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8 ◆고성혁의 역사추적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19908
가정 1. 백제의 자진 철수
신라가 한성백제의 옛 땅에다가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그곳 군주로 임명할 때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엔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획득하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엔 약간 다르다. 신라가 백제의 한성땅에 신주를 설치하였을 때 일본 서기의 기록은 이렇다.
흠명천황 13년기록
백제가 한성옛땅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인하여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평양은 평안도의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남양주땅을 말한다. 신라가 설치한 신주는 한강건너 남양주 땅이 바로 보이는 하남시의 이성산성일대이다.
여하튼 삼국사기 기록에도 공취(攻取)라고 하고 있으나 실제 싸운 기록은 없고 일본서기엔 싸웠다고 보기엔 힘든 “버렸다”로 적고 있다. 그로 인해서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데 이 의미는 무엇일까?
백제가 한성 옛땅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하는 것은 백제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래서 백제는 가야와 신라의 힘까지 빌어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고구려에 대항한 것이 이 전쟁이었다.
이 한강의 한성 옛땅 탈환전쟁을 일본서기 흠명12년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흠명 12년 봄 3월 백제의 성왕이 몸소 백제 군사 및 신라와 가야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그는 잃어버렸던 옛땅 6개군을 회복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오매불망 그리던 한성 옛 땅을 탈환한 백제가 기록에도 안남을 만큼 전투가 없이 신라가 이땅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분명히 왕이 직접 지휘하였다면 백제의 정예병력이 작전한 것인데 어떻게 쉽게 내줄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한강하류지역에 파견된 신라군은 일종의 원정군이다. 지금의 편제로 말하면 미국의 이라크 작전에 한국군이 파병된 것처럼 백제가 지휘하는 백제 신라 가야 다국적군에 신라는 일개의 부대로 편재된 그런 전력밖에 안된다.
원래 나당연합으로 고구려를 공략할 때 신라는 죽령 밖 고구려 땅, 즉 한강 중상류지역에 대하여 차지하고 백제는 한강 중하류의 한성옛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밀약된 것이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주력이 있었던 한강 하류 한성백제의 옛 땅을 신라가 차지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본서기에 기록된 흠명천황 13년조 백제가 한성옛땅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인하여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라는 말에 다시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투를 했다면 분명히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았을터인데 그렇지 않고 “버렸다”라고 기록한 것을 당시 백제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장기전에 따른 귀족세력의 반발이라든가 백제내 여러 문제로 백제 주력군이 회군하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그래서 한성땅이 무주공산이 되자 그곳에 파견되었던 신라군이 차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제연합군의 고구려 공략당시의 삼국의 정세 및 군사충돌 상황도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백제의 정치군사체제가 지방분권적인 속성에다가 상대적으로 강한 귀족세력의 영향력을 성왕이 무시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사비천도의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마당에 전쟁 또한 장기화로 치닫게 되자 귀족세력측의 불만이 쌓이게 됨에 따라서 회군이라는 부분은 도외시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백제 왕가의 한성옛땅에 대한 감정과 귀족세력의 한성땅에 대한 감정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인데 사비시대 귀족세력은 한성옛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존재였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한성옛땅 회복전쟁은 자신의 전쟁이 아닌 남의 전쟁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사회는 대부분 병농일치의 사회다. 따라서 농번기엔 일손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귀족세력측에선 일손부족이라는 불만을 백제왕가에 강력히 성토했을터이고 장기전으로 생긴 병력손실에 대한 복구는 이루어 지지 않는 등 전쟁수행여건이 극도로 악화 되엇슴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신라가 신주를 설치한 시기는 그해 7월이다. 한창 농번기 시절이다. 병력을 마음대로 이동하고 주둔시킬 수 있는 신라와 그렇지 못한 백제의 차이가 한강유역의 주인이 신라로 넘어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또하나 더 추론해 볼 수 있는 부분이 고구려의 이간책이다.
이런 이유로 백제 성왕이 왜에 군사적으로 더 의존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관산성 전투는 흔히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그에 대한 보복전쟁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왜 신라가 차지한 한성옛땅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고 관산성을 공격하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가 남는데 그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가정 2. 고구려의 나제동맹 이간책과 거칠부장군
엄밀하게 말해서 고구려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기 위해서 어떤 이간책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업지만 고구려의 움직임은 분명하게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고구려)이 사라(斯羅)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에 있는 군사를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수 있을 것입니다.
