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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독립운동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 교육가 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95년 가톨릭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게릴라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죽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혔다가 1910년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찾지 못했다.

글씨가 뛰어나, 뤼순감옥 수감 시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글 출처: wikipedia

사진: 왼쪽은 거사 전, 오른쪽은 순국 전의 안중근 의사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사 직후의 사진
.
이미 잘 아시는 사진이지만 저는 이 거사 직후의 사진이 이 분의 사진중에 가장 인상적입니다.
큰 사건을 낸 직후인데도 표정이 편안하고 결의마져도 나타나 있지요.

체포당시 러시아 헌병들과의 몸싸움으로 옷의 단추가 떨어져 나가 있습니다.








 
사형판결 뒤의 안중근의사.b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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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을 2일 앞두고 여순감옥에서 프랑스 신부 홍석구씨와 두동생이 안중근열사의 유언을 듣고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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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a-3.jpg

▲ 일제에 검거될 당시 안중근 의사로 추정되는 사진. 쇠사슬에 묶인 채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는 2008. 3. 26일 안중근 의사의 순국 97주기를 앞두고 일제에 검거된 안 의사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지역의 한 주택에서 발견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전시 중구 목상동에 사는 최정민(30)씨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고문서의 책장 사이에서 발견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최근 전문가 집단에 감정의뢰했다.

최 씨는 "10여년전 증조부의 고문서를 살펴보던 중 맞붙은 책장 사이에 숨겨진 안 의사의 사진을 발견했다"며 "쇠사슬에 묶인 안 의사의 사진은 일본강점기 '보험료 영수장'과 함께 보관돼 있었다"고 말했다.

최 씨는 또 "안 의사의 순국일에 맞춰서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사진을 공개했다"며 "전문가들도 진본 여부는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진본으로 추정된다'는 감정결과를 내놓았다"고 설명했다.

사진 속 안의사는 쇠사슬에 묶인 채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사진의 크기는 가로 9㎝, 세로 13.7㎝로 뒷면에는 연필로 쓴 '자신에(의) 선배 안중근 지사'라는 글이 한자로 쓰여있다.

대전시 향토사료관 양승률 학예연구사는 "이번에 발견된 사진은 일제가 제작했던 사진엽서와 표정 등이 비슷하지만 지저분한 뒷배경이 없고, 또렷한 눈초리 등 당당한 모습이 제대로 표현돼 있다"며 "일단 새로운 사진으로 추정되며 적어도 해방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전문가는 "사진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를 밝힐 근거가 없다"며 "만약 이번 사진이 안 의사를 직접 찍은 필름을 인화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 가치와 의미는 상당하다"고 언급했다.

http://bemil.chosun.com/brd/view.html?tb=BEMIL085&pn=1&num=87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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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emil.chosun.com/brd/view.html?tb=BEMIL085&pn=1&num=53404

안중근 의사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투사 정재관, 김성무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없앨 계획을 세우고 1909년 10월 21일 하얼빈으로 떠났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경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안중근 의사는 7시에 하얼빈에 도착하여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역사의 순간, 열차가 도착.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 의장대를 사열 후 환영객들로 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하자 러시안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안중근 의사는 10보 정도의 거리에서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쏜 후 남은 3발도 마저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따르던 하얼빈 총영사 가와가미 도시히코, 비서관 모리스지로, 남만주철도 이사나카세 이지로 등이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차례로 쓰러졌다. 이와 함께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 의사를 덮쳤으며 안의사는 '코레아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순순히 체포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明治)시대의 정치가로 일본의 근대적 헌법과 형법을 기초했고, 총리만 네차례를 지낸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며칠 전 동생들에게 "독립전에는 시신을 옮기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했다.

오늘 조선 DB 에서


처음 사진의 이등이 달고 있는 태극 훈장은 조선을 병탄한 공으로 고종에게서 받은 훈장 같습니다...

 
태극훈장을 달고 있는 이등박문.jpg

 
젊은날의 이토오 히로부미. 슌스케라고 불리우던.

 
단지.jpg


 
우로 부터 우덕순,조도선,유동하,김성옥.jpg


 
하얼빈 역에 도착하는 이등박문.jpg


 
마차로 옮기는 이등 시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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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들...
 
제주
여담이지만 안중근 의사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저격할 대상을 잘못 선택했다고 어느 일본인이 쓴 책을 본 기억이 나는군요. 2007-03-26  
 
combat
저격할 대상을 잘 선택 해치웠으니 훌륭한 분이 된것이조....히로히토면 더 좋았겠지만...2007-03-26  
 
왕립군사학교
안의사는 군인이었으니 교전중인 적 수괴 이토를 저격한 것에 대해 군인으로써 예우를 해줘야..마땅할진데,,당시 일본이,,인정 하지않고, 요즘도 이상한 한국사람 일부가 안의사 보고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이라크저항세력VS미국 에 비교를 하는게 저는 너무 가슴 아픕니다. 2007-03-26  

너굴마왕
이토히로부미는 온건파에 의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자기는 조선에 우호적이라는것을 자주 표현하였습니다..당시 국제 정세가 제국주의 시대였던 만큼 일본이 아시아를 방어하고 지켜난다는 또 다른 제국주의 이론을 펼쳤던거지요..이토의 죽음으로 합방에 가속화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온건파들이 한일합방 자체를 부정한건 아니라서 단지 시간 문제였을겁니다..그래도 안중근의사덕에 대일전쟁이라는 명분이 국사책에 나올수 있는건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토히로부미에 관련된 책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꼭 읽어 봤으면 좋겠습니다..우리에게 저지른 일은 차지 하더라도 연구할 가치가 많은 인물이거든요.. 2007-03-26  
 
