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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삼국시대

3. 관산성 전투의 전초전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

고성혁의 역사추적 -  2008/08/05  


관산성 전투의 시발점 도살성 전투에 대한 고찰
 

도살성과 금현성은 어디일까?

관산성 전투를 엄밀하게 다루어 볼때 그 시작은 도살성전투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도살성 전투라 하면 성왕 28년인 서기 550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먼저 공격해서 빼앗고 그로부터 2달 후인 3월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보복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서 시작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 대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28년(550년)에 기록이 있다.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결과는 백제나 고구려의 승리가 아니고 신라의 승리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백제와 고구려가 치고받고 시작하였는데 끝내는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한 결과를 내고 말았다.

이때부터 백제가 신라에 대한 동맹으로서의 시각을 버리고 신라와 적이 되는 계기가 도살성 전투이다.

그 기록은 어떻게 삼국사기에 나와 있을까?

진흥왕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한 신라는 553년 한강하류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그 발판은 이 도살성이었다.

한강하류 지금의 하남시지역에 신라는 신주를 설치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 신주는 도살성과 금현성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경주 이남을 하주, 그 윗지역을 상주라고 하는데 현재의 상주가 바로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지명이다. 그 후 신라가 팽창하면서 소백산맥을 넘어 새롭게 차지한 한강유역일대를 모두 신주라고 칭하였다.

따라서 한강하류인 뿐만 아니라 도살성도 신주에 속하는 영역인데 관산성 전투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이 이끄는 신주의 군사였다는 사실이다.

관산성 전투 초기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던 신라가 관산성에서 성왕을 사로잡고 난 후에 전세를 역전시키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전멸시킨 군대가 신주의 김무력 군대인데 그 신주군대의 근거지가 사실상 도살성과 금현성이다.

어떻게 보면 신라와 백제의 국운을 뒤바꾼 관산성 전투의 시작점이자 끝점이 도살성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도살성의 위치조차 모르고 도살성전투에 대해서 역사에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하겠다.

또한 도살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한차례 더 기술되는데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편에 보면 이렇게 적혀있다.


진덕여왕2년(648)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쳐들어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치므로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 장군들을 시켜 방어하도록 하였다.

김유신은 3군을 다섯방면으로 나누어 적군(백제)을 쳤으나 서로 승부를 주고 받으니 10일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쓰러진 시체는 들을 가득 메우고,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닐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유신은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말을 쉬게 하면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재차 진격할 계책을 도모하엿다.

이 때 물새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유신의 군막을 지나치자 장병들은 이를 보고 흉조라고 여기자 유신이 말하기를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반드시 정탐을 하려는 백제의 첩자가 올 것이다.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묻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신은  사람을 시켜  군중(軍中)에 령을 내렸다.

"굳게 지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도착한 다음 결전을 하리라."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자 은상(殷相) 등은 신라에 원군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의혹과 더불어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신 등이 일시에 들이쳐서 크게 이겼다.

벡제 달솔(達率) 정중(正仲)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고, 좌평(佐平) 은상(殷相)과 달솔(達率) 자견(自堅) 등 10명과 군사 8천9백8십 명의 목을 베었으며, 말 1만 필과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였다. 이 이외에 노획한 각종 기구도 이와 비슷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항복하여 왔으나 유신은 이들을 모두 풀어 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서울(경주)에 이르니 대왕이 문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 삼국사기 권제 42 열전 김유신  中 ---


관산성 전투(554년) 이후 약 100여년이 흘러서 또 다시 신라와 백제는 도살성 부근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던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 하고, 피가 흘러 방패가 떠 다닐정도였다.” 라는 부분에서 전투의 치열함과 처참함을 이것보다 더 극명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하는 경외감까지 들 정도이다.

