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은 어머니였다
강추위가 이어지던 지난 12월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이 곳 파주에서 약속장소인 압구정까지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날 뉴스에서 내일 날씨가 아주 추우니 단단히 각오하라고 경고한 대로 창 밖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인터넷에 들어가 오늘 날씨를 확인해본 순간 '으~' 하는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서울지역 현재 온도 영하 10도? 이런 날 왕릉답사를 가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궁궐 지킴이들과 유적지 답사 전문가들의 융건릉(경기 화성 소재) 답사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랴. 약속은 이미 한 것이고 전날 다시 확인할 때도 가겠노라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이런 살인적인 추위를 뚫고 왕릉 언덕을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중무장을 단단히 해야겠다 싶었다. 장롱 속에 처박아뒀던, 2년 전 친구가 장난삼아 사준 '빨간 내복'이 생각났다. 추운데 빨간색이 문제냐, 더 이상 생각 않고 내복바지를 입었다. 털 달린 바지, 두꺼운 솜조끼 위에 점퍼까지 껴입고 보니 뒤뚱거리는 오리가 따로 없었다.
영하 10도 강추위가 무섭긴 무서웠다. 버스는 당초 예상 인원 40명에서 대폭 줄어든 12명의 참가자들을 싣고 융건릉(隆建陵)을 향해 출발했다.
즉위한 왕의 첫 교지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52년간 왕위에 있던 영조가 1776년 3월 5일 죽자 소렴과 대렴이 끝난 5일 후인 3월 10일 조선 22대 왕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25세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조가 내린 첫 교지는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28세로 숨을 거둔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 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으로 일으킨 임인사화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으며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극도로 싫어했다.
영조 25년(1749)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한다.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려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여기에 어머니 영빈 이씨와 한 배에 태어난 화평옹주, 화완옹주까지 합세했다.
사도세자를 둘러싼 처가와 외척들은 거의 전부가 정치적으로 그의 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비롯하여 영조의 장인 김한구,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총애하던 후궁 숙의 문씨, 화순옹주의 시아버지 김흥경, 화협옹주의 시아버지 신만, 화평옹주의 시아버지 박사정 등이 모두 노론이었다. 화완옹주를 비롯하여 화령옹주, 화길옹주도 모두 노론 집안으로 시집갔다.
이들 노론세력이 공모해서 세자의 비행을 자주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 꾸짖었고 마침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홍계희, 윤급 등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아래는 5월 22일 실록의 일부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영조실록 5월22일)
그 날부터 세자는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고 영조를 뵙기를 청하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는 이미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했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는데 20여 일이 지난 윤5월 13일 유언비어가 '안'에서 일어나 영조가 놀라고 세자를 자결하라 명한다.
'안'이라는 것은 궁궐 내란 의미고 유언비어는 바로 어머니 영빈 이씨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생모 영빈 이씨였다. 이 '유언비어' 사건이 없었더라면 사도세자는 폐세자 됐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칼을 들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영조실록 권100 윤5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사관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했고 그날 일을 꺼려해서 감히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생모인 영빈 이씨가 개입해서 이렇게 극적으로 진행되었다.
고독한 세자의 비참한 죽음
나경언이 비행 10종목을 적어 올린 날로부터 시작된 사도세자의 비극은 한 달 만인 윤5월 21일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해서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 했다 하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단지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는 전교를 내렸을 뿐이다.
이를 뒤주에 가둬 9일 간 내버려두다가 아들이 죽은 날 후회했다는 말로 누가 납득하겠는가? 단지 의례적인 말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본 아들을 죽인 영조는 후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뒤주에 갇히던 다음날 세자의 장인 좌의정 홍봉한은 "한림(翰林) 윤숙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죄를 주기"를 청했고 영의정 신만, 신회, 김성응 등도 모두 죄주기를 청해 영조의 화를 부추겼다.
이에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켰던 임덕제는 강진으로 유배됐다.
임덕제는 나가지 않고 버티다가 영조의 명으로 시인들에게 끌려 나가게 되자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이었다. 영조 50년 6월, 임덕제가 함평에서 현감으로 죽자 그를 슬퍼하며 좌승지로 증직시켰다.
그날 사관은 말한다. 임덕제는 강직하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던 해) 수립(樹立. 세손을 업고 나온 일)에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사도세자가 죽은 지 12년이 지나고 노론이 조정을 채우고 있었으나 당시 언론인 사관의 붓은 날카로웠다.
