무이기도하다. 꽃 이 필 때는 매화나무, 열매가 달릴 때는 매실나무라고 부른다. 구연산과 사과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매실은 신맛의 대표이다. 누구나 매실을 떠올 리면 금세 입안에 침이 돈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매산이 란 험한 산을 넘어가면서 군사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자 매실 이야기로 목 마름을 해소해버린 매림지갈(梅林止渴)의 지혜가 유명하다.

매 실 중 익어도 푸른 빛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는 품종이나 설익었을 때 수확한 매실을 청매(靑梅)라고 한다. 청매는 각종 건강식품으로 널리 쓰이나 가장 큰 용도는 매실주이다. 그러나 씨의 껍질에는 시안산이라는 독성물질이 있으므로 소주에 담가 어느 정도 추출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너 무 오래 두지 않고 건져내는 것이 올바른 과일주 담그는 방법이다.

매 화나무는 수많은 품종이 있으나 기본이 되는 종(種)은 연한 분홍색으 로 피는데 5장의 꽃잎이 모여 둥그런 모양을 이룬다. 기껏 자라야 5-6m 정 도이고 우리나라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낙엽수이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이 고 줄기는 흔히 비스듬하거나 구불구불하게 자란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 고 계란모양이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다.

매 화나무와 살구나무는 구별이 매우 어려운데, 잎 가장자리의 잔 톱니가 규칙적이고 익은 열매의 육질과 씨가 잘 분리되지 않는 것이 매실나무이 다. 반면에 불규칙한 잔 톱니가 있으며 잎이 나올 때는 흔히 잎자루가 붉 고 육질이 씨와 쉽게 분리되는 것이 살구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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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버드나무

   

버 드나무의 또 다른 말은 버들이다. 가늘고 낭창낭창한 가지가 실바람에 도 하느작거리는 것이 버들의 모양새다. 이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을 대표 하며 옛 말에도 가느다란 것의 표현으로 세류(細柳)라 하였으며 여인의 날 씬한 허리를 유요(柳腰)라고 하였다. 나무 이름은 '부들부들하다'는 나뭇 가지의 특성에서 부들이 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버 드나무와 우리 민족의 인연은 남다르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주 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부인은 버드나무를 신격화한 것이라고도 하며 고려 태조의 왕비 신혜왕후는 버드나무 밑에서 왕건과의 첫 맛남이 이루어진 것 으로 고려사에 나와 있다. 그러나 버드나무와의 이런 아름다운 인연은 조 선시대에 들어오면서는 비극의 여인과 악연으로 이어진다. 연산군의 어머 니인 폐비 윤씨는 성종8년(1477) 비상을 버드나무 상자에 담아 권숙의 집 에 던진 것이 빌미가 되어 쫓겨났으며, 장희빈은 숙종27년(1701) 지금의 창경궁 통명전 연못가에 각시와 붕어를 넣은 버드나무 상자를 묻어두고 인 현왕후를 저주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버 드나무는 주위에 가장 흔한 나무로서 사랑의 표현은 물론 생활과도 밀 접한 나무였다. 옛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주는 풍습이 있었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으나 산들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다분히 투정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야 외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나무 젓가락을 만들었다가 쓴맛에 놀라 집어던지기 일쑤이다.그러나 바로 이 쓴맛에 인류 최대의 의약품, 아스피 린이 들어 있다. 기원전 5세기경 서양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임산 부가 통증을 느낄 때 버들잎을 씹으라는 처방을 내렸다. 2천300여년동안 민간요법으로만 알려져 오던 버들잎의 신비는 아스피린으로 불려지는 주성 분을 1853년 합성에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반화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 1899년 독일 바이엘사의 젊은 연구원인 펠릭스 호프만이 처음으로 상용화하였다. 그는 류머티즘을 심하게 앓고 있는 아버 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제 개발에 나섰다고 한다. 바이엘사는 진 통해열제인 아스피린 하나로 백년 가까이 세계적인 제약회사의 자리를 지 키고 있다.

한 편 질병을 쫓아내기 위한 우리의 버드나무 쓰임새는 다분히 상징적이 다. 예를 들어 학질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을 때는 나이 수대로 버드나무 잎을 따서 봉투에 넣고 겉봉에 유생원댁입납(柳生員宅入納)이라 써서 큰길 에 내다 버리면 병이 쉽게 떨어진다고 믿었다 한다.

전국 어디에서나 자라는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서 거의 한 아름 정도 자란다. 나무 껍질은 회갈색이고 얕게 갈라지며 작은 가지는 황록색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며 길이는 가운데 손가락 길이 만하고 너비는 1-2cm 정도의 긴 피뢰침 모양이다.

버드나무도 가지가 늘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과 구 별이 어렵다. 나뭇가지를 잡아 당겨보아 툭툭 잘 떨어져 나오면 대체로 버 드나무인 경우가 많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95] 주목

   

나 무 껍질이 붉은 빛을 띠고 속살도 유달리 붉어 주목(朱木)이란 이름이 붙었다. 흔히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말한다. 수백 년에서 천 년을 넘게 살고 또 목재는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소백산, 덕유산 등 높 은 산의 꼭대기에는 수령이 수 백 년 된 주목이 무리를 이루어 자라고 있 다.

어릴 때의 주목은 쨍쨍 내려 쪼이는 햇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여 더 높은 자람을 하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그것도 아주 천천히 숲 속의 그늘에서 적어도 몇 세기는 내다보 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이어간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주위의 다른 나무보다 키가 커져 햇빛을 받는데 불편함이 없다. 이런 느긋한 삶의 자세는 오늘날 산꼭대기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정원수로서 주목(注目)받게 되어 지금은 우리의 주변에서 비교적쉽 게 만날 수 있다. 주목은 어릴 때 생장이 늦은 반면 잔가지가 잘 돋아난 다. 그래서 나무를 여러 모양으로 쉽게 다듬어 취향에 맞게 만들 수 있어 서 정원수로서는 제격이다.

목재는 시신을 감싸는 관재(棺材)로 최상품이었다. 평양부근의 오야리 19호 고분에서 출토된 낙랑고분의 관재는 두께가 25cm에 지름이 1m가 넘는 주목 판재로 만들었다. 결이 곱고 잘 썩지 않으며 재질이 좋을 뿐만 아니 라 나무의 붉은 색은 잡귀를 내쫓고 영원한 내세를 상징한다는 믿음 때문 이었다. 서양에서도 주목은 관재로 쓰였다. 또 활을 만드는 재료로도 아껴 온 나무이며 얇은 판자를 만들어관리들이 임금을 알현할 때 손에 드는 홀 (笏)로 사용하였다.

붉은 줄기에서 추출한 액은 궁녀들의 옷감에서 임금님의 곤룡포까지 옷 감을 물들이는데 쓰였다 한다. 최근에는 껍질에서 추출한 파클리탁셀이라 는 성분으로 미국 MS사가 '택솔'이라는 항암제를 만들어 유명한 나무가 되었다. 택솔은 암세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관을 막는 것으로 다른 치 료제와 함께 사용해 말기암환자를 완치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효과가 뛰어나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고 알려져 있다.

주목의 여러가지 쓰임새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 기록에 주목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덕궁, 경복궁 등 궁궐에도 주목이 빠지지 않고 심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선조들이 가까이 두고 귀하게 여긴 나무임에 틀림없다.

전 국의 높은 산에 자라며 늘 푸른 바늘잎 큰 나무이다. 자라는 속도는 너무 늦어 1년에 굵기의 자람이 1-2mm 남짓하니 제법 굵어 보인다 싶으면 수령은 벌써 100년을 훌쩍 넘는다. 잎은 바늘잎 모양이나 소나무처럼 가늘 고 긴 것이 아니라 납작하고 짧다. 표면은 사시사철 짙은 초록빛이며 뒷면 은 연한 초록빛이다. 열매는 앵두만큼이나 고운 빛의 붉은 열매가 조그마 한 컵을 달아 놓은 것처럼 연초록 잎새 사이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컵 속에는 흑갈색의 종자가 한 개씩 들어 있는 모양이 독특하다. 울릉도 성인봉에 자라며 잎의 넓이가 더 넓은 회솔나무, 설악산의 설악눈주목은 모두 주목과 가까운 형제들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97] 전나무

   

하 늘을 찌르듯이 쭉쭉 뻗은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진 숲을 우리는 흔히 수해(樹海)라고 한다. 활엽수로 이루어지는 열대지방의 숲과는 달리 전나 무를 비롯한 침엽수로 이루어지는 한대지방의 수해는 열병하는 군인들처럼 단아하고 깔끔하다. 전나무는 주로 추운 지방에 자라면서 작은 수관(樹冠) 에다 곧고 긴 줄기를 한껏 뽐낸다. 마치 미인대회에서 만나는 늘씬한 슈 퍼모델 같다. 그것도 한 그루씩 자라는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 그루씩 모 여 자람을 좋아한다.

최 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보면 전나무의 한자이름은 '젓나모 회 (檜)'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문헌에는 전나무를 흔히 삼(杉)으로 표기하 여 혼란이 있다. 숙종 39년(1713) '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 삼나무가 하 늘을 가리어 거의 300리에 달했다' 하였고, 정조 13년(1789) 왕이 '손수 소나무와 삼나무를 심으셨던 것인데 지금 저렇게 울창하다' 하였다. 또 정 조20년(1796) 함경도 후주의 형편에 대하여 비변사에 올리기를, '이 곳은 높은 산에 삼나무와 소나무가 삼(麻)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등에 나 오는 '삼나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삼나무가 아니라 대부분 전 나무나 혹은 잎갈나무이다. 자라는 곳을 설명한 지리적인 위치가 일본삼나 무는 자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 나무는 곧바르고 집단으로 자라며 나무의 재질이 좋아 예부터 건축재 로 쓰였으며, 특히 기둥재로는 그만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 건물 인 수다라장, 양산 통도사, 강진 무위사 기둥의 일부 등이 전나무이다. 그 래서 전국의 알려진 큰 사찰에는 어김없이전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표적 인 곳이 오대산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이며 계곡과 어우러져 수백년 된 우람한 전나무가 옛 영광의 맥을 그대로 잇고 있다.

나무의 색깔이 거의 백색에 가까워 지금은 최고급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사랑을 받고 있다. 바늘잎 늘푸른 큰 나무로서 두세 아름까지 자랄 수 있 다. 나무 껍질은 흑갈색이며 세로로 짧고 불규칙하게 갈라진다. 잎은 납작 하면서 끝이 뾰족한 모양이고 길이는 새끼손가락 한 두 마디 정도이다. 잎 의 뒷면에는 흰빛 숨구멍이 있어서 하얗게 보인다. 봄에 황록색의 작은 꽃 이 피며, 가을에 길이 10cm 정도의 원통형 솔방울이 위로 향하여 익는다.

우리나라의 전나무 종류는 이외에 분비나무와 구상나무가 있다. 분비나 무는 솔방울의 비늘 끝이 그냥 곧바르고 구상나무는 뒤로 갈고리처럼 휜 것이 구분하는 차이점이다. 두 나무 모두 상당히 나이를 먹어도 솔방울이 잘 달리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달린다 하여도 높다란 나무의 꼭대기이니 가물가물할 수밖에 없다.

비늘(苞)이란 것의 크기가 새끼손톱 남짓한데, 그 끝이 휘었는가 곧바른 가를 따지는 좁쌀스러움을 두고 일반인들이야 '거참! 되게 할 짓 없는 사 람들이구먼!'할지 모른다. 그러나 식물분류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천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일이다.

수입하여 남부지방에 심고 있는 또 다른 전나무 종류에는 일본전나무라 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전나무와는 달리 흔히 일본인들이 신은 나막신처 럼 살짝 잎의 끝이 갈라져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98] 미선나무

   

옛 역사극의 궁중 연회 장면을 보면 귓불을 맞 붙여놓은 것 같은 커다란 부채를 해 가리개처럼 들고 있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이름하여 미선(尾扇 )이다. 대나무를 얇게 펴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물들인 한지를 붙인 것 으로 궁중의 가례나 의식에 사용되던 물건의 하나이다.

나무 이름을 처음 붙일 때 열매 모양이 마치 미선 같다하여 미선나무가 되었다. 꽃이 지고 처음 달릴 때는 '뭐 그저 그런' 파란 열매이지만 익어 가면서 차츰 연분홍 빛으로 변해 가는 모습은 작고 귀여운 공주의 시녀들 이 들고 있는 진짜 미선을 보는 것 같다.

