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yler's Story

1. 백제군 드디어 38선을 넘다 - 관산성 전투가 시작되다


1). 그 사실적 재구성

흔히 말하는 관산성 전투는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백제가 신라에 대한 보복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신라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백제의 내부사정으로 한성옛땅에서 백제는 자진 철수하였고 텅빈 그 땅에 신라는 깃발을 꼽은 것이다.

어찌되었건 애시당초 나제동맹의 고구려 공략의 밑그림은 한성 옛땅은 백제가 그리고 한강 중상류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한 약속과는 어긋난 것이기에 백제 입장에선 신라의 배신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1차원적 시각이다.

백제입장에선 한성옛땅을 신라가 차지한 것도 차지한 것이지만 더 큰 눈에 가시는 신라와 고구려의 재결합이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백제의 신라에 대한 응징전쟁의 전개과정을 리얼하게 재구성토록 해 보자.
 


그림설명 : 일반적으로 알려진 관산성전투의 상황도

이 그림이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관산성 전투의 상황도이다. 지금의 옥천관산성에서 백제, 왜, 가야의 3만 연합군과 신라군이 맞붙어 싸운 일대 격전인데 그림에서처럼 신라는 보은지역의 신라군과 상주지역의 신라군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경기지역, 즉 신주의 김무력군까지 합세한 전투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주공격선이 한성땅을 차지한 신라의 신주가 아니란 점이다. 단지 한성의 옛 백제 고토회복작전이 목적이었다면 응당 백제는 한성의 신라군을 공격함이 순서이겠지만 백제의 주공격선은 한성땅이 아니라 옥천지방이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또한 초기 격전지를 보면 삼년산성으로 가는 길목인 굴산성과 영동 각계리의 직동이었다.

보은의 삼년산성은 당시 신라에게 있어서는 소백산맥넘어 신라의 각군영으로 연결되는 허브(HUB)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군사령부이다. 따라서 백제가 신라군의 허브(HUB)라 할 수 있는 삼년산성을 공략하여 수중에 넣는다면 그 휘하의 신라 진영은 자연도태시킬 수 있는 잇점을 갖게 되는데 따라서 백제가 한강의 한성땅이 아닌 삼년산성쪽으로 주공격선을 잡은 것은 신라의 허리를 끊어 놓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2). 전쟁초반의 승세는 백제편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초기 전장(戰場)과 후기 전장(戰場)이 다르다. 관산성 전투 역시 그렇다.

전쟁의 발발시점에선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함산성이고 그 다음은 구전되어 전하는 전장터는 굴산성과 직동 핏골전장터이다. 일단 전쟁 발발시점의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 삼국사기엔 백제와 신라의 대회전인 관산성 전투의 결과만을 말하고 있다. 554년 7월에 성왕이 참수되고 백제의 참패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관산성 전투의 발발은 언제일까?

그 기록은 일본서기 흠명기 15년조에서 찿아볼 수 있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東方)의 령(領)인 물부(物部) 막기무련(莫奇武連)을 보내 자(自)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병사 죽사(竹) 물부(勿部) 막기위사기(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신라가 신주를 설치한 것이 서기 553년 7월이고, 이미 그 한달전인 6월에 왜에서 백제로 지원군을 보냈고 553년 12월 9일에 신라의 함산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관산성 전투는 정확하게 553년 12월에 시작해서 그 다음해인 554년 7월에 끝이 난 당시로서는 장기전에 속하는 전쟁임을 알 수 있다.


554년 12월 9일 관산성 전투의 발발과 동시에 신라 함산성 함락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함산성(函山城)을 서산성과 삼양리토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어차피 탄현쪽을 넘어온 백제군으로서는 당연히 서산성과 삼양리 토성을 함락시키지 않고선 신라진영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에 함산성을 그곳으로 보는 것은 군사적으로도 타당하다 하겠다.

삼양리토성이나 서산성은 신라입장에선 하나의 전초기지 성격이라고 볼 수 있기에 백제의 주공격선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쟁발발당시 백제 공격군 시각에서 본 전장 상황도


전쟁발발 초기엔 관산성은 그리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재 관산성으로 알려지고 있는 삼성산은 위치상 많은 군이 주둔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둔형 지휘소형 산성이라기 보다는 관측형 산성에 가깝다. 관측형 산성은 주둔 지휘소형 산성이 함락되면 자연적으로 나가떨어지는 그런 산성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면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옥천역에서 본 관산성과 삼양리토성(건물에 가려짐)과 서산성 그리고 멀리 백제진영의 고리산성이다.
이 사진은 신라진영에서 본 시각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림에서 보이는 아파트와 서산성 사이의 길로 백제의 선봉이 물밀듯 내려와서 순식간에 삼양리토성(함산성추정)과 서산성을 점령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응징의 칼을 빼든 백제군은 신라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함산성(삼양리토성)과 서산성 및 인근의 관산성까지를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신라군의 본진지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이렇게 초기 전세는 전적으로 백제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숫적 열세에 있던 신라는 밀릴 수 밖에 없었다.



2. 신라군의 총력 방어전 낙동강 방어선 - 핏골 전투와 굴산성 전투


1). 핏골전투의 전설

관산성 전투를 추적하다가 알게 된 것이 핏골전투의 전설이다. 이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마을고장에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인데 그 현장을 직접 찿아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직동이 바로 핏골 전설의 현장이다. 마을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금강의 상류 지류인 영동천위로 각계2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서 역사의 현장인 직동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이런 강의 지류는 예로부터 군의 이동통로이자 식수공급원 역할을 하였다. 이곳 역시 삼국시대 신라군의 주요 이동통로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주와 추풍령을 넘어 황간을 지나면 바로 이곳을 거치게 된다. 

 


핏골로 연결되는 각계2교와 영동천 (이 영동천을 따라 올라가면 황간과 추풍령에 이르게 된다)


각계2교 위에서 본  경부선의 열차와  KTX 고가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교통의 길목이다)
 

경부철도와 KTX고속전철고가 밑으로 지나서 드디어 신라와 백제의 숨겨진 격전의 현장인 핏골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엔 이 마을의 깊은 유래를 웅변하듯이 400년된 느티나무가 나그네와 동네사람들의 쉼터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엔 마을의 표지석과  유래비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핏골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 입구 표지석과  각계2리(핏골) 내력비 (內歷碑)

너무도 반가운 마을 내력비. 이런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역사가 된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더욱 뜻깊다.


핏골전설과 관련된 내력비 내용 소개

현 각계2리 동네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 동리 이름은 신라 진흥왕 15년(554)에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침공했다가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격전을 하였는데  특히  핏골에서 전멸하였으므로 그 후로 이 골짜기를 "핏골(血谷)"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2). 핏골이 간직한 관산성 전투의 또 다른 비밀

역사책에 기록된 것만이 증명되는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참으로 꽉 막힌 사람일 것이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그에 대한 정황과 사실적 재구성을 통해서 숨쉬는 역사로 재발굴 하는 것이 역사추적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래서 이 핏골전설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 특히 군사적 재해석을 해보고 관산성 전투를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해 보기로 한다.

먼저 핏골의 위치는 상주에서 추풍령을 넘어서 영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은 현재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며 경상도쪽으로 가기위해선 필히 거치는 그런 곳이다. 

비단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6.25전쟁때도 무력남침한 북괴군은 바로 이 루트를 지나서 낙동강 전선에 이르렀다. 대전-옥천-영동을 지나 황간-추풍령-김천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바로 그 길이다.

반대로 이 코스의 역으로는 상주에 본부를 둔 신라군의 보급로이자 또한 중부지역에 대한 진격로이기도 하다. 결국 백제와 신라가 맞 붙을 경우엔 영동 핏골은 결전장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이다.


핏골과 굴산성의 위치로 볼때 백제 주력군이 두군데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군사적 관점에선 타당치 않다.
 

그런데 관산성 전투당시 기록은 백제의 태자 여창이 이끄는 주력군은 고리산에 성을 쌓고 서기 553년 12월9일 전격전을 벌여서 신라의 최전방 기지인 함산성을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전에서 옥천을 지나는 백제의 주력군이 신라군과 굴산성에서 한판 맞붙게 되는데 굴산성의 위치와  핏골의 위치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공격루트를 두군데로 나눈다는 것은 전략전술 상 맞지가 않다. 왜냐하면 병력집중의 원칙을 가장 중시해야 할 공격군이 분산된다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다.

또 핏골의 유래를 보면 관산성을 공격한 백제 성왕이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한번 혈전(血戰)을 벌였다고 하는데 어떻든 간에 백제군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격전을 벌였다는 부분만큼은  명백한 사실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핏골 전투의 유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퇴각하다가 전투를 벌였다는 의미속엔 그 전에 진격하면서 이곳 또한 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릇 전쟁은 초기전투와 중기 후기 전투의 양상이 다르다.

