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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

견딜 수 없이 아름다운 곳, 프로빈스타운

견딜 수 없이 아름다운 곳, 프로빈스타운

2008 06/10   뉴스메이커 778호

 

아웃사이더 예찬(원제:Land's End)마이클 커닝햄·조동섭 옮김·마음산책·2008

사는 일에 지쳐 절로 진저리를 칠 때 피로는 저 삶의 가장 깊은 쪽에 파랗게 핀 곰팡이처럼 피어나 삶을 잠식한다. 그런 때 기쁨은 시들하고 슬픔도 무미(無味)해진다.

무감동과 무감각의 날들이 이어지며 긍지와 달뜬 욕망이 불러오는 환희는 희미해지고 자잘한 근심은 늘 때, “회색의 빛깔,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들이 일으키는 슬픔의 파동은 마음에 그 어떤 불도 지피지 못한다.

슬픈 순간에도 슬픔이 없다면 그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게 이건 사는 게 아냐, 라는 푸념이 흘러나왔다. 모든 사랑이 끝났다는 걸 돌이킬 수 없이 알아버린 순간, 내가 받은 삶이라는 백지수표가 부도가 나버린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에 화가 난다.

저질러놓은 일들은 수습할 방도가 없고, 사는 일은 다만 아득해질 때 나는 어디론가 불쑥 떠나고 싶다. 거리에서 비를 만나 속수무책으로 비에 젖어 추레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돌아와 빈집에서 찬밥을 혼자 떠먹을 때,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은 덧없고 살아갈 날들은 더없이 막막하고 사는 일은 붉게 사무칠 때 떠나려는 충동은 더 강렬한 욕망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내가 아는 사물들과 사람들이 이룬 그 익숙한 세계와 저만치 떨어져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몇 년을 살다 다시 낯익은 것들의 안부가 궁금해질 무렵에 돌아오고 싶다. 그곳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 고요한 곳, 자유로운 곳, 평화로운 곳이어야 한다. 아, 그런 곳을 찾았다!

그곳은 “달과 같은 정적”이 내려앉고, 그곳에 있으면 “무언가의 눈[眼]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 사막과 같아서 “영구한 제 일들로 너무 가득 차 있어서,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려서, 인간이, 냄비와 프라이팬과 바닥 깔개와 초인종을 짊어진 우리 인간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곳이다.

늦봄과 초가을은 날씨가 좋고, 5월과 6월에는 연무와 안개가 많다. 여름철에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리지만 겨울에는 단기 체류자들, 외국인, 관광객들, 여름 별장 주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극장과 상점들도 문을 닫는다. 겨울의 황량함과 침묵을 견디며 묵묵히 삶을 이어가는 지역 주민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단지 술집 몇 곳, 식당 한 곳,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점 몇 곳뿐이다.



                    프로빈스타운의 정경들.
여기는 어딘가? 바로 케이프코드 끝 모래톱 위에 세워진 자그만 도시 프로빈스타운이다. 도시 전체가 바다를 향해 길게 이어져 있고, 대륙의 평판층에 낮게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조수 간만에 큰 영향을 받는다.

조류보호구역이나 야생동물 수렵금지구역이 동물들에게 은신처가 되듯, 이곳은 괴짜들, 즉 망명자들, 반항자들, 이상주의자들에게 은신처였다.

다른 도시에서라면 따돌림과 기피를 당할 사람들이 여기서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인 두 남자가 손을 잡고 페루 출신 입양아를 데리고 다녀도 관심을 끌지 않는다.

소설가 마이클 커닝햄도 스무 해 전에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가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노동절에서 할로윈데이까지, 프로빈스타운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썼다.

“아름다움을 제 스스로 느끼거나 신경 쓰지 않는 세계, 존재와 변화라는 그 진정한 의무를 따르다가 그저 우연히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세계, 지질학적 시간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 어디보다도 고요하고 인적 없는 세계, 그런 세계를 감지하게 된다.”

프로빈스타운에서 동성애자들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여름철 성수기에 임시 고용된 계산대의 점원 남자들에게서 색조 화장의 흔적과 눈가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아이라이너의 검은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금전등록기를 누르고 물건을 봉투에 담는 이들의 겉모습은 평범해 보이지만 대개는 동성애자들이다.

성 정체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무엇이기에 이곳에서 성적 소수자들이 차별받는 일은 없다. 이곳은 다양한 동성애자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여름밤의 거리와 술집들은 여장 남자들과 가죽바지를 입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자들로 넘쳐난다.