미 선나무는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자생식물을 조사할 때 처음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나무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일본 에도 같이 자라지만 이 나무는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다. 물푸레나무과(科 )는 비교적 자손이 많은 대종가이다. 이들 중 미선나무속(屬)이란 가계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다른 종(種)의 형제를 두지 못하고 대대로 달랑 외아들 하나로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종이 우리나라에만 자 라는 경우는 더러 있어도 미선나무처럼 속 전체가 세계의 아무 곳에도 없 고 오직 우리 강산에만 자라는 경우는 흔치않다. 이런 점으로도 관련 전공 학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 크나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 라는 지역은 충북의 괴산과 영동, 전북 부안 등 중남부지방에 한정된 다. 이름이 알려지고 유명해져 사람들이 여기 저기 심어도 기후나 땅을 별 로 가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어느 지방에만 자라는 까다로운 나 무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차츰 한반도의 구석으 로 밀려나서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과 인연을 맺고 살아가게 되었으니 적어도 대가 끊길 염려는 없어졌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로 가지가 아래로 늘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키 는 1m를 겨우 넘긴다. 매화, 목련, 생강나무 등 부지런한 봄꽃들의 향연이 거의 끝나 갈 즈음, 깜박 늦잠에서 깨어난 듯 가느다랗고 엉성해 보이는 작은 갈색의 가지에 잎보다 먼저 꽃망울을 달기 시작한다. 꽃이나 잎 모양 이 개나리를 너무 닮아 영어이름은 아예 흰 개나리라 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나 노란 꽃이 아니라 새하얀 꽃이 개나리와는 달리 크기도 작으며 피는 시기도 더 빨라 분명히 다른 집안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여 러 개의 꽃들이 작은 방망이처럼 이어서 달리고, 네 갈래의 길다란 꽃잎은 노란 꽃술을 스쳐 가는 꽃샘바람이라도 막아주려는 듯 하얀 날개를 살짝 펼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정겹다. 뿐만이 아니다. 따사로운 햇볕에 묻어 나오는 은은한 향기는 봄 아지랑이로 피어올라, 우리의 코끝을 스쳐 갈 때 초봄의 상쾌함을 느끼게 한다.

하얀 꽃으로 대표되는 미선나무 외에도 분홍빛을 띤 분홍미선, 맑고 연 한 노란빛의 상아미선, 빛의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달리 나타나는 푸른미선 등 몇 가지 품종도 귀중한 만큼이나 나무에 대한 신비스러움을 더하게 한 다.

자연적으로 자라는 충북 괴산과 영동, 전북 부안 등의 집단 서식지 중에 서 4곳이나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니 작은 나무치고는 파격 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 .ac.kr





99] 향나무

   

신 라 경순왕 9년(935) "왕은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항복하러 가는 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는 삼국사기와 고려사 기록이 있다. 천 년사직을 통째로 넘기러 가는 부끄러운 행차가 너무 호화스러워 신라가 망 하게 된 원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향 나무를 비롯한 향료식물에서 채취한 향은 부정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함으로써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로 생각하였다. 향은 바로 우리 생활의 필수품이었으며 귀족들은 벌써 삼국시대부터 열대지방에 자라는 침향목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수입품인 침향은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에서 널리 사용할 수 있는 향의 원료는 향나무밖에 없었다.

발 향이라 하여 부인들의 속옷 위에 늘어뜨리는 장신구, 점치는 도구, 염 주알 등 향나무의 쓰임새는 넓다. 그 외에 고급 조각재, 가구재, 불상, 관 재 등 특수 목적에 쓰인다. 나무의 색깔이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이므로 자단(紫檀)이라고도 부른다.

좀 더 고급스런 기분을 내고 침향처럼 만들기 위하여 고려 때부터 매향 (埋香)의식이 있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다 향나무를 묻어 미륵보 살을 공양하며 깨끗한 세상에 왕생하고자 하는 종교의식을 말한다. 매향은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침향을 만드는 것으로, 이때 향나무는 보다 단단 해지고 굳어져서 불교에서는 이 향을 으뜸가는 향으로 삼는다. 향을 묻은 자리에는 흔히 매향비를 세웠다. 경남 사천에 있는 고려말 우왕 13년(138 7)에 세운 사천매향비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평안함을 미 륵보살께 빈다"라는 뜻의 글을 새겨 놓았다. 또 척주지(陟州誌)에는 "고려 때 강릉 정동에 향나무 310그루를 묻었다"하며 비문의 내용만 전해지는 강 원도 고성 사선봉 매향비에도 동해안 각 진과 포에 향나무 2천500그루를 묻었다 한다. 묻은 지점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가장 적당한 위치가 모래 시계 이후 유명해진 정동진으로 추정된다.

울릉도 도동 절벽에 붙어있는 향나무는 2천여년을 넘게 살아온 것으로 짐작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향나무는 육지에도 흔히 자라고 있으나 대량으로 자라던 곳은 역시 울릉도이다.

늘 푸른 바늘잎 큰 나무로서 굵기가 한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나무 껍 질은 적갈색이고 세로로 길게 갈라진다. 잎은 손톱길이 정도이고 어릴 때 는 짧고 끝이 날카로운 바늘잎이 대부분이며 손바닥에 가시가 박힐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면 바늘잎 이외에 찌르지 않는 비늘잎이 함께 생긴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꽃은 봄에 피어 이듬해 가을에 열매가 익는다. 열매는 굵은 콩알만하고 둥글며 껍질이 매끈해 보이나 자세히 보 면 작은 비늘이 서로 붙어 있다.

향 나무의 날카로운 바늘잎이 아예 처음부터 생기지 않고 비늘잎만 달리 게 개량한 가이스까향나무(螺絲柏)는 주로 정원수로 심고 있다. 그 외 아 예 누워서 자라는 설악산의 눈향나무, 우물가에 주로 심는 뚝향나무, 미국 에서 수입한 연필향나무는 모두 한 식구이다.

경북대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00] 금강소나무

   

태 백산맥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울진, 봉화를 거쳐 영덕, 청송일부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우리 주위의 꼬불꼬불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 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줄여서 강송이라고 학자들은 이름을 붙 였다.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더 널리 알려진 바로 그 나무다.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의 나무로 쳤다.

소 나무는 자라면서 여러가지 화학물질이 쌓여서 나무의 속이 진한 황갈 색을 나타낸다. 이 부분을 옛 사람들은 황장(黃腸)이라 하였으며 가장자리 의 백변(白邊)에 비하여 잘 썩지 않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황장이 넓고 백 변이 좁은 금강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서 왕실에 널리 쓰였다.

세종 2년(1420) 예조에서 "천자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드는데 견고하고 오래되어도 썩지 않으나, 백변은 내습성이 없어 속히 썩는데 있 습니다. 대행 왕대비의 재궁(梓宮)은 백변을 버리고 황장을 서로 이어서 만들게 하소서"하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 내내 좋은 소나무 보호를 위하 여 황장금표(黃腸禁標)를 세우고 경국대전에 좋은 소나무의 벌채를 법으로 금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세 월이 지나면서 금강소나무는 차츰 고갈되어 멀리 태백산맥의 오지까지 가서 벌채를 하여 한강을 이용, 서울로 운반하였다. 한강 수계(水系)로의 운반이 불가능한 울진.봉화지역의 소나무는 그래도 생명을 부지하여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일제 강점기 영주-봉화-태백으로 이어지는 산업철도가 놓이면서 이들도 무차별 벌채되기 시작한다. 조선시 대에는 권세 있는 양반이 아니면 지을 수도 없었던 소나무 집을 너도나도 짓기 시작하자 급격한 수요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잘려 나온 금강소나무 는 춘양역에 모아두기만 하면 철마(鐵馬)라는 괴물이 하룻밤 사이 서울까 지 옮겨다 주었다. 사람들은 춘양역에서 온 소나무란 뜻으로 춘양목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진 수탈에도 그나마 남아있는 곳 은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이다. 이곳은 1981년 유전자 보호림, 1985년 천연보호림으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소 나무와 금강소나무는 별개의 나무인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소 나무라는 성씨를 가진 종가 집의 자손에는 반송, 금강소나무, 황금소나무 등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모양새가 같지 않은 몇 종류가 있다. 그렇다고 다 른 성바지로 볼만큼 전혀 닮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애매하게 '씨'를 의심받 기도 하나 틀림없는 한 자손이므로 이럴 때 우리는 품종(品種)이라고 한다. 금강소나무는 한마디로 조상인 일반 소나무보다 더 잘생긴 소나무의 한품 종이다.

일 본의 국보 제1호인 반가사유상은 대부분의 일본 목불(木佛)이 녹나무 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재질이 소나무이다. 일부 학자들은 바로 강원도 에서 자란 금강소나무를 가져가서 만들었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만들어 진 불상을 분석하여 나무의 생산지가 한반도인지 일본인지를 아는 방법은 없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01] 잣나무

   

방 랑시인 김삿갓은 금강산을 둘러보고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소나무 잣 나무 울창한 바위를 돌아가니/ 산과 물 보는 곳마다 신기하네”라고 노래하 였다.잣나무는 이처럼 금강산을 비롯한 북한에서도 높은 산에 주로 자란다. 따뜻한 지방보다는 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동토(凍土)를 더 좋아한다. 학명에 ‘koraiensis’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며 중국인들은신라 송, 일본인들은 조선오엽송, 서구인들은 ‘코리안파인’이라 부르니 주변강 대국으로부터도 인정받은 우리 강산에만 자라는 우리의 나무이다.

잣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사시사철 변함이 없어서 송백이란 이름으로 고고 한 선비의 기상을 일컫는다. 멀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충신인 비녕자 (丕寧子)나 죽죽(竹竹)의 인품을 나타낼 때도 송백과 비유하였으며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를 비롯하여 옛 문인들의 그림에도 빠지지 않는다. 한마 디로 지조있는 선비들이 아끼고 사랑한 역사 속의 우리나무이다. 설중송백 (雪中松柏)이라면 송백이 눈 속에서도 그 색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굳은 지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잣나무는 지조의 상징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곧 바로 자라고 나무질이 좋아 홍송(紅松)이란 이름으로 예로부터 판자를 만드는 것에서 관재(棺材), 건축재까지 널리 쓰였다. 세종 31년(1449) 효행이 뛰어난 선비를 칭찬하는 내용 중에 “그 아비가 죽게 되어서는 잣나무를 얻어다 관을 만들어 장 사지냈다”고 하였다. 또 선조 26년(1593)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 수 셋이 모두 총에 맞아 병세가 위급하자 잣나무 관판(棺板)을 얻고 싶어 한 기록이있다. 건축재의 실증적인 자료로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수다 라장의 기둥 중 상당수가 잣나무이고 대장경판의 마구리에 쓰인 것에서도 나무의 귀중함을 짐작할 수 있다. 잣나무 열매는 옛날부터 건강식품으로 알려졌다. 명종 14년(1559)에는 안 동 봉정사 근처의 잣은 다른 곳에 비하여 제일 풍성하므로 해마다 진상하 는 것이 오로지 이곳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숙종 29년(1703)에는 갑산에 흉 년이 심하게 들어 백성들이 천막을 쳐 놓고 잣나무 씨를 따먹으면서 살았 다하였고 영조 33년(1757) 박필기란 이는 벼슬을 그만둔 뒤에 잣나무 열매 를 계속 먹었으므로 강건하고 병이 없어 나이 80세가 넘어서 죽었다고 한 다. 동의보감에도 잣은 해송자(海松子)라 하여 피부를 윤기 나게 하고 오장 을 좋게 하며 허약하고 여위어 기운이 없는 것을 보한다고 하였다. 늘 푸른 바늘잎을 가지고 아름드리로 크게 자란다. 나무 껍질은 흑갈색 이고 세로로 갈라지면서 큰 비늘로 붙어있다. 잎은 5개씩 모여나기하고 긴 손가락 길이 정도이며 양면에 흰빛 숨구멍이 5∼6줄 있어서 희끗희끗하다. 꽃은 암수 같은 나무로서 늦봄에 피어 솔방울 열매는 다음해 가을에 익 는다. 솔방울은 긴 달걀모양으로 크기가 어른 주먹만하고 백 여개씩 달리는 비늘(實片)의 아래 부분에는 한 개씩의 잣이 들어 있다. 잣나무와 비슷하나 잎과 열매 모두 잣나무보다 짧고 울릉도에 분포하는 섬잣나무가 있으며, 미국에서 1920년쯤 수입하여 목재생산 목적으로 심고 있는 스트로브잣나무는 모두 잣나무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잣은 오직 잣나 무에만 달린다.