따라서 초기 전투가 아닌 후기 전투만이 구전되어 내려왔다고 추정해 본다면 전쟁 초반 백제의 승기일때는 이곳을 백제가 진주하면서 상주의 신라 증원군 차단에 성공하였다가 후반기에 들면서 백제가 패퇴한 곳이라고 추정한다면 그것이 더 설득력 있다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이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재해석하여 재구성 하여 본다.


가정

1. 백제의 공격루트는 MAIN 공격선과 SUB 공격선으로 나뉘어 진격하고 나중에 최종 합류한다.
2. SUB 공격선은 신라의 병참지원과 지원군이 주(主) 전장(戰場)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차단역할을 한다. 


관산성 전투발발 당시 백제의 신라 침공군은 2개의 공격루트로 구성되어 신라의 증원군을 차단하는데 이용됨


3). 신라 증원군을 차단하는 백제, 왜, 가야, 혼성군은 금산에서 출발

즉, 핏골 전투의 백제군은 백제 태자 여창이 이끄는 주력군과는 다른 별도의 공격라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백제연합군의 구성에 이유가 있다. 

일본서기에 보면 서기 548년 백제의 "도구니시(得爾辛)"에 성을 쌓는데 왜병 370명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의 축성 및 전쟁준비에 왜병도 동원되었슴을 말한다. 도구니시성은 백제의 덕근지(德斤支)이며 현재 논산의 은진지방의 산성을 말한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 직전엔 왜에서 왜병 1000여명과 병선 40여척에 나누어 타고 백제에 오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게 해서 백제의 신라 침공전에 동원된 왜병은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백제 진영에 분산배치되었을 것이다.

관산성 전투 종반전에 백제군을 포위한 신라군을 백제 태자 여창과 함께 있던 왜장의 활약상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백제 성왕은 신라에 대한 응징전에 대가야군까지 동원하였다. 백제 귀족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입장에선 동맹군의 지원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가야군은 왜 백제편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텐데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가 적용된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이미 신라에 복속하였고 금관가야 멸망후 가야세력의 맹주이던 대가야는 계속되는 신라의 압박에 백제와 동맹으로서 그 타개책을 삼고자 했다.
 


관산성전투에 참전하는  대가야군과 왜의 참전루트 

즉 고령 함안 합천을 베이스로 하는 대가야군은 금산에서 백제성왕의 지휘아래 백제 왜, 가야 혼성군을 구성하여 상주에서 올라오는 신라의 증원군을 차단하는 작전에 참가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즉 대가야의 위치와 핏골전투의 위치 두가지를 종합해보면 옥천을 통과하는 백제 주력군과는 다른 루트를 통한 또하나의 침공루트가 존재했슴을 짐작케 한다.

예로부터 금산에서 영동 양산을 거쳐 가는 길은 경상도로 가는 길이었다. 바로 이 길을 통하여 백제 성왕은 백제군과 왜 그리고 가야군을 지휘했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도 관산성전투 후 백제 무왕시절에 신라에 대한 백제의 압박은 금산에서 영동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통해서 계속되었다. 이때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이 양산가이다.
 

4). 핏골전투가 간직한 백제 성왕의 비극적 죽음을 푸는 열쇠

이 상황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즉 백제의 주력군은 관산성 일대의 함산성을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신라군의 사령부인 삼년산성으로 진격하고 금산에서 출발한 백제 가야 왜 혼성군은 상주의 신라 증원군을 막고난 다음 본진과 합류한다는 작전구상이다.

여기서 백제 성왕은 왜와 가야를 조율하는 외교력 발휘는 물론이고 가야와 왜 혼성군 지휘자까지 겸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기록된 내용에는 이런 실질적 내용보다는 몸져 누운 태자 여창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50기의 호위병력만을 대동하고 태자의 군영으로 가는 도중에 참수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의 시작은 왜 백제 성왕이 신라군이 빤히 보이는 관산성 밑을 불과 50기의 호위병력만을 대동하고 가다가 비극적 종말을 고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태자 부여창이 전쟁의 지휘를 맡은 상황에서 사비궁궐에서 보고만 받고 있는 위치였다면 태자를 위문하러 가는 길이 관산성 아래 구천을 지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핏골전투의 유래를 통해서 백제성왕은 사비궁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투현장에 있었슴을 알수 있다.

전쟁 종반 신라의 반격에 밀려 내려온 성왕은 금산에서 추부로 이어지는 성왕의 백제군영에서 고리산에 주둔하고 있던 태자 여창을 보러 가는 도중에 신라 복병에 결렸슴을  핏골전투의 전설이 우회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즉, 신라에 대한 공격루트가 백제성왕과 태자 여창이 지휘하는 2개로 나뉘어 있었던 관계로 전투지휘 회담차 수시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교통로는 관산성 아래 구천을 통과하게 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관산성까지 백제가 차지한 시점에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군에 밀리고 있었던 시점에선 상황이 달라지는데 이를 성왕은 간과한 것이다. 늘상 다니던 교통로를 전속 호위기병 50기만 대동하고 평상시처럼 태자 여창의 군영으로 가던 성왕은  이를 눈치챈 신라복병에게 화를 입게 되는 것이다.


관산성 전투 초기 전쟁 진행 상황도 :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과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 가야 왜 혼성군과 이에 맞서는 신라군의 기동로를 표현하였다. 


5). 신라군 시각에서 본 핏골전투와 굴산성 전투
 

그럼 신라군의 시각에서 본 핏골과 굴산성 전투는 어떻게 될가?

백제의 치밀한  신라 응징준비와 가야와 왜까지 동원된 백제군의 초기진공에 신라군은 숫적 열세를 면치 못했다. 당시 백제군은 한성고토까지 포기하고 약 1만의 대가야 병력까지 동원하여 병력의 집중화를 꽤한 반면에 신라군은 신주의 김무력군, 그리고 충주 중원방면의 거칠부군과  상주지역군 등으로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초기전투엔 신라는 백제군의 공격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삼국사기 진흥왕 15년조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백제 제27대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 초기 백제군의 진격에 맞서 신라군 총지휘관은 각간 우덕이었다. 상주지역 군주(軍主)로서 그는 금산지역에서 진격해 오는 성왕의 백제군은 물론이고 백제 태자가 이끄는 백제 주력군의 공격까지 막아야 하는 중책을 맞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듯이 초반 방어를 맞는 사령관은 고전을 면키 어렵다.

말이 쉬워 불리한 것이지 실제로는 관산성 전투 초기 전투에서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의 고위 장수들이 모두 전사했거나 부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하여 본다. 전투지 인근지역엔 장군묘로 전해지는 곳도 있는 것과 이 전투 이후 이들 최고 관등의 장수들은 기록에 드러나지 않는것 또한 전사를 추정해 보게 한다. 

어떻든 방어선이 뚫릴 누란의 위기에 처한 신라 지휘부는 별동대라 할 수 있는 신주의 김무력군까지 동원하게 되는 총반격으로 전쟁은 장기화 양상에 접어들게 된다.

다음 그림은  신라군의 시각에서 본 관산성 전투 초기 전황도를 그려본 것이다.

 

3.
신라군의 낙동강 방어전투였던 보청천 굴산성 전투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이 흐르는 청성면 일대는 옥천 일대에서 가장 넓은 벌판을 가지고 있고 군량미 조달의 핵심인 너른 벌판까지 갖고 있다.

굴산성은 토성인데  옥천일대에선 옥천읍의 삼양리 토성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 학계에선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이곳까지 확대되기 전에는 백제나 마한세력이 축조한 토성으로 보인다. 

굴산리토성 배후의 저점산성이 신라가 이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석성이다. 아무튼 굴산성은 삼년산성이든 영동으로든 가는데는 꼭 거쳐야 하는 목지점이다. 현재도 굴산성 인근으로는 19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굴산성의 위치 (빨간타켓모양이 신라군의 거점이고 노란 세모꼴은 백제군의 주요 거점산성)

당시 백제군의 눈으로 본다면 바로 이런 풍광이었을 것이다. 바로 앞엔 굴산성이 버티고 있고 뒤쪽 높은 봉우리엔 신라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포장도로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도 이 방향으로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을 것이다


보청천 평야에서 본 굴산성전경과  저점산성. 굴산성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산을 지나면 삼년산성에 이르게 된다.


