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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구한말

구한말 왕족 및 정치인들



순종황제 (융희)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907년 헤이거 밀사사건에 책임을지고 고종이 양위 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순명효황후(순종비)

적의를 입고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는 순명효황후(순종비)
※ 순종비라는 말은 일본이 우리를 낮춰부르려고 일부러 그런것입니다




김홍집

1880년 수신사가 되어 도일했다,
관복차림으로 옆탁자위에는 수신사인이란 인신 상자가 놓여있다,
김홍집은 1896년 아관파천때 친러파에 살해 되었다.  



1895년 명성 황후 (진위를 가려야할 추정사진)

고종의 황후, 성은민 본관은 여흥, 민치록의 딸1866년 왕비에 책봉 되었고,
일본세력 견제책을 견재하고자 친러책을 강구하다 1895년 일본 낭인배에 의해 살해 되었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대되었다



독일대사관에서의 파티

독일공사관은 남산밑 회현동 주변에 있었다,
주한독일 총영사 바이페르트 가 게양된 독일 국기를 바라보고있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자적용포 입은 임금모습은 전통적인 의관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이 촬영한 것이다.



한말 각국 공사 1903  

알렌공사가 정동 미국공사관에서 각국공사를 초청, 외교단 회의를 주재한후 기념촬영,
우로부터 청공관원, 잘데른공사(독), 뿔랑시 공사(불),알렌 공사(미), 허태신 공사(청), 조던 공사(영),
방카르트 공사(백), 두사람건너 라밴 공사(러), 센즈 궁내부고문 (미)등, 일본공사가 불참한 것이 이색적이다.

 

흥선 대원군

자는 시백, 호는 석파, 남연군 구의 아들.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배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개화승 이동인



신미양요 포로  

조선군 포로는 상투바람에 방탄용으로 힌 무명 솜옷을 입고 있다



신미 함대 1871년

신미양요 아시아 함대 선상의 장병 1871
미국 아시아 함대는 군함5척 총병력 1,230명 함재 대포 85문을 장비하고 조선원정(5월16일 ~ 7월3일)을 단행했다.



이 재각(왕족)

주일한국대사를 역임했고 1904년 12월20일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되자 이듬해 7월 초대총재가 되었다.
장헌세자의 현손, 완평군 승응의 아들



민용익(개화파)과 박용하(일본최초유학생)



개화파의 동지들1884년

학모를 쓰고 있는 학생은 당시 일본에 최초 유학생(박용하)이다.
조선보빙사 민영익 일행이 미국사행을 끝내고 귀국 갑신정변 직전에 촬영한 기념사진,
서광범이 세계일주 여행기념 앨범을 들고있다.



강화도 연무당 전경

일본인들이 숙소를 감시하고있다



강화도 남문

한일 수호조약 성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금지하고있다.
조약체결의 경위를알려고 성문밖에 모인군중



1876년 강화도 덕진 성안

성안의 일본인들을 보고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들이다.



강화도 갑곳리 수문과 성벽

강화성에는 두 개의수문이 있었다,
이수문은 1676년 축초되었는데, 1900년에 갑곳으로 옮겨졌다가.



홍영식과 외부관원 1884년

외부관원들이 묄렌도르프 저택에서 찍은사진이다,
이사진은 갑신정변 직전에 촬영되어 미국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있다.



미국 보빙사 일행



이강 의화군 1894년

고종의 5번째 왕자이며 왕족신분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상복으로 위장하여 만주 안동에서 일본경찰에 검거



홍선 대원군 아들 이재선

고종의 이복형이며 대원군의 서자였다,
김씨세도정치에 불만을 품고 대원군이 재집권을 도모할 때 거사가 성공하면 국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으나
이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가담자는 극형에 처형되고 이재선은 고종의 복형이라 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대신들의 주장으로 사약을 받았다. (이재선의 손자들)





명성황후(민비) 시해된곳 (옥호루)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낭인배(깡패)를 동원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하여 시해함.
일본낭인배들에의해 옥호루에서 시해된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이건물은 궁중의 나인들이 자주 사용하는곳이다,
오른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참고 : 민비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




명성황후 장례준비1897년

명성황후의 시신은 일본낭인배에 시해되어 불에탄 뼈조각과 숯덩어리 뿐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명성황후 장례식 1897년

상복차림에 인산을 들고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침통한 표정들이다,
궁중내시가 무엇인가 유심히 바라보고있다,

능을 준비했는데 봉우리가 약 40~50 피트나 되었다. (프랑스인 알렉빅그 촬영)
장례행렬에 동원된 초롱등은 5천개나 되었다.


