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멸망과 왜왕의 절규
고성혁의 역사추적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20139
관산성전투의 결과 패전의 당사자는 백제뿐만 아니라 백제편을 들었던 대가야도 마찬가지였다.
대가야는 관산성전투당시 약 1만명의 병력을 참가시켰었는데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을 병력을 잃게 되었다. 그 충격이 너무도 엄청나서 백제와는 달리 가야는 회복을 못하고 8년뒤 신라의 보복 공격을 받고 망하게 된다.
가야는 당시 왜의 입장에서는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 그런 왜의 고향이 신라에 망하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왜왕 '흠명천황'이 절규하던 내용이 일본서기에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와 더불어 가야와 함게 동맹을 형성하고 약 1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던 고대일본 "왜"였다. 이런 "왜"이다 보니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대가야 멸망소식을 들은 왜왕 "킨메이(欽明)천황"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뼈에 사무친 원한의 절규 그 자체이다.
이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고고학적으로도 일본열도와 가장 가까웠던 가야의 이주가 가장 빨랐슴이 증명되고 있다. 특히 가야의 주류세력이 왜로 도래하여 지배세력이 된 거은 여러부분에서 입증이 되고 있다.
또한 문헌기록이 없는 고대 가야와 왜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설화를 보면 일본 큐우슈우(九州)지역 설화는 가야의 설화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가야에서 왜로 건너간 것만도 아니다. 고대 왜의 유물도 가야지역에서 심심치 않게 출토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파형동기(방패장식물)라든가 왜계 토기등도 가야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만큼 고대 가야와 왜는 교류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대 가야와 왜의 교류를 증명하는 유물들 (국립박물관 설명그림)
특히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북방계 유물의 대표격인 동복(솥)과 남방계 유물의 대표격인 파형동기가 동시에 출토되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왜계 유물로 알려졌진 파형동기(巴形銅기)이다. 용도는 방패꾸미게이다.
가야는 고대일본의 고향
고대 한일관계를 이해하려면 유럽과 미국의 관계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쉽다. 좀더 쉽게 풀어본다면 영국과 미국의 관계를 통해서 고대 가야와 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라는 존재는 영국인들이 가장 먼저 건너가서 세운나라이다. 그 후에 독일인 등, 여러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이 미국의 주류사회를 형성하는 백인집단이다.
그중에서도 정치 경제적 주류집단은 가장 먼저 미국으로 건너갔던 영국계 후손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독일계였다. 이들이 바로 앵글로 색슨계이다. 앵글로는 영국을 그리고 색슨(saxen)은 독일어로 작센을 의미한다.
이렇게 유럽의 이민으로 성장한 미국입장에서는 유럽, 특히 영국은 항상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이와 거의 똑같은 현상이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벌어졌었다. 일본열도와 가장 가까웠던 고대 가야쪽에서 가장먼저 그리고 가장 빨리 고대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착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었다.
미국에서도 영국계 후손들이 주류세력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일본에서도 가야계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니 고대일본인들 특히 가야계후손들이 볼때 가야는 고향 그자체인데 그런 고향이 공격을 받거나 하면 응당 지원에 나서는 것은 당연할 것 아닌가? 마치 영국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군사적지원에 나서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유럽에서 서로 경쟁하던 영국 독일 프랑스의 관계처럼 이들이 이주한 미국에서도 영국계후손 독일계후손 프랑스계후손은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하고 또 그바탕속에서 오늘의 미국이 형성된 것처럼 고대 일본열도에서도 가야계후손, 신라계, 백제계 후손들이 서로 경쟁속에서 고대일본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으로 고대일본의 가장 컸던 정치적 변란인 "임신의 난"이 이를 반증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결국 고대일본의 고향인 가야가 신라와 적대적이면 응당 신라와 왜의 관계도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신라와 동맹관계인 고구려라면 왜와 고구려의 관계도 적대관계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계는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일정부분 엿볼 수 있는데 영락5년(광개토대왕 5년) 왜의 공격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정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은 임라가라로 표현된 금관가야를 멸해 버린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인 백제와 왜가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라인과 가야-왜-백제로 이어지는 동맹라인의 대결이 광개토대왕의 군사적 역학관계였다.
