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Cleopatra BC 69∼BC 30)
클레오파트라 7세(BC 51∼BC 30).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마지막 여왕이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왕가, 이어 시리아 설레우코스왕가에서 발견되고, 프톨레마이오스왕가에서도 여왕이름으로 종종 쓰였으나 클레오파트라 7세가 가장 유명하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둘째딸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여성으로 높은 교양을 지녔고, 이집트어는 물론 여러 나라 말을 잘 구사하여 외교사절과도 통역 없이 대화하였다고 한다.
17세에 프톨레마이오스집안 관례에 따라 9세된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곧 두 사람은 대립하여 궁정 안에서 두 파로 갈라져 싸웠으며 한때 클레오파트라쪽이 열세하여 시리아로 물러갔다.
BC 48년 M.G.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에 들어온 J. 카이사르를 만나 지지를 받아냈다. 그 결과 일어난 알렉산드리아전쟁에서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패배시켜 죽게 하였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5살난 막내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이집트 공동통치자로 지정하였으나, 그녀는 사실상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카이사르의 로마개선 뒤 클레오파트라는 어린 왕을 데리고 로마를 공식방문하여 카이사르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BC 44년 3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급히 이집트로 돌아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고, 카이사리온을 공동통치자로 내세웠다.
BC 42년 G.J.C.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하여 카이사르를 암살한 무리를 격멸한 M. 안토니우스는 이듬해 소아시아 타르소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회견하였는데, 그 미모와 재기에 사로잡혀 알렉산드리아로 함께 가 연인 사이가 되었다.
BC 40년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정략결혼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끝난 듯 보였으나, BC 37년 파르티아원정을 위해 동방에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애정을 되찾는 동시에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들 사이에는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
BC 36년 파르티아원정은 참패로 끝났으나 클레오파트라는 페니키아까지 사랑을 구하여 달려갔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하자 관례를 벗어나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여신으로 분장하여 주변 여러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동방 헬레니즘세계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이 소식은 곧 로마에 전해지고, BC 35∼BC 34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활발한 선전과 비난의 문서 싸움이 시작되어 정치문제로부터 여성관계 추문을 폭로하기에까지 이르렀다.
BC 33년 안토니우스는 에페소스에 동방로마군단과 속국 군대를 집결시켰고, 클레오파트라도 군함과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BC 32년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옥타비아에게 이혼장을 보냈고, 옥타비아누스는 내란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만 선전포고하였다.
BC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서로 천하를 두고 겨루었으나 싸움중 클레오파트라가 함대를 이끌고 달아나고 안토니우스도 이를 뒤쫓아 싸움은 가볍게 끝났다.
BC 3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가 자살, 클레오파트라도 로마개선식에 끌려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 로마의 대표적 장군 두 사람을 매혹시킨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으로부터 <나일의 마녀>라는 악담을 들었으나 최후의 깨끗한 죽음은 높이 평가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로 알려진 B. 파스칼의 경구(警句), W.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및 그 영화화 등 헬레니즘 최후의 여왕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출처 : 야후백과사전
영화 CLEOPATRA(1963)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차드 버튼 주연
줄거리
위대한 이집트가 시저(Julius Caesar: 렉스 해리슨 분)의 손에 들어가고 그곳의 여왕 클레오파트(Cleopatra: 엘리자베스 테일러 분)라는 시저와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호탕한 성격에 치밀한 두뇌를 지닌 시저는 이집트를 통치하며 문제없이 잘 이끌어 가던 중, 그를 시기하던 지하 세력에 의해 조종된 자신의 아들 부르터스(Brutus: 케네스 헤이 분)의 칼에 맞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이런 혼란을 틈타 지하세력은 이집트를 삼키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재치와 용기로 다시 이집트는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신임과 사랑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적국의 공격과 계속되는 간신들의 모반 속에 안토니우스 역시 혼란에 빠지고 클레오파트라는 자결을 결심한다.