102] 두릅나무

   

농 가월령가 오월령(五月令)에 보면 “앞산에 비가 개니 살찐 향채 캐오 리라/ 삽주, 두릅, 고사리며 고비, 도라지, 으아리를/ 절반은 엮어 달고 나머지는 무쳐 먹세/ 떨어진 꽃 쓸고 앉아 빚은 술로 즐길 적에/ 산채를 준비한 것 좋은 안주 이뿐이다”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두릅은 이처럼 산채의 왕좌이이다. 봄의 따사로움이 대지 에 퍼질 즈음, 물에 살짝 데친 두릅나무 순을 빨간 초고추장에 찍어 한 입에 넣어본다. 풋풋하고 쌉쌀함이 입안 가득히 퍼져 나갈 때의 그 기막힌 맛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정다운 님이 따라주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이라 도 곁들여진다면 나라님 부럽지 않다. 두릅나무 순은 사람뿐만 아니라 초식성 동물들도 좋아한다. 두릅나무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워서 순이 붙은 작은 가지마다 날카로운 가시를 촘촘히 박아 놓았다. 덕분에 자손을 널리 퍼트려 수 천년을 무사히 이어 왔지만 수난의 역 사가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바로 요즈음, 있지도 않은 불로초 를 찾아 온산을 헤매는 신판 ‘진시황 특사’들 때문이다. 싹을 내밀자마자 잎을 펴볼 틈도 없이 싹둑싹둑 잘려나간다. 저장한 양분으로 다시 한번 싹을 내미는 안간힘도 써보지만 두 번 세 번 싹둑질을 당하고서야 목숨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봄날의 산골마다 시목(屍木)이 가득하여 자칫 식물원 에 가서야 두릅나무를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두릅나무의 한자 이름은 목두채(木頭菜), 가지 끝에 달리는 산채란 뜻이 다. 그외 늙은 까마귀발톱 같은 가시가 있다하여 자노아(刺老鴉), 용의비 늘과 같다하여 자룡아(刺龍芽) 등 여러 이름이 있다. 그만큼 쓰임새가 많았 던 나무임을 말한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양지 바른 산자락에 흔히 자란다. 겨울에 잎이 떨 어지는 활엽수로 키가 3∼4m 남짓한 작은 나무이다. 가지가 그렇게 많이 갈라지지 않아 전체적으로 듬성듬성하며 싹을 보호하기 위하여 생긴 가시는 오래 되면 떨어져 버린다. 아예 처음부터 가시가 생기지 않는 민두릅을 산림청에서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는데, 인공재배할 때 가시가 없으면 훨씬 취급이 쉬워지는 탓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한 대궁에 새 날개처럼 달린 잎이 또 한번 더 갈라지는 모양이 특별하다. 잎 전체의 길이가 어른 팔 길이에 이른다. 작은 잎과 잎 대궁이 마주치는 곳에도 가시가 있다. 작은 잎은 달걀모양 으로 큰 톱니가 있고 뒷면은 회색으로 잎맥 위에 털이 있다. 가지 끝에서 나오는 꽃차례는 우산모양으로 벌어지고 많은 꽃이 달린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걸쳐 흰빛으로 피며, 검 은 열매가 10월에 익는다. 한방에서는 총목피( 木皮)라고 하여 주로 뿌리나 나무껍질을 이용하는데 위와 신경계통의 병을 비롯하여 수종, 당뇨병 등에 썼다고 한다. 두릅은 나무두릅 이외에도 흔히 독활(獨活)이라고 하여 풀로 분류되는 땅두릅이 있다. 예로부터 한약재로 널리 쓰였다. 고려 문종 33년(1079) 중국에서 보 내준 약재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목민심서 관질(寬疾)에도 전염병에 독활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릅이란 이름을 가진 나무는 높은 산꼭대기에 자라는 땃두릅나무가 또 있다.


.103] 명자나무

   

봄 꽃들의 화려한 잔치가 무르익어 갈 때까지 갈색의 나뭇가지가 엉기듯 이 뻗어있는 자그마한 명자나무. 당연히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러나 잎이 피기 시작하면서 시샘하듯이 금새 봉오리를 펼치는 꽃나무, 매 화처럼 생겼으나 약간 큰 꽃이 붉게 흐드러지게 피는 꽃나무다. 대부분 붉 은 꽃이지만 때로는 흰색, 분홍색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어서 취미에 따라 골라 심을 수도 있다. 한번 시작하면 늦봄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연속적으 로 피므로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이 함께 섞여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다. 벚꽃처럼 너무 화사하지도, 모란처럼 너무 요염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촌스럽지도 않은 꽃이 바로 명자꽃이다. 그래서 경기도 일부에서는 꽃으로 서는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는 ‘아가씨꽃나무’라는 이름도 있다. 흔히 가지 끝이 가시로 변하므로 조금은 험상궂은 나무 모양새에 꼭 어울린다 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옛 사람들은 이 꽃이 너무 화사하고 한창 봄이 익어 가는 시기에 피므로 부녀자가 꽃을 보면 바람난다고 하여 집안에 심지 못하게 했다. 꽃이 지고 나면 띄엄띄엄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다. 한여름에 들어갈 즈 음 작달막한 키와는 달리 작게는 탁구공만한 것에서 굵은 것은 달걀크기에 이르기도 한다. 처음에는 초록빛의 타원형이나 여름을 지나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연노랑빛으로 익는다. 얼른 보아 마치 작은 사과가 달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명자나무는 모과와 사촌뻘쯤 되는 집안간으로 유전인자는 속이지 못하여, 모양새는 울퉁불퉁 모과처럼 영 ‘안 생겼다’. 손가락 굵기 정도에 키라고는 사람 키도 못 넘기는 작은 나무에 너무 큰 과일을 달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이를 안쓰럽게 한다. 명자 열매에는 능금산이 풍 부하여 신맛이 있으며 과일주나 청량음료로 만들 수 있다. 동의보감에 보면 ‘약의 효능은 모과와 거의 비슷한데 토사곽란으로 쥐 가 나는 것을 치료하며 술독을 풀어 주고 메스꺼우며 생목이 오르는 것 등을 낫게 한다. 냄새가 맵고 향기롭기 때문에 옷장에 넣어 두면 벌레와 좀이 죽는다’고 하여 한약재에서 좀약 대용으로까지 널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에 보면 ‘○○’라고 쓰고 명자 명과 명자 자로 읽는다 하였으며, 모과는 무(楙)라 하여 따로 구분한 것으로 보아 명자나무와 모과 는 쓰임새가 약간씩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의 고향은 중국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고 중부 이남에 주로 심고 있다. 한 나무씩 자라는 것이 아니라 무리 지어 자란다. 자른 가지에서 싹이 쉽게 잘 돋아나 마음대로 나무 모양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생울타리나 분재를 만드는데 아주 적당하다. 잎은 어긋 나고 긴 타원형이며 양끝이 뾰족하다. 잎 길이는 손가락 두 세 마디 정도 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명자나무는 향나무와 가까이 심으면 배나무와 마찬가지로 붉은별무늬병에 걸려서 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비슷한 풀명자는 일본에서 관상용으로 도입해서 심고 있는데, 명자나무와 다른 점은 꽃이 주홍색 한 가지뿐이고 과실의 크기가 꿩알 정도로 명자 나무보다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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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박태기나무

   

봄 의 전령사인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목련 등의 꽃잎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 복사꽃도 절정의 시기를 지나 봄의 화사 함이 아쉬울 4월 중순쯤이면 잎도 나오지 않은 채 온통 보랏빛꽃 방망이를 뒤집어쓰는 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박태기나무다. 우리나라의 꽃들이 대부분 흰색이거나 연분홍의 맑은 색인 것에 비하여 박태기나무는 ‘차별화한 색’으로 승부하려는 튀는 꽃이다. 가지 마디마디 에 꽃자루 없이 마치 작은 나방처럼 생긴 꽃이 7∼8개씩 모여서 나뭇가지 전체를 완전히 덮어버린다. 그래도 꽃에는 독이 있으므로 아름다움에 취하 여 꽃잎을 따서 입 속에 넣으면 안 된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밥알을 ‘밥티기’라고 한다. 이 나무의 꽃봉오리가 달려있는 모양이 마치 밥알, 즉 ‘밥티기’와 닮아서 박태기나무란 이름이 생겼다. 색깔이 꽃자주색이니 양반들이 먹던 하얀 쌀 밥알이 아니라 조나 수수의 밥알을 생각하면 짐작이 빠르다. 꽃의 이미지 와는 달리 조금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어 우리말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 지 않는다. 중국이름은 자형(紫荊)이니 그대로 번역하여 ‘자주꽃나무’라고 하였다면 더 어울리고 멋있었을 것 같다. 북한에서는 ‘구슬꽃나무’이다. 꽃의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으로서 활짝 핀 꽃이 아니라 지금 막 피어 나려는 꽃봉오리가 구슬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순히 나무의 꽃봉오리 하나를 두고도 남한은 밥알, 북한은구슬 을 연상할 만큼이니 앞으로 언젠가 통일의 그 날이 와도 같은 민족으로서 의 동질성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박태기나무와 구슬꽃나무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박태기나무 보다 낭만적인 구슬꽃나무에 점을 찍고 싶다. 본래 우리의 산하에 자라던 나무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 중국에서 시집 왔다. 아름다운 꽃 방망이를 감상하기 위하여 본 고향에서도 널리 심고 있으며 일본을 거쳐 미국까지 퍼져 있는 정원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중부이남의 절에 흔히 심겨진 것으로 보아 스님들 을 통하여 수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겨울이면 옷을 벗어버리는 낙엽수이고 키 3∼4m로 자라는 것이 고작이다. 나무 껍질은 매끄럽고 회백색이어서 겨 울에 보면 조금은 처량해 보인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아기 손바닥만한 크기의 잎은 거의 완벽한 하트모양이다. 두껍고 표면은 윤기가 있으며 5개 의 큰 잎맥이 발달하고 뒷면은 황록색이다. 열매는 작은 콩깍지모양으로 다 닥다닥 붙어서 겨울을 넘기고도 달려있다. 콩과의 식물이므로 땅이 척박하여 도 가리지 않으며 무리 지어 심어도 서로 싸움질 없이 사이좋게 잘 자라 준다. 껍질과 뿌리는 민간약으로 쓰이며 삶은 물을 마시면 오줌이 잘 나오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 중풍, 고혈압을 비롯하여 통경, 대하증 등 주로 부인병에 대한 효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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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팥꽃나무

   

전 라남도 해남에서 목포 쪽으로 길쭉하게 나온 화원반도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다. 20년도 훨씬 전 4월 중순의 어느 봄날 뽀얀 먼지를 날리는 털털이 시골버스에 실려 해남 대흥사에서 목포로 향하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나지막한 야산 곳곳에 붉은 자주 꽃 방망이를 달고 있는 자그마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진달래나 산철쭉은 분 명 아닌데, 누구네 자손이며 이름은 무엇일까?. 무작정 버스에서 내려 쫓아 갔다. 이렇게 시작한 팥꽃나무와의 첫 만남을 필자는 첫사랑만큼이나 가슴 깊숙이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다 자라도 허리 춤 남짓한 피그미 나무로 잎이 나오기 전에 동전크기 남짓한 꽃이 3∼7개씩 보송보송한 꽃잎을 선보인다. 작은 가지를 감싸듯이 나무마다 이런 꽃 무리가 수십개 모여 실타래를 풀어놓듯이 피어 올라간 다. 곱고 아름다운 보기 드문 우리 강산의 우리 꽃이다. 작달막한 키에 무리지어 꽃피는 모습은 정원이나 도로 가의 조경수로 제격이다. 온 나라 여기저기에,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 있는 한산도까지 조경이라면 ‘일 본 철쭉’으로 뒤덮지 말고 우리의 아름다운 팥꽃나무 심기를 권하고 싶다. 이 나무의 생활터전은 대체로 화원반도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올 라간다. 장산곶에서 잠깐 외도를 하여 넓은잎 팥꽃나무라는 이복동생을 만들 어 두고 북으로 평안도까지 이어진다. 모두들 싫다고 질겁하는 바다 갯바람 과 마주하기를 좋아하여 일부러 심지 않는다면 내륙으로는자진하여 들어와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라는 곳 자체가 거름기라고는 씨알도 없는 황토 이니 너무 습하지만 않으면 사람들이 가져다 심어도 투정을 하지 않는다.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 살다보니 땅위의 자기 키보다 더 깊이 뿌리를 뻗는다. 줄기는 보라 빛이 들어간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새 가지는 털이 덮여 있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길쭉하고 양끝은 동그스름하며 톱니가 없다. 열매는 한 여름에 흰빛으로 익는다. 팥꽃나무란 이름은 꽃이 피어날 때의 빛깔이 팥알의 색깔과 비슷하다하 여 ‘팥 빛을 가진 꽃나무’란 뜻으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또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는 이 꽃이 필 때쯤 조기가 많이 잡힌다하여 ‘조기꽃나무’ 라고도 한다. 그의 강한 생명력을 이어 받으려는 듯이 잎이 피기 전의 꽃봉오리를 따서 말린 것을 완화(莞花) 혹은 원화(원花)라고 하여 귀한 한약재로 쓰인 다. 동의보감에는 “맵고 쓰며 독이 많다.…옹종, 악창, 풍습증을 낫게 하 며 벌레나 생선 물고기의 독을 푼다하여 주로 염증의 치료제로 쓴다”고 했다. 팥꽃나무는 팥꽃나무과의 서향 무리에 들어가며 서향, 백서향, 삼지닥나 무, 두메닥나무 등 모두 아름다운 꽃과 향기가 특징이다. 이들 중 팥꽃나 무만은 향기가 강하지 않으며 잎이 어긋나기하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마주 나기 하는 것도 특별함이다. 영어이름 다프네(Daphne)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아폴론의 끈질긴 구애를 피하여 월계수가 되어 버린 아름다운 여신 다프네 에서 따온 것이다.