왜왕 "킨메이(欽明)천황"의 절규
이런과정을 통해서 왜의 고향인 금관가야가 신라에 흡수되고 또 대가야마저 서기 562년에 신라에 멸망당했으니 고향을 잃어버린 왜의 입장에선 얼마나 통한스럽겠는가?
그것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장문으로 나오는 왜왕 킨메이천황의 발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 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이 미마나가 가야입니다)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천황이 마침 대궐 밖으로 나가있던 황태자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들이고 병상 가까이 오게 하여 그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 병이 무거우니 너에게 뒷일을 당부하여 둔다. 너는 신라를 쳐서 미마나, 옛 가야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옛날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천황이 이 달에 돌아가셨다>
한마디로 신라에 대하여 원한에 사무친 쌍욕 그자체이다. 그러다 보니 왜는 백제와 더욱 동맹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백제마저 망한 후 왜로 건너간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서기 집필에 깊게 관여하였으니 백제가 신라에 가졌던 감정이 그대로 일본서기에 표현된 것이다.
가야계 후손, 백제계 후손이 신라에 가졌던 악감정은 신라에 대해서 악의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신라에 유리한 내용은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가야를 흡수한 신라를 말하지 않는 것이 일본서기이다.
경북고령의 대가야 지역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 투구(국립박물관 소장)
사무라이투구와 외형에서 닮은 부분이 많다.
군사적관점에서 본 일본서기왜곡과 임나일본부설
고대일본의 고향인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었다고 표현하자니 자존심 상하기 때문에 왜왕인 천황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쓴 일본서기에선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왜곡한 것이 역사왜곡의 핵심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왜곡된 사실을 군사적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영국의 식민지이자 이민지였던 미국이 200여년 정도 흐른 20세기 시점에선 군사적으로 영국을 능가하고 2차대전때는 영국이 공격받자 미국은 기꺼이 영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향이니까. 똑같은 맥락에서 가야의 이민지였던 왜가 성장하여 신라와 경쟁하던 가야를 도왔던 것이다.
미국이 그들의 고향 영국을 도왔던 것처럼 왜는 그들의 고향 가야를 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왜가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고 한다면 마치 미국이 영국을 지배했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 된다. 한마디로 어불성설 그자체이다.
이렇게 군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와 실상을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광개토대왕비를 토대로 보더라도 신라를 공격한 것은 왜로 나오는데 오히려 광개토대왕이 끝까지 추격하여 결과적으로 멸한 것은 금관가야였다. 그 이유는 뭘까? 바로 가야가 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기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그 근본인 금관가야 멸했던 것이다.
역사는 곧 전쟁사이고 전쟁은 군사적관점에서 해석해야만 제대로 된 해석이 되는 이유이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1:1 모형석.
이 광개토대왕비의 2면에 왜가 신라를 공격하여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가야를 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세운 서울 남산타워와 광개토호태왕비를 한장의 사진에 담았더니 묘한 기분이 든다.
(왼쪽) 광주광역시에 남아있는 왜의 전방후원분
(오른쪽) 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왜왕 닌토쿠(仁德)천황의 전방후원분 (세계 최대의 묘이다)
왜왕 인덕천황의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단면적으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크다.
이런 대규모의 능을 조성한 것으로 볼때 고대 왜의 인력동원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왜의 인력동원능력은 곧 군사력동원의 능력과 직결된다. 따라서 고대왜의 신라 공격을 단순한 왜구집단의 노략질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 반증으로 막강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도 당시로서는 대규모인 5만의 기보병을 신라구원에 파병한 것으로도 가늠할 수 있는 사항이다.
이런 사실관계에서 서기 554년 백제와 왜 그리고 대가야의 연합 3만군에 맞서 싸워 이긴 신라의 관산성 전투는 군사적으로나 우리 역사에서 분명하게 기억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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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왕이 직접 신라에 병합을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의 임나가야는 물론 백제, 신라를 마치 신하국처럼 기록해놨습니다.
참고로 '임나(미마나)'라는 지명은 한반도에 남아있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고대지명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고김석영 선생의 분국설을 꽤 신빙성있게 봅니다.
즉 왜국은 가야의 분국 즉 육가야(12가야라는 말도 있습니다)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일본학자들도 고김석영 선생의 분국설을 뒤집진 못했으니까요...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인 구해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고 신라에 복속된 것이 532년입니다.