백제성왕이 왜에 지원병을 요청하면서 고구려의 동태를 언급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경우 철저하게 군사적 관점에서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는데 여기엔 만고불변의원리가 있다. 그것은 “적의 적은 친구요 적의 친구는 적이다”라는 원칙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공동의 적을 공유하면 곧 동맹이 성립함을 의미하고 반대로 공동의 적이 깨지게 되면 동맹은 와해됨을 뜻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신라에게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했을까?
신라의 대 고구려 정보통은 거칠부였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에도 나오는 그대로 그는 고구려땅에 승복차림으로 들어가서 고구려정세를 염탐하다가 고구려국내의 정난을 피해 죽령근처까지 내려온 혜량법사와의 일화를 통해서 거칠부가 고구려에 대한 정보통임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만약에 고구려가 나제동맹에 대한 이간책으로서 신라와 접촉했다면 필시 거칠부를 거쳤슴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가 물밑협상을 진행시켰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장면 : 문경 고모산성 거칠부장군 막사
거칠부 : 아니 어인일로 고구려 장군께서 이렇게 먼길까지 오셨습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구려밀사 : 거칠부 장군님께서 이렇게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인사드립니다.
거칠부 : 요즘 무척 바쁘실텐데 어떻게 시간을 내실 수 있었습니까?
고구려밀사 : 원래 일 못하는 사람이 몸만 바쁩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거칠부 : (휘하 장수들을 보고) 다들 물렀거라
거칠부장군의 막사엔 거칠부와 고구려밀사 단 둘이 자리를 마주한다
거칠부 :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고구려밀사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려도 되겠는지요?
거칠부 : (호탕하게 웃으며) 사내대장부 장수끼리 에둘러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고구려밀사 : 고맙습니다. 한가지 제안을 드리려합니다.
거칠부 : 무슨제안입니까?
고구려밀사 : (거칠부에게 바짝 다가 앉으며) 백제 대신에 우리 고구려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소이까?
거칠부 : (내심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귀국 고구려하구요? 귀국처럼 강대한 나라가 보잘 것 없는 우리 신라와 손을 잡는다니 믿기지 않소이다.
고구려밀사 : 보잘것 없는 신라라니요. 이사부장군과 거칠부장군이 신라군을 지휘하면서 신라군은 이제 예전의 신라가 아니잖습니까? 장군님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거칠부 :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우리가 지금 고구려와 손을 잡을 수 있겠소이까?
고구려밀사 : 국익에는 명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까짓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거지요.
거칠부 : 실리라니요? 우리 신라에게 뭐 좋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고구려밀사 : 있다마다요.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차지선(次之善)은 百戰百勝이요, 선지선(先之善)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는 말이 있는데 신라에게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비책을 알려 드릴까 합니다.
거칠부 : 싸우지 않고 이겨요? 으음. 그야 그렇지만 .. 그래서 어떻다는 거요?
고구려밀사 : 한수유역 전부를 신라가 차지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거칠부: 그땅은 지금 고구려 땅인데 그저 내놓겠단 말씀입니까?
고구려밀사 : (거칠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 지금 귀국 신라가 백제와 더불어 우리 고구려의 땅을 나누어서 도모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장군님도 잘 아시다 시피 현재 우리 고구려 사정이 남쪽을 신경쓸 겨를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 땅을 백제에게만큼은 도저히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백제의 손을 끊고 우리 고구려와 손잡아 주신다면 한수땅을 모두 신라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거칠부 : (한창 생각에 잠기다가) 그말을 무엇으로 보장한단 말이요?
고구려밀사 : 신라군이 한수땅을 공격하면 우리 고구려군은 못이기는 척 하고 물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에게 빼앗은 금현성도 넘기도록 하겠소이다.
거칠부 : 제안은 구미(口味)가 당기오만 그래도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하루아침에 끊는다는 것이 좀..
고구려밀사 : 동맹이 무엇입니까? 공동의 적에 맞서는게 동맹인데 지금 우리 고구려가 이제 신라와 친선을 맺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나제동맹은 의미가 없는 것 아니온지요?
