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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세계사

1차대전 최악의 상륙작전 갈리폴리

1914년 8월,1차 대전이 발발할때만 해도 터키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독일에 많은 원조를 받고 있었을 뿐더러, 전통적인 적대국 러시아가 연합국측에 참전하자 터키는 동맹국측에 가담하게 된다.

더군다나 독일이 터키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서 터키군의 현대화를 추진한 결과, 터키군은 40개 사단 규모의 정규군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고착상태에 빠진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서부전선에 대한 실마리를 좀처럼 찾지 못한 상태에서, 터키군이 남부로부터 러시아를 압박하게 된다면 전쟁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터키를 패배시켜 동맹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하고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지원한다는 것이 작전의 큰 목적을 세우게 된다. 실질적인 계획을 입안한 당시 내각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곧바로 다르다넬즈 해협을 통해 터키 수도 이스탄불로 진격하는 작전안을 내각에서 관철시켰다.


그런데 갈리폴리(=칼리폴리Gallipoli)는 다르다넬스 해협 동쪽끝에 있는 터키 서부의 항구로, 지정학적으로 흑해를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이곳을 장악할 수 있다면 러시아로 통하는 관문을 열수 있을 뿐 아니라, 터키군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국토를 갈라놓을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발칸전쟁등에서 시종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터키군이었기에 당시 세계최고의 해군력을 자처하던 영국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의 대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 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무너져 가는 제국이라도 하루아침에 붕괴되지는 않았다. 터키에는 아직 케밀 파샤(= 케말 무스타파)장군이 있었다.




터키군의 '케밀 파샤' 대령 (좌측 하얀옷에  쌍안경을 걸고 있는 이). 그는 후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오스만 투르크의 제국정치를 종식시키고 현대 터키를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갈리폴리를 침공하려던 영국 해군은 당시 세계 최강으로 전함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호를 중심으로하여 31척의 주력 전함, 3척의 전투 순양함, 24척의 순양함, 25척의 구축함, 50대 이상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대선단을 동원하여 단숨에 갈리폴리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에대해 케밀파샤 대령은 좁은 다르다넬즈 해협 양편에 강력한 해안 포대와 진지들을 구축하고 연합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해안 포대에 대해 처칠도 알고 있었고, 영국군이 보유한 해군력만으로도 충분히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다다넬스 해협의 터키군 요새에 포탄을 발사하는 영국해군 전함 '콘월리스'(HMS Cornwallis)


그리고 마침내 1915년 2월19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 함대가 터키군의 요새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케밀파샤대령이 이끄는 터키군의 반격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특히 3월 18일에는 작전에 참가한 16척의 전함 중에 3척이 침몰되고 3척이 대파되는 참패를 겪고 말았다. 이로 인해 무리한 작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영국 해군의 ‘피셔’ 제독이 사임하고, 총책임자인 ‘처칠’도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영국군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터키군이 입은 피해 역시 상당하였으므로 곧바로 상륙작전을 펼쳤다면 터키군도 더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나 영국은 유능한 해군제독과  장관을 이따라 해임하면서, 오히려 터키군에게 병력을 재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해군의 단독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판단한 영국은 육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I. 해밀턴장군의 지휘 아래에 4월 25일에 호주와 뉴질랜드군을 주축으로 한 영연방군과 프랑스군 등 7만의 원정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하였다.

그런데 터키군역시 6주간의 시간동안 부족한 병력을 추가로 재배치하여 8만 5천명을 다르다넬스 해협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숫적 열세에 직면한 연합군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터키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해밀턴은 좁은 해변과 가파른 언덕이 있는 상륙작전을 펼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지점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케밀파샤가 이끄는 터키 제 19사단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케말파샤는 영국군을 좁은 해안에 가두어 대규모 작전을 봉쇄하였다. 특히 병력을 주요 거점지역에 배치하여, 정면대결보다는 수비적인 전략에 치중하였다.  케밀파샤의 봉쇄작전은 적중하여 영국군이 전진을 하지도, 바다로 돌아가지도 못하도록 만들었다.