화안옹주와 화평옹주만의 어머니였던 영빈 이씨는 친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딸과 가세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동안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아내와 어머니, 아버지 형제에게 모두 버림받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목격했던 11세 어린 정조는 마음 깊이 한을 새기고 기억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의 총애를 입은 화안옹주는 양자 정후겸을 앞세워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손잡고 권력을 휘두르며 정조를 압박한다.
뒤주에서 죽은 세자는 7월 23일 경기 양주 중량포 배봉산(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그날 묘에 가서 곡을 하고 수은묘(垂恩墓)라는 묘호를 내렸으나 죽은 아들은 되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지울 수 없었다.
수은묘는 정조가 등극한 후 현재 화성의 명당 융릉으로 천장해 현융원으로 바뀐다.
두 여자, 왕릉에서 달리다
왕릉 답사를 다닐 때는 혼자 아니면 보통 한두 명 정도 동행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단체로 갔다. 혼자 다니든 단체로 다니든 장단점이 있다. 이번에는 단점이 눈에 띄었다. 미처 단체 일정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융건릉에 오면 사도세자의 융릉을 주로 보고 정조의 건릉은 생략하기 일쑤라 한다.
왕릉 답사가 주목적이 아니라면 석물 등이 더 훌륭한 융릉만을 선택하고 그보다 떨어지는 정조의 건릉은 시간도 많이 걸리기에 생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왕릉답사가 목적이 아닌가. 여기까지 와서 정조를 보지 못하다니? 갑자기 조급해져서 융릉 답사 중 빠져 나와 진정임씨와 건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5만 평 넓은 융건릉은 눈이 오면 융건백설이 화성8경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경치를 감상할 운은 없었다. 건릉으로 가는 길에는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다. 건릉까지는 꽤 멀고 게다가 평탄한 길도 아닌 언덕길이 펼쳐진다.
숨을 몰아쉬며 헐레벌떡 올라간 건릉을 답사하고 사진을 찍고 내려오자마자 일행이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또 뛰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관람객이 많지 않기에 망정이지 지엄한 왕릉에서 미친 듯 달리기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허파가 끊어지고 숨이 목 끝에 차오를 때까지 언덕길을 내달렸다. 학교 다닐 때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를 한 후 이렇게 장거리를 죽어라 뛰어보긴 처음이었다. 등 뒤에서는 배낭이 덜컹거리며 등을 때리고 잔뜩 껴입은 옷이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숨차게 뛰어 버스에 오르자 기다리던 사람들의 떨떠름한 표정이 들어왔다. 단체행동에서는 이탈해 늦는다는 일은 모든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니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연신하며 자리에 앉으니 땀이 솟는다. 강추위도 달리기는 이기지 못해 흐르는 땀을 씻으며 헐떡거리는 숨도 돌리지 못한 채 점퍼와 조끼를 차례차례 벗어 버렸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천장한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며 세종의 영릉 다음 명당으로 손꼽힌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날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첫 교지로 천명했으니 오랜 세월을 가슴에 묻어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이제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포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1752~1800)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서인들을 성급하게 죄를 주는 치졸한 복수는 하지 않는다. 갓 즉위한 왕에게 노론의 세력을 누를 힘이 없었고 현명한 정조는 서서히 자신의 사람을 기르기 시작했다.
홍국영을 이용해 세도정치를 묵인하며 노론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린 후 규장각에서 인재 양성과 정치적 구도를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다.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난 1789년 7월 11일,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가 올라오자 천장을 하기로 즉각 결정한다.
왕심을 알고 있던 박명원이 "영우원(수은묘)이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 운운하며 상소라는 형식으로 천장의 구실을 만들어줬고, 정조는 내심 미리 정해놓은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옮기라 하며 사도세자의 천장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후손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재물을 뜻한다. 좌청룡이 빈약하다는 것은 왕실의 가장 중요한 왕자생산에 관계되는 것이니 이 보다 더 좋은 구실이 없었다.
천년에 한 번 만나는 명당
원래 이 화산의 융릉 자리는 효종이 죽자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산 윤선도가 현종의 명으로 수원으로 내려가 산세를 본 후, '세종의 영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보고했던 자리였다.