굴산성 전경 파노라마 사진(앞 오른쪽 건물뒤 언덕베기가 굴산성) 굴산성은 옥천인근지역에서 삼양리토성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서 초기엔 마한 또는 백제지방세력의 치소(治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삼국사기 기록엔 신라 자비마립간시절 삼년산성을 축성하면서 굴산성을 보강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굴산성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즈막한 야산에 흙으로 빚은 토성이었으나 현재는 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굴산성 안으로 들어가보면 중규모의 포곡형 산성으로서 군 주둔 지휘형 토성임을 금방 알수 있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보청천일대의 평야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지휘 관측 및 주둔형 성곽으로는 삼박자를 고루 갖춘 토성이다.
 


굴산성 평면도


필자의 생각은 산성에 대해서 고찰할때는 그 구조도 구조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격과 방어측면에서의 고찰이라 본다.  그래서 구조적 특성에 대한 설명은 가급적 줄이고자 한다. 물론 고고학적으로는 유물이라든가 구조적 측면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지리적 측면이 군사적 관점에선 더 중요하다.

특히 고대 삼국시대의 전투는 독립된 산성만의 전투가 아니라 인근 산성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그런 지리적 연결관계는 삼국시대 전투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의 전투를 파악하는데에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이런 산성간의 시스템적 지원관계는 삼국시대가 가장 원할 하였고 반대로 시대가 내려오면서는 그 연결성이 떨어지다가 조선 중기이후엔 유명무실화되어서 외침에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였다.

그런의미에서 굴산성전투 당시  지리적 위치와 군기동로의 연결성을 구글지도를 통해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굴산성을 중심으로 보청천을 흐르는 평야 주변에서 백제와 신라의 전투 상황도


윗 사진은 굴산성 동쪽 망대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보청천과 평야지대를 한눈에 조망하는 굴산성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윗 상황도에서 보면 굴산성에서 보청천 방향으로 화살표 방향으로 보는 사진이다. 


망대지에서 남쪽 굴산성 입구쪽으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보청천일대 평야와 강 건너 영동군의 궁촌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관산성 전투 당시 마주보이는 산에선 백제의 주력군이 진을 치고 있고  바로 아래 들판에선 신라와 백제의 밀릴 수 없는 한판 승부가 벌어졌으리라..

 


흔적조차 없는 굴산성 입구를 들어서기 되면 소로에 접어들자 마자 우물터가 있다. 주둔형 산성의 핵심은 식수해결이다.  그 규모로 볼때 관산성이라 일컬어지는 삼성산의 간이우물터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수천년을 이어 내려온 우물이라 생각하면 그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수천년의 시대가 연결되는 그무엇의 느낌을 받게 된다.


굴산성이 보은과 영동 옥천으로 연결되는 삼각꼭지점에 위치하고 있슴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교통 표지판


아랫사진은 신라 진영쪽에서 본 보청천의 모습이다.  아마도 그 당시엔 강건너 백제군이 포진하고 있었으리라.
 

현재도 유유히 흐르는 보청천. 이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554년 신라와 백제는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였다. 보청천이 피로 물들었다고 하니 그 치열했던 전투전개과정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굴산성이 백제군에 점령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굴산성에서 배후의 저점산성으로 연결되는 신라의 방어선을 백제가 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저점산성 넘어 삼년산성으로 이어지는 루트상에 신라가 방어진지를 많이 구축하여 지금까지 곳곳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백제와의 전투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저점산성과 굴산성에서 백제 태자 여창의 진군은 멈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 한국전에서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괴군은 낙동강전투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치열한 반격에 발이 묶였고 그 정점의 전투는 백선엽장군이 지휘하였던 다부동 전투였다. 그와 거의 비슷한 양상이 서기 554년 보청천의 굴산성전투였다.

여기서 백제군이 보청천의 굴산성과 저점산성을 못 넘은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바대로 백제 공격군의 병참보급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지역은 신라의 주력군의 지휘본부인 삼년산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곳이다.

또한 삼년산성의 배후로는 거칠부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충주산성의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거칠부장군의 신라군도 이곳 굴산성 전투지역으로 급파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거칠부장군의 휘하 병력은 신라군 중에서도 가장 정예병력이다. 그들은 고구려군과 전투로 단련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칠부휘하의 신라군이 합세함에 따라서 백제 주력군은 진격이 멈추고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고착화 되었을 것으로 군사적 판단을 해 본다.

그 근거로는 이 전투 이후 거칠부장군은 승승장구하고 병부령 이사부의 뒤를 이어서 병부령에 오르고 진지왕때는 실권자로서 군국정사를 모두 보는 상대등에 오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




4. 백제군 수세로 몰리다 - 관산성전투의 공수(功守)전환


관산성 전투 후반기 주전장(主戰場)의 이동 :  굴산성 -> 관산성


굴산성 전투 직후의  백제와 신라  양진영의  분위기를 극화하여 본다면


장면 1 : 삼년산성 신라 최고 지휘자 회의

이사부 : 병부령으로서 이자리를 빌어서 여러 장졸들에게 치하를 드리는 바이오. 일찌기 없었던 최대의 국난을 맞아 목숨을 내던지는 우리 신라군의 용맹함에 대왕마마조차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 하오이다. 이제 백제군의 예봉은 꺽은것 같고 이제 국면을 전환하고 반격을 해야 할 시점이라 사료되오. 기탄없이 말해주기 바라오.

거칠부 : 신 거칠부 아뢰옵니다. 지금 백제군은 병력보충이 안된다는 첩보를 입수했사옵니다. 장기전화 되면서 병력을 차출한 백제귀족세력은 조속히 전쟁을 끝내고 휘하 병졸을 되돌려 주길 원하고 있다 하옵니다.

이사부 : 이제 봄이 다가오니까  농사지을 인력이 필요한 모양이외다.

거칠부 :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이사부 : 백제 성왕을 맞아 싸우던 각간 우덕과 이찬탐지는 어찌 되었는가?

거칠부 : 아뢰기 황송하오나  모두 전사했사옵니다.


(실제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진흥왕 15년 기록은 이렇습니다.

백제 왕 명농(明?)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등이 맞서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여기서 백제왕 명농은 바로 백제 성왕을 말합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관산성 초기 전투당시 관산성, 즉 옥천일대의 군주(軍主)는 각간 우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간이라는 벼슬은 신라 6두품 벼슬중 최고 관직을 말하고 이찬은 각간 바로 다음의 관등입니다.

즉 당시 옥천지역 일대를 관장하는 군사령관이 우덕이라는 말인데 삼국사기에선 "불리하다"고만 설명하였지만 그 후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찿을 수 없고 전쟁 진행과정상 전사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가 격전을 치뤘던 굴산성이 있는 옥천군 청성면엔 지금도 장군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곳이 있는데 어쩌면 각간 우덕과 그 당시 신라군 전사자를 수습하여 합장한 무덤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역사의 상상일까요?
)


아무튼 가야와 왜까지 동원한 백제의 주력 3만은 신라의 방어선인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굴산성전투에서 발이 묶이게 됩니다. 급기야  백제군은 수세로 몰리게 됩니다.  그 상황을 계속 극화하여 보겠습니다.


이사부 : ( 지긋이 감은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흐른다 )

거칠부 : 시신은 잘 수습해서  좋은곳에 장례는 치뤘사옵니다.

이사부 : 이제 우리 장졸에 대한  복수를 할 때가 왔소이다. 여러 장수 모두 지금보다 배가 하여 전투에 임해야 할 것이오.

거칠부 : 상주방면군은 백제편에선 대가야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라 지시하엿사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신라군이 숫적으로는 열세라서 병력 보충이 시급하옵니다.

이사부 : 지금까지 총동원력을 내려서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늙거나 다친 사람외엔 없다는 것 모르오?

거칠부 : 신주의 김무력군이 있지 않사옵니까?

이사부 : (아차 하는 마음에) 신주 김무력이라 하면 작년에 신주에 군주로 임명된 자 말 아니오? 대왕마마가 직접 임명한 곳인데 게다가 고구려가 만에 하나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어찌하겠소?

거칠부 ; 고구려는 걱정 안하셔도 괜찮사옵니다. 지금 그들은 자신들 코가 석자라서 이곳엔 신경쓸 겨를이 없사옵니다.

이사부 : (한 창 생각에 잠긴다) 으음.. 김무력이라...  가야출신인데...

거칠부 : 그러니까 이참에 충성도도 시험해 볼 겸 여러가지가 좋습니다. 김무력이 내려오면 백제의 뒤를 공격할 수 있사옵니다.

이사부 : 그렇긴 한데... 그래도 뭔가 좀 부족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소이다. (뜸을 들이다가) 요즘 성왕의 근황은 아는바가 있소이까?