방패가 떠 다닐정도로 피가 흐르는 상황의 전투를 상상해 보면 가히 그 치열한 전투전개상황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도살성은 또 한번 신라와 백제의 대규모의 처절한 전투의 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역사속에서 뭍혀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전쟁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전투지역과 각 군의 배치를 먼저 살펴야 그 전개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데 도살성과 금현성의 위치를 모른다는 점이 필자가 관산성 전투의 재구성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여러 관계서적을 뒤져봐도 딱히 여기다 하는 내용이 없이 학자별로 대충 여기저기 추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인터넷자료를 보면 도살성과 금현성을 중국대륙에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보면 너무 터무니 없었다. 당시 삼국간의 전투전개상황과 병력배치나 이동등을 도외시 하고 단지 “우리나라최고”라는 생각에 신라까지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터무니 없어 보였다.

일부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서 대륙백제설을 주장하는 경우는 있지만 분명하게 관산성전투당시에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전투는 한반도에서 전개되었슴이 분명하다. 이것에 대해서는 문헌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유물로도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당시의 도살성 위치를 중국대륙이라고 주장하는 자료를 보고 씁슬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군사적 관점에서 객관적 자료와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도살성의 위치를 찿아보고자 마음 먹고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고 정치는 정치논리로 그리고 전쟁은 군사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일반적 논리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라는 판단이다.
 

도살성과 금현성 위치 추론의 3가지 원칙

첫번째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원칙이다.

먼저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했고 그 다음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했기 때문에 도살성은 고구려영토에 있어야 하고 금현성은 백제지역에 속해 있어야 한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도살성과 금현성을 마지막엔 신라가 차지하고 말았으니 두 성은 신라가 접근할 수 있는 범위내에 존재해야 한다. 즉 이말은 도살성 금현성 모두 백제 고구려 신라의 3국의 접경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두번째는 금현성과 도살성은 그렇게 멀지 않은 인접 거리내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기록에 보면 이사부 장군의 부대가 두 성을 모두 차지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것에 기초한다면 신라의 동일한 부대가 작전을 수행한 것이기 때문에 두 성의 위치는 신라가 동시에 작전을 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도살성과 금현성은 서로 그렇게 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두성을 차지한 이후 신라가 한강하류인 한성일대에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그곳의 군주로 파견하게 되기 때문에 도살성과 금현성은 신라가 한강하류로 접근할 수 있는 루트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지금의 경상도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중간지역에 도살성과 금현성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550년 당시 신라는 이미 충청도 보은의 삼년산성과 문경세재의 고모산성을 발판으로 해서 충주지역까지 진출한 상태이므로 도살성과 금현성은 삼년산성과 고모산성 그리고 충주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지역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3가지 사항을 공통분모로 할 수 있는 삼국시대의 성을 찿기로 했다.

 
1. 도살성(천안) 금현성(연기군 전의면) 설

인터넷의 자료엔 상당히 많은 자료에서 천안을 도살성으로 그리고 연기군 전의면을 금현성의 위치로 추정하고 있었다. 천안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천안의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천안의 삼국시대 지명으로 도살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금현성에 대해서는 천의 바로 아래인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금이성을 금현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위치를 봤을때는 군사지리적 측면에선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일까?

먼저 현재의 천안시가지가 형성된 지역은 삼국시대 보다는 고려시대에 와서 융성한 지역이다. 삼국시대엔 현재 천안지역보다는 목천지역이 보다 중심이 되는 지역이었다. 현재의 독립기념관으로부터에서 유관순의 만세운동이 일었던 병천지역으로 지칭되는 목천일대는 웅진백제시대 목협만치의 주세력근거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곳을 도살성이라 비정하는 것은 천안 목천일대가 도살성이 고구려영역이라는 조건에 맞지 않는다.

또한 천안 목천일대지역은 신라의 중부지역 최고 사령부라 할 수 있는 충북 보은과 550년 당시 나제동맹 주력군이라 할 수 있는 고모산성과 충주산성에 배치된 신라군의 지원을 받기에 부적합한 장소처럼 보인다.