106] 라일락

   

‘4 월은 잔인한 달 /언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을 욕망과 뒤 섞어 놓는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영국 시인 토머스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시작부분이다. 제1차 세계대 전 후 황폐해버린 유럽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1922년의 작품이다. 라일락은 엘리엇의 노래에서처럼 춥고 바람 부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목련, 개나리, 진달래 등의 봄꽃이 떨어져 버리고 새 잎이 제법 자리 를 잡아갈 즈음 연보라나 새하얀 작은 꽃들이 구름처럼 모여 피는 꽃나무 이다.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향긋한 꽃내음으로 온 몸이 나긋나긋해져 녹아 내려 버릴 것 같은 라일락, 젊은 연인들의 꽃이요, 향기다. 영어권에서는 라일락이라 부르며 프랑서에서는 리라라고 한다. 60년대를 풍미한 가요 ‘베사메무쵸’는 ‘…리라 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 리라 꽃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로 이어진다. 스페인어로 나에게 키스해 주세요란 노래말처럼 라일락의 꽃향기는 첫사랑의 첫 키스 만큼이나 달콤하 고 감미롭다. 꽃말처럼 낭만과 사랑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 나무의 순수 우리말 이 름이 ‘수수꽃다리’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달리 는 꽃 모양이 옛 잡곡의 하나인 수수 꽃을 너무 닮아 ‘수수 꽃 달리는 나무’가 줄어 수수꽃다리란 멋스런 이름이 붙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수 꽃다리와 라일락은 각자의 이름을 따로 가진 다른 나무이다. 그러나 우리나 라의 수수꽃다리인지 아니면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수입꽃나무로 들여와 온 나라에 퍼진 라일락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전문가도 어렵다. 사실 라일락은 중국에 자라는 수수꽃다리를 유럽 사람들이 가져다가개량한 것을 우리가 다시 수입하는 경우도 있으니 크게 다르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수수꽃다리의 고향은 추운 북쪽지방의 석회암 지대이나 우리나라 어디에 나 옮겨 심어도 까다롭게 굴지 않고 잘 자라준다. 키가 4∼5m에 이르는 작은 나무이고 가지는 구부러지고 넓게 퍼진다. 잎은 긴 잎자루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마주보기로 달린다. 두껍고 표면이 약간 반질반질한 잎은 거의 완벽한 하트모양이다. 꽃향기와 함께 아름다운 사랑의 상징이다. 원뿔모양 의 꽃차례에 수십 송이씩 피어나고 긴 깔때기 모양의 꽃은 꽃부리가 4갈래 로 벌어진다. 꽃 색깔은 엷은 보랏빛이 대부분이지만 하얀 꽃도 있다. 수 수꽃다리 이외에도 정향나무, 개회나무, 꽃개회나무 등 모양이 서로 비슷한 나무가 우리의 산에 여럿 있다. 특히 정향(丁香)나무는 예부터 향료와 약 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향나무는 전혀 엉뚱한 두 나무를 두고 같은 한자를 표기하여 많은 혼란이 있다. 향료로 쓰는 정향나무는 열대의 몰루카제도 원산인 늘 푸른 작은 나무로서 꽃봉오리가 피기 전에 채취하여 말린 것이다. 증류하여 얻어지는 정향유는 화장품이나 약품의 향료 등으로 이용된다. 정향은 식품 ·약품·방부제를 비롯하여 진통제 등 쓰임새가 넓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북부지방에 자라는 수수꽃다리와 가까운 집안간인 정향나무이다. 열대의 상록 정향나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데, 꽃에 향 기가 있다는 것 때문에 같은 나무처럼 알려지고 있다. 기록에 나오는 ‘정 향’이 우리의 수수꽃다리 종류인지 아니면 향료로 쓰는 열대지방의 정향나 무인지 구분이 어렵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07] 능금나무

   

능 금은 배, 감,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의 주요한 옛 과일이었다. 세계적으로는 약 25종이 유럽, 아시아 및 북아메리카에 걸쳐 자라고 있다. 중국의 기록으로는 1세기경에 임금(林檎)이라 불렀던 능금을 재배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 능금보다 길고 큰 열매를 가진 과일나무가 남쪽에서 들어왔 는데, 이것을 내(奈)라 했다 한다. 임금은 중국의 과일이고, 내는 오늘날의 서양사과를 말하는 것으로도 추정한다. 대체로 삼국시대쯤 임금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기록으로는 송나라의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1103)에 ‘내빈과(奈○果)는 임금 을 닮고 크다’ 하였고 고려도경(1124) 권23 잡속 토산(土産)에 보면 일본 에서 들어온 과일에 능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처음이다. 동국이상국집 고 율시에는 ‘… 붉은 능금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아마도 그 맛은 시고 쓰리 다’라 하여 구체적인 생김새와 맛까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태종 12년(1412)과 13년 종묘에 올리는 햇과일로 능금이 등장하고, 쪼개고 깎아서 쓸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올릴 것인지를 두고 대신들의 논란이 있었다 한다. 그 외 조선왕조실록에는 엉뚱한 계절에 능금 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여러 번 있다. 이처럼 능금은 우리의 주요한 과일로서 명맥을 이어왔고 개화 초기까지 만 하여도 개성과 서울 자하문 밖에 흔히 재배하고 있었으나 다른 과일에 밀려 지금은 없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능금으로 알고 있는 이 과일이 중 국의 임금이 들어와서 능금이 된 것인지 아니면 경북, 경기, 황해도 등지 에 야생상태로 자라는 순수 토종 능금나무의 열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능금과 같은 과일로 흔히 알고 있는사과(沙果)는 무엇인가? 훈몽자회에 보면 금(檎)은 능금 금으로 읽고 속칭 사과라고 한다 하여 벌 써 500년 전에도 뒤섞어 쓰인 것 같다. 지금도 능금과 사과의 명칭에 대 한 논란이 끊이지 않으나,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시험장을 개설하고 각종 개량 과수묘목을 보급할 때 선교사나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능금이 달 리는 나무’를 일단 사과나무로 보는 것이 혼란스럽지 않다. 사과는 유럽인들이 즐겨한 과일로서 얽힌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금단의 열매 사과를 따먹다가 쫓겨난다. 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불 화(不和)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 한 개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에게 줌으로써 급기야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분 쟁을 가져오는 불씨를 ‘파리스의 사과’라고 한다. 그 외 활쏘기의 명수 윌리엄 텔의 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 등 서양 문화에 비친 사과의 의미는 여러가지이다. 능금나무는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키 10m 정도에 이르고 어린 가지 에는 털이 많다. 잎은 타원형이고 어긋나며 가장자리에는 잔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분홍색으로 피고 다섯장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가을에 노란빛 이 도는 열매가 붉게 익으며 겉에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두 나무는 매우 비슷하여 구분이 어려우나 능금은 꽃받침의 밑부분이 혹처럼 두드러지고 열매의 기부도 부풀어 있다. 사과는 꽃받침의 밑부분도 커지지 않고 열매의 기부도 밋밋하다. 또 능금은 사과에 비해 신맛이 강하 고 물기가 많으며 크기도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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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귀룽나무

   

귀 룽나무라는 이름은 구룡목(九龍木)이라는 한자 이름에서 유래했다. 불교의 연중 행사로 관불회(灌佛會)가 있다. 석가 탄생 때 구룡(九龍)이 하늘에서 내려와 향수로 석가의 몸을 씻고, 지하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그 발을 떠받쳤다고 하여 공동으로 제사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평안북도 운산군의 구룡강, 금강산의 구룡폭포를 비 롯하여 곳곳에 구룡이란 이름이 많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의주의 압록강변 에 구룡연(九龍淵)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세종 때 구룡 봉화대가 설치되었다 한다. 의주의 구룡 근처에 특히 많이 있어서 처음 ‘구룡나무’가 발음이 쉬운 귀룽나무가 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조선조 궁궐 여기 저기에 이 나무가 특히 많은 것은 육진(六鎭)을 개척하는 등 유난 히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는 일에 골몰하였던 조선초기의 정책적 배려와도 상관이 있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북한에서는 ‘구름나무’라고 부른다. 연초록의 새잎 위로 하얀꽃이 무리지어 피는 모양은 여름날 뭉게구름을 연 상케 한다. 키가 10∼15m까지 자라고 지름도 거의 한아름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평지보다는 높은 산이라면 우리나라 어디에나 자란다. 대체로 중부 이북에 많으며 일본, 중국, 유럽에도 분포한다. 식물학적으로는 벚나무 무리에 들어 가는데, 모양새는 벚나무와는 다르다. 우선 나무껍질은 흑갈색이며 거의 세 로로 갈라져서 가로로 갈라지는 벚나무와 구별된다. 어린가지를 꺾거나 껍질 을 벗기면 거의 악취에 가까운 냄새가난다. 파리가 이 냄새를 싫어하여 옛 사람들은 파리를 쫓는 데도 이용하였다고 한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모양으로 끝은 뾰족하며 밑은 둥글고 잔톱니가 있다. 이른봄 어린잎을 나물로 먹기도 하는데 쓴맛이 강하여 몇 번 우려낸 후 먹는다. 꽃은 벚나무와는 달리 늦봄 잎이 나온 다음 새가지 끝에 흰빛으 로 피며 꽃차례는 밑으로 처지면서 원뿔 모양이다. 신록의 싱그러운 잎을 배경으로 하얗게 달리는 꽃은 화창한 봄날의 대지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가로수로 일품이며 꽃필때 보면 가버린 계절의 잔설(殘雪)을 연상케할 만큼 하얀꽃이 매력적이다. 열매는 둥글고 여름에 검게 익으며 벚나무에 달리는 버찌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비슷하다. 그냥 날 것으로 먹기에는 너무 떫 어 사람은 물론 산새 들새들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작은 가지를 말린 것을 구룡목(九龍木)이라 하여 민간약으로 이용된다. 끓인 다음 음식에 체한 것을 치료하는데 쓰고, 생즙을 낸 것은 피부가 헌 데를 아물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꽃이나 잎의 모양차이에 따라 털귀룽나무, 서울귀룽나무, 차빛귀룽나무 등의 여러 품종이 있다. 또 귀룽나무와 닮은 종류에 개벚지나무가 있다. 모양이 너무 비슷하여 차이점을 찾아내기가 어려우나 잎 뒷면에 작은 사마 귀모양의 분비세포(腺點)가 흔하지 않고 꽃차례 밑에 작은 잎이 있으면 귀 룽나무, 반대로 선점이 촘촘하고 꽃차례 밑의 작은 잎이 없으면 개벚지나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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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곰솔

   

