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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해방이후시대

여순 반란사건과 태백산맥

여순반란 사건과 14연대의 봉기… 그리고 ‘태백산맥’

역사 바로바라보기 2006/08/19 18:23  체로키나인


동족의 가슴팍에 총부리를 들이댈 수 없다며 일어섰던 14연대의 봉기

여순 반란을 진압했던 국군 지도부는 상당수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출신이었다.

여순반란 진압에 투입된 정부군


속칭 '여순 반란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식으로 '10.19 사건'으로 개칭되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 '4.3항쟁'과 더불어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최대의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이 사건은 여수/순천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기억하기 꺼려하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특히 여수 주민들은 여순 사건의 전개과정을 묻는 질문에 '당한것만도 지긋지긋한데 대답은 무슨 대답이냐' 며 질문을 회피하고 만다.

이 사건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인명피해뿐만아니라 사건 자체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충분한 평가작업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10.19 사건'이나 '4.3항쟁'이 민족분단으로 치닫고 있던 역사적 과정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민족의 비극이었다면 오늘의 조국분단의 상황은 그러한 비극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정치상황에서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아름다운 도시 여수
1948년 여순사건으로 ‘반란의 도시’가 됐다.

우리나라 남단에 자리한 이름난 항구 도시 여수. 동백꽃 붉은 오동도, 일출이 그만이라는 향일암이며 여수 앞바다에 동동 떠 있는 다도해의 섬들은 여수가 제 얼굴처럼 내미는 자랑거리다. 얼마나 물빛이 곱고 아름다우면 여수(麗水)라 불렀겠는가.

하지만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깃든다고 했다. 여수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현대사에서 여수는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기 보다 차라리 ‘반란의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1948년 10월 19일 14연대가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여순사건 때문이다.

이제부터 ‘반란의 도시’ – ‘여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14연대 터엔 화약공장이 들어서 있고

첫 기행지는 여순사건의 진앙지인 여수 신월동 14연대 터. 여순사건 당시에는 신월리라 불린 이곳은 여수에서는 동정과 서정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앞에는 비단결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푸른 산이 어머니처럼 둘러쳐져 있던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났으며 주위의 땅이 옥토인지라 주민들은 ‘반농반어’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군사지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1942년 8월. 앞바다가 ㄷ자형인 천혜의 요새인 것을 일본 해군이 확인하고 비행장을 만들면서부터다. 공정이 90% 정도 완성될 무렵 해방돼 공사가 중단됐고 격납고, 무기창고, 비행기 이륙장이 남아 있던 채로 1948년 5월 4일 14연대가 창립되면서 부대 터가 됐다. 현재는 한국화약 제2공장이 들어서 있다.

동족의 가슴팍에 총부리를 들이댈 수 없다며 일어섰던 14연대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폭탄을 만드는 화약공장이 들어선 걸 보면서 왠지 모를 씁쓸함에 빠진다. 터를 둘러친 철책이며 언덕마다 서 있는 초소들은 그런 씁쓸함을 더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단선·단정 수립에 반대해 일어선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 준비중이던 14연대 병사들이 출병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군경비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10월 19일 아침 7시 우체국 일반전보로 ‘병력수송선 LST는 19일 20시 출동하라. 제주 경비사령관 김상겸 대령에게 통보필’이라는 내용이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전달되자 병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최후의 결단을 요구받았다.

마침내 20시 출정준비를 하고 있던 부대원들에게 인사담당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와 7명의 하사관들이 제주 출병 거부를 주장했고 병사들이 이에 동조해 병기고와 탄약고를 접수하면서 사건의 방아쇠는 당겨졌다.

3000명이 못 되는 전체 병사들 중 2500명 가량이 참여한 이 무장봉기는 20일 오전 10시 여수 장악, 12시 순천 장악 등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불과 2∼3일만에 동으로는 광양· 하동, 북으로는 곡성·남원, 서로는 벌교·보성·화순까지 펴져 나가 전남의 절반 이상에 파급을 미쳤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사건이 삽시간에 들불 번지듯 퍼져나간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에 대한 원성이 큰 몫을 차지했다.

여수 일원에서는 1948년 7월 하순부터 8월 상순까지 2기분 배급이 지급되지 않은 데다가 7월에 발생한 수해로 각 지방에 이재민들이 무더기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14연대의 봉기는 이런 불만을 점화시킨 것이었다.



초등학교 교정 피로 물들인 학살

서울로 치면 종로나 명동쯤 되는 중앙동로타리는 오래 전부터 여수의 도심을 형성해왔다. 지역의 여론을 움직이는 곳이기도 한 이곳에서 1948년 10월 20일 4만에 이르는 여수 시민이 모여 인민대회를 열었다.

이날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에서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한 제주도 출동에 반대하며 조선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궐기하며 주한미군 철수와 조국통일, 조선인민공화국 지지’등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해 무장봉기의 의미를 알렸다.