 ▼ 550년 도살성 전투 직전 당시  중부지방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역분포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안을 도살성으로 추정한다면 가장 먼저 천안은 당시 고구려영역도 아닐뿐더러 신라가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서기 550년 당시 신라는 소백산맥을 겨우 넘은 정도에 불과하다. 이때 신라군의 사령부 및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하던 곳은 죽령방면군으로는 온달산성과 단양적성쪽이 되고 문경세재를 넘는 조령방면군의 사령부는 고모산성이 핵심기지였다. 고모산성의 전방 기지겪인 충주시에 있는 충주산성이 된다.

그 다음으로 추풍령 방면군의 사단 사령부 역할은 삼년산성이고 그 삼년산성의 전초기지역할은 옥천군 청성면에 자리잡고 있는 굴산성이었다.

이렇게 신라군이 군사령부를 고모산성과 삼년산성에 두고 있는 전선배치에 대해서 고구려군은 괴산 증평 진천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에 천안이 도살성이라 한다면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는 괴산 증평 진천을 거쳐가야 하는데 군작전과 기동의 보편적 원칙상 맞지가 않다.

또한 금현성이라고 일반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충남연기군 전의면의 금이성의 위치또한 당시 백제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청원일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역시 이치상 맞지가 않다.

만약에 천안이 도살성이라 하고 연기군 전의면 일대를 금현성이라고 가정할 때 백제가 고구려영인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가 백제영토인 금현성을 차지했다고 한다면 금현성의 위치가 도리어 백제가 차지하고 있는 도살성보다 더 공주(웅진)쪽에 가깝게 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 두곳은 그 타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좀 더 자료를 찿아 보았다.
 

천안은 도솔이라는 명칭에서 유래

현재 천안시일대가 사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통일신라말 고려초부터이다. 당시 이 지역 명칭이 동도솔 서도솔이라 불리웠다 한다.

그런데 이 도솔이라는 명칭은 불교식 용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극락세계를 갈 때 꼭 거친다는 서방정토의 도솔천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고 통일신라말 후삼국시대엔 미륵불사상이 널리 퍼지던 시기였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자신을 살아있는 미륵부처라고 지칭한 것을 되세겨 본다면 금방 이해될 부분이다.

그 동도솔과 서도솔을 합쳐서 도솔이라 불리웠는데 그렇다면 천안(天安)과 도솔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는데 극락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 도솔천안이다. 즉, 미륵불사상에 기초한 도솔천안에서 앞부분 도솔이 빠지고 천안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간과하고 도살성과 도솔의 음가(音價)가 유사해서 천안시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표시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이 점에 대해서 천안시청 문화관광과의 학예사에게 전화를 걸어 천안을 삼국시대의 도살성이라고 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전하고 천안시청 학예사도 그 점에 대해서 인정하였으니 조만간에 고쳐지리라 본다.

또한 연기군 전의면의 금이성은 지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말 고려초의 유물만이 출토됨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산성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월간조선 정순태 기자의 관산성 전투 역사 기행문

도살성과 금현성 위치에 대해서 골몰하던 중 우연찮게 월간조선 2007년 11월호에 관산성 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실린 것을 보게 되었다. 평소 월간조선 조갑제 전 편집장의 글과 정순태 기자의 역사관련 글을 즐겨 읽는 터이지만 때마침 관산성 전투관련 역사기행문이 게재된 것은 필자에게 뜻밖의 선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정순태 기자의 관산성전투기사에 보면 청주를 도살성으로 그리고 진천을 금현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기사는 필자의 눈을 진천으로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관산성전투 현장인 옥천지역의 산성에 대해서 조사할 때 옥천군청 홈페이지 자료를 매우 유용하게 사용한 경험을 살려서 진천군청과 청주시청, 그리고 증평군청의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지게 되었다.

이럴땐 인터넷 시대가 참으로 좋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만약 인터넷이 아니라면 각종 자료를 찿아 해당 지역을 직접 가보거나 해야 하는데 그 시간과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순간 아찔한 느낌마저 든다.