명화와 함께보는
이집트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Alexandre Cabanel
Cleopatra Testing Posions on Condemned Prisoners 1897
역사는 어느 의미에선 ‘승자의 기록’일 뿐입니다. 이긴 자들이 살아남아 패배한 자들의 역사를 지워버리거나 뒤틀어버리곤 한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존속해오는 동안 이런 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라지거나 왜곡된 진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요?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비록 패배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조국이 숭상하던 태양처럼 너무나도 강렬한 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패배했기에… 승자쪽의 역사가 끊임없이 자신을 왜곡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죠. 이 때문에 이 주인공을 둘러싼 진실과 오해는 지난 2천년 동안 빛과 어둠처럼, 해와 달처럼 극적으로 갈라져왔습니다.
“야심에 찬 탐욕스러운 여왕은 자신의 혈육을 남김없이 잔인하게 살해한 뒤 그 분노를 외국인에게 돌렸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품에 안긴 채 가장 훌륭한 이들을 모략하고 죽이도록 해서 그들의 유품을 횡령했다.” - AD.1세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모두가 확신하는 그의 연인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뿐이다. 당시 로마 여인들의 난잡한 생활과 비교해본다면 그 둘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게다가 그 관계는 정식으로 인정된 것이었다.” - BC. 1세기, 수에토니우스
“아름답지만 탐욕스럽고 뻔뻔한 여왕에게 이집트 왕조의 모든 악덕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울 바가 없다. 해로운 나뭇가지 끝에 독을 품은 꽃이 피듯 그는 라지드 왕가의 마지막 영예이자 오점인 것이다.” -1904년. 부세 르클레르
“역사상 가장 광활하고 비옥한 땅을 호령해온 우리 로마인이 한낱 이집트 여인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한다면 조상을 뵐 낯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여인의 수중에서 농락당한다면 어찌 우리의 위대한 영웅들이 원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원전 31년 클레오파트라와 적대하던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외쳤다고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왜 로마는 이 여성을 이토록 증오에 가득 차서 왜곡하고 비방했을까요? 왜 로마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세력 가운데 실질적인 주력군인 안토니우스 대신 클레오파트라를 겨냥해서 선전포고하는 방법을 선택했을까요?
MICHELANGELO Buonarroti
Cleopatra 1533-34
기원전 50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삶과 야망, 그리고 사랑.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과 두번씩이나 결혼했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격렬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를 하죠. 그리고 로마 최고 권력자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클레오파트라는 39세의 나이에 죽으면서 희대의 요부이자 뛰어난 외교전략가로 숱한 수수께끼를 남겼습니다. 마케도이아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여왕이라도 당대 최고의 권력자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수 있었던 것일까요?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14세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습니다. 막다른 길에 처한 그녀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의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우게 되죠. 클레오파트라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 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Jean-Leon Gerome
Cleopatra before Caesar 1866
위 그림에서 보면 그녀는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녀는 스스로 양탄자위에 알몸으로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게 했죠.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카이사르에게 줄 값진 선물이라고 둘러댑니다. 카이사르는 값비싼 양탄자를 풀어 보게 했고 그 속에서 알몸의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게 된거죠.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그녀의 연인이 되었음은 말할것도 없고, 그녀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를 이어 자신을 보살펴줄 사람들 찾습니다.
Alma Tadema
Antony and Cleopatra 1883
그는 바로 로마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였습니다. 삼두정치인 중 한명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지역 사령관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녀는 또 다시 그를 유혹할 묘안을 짜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오늘날 터키의 한 지방 도시인 고대 타르수아에서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납니다. 황금빛 배에 여신처럼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가 앉아 있고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소리가 들립니다. 형용 할 수 없는 향기는 바람을 타고 안토니우스의 혼을 빼앗고 말죠.
위 그림을 보면 수수한 차림의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보고 정신이 나가있습니다.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 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하고 있네요.
