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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경종과 선의왕후 의릉 수난사

중앙정보부가 파괴한 왕릉


▲ 동원상하봉 왕릉, 경종의 의릉.

조선 20대 왕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가 잠들어 있는 성북구 석관동 의릉은 효종의 영릉에 이어 두 번째 동원상하봉 왕릉이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경종(1688~1724)은 33세로 왕위에 올라 4년 간 재위 후 37세로 승하해 천장산 아래 의릉에 안장된다.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1705~1730)는, 원비 단의왕후(1686~1718)가 2월 7일 34세로 죽자 숙종 44년(1718) 9월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선의왕후는 영조6년 6월 29일 경덕궁 어조전에서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승하한다. 10월 16일 풍수지리설에 따라 능침이 정혈을 벗어날 것을 우려해 경종의 능침에서 아래로 80자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의릉은 위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두르고 선의왕후 능침에는 두르지 않아 영릉과 마찬가지로 부부가 한 방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크기로 줄어든 문인석과 무인석, 사각 장명등은 숙종 이후 바뀐 조선후기 양식이다.


▲ 꼬리가 등 가운데로 올라간 선의왕후 능침 석호. 위는 경종의 능상.

경종과 선의왕후 능침 둘 다 석호가 특이하게 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 등 가운데 붙어 있다. 호랑이가 꼬리를 추켜올리는 것은 긴장된 자세가 아닌가. 이렇게 올라간 꼬리를 가진 석호는 처음 본다.

보통 왕릉 석호의 꼬리는 밑에서 얌전하게 말려 갈무리 돼 있는데 유독 의릉의 꼬리만 올라가 노론의 등쌀에 시달렸던 경종의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듯싶다.



정자각 앞 연못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나 살아서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경종이 지하에서나마 편안하게 잠들었으면 좋을 텐데, 340년 이후 갑자기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들어오면서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같이 하는 기구한 운명이 됐다.

천장산을 포함한 13만 평의 의릉 경역에 1962년 중정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의릉 수난사는 1995년 9월 안전기획부가 이전하면서 당시 문화재관리국이 관리권을 되찾기까지 계속됐다. 이제야 겨우 의릉은 중정에서 안기부까지 이름이 바뀌는 군사정권 시절의 권력기관이 망가트려 놓은 왕릉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 중이다.

김종필 초대 중정부장이 1962년 중앙정보부 청사 부지로 선택한 곳이 의릉이었다. 이후 1995년 안기부가 새로 청사를 짓고 이전하기까지 33년간 군사정권의 시녀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며 '의릉 접근차단' 담장을 둘러쳤다.


▲ 복구 이전 의릉은 정자각까지 석교가 놓였고 정자각 앞은 연못과 일본식 정원이 조성됐다.

그 담장 안에서 언제 어떤 건물이 지어지고 정자각 앞에 연못이 들어섰는지는 대부분 비밀에 싸여 있다. 단지 '이후락 시절에 만들어졌을 것' '연못에서 뱃놀이도 했다더라' 등등의 '카더라' 소문만 무성하다.

왕릉을 파헤쳐 놀이터로 만들든 건물을 짓든 건축허가도 필요없던 절대권력이었다. 또 외부에 기록을 노출하지 않던 습성 때문이기도 하다. '음지'에서 일하고 '음지'를 지향했던 시절이다.


▲ 외래종 수목을 뽑아내고 연못을 메워 금천교와 홍살문 참도를 복구했다.

1996년에서야 당시 문화재 관리국은 겨우 의릉 관리사무소를 개설하고 의릉을 일반에 개방한다. 중정은 정자각 앞을 파헤치고 일본수종을 가득 심었다. 2003년 12월부터 일본식 정원을 없애버리고 연못을 메우며 복원을 한 것이 의릉의 현재 모습이다.

돌다리가 놓인 연못에 커다란 비단잉어가 와글대는 일본식 정원이 예쁘게 보였는지 '가장 아름다운 왕릉'이라는 쓴웃음 나오는 칭찬을 들었던 의릉 복원 계획이 발표되자 인근주민들은 '그대로 두라'며 복원을 반대하기도 했다.


▲ 복구 이전 의릉 정자각 앞은 연못이고 좌청룡(왼편 주차장) 우백호(오른편) 자리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들어와 있다. 오른편 건물 앞에 보이는 것이 안기부 직원들이 운동하던 잔디구장이다.

33년을 마음대로 쓰던 안기부가 나가던 날로 문화관광부는 산하기관인 한국예술종합학교에게 안기부 청사를 무상 임대 해주고 관리를 위임했다. 문화재관리국에 불과했던 문화재청은 당시 아무 힘을 쓸 수 없었다.