그런 구해왕의 아들이 신라 김무력장군이고 김무력장군의 손자가 김유신 장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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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점이 있어 지적합니다.
닌토쿠의 묘가 세계최대라는 것은 18년대 중후반에 재조성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일본화가가 그린 실제의 닌토쿠의 묘는 작고 보잘것 없었습니다. 물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회자도 없었고...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천황가의 권위와 일본국민들을 통치하게 위해서 닌토쿠의 무덤은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확장 증축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왜의 고향은 대가야지만.. 6세기 이후의 나라와 일본의 고향은 백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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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갈등..이것은 주몽이가 북부여에서 탈출할 때 부인과 유리왕자를 두고 도망친게 화근이 됩니다. 그리고 졸본부여에서 주몽이가 현지세력에 융화, 기반을 다지기 위해 소서노와 정략결혼 한 것도 문제이고요..
여하튼 북부여에서 온 유리王子와 비류, 온조王子들과의 화합실패가 먼 훗날의 역사의 치욕거리가 되었습니다.
한편 북부여도 도망친 정치범인 "주몽"의 부인과 아들을 살려준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짚고 싶군요....
유리왕자가 놀림 받은 것을 보면 결코 숨어살지는 않았더군요.
두 세력간 화합..절대 불가능합니다...지금도 그런데 어떻게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는" 옛날에 화합을 합니까! 그런 유감과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聖王의 <남부여>로의 국호개칭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 옛날엔 한국이 일본에 주기만 했다고?
민족주의 사관의 문화전파론 벗어나 고대 한일교섭사 새로 쓴 박천수 교수
2007년12월13일자 한겨레신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박천수 교수의 신간.
일본과의 교류 역사를 이야기하면 한국인들은 대개 ‘조상들은 일본의 은인’이라는 자부심부터 깐다. ‘백제·신라 등이 미개한 일본에 수준 높은 문화와 기술, 제도를 일방적으로 전해주었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는 곧 일본이 ‘배은망덕하다’는 논리로 종종 뛴다.
일본보다 우월했다는 민족주의 사관 아래 숱한 역사서, 심지어 교과서도 일방적인 문화전파론을 가르쳐왔다. 반면 일본학계는 지금도 4~5세기 왜군이 출병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휘둘린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땅의 일본인 무덤 외면해온 학계
△ 광주 월계동 전방후원분(맨 위)과 일본 군마현의 전방후원분인 간논야마 고분(아래).
장고 모양을 한 고대 일본 특유의 이 무덤 양식은 전라도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도 종종 발견되어 당대 문화 교류상을 증언하고 있다.
고대 일본은 일방적인 수혜자였을까. 침략자였을까. 기원 직후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중엽까지 일본 열도와 한반도 사이에 벌어진 교류의 실상은 무엇일까.
1990년대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수학하면서 한-일 고대 교류사 유적들을 외롭게 연구해온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최근 역저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사회평론 펴냄)를 통해 피할 수 없는 ‘팩트’(사실)들을 상기시킨다. 일본 땅에 널린 선조들의 유적 못지않게 이 땅에 왜인들이 남긴 유적·유물 또한 숱하게 널려 있다는 것을.
80년대부터 3~6세기 전형적인 일본의 귀족 왕묘 무덤인 장고 모양 고분, 이른바 ‘전방후원분’이 전남 영산강 유역의 고흥·영광·광주 등지에서 13기나 발견됐다. 경남 해안 일대에서도 왜식 무덤, 동모·투겁창 등의 고대 일본산 무기, 갑옷, 일본식 야요이 토기 등이 숱하게 출토된다.
단순 무역이 아니라 정착하고 대를 이어 영주했으며, 큰 무덤으로 지역 권력을 과시한 징표 등이 속속 드러났다. 국내 학계는 외면하거나, 제 논에 물대기식으로 해석해왔다.
서울 강동 지역에서 백제 왕조가 쌓은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이 발견됐으며, 이것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고 보도한 2005년 한국방송의 오보 파문은 이런 사고방식이 빚은 해프닝으로 기억된다. 저자는 관련 목록만 100쪽에 가까운 한-일 고고발굴 자료를 들고서 힘주어 말한다.