현종은 이곳으로 결정하고 토목공사를 시작했는데 돌연 우암 송시열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동구릉을 추천하자, 노론들은 일제히 동구릉을 명당이라고 맞장구치면서 고산 윤선도를 비난한다.
동구릉은 선조 이후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부상한 후, 대신들의 세력에 밀려 왕실 공동묘지로 변한다.
어쨌든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자신이 추천했던 화산이 무산되고 효종의 복상에 서인과 남인이 맞붙은 예송논쟁에서 밀려나 유배를 간다.
우암이 주장한 곳으로 장사지낸 효종의 파묘자리는 정조에 의해 영조가 묻히게 되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미 정조는 아버지를 천하명당 자리로 이장하려고 마음을 굳히고 여러 자리를 보아둔 터였다.
효종의 영릉(寧陵) 의궤(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에 후세의 참고로 하기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나 경비 등을 자세하게 적은 책)를 다 훑어본 정조는 윤선도의 실력을 알고 있었고, 윤선도가 남긴 글에서 '화산이 반룡농주(盤龍弄珠·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 대지(福龍大地)로서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리에 다시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라고 했던 말까지 인용한다.
화산에 있는 명당자리는 수원부 객사의 뒷산이었고 영우원 천봉으로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로 200호 민가와 함께 옮겨진다.
화산(花山)이란 말 그대로 지형이 꽃봉오리가 둘러싼 형태다. 꽃심에 해당하는 곳이 융릉 능침이다. 꽃심은 혈이 하나밖에 없기에 융릉은 쌍릉이 아닌 합장릉이다. 혜경궁 홍씨는 81세까지 장수해 순조5년(1815) 죽어 이 꽃심에 합장된다.
어지간한 풍수들은 엄두도 못 낼 박식한 실력을 자랑했던 정조는, 무덤이 자리할 혈(穴)과 좌향(坐向·무덤의 방향), 누워있는 용의 구슬이 안대할 자리까지 일일이 지시해서 그날로 천장 도감이 설치됐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천장을 위해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는 증거는 많다. 그날 영우원 천장 비용을 전교하면서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관리들에게 밥을 싸 가지고 다니라고 했으며 노론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영문(營門)에 돈 1만 냥을 내서 경기감영에 쓸 비용으로 주라 한다.
노론의 힘을 저절로 약화시키면서 비용을 충당하려는 정조의 계획된 정책이었다. 이틀 후인 7월 13일 수원부 민가 200호를 옮길 때 드는 비용이 거론되자, 균역청의 돈 10만 냥을 수원에 떼어주어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고, 서울과 지방의 도감은 10만 냥을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가져다 쓰라고 명한다.
영우원 천장에 들어간 비용이 약 18만 냥(약 200억 원)이었으니 정조의 이 계책은 저절로 벽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아버지를 죽게 한 노론에게 복수하는, 이른바 손도 안대고 코 풀어버리는 격이었다.
융릉 천장을 시작으로 정조는 화성축조가 끝나자 훈척세력과 정치,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군정을 문란케 하던 기존의 오군영을 과감히 개편해버리고 왕권을 강화했다.
털끝만큼도 백성의 폐를 끼치지 말라
개혁군주답게 정조는 과거 국장과 천장 공사에 백성을 공짜로 부역시키던 전례를 깨버린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하는 사람들의 급료, 양식은 물론, 의복까지 지급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했다.
융릉에 쓸 석재는 운반하는 일에 백성이 고생할 것을 염려해 가까운 꾀꼬리봉 및 산성 밖에 떠서 쓰게 했다. 남양·강화 등지의 석재가 질이 좋다는 것은 정조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뜻은 오직 아버지를 자주 찾아보는 데 있다고 밝힌다.
정조 자신이 여러 차례 밝힌 대로 본 원의 일로 털끝만한 폐도 백성들에게 차마 끼칠 수 없다 했고 사대부 집에서 자원이라는 구실로 참여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사대부 집에서 보낼 사람은 어차피 백성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백성들을 쓰지 말게 한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엄명했다.
천장공사가 진행되던 그해 여름과 가을까지 정조는 자주 영우원으로 행차했는데, 정조의 오랜 한이 풀어지는 순간이라 아버지의 억울함이 벅차게 치밀었던가. 행차할 때마다 왕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고 대성통곡을 하게 했으며 통곡을 하다가 격함에 못 이겨 정신이 혼미해지고 구역질까지 했다.