토지 2만여 평과 건물 3만여 평이 의릉을 중앙에 두고 양 날개 좌청룡·우백호 자리를 파헤치고 들어서 있어 당시 안기부 청사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문광부 '빽'으로 건물과 토지를 공짜로 쓰고 있는 예술학교는 현재 학교건물을 신축 중이고 건물이 완공되면 나간다고 한다. 안기부 유산인 건물이 철거돼 의릉이 원상회복되기를 기대해본다.

현재 의릉에는 재실조차 없다. 홍살문 동북쪽 도로변에 있던 재실은 1970년 영친왕이 사망하자 홍류릉 경역으로 옮겨 영친왕이 잠든 영원 재실로 다시 지어진다. 무슨 도깨비 조화인지 왕릉 재실이 헐려나가 영원 재실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재실 터는 국악예술고교에서 학교부지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일반주택단지로 변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중정 강당 표지판 뒤 유리문 출입구는 쇠사슬로 감겨있다.


구 중앙정보부 강당

의릉 복원 3년 계획에 이 중앙정보부 강당은 철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72년 이후락 중정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건물이기에 2004년 9월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돼 근대문화유산이 됐다. 아무래도 의릉과 안기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으로 묶여 있는 모양이다.

▲ 입구부터 계단까지 붉은 양탄자로 깔렸다.
ⓒ 한성희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합의 발표한 남북공동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민족통일 3대원칙'을 천명해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낡아서 버려진 유령 같은 건물을 올려다보자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쇠사슬로 감아 자물통으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중정 강당 건물에 들어서자 빈 건물 특유의 서늘한 냄새가 훅 몰려든다. 바닥부터 계단까지 푹신푹신한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어 옛 안기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색은 바랬지만 2층까지 발 딛는 바닥마다 깔린 양탄자를 밟고 걸어다니자니 호화스러운 중정의 과거 그림자를 더듬는 기분이었다. 중정 강당은 1962년에, 회의실은 1972년 10월에 지어졌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강당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둠에 잠겨 있었다. 140평에 100석 좌석을 갖춘 이 강당은 영화관으로도 사용돼 영사실이 그대로 남아있다.

잠깐씩 들여다본 작은 방마다 당시에는 호화판이었을 붙박이옷장이 있어 낡은 필름을 되돌려 보는 듯했다.

강당의 절반 크기의 회의실은 낡았지만 푹신푹신한 가죽의자와 탁자, 천장의 샹들리에, 커튼까지 안기부의 위용을 담고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한 때는 호화스러웠을 색 바랜 커튼을 들추고 내려다 본 중정 강당 앞은 예전에 잔디구장이 있던 곳이다. 잔디구장은 중정 직원들의 운동장으로 사용됐으나 지금은 소나무 묘목이 있다.


▲ 1972년 이후락 중정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강당은 깊은 어둠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어둠 속에 영화관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왕릉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잔디구장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다 입에서 저절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왕릉 근처엔 얼씬도 하지 못했고 행여 불이라도 나면 능수복의 목이 날라 가는 참형을 당했던 조선왕릉에 연못을 파고 즐기며 잔디구장까지 만들었던 배짱은 다시 보아도 입이 벌어지게 만든다.



43년 만에 천장산 개방

의릉은 아름다운 천장산을 등에 지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62년부터 출입이 봉쇄된 천장산 정상에는 레이더가 설치돼 있었고 주위에 군부대가 주둔해 살벌한 위압으로 주민들을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 회의실 바닥도 양탄자다. 가죽의자와 먼지 쌓인 테이블에 세월이 묻어나지만 옛 안기부의 모습은 짐작이 간다.

천장산을 따라 가시철망이 둘러쳐 있지만 문화재청으로 관리가 이전된 후 철조망을 걷어냈다. 그리고 지난 5월 1일부터 43년 만에 시민들에게 3km 천장산 산책로를 개방했다.

오랜 세월 동안 출입하지 못했던 산책로가 개방되자 수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천장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겼다. 시민들은 이곳을 가벼운 등산과 휴식 장소로 애용하고 있다.

안기부 청사는 이전해 갔지만 국정원으로 바뀐 현재도 의릉 경역에 4800평을 무상임대 해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국정원과 조선 왕릉은 질기디 질긴 인연인지 악연인지 아니면 만만한 왕릉부지라서 그런지 새로 이전해간 곳 역시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경역이다. 헌인릉 경역에 13만 평을 사용해 새로 청사를 지었으니 문화재청이 부지를 되돌려 받으려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조선의 절대권력이었던 왕이 묻혀있는 터가 국정원의 권력과 궁합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재실이 없기에 안기부가 남겨놓고 간 딱딱한 2층 건물에 입주한 의릉 관리사무소의 모습에서 안기부 그림자가 의릉에서 벗겨질 날이 요원하다고 걱정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 중정 강당 앞 잔디구장의 잔디를 걷어내고 토종 소나무를 이식했다.
2005-11-23 10:2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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