FICHERELLI, Felice
The Death of Cleopatra 1650s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해요. 행여 그가 권태를 느낄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죠.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결혼을 해 그를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만들고자 하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남녀 쌍둥이를 낳고 3년 뒤 마침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의 인종적 차이를 무시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안토니우스에게 군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시리아와 페니키아 해안의 부유한 도시들, 살리시아 해안의 일부, 유대의 해안지역 등 과거 이집트 전성시대의 소유 영토 대부분을 할양받았죠. 그녀는 안토니우스 덕분에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진 여왕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을 성공시키고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중요한 의식을 거행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 그리고 카이사리온을 ‘왕 중의 왕’으로 선포하면서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출자’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조치는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스스로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공언하던 옥타비아누스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LAIRESSE, Gerard de
Cleopatra's Banquet c. 1675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로마인들이 가만있었겠어요? 로마시민의 피로 얻은 영토를 쾌락의 댓가로 지불했다는 사실과 순수 로마혈통인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민족 여성을 선택했다는 자존심 손상, 이에 덧붙여 전쟁이 로마내에서 벌어질 경우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로마시민들의 현실적 계산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지지를, 안토니우스에게 비난을 안겨줍니다.
특히 카이사르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이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죠. 바로 악티움 해전입니다.
강력한 부권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신흥세력 로마냐? 아니면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모권과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전통세력 이집트냐?
John William Waterhouse
Cleopatra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승자가 되고 패전 사령관이 된 안토니우스는 자결을 합니다.
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자결을 합니다.
그녀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것으로 추정합니다.
클레오파트라가 팜므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어 왕권을 차지했으며 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에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버렸나봐요. 죽음에 대한 공포에다가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니 작품소재 선택으로 그만이었던거죠.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며 강한 의문을 던졌다고 한다.
DELACROIX, Eugene
Cleopatra and the Peasant 1838
위 그림에서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그녀의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Jena Andre Rixens
The Death of Cleopatra 1874
RENI, Guido
Cleopatra with the Asp c. 1630
RENI, Guido
Cleopatra 1635-40
SOLARI, Andrea
Cleopatra
GENNARI, Cesare
Cleopatra c. 1663
CAGNACCI, Guido
The Death of Cleopatra c. 1660
CAGNACCI, Guido
The Death of Cleopatra 1658
BRAY, Jan de
The de Bray Family (The Banquet of Antony and Cleopatra) 1669
CLAUDE LORRAIN
The Disembarkation of Cleopatra at Tarsus 1642-43
LISS, Johann
The Death of Cleopatra 1622-24
TIEPOLO, Giovanni Battista
The Banquet of Cleopatra 1743-44
Tiepolo, The Meeting of Anthony and Cleopatra, detail, 1746-47, fresco, Palazzo Labia, Venice
위의 그림은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앨마 테디마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다.
출처 : 봉주르! Bella Lula! 그림박물관 http://blog.naver.com/helmut_lang?Redirect=Log&logNo=150039199670
M. Bianchi - 클레오파트라
J. Jordaems - 진주를 녹이는 클레오파트라
G. Hoet - 진주를 녹이는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on the terraces of Philae
H. Markart - 클레오파트라의 나일강에서의 사냥
Hans Makert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안젤리카 카우프만 - 안토니우스묘의 클레오파트라
출처 : http://jsm0123.egloos.com/8641393
클레오파트라의 진실
기원전 41년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타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했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피살된 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 권력자였다.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를 도와준 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 명색은 로마의 동맹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호출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몇 번의 독촉을 받은 끝에야 타르수수로 향했다. 이는 나름대로의 계산때문이었다. 시저를 사로잡아 아들까지 둔 클레오파트라, 이번에는 안토니우스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철저한 준비를 갖추기 위해 늦장을 부린 것이다.
진주를 삼키다
클레오파트라가 탄 배가 타르수스를 향해 천천히 키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금장식으로 번쩍이는 화려무쌍한 배, 아름답게 펄럭이는 보랏빛 돛, 피리와 류트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선율, 그에 맞춰 노예들이 은으로 만든 노를 젓고, 사랑의 여신 비너스처럼 단장한 클레오파트라가 금빛 천막 안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스물 아홉살의 클레오파트라, 아름다움의 절정에 다다라 있었다. 옆에는 사랑의 신 큐피트로 분장한 미소년들이 색색의 타조 깃털로 부채질을 하고, 숲의 요정 님프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치 천상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이었다.
앨마 테디마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자기가 베푸는 선상의 파티에 와달라고 청했다. 그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배의 화려함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닥에는 온통 꽃이 깔려있었으며 금 접시와 보석 박힌 금 술잔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런 파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겠군요."