거칠부 : 길동현(핏골)에서 우리 신라군에 패퇴하고 물러난 후 금산과 추부에서 병력을 추스리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이사부 : (눈을 반짝이며)  허면... 백제태자 여창과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아시오? 본시 백제군은 두갈래로 공격해   왔는데 지금은 백제왕과 태자의 부대가 하나로 합치었는지 아니면 분리 되어 있는지 알고 있는가?

거칠부 : 아직 완전히 합지지 않은 것으로 아옵니다. 태자 여창은 고리산에 진을 치고 있고 백제왕은 우리신라군에 밀린 이후  금산에서 마전으로 이어지는 군영에 진을 치고 있다 하옵니다.

이사부 : 그렇다면 태자의 백제군과 백제왕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로 합치지 못하게끔 길을 차단하시오. 그리고 신주의  김무력군의 이동에 대해서는 대왕마마의 윤허를 얻은 후에 지시토록 할것이오. 무엇보다도 백제왕과 태자의 양군이 합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요. 명심토록 하오.

거칠부 : 명심토록 하겠사옵니다. 삼년산군에서 가장 날쌘 기병을 추려서 길목을 차단토록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다음 사진은  관산성위치에서 바라본  백제 진영의 사진이다. 아마도 관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은  바로 이런 백제의 전선을 주시하면서 전쟁에 임했을 것이다.


▲ 신라 관산성에서 본  백제군 산성의 전경 파노라마  

1번은 태자 여창이 진을 치고 있는 고리산성(환산)
2번은 성왕이 참수된 구진베루  
3번은 백제의 보급기지역할을 한 식장산 줄기      


다음사진은 신라군과 마주하고 있는 백제진영에서 보는 신라진영의 모습이다. 산성의 높이로 본다면 백제진영의 환산성이 신라의 관산성을 내려다 보고 있는 형세이다.


백제진영의 이백리산성에서 본 신라 진영이다. 관산성등 신라의 보루산성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장면 2 : 백제의 태자 여창의 군영 (백제 군사들의 넋두리 소리) 

백제병사 1 : 우라지게 날씨도 덥네 지난 겨울에 시작한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하것네

백제병사 2 : 이넘아 그런소리 말어.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무슨 군소리가 많아?

백제병사 3 : 제길 죽는게 더 낫것어. 이거 사람이 할 짓이 못돼

백제병사 2 ; 이사람아. 죽으면 처자식은 어쩔려구 그래? 고향에 있는 처자식 생각해 봐.

백제병사 1 ; 그러게 내가 미치고 환장하것다고 하는거 아녀?  장가들고 3개월만에 여길 끌려 왔다니까

백제병사 3 : 허긴 나도 마누라가 만삭인거 보고 왔는데 그거 생각하면 ( 고개를 돌린다 )

백제병사 2 : 젠장 야밤에 도망이라도 갈까. 

백제병사 1 : 쉬잇. 누가 듣것어.

백제병사 2 : 들으라지 뭐. 이판사판인데 뭐가 무서워.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가지 아녀?

백제병사 3 : 허긴. 가야에서 온 짜슥들은 아예 장수가 이끌고 돌아갔다지 아마

백제병사 2 : 어디 가야병사뿐인 줄 알어? 산너머 군영쪽은 농사때문에 벌써 돌아간지 오래지 아마.

백제병사 1 : 우리 주군은 지금 뭐하는 거야. 아주 충신이 났어요 충신이 났어. 우리 졸개들 다 죽이고 말이여

백제병사 3 : 이봐. 우리 주군은 충성할 만하지 뭐. 좌평자리 하나 얻었잖여. 그러니께 충성해야 말고. 암.

 

장면 3 ; 백제 태자 여창의 지휘본부

태자 여창 : 지금 상황이 어떻소?

좌평 1 ; 현재 전선은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사옵니다.

태자 여창 ; 금산쪽 대왕마마의 기마부대 소식은 들어온 것 없소이까?

좌평 2 : 관산성에서 신라의 방어선에 걸려서 손실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자 여창 ; 허허.  이거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구려. 아바마마가 이끄는 군과 연합작전도 물거품 되는거 아니요?

좌평 1 : 그러게 말입니다. 신라군의 방어가 워낙 두텁다 보니까 (말끝을 흐린다)

좌평 2 : 우리도 굴산성에서 신라군을 뚫지 못했지 않사옵니까? 대왕마마께서도 혹시나 그런것 같사옵니다.

태자 여창 : 현재 우리 병력은 어떻소?

달솔 1 : 아뢰기 황송하오나 전투에서 죽은 병사보다 도망치는 병사가 더 많사옵니다.

태자 여창 : (얼굴이 불어지며 크게 노한다) 그게 무슨말이요? 도망치는 병사가 더 많다니?

달솔 2 : 문제는 공주에서 사비로 천도하는 과정에 불만이 있던 귀족세력들이 병사들을 철수 시킨 경우가 많사옵니다.

좌평 1 : 지방 귀족들이 자신들의 식솔과 농사일 때문에 그런거 아닐까요?

태자 여창 : (대노하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한단 말이요?

좌평 1 : (고개를 못든다)

좌평 2 :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도 염두해 주셔야 하옵니다.  아군의 사기문제도 그렇고 (말 뒤끝이 흐려진다)

태자 여창 : (전쟁이 길어졌다는 말에 좌평 2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떨구며 한숨지며 말한다) 허긴 지난 겨울에 시작한 전투가 현재 벌써 한여름이 지나고 있으니.. 가야군은 현재 어떻소이까?

좌평 1 : 가야군 8천중에 벌써 절반 이상이 전장에서 죽거나 다쳐고 나머지도 상당부분 이미 철수한 상태이옵니다.

태자 여창 : 허허 이거 큰일이구려 빨리 대왕마마의 군진과 합쳐야 할터인데 전령은 아직 소식이 없소?

달솔 2 : 전령은 이미 보냈사옵니다만 관산성에서 신라가 길을 끊고 있는지라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사옵니다.

태자 여창 : 그렇다면 왜에 좀 더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하는것이 어떻소?

좌평 1 : 왜까지 구원병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워낙 힘들지 않사옵니까? 바다를 건너고 또 왜 조정까지 간다는 것도     현재는 시간도 없고 말입니다.

태자 여창 : 그러면 도대체 뭐를 할 수 있단 말씀이오? 답답하구려 백제가 언제부터 저 보잘것 없는 신라에게 조차 이렇게 끌려 다니게 되었단 말이오? 여러 좌평들 입이 있으면 한번 말을 해 보시오. 말을....

 
해설(나레이터) :

신라의 반격에 밀려서 전쟁초의 진영으로 되몰린 백제군의 상황을 가상으로 역어 본 것입니다. 백제 성왕의 경륜과 카리스마에 훨씬 못 미치는 태자 여창의 입장에선 전쟁에서 수세로 몰리게 되자 여러가지 곤경에 직면하였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자 여창은 전쟁의 피로도 피로지만 리더쉽의 문제등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몸져 드러눕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전령을 통해서 아버지인 백제 성왕의 귀에 들어갔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전쟁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  
   

백제 태자 부여 창이 지휘한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과 저점산성의 신라 방어선을 끝내 뚫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된다. 

신라는 전군의 동원령을 내려서 격전지로 이동하여 병력 손실을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던 반면에 백제는 그렇지 못하였다. 특히 겨울에 시작한 전투는 봄을 지나면서 장기화 되자 지방귀족 소속의 병력은 보충되기는 커녕 이탈조짐까지 보이고 만다.

결국 백제는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주 전장터는 굴산성에서 다시 전쟁발발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후퇴하면서 태자 부여 창은 몸져 드러눕게 된 것이다. 태자 부여창 휘하엔 백제군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야와 왜의 병력까지 함께 있었다. 게다가 태자 부여 창은 백제 귀족들의 열렬한 지원하에 전쟁을 감행 한 것이 아니라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전한 터라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그 심적 압박은 이만저만 크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환산이라고 불리는 고리산의 산성 축조물들은 이때 축성되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리산에서 이백리산성과 노고산성으로 이어지는 식장산 능선을 따라서 많은 보루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의 주 방어선이었다. 고리산성은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그런 위치였다.

또한 이백리산성과 노고산성은  탄현고개를 방비하는 게이트같은 역할을 하는 산성으로서 그 어느곳보다 방어가 엄중하였을 것이다.


관산성 부근 확대. (서화천을 사이로 하여  양쪽 능선으로 양 진영 재편) 삼성산을  재건산이라고도 하는데 이 곳을 현재 관산성터로 비정하고 있다. 관산성터 바로 아래가 구천(구진베루)이다.