거칠부 : 듣고보니 그렇구려
고구려밀사 : 우리 고구려와 신라는 혈맹 그 옛날 혈맹이었다는 것을 잊지는 않으셨지요? 신라가 왜의 공격에 풍전등화일때 우리 선대왕 광개토태왕께서 친히 5만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해주고 왜를 물리쳐 준 덕분에 지금의 신라가 있다는 것은 우리 고구려와 신라가 혈맹이었다는 증표 아니겠습니까? 다시 그때처럼 손을 잡자는 겁니다.
거칠부 : (안색이 변하며) 그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 후 고구려가 신라의 상국 노룻을 하고 우리 신라왕자들이 고구려에 볼모로 가서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신라는 두번다시 약소국의 서러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세삼스럽게 지금에서 옛날 일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겠소이까?
고구려밀사 : (당황하면서) 아아. 아니옵니다. 얹짢으셨다면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게 아니오라 왜라는 존재때문이옵니다. 신라를 항상 괴롭히고 해안을 범접해서 노략질 하고 신라백성을 잡아가는 왜가 어느나라와 손잡고 있습니까? 바로 백제이옵니다. 백제와 왜는 왕족끼리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나라들이라는 것을 신라가 모를리 없을 테지요? 신라와 왜는 불구대천지 원수지간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백제하고 손잡으면서 왜하고도 손을 잡은 것입니까?
거칠부 : 왜하고 손을 잡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고구려밀사 : 원래 적의 적은 동지요 적의 동맹은 적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고구려에게는 백제는 물론이고 왜도 적국입니다. 신라가 왜를 적으로 여긴다면 응당 고구려와 신라는 동맹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광개토대왕이 왜를 물리칠때도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어떻습니까? 왜의 동맹국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계속한다는 것은 곧 신라가 왜와도 손을 잡는다는 의미인데 거기까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거칠부 :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말씀해 보시지요.
고구려밀사 : 만약에 왜(倭)가 신라(新羅)를 공격할 경우 과연 백제가 어느편을 들까 하는 것이옵니다. 왜왕가(倭王家)하고 혈연지간인 백제가 신라편에 서기 보다는 왜편에 설 공산이 훨씬 클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신라는 혼자 백제와 왜를 모두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고구려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고구려와 다시 손을 잡게 된다면 그 이익은 모두 신라것이 될 것입니다.
거칠부 :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다면 우리 신라가 백제와 손을 끊기만 하면 되겠소이까?
고구려밀사 : 이제야 저의 본심을 헤아려 주시는군요.
거칠부 : (웃으며) 좁디 좁은 신라장수가 어찌 대국의 장수의 깊은 속내를 따라가겠습니까?
고구려밀사 : (호방하게 웃으며) 거 무슨 말씀을 허허 몸 둘바를 모르겠소이다. 이제 우리 고구려와 신라는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오이다.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소이다.
거칠부 : 무엇이요?
고구려밀사 ; (농담조로) 한수땅을 차지하거든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아 주시오
거칠부 :(껄껄 웃으며) 농담도 잘하십니다. 감히 신라가 어찌 고구려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고구려밀사 : (얼굴이 굳어지며) 신라가 진짜 해주셔야 하는 것은 백제의 북진을 한수땅에서 신라가 막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고구려는 북방 돌궐족과의 전투에만 전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칠부 :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그나저나 그렇게 되면 백제가 가만있지 않을터인데 그것이 걱정이구려
고구려밀사: 무얼 그렇게 걱정합니까? 그땐 또 우리 고구려가 있지 않사옵니까? 우리 고구려요. 그리고 나라의 이익에 사사로운 감정을 논하는 것은 장군이 취할 행동이 아니지요.
거칠부 : 아니 그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라가 한수유역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백제가 가만 있지 않을텐데 보복공격을 하게되면 어차피 싸워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것이 어려운 것 아닙니까?
고구려밀사 : 그 방도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거칠부 : 정말입니까?
고구려밀사 : 우선 고구려와 신라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십시오.
거칠부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숨겨도 시원찮을 판국에 도리어 소문을 내라니요?