현융원(顯隆園· 천장하고 영우원은 현융원으로 바뀐다)이 완공되자 정조는 "원을 옮기는 데 오랫동안 경영하고 조처한 것은, 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을 고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라고 밝힌다.
군대와 의장은 군사들을 썼고 대여를 메는 백성과 잔디를 뜨는 사람, 각종 운반을 하는 백성까지 식량과 비용을 후하게 지급했고, 의복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일을 금하고 호조와 내탕금으로 만들어 지급했다.
발인하는 날 떡과 고기를 마련해 10리마다 상여군에게 먹이고 신방제중단(新方濟衆丹)이라는 피로회복약을 만들어 사람들마다 몇 알씩 먹게 하는 배려까지 했으니 "원(園)을 연 때로부터 원에 안치할 때까지 역사를 감독한 신하들과 호위한 장사들 및 여부(轝夫)·장수(匠手)·역부(役夫)들이 죄다 몸 성히 돌아와, 마치 도와준 사람이 있는 듯하였으니, 참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이다"라는 정조의 말은 전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정조가 지극 정성을 들여 아버지를 천장한 융릉은 넓게 퍼져나간 잔디가 포근한 명당자리다. 융릉의 문인석은 기존 왕릉의 문인석을 벗어나 목이 시원하게 뻗은 점이 특징이다.
누가 뭐래도 조선왕릉 중 석물의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걸작품은 영조가 천장한 인조의 장릉이다.
융릉의 난간석과 병풍석은 정조가 “난간석이나 병풍석 등에 대하여 선조(先朝)의 금령(禁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지 최고의 제도를 쓰려다 보니 준수하지 못하였다"고 실토한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에게는 조성할 수 없는 것이다.
융릉은 장릉의 석물을 답습했지만 장릉보다는 작품성이 다소 떨어진다. 문화의 절정기에 조성된 장릉의 석물은 이후 홍유릉과 수릉에도 적용된다. 정조의 양부였던 효장세자의 영릉에도 정자각 앞에 넓게 펼쳐진 박석은 후기 조선왕릉의 특징이며 융건릉도 박석이 넓게 깔려 있다.
융릉의 인석은 아름다운 연꽃봉오리로 능상을 둘러싸고 있다.
융릉은 다른 왕릉의 사각 연못과는 달리 원형이다. 이 또한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특별하게 시원한 정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용이 누워서 여의주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반룡농주형의 풍수라 여의주의 둥근 모습을 따서 만든 게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정답이라기엔 좀 빈약하다는 생각이다.
28세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천년에 한번 나오기 힘들다는 명당으로 이장하며 25년간 참고 참았던 통한을 대성통곡으로 터트렸던 정조의 효심은 융릉과 화성에 집약된다.
이 명당자리는 과연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사도세자는 광무3년(1889) 11월 장종으로 추존돼 왕이 됐고 그해 12월 다시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며 현융원은 융릉으로 격상한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후 사도세자의 핏줄로 후기 조선왕조가 마무리됐다.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의 손자가 철종이고 은신군의 후손이 고종이니 사도세자의 아들 세 명의 후손이 왕위를 이은 셈이다.
은신군의 양자였던 남연군은 인평대군의 후손이긴 하지만 족보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였던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과 개혁군주 정조의 이상이 무너지는 원인이 됐던 노론의 나라, 후기 조선의 몰락은 냉정한 역사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 융릉 |
강추위가 이어지던 지난 12월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이 곳 파주에서 약속장소인 압구정까지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날 뉴스에서 내일 날씨가 아주 추우니 단단히 각오하라고 경고한 대로 창 밖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인터넷에 들어가 오늘 날씨를 확인해본 순간 '으~' 하는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서울지역 현재 온도 영하 10도? 이런 날 왕릉답사를 가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궁궐 지킴이들과 유적지 답사 전문가들의 융건릉(경기 화성 소재) 답사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랴. 약속은 이미 한 것이고 전날 다시 확인할 때도 가겠노라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이런 살인적인 추위를 뚫고 왕릉 언덕을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중무장을 단단히 해야겠다 싶었다. 장롱 속에 처박아뒀던, 2년 전 친구가 장난삼아 사준 '빨간 내복'이 생각났다. 추운데 빨간색이 문제냐, 더 이상 생각 않고 내복바지를 입었다. 털 달린 바지, 두꺼운 솜조끼 위에 점퍼까지 껴입고 보니 뒤뚱거리는 오리가 따로 없었다.