성치산성은 백제의 주요 주둔지로서 보급은 물론이고 곤룡재와 닭재를 통해서 대전과 사비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성치산성은 백제산성으로서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거니와 성치산성의 위치는 대전으로 넘어가는 게이트 뿐만 아니라 금산 추부 마전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삼각로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의 진영 맞은 편으로는 신라가 어렵게 찿은 마성, 용봉 삼성산(관산성), 서산성, 구건리 산성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백제와 신라 양진영 사이로는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이 구비구비 흐르고 있고 관산성 바로 아래 돌출된 지역이 바로 구진베루라고 알려진 구천이다. 그곳이 성왕이 전사한 곳이다. 

이것을 좀더 확대한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양진영 사이로 흐르는 서화천은 양군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금산 추부 마전(馬田)의 백제군의 이동로이기도 하다. 즉 성치산성에서 태자 여창의 고리산성으로 이동할 경우 서화천을 따라 가는 교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백제와 신라는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 계기가 바로 백제 성왕의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성왕이 바로 저 구진베루에서 죽게 되었는지 그 역사추적을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자.


이곳이 바로 구진베루라 불리는 곳이다. 벼랑아래로 휘돌아 나가는 서화천을 따라 가던 성왕은 이 언저리에서 신라 복병에 걸려들었다.
 

이러한 첨예한 대치상황에서 어찌하여 성왕은 신라의 관산성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서화천을 따라 가다가 구진베루에서 신라 복병에 걸려 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금으로 치자면 한마디로 비무장 DMZ 사이로 이동한 것과 같은 것인데 군사 논리상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풀어 가고자 한다.




5. 백제 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 그 현장추적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세력판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몇 안되는 역사의 분수령이 관산성 전투에서의 성왕의 전사다.

성왕이 사비궁궐에서 전선의 상황을 보고 받다가 태자 여창이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위문하러 갔다면 절대로 신라의 매복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에서 태자 여창이 진을 치고 있는 환산성(고리성)으로 갔다면 성왕의 전사지인 구천(구진벼루)근처엔 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왕이 전사(戰死)한 곳이 왜 신라군이 바로 빤히 내려다 보는 관산성인가 하는 의문이 필자를 사로잡게 되었다. 그래서 관산성전투를 현지답사로 재고찰하게 된 이유였는데 그것을 이제 사실적으로 재조명토록 하고자 한다.

흔히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의 총지휘는 태자인 여창이 하고 성왕은 궁궐에서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지만 성왕자신도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다.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주력군은 굴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고 마찬가지로 성왕이 이끄는 백제연합군도 충북 영동군의 핏골전투에서 패하면서 금산방면으로 퇴각하였다.


▽ 백제군의  퇴각로



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백제 태자 여창이 주둔하고 있는 고리산과 마주보고 서화천을 경계로 하여 현재의 옥천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서산성 -> 삼양리 토성-> 삼성산성(관산성추정) -> 용봉 -> 마성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마치  휴전선의 GOP삼아 백제군과 대치상태로 접어들었다. 

옥천분지에 신라군의 주력이 집중하자 금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성왕이 이끄는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은 성치산성으로 지휘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 추적의 단서 - 금산군 주부면 마전리(馬田里)

백제의 성왕이 하필이면 왜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는 관산성 근처에서 달랑 호위병력 50명만을 거느리고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서적이나 자료는 그 어디서도 찿아볼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자료에서 단지 삼국사기의 자료만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곳 관산성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여러가지 단서를 찿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옥천과 금산군 추부면을 연결하는 국도에 눈길이 끌렸다. 백제성왕이 전사한 구진베루라는 곳은 분명히 금산쪽에서 옥천쪽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자동차를 제쳐두고 버스를 이용하였다. 버스를 이용하게 되면 자동차를 직접 몰고 갈 때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여러가지 사항을 지역주민들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옥천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금산군 추부면으로 가기 위해 버스안내판을 보니 추부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버스기사에게 물어보니 "마전"으로 가는 표를 끊으란다.

 "마전"

한글로 표시된 것을 보는 순간 뭔가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마전에 내려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게 여쭈어 보았다.

"어르신 여기를 왜 마전이라고 합니까?  "

"외지에서 왔나 보군?

"예, 그렇습니다. "

"여기가 그 옛날부터 말(馬)을 사고팔던 장터가 있었던 동네라서 마전(馬田)이라고 하는 거야"

"아!  그렇습니까? 어르신 고맙습니다"

나의 직감이 맞아 떨어진 순간이었다.  그길로 다시 시외버스에 올라서 옥천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금산에서 옥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충남의 명산 서대산이 한눈에 보이는 가운데 추부면 마전리에서 옥천까지는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을 따라 거의 평탄하게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마전리는 계곡사이의 넓다란 평지를 형성하고 있었으니 말을 기르기엔 아주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이로서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충북 영동의 핏골에서 신라의 결사적인 방어에 막힌 백제 성왕은 가야의 기병을 이끌고 이곳 추부면 마전리로 후퇴하였다가 태자 여창의 주력군과 합류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했을 것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금산 추부면 마전리에서 식장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엔 백제의 주요 산성인 성치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성치산성은 옥천에서 금산이나 대전으로 빠져나가는 바로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성치산성이 위치한 곳은 말동산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데 그만큼 예로부터 말(馬)과는 불과분의 관계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쉽게 백제의 군마 사육장은 성치산성인근과 현재의 추부면 마전리에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관산성전투 당시 백제편에 가담한 대가야는 고분발굴을 통해서 말과 관련된 유물을 많이 전하고 있다. 이런 여러 정황을 토대로 볼때 금산과 마전으로 연결되는 성치산성은 백제의 기병 주력이 포진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옥천에서 금산으로 이어지는 37번국도. 왼쪽이 현재 공동묘지인 연화원이고 바로 말무덤터이기도 하다. 바로 이고갯길에서 신라는 금산쪽에서 공격해온 성왕의 백제군과 혈투를 벌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산군 기록

삼국사기에 보면 관산성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백제의 군마보급지인 금산지역까지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관산성전투는 554년 7월에 끝났는데 그로부터 딱 2달후 백제의 복수전이 있었슴이 삼국유사엔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554년 9월에 백제(百濟)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여기서 진성은 오늘날 금산군 진산면이다. 그만큼 백제로서는 패전속에서도 금산지역만큼은 신라에게 넘겨 줄수 없는  사활(死活)적 지역이었던 것이다. 

백제가 패전한지 2달만에 신라에게 설욕한 동력은 백제왕가(百濟王家)가 아닌 백제귀족세력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백제귀족세력 입장에선 금산지역만큼은 경제적으로 큰이익 달려 있기 때문에 신라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수 없었던 것으로 필자는 군사경제적으로 추론해 본다.

아무튼 추부면 마전리는 백제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의 결정적 단서였다.

▽ 백제의 보급로와 주요 산성 (현재의 주요 국도와 백제의 보급로는 정확히 일치한다)




신라군이 옥천을 장악했어도 신라의 최전선은 삼성산(관산성)에서 용봉 마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성치산성에서 백제 태자 여창이 주둔하고 있는 환산성과 노고산성으로 이어지는 보급루트는 백제가 관할하고 있었다. 이 보급로를 통해서 태자 여창의 백제군과 성왕이 지휘하는 백제군은 서로 유기적 지원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이러한 백제군의 연결고리를 끊어야만 신라군의 작전이 용이해 짐을 신라 지휘부는  판단했다. 그 근거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은 우리 역사서가 아닌 일본서기에 전하고 있다.

"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신라 지휘부는 태자 여창의 백제군과 성왕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연결로를 끊고자 했던 것이다. 일종의 차단을 통한 각개격파를 위한 작전이 진행되는데 여기에 삼년산군의 비장인 고간 도도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말먹이꾼 고간 도도는 삼년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의 정예 기병이라 봄이 합당하다. 즉 기병이 주축이 된 성왕의 백제군에 맞서기 위해선 역시 기병이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군은 일종의 GOP격인 관산성과 이어지는 돌출부 바깥쪽에 삼년산성 소속의 기병부대를 주둔시키고 관산성까지 연결되는 방어 차단막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서기엔 " 길을 끊었다"로 표현하고 있다.


관산성과 구천의 구글지도 - 관산성에서 구천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신라는 차단막을 설치한다.


구천(구진베루)의 끝 서화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을 이곳에선 염장(殮場)터라고 부르고 있다.  그 옛날 관산성 전투당시 전사자를 염을 하던곳이라서 염장터라 불리우는 곳이다.