넋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말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정도는 제게 아주 적은 비용이랍니다. 정말 사치스런 파티를 원하신다면 1만 세스텔치아가 드는 파티를 열어드리지요."
1만 세스텔치아는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약 20만 파운드, 2억 4천만원 정도 한번의 파티에 어떻게 그런 큰 돈을 쓸 수 있겠느냐는 안토니우스의 말에 클레오파트라는 내기를 하자고 했고 안토니우스는 좋다고 하고는 부하 중 한 사람을 심판으로 정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진실
클레오파트라만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도 드물지만, 그만큼 왜곡된 역사적 평가를 받아온 인물도 드물 것이다.
<영웅전>을 쓴 로마의 전기작가 플루타르크가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우스를 파멸시킨 교활한 여인, '나일강의 세이렌'이라고 부른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남자의 일생을 망치는 요부, 혹은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콧대 높은 여자의 대명사로 근 2천 년 가까이 선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로마인의 입장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오만하고 도도한 요부임에 틀림없다. 로마의 영웅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조국 로마에게 창끝을 돌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니까. 때문에 로마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클레오파트라를 평가절하했고, 그와 견해가 다른 이집트측의 자료나 기록들을 없애버렸다.오늘날 우리가 알고 이쓴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정보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왜곡, 조작된 정보들이다.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오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두 언니외에도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가 더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전통적으로 남매간에 결혼을 한다. 그것이 왕가의 혈통을 보존하고 왕위를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이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마케도니아 청년 왕 알렉산더의 후예가 세운 왕조이다. 알렉산더가 대제국을 건설한 직후 사망하자 제국은 이집트 지역,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지역, 시리아 지역 셋으로 나뉘는데 그 중 이집트를 차지한 것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그러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지배층 문화는 이집트 고유문화가 아니라 그리스 문화요, 지배층의 언어도 그리스어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51년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에 즉위, 공동통치를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 여덟살, 동생은 열 살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 아닌 이집트어를 배워 사용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초의 왕이다. 그는 이집트 고유어를 익혔을 뿐 아니라 이집트 고유 문화와 신앙, 전통을 존중하고 자기를 이집트 고유의 신들과 결부시켰다.
백성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정략적 조치였지만 어쨌든 그리스 문화에 젖어 있던 왕가의 풍습에 반하는 파격이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였고, 궁전 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토론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기원전 100년경부터 로마는 알렉산더 사후 분할된 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로마의 합병 속에 이집트의 독립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클레오파트라와 그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사이에는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합병을 주장하던 시저에게 접근, 타고난 미모와 지성, 재능으로 능란한 외교를 벌인 끝에 이집트를 '동맹국'으로 선언하게 만들고, 나아가 불안한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저가 피살당하자, 이번에는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로마에 대항했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이집트의 영광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의 이름 '클레오파트라'는 바로 '민족의 영광'이란 뜻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역사적 복권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키프로스, 리비아, 시라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 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 중의 여왕'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하지만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가 난 시저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안토니우스에게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옥타비아누스의 눈에는 안토니우스는 그저 이집트 여왕 손에 놀아나는 하수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31년 그리스 동쪽 해안의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연합 함대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다. 결과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참패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클레오파트라 역시 로마에 끌려가 웃음거리가 되느니 자결을 택했다. 자기를 안토니우스 옆에 묻어달라는 편지를 남긴채, 기원전 30년의 일이다.
그가 자결방법으로 독사를 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플루타르크는 뱀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단지 뱀의 자취같은 것이 발견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무너지고 이집트는 로마에 합병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후한을 없앤다는 명목하에 모두 처형되었다.클레오파트라는 강대국 로마에 맞서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쓴 인물이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로지 미모를 무기로 남자를 유혹해서 욕망을 달성한 여인으로만 남겨놓았다. 로마가 자랑하는 두 영웅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클레오파트라가 몹시 꽤씸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를 요염한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야심만만하고 탁월한 '정치가'로서 재평가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출처 : http://jsm0123.egloos.com/8641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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