영하 10도 강추위가 무섭긴 무서웠다. 버스는 당초 예상 인원 40명에서 대폭 줄어든 12명의 참가자들을 싣고 융건릉(隆建陵)을 향해 출발했다.
▲ 동행했던 답사팀이 융릉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즉위한 왕의 첫 교지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52년간 왕위에 있던 영조가 1776년 3월 5일 죽자 소렴과 대렴이 끝난 5일 후인 3월 10일 조선 22대 왕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25세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조가 내린 첫 교지는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28세로 숨을 거둔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 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으로 일으킨 임인사화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으며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극도로 싫어했다.
영조 25년(1749)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한다.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려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여기에 어머니 영빈 이씨와 한 배에 태어난 화평옹주, 화완옹주까지 합세했다.
▲ 정자각 |
사도세자를 둘러싼 처가와 외척들은 거의 전부가 정치적으로 그의 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비롯하여 영조의 장인 김한구,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총애하던 후궁 숙의 문씨, 화순옹주의 시아버지 김흥경, 화협옹주의 시아버지 신만, 화평옹주의 시아버지 박사정 등이 모두 노론이었다. 화완옹주를 비롯하여 화령옹주, 화길옹주도 모두 노론 집안으로 시집갔다.
이들 노론세력이 공모해서 세자의 비행을 자주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 꾸짖었고 마침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홍계희, 윤급 등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아래는 5월 22일 실록의 일부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영조실록 5월22일)
▲ 정조는 이 금천교를 여러차례 건너 아버지를 보러왔다. |
그 날부터 세자는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고 영조를 뵙기를 청하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는 이미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했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는데 20여 일이 지난 윤5월 13일 유언비어가 '안'에서 일어나 영조가 놀라고 세자를 자결하라 명한다.
'안'이라는 것은 궁궐 내란 의미고 유언비어는 바로 어머니 영빈 이씨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생모 영빈 이씨였다. 이 '유언비어' 사건이 없었더라면 사도세자는 폐세자 됐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융릉 장명등 구멍으로 내다본 풍경. 사도세자의 눈으로 본 당시 세상도 이렇게 좁고 답답했을까? |
임금이 칼을 들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영조실록 권100 윤5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사관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했고 그날 일을 꺼려해서 감히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생모인 영빈 이씨가 개입해서 이렇게 극적으로 진행되었다.
고독한 세자의 비참한 죽음
나경언이 비행 10종목을 적어 올린 날로부터 시작된 사도세자의 비극은 한 달 만인 윤5월 21일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해서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 했다 하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융원>이라 쓰인 비석. | |
ⓒ 한성희 |
이를 뒤주에 가둬 9일 간 내버려두다가 아들이 죽은 날 후회했다는 말로 누가 납득하겠는가? 단지 의례적인 말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본 아들을 죽인 영조는 후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뒤주에 갇히던 다음날 세자의 장인 좌의정 홍봉한은 "한림(翰林) 윤숙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죄를 주기"를 청했고 영의정 신만, 신회, 김성응 등도 모두 죄주기를 청해 영조의 화를 부추겼다.
이에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켰던 임덕제는 강진으로 유배됐다.
임덕제는 나가지 않고 버티다가 영조의 명으로 시인들에게 끌려 나가게 되자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이었다. 영조 50년 6월, 임덕제가 함평에서 현감으로 죽자 그를 슬퍼하며 좌승지로 증직시켰다.
그날 사관은 말한다. 임덕제는 강직하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던 해) 수립(樹立. 세손을 업고 나온 일)에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사도세자가 죽은 지 12년이 지나고 노론이 조정을 채우고 있었으나 당시 언론인 사관의 붓은 날카로웠다.
▲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 불리던 정조대에 만든 융릉은 예술성이 뛰어나다. |
화안옹주와 화평옹주만의 어머니였던 영빈 이씨는 친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딸과 가세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동안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아내와 어머니, 아버지 형제에게 모두 버림받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목격했던 11세 어린 정조는 마음 깊이 한을 새기고 기억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의 총애를 입은 화안옹주는 양자 정후겸을 앞세워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손잡고 권력을 휘두르며 정조를 압박한다.