요즘은 지역자치단체의 홈페이지가 상당히 잘 꾸며져 있는데 특히 필자에게는 각 지역의 유래라든가 향토유적에 대한 숨은 자료를 손 쉽게 찿을 수 있어서 인터넷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향토자료에서 지역 유래와 삼국시대 산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그 위치를 파악해서 구글어스에서 지형의 모습을 확인해 보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압축된 지역은 증평과 진천이었다. 특히 진천은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있는 태령산과 유허지로서 유명한 곳 아닌가? 또 삼국시대엔 고구려 영토였으니 순간 속칭 “필이 꽂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또 한번의 밀리터리관점의 검증작업을 하게 된다.
 
먼저 삼국의 접경지역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도살성과 금현성은 그 위치가 서로 멀지 않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신라가 한강하류지역으로 가는 중간역할로서의 지역이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좀 더 구체적인 위치를 추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순태기자가 언급한 내용엔 도살성의 위치를 지금의 청주로 비정하고 있다. 그래서 찿아 보았더니 청주엔 상당산성이 있다. 서울인근의 남한산성같은 곳이 청주의 상당산성이다.

그 지역적 유래를 보면 삼국시대엔 상당현이라 불리웠고 진흥왕이 낭성이라고 하는 곳에서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는 유래도 있다. 그 낭성(낭자곡)을 상당산성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는데 위치가 마음에 걸린다.

도살성은 550년 당시 고구려 영토인데 상당현(청주)에 대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백제영토였다가 신라의 상당현으로 바뀐 것으로 나온다. 또한 위치도 보면 신라의 보은 삼년산성과는 인접해 있지만 고구려의 작전영역으로는 조금 멀어보인다.

결정적으로 금현성으로 추정하는 진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너무 백제의 영역에 치우쳐 있기에 군사적 관섬에선 도살성으로 보기엔 부족하다.
 

증평군 이성산성 - 고구려의 최남단 전초기지


증편군 도안면에 있는 이성산성

증평군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증평군의 연혁을 살펴보는데 눈에 확띠는 것이 있었으니 증평군 도안면에 있는 이성산성이다. 이성산성의 위치는 금강의 증평지역 상류인 보강천을 자연해자로 삼고 증평의 미호평야를 굽어보는 나지막한 산성이다.

그런데 그 위치가 바둑에서 본다면 혈맥의 점이다. 청주에서 출발하여 미호평야를 거쳐서 괴산과 충주로 가려면 이성산성을 거치지 않고선 갈 수가 없는 딱 그 위치이다. 밀리터리적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성산성에서 눈을 띌래야 띌수가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음운학적으로는 도살성과 연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증평의 옛지명에서 단초가 될 만한 것이 잡혔다.

반대로 고구려입장에서는 충주 국원성에서 연결되는 이성산성은 백제의 청주를 위협하는 비수와도 같은 곳으로서 미호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위치다. 그런 이유로 해서 백제입장에서는 이성산성은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란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성산성이라는 이름엔 도살성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에 하나의 멍에로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한 고비마다 그것을 푸는데는 그 현장에 직접 가보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필자는 증평군 이성산성을 향해서 한 달음에 달려갔다.

구글어스를 통해본 이성산성을 직접보니 이성산성은 산이라기 보다는 나지막한 언덕베기라고 하는 것이 더 맞아보인다. 현재는 인근 주민들의 운동과 산책의 장소로 변한 이성산성이다.

그러나 이성산성에 올라보고선 내 눈앞에 펼쳐진 미호평와와 굽이쳐 흐르는 금강의 상류인 보강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말과 군사를 먹이고 주둔하기엔 이보다 더 편한 장소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서 하산과정에서 택시기사 한분을 만났는데 지긋한 연세의 그 기사분은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선 증평문화원에 가보면 좀더 상세한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증평 문화원에서 찿은 단서들

증평문화원에서 관계자가 자초지종을 듣더니 책을 하나 꺼내준다. 1997년도에 실시했던 이성산성 지표발굴조사 보고서이다. 증평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관내 문화유적에 대한 재조명 차원에서 이성산성에 대해서 조사를 한 것이라고 한다.