고구려밀사 : 지금 백제의 주력군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한성 옛땅을 회복하고자 한수유역이 있지 않습니까? 신라군도 같이 있지요?
거칠부 : 예 그러하오만
고구려밀사 : 그러면 지금 백제 사비 왕도(王都)와 신라와 접경인 후방엔 백제 병력이 별로 없을 것 아니오?
거칠부 : 그렇겠지요.
고구려밀사 : 소문을 냄과 동시에 백제의 바로 코앞인 탄현근처까지 신라군을 증강배치하면 그와 동시에 우리 고구려군도 한수 이북의 백제군을 압박할 것입니다. 그러면 백제는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거칠부 : 백제 수도인 사비가 걱정되겠지요.
고구려밀사 : 맞습니다. 고구려와 신라가 손잡았다는 소문도 들었는 데에다가 신라가 백제 바로 코앞에 병력을 증강시키고 우리 고구려도 압박하게 되면 백제는 협공을 받는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당연히 한수유역에 나가있는 주력군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허면 한수유역은 무주공산이 되는 겁니다.
거칠부 : 으음. 하긴 우리 신라가 이미 백제탄현 바로 앞인 관산성을 차지하고 있는데 괜찮은 방법이구려. 백제가 한수에서 철수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 신라가 깃발만 꽃으면 된다 이말씀이구려. 허허허
고구려밀사 : 만에 하나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뒤에서 우리 고구려가 백제를 칠 터인데 백제가 쉽게 군사를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오이다. 안그렇소이까? 허허허.
거칠부 : 듣고보니 이보다 더한 신묘한 계책이 없는 것 같소이다. 허허허 내 즉시 조정에 특별히 간해서 성사토록 하겠소이다.
고구려밀사 : 그럼 오늘부터 우리 고구려와 신라는 예전처럼 같이 손잡고 가는 겁니다. 하하하
거칠부 : 두말하면 잔말이지요. 허허허.
가정 3 신라의 전략적 노림수와 전격전 - 한강을 확보하다.
그 다음의 가정으로는 고구려의 내정을 꿰뚫고 있는 신라 거칠부의 전격전을 들 수 있겠습니다.
거칠부와 고구려 승려 혜량법사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 거칠부는 정보에 매우 정통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정확한 정보를 이용해서 과감한 전략을 펼쳤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보라는 것은 고구려 내정의 혼란으로 인한 신라 백제 접경지역에 대한 고구려군의 작전불능이라는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해서 과감한 전격전을 펼쳤다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장면 : 신라조정의 국정회의
(참석자 진흥왕의 모후, 진흥왕, 병부령 이사부, 거칠부 장군등 여러 신하)
진흥왕 12년 봄 정월 신라는 일대 변화를 맞게 된다.
진흥왕이 서기 540년 7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자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모후(母候)인 김씨부인이 섭정을 하였는데 서기 551년 진흥왕 12년에 비로서 친정체제로 바뀌는 그런 해이다.
이때 신라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개국(開國) 이라는 연호를 선포했다고 삼국사기엔 전한다. 바로 그런자리다.
진흥왕 모후 : 이제 왕이 어느덧 자라서 성년이 되었소. 이제 섭정을 그만두고 왕이 친히 다스릴 것이오. 그러니 경들은 왕을 보필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주기 바라오.
진흥왕 : 고맙소. 그간 병부령 이사부를 비롯해서 거칠부 장군등 여러 대신들이 잘 보필해 주어서 과인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보오. 앞으로 더 강한 신라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대신들이 더 많이 힘을 보태주기 바라오.
대신들 모두 : 경하드리옵니다. 대왕마마.
진흥왕 : 무릇 제왕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뜻에서 연호를 썻다 하오. 그래서 과인도 연호를 발표하고자 하오. 우리의 연호는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의미에서 개국(開國)이라 할 것이오.
병부령 이사부 : 대왕마마. 앞으로 개국이라는 연호가 사방에 퍼져 나가도록 하겠사옵니다.
진흥왕 : 고맙소이다. 병부령 이사부장군은 아직도 할 일이 많이 있으니 잘 도와주기 바라오. 백제와 고구려가 놓고 싸우던 도살성과 금현성을 우리 신라가 차지하였는데 그쪽 소식은 어떻소?