“고대 한-일 교류사에 자꾸 근세나 현대의 갈등관계를 투영시키면 안 된다. 실제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발굴 유물들이 던지는 목소리에 귀기울여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는 20년 이상 한-일 발굴 현장을 누빈 전문가의 시각으로 한-일 교류사를 처음 고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그가 보기에 철기시대인 기원전 300~400년께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7세기까지(일본 시대 구분으로는 야요이시대부터 아스카시대까지) 한반도와 일본의 고고학은 경계가 없다. 무덤, 주거지 등의 유적과 장신구, 도구, 무기류 등은 형식이나 얼개가 거의 같다. 따라서 근대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걷고 고고 유물에 바탕해 한-일 교류사를 정리하면 흥미롭고도 당혹스러운 몇 가지 가설이 나타난다.
△ 전북 익산 입점리 백제 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왼쪽 위)과 일본 규슈 에타후나야마 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 기본 디자인이 거의 같다.
경북 현풍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는 신라산 말안장(오른쪽 위)과 일본 오사카 후콘타고뵤야마 배총 고분에서 출토된 신라산 말안장.
“전라도 일대는 왜인 귀족들이 다스려”
우선 5~6세기 전라도 일대의 남도 지역은 일본 규슈 땅의 왜인 귀족들이 다스렸다고 본다. 백제는 통치권이 미약한 남도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일본 규슈 땅의 왜인 귀족들을 관료로 데려와 부렸다는 것이다. 광주 도심의 명화동, 월계동, 함평 신덕 고분 등 전라 지역 전방후원분이 그들이 누린 권세를 증명한다.
뿐만 아니다. 남해안과 경남·북 내륙에 포진한 금관가야, 대가야 등의 가야연맹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일본 열도 한가운데인 긴키지방(오늘날의 오사카·나라 일대)의 야마토 정권은 물론이고 규슈, 시코쿠, 심지어 오늘날 도쿄 인근의 간토지방 세력과 동맹관계를 맺고 철 수출은 물론 무기류, 장식품 등의 위신재(신분이나 권위를 표시하는 물건) 등을 교역하는 데 열을 올렸다.
왜와 적대적 관계로 인식된 신라도 5세기 전반 금관가야 쇠퇴 이후와 6세기 후반 대가야 멸망 뒤 일본 각지의 세력과 교역하면서 대일본 교류의 주도권을 행사했다고 박 교수는 주장했다.
유명한 경주 황남대총의 출토품 ‘곱은옥’(초승달 모양의 장식구슬)이 일본산이라는 논쟁적 주장과 일본 중앙 긴키지방의 이 시기 주요 고분에 신라제 말갖춤과 금동 장식구가 다수 묻혔다는 사실 등이 근거다.
그는 또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공주·부여 지역에서 발견된 일본식 동굴 무덤인 횡혈묘는 백제 왕도에도 적지 않은 왜인이 살았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기원 전후부터 7세기까지 700년간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밀접했을 뿐 아니라 범국민적인 혐한·반일 대립 감정은 사실상 없었다. 같은 생활권·경제권으로서 서로가 존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휴 동맹의 대상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한반도 삼국 간 국경을 넘나드는 것보다 바다로 왜국과 왕래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정도”였다.
저자는 일방적인 식민지배를 뜻하는 임나일본부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일본에 가야·백제 등에서 준,위신을 과시하는 장식품과 토기가 숱하게 발견되고, 한반도에서는 왜인들의 무덤과 무기류 등이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도 그 방증이다. 두 세력이 철과 문물, 군사용병 등의 조건을 놓고 맞춤한 거래관계를 이어나갔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단절되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 합리적인 정치적 교섭 아래 관계를 지속했다는 것이다.
낯선 일본의 한반도계 유적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라도 원주민과 가야 출신 이주민의 유물이 공존하는 일본 하카타(후쿠오카)의 3~4세기 마을 유적 니시신마치는 영산강 지역과 가야 권역의 토기와 부뚜막 시설이 뒤섞여 발견된 ‘이주민 타운’으로 드러났다.