“혹시 이성산성이 삼국시대 도살성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까?”

“도살성이요? 글세요. 못들어 봤는데요.”

“그렇습니까? 제가 볼때는 아무리도 이성산성이 관산성전투의 전초전이었던 도살성 같다는 심증을 갖게 됩니다“

“그래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를 못했는데요 이성산성이 초기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성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곳 증평이 삼국시대때 지명이 도서현(道西現)이라고 했었는데 혹시 그것과 관계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말을 듣는 순간 2% 부족한 뭔가의 연결고리를 찿은듯한 마치 만화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때 전기불이 반짝이듯이 내 머릿속에선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혹시 이 보고서를 하나 더 있다면 제가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떡하죠? 죄송하게 한권뿐이라서요 대신에 필요하신 부분을 복사는 해 들릴 수 있습니다”

중요부분을 찿아서 한달음에 내리 읽어 내려갔다. 아마 피라미드의 비밀을 풀었던 고고학자들의 마음처럼 이성산성발굴조사보고서는 다른곳에선 얻을 수 없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었다.

 
이성산성지표조사발굴 보고서

보고서 앞머리엔 이성산성의 역사지리적 배경부터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청주,보은,영동,옥천등은 백제의 군현으로 기록되어 있고 진천,괴산,음성,중주등은 고구려 군현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성산성이 위치해 있는 현재의 증평군 도안면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고구려의 흑양군(黑壤郡) 도서현(道西縣)이었는데 당시의 도서현(道西縣)의 치소(治所)인 도서현성을 이성산성이라고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내용은 주석에 별도로 표기하고 있는데 1983년도에 민덕식씨가 사학연구에 올린 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이성산성과 도살성의 연결고리로서 하나는 찿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증평군 민속자료실에 있는 증평군 모형도이다.  이성산성의 위치를 잘 볼 수 있다.

이성산성(도살성 추정)의 내부는 무척이나 큰 성이다. 증평에서 괴산 충주로 넘어가는 검문소 같은 지점에 있는 곳으로서 그옛날  군사적 가치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도살성내에 있는  남성(토성)의 평면도 :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거의 허물어져서 원형을 알아보기 쉽지 않다.


도살성내 북성의 성벽(토성)의 흔적을 가파른 경사로로 알수 있다 ( 주민들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도살성의 북성 평면도 : 증평군의 평야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성산성의 축성된 시대적 배경으로서 고고학적 유물에 관련한 내용을 보고서엔 기술하고 있는데 증평군 일대는 고구려가 진출하기 이전인 청동기 및 철기시대 유적도 혼재하고 있다고 표기하고 있다. 이성산성에는 삼국시대 토기가 주로 발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그 시대적 고찰자료로서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로서 이성산성은 삼국시대의 산성임을 알수 있다.
 
이어서 보고서는 각종 유물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 관심사는 유물이 아니라 이성산성과 도살성의 연결고리이다. 특히 도살성(道薩城)의 살(薩)자의 근거를 찿아내는 것이 이성산성을 도살성으로 보는 가장 핵심포인트인데 그 단서를 지표조사보고서에서 볼 수 있었다.
 


도살성의 북성에서 내려다 본 증평군 평야

이성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22페이지에 보면 신라소지왕 6년(484년) 고구려가 모산성(母山城)을 침공하였으나 나제동맹군에 의해서 격퇴되었는데 모산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나제동맹군의 활동으로 미루어 보아 청추,진천부근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모산성은 일반적으로 진천의 대모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서 지표조사 보고서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데 同王(신라소지왕)16년(494) 신라는 고구려군과 살수지원(薩水之原:충북청천)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견아성으로 후퇴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내 눈에 확 띄는 것이 살수지원(薩水之原)이라는 글자였다.