거칠부 : 신 거칠부가 아뢰옵니다. 백제는 한성 옛땅을 찿는 것이 더 큰 목적이기에 그쪽에 더 신경을 쓰느라고 변방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동맹인 우리 신라가 대신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사옵니다.
진흥왕 : 백제가 그렇게 믿고 있다니 다행이구려. 그러면 고구려는 어찌하고 있소?
거칠부 : 고구려는 지금 내우외환에 빠져 있는지라 제대로 된 군사작전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진흥왕 ; 내우외환이라니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거칠부 : 신이 고구려 승려 혜량법사를 통해서 알아본 바로는 돌궐이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는 바람에 고구려의 주력군은 모두 그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옵니다. 심지어는 한수유역과 우리와 대적하고 있는 중원의 고구려 병력도 그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진흥왕 :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큰 피해 없이 도살성과 금현성을 둘다 차지한 이유가 거기에 다는 말씀이오?
거칠부 : 맞사옵니다.
진흥왕 ; 그렇다면 내우(內遇)는 무엇이오?
거칠부 : 얼마전에 고구려 조정내에서 한바탕 대란이 있었다 하옵니다..
진흥왕 : 뭐라고요? 대란이라니요
거칠부 : 말씀 드리겠사옵니다. 안원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싸고 안원왕의 사돈간에 군사를 동원하여 거의 2천명이 죽었다 하옵니다.
(해설 :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엔 전하지 않고 일본서기에 백제본기를 인용하면서 전하고 있는 내용이다. 백제본기라 함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아니고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하면서 왜로 건너간 백제의 관료들이 그 당시까지 적은 백제의 역사서를 말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그만큼 신빙성이 높다 할 수 있다. )
서기 551년인 왜왕 흠명천황 7년조의 기록은 이렇다.
고구려가 크게 어지러워서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명이었다. 안원왕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는데 대부인(大婦人)은 아들이 없고, 중부인(中婦人)과 소부인(小婦人)에게는 각각 소생이 있었다.
중부인(中婦人)측 세력을 추군(秋群)이라 하였고 소부인(小婦人)측 세력을 세군(細群)이라 하는데 안원왕 재위 15년에 병이들어 눕자, 후계를 둘러싸고 두 외척세력인 추군(秋群)과 세군사이에 한바탕 왕위계승전을 벌인 것이다.
추군(秋群)과 세군(細群)은 양 세력은 군사가지 동원하여 3일간에 걸친 격렬한 유혈충돌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안원왕은 죽고, 중부인(中婦人)세력인 추군(秋群)이 승리하였다. 그 중부인 소생이 안원왕의 뒤를 이은 왕이 양원왕이며 8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거칠부 : 그래서 소부인인 세군(細群)측에 섰던 고구려의 정치세력은 거의 숙청 되었다 합니다. 그 영향이 우리 신라와 마주보고 있는 고구려군에게도 미쳐서 지휘계통이 거의 무너진 상태라고 고구려 혜량법사가 저에게 귀띰 해 주었사옵니다.
진흥왕 :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소?
거칠부 :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하는 바람에 외척세력이 국정을 잡고 있는데 지방세력은 조정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하옵니다.
진흥왕 : 그렇다면 우리 신라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고구려군은 지금 어떻소?
거칠부 : 지난번 왕위계승 다툼에 동원되느라고 빠져 나간 후엔 아직 병력이 보충되지 않은 상태이옵니다.
진흥왕 ; 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겠구려?
거칠부 : 맞사옵니다.
진흥왕 : 그렇다면 죽령과 계립령 밖의 고구려땅을 빨리 공략토록 하시오.
거칠부 : 알겠사옵니다. 즉시 이행토록 하겠사옵니다.
이사부 : 대왕마마 신 병부령 이사부 아뢰옵니다.
진흥왕 : 오 그래요 병부령 이사부. 말씀해 보시오.
이사부 : 우리 신라가 그야말로 나라를 새로 열고 보다 넒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선 죽령밖 고구려땅에 만족해선 아니되옵니다.
진흥왕 : 좋은 방도라도 있다는 말씀이오이까?
이사부 : 모름지기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선 선진문물을 빨리 받아들여야 하온데 그동안 우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있었사옵니다.