불타는 여수 시가지

여수수산시장과 선착장이 근방에 있어 흥성거리는 이곳은 1948 년 10월 26일 국군의 육해공군 진압작전에 초토화가 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여수에 있는 집이란 집에는 모두 구멍이 뚫렸다고 할 만큼 포격과 사격은 엄청났다. 국회에 보고된 피해현황을 보면 읍의 6할이 파괴되고 시내 중심가의 주택 1700여 호, 그 외 2600여 호 전소, 이재민 2만 수천 명이 발생했다. 가히 전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동 로타리에서 언덕 하나 넘으면 있는 여수경찰서와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는 당시 학살의 중심 무대였다. 진압을 끝낸 국군은 학교에 시민들을 불러모았다. 집에서 나오지 않는 자는 사건에 참여한 자로 간주, 처벌하겠다는 국군의 강압적 태도에 모두 학교로 몰려들었다.

전남 여수 1948. 10월, 여수 탈환 이후
주민들이 진압군의 감시하에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으로 이송되고 있다.
이들중에서 반란군에 협조한 혐의가
있는, 이른바 부역자들을 골라내 징계했다.
뒤쪽으로 남산동 산 벌판이 보인다.


이런 현상은 여순사건이 일어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일어났다. 여수에서는 진남관, 종산국민학교, 여수서국민학교 등이 주무대였다.

가장 많은 학살자를 낳은 종산국민학교에서는 연일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1948년 10월 말에서 12월 초순까지 여수권역 전체에서 색출된 14연대 군인들과 부역자들을 교실에 10여명씩 그룹을 지어 포승줄로 묶어 수용했다.

수용 후 약 2개월 간의 부역자 심사에서 진압군 책임자였던 제5연대장 김종원은 재판도 없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교정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는 등 초법적인 학살을 일삼았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손가락총’이었다. 우익단체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람은 어김없이 끌려가 총살되거나 암매장되거나 죽창에 찔려 죽어나갔다. 그들 중에는 사사로운 원한을 앙갚음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경찰은 반란군에 쫒겨 후퇴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전남광양 1948. 10월


김종원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당시 국군 지도부는 상당수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출신이었다. 그들은 일제가 독립군을 토벌하면서 썼던 삼광작전(三光作戰)을 그대로 적용했다. 삼광은 살광(殺光), 소광(燒光), 등인데 모조리 죽이고 깡그리 불태우고 남김 없이 빼앗아 죽이라는 뜻이다. 이 때 쓰는 ‘광’에는 ‘모조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진압군들에 의하여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으로 붇찹혀 온 여수시민 청장년들이

자기 집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잡혀있다. 반란 동조 혐의자로

판명되면, 이곳 학교 뒤 교정에서 즉결처형(참수&총살) 되었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들로서, 이들 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이들의 소행은 계엄령 하에 이뤄진 무소불위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 당시의 진압이 초법적으로 이뤄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교정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하필이면 왜 아이들이 배우고 자라는 곳에서 그런 일을 했는지. 우리는 도대체 아이들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쳐야하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죽어 형제가 되어야 했던 여수 사람들의 무덤

종산국민학교에서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된 만성굴 뒤 형제 무덤에서 그런 질문은 더 깊이 가슴에 닻을 내렸다. 우리는 훗날 빨치산 대장이 되는 김지회가 14연대 600명의 주력을 이끌고 20일 아침 순천으로 떠났던 여수역을 거쳐 만성리에 있는 만성굴로 향했다.

집단학살지 만성굴 


일제 때 팠다는 컴컴한 터널. 터널을 통과하며 우리 역사가 그러했던가 싶어 가슴은 더 먹먹하고 서늘했다. 터널 안은 차가 쌍방향으로 교행할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하지만 차는 쌍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차 한 대가 마주 오면 터널 중간 중간에 옆으로 파놓은 피랍지대로 비켜야 했다. 좌와 우, 서로를 향해 마주 달리기만 한 우리. 왜 이렇게 비켜주지 못하고 정면충돌을 해야만 했을까?


좌 우익의 대립(1947. 8. 15) 독립기념일 행사마저 양쪽으로 갈라져 행진하고있다.

첨예화된 좌우익의 대립은 국경일 기념식행사 조차도 따로 개최하게 되었다. 1947년

8월 15일 남대문 부근을 시위대가 양쪽으로 갈라져 행진하고 있다. (1947. 8. 15)



안타까움은 만성굴 뒤 바로 왼편 언덕에 자리한 ‘형제의 묘’에서 더 커졌다. 형제의 묘에는 여러 개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쇠로 만든 팻말로 ‘이곳은 형제의 무덤이니 무덤을 쓰지 말라’고 적어 놓았다. 무덤은 다른 무덤의 서너 배쯤 컸고 둘레엔 돌로 영역 표시가 돼 있었다.