연합군의 주축인 영국군의 움직임이 봉쇄되자, 상륙작전은 장기전으로 흘러 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참호진지를 구축한 터키군의 저항은 매우 견고하면서도 끈질긴 것이어서 양측모두 수십만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함포사격으로 항상 유리한 입장에서 공세를 펼쳤던 연합군이었지만, 영국군의 악명높은 돌격전술은  매번 엄청난 희생자만 발생시킨체 아무 소득없이 끝나곤 하였다.

  
8월에 접어들자 영국은 상륙지점을 이스탄불에서 좀 더 가까운 수불라안으로 잡았다. 그리고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은 연합군이 해안선으로 상륙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전함들은 터키의 포격사정권 밖에 배치되어야 했기 때문에, 육군의 상륙작전을 충분히 지원할 수 없었다.
결국 엄청난 희생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영국 최고사령부는 당시만해도 영연방 소속인 호주 - 뉴질랜드 군(=앤잭코브, ANZAC Corp)에게 참호진지에 대한 정면돌파를 명령하였다.


현대전에 전혀 경험이 없었던 호주 - 뉴질랜드군의 운명은 한마디로 전쟁의 희생량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전투라기 보다는 대량학살 홀로코스트나 마찬가지였다.


지휘관의 '진격'이란 한마디에 기관총 사수가 기다리고 있는 적진을 향해 무조건 돌격하는 것이 전술의 전부였다.
그것도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무모한 차라리 집단자살에 가까운 전술에도 한가지 희망은 있었다.
오후 4시 30분에 전함으로부터 함포지원 약속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함에서 함포사격만 제대로 해 준다면, 참호안에 기관총 사수들은 제대로 사격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일단 참호진지만 점령하면 전투는 끝난다.


4시 30분이 되자 호주 - 뉴질랜드 연합군은 약속한대로 돌격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어의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함포사격이 3분이나 늦은 것이다.




터키군 방어선을 향해 돌격하는 '호주-뉴질랜드' 군단(ANZAC)


쏟아지는 기관총탄속에 방탄복은 커녕 철모도 없이 노출되었던 그들의 운명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3분 후 재기된 함포사격조차 터키군의 진지에 닿지 못하였던 것에 있었다.

죽음 ...또 죽음
단 10분 동안에 호주- 뉴질랜드 군은 전력의 90%를 잃어버렸다.
이 죽음이 분명한 상황속에서도 지휘장교는 2분간격으로 다섯차례에 걸쳐 돌격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전술 아닌 전술로 인해 희생된 호주군의 전사자만 8,587명 부상자는 1만 9,367명이었다. 

이제는 고전영화에 속하긴 하지만 '갈리폴리'라는 영화속 이야기 역시
이 전투에서 희생당한 아치 해밀턴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이다.


내용은 호주의 촉망받던 육상선수 출신 아치 해밀턴과 프랭크 던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 유행처럼 번지던 자원입대에 합류하여 전쟁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해 8월 수불라안 만 내에 있는 안잭 내포(Anzac Cove)항을 점령하는 전투에 투입된다.

주인공이 속한 중대는 총 600명이었는데, 4대로 나누어 기관총 사수를 돌파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물론 대책없는 육탄돌격이었다. 3대의 부대가 괴멸당하고서야, 대위는 본대에 명령철회를 요구한다. 그러나 통신두절, 할 수없이 해밀턴의 친구이자 같은 육상선수 출신인 프랭크에게 맡긴다.

영화상으로는 해밀턴은 자원입대하였지만, 프랭크는 친구가 지원하자 분위기에 휩슬려 지원하였기 때문에 보다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본대에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터키군의 총탄세래를 등지고 달려야 했으니까....

아무튼 어찌 어찌 구사일생으로 프랭크 군은 전황을 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연대장은 전황을 무시하고 거듭 돌파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통신까지 재개되어 공격을 보류하고 있던 해밀턴이 소속된 부대에게 재차 명령이 전달되어 버린다.