진흥왕 : 선진문물이라니 무얼 말하는 거이오?
이사부 : 백제나 고구려가 강성한데에는 중국과 통교하면서 선진문물을 빨리 접한 것이 하나의 이유이옵니다. 그리고 중국을 넘어서 서역까지도 가야하는데 우리는 백제나 고구려가 막아서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사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좋은 기회가 찿아왔사옵니다. 게다가 현재는 우리가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사옵니다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입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강한 중국쪽 나라들하고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진흥왕 : 과연 연륜이 높은 병부령 이사부의 말씀 답소이다. 그런데 어떡하면 된단 말이오
이사부 : 관건은 한강하류지역인 한성땅을 차지하는 것이옵니다.
진흥왕 : (진흥왕은 물론이고 배석한 모든 중신들이 다들 깜짝 놀라며 술렁인다.) 방금 뭐라 하였소? 한성땅을 차지한다 하였소? 그 한성땅으로 말한다면 옛날 백제가 고구려에게 잃었던 땅이고 고구려도 정예병이 배치된 그런 곳인데 우리 신라가 어떻게 양국에 맞서서 그 땅을 차지한단 말이오? 그러다가 역공이라도 받으면 어찌되는지는 경이 더 잘 알것 아니오이까?
이사부 : 지금 아찬 김무력 장군이 백제 성왕의 지휘 아래 한성땅 공략에 참가하고 있사옵니다. 우리가 도살성과 금현성 모두를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차지한 것처럼 때를 기다렸다가 공략하면 가능성이 충분히 있사옵니다. 아찬 김무력에게 백제를 돕는 척만 하고 병력손실을 최소화 하도록 하고 있다가 백제 고구려 양군이 모두 지치게 되면 그 틈을 타서 작전을 하게끔 할 생각이옵니다
거칠부 : 대왕마마 신 거칠부도 병부령 이사부장군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지금 고구려는 북방 돌궐을 막느라 이곳 남방경계엔 한계가 있사옵니다. 따라서 백제가 기를쓰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면 고구려는 병력보충이 안되기 때문에 힘이 달릴 것이옵니다. 그런데 백제 역시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웅진지역 귀족들의 불만이 높다 하옵니다. 게다가 백제의 귀족들은 한성옛땅 회복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옵니다. 옛날 한성 출신 귀족들은 몇 번의 정변으로 이미 권력중심에서 제외된지 오래이옵니다. 따라서 현재 백제의 중심귀족세력들은 한성땅에 탈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합니다. 오히려 자신들 휘하의 병력이 장기적으로 차출되는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하니 백제역시 고구려와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문제가 많을 것이옵니다. 그러면 고구려와 백제가 둘다 지쳐있을때 우리 신라가 공략하면 이 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옵니다.
진흥왕 : 경들이 그렇게 말을 하니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뒷일도 생각해 보고 하는 말이오? 그리고 한성땅을 차지하더라도 백제가 중간에 가로 막고 있는데 군량미나 군마등 물자는 어떻게 조달할 생각이오?
이사부 : 그 부분은 그리 걱정 하지 않아도 될 듯 하옵니다. 한수(漢水)가 시작하는 죽령땅과 한수의 중간에 해당하는 지역 그리고 하류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면 한강의 물에 배를 띄워서 물자를 수송하면 육로보다 더 안전하고 빠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리고 대왕마마. 신 한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진흥왕 : 무엇이오?
이사부 : 고구려에 전갈을 하나 보내 주시옵서서.
진흥왕 : 무슨 전갈 말이오?
이사부 : 하늘이 고구려를 굽어 살피기 때문에 우리 신라는 고구려와 대적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말씀하시고 현재는 백제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백제편에 있지만 하늘이 보살피는 고구려를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내주시옵서서. 그러면 필시 고구려는 그 뜻을 헤아릴 듯 하옵니다. 왜냐하면 거칠부 장군이 말했듯이 지금 고구려는 북방 돌궐을 상대하기에도 벅찬 마당에 우리 신라가 그런 뜻을 내비치면 좋아 할 것이옵니다.
진흥왕 : 그런데 어떻게 전갈을 보낸단 말이오.