곰 솔은 해송(海松)이라고도 하며 이름 그대로 바닷가에 자라는 소나무이 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감히 살아갈 엄두도 못내는 모래사장, 바닷물이 수 시로 들락거리는 곳에서도 지평선이 아련한 바다의 풍광을 즐기면서 거뜬히 삶을 이어간다. 파도가 포말(泡沫)이 되어 날아 다니는 소금 물방울을 맞 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 강인함이 돋보인다. 수 십 그루가 모여 자라는 특성 때문에 억센 바닷바람으로부터 동네를 보호해 주고 농작물이 말라 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남해안과 섬 지방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강릉, 서쪽은 경기도까지 남 한의 바다를 끼고 대체로 십여 리 남짓한 사이에 벨트 모양으로 자란다. 그러나 그 강인한 생명력은 본래 소나무의 생활터전인 내륙 깊숙이까지도 들어가 당당히 경쟁하고 있어서 해송이라는 그의 별명이 무색해 지는 경우 도 흔하다. 일본 남부와 중국의 일부에도 분포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바닷 가에 자란다. 그러나 옛 문헌에 나오는 해송은 지금의 곰솔이 아니라 잣나 무를 말한다. 신라 때 당나라로 유학 가는 학생들이 학비에 보태 쓸 목적 으로 가져간 잣을 두고 중국인들은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의미로 해송자(海 松子)라 한 것이다. 같은 나무를 두고 곰솔과 해송이란 이름은 거의 같은 빈도로 쓰인다. 소나무의 줄기가 붉은 것과는 달리 해송은 새까만 껍질을 가지므로 흑송(黑 松)이라 하였는데, 순수 우리말로 검솔이라 하다가 곰솔이 되었다. 자라는 곳으로 보아서는 내륙에도 흔히 자라므로 해송보다는 곰솔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소나무와곰솔은 유전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다. 그래서 흔히 소나무 종류를 이야기 할 때 이 둘을 묶어서 한 다발에 바늘잎이 둘씩 붙어 있 다고 이엽송(二葉松), 나무의 성질이 단단하다하여 경송(硬松)이라 부른다. 여러 가지 비슷한 면도 있으나 따져보면 자기 개성이 비교적 명확하여 둘 을 구분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곰솔의 껍질은 강렬한 자외선에 타 버린 듯 까맣게 보인다. 또 바늘잎 은 너무 억세어 손바닥으로 눌러보면 찔릴 정도로 딱딱하고 새순이 나올 때는 회갈색이 된다. 반면에 소나무는 아름다운 붉은 피부를 갖고 잎이 보 드라우며 새순은 적갈색이다. 이런 특성을 두고 곰솔은 남성적이고 소나무는 여성적이라고 말한다. 꽃가루를 받아 교배를 시키면 두 나무의 중간쯤 되는 ‘중곰솔’이란 튀기가 생긴다. 자연상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양부모의 좋은 점을 물 려받아 더 빨리 자라고 더 곧게 되는 성질을 갖기도 한다. 물론 못된 점 만 닮은 망나니도 태어나는 것은 동물의 세계나 마찬가지다. 곰솔은 어릴 때 생장이 대단히 빨라서 소나무를 능가하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 추월 당 하고 만다. 또 나무의 성질은 소나무 보다 못하나 곧게 자라는 경향이 있 어서 남부지방의 바닷가에는 심을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곰솔은 제주시 아라동의 천연기념물 160호이며, 그 외 익산 신작리의 188호, 서천 신송리 270호, 부산 수영동의 353호, 전주 삼천동의 355호 곰솔이 역시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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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골담초

   

골 담초(骨擔草)란 글자 그대로 뼈를 책임지는 풀이란 뜻이다. 옛사람들 이 이름을 붙일 때부터 나무의 쓰임새를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뿌리를 한 약재로 쓰고 있다. 풀초(草)자가 들어 있어서 초본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자그마하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나무이다. 귀여운 나비모양의 노랑꽃을 감 상할 수 있고 약으로 쓸 수 있으므로 민가의 양지바른 돌담 옆에 흔히 심 는다.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진 콩과식물이라 척박한 땅이라도 잘 자란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오른쪽으로 돌아 5분쯤 올라가면 고려 우왕 3년(1377)에 창건한 국보 제19호 조사당(祖師堂)이란 자그마한 목조건물이 있다. 건물의 처마밑 철망 안에 별로 볼품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데, 신선 집 꽃이란 의미의 선비화(仙扉花)란 팻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 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바라보며 시 를 짓기도 하였다. 이름은 골담초라 한다"라고 하여 이 나무의 의미가 심 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1730년쯤 조사당의 선비화를 보고 적어둔 기록 이 있다. "지팡이가 싹이 터서 자란 나무는 햇빛과 달빛은 받을 수 있으나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는다. 지붕 밑에서 자라고 있으나 지붕은 뚫지 아니 하고 높이는 한 길 남짓하지만 천년세월을 지나도 한결 같다. 광해군 때는 경상감사정조(鄭造)가 절에 왔다가 이 나무를 보고 '옛 사람이 짚던 것이 니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라고 하면서 톱으로 잘라 가지고 갔다. 나 무는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나와 전처럼 자랐다. 다음 임금인 인조 때 그는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다. 지금도 이 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며 또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스님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부른다" 고 하였다. 함부로 선비화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다가 화를 입었다하여 나무의 신비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 원산으로 가정에 흔히 심고 있는 낙엽활엽수로서 사람 키 정도 자 라는 작은 나무이다. 줄기가 옆으로 늘어지면서 회갈색을 띄고 많은 포기 를 만든다. 가지는 둥근 것이 아니라 다섯 개의 능선이 특징이다. 잎자루 의 아랫부분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발달하고 대궁의 좌우 2개씩, 모두 4개 의 잎이 달려서 우리는 이런 경우 우수우상복엽(偶數羽狀複葉)이라 부른 다. 작은 잎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이고 타원형이며 두껍고 표면에 윤기가 있다. 꽃은 4-5월에 노랑나비 모양으로 한개씩 원뿔모양의 꽃차례 에달린다. 노랗게 피는 꽃을 따서 쌀가루에 섞어 시루떡을 쪄 먹기도 한 다.

열매는 콩꼬투리 모양으로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걸쳐서 익는다.

뿌 리는 약용으로 쓰는데, 생약의 골담근이란 뿌리를 말린 것이다. 한방 에서 해수.대하.고혈압.타박상.신경통 등에 처방한다. 금작목(金雀木), 금 작화, 금계화(金鷄花)등 노오란 꽃의 색깔 때문에 '금(金)'자가 들어간 여 러 별명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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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아까시나무

   

'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 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생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우리에게 잊어버린 고향의 정경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박화목의 동요이다. 우리와 너무 친해져 버린 이 나무는 언제부터 우리 땅에 꽃향기를 풍기기 시작하 였을까. 1891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인천의 무선회사 지점장 사가끼란 사람 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묘목을 구입하여 인천 공원에 심은 것이 시초였 다. 미국을 고향으로 하는 이 나무는 그 후 1910년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 면서 강토의 구석구석을 일제의 점령군마냥 누비게 된다. 콩과식물이라토 사가 흘러내릴 정도로 황폐해진 민둥산에도 금세 뿌리를 내릴 만큼 생명력 이 강하고 잘라 버려도 금세 싹이 나오므로 연료로도 적합했기 때문이다.

광복 후에도 여전히 아카시아 심기는 이어져서 한때는 우리나라에 심은 전체나무의 10%에 육박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동요 '과수원 길'처럼 고향 의 정경을 복사꽃 살구꽃보다 아카시아 꽃향기로 더 쉽게 느끼게 되었다.

우유 빛으로 치렁치렁 달리는 꽃의 군무(群舞)와 코끝을 스치는 그 매혹 적인 향기에 취해 우리는 유년의 꿈과 낭만을 가져다 준 나무로 기억한다.

그 러나 이 나무가 소나무 등 재래 수종의 생장을 방해하고 장소를 가리 지 않고 뿌리를 마구 내리는 바람에 천하의 망나니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일제침략과 함께 들어온데다 새싹의 생장이너무 왕성하여 한 번 심 어두면 주위의 다른 나무를 제치고 혼자만 사는 것처럼 보인다. 더더욱 용 서할 수 없는 것은 무엄하게도 조상의 묘소를 뚫고 들어가는 행실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다. 햇빛을 너무 좋아하는 녀석이라 널찍한 산소 곁도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것은 사실이나, 들여올 당시의 헐벗은 우 리나라 산의 상태로 보아서는 최상의 선택일 따름이지, 일제가 못된 짓을 하였다고 아카시아까지 같은 도마에 올려놓을 수는 없다. 다른 나무를 못 살게 하는 문제도 땅이 척박할 때 뿐이고 차츰 비옥해지면 서서히 주위의 토종나무에게 자리를 내주는 염치도 가지고 있다.

필자가 아카시아를 예쁘게 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선 꽃은 '향긋한 꽃 냄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벌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수 와 같아 우리나라 꿀 생산의 70%를 아카시아 꽃에서 딸 정도이다. 1년에 1천억원대의 수입을 가져다 준다. 다음은 나무의 쓰임새다. 빨리 자라는 나무답지 않게 단단하고 강하며, 최고의 나무로 치는 느티나무 비슷하게 노르스름한 색깔이 일품이다. 그래서 원산지에서는 힘을 받는 마차바퀴로 쓰였고 오늘날은 고급가구를 만드는 재료로, 없어서 못쓴다.

아카시아종류의 나무는 열대지방에 주로 자라는 진짜 아카시아(Acacia) 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미국 원산의 아까시나무(obinia)가 있다. 우리가 '아카시아'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나무는 아까시나무라고 하여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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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고추나무

   

오 늘날의 우리 음식에 고추는 빠질 수 없는 조미료이지만 고추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는다. 기껏 조선 중기나 초기 정 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우리를 독살하기 위하여 들여왔으나 오히려 입맛에 맞아 우리 것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대로 일본의 문헌에 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자기네한테 들어왔다는 내용이 있어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처음 고추를 맛본 우리의 선조들은 하도 먹기가 고생스러워 고 초(苦草)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나중에 고추가 되었다 한다. 차츰 서민들에게 까지 널리 퍼져 친숙해져 버린 고추와 닮은 나무가 바로 고추나무이다. 셋 으로 벌어져 달리는 잎의 모양이나 작고 갸름한 꽃봉오리와 하얗게 핀 꽃 모양이 고추 잎을 금세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 천년 전부터 우리의 산에 자라던 이 나무의 고추가 들어오기 전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특별히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없는 ‘고추나 무’ 이야기를 옛 선비들이 아는 척하여 기록에 남겨둘리가 없으니 대답은 고추나무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옛 사람들이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천덕꾸러기였든 말든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새하얀 꽃과 예쁜 방패모 양의 열매가 고추나무만이 갖는 매력이다. 우리나라 어느 계곡이나 산자락에서 흔히 만나는 이 나무는 새잎이 돋 아나기 시작하여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들어설 즈음 한 뼘이나 됨직 한 길 다란 꽃대를 쑤욱 내밀고 자그마한 꽃봉오리를 송골송골 매단다. 이어서 살 포시 벌어지는꽃봉오리마다 하얀 꽃들이 매달리는 모습은 멀리서도 우리들 의 눈길을 끈다. 연초록 고춧잎 모양 잎사귀를 뒷 배경으로 순백의 무리 지은 꽃의 자태는 깨끗함과 순결함 바로 그 자체이다. 나무는 다 자라도 굵기가 팔뚝 정도이고 높이도 기껏 4∼5m가 고작이다 . 어린 가지는 둥글고 잿빛이 들어간 녹색인데 오래되면 나무 껍질은 진한 갈색으로 변하며 세로로 길게 띄엄띄엄 갈라지기도 하는데, 산 속의 평범 한 나무의 어디에서 이런 꽃이 나올까. 우리를 신비롭게 한다. 꽃이 지고 나면 납작하고 약간 부풀어오른 반원형의 열매가 달린다. 처음엔 손톱크기 남짓하다가 익어가면서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해지고 연한 황갈색으로 변한다. 갸름한 열매의 윗 부분이 V자로 살짝 갈라져 있 어서 옛 무사들이 들고 다니던 방패의 축소 모형을 그대로 쏙 빼닮았다. 잎은 손가락 마디 하나 만한 길이의 잎자루 하나에 3개씩 달리고 서로 마 주보기로 붙어 있다. 하나 하나의 잎은 긴 타원형으로 끝은 뾰족하고 밑 부분은 쐐기모양이며 마름모꼴에 가깝다. 옛날 이 나무의 유일한 쓰임새라면 어린 잎은 부드럽고 향기가 있어 살짝 익혀서 나물로 무쳐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고 추나무의 깨끗한 꽃과 특별한 모양의 열매는 메마른 우리의 정서에 활력소 를 넣어줄 힘을 갖고 있을 것 같다. 분별없이 수입하여 아무 곳에나 심어 대는 외래 수종 대신 심어볼 만한 우리의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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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해당화

   

해 당화는 멀리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노래하던 꽃나무다. 고려사에 실린 당악(唐樂)에 보면 '봄을 찾아 동산에 가니/ 고 운 꽃 수놓은 듯이 피었네/ 해당화 가지에 꾀꼴새 노래하고/ ...'라고 하 였으며 동국이상국집의 '해당화'에는 '하도 곤해선가 머리 숙인 해당화/ 양귀비가 술에 취해 몸 가누지 못하는 듯/ 꾀꼬리가 울어대어 단꿈에서 깨 어나/ 방긋이 웃는 모습 더욱 맵시 고와라'라고 읊조리고 있다.