그래서 증평문화원 관계자에게 물어보았다.

“살수지원(薩水之原)이라고 하는 충북청천이 어디입니까? 이곳 증평이 고구려때 도서현이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수지원이라는 곳이 있다면 이성산성을 도살성이라 연결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 같은데요?”

“그런 내용도 있었습니까? 충북 청천은 괴산군에 속해있습니다. 그런데 괴산군은 한강수계이고 이곳 증평은 금강수계라서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증평과 괴산은 고개 하나를 두고 나뉘어 있지만 거리는 무척 가까운 편이다. 그러나 괴산은 한강수계의 상류지역이고 증평은 금강 수계의 상류지역이다.

강줄기가 다르면 문화가 다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곳이 삼국의 접경지역이며 격전지가 되는 더 강력한 단서가 되는 것인데 그것을 증평문화원 관계자는 재차 확인시켜주고 있음이리라.

원래 살수하면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을 떠올리는데 살수(薩水)라고 할때 살(薩)은 우리말인 “물살”할 때 그 “살”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표기방법중 하나인 이두식표기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살수라고 할때는 물살이 쎈 강 상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도서현에 속한 이성산성과 살수지원(薩水之原)의 의미를 연결하면 이성산성을 도살성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물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금현성은 어디일까?

월간조선의 정순태기자도 금현성의 위치를 지금의 진천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진천에는 김유신장군 탄생지이기도 하고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한 곳이 바로 진천이다.

도살성으로 추정하는 증평의 이성산성과 진천은 지척간이다. 고개를 하나 사이에 두고 충북지역에서 보기 드문 평야를 끼고 있는 곳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위 지도를 보자.

증평의 이성산성이 도살성이다라는 추정의 근거를 앞서 서술하였는데 현재의 진천 또한 교통의 요충지이자 진천평야를 끼고 있는 곳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현재의 진천을 고구려영인 흑양군 진주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고구려 장수왕이 남정하여 충주를 고구려의 국원성으로 삼았을때의 영역표시이다.

진천에 있는 도당산성이나 대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제일 하층엔 백제의 유물이 그다음엔 고구려 제일 상층엔 신라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천의 지리적 역사적 환경을 웅변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진천을 550년 당시 백제의 금현성으로 추정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앞서 전제한 바와 같이 삼국의 접경지라는 제1조건과 도살성과 그리 멀지 않고 신라의 접근성이 용이해야 한다는 제2조건과 신라의 한강하류 신주로 연결되는 루트상에 있어야 한다는 제3조건에서 추론의 근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금현성에 대해선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고대 전쟁의 불문율이라 할 수 있는 등가성 원칙인데 소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원칙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한번 보자.
 

성왕 28년(550)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진흥왕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한 마디로 백제의 공격에 대해서 고구려가 즉각적인 보복공격을 감행하였는데 공격받은 성이 아니라 다른 성이다.

보통 이럴 경우엔 앞서 말한 등가성 원칙에 따라서 아군이 공격받은 성과 같은 성격과 가치의 적의 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그 점에서 진천일대는 증평의 도살성과 판박이이다.

지리적 측면에서 보면 고구려의 도살성으로 추정되는 이성산성의 경우 미호평야를 굽어보고 있는데 이성산성 바로 앞은 금강상류인 보강천이 해자처럼 두루고 있어서 자연방호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성산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충주나 괴산쪽으로 갈 수 없는 길목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요충지이다.

한편 이성산성은 백제와 접하는 고구려의 최남단 성으로서 백제가 공격하기 위한 접근로가 쉽게 펼쳐져 있다.