명성황후 홍농도착 1897년

홍농에 도착한 대여가 홍살문 입구에서 잠시 대기 하고있다.
한나라의 국모를 잃은 백성들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그결과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고종황제 홍릉참배 1910

고종황제가 홍릉에 있는 명성황후의 능을 참배하고 언덕길을 내려오고있다,
주변에는 모두 일본의 경무관들이 호위하고 있다.




일본 총독부 관저 (남산)

서울남산 중턱에 자리잡았던 일본은 이시기에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을 강요 했다.



영국 대사관 (정동) 1900년

1884년 5월 고종황제가 외국인들이 사대문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한 직후 아스톤은 정동에 토지를 구입했다,
당시 멕시코 금화 1,200달러 영국파운드화로 환산하면 약 225파운드에 구입된 이토지는
오늘날 주한 영국 대사관이 서있는 바로그자리다.



미국 공사관 (정동) 1880년

덕수궁과 정동교회 사이에 있던 공사관건물이다.



프랑스 공사관1907년 (서대문)

세련된 본건물은 1903년에 프랑스식으로 세워진 현대식 건물이다 6.25때 소실되었다.



러시아 대사관 (정동)

정동 러시아 공사관 건물에는 기념행사로 인하여 만국기가 많이 보이고 정문앞에는 사람들이 웅집하고있다
당시 이주변에는 외교관들이 밀집되어 있어 비밀요원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되었다,
공사관건물은 6,25때 파괴되고 지금은 망루만 있다.




청국 사신  

당시 서울 중앙우체국 뒷편에 청국 대사관 건물이 있었다,
한국에온 청국 대신들은 다른나라 외교관보다 인원이 많았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전승으로 끝나자 청국세력은 점차 몰락 되었고
일본세력은 한반도를 완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 최고의 태극기

이태극기는 미국인 스미드소니언 국립박물관 쥬이가
1884년 서울에서 수집보관한것임.(53*36cm)



슬픔에 잠긴 광무황제(1899년)

이사진은 명성황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것이다.
병풍으로 주변을 막고 있는 뒤편에 백립을 쓴 상주가 숨어서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보인다.



고종황제 인산행렬 1919년

대여 뒤를 따라 거리에는 온통 인산행렬이 가득하다,
비운으로 국왕의 모습을 빼앗긴 조선은 일본을 항거할 힘도 없었다



광무황제 대여행렬 1919년

상두꾼이 대여를 메고 장지로 떠나고 있다
백립을쓴 시민들은 마지막 떠나는 임금님의 상여를 보기위해 웅집하고있다.




광무황제 조문하는 일본관리 1919년

고종황제는 69세로 건강했다. 왕의 죽음에 대하여 많은 의혹은 있었지만...

그러나 침묵의 세월을 깨고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 지고있다.
고종황제는 평소처럼 밤늦게 밤참을 드신후 두 궁녀와 함께 1919년 독살당했다.

일본 총독부는 고종의 사망사실을 하루지나 발표했다,
궁궐안에서는 이미 독약을 넣은 음식을 드시고 독살했다는 소문은 알려졌지만
일본인의 감시가 엄중하여 감히 사실을 외부로 발설할 수가 없었다,

고종의시신에는 독약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붉은반점과 용포소매자락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그날 상궁2명이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음식에탄 독약이 얼마나 독성이 강했는지 짐작간다,

일본관리들은 궁중전의 (외국인) 접근조차막고 시신을 아무도 볼 수 없도록했다,
일본은 독살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밤늦게 왕족과 대신들을 불러 서명을 강요까지 했었다.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1919

장지로 떠나기전 일본관리들이 촬영한 것이다,
고종황제의 붕어로 상복입은 모습은 왕족만이 슬픔은 아니였다.

영친왕의 정식 칭호는 영왕입니다.
일제시대에 조선왕실을 격하시키려고 친 이란 단어를 넣어서 영친왕으로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의왕을 의친왕으로 개칭 격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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