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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삼국시대

6. 관산성 전투 당시의 신라 백제의 산성 분포

2008/08/20  ◆ 고성혁의 역사추적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19930



관산성 전투당시의 신라 백제의 산성 분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에 기록된 관산성 전투는 현재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옥천 삼성산 일대만의 전투는 아니었다는 것이 현지 답사를 통해 알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필자가 역사현장, 특히 역사에 기록된 전투현장을 찿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첫번째 이유는 그 현장을 직접보면 책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 그리고 책이 전하지 못하는 것들을 금새 찿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관산성 전투도 역시 마찬가지다. 관산성 전투를 언급하는 여러 책들을 보면 속된 말로 모두가 거기서 거기다. 내용이 거의 같다.

물론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등 옛날 자료를 토대로 하기 때문에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마디로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책을 통해서만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라고 나는 보는 것이다.
 

관산성 전투는 역사이기 이전에 분명한 전투의 기록이다. 따라서 전쟁이나 전투기록은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해서 그 분석과 해석은 분명하게 군사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번 관산성전투의 현장에서 본 바 역시 그랬다. 현대그룹 창업자이신 고 정주영회장이 늘상 강조하던 현장중시의 경영이 역사의 현장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그 핵심이 맞닿아 있다 하겠다.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삼성산 정상에 직접 올라가 보고 그 협소함과 그 곳 주민이 전해 주는 그 옛날 전쟁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관산성 전투에 대한 관점을 달리 하게 되었다. 특히 관산성 주변의 여러 산성에 대한 정보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하였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관산성 주변, 더 나아가선 백제와 신라 접경지역의 주요 산성을 찿아보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불과 50여년전의 6.25 전쟁도 서로 뺏고 빼앗기던 고지쟁탈전 아니었던가?

하물며 삼국시대는 산성중심으로 군사는 물론 생활이 이어나갔다는 점을 고려해 볼때 주변 산성에 대한 조사는 당시 백제 신라의 병력배치와 이동등 제반 군사활동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무릇 전투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적군과 아군의 병력배치가 어떻했는지 그것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 대해선 우리의 역사서엔 뚜렷하게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다시금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여러 서적을 살펴보았으나 그 어디도 자료가 나와 있지 않았다. 설사 나와 있다 하더라도 추측에 불과하고 군사적 관점에선 앞뒤가 맞지 않아서 나 스스로 새로운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방법은 우선 옥천일대의 산성을 조사하고 그 산성과 지역에 얽힌 유래를 찿아보고 그 조각조각의 퍼즐을 군사적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옥천과 대전일대의 산성을 찿아보니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천문화원자료에 따르면 옥천일대만 하더라도 무려 42개의 삼국시대의 토성과 산성 유적이 있다고 나온다. 한마디로 옥천일대는 산성의 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는 대전일대의 산성이다. 계족산성과 노고산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산성의 이름이 나온다. 순간 유레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관산성전투의 재구성에 가속도가 붙는 듯한 기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관산성전투 직전  신라와 백제의  대치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산성의 분포이다.
 

우리나라 그 어느지역보다 옥천은 산성이 많다. 막상 조사해놓고 보니 많아도 너무 많다. 옥천일대의 산봉우리마다 산성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것만 해도 그 당시 신라와 백제가 이곳에서 대치하고 있는 정도를 산성만큼 극명하게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여러 자료에서 찿은 산성의 위치를 주로로 찿고 그것을 구글어스 지도에 하나하나 마킹할 때까지도 전체적인 윤곽이 보이질 않았었다. 그런데 다 완성해 놓고 보니까 신라와 백제의 산성배치만 놓고서도 어떻게 전투가 진행되어 갔는지 대충 감을 잡을 만 했다.

신라의 산성은 옥천분지를 중심으로 해서 금강 동북방향쪽으로 밀집되어 있고 백제는 대전동쪽 식장산 능선을 타고 주욱 산성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라는 옥천지역 관산성에 언제쯤 진출하게 되었나?


신라군의 전진배치를 보여주는 그림. 원래 신라는 자비마립간 시절 삼년산성이 군사중심으로 삼고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게된다


신라 산성의 특징은 배후에 신라군의 사령부라 할 수 있는 보은군 삼년산성을 배후로 금강까지 점차적으로 진출하면서 소백산 넘어 신라의 영역을 점점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옥천과 보은을 연결하는 도로는 현재도 19번 국도가 이용되는데 그 라인상으로 이름모를 산성이 많이 있다.

그렇게 신라의 영역이 점차로 백제진영까지 내려오면서 금강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의 새로운 국경선으로 상당기간 안정화 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그 이유는 백제성왕과 신라 진흥왕 시절 본격적인 충돌전까지는 나제동맹은 거의 100년넘도록 지속되었기 때문인데 신라의 전초기지인 보은에 삼년산성을 서기 470년인 자비마립간 13년에 쌓았을 때도 신라와 백제간은 충돌이 없었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신라 자비마립간 다음 왕인 소지 마립간때인 서기 486년에 수리했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통해서 신라가 금강 언저리인 굴산성을 수리하고 주둔할 때까지만 해도 백제와 신라간에는 충돌이 없었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나제동맹 시스템은 원활하게 작동되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다가 신라가 백제의 바로 코앞인 옥천분지까지 진출해서 관산성 서산성 삼양리 토성까지 차지하게 되자 그 때부터 서서히 백제가 신라의 저의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금강 동북쪽 보은 방향의 신라 산성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군사시설로 볼 수 있으나 백제의 코앞인 관산성이나 구건리 산성등은 고구려의 남하보다는 백제에 대한 견제차원의 산성으로 군사적 판단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백제 동성왕(무녕왕의 이복 형으로서 동성왕의 다음이 무녕왕이다)때 탄현에 목책을 설치한다


실제로 삼국사기 동성왕 23년 7월 기록에는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동성왕 시기는 백제의 수도가 지금의 공주인 웅진이던 시절이다. 백제가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는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웅진시절 백제는 정변이 그만큼 많았던 시절이었다.

동성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무녕왕때 잠시 안정을 취했지만 웅진백제는 고구려만을 신경써도 힘들 판국에 동성왕이 탄현에 고구려가 아닌 신라에 대비해서 탄현에 목책을 설치했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점이 기존의 역사서에선 간과하고 그대로 넘어간 면이 없지않아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금강을 넘어서서 관산성, 즉 옥천일대까지 신라가 진출한 시기를 가늠하는 것은 동성왕때 탄현에 목책을 설치했다는 것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신라 백제의 국경선이 금강과 보청천을 따라 형성되던 것이 관산성 바로 앞을 흐르는 서화천, 즉 백제 성왕이 죽은 구천일대의 개천을 경계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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