결과는 전멸... 해밀턴의 발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총알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 공격에 참여한 두 연대 600명중 전사자만 4백명, 이것이 넥(Nek) 전투, 호주에서는 안잭 내포의 비극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갈리폴리 전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처음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였던 4월 25일에 우리나라의 현충일과 같은 행사를 한다고 한다.

연합군 25만 2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끝에 6개월만에 병력을 철수 시키고 말았다.
결국 케밀파샤가 이끈 터키군이 승리한 것이다.





터키군역시 함포사격등에 의해 25만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사상자의 숫자로만 본다면 연합군과 크게 다를것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터키군은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의 대 공세를 막아내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와 연합군의 연결 역시 한동안 막아 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몰락해 가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남은 힘을 보여주면서, 터키는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았고 또 중동과 유럽지역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주도권도 일시적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출처: 역사의 천존고  http://kr.blog.yahoo.com/shim4ro/2734?c=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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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의 역사마다 불세출의 영웅들이 한둘은 있기 마련인데 터키는 케밀파샤 라는 영웅이 그랬죠. 심지어 한 전장에서는 총탄이 한발도 안남고 다 바닥난 부대를 이끌고 몇배나 많은 적부대에 반격하여 격파 한 전설도 있는 불패의 장군입니다.

1차대전의 패배후 그리스가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압도적 병기와 전력으로 침공해 왔을때 승산없으니 항복하자는 일부 정치인들을 설득한 후 바로 전장으로 달려가서 허를 찌르는 선제공세를 결행, 오히려 그리스 국내로 진격해 들어가 버립니다.

위대한 군인,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사상가... 군주제를 공화제로 전환시켰고,종교와 정치를 엄격히 분리했고, 외부의 위협에 조국을 지켰죠. 아직도 터키에서는 이 분을 욕하면 처벌되는 법이 있을 정도. 터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에서도 이 분은 넬슨제독만큼이나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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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영어 잘하시는 분은 꼭 "The Band Played Waltzing Matilda"라는 노래를 들어보세요...
위 사건을 주제로한 정말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재밌는 사실은 갈리폴리전투로 인해 호주와 터키간에 묘한 우호관계가 생겨났다는 점인데, 호주군 장교가 철수하면서 남긴 쪽지와 이후 본문에도 언급된 아타 투르크 대통령이 갈리폴리에 참전했다 호주-뉴질랜드군 희생자의 부모들에게 보낸 메시지가 매우 유명합니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호주에는 아타 투르크의 기념관이 있고 호주의 현충일과 같은 ANZAC Day에는 당시 적국으로서는 유일하게 터키의 국기가 퍼레이드에 함께 등장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위에서 언급한 가사와 쪽지, 그리고 아타 투르크의 메시지 같은 것을 찾아보시기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에서 말한 1934년 아타 투르크 대통령이 ANZAC연합군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Johnny'는 흔한 영어식 이름이고 'Mehmet'은 흔한 터키식 이름입니다. -

"Those heroes that shed their blood and lost their lives… you are now lying in the soil of a friendly country. Therefore rest in peace.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Johnnies and the Mehmets where they lie side by side here in this country of ours… You the mothers who sent their sons from far away countries, wipe away your tears. Your sons are now lying in our bosom and are in peace. Having lost their lives on this land they have become our sons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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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잭코브ANZAC Corp)라는 대목에서 좀 그렇네요 ㅎㅎ ,,,

앤잭코프 ANZAC CORP 라고 적으셨는데,, Australia-New-Zealand-Army-Corporation 즉 ANZAC 이라는 단어에 이미 CORP 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요 ,, 한마디로,, 한국말로 하면 호주-뉴질렌드 연합 연합군 이렇게 되는거죠 ,, ANZAC CORP 대신에 그냥 ANZAC 이라고 하면 않될까요


음...앤잭은 고유명사화 되었다고 봅니다. 지적하신분 말 처럼 풀어쓰면 그 속에 연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긴 하였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합성어죠. 영문법은 잘 모르지만 ;; 뒤에 corp가 붙어도 괜찮지 않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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