▲ 문인석의 눈과 입술 등에 사실감이 살아있으며 시원하게 뻗은 목과 봉황이 새겨진 금관이 인상적이다. 저 봉황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데 대한 정조의 한풀이일까? |
뒤주에서 죽은 세자는 7월 23일 경기 양주 중량포 배봉산(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그날 묘에 가서 곡을 하고 수은묘(垂恩墓)라는 묘호를 내렸으나 죽은 아들은 되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지울 수 없었다.
수은묘는 정조가 등극한 후 현재 화성의 명당 융릉으로 천장해 현융원으로 바뀐다.
두 여자, 왕릉에서 달리다
왕릉 답사를 다닐 때는 혼자 아니면 보통 한두 명 정도 동행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단체로 갔다. 혼자 다니든 단체로 다니든 장단점이 있다. 이번에는 단점이 눈에 띄었다. 미처 단체 일정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융건릉에 오면 사도세자의 융릉을 주로 보고 정조의 건릉은 생략하기 일쑤라 한다.
왕릉 답사가 주목적이 아니라면 석물 등이 더 훌륭한 융릉만을 선택하고 그보다 떨어지는 정조의 건릉은 시간도 많이 걸리기에 생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왕릉답사가 목적이 아닌가. 여기까지 와서 정조를 보지 못하다니? 갑자기 조급해져서 융릉 답사 중 빠져 나와 진정임씨와 건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정조의 건릉을 보려고 미친 듯이 달렸다. |
25만 평 넓은 융건릉은 눈이 오면 융건백설이 화성8경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경치를 감상할 운은 없었다. 건릉으로 가는 길에는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다. 건릉까지는 꽤 멀고 게다가 평탄한 길도 아닌 언덕길이 펼쳐진다.
숨을 몰아쉬며 헐레벌떡 올라간 건릉을 답사하고 사진을 찍고 내려오자마자 일행이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또 뛰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관람객이 많지 않기에 망정이지 지엄한 왕릉에서 미친 듯 달리기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 숨을 헐떡이며 뛰었던 건릉 언덕길 |
허파가 끊어지고 숨이 목 끝에 차오를 때까지 언덕길을 내달렸다. 학교 다닐 때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를 한 후 이렇게 장거리를 죽어라 뛰어보긴 처음이었다. 등 뒤에서는 배낭이 덜컹거리며 등을 때리고 잔뜩 껴입은 옷이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숨차게 뛰어 버스에 오르자 기다리던 사람들의 떨떠름한 표정이 들어왔다. 단체행동에서는 이탈해 늦는다는 일은 모든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니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연신하며 자리에 앉으니 땀이 솟는다. 강추위도 달리기는 이기지 못해 흐르는 땀을 씻으며 헐떡거리는 숨도 돌리지 못한 채 점퍼와 조끼를 차례차례 벗어 버렸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는 아버지가 보고파서 이 언덕길을 숨차게 황급히 오르내렸을 것이다. |
정조가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천장한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며 세종의 영릉 다음 명당으로 손꼽힌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날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첫 교지로 천명했으니 오랜 세월을 가슴에 묻어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이제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포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1752~1800)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서인들을 성급하게 죄를 주는 치졸한 복수는 하지 않는다. 갓 즉위한 왕에게 노론의 세력을 누를 힘이 없었고 현명한 정조는 서서히 자신의 사람을 기르기 시작했다.
홍국영을 이용해 세도정치를 묵인하며 노론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린 후 규장각에서 인재 양성과 정치적 구도를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다.
▲ 넓은 사초지가 푸근하게 펼쳐져 있는 융릉의 능상. 용이 누워서 놀고 있다는 천하명당이다. |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난 1789년 7월 11일,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가 올라오자 천장을 하기로 즉각 결정한다.
왕심을 알고 있던 박명원이 "영우원(수은묘)이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 운운하며 상소라는 형식으로 천장의 구실을 만들어줬고, 정조는 내심 미리 정해놓은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옮기라 하며 사도세자의 천장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후손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재물을 뜻한다. 좌청룡이 빈약하다는 것은 왕실의 가장 중요한 왕자생산에 관계되는 것이니 이 보다 더 좋은 구실이 없었다.
