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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아직도 망부가 부르는 정순왕후(단종비) 사릉

왕비의 통곡에 온동네 여인네들이 울었다


▲ 사릉

수백 년 전 한 여인의 슬픈 사연이 전해 내려와 지금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그 주인공이 바로 비운의 단종비 정순왕후다.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18세의 정순왕후(1440∼1521)는 영월로 떠나는 17세 소년왕 단종(1441-1457)과 애끓는 이별을 하고 살아서 다시는 낭군을 볼 수 없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마지막 자리였던 영도교는 영영 이별한 다리, 님이 영원히 건너간 다리가 되어 애절한 전설을 남긴다.

이 같은 전설을 뒷받침하듯 성종은 살곶이 다리와 함께 영도교를 보수하고 직접 이름을 붙인다. 성종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알기에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닐까 한다.


▲ 왼편 소나무 숲에 해주 정씨 묘역이 있다.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있는 사릉(思陵)은 지아비를 잃은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가 잠든 비공개 능이다. 10만여 평의 사릉은 울창한 푸른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한적하다.

단종2년(1454) 15세에 왕비로 책봉된 정순왕후는 다음해인 1455년 세조의 왕위찬탈로 이름뿐인 의덕(懿德)왕대비에 올랐다가 세조3년(1457) 노산부인으로 강등된다.

1521년(중종16년) 단종부터 7대의 왕대를 살았던 정순왕후가 82세로 죽자 중종은 대군(大君)부인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 시집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장사를 주도했고 해주 정씨 묘역에 안장됐다. 문종의 외손이었던 정미수는 정순왕후가 후사를 부탁하고 죽자 정순왕후의 제사를 봉향한다.


▲ 숙종대의 복위 능이라 장명등도 사각옥개석이며 무인석이 생략되고 간소하다.

숙종24년(1698) 단종과 함께 복위되자, 사릉총리사 최석정은 숙종에게 이런 사연을 알리고 "사릉은 본래 정미수 개인 땅이며 왕후께서 살아서 후사를 부탁했으므로, 능으로 봉해졌다해도 정씨 묘소를 옮기면 정순왕후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정씨 묘역을 그대로 둘 것을 청했다.

이에 숙종은 "해가 오래된 묘는 일찍이 옮기지 않은 예가 있다. 그대로 두라"고 허락했다. 능으로 결정되면 가차없이 이장 당해야 했는데 정순왕후를 돌본 공으로 해주 정씨의 묘역은 이런 연유로 지금도 사릉 능역에 남아 있다.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죽음의 유배 길을 떠난 지 넉 달 뒤 단종은 죽음을 당했고, 궁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는 지금의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가삼간(정업원)을 짓고 살게 된다.


▲ 사릉으로 들어가는 길.

하루아침에 고귀한 신분에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왕비의 심정을 헤아리며 동정하고 같이 슬픔을 나눈 사람은 동네 여인들이었다.

송비는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던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

비운의 소녀왕비가 가슴을 치고 우는 소리는 여인들의 가슴을 후벼팠고, 왕비의 한이 서린 통곡소리가 들리면 산 아래 마을 여인들도 일제히 통곡해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졌다.


▲ 사릉의 예감(제문을 불 태우는 곳)은 깨졌지만 드물게 뚜껑이 남아있다.

여자의 한은 여자가 알아준다고 했던가. 조선의 민초였던 여인들이 정순왕후와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슬픔을 나눴던 이 통곡을 사람들은 동정곡(同情哭)이라 했다. 송비의 서리서리 품은 한을 이해해주는 것은 여인네들의 몫이었다.

송비는 먹을 것이 없어 궁궐에서 따라 나온 세 명의 시녀가 동냥해온 밥으로 끼니를 연명한다.

왕비와 통곡으로 마음을 같이한 마을 여인네들이 줄을 서서 푸성귀를 전해준다는 소식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자 금지령이 내렸고 여인들은 궁궐의 감시를 받는다.

조선의 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송비를 돕기 위해 정업원 근처에 최초의 금남(禁男)시장인 채소시장을 열었다. 남자의 출입을 금했으니 제 아무리 관리라도 출입을 할 수 없었고, 북적대는 시장에 장사하러 가는 척 담 너머로 던져주는 여인들을 누가 말리랴.