프로빈스타운의 여름밤은 술과 환락, 그리고 담요처럼 내려앉는 섹스의 축복으로 흥청거린다. 이 환락과 성적인 무한자유가 드리우는 그늘은 에이즈 만연이다. 동성애자인 커닝햄은 에이즈로 죽은 친구를 화장해서 그 남은 재를 바닷가에 뿌렸던 일을 담담하게 적는다.

프로빈스타운에는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소문이 떠돈다. 초가을부터 늦봄까지 소문의 향연이 펼쳐진다. 누가 누구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거나 누가 술에 취해 옛 애인의 아파트를 부쉈다는 소문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문이다. 그러나 엘튼 존이 프로빈스타운에 집을 사려고 하는데 마음에 드는 집을 못 찾고 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프로빈스타운에 나타났다와 같은 소문들은 다른 곳에서는 듣기 힘든 소문이다.

또 다른 희귀한 소문도 있다. 도시 서쪽에 있는 우체국에는 여러 해 동안 혼자 시를 쓰는 여자가 근무를 했다. 이 여자는 시를 사랑할 뿐 아니라 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랑했다.

누군가 공모에 내기 위해 시가 든 봉투를 갖고 우체국에 가면 이 여자는 그 봉투를 발송하기 전에 우체국 뒤뜰로 가져가서 행운의 표시로 제 맨 젖가슴에 꾹 눌러댄다고 했다. 이런 소문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청정하고 유쾌한 소문이다.

프로빈스타운의 특산물은 모래다. 폭풍에 실려 온 모래들은 가벼워서 눈과 같이 공중을 떠다닌다. 걸음을 내디디면 어디에도 단단한 바닥은 없어 모래 속으로 발이 가라앉는다. 이곳은 차라리 모래들이 만든 모래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모래는 길들여지고, 집과 길들은 아스팔트와 포장도로와 벽돌로 이룬 지층 위에 떠 있다.

이곳에서 내륙은 멀고 바다는 가깝다. 커닝햄은 “한때 프로빈스타운은 너무도 철저히 바다에 바쳐져 있었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 바다의 현시(顯示)에 가까웠다”고 쓴다. 한없는 자유와 매혹, 자연의 아름다움과 냉혹이 한데 버무려져 있는 이 땅을 찾는 부류들 중의 많은 이는 예술가들이다.

1910년대에 유진 오닐이 왔고, 유진 오닐의 희곡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상연한 곳도 이곳이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태양과 고요와 청년들”에 이끌려 이곳에 오고, 노먼 메일러와 같은 작가들이 흘러들어와 삶의 한때를 지내고, 프란츠 클라인, 마크 로스코, 로버트 바더월, 에드워드 호퍼와 같은 화가들도 “선택된 종족의 일원”으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예술가들이 아니면 중독, 장래성 없는 직업, 비관적인 연애, 그밖에 믿을 수 없는 운명의 덫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에서 도망가기 위해서 찾는다.

커닝햄은 차가운 바다에서 솟아오른 낮은 산과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의 빛으로 가득 차 있는 도시 프로빈스타운을 “지리적 독단”이라고 부른다. 이곳이 바람과 바다가 1만 년을 걸려 만든 땅이라는 건 지질학적인 진실이다. “산맥의 융기와 침식을, 대양이 조수 간만을, 광대한 숲과 늪의 생사를 이기고 살아”(노먼 메일러) 남아 우뚝하다. 그곳은 굳은 땅 위에 서지 않고, 몇 만 년 동안 불어온 바람이 실어온 모래땅 위에 서 있다.

커닝햄은 이곳은 구성하는 웨스트엔드에서 이스트엔드로 이어지는 프로빈스타운을 꼼꼼한 지리학자와 같이 탐사하고 그것들을 세세하게 적는다. 아울러 만(灣)과 조수, 사계절과 동물들과 바닷물,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역사를 그 명민하고 투명한 문체로 그리는데,

그 문체는 미문에 가깝다. 그 미문이 실어오는 전언은 이 지구 상 어딘가에 있는 한 장소의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매혹과 덧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욕망의 가벼움과 덧없음에 대한 것이다. 나는 언젠가 가볼 수 있을 것인가, 그 모래의 도시, 하늘은 청색으로 빛나고 바닷물은 따뜻한 그곳, 집 밖에 의자를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소리치는 노인이 있던 그 땅을.

언젠가 가서 심원한 삶을 살아볼 수 있을 것인가.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lyk3390&folder=13&list_id=972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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