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 무덤 ‘입구’에 닿다
ㆍ이집트 서쪽 마그나 신전 인근
ㆍ추정 묘 발견…고고학계 ‘들썩’
1963년작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한장면
이집트 타포시리스 마그나 신전 주변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묻혔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돼 세계 고고학계가 들썩이고 있다.
미국 CNN방송에 따르면 이집트 고유물 최고위원회는 19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19㎞ 떨어진 타포시리스 마그나 신전 주변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무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타포시리스 마그나 신전은 기원전 300년쯤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발굴팀은 3년 동안 이 지역에서 발굴작업을 해왔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새겨진 22개의 동전과 안토니우스의 턱을 닮은 부서진 석고 가면, 10구의 미이라 등을 신전 근처에서 발굴했다고 공개했다.
발굴팀의 캐슬린 마르티네스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14년 동안 연구했으며, 그녀가 코브라에게 물린 후 신전에 묻혔을 것으로 생각해 신전을 찾아나섰다”고 말했다.
자히 하와스 고유물 최고위원회 위원장은 “무덤은 신전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싼 형태로 동시대의 미라 10구가 매장돼 있고 2구에는 금장식이 돼 있었다”면서 “이러한 무덤에 묻힐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무덤이 클레오파트라의 묘로 확인되면)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AFP통신 등은 이 발견에 대해 “초보자들의 행운”이라고 전했다. 당초 마르티네스 등이 클레오파트라 묘 위치에 대한 가설을 제기했을 때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낮다고 봤기 때문이다.
발굴팀은 레이더 탐색을 통해 지하 약 12m 지점에서 시신이 매장됐을 것으로 보이는 공간을 찾아냈으며, 21일부터 이 공간에 대한 발굴 작업에 착수한다. 하지만 고고학계 일부에서는 발굴팀의 자신감이 지나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발굴지점이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여름 별장과 인접해 있어 6월부터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점도 난관이다.
[경향신문] 2009년 04월 20일(월) <김향미기자 sokhm@kyunghyang.com>
고고학자들은 두 BC30년 경에 사망한 그들이 함게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착수하여 3년동안 발굴 하였다.
크레오파트라는 BC 69년에 출생 하였으니, 39세에 사망하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는 이집트 最古왕조의 최후의 여왕이었다.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와 로마 장군인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뒤 자살했다.
그리스 역사학자 플루타르크(46년~120년)는 시저가 두 사람을 함께 매장하도록 허락했다고 기록했지만 현재까지 두 사람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집트고유물 위원회 주석 자희 하와스(오른쪽)가 묘지 입구에서 중대 발표를 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頭像(흰색-얼굴이 아래쪽을 향해 있슴)과 안토니우스의 석고 가면(검정색)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들~
위원회는 타포시리스 마그나 신전 묘역에는 27개의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묘가 있으며 이곳에서 10개의 미이라가 발굴 되었는데 2구에는 금장식이 있었다. 이런 유물들로 보아 이 묘지는 고대귀족의 묘지였으며 황실의 묘지로 추정된다고 발표 하였다.
출처-Xinhuanet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묘지 찾는다>
[연합뉴스] 2009년 04월 15일(수)
(카이로=연합뉴스) 고웅석 특파원= 이집트와 도미니카의 고고학자들이 다음 주부터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묘지로 추정되는 3곳에 대한 공동 발굴 작업에 나선다.
이집트 고유물최고위원회는 15일 이 같은 계획을 발표하면서 발굴 작업은 향후 3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고유물최고위원회는 지난달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타포시리스 마그나 신전에 대한 전파탐지 조사를 통해 이들의 묘지로 유력한 3곳을 찾아냈다.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와 로마 장군인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뒤 자살했다. 이들이 묻힌 곳은 2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흑인?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사진)가 아프리카계 혈통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고 영국 BBC가 지난 15일 보도했다. 클레오파트라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여자 형제인 아르시노에 공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 그 안에 있던 유해를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스계 혈통일 것으로 판단해왔다.
이번 연구를 이끈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의 힐케 투어 박사는 "(유해에 대한) 법의학적 분석 및 안면 복원술 적용 결과 아르시노에가 아프리카계 혈통을 지닌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결과가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 간 관계를 포함해 클레오파트라 가족에 관한 새로운 연구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터키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시노에의 무덤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적 탐험을 담은 BBC의 이번 다큐멘터리는 '클레오파트라 : 킬러의 초상화(Cleopatra:Portrait of a Killer)'라는 제목으로 오는 23일 방영될 예정이다.
英 BBC 보도
출처 : 연합뉴스 기사입력 2009-03-16
2천년전 클레오파트라가 살해한, 여동생(Arsinoe) 얼굴 ‘복원’
2천여년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의해 살해된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 아르시노에. 14일 더 타임스 등 해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 소속 과학자들은 아르시노에의 유골을 발견했으며 법의학적 복원 과정을 통해 그녀의 외모가 아프리카인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1년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르시노의 두개골은 유럽 백인은 특징은 물론 아프리카인의 특징도 보인다고 과학자들은 설명한다. 이로써 클레오파트라 또한 혼종일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그간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스 백인인지 또는 북부 아프리카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아르시노에로 추정되는 유골은 터키 에베소의 한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이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한편 관련 다큐멘터리는 현지 일자 23일 BBC를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기사입력 2009-03-16)
英 연구팀, 클레오파트라 재현… 입체 컴퓨터 작업
"혼혈에 서구 미인형과 달라"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이 2,000년 만에 과학의 힘으로 부활했다고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16일 보도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샐리 앤 애쉬턴 교수팀이 1년 여간 각종 조각과 사료를 토대로 3차원 입체 컴퓨터 작업을 한 끝에 최근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을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현된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은 현 시대의 서구적 미인형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애쉬턴 교수는 "클레오파트라는 완전한 유럽 인종이 아니라 다양한 피가 섞인 혼혈이었을 것"이라며 "그의 조상이 이집트에서 300년이나 살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집트 왕족은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추정되지만 이집트에서 살면서 피가 섞였을 것이란 설명이다.
기존 유물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이 다양하게 묘사돼 있다.
지난해 영국 뉴캐슬대 세프턴 박물관이 공개한 은동전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좁은 이마와 볼록한 뺨, 얇은 입술과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으며 2001년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클레오파트라 동상은 키 1.5m의 단신으로 얼굴이 평범하고 몸은 뚱뚱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17세에 왕위에 오른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연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악티움해전에서 패하고 사망하자 독사를 가슴에 풀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 한국일보 2008. 12.17 박관규기자 qoo77@hk.co.kr
2007년 2월14일 영국 뉴캐슬대가 공개한 클레오파트라(오른쪽)와 그의 연인 안토니우스가 새겨진 동전.
기원전 32년에 제작된 이 동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좁은 이마에 뾰족한 턱과 코, 얇은 입술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 역사를 바꿀 만한 절세미인이었다는 일반의 평가와는 거리가 있다. 안토니우스 역시 튀어나온 눈에 비뚤어진 코, 굵은 목의 소유자로 드러났다. 뉴캐슬대 연구진은 “남자를 유혹하는 요부로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동아일보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미남미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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