안덕래
그런 주장의 핵심은 '이토'가 조선 왕조를 유지시켜 조선을 식민지가 아니라 '만주국' 같은 괴뢰 정부로 운영하려 하였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이토가 살아 있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지 되엇을것이라는 주장이고, 그가 죽어서 조선이 완전 식민지가되었다는 것인데... 만주국과 같은 독립이 독립이며, 부의 같은 왕위과 진정한 군주라 하겠습니까 ? 만주국이 소련에게 적국으로 선포되어 박살났던것 처럼, 만약 조선이 이토의 계획대로 유지 되었다면, 2차 대전후 조선은 독립될 식민지가 아니라, 점령될 적성국가가 되었을것이며, 우리의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은 졸지에 국왕에게 반대한 역적 무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만주가 짱깨들의 영토가 되었던것 처럼 전승국 짱깨와 로스케들의 영토로 넘겨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이토의 사살은 어쩌면 민족의 주체성을 지켜나가게 된 진짜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7-03-26  
 
crimson
아직도 이토히로부미가 한국에 우호적이었다고 잘못죽였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니....위의 님 말씀처럼 그렇게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천천히 일본에게 먹혔다면 우리나라는 현재 대한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 조선 자치령쯤 되거나 일본에 전부는 아니라도 남부지방 일부는 일본에 속해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역사 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지만 이토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 정많은 당시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끌려다녔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갑작스런 한일 합방으로 독립 세력이 민중들에게 큰지지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토히로부미는 당시 사료를 참고하면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유지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천천히 합병을 해나가서 반발을 줄여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더 무서운 부류라고 생각합니다. 단순무식하지 않고 지능적이니 말입니다. 200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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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덤덤탄

http://bemil.chosun.com/brd/view.html?tb=BEMIL085&pn=1&num=63165

덤덤탄에 대하여는 군사매니아인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제 이야기를 꾸며가기 위하여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합니다.

총알이라는 것은 운동에너지를 전달하는 물체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총알이 우리 몸을 관통하는 경우에는 총알이 갖고있던 에너지를 모두 모아 인체를 타격하지 못하고 일부 에너지가 관통한 총알과 함께 빠져나가고 맙니다.

그런데 총알이 인체를 뚫고 들어와 인체내에서 급정거한다면 그 총알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인체가 흡수하게 되므로 그 타격은 관통의 경우에 비하여 훨씬 커 지지요. 더구나 인체속으로 들어온 총알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인체내에 넓게 퍼져버리면 이건 큰일입니다. 총알을 빼어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요.

보통 탄환의 앞면속에는 납이 들어있는데 이 탄환의 앞에 그림처럼 십자형의 흠집을 내어 탄환이 인체에 박히는 순간 앞부분이 쉽게 파열하여 내부의 납조각을 넓게 퍼트리려고 만든 총알을 덤덤탄이라 합니다.



덤덤탄의 형태


이 덤덤탄은 1848년 프랑스에서 개발되었는데 그 생산공장이 인도의 덤덤(Dumdum)지방에 있었기로 이 탄환을 덤덤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이 탄환이 보여주는 사상을 매우 악의적이며 잔인하기로 1907년 제네바 협약에서는 이런 형태의 탄약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총탄에서도 이러한 기술사상은 계속이어지고 있으며 좀 더 교묘한 형태의 총탄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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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덤덤탄>

그런데 우리의 근세 투쟁역사에서 이 덤덤탄을 사용하여 쟁점을 만들었던 분이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료인 연해주 대동공보사 이강으로부터 부라우닝 7연발 권총을 건네받았는데 총알은 또 다른 동료에게 부탁하여 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총알이 덤덤탄 이었던 것이지요.

법정에서 일본 검찰은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이 덤덤탄을 들이대며 그의 행위가 테러였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안중근 의사는 "나는 동료에게 거사에 필요한 총알을 부탁하여 얻은 것 뿐이지 그 총알이 덤덤탄인지는 알지 못했다" 고 대답합니다.

안의사는 정말 그것이 덤던탄인줄 몰랐을까요? 아니면 그 당시에는 많이 사용되고 있었을 이 탄을 무심하게 받아들인 것일까요?

제네바 협정이 1907년에 발표되었고 안의사는 불과 2년후인 1909년 10월에 덤덤탄을 사용했으므로 그럴 수 있습니다.

일본 야마구치현 박물관에는 덤덤탄에 맞아 사망한 이토오.히로부미의 옷....붉은 피가 흥건히 배어있는 내복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여러가지 착잡한 마음이 들더군요.

내가 안의사가 덤덤탄을 사용한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이고자 할 때 이토오 개인에 대한 원한의 감정이 얼마나 개입되었느냐....아니면 개인적 억하심정은 없이 다만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상징적 인물이며 조선백성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기에 제거하려 한 것이 뿐이냐를 가늠하는 심증적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분이 덤덤탄에 대하여는 별다른 관심없이 사용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이토오...내가 반드시 죽이고 말테다...하는 결의속에 개인의 악감이 극력 절제되어 있었다고 믿고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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