거칠부 : 대왕마마. 제가 고구려에 대해선 정보망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혜량법사에게 대왕마마의 뜻을 전하면 혜량법사가 고구려 조정에 연이 닿아 있는 다른 법사를 통해서 전달이 가능하옵니다. 일이 잘 성사되면 나중에 혜량법사에게 큰 상을 하나 내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진흥왕 :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오.
(해설 : 이 부분에 대한 삼국유사의 언급이 바로 진흥왕이 이렇게 말한 부분으로 표현된다.)
신라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으랴』
이상의 가상 극화에 대한 삼국사기 진흥왕조 12년과 14년의 해당기록은 이렇다.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봄 정월,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3월,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열전 거칠부전)
진흥왕 12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 때 혜량 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읍배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성명을 보전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의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그를 말에 태워 함께 돌아 와서 왕에게 배알시키니, 왕이 그를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를 열고 팔관법을 실시하였다.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런 상황을 토대로 하여 관산성 직전 550년부터 553년까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치구도 및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 그림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로써 신라가 한수땅에 신주를 설치하고 한반도에는 새로운 격동의 장을 잉태하게 된다.
눈물을 머금고 옛고토를 스스로 버릴 수 밖에 없었던 백제 성왕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는 과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바로 이시점에서 백제성왕의 머릿속엔 어떤 구상이 그려지고 있었을까?
아마도 한성땅으로 이어지는 신라군의 맥을 끊음으로서 신주땅의 신라군은 고사시키고 신라군의 주력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응징전을 구상하였을 것이다.
신라에 대한 괘씸죄, 그것이 바로 관산성 전투의 시작이 된다.
왜 백제는 한성고토를 신라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나?
군사의 신속한 동원과 집중에 실패한 백제
실제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새롭게 차지한 지역에 대해서 새로운 군주(軍主)를 임명하고 당시 흡수한 가야인들에 대한 대규모 사민(私民)정책으로 영토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런 중앙집권적인 정치군사체제로 말미암아 신라는 유사시 특정지역에 군사동원을 집중할 수 있었는데 비하여 백제는 지방 귀족세력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군사력의 집중도에 있어서 열세를 보였다.
구당서에 보면 백제의 인구는 76만호로서 고구려나 신라보다 많게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지형지세에서 백제지역은 많은 평야를 가지고 있고 그 땅에서 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슴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백제의 인적자원은 지방분권적인 체제로 말미암아 유사시 군사력의 집중에 효율적으로 이용되지 못했다.
성왕 28년 백제가 달솔 달기에게 1만의 군사를 보내서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고구려의 역습으로 금현성을 내주는 등 서로 공방하다가 지친틈에 신라가 두 성을 차지했다고 하는 의미는 달리 말해서 백제나 고구려 두나라 모두 전투가 장기화 됨에 따라서 병력손실분에 대한 보충이 이루어 지지 않았슴을 의미한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에서도 초기 승기를 잡았던 백제가 신라의 반격에 결국 무릎을 꿇게 되는 과정에서도 보면 신라는 신주의 김무력군과 그 휘하의 보은 삼년산성의 군, 그리고 상주의 군등 삼개방면의 지원군이 옥천 관산성으로 집결하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백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군사력의 집중도에서 백제가 신라에 밀린 결과이다.
이에 대해서 백제성왕은 그 보완책으로서 전통적인 백제의 우방인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신라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야세력을 응원세력으로 확보하였다고 봄이 사실적 관계 추론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다.
실제로도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조 기록에 보면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창이 신라정벌을 계획하자 기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사옵니다.”라고 간하였다.
그러자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을 낼 것이 있겠소? ”
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기로라 함은 원로신하들인데 대체로 백제의 귀족세력이다. 태자 여창의 군사계획에 적극 동조하기 보다는 반대의 입장을 표하는 것을 볼때 그만큼 백제는 군사력 동원이 쉽지 않았을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서 신라기록은 왕이 명해서 어느 장군이 가서 싸웠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군사력 동원에 있어서의 양국간의 차이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군사 기동력의 차이
무릇 군사력의 집중은 기동력에 달려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동력 있는 군대는 승리하게 될 확률이 높다. 이 기동력이라는 부분에서 신라가 월등히 앞서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한강을 내륙운하처럼 군사물자의 이동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신라의_낙동강과_한강_물길_이용
요즘 세간에 관심이 되는 낙동강과 한강의 물줄기를 잇는 운하그림이다. 공교롭게도신라가 이용한 물길과 100% 똑같다. 신라는 바로 이 물줄기를 이용해서 군수물자 및 병력의 이동등에 적극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 한강은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를 몰아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방어막이자 보급로이였다.