천년에 한 번 만나는 명당
원래 이 화산의 융릉 자리는 효종이 죽자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산 윤선도가 현종의 명으로 수원으로 내려가 산세를 본 후, '세종의 영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보고했던 자리였다.
현종은 이곳으로 결정하고 토목공사를 시작했는데 돌연 우암 송시열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동구릉을 추천하자, 노론들은 일제히 동구릉을 명당이라고 맞장구치면서 고산 윤선도를 비난한다.
동구릉은 선조 이후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부상한 후, 대신들의 세력에 밀려 왕실 공동묘지로 변한다.
어쨌든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자신이 추천했던 화산이 무산되고 효종의 복상에 서인과 남인이 맞붙은 예송논쟁에서 밀려나 유배를 간다.
우암이 주장한 곳으로 장사지낸 효종의 파묘자리는 정조에 의해 영조가 묻히게 되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 정자각 앞에 박석이 넓게 깔려 있어 조선 후기 박석의 진수를 볼 수 있다. |
이미 정조는 아버지를 천하명당 자리로 이장하려고 마음을 굳히고 여러 자리를 보아둔 터였다.
효종의 영릉(寧陵) 의궤(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에 후세의 참고로 하기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나 경비 등을 자세하게 적은 책)를 다 훑어본 정조는 윤선도의 실력을 알고 있었고, 윤선도가 남긴 글에서 '화산이 반룡농주(盤龍弄珠·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 대지(福龍大地)로서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리에 다시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라고 했던 말까지 인용한다.
화산에 있는 명당자리는 수원부 객사의 뒷산이었고 영우원 천봉으로 수원부는 팔달산 아래로 200호 민가와 함께 옮겨진다.
화산(花山)이란 말 그대로 지형이 꽃봉오리가 둘러싼 형태다. 꽃심에 해당하는 곳이 융릉 능침이다. 꽃심은 혈이 하나밖에 없기에 융릉은 쌍릉이 아닌 합장릉이다. 혜경궁 홍씨는 81세까지 장수해 순조5년(1815) 죽어 이 꽃심에 합장된다.
어지간한 풍수들은 엄두도 못 낼 박식한 실력을 자랑했던 정조는, 무덤이 자리할 혈(穴)과 좌향(坐向·무덤의 방향), 누워있는 용의 구슬이 안대할 자리까지 일일이 지시해서 그날로 천장 도감이 설치됐다.
▲ 정자각에 제례 때 차임막을 걸거나 등을 달던 못과 고리 등이 남아있다. |
정조가 사도세자의 천장을 위해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는 증거는 많다. 그날 영우원 천장 비용을 전교하면서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관리들에게 밥을 싸 가지고 다니라고 했으며 노론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영문(營門)에 돈 1만 냥을 내서 경기감영에 쓸 비용으로 주라 한다.
노론의 힘을 저절로 약화시키면서 비용을 충당하려는 정조의 계획된 정책이었다. 이틀 후인 7월 13일 수원부 민가 200호를 옮길 때 드는 비용이 거론되자, 균역청의 돈 10만 냥을 수원에 떼어주어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고, 서울과 지방의 도감은 10만 냥을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가져다 쓰라고 명한다.
영우원 천장에 들어간 비용이 약 18만 냥(약 200억 원)이었으니 정조의 이 계책은 저절로 벽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아버지를 죽게 한 노론에게 복수하는, 이른바 손도 안대고 코 풀어버리는 격이었다.
융릉 천장을 시작으로 정조는 화성축조가 끝나자 훈척세력과 정치,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군정을 문란케 하던 기존의 오군영을 과감히 개편해버리고 왕권을 강화했다.
털끝만큼도 백성의 폐를 끼치지 말라
개혁군주답게 정조는 과거 국장과 천장 공사에 백성을 공짜로 부역시키던 전례를 깨버린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하는 사람들의 급료, 양식은 물론, 의복까지 지급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했다.
융릉에 쓸 석재는 운반하는 일에 백성이 고생할 것을 염려해 가까운 꾀꼬리봉 및 산성 밖에 떠서 쓰게 했다. 남양·강화 등지의 석재가 질이 좋다는 것은 정조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뜻은 오직 아버지를 자주 찾아보는 데 있다고 밝힌다.