옷에 자주 염색을 들여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송비의 소식은 세조에게도 마음 편할 수 없었다. 세조는 정업원 근처에 영빈정(英嬪貞)이라는 집을 지어주고 곡식을 내렸으나 송비는 끝내 거부했다.

송비가 세조의 도움을 받아들일 사람이었다면 아침저녁으로 억울하게 죽은 지아비 생각에 가슴을 치고 통곡하지도 않았으리라.

죽을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고 생각했다 해서 붙은 사릉(思陵)이란 능호는 조선왕릉 능호 중 그래서 가장 애절하다.


▲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


지금도 흐르는 왕비의 눈물


사릉에는 전통수목 양묘장이 있어 태백산맥에서 200년 이상 묵은 춘양목의 우량종자를 채취해 소나무묘목을 기르고 있으며 백송, 미선나무 등 천연기념물, 희귀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곳에서 기른 묘목과 희귀식물들은 궁·능·원에 분양되며 고건물 복원 목재로 키우고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사릉 능침에 올라 소나무 숲을 내려다본다. 조선 왕릉 중에 이렇게 소나무가 잘 보존된 숲은 드물다. 단종의 장릉과 같은 모양의 석물이 서 있고 복위왕비라 무인석은 생략되었다.


▲ 잔디만 살짝 걷어내면 드러날 박석이 보인다.

18세 어린 나이에 청상이 되어 자손도 없이 홀로 지낸 송비의 흔적을 찾아보려 사릉을 한 바퀴 불러본다. 그렇게 송비를 그리워했던 단종은 머나먼 영월에, 송비는 이곳에 있으니 죽어서도 두 부부는 만날 수 없는 운명인가. 5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단종과 송비는 떨어져 있다.

사릉의 정자각 앞 잔디밭에는 흙과 잔디에 살짝 덮인 박석이 드러나 보인다. 잔디만 걷어낸다면 수백 년 전 박석이 금방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 구렁이 허물일까?
능을 내려오다가 뱀이 벗어 내버린 허물을 발견했다. 이곳에도 공릉처럼 정순왕후를 지키고 있는 구렁이가 있는 것일까? 부디 정순왕후를 잘 보살피고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게 뭐지요?"

능상을 내려오는 언덕 중간쯤 작은 물체가 덮여있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뜻밖에 물이 흘러내려 간다. 안내를 하던 사릉 관리인이 설명해준다.

"저 능침 앞에서 물이 나와서 그 물을 빼는 수로예요."

정순왕후 능침 앞에 물이 솟아 나와 물줄기를 돌리려 만든 수로였다. 잔디에 덮여 숨어있던 사릉의 물줄기. 물이 솟는 무덤은 풍수에서 금기시 하는 대표적인 흉당이다.



▲ 효장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 수길원. 장마철이면 사진 아래 부분 바위가 있는 곳에 물이 솟는다. 풍수가들은 이 바위가 후손이 끊기는 흉당이라는 증거라고 한다.
문득, 효장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 수길원의 무덤 앞에도 물이 나오던 생각이 났다. 장마철이 되면 정빈 이씨 무덤 앞에서는 샘이 솟아나며 수길원 곳곳은 비가 오지 않아도 늪지와 흡사해 발이 빠지곤 했다.

"수길원에서 일을 하면 꼭 사고가 나요. 연장이 망가진다거나 누가 다치든지."

소령원과 수길원에서 공익근무를 하는 청년이 이런 말을 했었다.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영릉)는 10살 어린 나이로 죽었고 정빈 이씨는 후사가 끊겼다.

정순왕후의 무덤 앞은 마르지 않는 샘이 지금도 솟고 있으니 수렴이 든 무덤은 후사가 없는 풍수의 진실일까?


▲ 사릉 무덤 앞에서 솟아나오는 샘을 이 물길로 아래로 빼낸다.

복잡한 마음에 맑은 물이 졸졸 내려가는 어두운 구덩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사릉은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아 조용하고 아름다운 능이지만, 무덤 앞에서 솟아나온 물이 흘러 내려가는 수로를 들여다보자니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 하는 왕비 생각에 마음이 흐려진다.

저 샘물은 지금도 풀지 못한 정순왕후가 흘리는 눈물이 아닐까. 그 옛날 비운의 왕비가 흘린 슬픔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지금도 흘러내리고 있다.
2005-12-09 14:4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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