그 말은 바로 이 염장터가 백제 성왕 일행이 신라 매복군에 걸려 들었던 바로 그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서화천이 휘돌아 나가는 그곳을 백제 성왕 일행이 지나는 순간 그 뒤에 매복해 있던 신라군이 습격했을 것이다.


관산성에서 내려다 본 구천(狗川), 구천이라 함은 흔히 말하는 실개천의 개천을 한자로 적을때 개구(狗)자로 표현한 것인데 현재는 서화천으로 불리고 있다. 

성왕은 굽은벼랑의 현지방언인 (구즌벼루, 구진베루) 밑에서 신라복병에 걸려서 참수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구진베루의 끝자락 돌아가는 부분이 전사자를 염(殮)했다는  염장터이다.  

이곳 구천에서 신라복병에 사로잡힌 백제성왕의 죽음에 대해선 앞서 다룬바 있듯이 우리 역사서보다 일본서기가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일본서기 편찬자중 상당수가 백제 엘리트 출신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와 더불어서 백제 멸망후 왜로 건너간 백제 지배층이 백제 역사서를 함께 가져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를 편찬할 당시 이미 백제는 멸망하였기에 백제 지배층은 일본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면서 일본서기 편찬과정에서 백제의 역사를 함께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미 멸망한 백제보다는 새롭게 몸담게 된 왜의 입장에서 서술하다 보니 왜왕인 천황중심으로 기술했을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는 백제의 신라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녹아 있기에 신라에 대한 서술은 항상 부정적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백제 성왕을 참수하게 되는 신라의 비장 고간도도를 말먹이 노비인 사마노(飼馬奴)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일본서기내용이 전혀 믿을 수 없다거나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우리역사서가 전해주지 못하는 일정부분을 일본서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가 전하는 구천에서 신라복병에 참수되는 백제 성왕의 모습을 다시한번 보자.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다른이름은 곡지이다.

“고도는 천한 노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옵니다”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  다른 기록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 주어 베게 했다”라고 하고 있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수는 없다.”

라고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명왕을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 다른 기록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추어 백제에 보냈다 한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국립박물관 소장 용봉환두대도. 삼국시대엔 칼은 신분의 상징이었고 특히 용봉환두대도는 신라, 백제, 가야, 왜의 공통적인 왕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백제성왕이 참수된 구진베루는 현재 지명이 옥천군 군북면 월전리이다.

월전리는 달골(月谷)과 군전리(軍田里)가 합쳐지면서 월전리(月田里)로 개칭되었다. 군전리(軍田里)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옛날 이곳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군전리라고 이름지어졌다 한다.


성왕 戰死후 신라 백제 전쟁의 급반전

성왕이 신라군의 매복으로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 주둔 성왕 휘하의 백제군은 필사적으로 신라 관산성을 총공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한 신라군의 방어막을 백제는 돌파하지 못하고 만다. 백제 기마군이 돌격을 감행하다가 저지된 그 자리는 말무덤고개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 왜, 가야 혼성군으로 편성된 성왕휘하의 백제군은 아무래도 성왕의 전사로 말미암아 구심점을 상실한 가운데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결과도 말무덤터가 전하는 그대로 백제의 패배로 이어진다.


성왕휘하의 백제군과  태자 여창휘하의 백제군이 서로 합하지 못하게 차단작전을 신라군은 관산성과 구천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나갔다. 구진베루 뒤쪽에 성왕휘하의 백제기병을 막기 위한 삼년산군 소속의 신라 기병이 배치되었고 이는 성왕의 일행을 참수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성왕의 전사소식을 들은  금산, 추부, 마전 지역의 백제군은 관산성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죽은 백제군의 수많은 말로 인하여 현재 말무덤고개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왕휘하의 추부 마전 성치산성 주둔의 백제군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할때 환산(고리산)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태자 여창의 군대는 협공을 왜 안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기에  자세한 내용은 알 방도가 없긴 하다. 그러나 군사적 추론을 한다면 백제성왕이 급히 태자 여차의 군영으로 가고자 했던 점과  태자 여창이 몸져 드러누웠다는 사실, 그리고 전쟁 초기부터 백제귀족의 반대등을 고려해 보면 태자 여창은 고리산성에 주둔한 백제의 주력군에 대한 그당시 이미 지휘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는 신라는 백제군을 양분하고 각개격파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한번  백제성왕이  태자 여창의 군영에 가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백제 본기엔

'성왕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치상 보기 50으로는 신라를 습격하기 어렵다.

이에 반하여 일본서기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행군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수세에 몰리고 있는 형국에서 사사로운 부자간의 정리를 논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좀 부자연스럽다. 물론 아들 태자의 건강이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있는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성왕이 보기 50으로 이동하였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다.


백제성왕의 마지막 이동경로 추적 (백제성왕은 사비궁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슴을 알수 있다)


이 내용의 감춰진 이면을 다시 살펴보면 전쟁초기 백제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에 대한 승리를 장담한 태자였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 정신적 압박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게다가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은 왕 직할부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귀족 소속의 부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게다가 왜병과 가야군까지 함께 구성되어 있으니 젊은 태자입장에선 불리한 전황속에서 군사 정치적 조율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백제 성왕은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봄이 더 현실적이다 하겠다.

이는 비단 태자 여창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이 다시 규합하는 사태로까지도 비화될 소지가 있는 상황임을 성왕은 직감했을지  모른다.

전황보고를 받은 성왕은 사태의 심각성에 해가 지고 있는 저녁무렵임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급히 태자 여창의 군영으로 말을 몰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거리는 성치산성에서 태자 여창의 군영인 고리산성까지는 20km가 안되는 거리다. 말로 달리면 2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기에 백제 성왕은 해가 뉘엇뉘엇 져가고 있슴에도 출발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백제성왕의 머리속엔 어서가서 태자여창 군영의 상황을 점검하고 왜와 가야군 그리고 귀족수하의 지방군에 대한 여러 정치군사적 조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꽊 차 있지나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성왕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로서 군사적 측면으로 고려한다면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신라가 성왕이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길을 끊기위해 집결하였다는 말로 볼땐 성왕의 주 이동루트가 신라군에 간파되었다고 판단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2차대전때 태평양 전선을 시찰하러 가던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정보를 미군이 미리 파악하고  요격한 것과 비견될 수도 있다.

즉, 성왕은 성치산성에서 태자여창의 군영인 고리산성까지는 작전회의차 늘상 다니던 이통통로였기에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측근 소규모 호위병력만을 대동하고 태자 여창의 고리산성으로 이동하다가 신라 기병에 요격당한 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왕의 죽음이다.

반대로 보면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에 백제는 신라군의 이동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성립하는데 이는 정보전에서의 성패가 전쟁의 성패를 가른다는 군사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이다.


관산성전투는 554년 전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보통은 여기까지가 흔히 알고 있는 관산성 전투이야기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워낙 성왕의 죽음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성왕이 전사한 지역인 관산성전투를 554년 백제와 신라의 전쟁인 것처럼 삼국사기에서도 묘사하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그렇고 어지간한 책의 내용도 삼국사기의 원문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성왕 사절지(死節地)로 알려진 구진벼루와 관산성(삼성산)에서 성왕을 비롯하여 4명의 좌평과 사졸 2만9천6백명이 죽은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의 전투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554년 백제와 신라간의 대전쟁중 관산성지역에서 성왕이 전사한 것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삼국사기내용만 본다면 신주의 김무력군이 이곳 관산성에서 성왕의 백제군을 격파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한강유역의 신라군이 관산성까지 오려면 중간에 백제 태자 여창의 군대가 있기에 바로 관산성에 올 수 없다. 

어디까지나 성왕 휘하의 백제군은 주력군(主力軍)이 아닌 조력(助力)이었고 주력은 고리산성(環山城)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태자 여창 휘하의 백제군이었다. 

따라서 신주의 김무력 신라군과 태자 여창의 백제군이 맞붙은 전투가 관산성 전투의 최종 라운드였다. 그곳에서 554년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관산성 전투의 최고의 하일라이트는 이곳 관산성이 아닌 백제 태자 여창의 진영에서 있었으니 그것은 백골산 전투이다. 

백골산. 이름 그대로 백골이 쌓인 전투이다. 이 백골산에서 신라의 신주군주 김무력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삼국의 세력판도를 바꾸게 된다.



6. 김무력의 신라군 백골산에서 백제군을 학살하다


1).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의 군사령부 위치

한성백제의 옛땅을 신라가 차지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장군이 바로 김무력이다.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 즉, 한성백제의 옛땅을 획득하고 그곳을 신주로 삼았다. 그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이가 바로 김무력이다. 신라의 독특한 지역지배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무력 휘하 부대의 주둔위치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新州)뿐만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과 금현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요충지였다. 바로 그곳에 다름아닌 김무력 휘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이 부대가 백제 태자 여창의 주력군을 배후에서 기습하여 관산성전투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 신라가 설치한 신주(新州)지역인 한성백제 옛땅은 신라입자에서는 최전방중의 최전방이다. 보통 최전방엔 군최고사령부가 위치하지 않고 보다 후방에 위치하게 된다.