북한의 원산 남동쪽에 있는 명사십리는 바닷가 약 8km가 넘게 펼쳐진 흰 모래밭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이었다. 여기에는 해당화가 해수욕 장을 가로질러 붉게 피어있고 뒤이어 긴 초록빛의 곰솔 숲이 이어지며 흰 모래와 어우러진 옥빛 바다는 명사십리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명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의 해당화는 너무나 유명하여 고전소설 장끼전에도 '명 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한탄마라. 너야 내년 봄이면 다시 피려니와 우 리 님 이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는 내용이 나온다.

몽 금포타령에 나오는 황해도 용연의 몽금포, 권력자의 별장지로 알려진 화진포 등이 모두 해당화로 유명한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황해도 장산 곶 설명을 보면 '3면이 바다에 임하였으며 가는 모래가 바람을 따라 무더 기를 이루고, 혹은 흩어지며, 어린 소나무와 해당화가 붉고 푸른 것이 서 로 비친다'고 하였다.

해 당화는 이름 그대로 바닷가 모래사장이 바로 그가 좋아하는 고향 땅이 다.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금물투성이 모래땅에 뿌리를 묻고 산다. 피어나는 주홍빛 해당화의 무리를마주하고 있으면 애달픈 사연을 묻어 둔 여인의 넋이라도 담겨있는 듯하다. 그래서 1970년대를 풍미하였던 이미 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비롯해 사랑을 노래한 우리의 대중가요에 해당화 는 흔히 등장한다.

꽃 이 가진 상징성만이 아니라 실제의 쓰임새도 많다. 향수의 원료가 되 고 꽃잎은 말려 술을 담그거나 차에 우려 마시기도 한다. 향수를 대신하는 향낭, 즉 향기나는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 다닐 수도 있다. 한방에서는 주 로 뿌리를 쓰는데 치통과 관절염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꽃은 수렴, 진통, 지혈 및 설사를 멈추는 데 쓰인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신경통에 좋다는 소문이 돌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해당화들이 뿌리째 뽑혀나가 고 있는 실정이다. 한자 이름은 해당화(海棠花) 외에 매괴()라고도 하 는데, 특별히 겹해당화를 매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키 작은 꽃나무다. 그러나 깊은 산골이 아니면 전 국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높이 1m 정도이며 줄기와 가지에 예리한 가시가 있고 털이 촘촘하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깃털 모양으로 7-9개의 작 은 잎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새 날개 모양이다. 잎은 두껍고 타원형으 로 주름이 많고 윤기가 있으며 뒷면은 잎맥이 튀어나와 있다. 잔털이 촘촘 하며 선점이 있고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다. 꽃은 새 가지 끝에 꽃대가 나오며 5월에서 8월에 걸쳐서 주먹만한 붉은 꽃이 핀다. 늦여름에 동그란 열매가 붉게 익는다. 정원수로 키워도 주먹만한 꽃송이가 탐스럽고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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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시무나무

   

'한양 천리 떠나간들 너를 어이 잊을 소냐 /성황당 고개 마루 나귀마저 울고 넘네 /춘향아 울지 마라 달래었건만/대장부 가슴속을 울리는 임이여 ....'

흘 러간 옛 노래인 남원 애수이다. 조선시대에 대장부가 출세하려면 연인 과의 이별에 아무리 가슴이 미어져도 괴나리봇짐 둘러 메고 산 넘고 물 건 너 과거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시무나무는 옛 과거 길의 길잡이-이정 표에 쓰인 나무로 알려지고 있다. 큰 마을은 장승이나 솟대로 찾아갈 수 있으나 산길의 수많은 갈림길은 무엇인가 표지가 필요하였다. 5리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는 오리나무, 좀 거리가 벌어지는 10리나 20리 마다는 시무 나무를 심어서 지나가는 나그네가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래도 길을 잃을까 염려되었던지 나그네들은 신고 다니던 짚신이 헤어지면 아무 곳에나 버리지 않고 이런 이정표 나무나 당산목에 걸어두었다 한다.

풍류시인 김삿갓의 시에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 /사십촌중오 십반(四十村中五十飯)'이라 하여 '시무나무 아래의 서러운 손님이 망할 놈 의 마을에서 쉰 밥을 얻어먹었다'는 뜻이다. 한자를 훈이 아니라 음으로 읽어야 멋진 시가 된다. 시무나무는 느티나무나 팽나무와 같이 흔히 동네 를 지켜주는 당산목이나 성황림의 나무로서 따뜻한 밥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김삿갓과 울분을 같이 하던 나무였다.

아 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이고 느릅나무와 그리 멀지 않은 집안간이며 느릅나무과(科)라는 한 무리에 같이 들어간다. 잎의 모양새는 참느릅나무 와 거의 닮아 있으나보다 좁고 길며 잎의 밑 부분이 거의 비뚤어지지 않 았다. 또 작은 가지는 흔히 가시로 변해 있어서 한자로는 가시 느릅나무란 뜻으로 자유(刺楡)라고 한다. 특히 동네 앞 개울가와 같이 자주 낫질로 잘 려나가는 곳의 시무나무는 손가락 길이 만한 험상궂은 가시를 촘촘히 내밀 어 '왜 자꾸 자르느냐?'고 항변할 줄도 안다.

봄 날의 시무나무 새싹은 쌀가루나 콩가루 등 여러 가지 가루를 묻혀서 떡을 만들어 배고픈 백성들의 구황식물 역할도 하였다. 느릅나무 무리 중 에는 비교적 재질이 단단하고 치밀하여 특히 차축의 재료로서는 박달나무 를 초유(楚楡)라 하여 으뜸으로 치고, 다음이 축유(軸楡)라 하여 바로 시 무나무였다. 중국의 시경 당풍(唐風)편에 산유추(山有樞)라 하여 시무나무 에 관한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도 선인들이 좋아한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시무나무는 우리나라의 어디에서나 자라는 흔한 나무라서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로서 학술가치가 크다. 서양에는 아 예 자라지 않고 동양에서도 우리나라와 중국에만 있고 일본에는 없기 때문 이다.

시 무나무 열매는 다른 어떤 나무도 갖지 않은 흥미로운 생김새를 하고 있다. 비행접시처럼 동그란 날개를 가지고 씨가 한 가운데 들어있는 다른 느릅나무 무리와는 달리 시무나무는 씨는 한 구석으로 치우쳐 있어서 한쪽 에만 날개가 반달 모양으로 붙어 있다. 영어 이름 hemiptelea도 반쪽날개 란 뜻이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16] 노린재나무

   

녹 음이 짙어가는 늦봄의 끝자락 5월 말이나 6월초쯤 산에 오르면 숲 속의 큰 나무 밑에서 새하얀 꽃뭉치를 잔뜩 달고 있는 자그마한 노린재나 무를 흔히 만난다. 다섯 장의 갸름한 꽃잎 위로 노랑 꽃밥과 긴 대궁을 가진 수술이 수십개씩 뻗어 있어서 꽃잎은 묻혀버리고 작은 솜꽃이 몽실몽 실 피어나는 듯하다. 은은한 향기도 갖고 있어서 등산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 나무는 노란 재를 만드는 나무, 즉 황회목(黃灰木)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 자초(紫草)나 치자 등 식물성 물감을 천연 섬유에 물들이려면 매염제(媒染劑)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은 명반이나 타닌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옛날에는 가장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나 무를 태운 잿물이었다. 노린재나무는 전통 염색에 매염제로 널리 쓰인 황회 를 만들던 나무이다. 잿물이 약간 누른빛을 띠어서 노린재나무란 이름이 붙 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숲 속의 수많은 이름 없는 자 그마한 나무 하나에 불과하지만 불과 백여 년 전만 하여도 천에 물감을 들일 때 꼭 있어야 하는 귀중한 자원식물이었다. 중종 8년(1514) 의 실록에는 죽청이란 스님이 ‘지금 황회목(黃灰木)으로 돈 버는 일 때문에 곽산(郭山)에 와 있다’고 행적을 기록한 내용이 실 려 있다. 영조26년(1750)에 편찬한 궁중의복의 규범서 상방정례(尙方定例)에 ‘명주를 자주색으로 염색할 때는 한 필에 지초 8근, 황회 20근, 매실 1 근으로 염색한다’하였다. 순조 9년(1809)에 나온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자 초 염색을 할 때는 노란 잿물을 받아 사용한다’고 하여 조선조 때는 황 회가 염색에 빠지지 않은매염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황회를 이용한 염색기술은 멀리 일본까지 수출하기도 하였다. 대 화본초 (大和本草)라는 그들의 옛 책에 따르면 ‘조선사람의 도움을 받아 노린재나무의 잎을 끓인 즙으로 찹쌀을 물들여 떡을 만들고 4각형으로 잘라 서 팔았다’고 하였다. 역시 같은 책에 ‘잎을 건조하면 대개 황색으로 되 고 이것은 염색할 때 명반 대신에 사용하므로 한자 이름은 산반(山礬)이라 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황회를 이용한 염색법은 널리 퍼지게 되 고 제주도의 섬노린재는 일본인들이 아예 탐라단(耽羅檀)이라 부른다. 기껏 다 자라야 사람 키 남짓하고 팔목 굵기가 고작인 줄기를 위로 내밀어 사방으로 가지를 여기저기 뻗친다. 거의 수평으로 긴 타원형의 수많 은 잎을 펼치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이 나무가 살아가는 처지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햇빛을 더 많이 받아 보겠다는 처절한 키다리 경쟁에서는 물려받은 유전인자로는 가당치도 않으므로 일찌감치 포기하였다. 어쩌다 잠깐 들어오는 햇님의 은총을 펼쳐진 잎으로 최대한 받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존전략이다. 그래서 음지는 물론 추위와 메마른 땅, 공해에 찌 든 도심, 갯바람을 마주하는 바닷가까지 씨앗이 어디에 떨어져도 잘 자라는 뛰어난 적응력을 과시한다. 꽃이 지고 나면 팥알보다 좀 굵은 갸름한 열매가 달린다. 초가을에 들 어가면서 익어 가는 열매의 색깔로 노린재나무의 종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곱고 짙푸른 벽색(碧色)의 노린재나무, 흰색의 흰노린재나무, 검은 빛깔의 검노린재나무, 벽색이 너무 진하여 거의 검은 빛으로 보이면 섬노 린재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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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등칡

   

백 두대간의 줄기를 타고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남쪽으로 가지산까지 태 백준령의 깊은 계곡에서 맑은 물만 마시고 살아가는 낙엽 나무덩굴이 있다.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모양은 등나무 같으나 잎을 보면 칡처럼 생 겨서 등칡이란 이름을 가졌다. 또 초본식물인 쥐방울덩굴과 열매가 닮았으나 더 크다하여 큰쥐방울덩굴이라고도 한다. 식물의 잎은 동물로 치면 얼굴에 해당하고 꽃은 생식기관이다. 잎이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꽃 치장에는 온갖 정성을 쏟 는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꿀을 만들고 향기를 내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곤충을 꾄다. 그래야만 암수가 서로를 찾아 수정이란 단계를 거쳐 대를 이어 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등칡은 꽃 모양새를 가꾸는데 감히 아무도 따라 갈 수 없는 독보적인 꽃이다. 흔히 만나는 꽃 모양처럼 몇 장의 꽃잎을 펼치고 가운데에 암술과 수술이 모여있는 벚꽃이나 코스모스 꽃과 같은 평 범함을 그는 처음부터 거부하였다. 신록이 익어 가는 5월 등칡 꽃은 잎이 피어나면서 마치 숲 속의 오케 스트라를 연주하려는 듯 잎자루 사이마다 손가락 굵기의 귀여운 ‘아기 색 소폰’을 매단다. 처음 나팔 부분이 연한 녹색의 삼각형으로 꽃봉오리를 만 들고 있다가 샛노란 꽃을 피운다. 하나 하나가 정확한 삼각형의 꽃잎 3장 은 신기하게도 완전히 피면서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정도의 ‘동굴입구’를 동그스름하게 둘러싸게 된다. U자형의 동굴을 6∼7cm쯤 들어가면 갑자기 동 굴이 넓어지고 끝에 암술이 얌전히 자리 잡고 있다.무엇 때문에 이렇게 괴상하게 생긴 꽃을 만들었을까? 수꽃가루를 잔뜩 묻힌 곤충이 등칡 꽃에 현혹되어 블랙홀 같은 동굴에 들어가면 빠져 나오 기 위하여 바둥거리기 마련이다. 이때 곤충에 묻어 있던 꽃가루를 아낌없이 받아 수정을 간편하게 하자는 속셈이다. 그러나 동굴절벽을 다시 기어올라 나팔입구로 되돌아 나오기는 쉽지 않다. 한마디로 남을 이용하여 목적달성 을 하고 난 다음은 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 비정하다. 덩굴의 길이가 10여m에 달하고 지름 팔목 굵기 정도에 이르기도 하며 새로 나온 가지는 녹색이지만 오래되면 회갈색으로 변하고 갈라진다. 잎은 손바닥을 펼친 크기에 이르고 톱니가 없으며 완전한 하트 모양이다. 가을에 는 길이 10여cm에 엄지손가락 굵기의 긴 타원형 열매가 달리는데 표면에는 6개의 골이 있다. 마치 작은 수세미처럼 생겼다. 등칡의 줄기는 이뇨(利尿) 및 진통제로 쓰이는 한약제이다. 옛 이름은 통초(通草)라고 하여 세종 5년(1423)의 실록기록을 보면 향약(鄕藥)으로 이름 이 나오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황해도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 날 통탈목이라는 상록관목을 통초라고도 하여 한자 이름에 혼란이 있다. 중 국에서는 관목통(關木通)이라고 한다. 등칡을 포함한 쥐방울덩굴 종류에는 신 부전증을 일으키고 때로는 발암물질로도 분류되는 아리스토로킥산(aristolochic acid)이 들어있어 사용에 제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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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튤립나무