도당산성과 대모산성 (두 개의 성중 하나를 금현성으로 추정)의 위치와 지형도


진천군 대모산성 전경


마찬가지로 진천의 경우 진천평야를 굽어보는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시 금강상류의 한 지류인 성암천을 앞에두고 방호구실로 삼고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진천은 만뢰산과 덕곡산을 경계로 하여 천안 목천으로 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도 21번 국도가 덕곡산을 넘어 목천으로 연결되고 34번국도가 만뢰산을 넘어 천안으로 넘어가고 있다.

진천이 뚫린다면 바로 천안을 거쳐서 공주 웅천성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마는 그런 곳이기에 백제로서는 550년 당시 최전선중의 전선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금현성은 한자로 쓰면 金峴城이 되는데 과거 우리 지명을 우리 말을 한자로 바꾸어 쓴 경우가 많다. 그렇게 볼때 금현성을 풀어보면 쇳고개, 쇳재 이렇게 될터라서 쇳고개라는 지명이 혹시 진천부근에 있는지 조사해 보았으나 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일대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제철제련 지대임을 진천군청 문화담당 신운철계장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진천군 석장리일대의 고대 제철 유적지 (진천군청 제공) * 이 사진은 무단도용을 금함.


고대 제철 유적지 진천군 석장리 일대 (사진제공 진천군청)
 

한편 진천읍 마을에 대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진천읍 금암리의 금성마을이 예로부터 금광산지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로서 금현성이라 할때 그 金자는 쇠가 아니라 금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또한 진천읍을 넘어 이어지는 목천에는 백제의 제철시설 흔적인 쇠똥이 많이 발견된다고 하니 진천에서 목천으로 넘어가는 이곳은 분명히 그것이 금이든 철이든간에 金과 연관성이 있슴에 분명해 보인다.

또한 진천군청 신운철 문화계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당산성은 지금은 도읍 ‘都’에 집 ‘堂’을 쓰는데 그 부분이 잘못됐고 이것은 누군가가 한문을 바꿨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대로 쓰려면 무리 ‘徒(도)’자, 화랑도 할 때 이 ‘徒’를 씁니다. 그리고 깃발 ‘幢(당)’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 徒幢(도당)은 곧 郎幢(낭당)과 같은 개념이 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는 ‘郎幢(낭당)’이라는 무적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낭당부대가 주둔하던 곳이 이곳이고 그 낭당부대의 주력은 화랑도들이었다는 겁니다.

저 앞에 17번 국도가 보이는데 이 국도 공사를 하면서 지표조사를 했습니다. 지표조사를 하면서 삼국시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충북대 학술조사단에서 유물들을 조사했는데 당시 발견된 무덤들이 화랑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이게 도당산성하고 연계가 됐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들이 머물면서 전투하다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기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당산성도 상당히 중요한 유적인데 이 부분도 아까 말씀드린 연구하고 병행해서 복원시켜야 할 겁니다.

---- 조갑제 닷컴 신라의 삼국통일 발자취를 찿아서의 일부분 ---



도당산성 전경. 도당산성 바로 뒤쪽이 김유신장군을 모신 사당인 길상사가 있다.


이런 사실들을 현재의 도로망과 연계시키면 다음과 같다.

550년대 도살성 전투이후 새롭게 얻은 소백산맥 넘어의 새땅을 신라를 신주라 칭하게 되는데 이것의 지리적 군사적 중요도는 그 위치를 지도상에 그려봄으로써 확연하게 알수 있게 된다.
 



현재 중부고속도로는 바로 하남(신라의 한강하류 신주가 설치된 이성산성) -> 이천 (설봉산성) -> 진천증평(금현성.도살성)->청주(낭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  1500년전의 신라 팽창의 길이 현재의 중부고속도로와 그대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보면  일종의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이상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때 증평과 진천은 그 옛날 삼국의 격전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수 있다. 이것을 지도상에 종합하여 전투 전개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전투력이 고갈되었을때 신라가 고모산성과 삼년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충주일대를 석권하고 증평의 도살성, 그리고 진천의 금현성 일대를 모두 차지하게 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 후 지금까지 진천일대는 김유신장군과 관련한 유적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것또한 역사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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