삼국사기 진흥왕 11년조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명을 하여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명을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획득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상 김무력이 획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진흥왕 11년엔 이미 이사부는 고령인데다가 실전에 참여하지 않는 병부령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직책으로 표시해 본다면 국방부장관 이사부->육군참모총장 거칠부 -> 제 1야전군 사령관 김무력으로 보면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이미 앞서서 필자는 도살성과 금현성이 있는 지역은 오늘날 충북 증평과 진천임을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역은 진천이다.

진천이 어떤 곳인가? 김유신장군의 탄생지이다. 

여기서 잠깐 김유신장군 탄생비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진천의 만뢰산엔 김유신장군의 태실이 위치하고 있다.


진천의 길상사.  김유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진천의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도당산성 뒤 봉화산에서 본 진천읍 전경. 오늘날도 군사적 위치를 엿볼 수 있는 군의 진지 표시판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의 첫번째 장을 보면 김유신장군이 태어난 배경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파격적이다. 한마디로 자유연애를 통해서 잉태된 것이 김유신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김무력의 아들인 서현은 어느날 길에서 갈문왕 입종(入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눈이 딱 맞아 버린다. 그래서 한마디로 사고를 치고 만다.

이것을 알아버린 만명의 아버지인 숙흘종은 자신의 자신의 딸인 만명을 별체에 가둬서 하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서현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벼락이 쳐서 별채의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지키고 있던 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만다. 그러자 만명은 뚤린 구멍으로 도망쳐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진천)으로 달아났다고 전하고 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여자친구 아버지가 여자친구를 가둬버리자 그 집에 쳐들어가서 여자친구를 빼내서 같이 도망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자니 천둥소리만큼 얼마나 시끄러웠을지는 뻔한 일 아닌가?  지금생각해도 좀 파격적이다. 

그런데 도망간 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오늘의 충북 진천이다. 아버지(김무력)가 지역사령관으로 있던 곳으로 도망간 것이다. 좀 비약해보면 어쩌면 아들 여자친구를 구해내는데 아버지인 김무력도 어느정도 힘을 써 줬을지도 모르겠다.

시쳇말로 아들이 여자친구를 꼬셔도 왕족 딸을 꼬셨으니 아무튼  김무력 입장에선 아들이 애기까지 밴 여자친구를 데리고 도망왔는데 어쩌겠는가? 기록에 보면 서현은 만노군 태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버지 김무력의 영지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좀 빗나간 이야기이지만 김유신장군이 화랑인 시절 사랑에 빠졌던 천관녀와의 관계도 어찌보면 부전자전일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김무력장군이 지휘사령부를 두고 있던 지역은 새롭게 설치된 신주(新州)인 한강하류지역이 아니라 오늘날 진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하류로 진출하는데 중간기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진천지역이 관산성전투에서 또 한번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2). 김무력 군의 투입 이동로 추정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신라의 정예부대이자 신라팽창의 선봉장이었다. 특히 한강중하류지역을 관할하는 특임대성격까지 지니고 있는 부대였기에 관산성초기 전투에선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절박한 위기에 몰리게 된 신라는 김무력휘하의 부대까지 관산성에 투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사항을 삼국사기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사람과 사졸 2만9천6백여명을 베었으며,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인 일본서기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신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던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완전히 기습받은 형국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기록은 왜왕 흠명천황15년조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현장이 옥천 관산성으로 김무력의 신라군의 이동로 추정

관산성 전투지역으로 출동 명령을 받은 김무력 군은 오늘날 진천->청주->신탄진->대전->백골산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우리나라 지형상 큰 산줄기나 큰 강줄기는 거의 변하지 않는 관계로 고대나 현재나 주간선도로는 크게 변화가 없다. 그래서 김무력 군이 진천지역에서 옥천지역으로의 이동로를 추정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진천에서 대전으로 이어지는 중부고속도로와 거의 일치하는 이동로이다.


3). 백골산성의 발견

역사의 분수령인 관산성전투를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서 맞딱트린 첫번째 문제는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자들마다 관산성전투지역을 옥천의 삼성산일대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백제 태자 여창이 성을 쌓고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고리산(환산)일대라고 하는 견해도 있는 등 정확한 지역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백제태자 여창이 진을 쳤다는 고리산일대를 답사해 보았으나 그 역시 3만의 대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서에서도 설명하였듯이 현지답사 결과 고리산과 이백산성 그리고 식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백제의 산성들 역시 감시초소 성격으로써 대규모 병력주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환산(고리산성)일대의 상세지도를 유심히 설펴보던 중 환산성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지 않은가? 

그래서 찿아보았더니 역시나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백골산(白骨山)이었다.

우리나라 지역명을 보면 백골, 핏골이라는 명칭이 의외로 많다. 거의 대부분 전쟁과 관련된 지명인데 대체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때 붙여진 이름이 태반이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환산성 뒤편의 백골산의 유래를 여러 자료를 통해서 찿아보았더니 그 옛날 백제와 신라군이 이 지역에서 혈투를 벌였을때 생긴 지명임을 밝혀내었다.


백골산성 안내 표지판

또한 백골산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백골산성이 존재해 있었고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적어보면

시도기념물 종목 : 시도기념물 22호
명칭 : 백골산성(白骨山城)  테뫼식
분류 : 성지(성곽)
지정일 : 1991.07.10
소재지 : 대전 동구 신하동 산13
산성 둘레 약 400미터

백골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해발 340m의 백골산 정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400m이다.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다.

옛 기록에 나오지 않다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백골산(白骨山), 대전(大田)의 동약4리(東約四里) 옥천군계(沃川郡界)를 이루는 산상에 석뢰로써 주위(周圍) 약이백이십간(二百二十間)"이라 하였고 <전국유적목록>에는 거의 그대로 옮겨 적었으며 <문화유적총람>에는 "높이 344m의 백골산에 있는 산성으로 정상부에 석성이 있는데 백제때 축조된 것이라 하며 주위 약 396m이다. 백제와 신라가 싸워서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고 하였다.

백골산은 대단히 험한 산세를 갖추고 있는데, 성벽은 산 정상부에 지형을 따라 축조하였고 성벽이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례로 완정히 무너져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산성은 백제측의 전략거점인 계족산성과 동쪽으로는 신라측의 유명한 관산성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함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은 가파른 지형에 쌓여진 까닭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부분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백골산성의 서쪽으로는 백제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이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유명한 관산성을 끼고 있어 백제가 신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어떻게 생긴 산성인지 그 일대 지형은 어떤지 검색해 보았으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 볼 수는 없었다.

군사적 식견이 없으면 대체로 산성자체만을 보기 때문인데 인터넷검색으로서는 백골산성의 가치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군사적가치로서의 산성은 산성자체보다는 주변의 지형지세와 연결성이 더 중요한데 그것을 책상머리에서 인터넷에 올라온 몇장의 사진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증에 현지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백골산성 현지 답사


지도상에서 보는 환산과 백골산의 위치


지도상으로 백골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주 작은 소로로 표시되어 있다. 차량네비게이션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검색해보니 백골산성보다는 인근에 있는 대청호 주변의 김정선생유적지로 찿는 것이 쉽다.

차를 몰고 도대체 백골산이 어떠하길래 1500년이 넘도록 무시무시한 이름을 간직하고 내려오게 되었는지 그 모습을 보러 달려갔다.

고속도로에서 대전시가지로 빠져나와서 네비게이션은 대전 동부지역 간선도로로 안내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들어온  모습은 바로 70년대 건설된 경부고속도로의 대전터널 연결 고가도로였다.

요즘은 새롭게 난 경부고속도로로 지나기 때문에 이 고가도로를 이용할 일이 없는데 옛날 경부고속도로의 대전터널 고가도로를 보는 순간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난다. 어렸을때 고속버스를 타고 지나던 일, 경부고속도로 화보에 항상 등장하던 아치형 대전터널 고가도로였다.

이 터널 밑으로 네비게이션은 길을 안내했다. 구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을 지나자 바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대청호반의 모습이었다.

대청호반의 옆길로 난 샛길로 접어들어서 좀 달려가자 지도상에 그려진 산봉우리 두개가 보였다.  그것이 바로 하나는 꾀꼬리봉이고 또하나가 백골산이다.  