   

우 리나라에 가로수가 처음 심기기 시작한 것은 고종 32년(1895) 내무아 문(內務衙門)에서 각 도(道)의 도로 좌우에 나무를 심도록 공문서를 보낸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신작로라는 새로운 길이 뚫리면서 가로수에 적합한 나 무로 알려진 버즘나무, 양버들, 미루나무 등이 수입되기 시작하였고 이때 같이 들어온 나무가 백합나무다. 이 나무의 학명은 ‘Liriodendron tulipife ra’라 하는데, 앞 부분은 희랍어로 ‘백합꽃이 달리는 나무’라는 뜻이며, 뒷 부분은 ‘커다란 튤립 꽃이 달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말 이름 은 백합나무 혹은 튤립나무라고 하여 양쪽을 다 쓰지만 튤립나무가 더 적 합한 말이다. 미국의 중·북부에서 캐나다 남부에 걸쳐 널리 자라는 이 나무는 고향 땅에서도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5∼6월경 6장의 녹황색 꽃잎을 달고 어린 아이 주먹 만한 꽃이 위를 향하여 한 송이씩 피는데 모양이 튤립 꽃을 그대로 닮았다. 튤립 꽃잎에는 볼 수 없는 오렌지 빛 반점이 밑쪽에서 동그랗게 이어져 있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나무에 튤립 꽃이 핀다하여 ‘Tulip tree’라 한다. 또 다른 이름은 ‘Yellow poplar’이다. 높이 30m, 지름 두세 아름을 훌쩍 넘게 자랄 수 있는 큰 나무인데, 자라는 속도가 포플러 뺨친다. 적 당한 습도와 비옥한 땅이라면 십 수년에 벌써 아름드리에 이른다. 목재는 가볍고 부드러우며 연한 노랑 빛을 띠고 광택이 있어 자연스레 ‘노란 포 플러’란 이름이 붙었다. 이외에도 white wood, white poplar, blue poplar, canoe wood 등 수많은 별명이 있다. 이름만큼이나 쓰임새가 많았다는 증 거이다. 나무는 색깔이 연하여 종이를 만들기 위한 표백을 하는 데 약품이 적 게 든다. 또 생장이 빠르므로 대량으로 쓰이는 펄프의 원료는 물론 가구, 목공예, 합판 등에 널리 쓰인다. 옛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가공하기 쉽고 물에도 잘 뜨는 이 나무를 통나무배 만드는 재료로 애용하였다 한다. 빨 리 자라는 나무가 대체로 재질이 좋지 않으나 백합나무는 그렇지 않다. 우리와의 인연은 가로수로 시작하였으나 최근 산림청에서는 베서 이용할 수 있는 경제수(經濟樹)로 이 나무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기 후가 비슷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400여종이 넘는 나무들을 가져다 심어본 결과 우리나라에 적응하여 잘 자라는 몇 안되는 나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스라이 먼 옛날 약 1억년 전인 백악기부터 지구상에 터를 잡아온 이 나무는 바깥 모양에도 특별함이 있다. 길다란 잎자루에 어른 손바닥만한 커다란 잎은 갸름하고 톱니가 있는 평범한 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잎의 끝 부분은 직선, 가장자리는 간단한 곡선으로 처리하여 소박한 단순미가 그의 매력이다. 줄기는 회백색으로 세로로 골이 지면서 조각조각 갈라지고, 훌쩍 큰 키 에 독특한 잎은 넓은 원뿔형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공해에 강하고 병 충해가 거의 없으며 전국의 어디에나 심을 수 있고 가을이면 노란 단풍이 운치를 더한다. 그래서 이역만리 고향 땅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사람들 의 사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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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수국

   

한 자 이름이 수구화(繡毬花)인데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 이란 의미이다. 옛 사람들이 이름을 붙일 때는 특징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금세 알 수 있게 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수구화란 모란처럼 화려한 꽃이 아니라 잔잔하고 편안함을 주는 꽃이다. 꽃 이름은 수구화에서 수국화 , 수국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학명(學名)에 어쩐지 일본 냄새가 나는 ‘otaksa’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18세기 초 서양의 문물이 동양으로 들어오면서 약용식물에 관심이 많 은 의사 겸 식물학자들은 앞 다투어 동양으로 진출하게 된다. 오늘날 학명 에 식물이름을 붙인 명명자(命名者)로 흔히 만나는 네덜란드인 주카르느(Zuca rnii)씨는, 당시 약관 28세의 나이에 식물조사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와 있 다가 오타키라는 기생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변하게 마련이다. 오래지 않아 변심한 그 기생은 다른 남자에게 가 버렸다. 가슴앓이를 하던 주카르느씨는 수국의 학명에다 오타키의 높임말 otaksa를 넣어 변심한 애 인의 이름을 만세에 전해지게 하였다. 수국의 꽃은 처음 필 때는 연한 자 주색이던 것이 푸른색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연분홍 빛으로, 피는 시기에 따 라 색깔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배신자에 대한 보복으로서는 멋있고 낭만적인지 아니면 조금은 악의적인 보복인지 가름이 어렵다. 수국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주물러 예쁘고 달콤하게 만드는데 소질이 있는 일본인들은 중국수국을 가져다 이리저리 교배시켜 오 늘날우리가 키우는 원예품종 수국으로 만들었다. 불행히도 이 과정에 암술 과 수술이 모두 없어지는 거세를 당하여 종자를 맺을 수 없는 석녀가 되 어 버렸다. 유희의 물명고(物名攷)를 보면 수국은 처음에 파랗다가 다음에 하얗게 되며 모란과 거의 같은 때 핀다하였다. 이로 보아 옛 어른들은 지 금 우리가 감상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원예품종 수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중국수국을 심고 즐긴 것으로 생각된다. 수국은 중부 이남의 절이나 정원에 널리 심는 작은 나무이다. 키 1m정 도까지 자라며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이나 녹색에 가까운 여러 개의 줄기가 올라와 포기를 이루고 있어서 나무가 아니라 풀처럼 보인다. 잎은 달걀모양이고 두꺼우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표면은 짙은 초록빛으로 광택이 있다. 초여름 줄기 끝마다 작은 꽃들이 서로 옹기종기 모여 초록 잎을 배경 으로 연한 자주 빛을 띠는 동그란 꽃 공이 만들어진다. 꽃마다 4∼5개씩 붙어 있는 꽃잎은 꽃받침이 변하여 그렇게 보이는 가짜이다. 어느 쪽이든 이를 밝히는 일은 식물학자들의 몫이고 감상하는 이들이야 예쁘면 그만이다. 꽃의 색깔은 키우는 곳, 흙의 성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수 국과 비슷한 무리에는 산에서 흔히 만나는 산수국과 울릉도에 자라는 등수 국이 있다. 이들은 모두 생식기능을 가진 정상나무로서 자식 못 낳은 수국 의 처지를 동정하는 듯도 하다. 그 외 역시 일본에서 들여온 나무수국은 원뿔모양 꽃차례에 훨씬 많은 꽃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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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박쥐나무

   

박 쥐는 생김새가 쥐와 비슷하고 낮에는 음침한 동굴 속에 숨었다가 밤 에만 활동하며 앞 얼굴이 흉측 맞게 생겨서 사람들이 싫어한다. 왜 하필이 면 이 나무는 허구한 이름을 놔두고 ‘박쥐의 나무’로 붙였느냐고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쥐나무의 잎을 한번 보고 박쥐의 날개를 연상해 보면 금세 너무 닮은 꼴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박쥐의 생태나 얼굴모양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박쥐의 날개를 보고 이름을 따온 것이다. 끝이 3∼5개 살짝 갈라진 커다란 잎에, 나무와 나무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라도 잠시 비쳐지면 이리저리 뻗은 잎맥은 마치 펼쳐진 박쥐날개에서 실핏줄을 보는 듯하다. 잎의 두께가 얇고 잎맥이 약간씩 돌출되어 있어 더더욱 닮아있다. 박쥐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주위 의 키다리 나무들과 햇빛을 받기 위한 무한경쟁에 무모하게 뛰어든 것이 아니라, 숲속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서로 혼자만 살겠다 고 높다랗게 하늘로 치솟아서 잔뜩 잎을 펼쳐 놓은 비정한 이웃 나무들에 게 기대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는데 필요한 구조조정을 아득한 옛날부터 과감히 수행했다. 우선 덩치는 키 3∼4m로 줄이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작고 촘촘한 잎은 아예 없애 버렸다. 넓고 커다란 잎을 듬성듬성 만들어 산바람에 흔들 리는 나무 사이로 어쩌다 들어오는 햇빛을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꽃 모양도 독특하여 손가락 두 마디 길이나 됨 직한 가늘고 길다란 연노랑의 꽃잎이 살짝 벌어지면서 속의노랑 꽃술을 다소곳이 내밀고 있다. 박쥐나무 꽃에서 오는 느낌은 층층시하에 조심조심 살아가던 조선시대의 가련한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잠깐 외출을 하려는 그 애잔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학생들과 함께 책으로 배운 나무 모양도 익히고 표본 채집을 위하여 산에 가는 일이 많다. 나무 이름을 알려주면 우르르 달려들어 꽃이나 열매 가 달리고 잎이 깨끗한 표본을 만들려고 경쟁적으로 가지를 잘라댄다. 학점 이라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나무는 좀 잘라주어도 상관이 없는데, 박쥐나무와 같이 키가 작고 잎이 많이 달리지 않은 나무 는 30여명의 학생들이 가지 하나씩만 잘라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게 바로 박쥐나무”라는 나의 말 한마디로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해 버린다. 공부를 시킨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생명을 빼앗겨 버린 불쌍한 박쥐 나무에게 나는 말한다. “잘 가거라.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커다란 나무로 다시 태어나 큰소리 땅땅 치며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감히 용서를 빌어본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만나는 낙엽활엽수 작은 나무로서 흔히 줄기가 여럿 올라오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앞뒤에는 털이 있다. 꽃은 암 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초여름에 핀다. 콩알 크기의 열매는 바깥의 육질이 안쪽의 씨를 둘러싸는 핵과(核果)이며 가을에 짙은 푸른색으로 익는다. 봄 에 나오는 어린잎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뿌리는 팔각풍근(八角楓根)이라고 하며 한방에서는 진통제나 마취제로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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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박달나무

   