신라가 총력을 기울여서 죽령넘어 남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국운을 걸고 한강하류를 차지한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견해는 중국과의 통교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강은 신속한 군사 보급물자 이동의 핵심적 자원이 된다. 지금처럼 도로나 철도가 나있지 않은 상태에서 험한 산길을 넘어 군사이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라는 남한강 일대를 차지함으로써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한강하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의 주둔지였던 소백산맥인근지역에서 한강하류까지 가는데 중간기착지로서의 교두보까지 마련하게 되었다.
즉 가지역의 성간에 유기적인 지원 연결체제를 구비한 것이 기동력 확보에 근간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비해서 백제는 수도 사비에서 한강하류까지 이동하려면 순전히 육로로만 이동해야 하고 중간중간에 적에게 보급로가 노출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방분권적인 정치군사체제에서 각 지역의 성(城)간에 유기적인 결합력이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이유에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할 때 백제가 곧바로 반격하지 못한 실질적 이유로 산정할 수 있겠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되찿은 옛 백제 땅에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다고 비정하는 곳이 지금의 하남시 일대의 이성산성이다.
이성산성에서 보면 옛 백제의 수도엿던 위례성인 풍납토성이 바로 눈 아래 보이고 한강 건너 구리시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략적 요충지를 신라에 빼앗긴 백제로서는 얼마나 뼈아팠을지는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중요한 지역이라면 신라의 공격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도 없다. 이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정상적이라면 백제가 오매불망 되찿은 옛고토라면 또 그곳을 신라가 공격하였다면 응당 격전을 벌였어야 이치상 맞고 또 빼앗겼다 하더라도 되찿기 위한 공격을 백제가 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상황을 일본서기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 그래서 신라가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즉 신라의 공격이 먼저가 아니라 백제가 한성을 포기하고 난 다음에 신라가 한성땅을 차지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왜 백제는 한성 옛땅을 버려야만 했을지 역사적 추론을 해 보자.
백제 성왕의 사비천도의 영향
예나 지금이나 한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 관점에서 수도를 옮길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보면 정치군사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수도를 옮기는 목적이 더 크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백제는 수도를 한성위례성에서 웅진성으로 그리고 부여사비성으로 천도를 하였다.
한성위례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길때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백제의 개로왕이 참수되고 고구려에 점령당함으로써 부득불 문주왕때는 수도를 공주 웅진성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왕때는 상황이 다르다. 성왕의 선대왕인 무녕왕은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웅진시대를 재정립한 왕이었고 그 토대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따라서 성왕이 웅진에서 부여사비로 옮기는 것은 군사적 관점이 아닌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이 배경엔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좁은 웅진성에서 보다 넒은 사비성으로 옮겼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비성으로 옮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 그에 반대하는 귀족 약 2000여명을 참살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었다.
어떻든 수도천도 과정에서 백제성왕은 기존의 정치세력을 자신중심으로 재편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과정에서 소외된 귀족계층이 생겼음은 자명할 것이다. 그런데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선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소외된 귀족이나 호족들에게선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병력수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백제와 신라의 점령지에 대한 처리 차이
이런 측면에서 신라와 백제의 병력운용에서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신라는 새로운 땅을 차지하게 되면 그곳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실질적인 지배를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성에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그곳 군주로 임명한 예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야인을 새로 획득한 땅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까지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방분권적 국가였기 때문에 사민정책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점령한 땅에 대해서 군대를 장기적으로 주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지방귀족휘하의 병력은 전투가 끝나면 다시 지방귀족소속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연한다면 신라는 점령지에 대해서 국가직할로 편입시키는 데 비하여 백제는 편입이 아닌 부용세력화 정책이었기에 신라처럼 항구적인 자기영토화가 힘들었다. 이것은 백제가 멸망할때까지 백제가 전라도 전지역에 대한 완벽한 지배권을 가지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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