저녁놀 무렵 대청호반과 어우러진 백골산의 풍경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동안 숫하게 경부고속도로로 지나쳐왔던 그 대청호반의 바로 그곳에 백골산성이 위치하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옛 경부고속도로상에서 본 대청호의 모습 (대청호가 없던 삼국시대엔 이 곳은 보다 넓은 초원지대였을 것이다)


대청호와 연결되는 차도에서 본 백골산의 전경 (백골산 정상부의 산성까지는 매우 가파른 숲길을 올라가야 한다)


오늘날 대청호반과 이어지는 구릉과 바로 이어지는 높다란 백골산의 모습은 그 옛날 백제의 대군이 주둔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백제의 전초기지인 환산의 고리산성이 바로 코앞에 있고 백제의 주력군이 주둔할 수 있는 넓다란 구릉과 환산과 백골산을 끼고 돌아가는 금강의 맑은 물은 3만 백제군의 충분한 식수원이었으리라.

역시나 전투현장의 현지답사만큼 좋은 안내서는 없음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 계기였다.


5). 백제 주력군 주둔지의 치명적 약점

백골산 현지답사를 통해서 마침내 관산성 전투의 마지막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신라의 관산성을 굽어보는 백제의 최전초 기지인 환산 고리산성을 앞에 두고 백제 주력군은 백골산성 뒤편의 넓다란 대청호반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 약점을 백제지휘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백골산 일대는 관산성일대의 신라군을 상대로는 최적의 주둔지였지만 금현성과 도살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는 등뒤가 그대로 노출되는 치명적 위치였던 것이다.


신주의 김무력 신라군은 환산과 백골산 일대에 주둔중인 백제군의 주력을 배후에서 기습공략하였다.


김무력의 신라군이 백제군 주력을 배후에서 공략에 성공하자 관산성(옥천)일대에 있던 신라군은 전격적으로 백제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협공하게 되자 백제군은 완전히 포위공략에 빠졌다.


550년 신라가 차지한 금현성과 도살성이 관산성 전투에서 또 다른 비수로 다가와 백제군을 도륙낼지는 아마도 꿈에도 몰랐었으리라. 게다가 식수원이었던 금강은 배후를 기습당한 백제군에게는 도망갈 길조차 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 된 것이다. 

또하나 주목할 점은 이곳 백골산의 주둔 백제군은 주 병력이 기병이 아닌 보병 중심으로 편재되었을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백골산과 연결되는 탄현 고갯길은 기병이 작전하기엔 너무도 좁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제의 기병은 주로 성왕이 이끄는 부대쪽으로 편성되었을 가능성은 앞서에서 기술 한 바이다. 

현재 마달령의 유래를 보더라도 탄현자체가 신라의 침입을 막는 가장 중요한 지역임은 백제의 성충이 언급한 그대로이다.

말 두필이 연이어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바로 탄현고갯길 이기에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백제군은 보병중심이었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6). 백골산에서의 대학살

신라조정의 명령을 받은 김무력 군은 성을 지키는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급히 관산성전투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편재는 기병중심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신속한 이동이 필요했고 또한 이 지역은 과거 고구려의 기병을 주로 상대하였던 지역이기 때문에 전투의 양상또한 기병중심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삼국사기에도 보면 김유신장군이 도살성에서 신라의 기병을 훈련시키고 휴식하게 한 기록이 있는 만큼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무력이 이끈 부대는 기병편재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하겠다.  

실제로도 백제 성왕을 참수하였던 김무력 휘하의 부대도 삼년산군의 기병 출신 고간 도도임을 본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보병중심의 백제군과 기병중심의 신라 김무력군, 더우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배후를 기습당한 백제군으로서는 신라 김무력의 기병을 상대로 전투자체가 불가능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때의 전황은 백제 지휘부가 제대로 지휘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였다. 백제성왕은 신라복병에 걸려서 참수된 상황이고 게다가 태자 여창 또한 몸져 누운 상태였으니 백제군의 상태는 최악 그자체였다.

이러한 모습을 글로만 표현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다. 그래서 관산성 전투의 마지막 부분인 백골산전투에 대한 기술에는 많은 시간적 갭이 있었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글을 쓰는 것이 거의 학살에 가까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지 전혀 머리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살수대첩모형도를 보고 있자니 그 지형지세가 백골산 일대와 판박이 아닌가? 


대청호반과 우측의 백골산의 파노라마 전경사진. 바로 이지역에  백제의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다음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배경이 너무도 흡사하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살수대첩의 가상 모형으로 전시된 디오라마이다.
(백마를 탄 장군이 을지문덕장군으로 표현되어 있다)  위의 대청호반과 백골산의 파노라마사진과 비교해보면 거의 흡사하다. 아마 백골산 전투당시 김무력장군도 저렇게 지휘했을까?


아마도 기병중심의 신라 김무력군은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백골산 뒤쪽의 백제군 주력을 디오라마의 모습처럼 거의 일방적으로 공격했을 것이다.


전투의 현장을 리얼하게 표현한 디오라마


백제 태자 여창이 지휘하던 백제군 주력은 안심하고 무방비 상태로 백골산 뒤쪽의 구릉지대에 주둔하고 있다가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급습당하자 한마디로 퇴로가 차단당한 형국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옥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은 김무력이 백제군 주력을 배후에서 공략하자 바로 호응하여 백제 태자 여창이 지휘소를 꾸리고 있던 환산과 식장산으로 연결되는 백제 방어라인을 그대로 돌파해 버린 것이다.

이러니 백제군은 완전 포위된 채 신라군에 거의 학살되는 전투양상을 보인 것이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백제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관산성 전투의 최종기록이다. 즉 백제 성왕이 관산성인근에서 참수되고 백골산 배후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군 주력은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참살되었던 것을 말한다.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았을 때 삼국사기가 전하는 관산성 전투의 결과는 전혀 과장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서기 550년 나제동맹하에서 신라가 금현성과 도살성을 차지하게 되고 553년 한성백제 옛땅에 신라가 신주를 설치하면서 나제동맹이 파기되고 신라와 고구려가 은밀히 손을 잡게되자 그에 대한 백제의 응징으로 촉발된 전투가 관산성 전투였다. 

서기 553년 겨울 12월에 백제의 선공으로 신라의 함산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던 백제는 충북영동의 핏골전투와 옥천 굴산성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에 막혀서 퇴각하고 그 와중에 관산성부근에서 백제성왕이 신라군에 참수되었던 관산성전투는 서기 554년 7월 신주의 김무력 신라군이 백골산전투에서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인해서 백제는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또한 백제편에 섰던 대가야는 결정적으로 신라의 보복공격을 받아서 관산성 전투(554) 이후 562년에 신라 이사부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5세기초 광개토대왕의 남정이후 또 한번 동북아의 국제역학관계가 변화하게 된 것이었다.



무녕왕능 발굴 이후 최대의 발굴로 평가되는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능산리고분 인근의 왕흥사터에서 발굴되었다.
백제성왕의 아들 태자 여창(위덕왕)이 세운 왕흥사절터에서 발굴되었기에 백제성왕을 추모하는 유물로 판단하고 있다.
어찌보면 관산성전투가 낳은 걸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백제 대향로 발굴당시의 모습

태자 여창은 자신의 아버지인 백제 성왕이 잘신의 잘못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관산성전투 패전후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중신들의 만류로 출가하지 못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 백제대향로가 발굴된 바로 근처에서 창왕(위덕왕)의 명문이 세겨진 백제사리감도 발굴되었다. 백제 공예품의 진가를 알수 있는 그런 유물(국보)이다.




출처 : 고성혁의 역사추적 '관산성전투'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folder/303.html?m=l&p=2&tc=31&tt=1223189146&pc=5

 



  

Comment +2

  • DH 2019.10.14 10:51

    잘 봤습니다. 저도 전쟁사에 관심이 많지만 이렇게 답사하시면서 연구하시다니 놀랍습니다.
    최근에 이성계장군의 황산전투에 관심이가서 논문도 읽고 한번 가서 보기도 했는데 그냥 훑어보는 수준으로 그쳤습니다.
    이렇게 쓰신 글들 편하게 읽을수 있어 감사합니다.

  • 구름에달가듯이가는나그네 2020.04.05 09:48

    삼국사기에 신라에 그렇게 많은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에 의문을 품고 여기저기 둘러보는중~ 왜구의 실체가 일본인이 아닌 가야계 아님 백제계 사람들로 추측만 하다
    이글을 읽어보며 가야계 사람들일것이라는것을 한번 추측하게 됩니다
    관산성 그 현장으로 가봐야 될것같은 그 실마리를 한번 찾아볼까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