만성리 형제의 묘


당시 현장을 지키고 있던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 최명균 씨의 증언에 따르면 1949년 1월 종산국민학교에서 색출된 125명은 헌병들에 의해 총살된 후 화장됐다고 한다. 시신은 3일  간이나 불탔고 냄새가 지독해 인근 사람들이 다니기도 힘들었다.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거둬 묻어주려고 했지만 군인들은 그것도 못하게 위에서 집채만한 돌을 굴려댔다. 유족들은 서로 뒤엉켜 알 수 없는 유골을 추려 한데 묻고 형제의 묘라 불렀다.

묘자리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따뜻한 양지녁에 쓴 것을 그나마 위안거리로 삼아야 하는가. 무덤 옆에 앉아 바다 쪽을 보니 순천으로 가는 철길이 보인다. 과연 여순사건 뒤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열차였을까. 대답해주는 이는 없고 철길 아래 파도만 부서지고 있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내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
전남광양 1948. 10월


이 외에도 학살은 곳곳에서 이뤄졌다. 호명동과 봉개동이 그 대표적인 장소. 우리는 그 중 100여 명이 트럭에 실려와서 야산에서 학살당했다는 호명동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죽었지만 발견된 유골은 겨우 5구. 그 중 한 구의 두개골에선 총구멍이 발견됐다. 여기서 발굴된 유골과 봉개동 장개골과 큰골에서 발견된 유골을 모아 1999년 10월 18일 진혼제를 지내고 여수시립공원 묘원에 안치했다.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경찰과 의용단원들의 시신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학살은 좌우익이 모두 했는데 14 연대 등 좌익이 학살한 것이 500명 가량, 진압군과 경찰이 한 것이 9500명으로 당시 전남동부지역 총인구의 20분의 1이 학살로 죽은 셈이다. 여순사건으로 인심 좋은 순천은 역천(逆天)이 되었고 산고수려하다던 여수는 악수(惡水)로 변했다는 말이 떠돈다.



박종화의 〈남행록〉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날이 저물 무렵 우리는 벌교로 향했다.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소설이 현실의 한 반영이라고 할 때 여순사건으로부터 6·25 전쟁까지의 우리 현대사를 《태백산맥》처럼 잘 그려낸 작품은 거의 없다.

하지만 200자 원고지로 1만 6500장을 쓰면서 작가 조정래 씨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쓰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여순사건은 이미 무수한 작가들에 의해 ‘반란’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동아일보에 〈남행록〉이라는 기행문을 쓴 월탄 박종화 씨의 글이다.

여순반란 당시의 벌교 읍내

〈남행록〉에 나타난 여순사건의 기록은 상당수 허구다. 그의 글은 이승만 정부의 시선에 맞게 만들어졌고 이후 여순사건의 이미지를 고정화하는데 한몫을 담당했다. 하지만 《태백산맥》의 등장은 일방적으로 덧칠된 이미지를 교정해줬다.

벌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벌교읍사무소에서 설명과 더불어 한 장의 지도를 받아들고 《태백산맥》의 주무대인 소화다리를 찾았다. 일제 강점기인 서기 1931년 소화 6년에 건립된 이 다리의 본 이름은 제1부용교. 하지만 친일의 상징이라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벌교 홍교다리

다리 앞 안내판에는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로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6·25 대격랑까지 우리 민족이 겪은 비극과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해방 직후 좌우익 대립의 와중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에서 숱한 인명이 희생되었던 장소”라고 기록돼 있었다.

현재는 노후되어 사람들만 다니고 옆에 새로 다리를 놓았다. 하지만 다리는 관리가 되지 않아 한쪽이 부서져 있다. 소화다리에서 좌우익이 번갈아 학살을 자행했다.

원래는 난간이 있었으나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한다고 철난간을 떼어간 뒤 난간 없는 다리가 됐다. 이 때문에 여순사건 때 학살의 현장이 된 것이다. 다리에 세워놓고 학살을 하면 시신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에 시신처리 문제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람만 다닌다는 다리를 걸어보면 사람이 되지 못한 짐승같았던 그 시절을 떠올려 본다. 왜 우리는 이념의 칼날을 세워 서로를 다치게 해야만했던가.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길은 말이 없다.


끝나지 않은 이념 갈등으로 조성 못된 태백산맥 테마공원

현부자네와 소화집은 소화다리에서 차로 2∼3분 거리의 버스터미널 뒤편에 있다. 현부자네제각은 일제 당시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조선인 소작농을 동원해 20리 벌교 포구를 따라 제방을 쌓아 조성한 중도들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놓았다.

제각은 한옥을 기본틀로 삼되 구석구석 일본식을 가미한 건축물이었다. 마루는 조선식에 천장 일본식이었고 기와 지붕 처마에는 벚꽃 무늬를 단청으로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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