단 군신화를 보면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세상을 다스린다. 단(檀)은 박달나무를 의미하므로 단군신화에 나 오는 신단수를 박달나무로 생각하고 있다. 5천년전의 신화에 나오는 나무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다는 자체가 무리이겠으나 선조들과 가까이 있 었던 나무만은 틀림이 없다. 옛 가옥의 생활필수품으로 안방마님의 공간인 대청마루 한쪽 구석에는 어김없이 다듬이 돌과 다듬이 방망이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명주옷감을 감아 다듬이질 할 때 쓰던 홍두깨와 함께 시집살이 고달픔의 상징물이다. 가을밤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에 맞추어 방망이질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 던 옛 여인의 애환이 서린 생활도구였다. 또 빨래방망이나 디딜방아의 방아 공이와 절구공이, 아름다움을 가꾸던 마님의 얼레빗,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졸들의 육모방망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도깨비를 쫓아내는 상상의 방망이도 바로 박달나무다. 지금도 단단하고 힘센 것을 말할 때는 박달나무 방망이로 대표된다. 남 성의 심벌을 은유적으로 비유하는데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무명의 시민으 로부터 얻어맞는 방망이도 역시 박달나무다. 나무를 찍으면 오히려 도끼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하다 하여 일본인들은 아예 도끼 분질러지는 나무란 뜻 으로 오노오레(釜折)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잘 자랐으므로 박달고개란 지명도 흔히 있다. 대표적 인 곳은 충북 제천시 봉양면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경계에 있는 작은 고개인데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우리 님아…’로 이어지는 옛 노래 가락으로 익숙해진 곳이다. 고려사에 보면 지금의 박달재와 동일한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종 4 년(1217) 김취려 등이 충주, 원주 사이로 거란군을 추격하다가 맥곡에서 교 전하였으며, 박달재까지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박달나무가 많이 나는 곳은 박달재에서 머지않은 문경새재가 흔히 알려 져 있다. 어느 시인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목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 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고 읊조리고 있다. 이렇게 박달나무가 유명한 탓에 박달이란 이름이 붙은 나무도 많다. 개 박달나무, 물박달나무는 진짜 박달과 사촌쯤은 되나 까치박달은 서어나무에 가까워서 열촌도 넘고 가침박달은 장미과(科)에 속하므로 아예 족보가 다르 다. 사람들이 이름이 헷갈린다고 투덜대지만 이름을 붙여준 사람 탓이지 나 무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 한아름이 넘는 큰 나무가 되기도 한다. 어린 가지에서 제법 팔뚝만한 굵은 가지도 벚나무처럼 가로 숨구멍이 있으나 차츰 굵어지면 줄기는 큰 조각으로 벌어져 비늘처럼 떨어진다. 잎은 손바닥 반만하고 달걀모양으로 밑은 둥글고 끝은 뾰족하며 잔톱니가 있다. 잎 뒷 면을 손으로 만지면 약간 끈적끈적한 것이 박달나무의 특징이다. 꽃은 암수 한 나무로 암꽃은 위로 서서 피며 수꽃은 내려 숙여서 초여름에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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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장미

   

오 늘날 장미(薔薇)라고 부르는 나무는 장미과 장미속(osa)에 속하면서 북반구의 한대 아한대 온대 아열대에 걸쳐 자라는 약 200종에 이른다. 야 생종의 자연잡종과 개량종으로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향기가 있어 관상용 및 향료용으로 키우고 있다. 장미는 그리스 로마시대에 서아시아에서 유럽지 역의 야생종과 이들의 자연교잡에 의한 변종이 재배되고 있었으며 이 때부 터 르네상스시대에 걸쳐 유럽 남부 사람들이 주로 심고 가꾸기 시작하였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영국의 국화이며 가장 서구적이라고 느껴지는 장미라고 한다. 과연 장미는 예부터 서양인들 만이 즐겨한 꽃인가? 우리의 옛 문헌에 장미가 수없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 아서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옛 장미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장미 가 아니고 찔레나 인가목 등의 장미속(屬)의 어느 종류라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고려사 및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장미의 앞뒤 설명을 보아서는 현재의 장미와 거의 같은 형태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중국에도 야생 상태의 장미종이 있으며 삼국사기에 장미라는 이름이 나 오는 것으로 보아 모란처럼 벌써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하여 수입되어 즐겨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다양한 장미품종이 수입되기 시 작한 것은 광복 후부터이다.

삼국사기 제 46권 열전6 설총(750년쯤) 조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홀연히 한 가인(佳人)이 붉은 얼굴, 옥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말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봄비로 목욕하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옵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 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저를 받 아주시겠습니까?’ 하였다. 어느 임금님이 요염한 장미를 싫다고 하였겠는가. 이 내용의 장미는 물론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겠으나, 그때 벌써 키우고 있던 장미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고려사에는 한림별곡의 일부 가사를 소개한 내용 중에도 ‘황색 장미, 자색 장미’라는 대목이 있다. 강희안이 성종 5년(1474)에 쓴 양화소록에는 사계화(四季花)란 이름으로 장미 키우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 연산 11 년(1504) 신하에게 율시(律詩) 3수를 지어 바치게 한 내용 중에 ‘한 시렁 장미가 집 가득히 붉도다/ 한 타래 검은머리 기쁨 살 만 하도다/ 꽃을 머물러 피지 않고 낭군 오기 기다리네’라는 내용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 록에는 장미꽃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그래서 흔히 알고 있듯이 장미는 최근에 들어온 꽃이 아니라 멀리는 신라 때부터 우리와 함께 살아온 꽃 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장 미는 줄기의 자라는 모양에 따라 덩굴장미(줄장미)와 나무장미로 크게 나뉜다. 수많은 품종이 있고 각기 다른 모양을 갖고 있다. 줄기는 녹색 을 띠며 가시가 있고 자라면서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하나 의 긴 잎자루에 3개 혹은 5∼7개의 작은 잎이 달린다. 꽃은 품종에 따라 피는 시기와 기간이 다르고 홑꽃에서 겹꽃까지 모양과 빛깔을 달리한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123] 국수나무

   

동 물의 왕국이라는 TV프로를 보면 백수의 왕자 사자에서부터 작은 곤충 한 마리까지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나 실감한다. 우리의 선조들도 귀족들은 풍류를 즐기며 시도 짓고 글도 쓰는 삶의 여유를 가 질 수 있었으나 가난한 민초들이야 허구장천 굶지 않을 궁리에 여념이 없 었다.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 왔다가서 고려시대의 풍속을 적은 고려도경 제22권 잡속(雜俗)에는 국수가 귀하여 큰 잔치나 있어야 먹을 수 있는 고 급 음식이라 하였다. 목민심서에는 향례(饗禮)가 있을 때나 겨우 쓸 수 있 다 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국수는 궁중의 음식을 관장하는 내자시( 內資寺)에서 공급하였다. 그래서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는 결혼을 의미하 는 말이 남아 있을 만큼 귀한 음식이었으니 보통사람들은 국수 한 그릇 먹기가 꿈에 용 보기 아니었나 싶다. 국수나무는 먹을 것을 찾아 산야를 헤매던 굶주린 백성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헛것’을 보고 붙인 이름일 것이다. 가느다란 줄기의 뻗침이 국수 발을 연상하고 색깔도 영락없이 국수를 닮아 있다. 가지를 잘라 세로 로 찢어보면 황갈색의 굵은 골속이 역시 국수를 연상한다. 그래서 국수나무 란 이름이 붙은 나무는 진짜 국수나무 말고도 나도국수나무, 산국수나무, 섬국수나무, 중산국수나무를 비롯하여 금강산에서 발견되어 북한의 천연기념물 로 지정된 금강국수나무까지 있다. 삶의 질은 고사하고 먹는 날 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우리 선조 들이 국수나무 옆에서 진짜 국수 한 그릇을 그리며 허리를 졸라맸을 생각 을하면 오늘의 풍요가 죄스럽기까지 하다. 국수나무는 동네 뒷산 약수터에 올라가는 오솔길에서도, 마음먹고 시작한 꽤 높은 등산길에서도 산기슭, 산골짜기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는 흔한 나 무이다. 늘씬한 몸매도 아름다운 꽃도 갖지 않아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느다란 줄기가 싸리나무 대용으로 농기구인 삼태기도, 바지기도 만들어지면서 조금의 수난을 겪고 살아온 나무이다. 다 자라야 사람 키 남짓하다. 그나마 곧장 하늘로 치솟지 못하고 여러 개의 줄기가 올라와 집단을 만들고, 가지는 마치 덩굴처럼 아래로 늘어지 면서 여러 갈래로 얽혀있다. 어린 가지는 붉은 밤색이며 잔털이 있으나 오 래되면 껍질이 희뿌연 색으로 변한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넓은 삼각형 으로서 전체적으로는 달걀모양이다. 끝은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몇 군데 움푹 패여 비교적 깊은 겹톱니가 있다. 초여름에 들어갈 즈음 새끼손톱크기의 노랑 빛이 연하게 들어간 흰 꽃 들이 새 가지 끝의 원뿔모양 꽃차례에 무리 지어 핀다. 열매는 여러 개의 씨방이 모여서 된 ‘골돌(  )’로 가을에 익으며 잔털이 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국수나무는 공해가 심한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못 한다고 한다. 꼭 측정장치로 수치를 나타내지 않더라도 이런 식물을 심어놓 고 왕성하게 자라면 공해가 없는 것으로, 생육이 시원치 않으면 공해가 심 한 것으로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국수나무 같은 이런 식물들은 이름하 여 지표식물(指標植物)이라 한다.
124] 황벽나무

황벽(黃蘗)나무, 황백(黃柏)나무, 황경나무, 황경피나무 등으로 불린다. 줄기의 두툼한 껍질을 벗겨내면 개나리의 꽃잎보다도 더 선명한 노란색의 속껍질이 나타난다. 나무이름은 이 속껍질의 색깔에서 따온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구리칼로 겉껍질을 긁어 버리고 꿀물에 한나절 담갔다 가 꺼낸 다음 구워 말려 쓰는데, ‘5장과 장, 위 속에 몰린 열과 황달, 치질 등을 주로 없앤다. 설사와 이질, 적백대하, 음식창을 낫게 하고 감 충을 죽이며 옴과 버짐, 눈에 열이 있어 핏발이 서고 아픈 것, 입안이 헌것 등을 낫게 한다’며 귀중한 약재로 평가했다. 속껍질에 0.6∼2.5% 함 유된 벨베린(berberine)이란 성분은 현대의학에서도 생약으로 폐렴균, 결핵균, 포도상구균에까지 발육저지작용과 살균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식욕을 촉진 하는 효과까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황벽나무의 뿌리도 단환(檀桓)이라 하여 ‘명치 밑에 생긴 모든 병을 낫게 하며 오래 먹으면 몸이 가벼워 지고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여 그 약효를 들고 있다. 또 안 껍질을 햇 볕에 말려두었다가 치자와 마찬가지로 노란물을 들이는 재료로 이용하였다는 내용이 조선 후기 부녀자들의 생활지침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 기록 되어 있다. 현존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은 1천2 00년이나 온전하게 보존된 비밀이 황백자(黃柏子)라는 황백나무 열매에 있다 한다. 다라니경을 만든 종이는 좋은 닥나무 껍질을 사용하고 제조과정에 나무망치 등으로 두들겨 밀도를높이고 묵주 등을 굴려 두께를 고르고 광 택이 나도록 함으로써 섬유소가 나선형으로 치밀하게 엉겨있게 하였다. 그러 나 이것만으로는 1천년이란 긴긴 세월을 무사히 넘길 수 없다. 제조의 최 종과정에 황벽나무 열매에서 채취한 황색 색소로 착색하였기 때문에 가능하 다. 이 성분은 벌레나 세균의 침입을 막고 먹의 번짐을 차단하는 한편 향 내를 풍김으로써 종이의 품질을 높인 것이다. 황벽나무는 나이가 10여년만 넘어서면 줄기에는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하 는데, 우리나라에서 코르크를 채취할 수 있는 굴참나무, 개살구나무, 황벽나 무의 세 나무 중에는 황벽나무가 가장 품질이 좋다고 한다. 안 껍질은 약재, 바깥 껍질은 코르크로 쓰이며 아름드리로 자라는 목재 도 연한 황갈색으로 색깔이 곱고 무늬가 아름다워 가구재, 기구재 등으로 쓰인다. 목민심서 권5의 공전 장작(匠作)에 황벽나무로 농을 만들었다는 기 록이 있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분포하나 깊은 산 비옥한 땅에 자란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큰 나무로서 지름이 한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잎은 마주나며 새날개의 깃모양으로 5∼13개이고 긴 달걀모양으로서 양끝은 뾰족하며 가장자 리에는 톱니와 털이 있다. 잎 뒷면은 흰빛이 돌며 잎맥 기부에 부드러운 털이 있고 문지르면 향 기가 난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초여름에 손톱길이 남짓한 원뿔꽃차례로 작은 꽃이 여러 개 노랗게 달린다. 열매는 거의 둥글고 작은 구슬만하며 검게 익어 다음 해까지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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