금당벽화로 유명한 일본 나라 호류지 근처의 후지노키 고분은 신라와 백제에 교섭 창구를 가진 왜의 왕족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전형적인 신라의 말갖춤이 발견됐다. 껴묻거리(부장품)로 백제계 관과 신발, 가야계 말갖춤에다, 귀고리는 백제계와 가야계를 섞어넣은 구마모토의 에타후나야마 고분, 사실상 가야계 이주민들의 집단 무덤으로 고분과 형태는 물론 출토품도 거의 가야 무덤과 똑같은 니자와센쓰카 고분군, 도쿄 인근의 간토지방 고분의 가야계 출토품 등의 사례들도 소개된다.
기존 견해와 달라 논쟁거리 될 듯
저자는 결론적으로 3~5세기 일본 열도와의 교류 중심은 가야였으며,백제는 6세기 초부터 교류를 본격화했고, 그 사이 간간이 신라가 끼어들었다며 갈래를 짓는다. 이는 4세기 후반 이래 백제가 고대 한-일 교류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기존 문헌사학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논쟁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박 교수의 저작은 그동안 우리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문물을 다 전해줬다는 민족주의 편향의 인식을 깨는 첫발”이라며 “이 책은 ‘우국지사의 말투로’ 고대 한-일 교류사를 재단하는 시대가 지났음을 웅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지난 10월 일본 출판사 고단샤를 통해 같은 내용을 담은 일어판 연구서 <가야와 왜>를 출간한 바 있다.
일본엔 있는데 한국엔 없는 건 ‘관심’
실망스러운 각 캠프의 슬로건, 추상적 단어와 식상한 단어 짜맞춰
고대 한-일 교류사의 실상을 증언하는 전시나 복원 유적들은 국내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난 10월16일~12월2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전은 모처럼 고대 한-일 교류사를 화두로 다루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일본 규슈 사가현의 청동기시대 대형 마을 복원 유적인 요시노가리의 농경, 생활 유물들을 한반도에 있는 동시기 유적, 유물과 비교 전시했다. 토기, 꺾창, 거울 등 대다수 유물들이 한반도 것과 거의 똑같거나 비슷해 눈길을 끌었지만, 국내 전문가들은 적잖은 아쉬움도 표시했다.
요시노가리는 세계적인 교류사 유적 공원으로 복원됐으나 이에 비견될 국내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주거 터인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은 흙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고대 주거문화의 획기적 단서가 된 송국리 유적의 추정 면적은 80만여 평으로 요시노가리(40만여 평)보다 훨씬 방대하며 시기도 기원전 7~8세기로 앞선다. 70~90년대 국립박물관 등에서 여섯 차례 조사를 했으나 유적 추정 지역의 10분의 1 정도만 발굴하는 데 그쳤고, 지금은 모두 흙을 덮어 언덕배기와 밭 풍경밖에 볼 수 없다.
부여군은 조사단을 구성해 내년부터 발굴을 재개하고 2017년 복원공원 개관도 추진하기로 했으나, 관련 예산은 1억원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국가 차원에서 추가 발굴과 복원 사업계획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미술관에 소전시로 차려진 ‘계룡산 분청사기’전(2008년 2월17일까지)도 한-일 문화교류사 연구에 대한 국내의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기슭의 가마터에서 1927년과 92년에 캐낸 분청사기 조각들을 전시 중인데, 이들 사기 조각의 간단치 않은 내력은 거의 묻혀 있다.
‘계룡산 분청사기’로 불리는 이곳 분청사기 조각들은 조선시대 일본의 영주들에게 일급 다기로 수출됐던 명품. 일본에서는 매우 유명한 가마터다. 국내 일반인들은 이름을 아는 이조차 드물지만, 일본에서는 고려 다완의 성지로 알려져 답사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지 주민들이 ‘여기는 일본 도자기 가마터’라고 말할 정도다.
학봉리 출토품은 특유의 익살스런 물고기 무늬, 비늘 표현의 독창성이 뛰어나 일본에서는 다도구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김영원 박물관 미술부장은 “학봉리 가마터의 사기들은 지금도 일본 도공들이 다기 디자인에 베낄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하다”며 국내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런 내력들을 대형 기획전 등을 차려 드러내지 않고, 좁은 상설전 전시장 귀퉁이에 발굴품만 주섬주섬 챙겨 보여주는 전시 구성의 옹졸함 또한 납득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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