정조 자신이 여러 차례 밝힌 대로 본 원의 일로 털끝만한 폐도 백성들에게 차마 끼칠 수 없다 했고 사대부 집에서 자원이라는 구실로 참여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사대부 집에서 보낼 사람은 어차피 백성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백성들을 쓰지 말게 한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엄명했다.
▲ 융릉과 건릉은 수복방은 없으나 제례를 지내는 제물을 준비했던 수라간은 남아있다. |
천장공사가 진행되던 그해 여름과 가을까지 정조는 자주 영우원으로 행차했는데, 정조의 오랜 한이 풀어지는 순간이라 아버지의 억울함이 벅차게 치밀었던가. 행차할 때마다 왕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고 대성통곡을 하게 했으며 통곡을 하다가 격함에 못 이겨 정신이 혼미해지고 구역질까지 했다.
현융원(顯隆園· 천장하고 영우원은 현융원으로 바뀐다)이 완공되자 정조는 "원을 옮기는 데 오랫동안 경영하고 조처한 것은, 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을 고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라고 밝힌다.
군대와 의장은 군사들을 썼고 대여를 메는 백성과 잔디를 뜨는 사람, 각종 운반을 하는 백성까지 식량과 비용을 후하게 지급했고, 의복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일을 금하고 호조와 내탕금으로 만들어 지급했다.
발인하는 날 떡과 고기를 마련해 10리마다 상여군에게 먹이고 신방제중단(新方濟衆丹)이라는 피로회복약을 만들어 사람들마다 몇 알씩 먹게 하는 배려까지 했으니 "원(園)을 연 때로부터 원에 안치할 때까지 역사를 감독한 신하들과 호위한 장사들 및 여부(轝夫)·장수(匠手)·역부(役夫)들이 죄다 몸 성히 돌아와, 마치 도와준 사람이 있는 듯하였으니, 참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이다"라는 정조의 말은 전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 목이 시원하게 뻗은 문인석과 무인석. |
정조가 지극 정성을 들여 아버지를 천장한 융릉은 넓게 퍼져나간 잔디가 포근한 명당자리다. 융릉의 문인석은 기존 왕릉의 문인석을 벗어나 목이 시원하게 뻗은 점이 특징이다.
누가 뭐래도 조선왕릉 중 석물의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걸작품은 영조가 천장한 인조의 장릉이다.
융릉의 난간석과 병풍석은 정조가 “난간석이나 병풍석 등에 대하여 선조(先朝)의 금령(禁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지 최고의 제도를 쓰려다 보니 준수하지 못하였다"고 실토한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에게는 조성할 수 없는 것이다.
▲ 인조의 장릉과 똑같은 융릉 병풍석과 상석(박석). |
융릉은 장릉의 석물을 답습했지만 장릉보다는 작품성이 다소 떨어진다. 문화의 절정기에 조성된 장릉의 석물은 이후 홍유릉과 수릉에도 적용된다. 정조의 양부였던 효장세자의 영릉에도 정자각 앞에 넓게 펼쳐진 박석은 후기 조선왕릉의 특징이며 융건릉도 박석이 넓게 깔려 있다.
융릉의 인석은 아름다운 연꽃봉오리로 능상을 둘러싸고 있다.
▲ 조선왕릉 중 유일한 연꽃봉오리 인석이 아름답다. | |
용이 누워서 여의주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반룡농주형의 풍수라 여의주의 둥근 모습을 따서 만든 게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정답이라기엔 좀 빈약하다는 생각이다.
28세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천년에 한번 나오기 힘들다는 명당으로 이장하며 25년간 참고 참았던 통한을 대성통곡으로 터트렸던 정조의 효심은 융릉과 화성에 집약된다.
이 명당자리는 과연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사도세자는 광무3년(1889) 11월 장종으로 추존돼 왕이 됐고 그해 12월 다시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며 현융원은 융릉으로 격상한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후 사도세자의 핏줄로 후기 조선왕조가 마무리됐다.
▲ 둥근 방지원도. |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의 손자가 철종이고 은신군의 후손이 고종이니 사도세자의 아들 세 명의 후손이 왕위를 이은 셈이다.
은신군의 양자였던 남연군은 인평대군의 후손이긴 하지만 족보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였던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과 개혁군주 정조의 이상이 무너지는 원인이 됐던 노론의 나라, 후기 조선의 몰락은 냉정한 역사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2006-01-20 11:36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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