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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세계사

WW2 태평양전쟁 - 미미한 결과 그러나 놀라운 용기 - 두리틀 특공대

august 의 軍史世界


상상과 현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하와이로부터 들려온 소식에 온 세계인들은 놀랐고 특히 미국인들은 경악을 하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태평양의 미 해군이 순식간 코피가 터졌다는 사실은 미국인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을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 미국인들은 순식간 충격에 빠졌습니다 ]


진주만의 기습이 있은 후 곧바로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한 미국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여 연합국 측의 군수공장이 됨과 동시에 태평양은 물론이거니와 대서양건너 유럽에 까지 엄청난 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여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결국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도발을 감행한 일본은 실컷 얻어터지고 핵폭탄의 뜨거운 맛을 본 후에야 살기 위해 싹싹 빌게 되었습니다.


[ 결국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일본은 패망하였습니다 ]


그런데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 일본의 일격으로 미국이 전대미문의 피해를 본 직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곧바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여 일본을 쉽게 굴복 시킬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였습니다. 

당시까지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니 감히 원숭이같은 일본놈들이 겁대가리 상실하고 어디에다가 싸움을 걸어?" 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 전쟁이 개시되자 막연히 일본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질 않았고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패배, 패배 그리고 패배였습니다. 

진주만기습 후 동남아로 진격을 개시한 일본에게 영국의 동양함대가 수장당하고 난공불락 요새 싱가폴이 함락되었으며 필리핀의 미군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일본에게 항복을 하는 치욕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미국인들의 실망은 대단하였으며 정치인들도 군부의 무능을 질타하였습니다.


[ 막연한 기대와 달리 미국은 패전만 거듭 하였습니다 ]


당연히 이런 질타를 받은 미군 수뇌부의 심기 또한 편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인들이나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당시 미국이 일본을 응징할 방법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일본과 가까운 동아시아에 주둔한 미군의 병력과 장비는 사실 너무 형편없어 감히 대적도 못할 정도였고 본토 또한 제대로 된 전쟁준비를 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위정자들은 심기가 몹시 불편하였으나 실질적인 응징수단이 없었습니다 ]


당연히 당시에는 오늘날 전략폭격기나 ICBM 처럼 미국에서 일본을 직접 타격할 수단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전선을 맞대고 땅따먹기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바다에서 적의 주력을 수장시켜 일본을 대외적으로 고립시키고 차츰차츰 압박하여 들어감으로써 항복을 유도하여야 하는데 문제는 해상전력에서 미국이 일본에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진주만기습으로 태평양함대의 전력 상당 부분이 와해되었습니다 ]


전함세력은 진주만에서 순식간에 박살이 났고 항공모항 전력도 중형항모기준으로 6 : 4의 열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개전과 동시에 태평양을 휘젓고 다니는 일본의 해군항공 전력에 비하여 미국의 전력이 절대 열세로 판가름 났기 때문에 즉시 반격은커녕 일본의 공세를 겨우겨우 막아내기에 급급할 정도였습니다.


[ 미국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


이런 상황을 대등하게 혹은 우세하게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였으나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기다려 주지 않았고 복수를 주문하였습니다. 

군부도 뭔가 획기적인 대책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비록 현재는 밀리고 있지만 자신감까지 잃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고 군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대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는 이


결국 미국이 찾아낸 방법이라는 것은 바로 ' 이에는 이' 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진주만 기습을 당하여 충격을 받았다면 미국도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폭격을 가하여 복수한다는 단순한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작전을 구상하면서도 그 전술적 효과에 대해서는 미군 당국도 그리 신통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 미국은 함무라비 방식으로 복수를 생각합니다. ( 폭탄을 투하하는 미국의 함상 폭격기 SBD Dauntless ) ]


일본의 경우는 최대한 기습의 효과를 살려서 심리적인 전과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미국 태평양함대를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적인 성과까지 이루었지만 미국이 일본에 폭격을 가한다면 이만큼의 전과를 얻기는 사실 어려웠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이상 일본은 미국의 역습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어대책을 세워 놓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전쟁이 개시되자 일본의 감시망이 강화되었습니다 ]


그것보다도 현실적으로 일본본토를 폭격할 마땅한 장소와 장비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이 엄청난 피를 흘려가면서 이오지마나 오키나와와 같은 섬을 탈취한 이유는 일본본토를 폭격하기 위한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당연히 일본본토에 가까운 미군 비행장이 없었고 B-29 처럼 장거리 항속이 가능한 폭격기도 없었습니다.


[ 전쟁말기 같은 전략 폭격은 엄두도 내지 못할 때였습니다. ( B-29 비행대의 고베 맹폭장면 ) ]


그렇다면 방법이 진주만 기습 때의 일본처럼 미국 항모전력을 한곳에 모아 일본 본토까지 접근 시켜서 폭격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자살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일본의 해상 감시망을 뚫기도 힘들뿐더러 설령 뚫었다하더라도 수적으로나 성능으로나 미군의 해군항공 전력이 하늘에서 제압당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그나마 보존 된 항모전력을 잃는다면 미국은 하와이까지 포기 할 지도 모를 위험에 닥칠 수 있었습니다.


[ 진주만 급습에서 미국의 항모전력은 참화를 피했고, 최대한 보존시켜야 했습니다 ]


하지만 지체 할 수 또한 없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 권력자부터 뉴욕 할렘가의 빈민들 모두가 복수를 외치고 있었음에도 연이은 미군의 패전으로 미국민과 미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어찌 되었든 반전을 위한 기회를 잡아야 했고 설령 그 효과가 보잘것 없다하더라도 일본을 응징하는 제스추어는 취하여야 했습니다.


[ 미국은 상징적인 군사행동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


이러던 중 해군성의 작전참모인 로우 ( Francis S. Low 1894~1964 )대령은 다음과 같은 구상을 하여 군 당국에 제안을 합니다. 

"항공모함을 최대한 일본본토에 근접시켜 폭격작전을 하되 일본의 감시망 밖에서 폭격기를 이륙시키면 항모의 안전도 기할 수 있고 폭격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항모 탑재 폭격기들은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육군이 보유한 장거리 폭격기들을 항모에 탑재하여 작전에 나서면된다 "


[ 육군이 보유한 폭격기를 이용하자는 의견이 제시됩니다. ( 전쟁초기 미 육군의 중폭격기였던 B-17 Flying Fortress ) ]


육군의 장거리 폭격기를 항모에 탑재하여 작전한다는 단순한 구상은 의외로 지휘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세부 실행구상 단계에 착수합니다. 

그런데 막상 작전계획을 짜다보니 미 육군이 보유한 폭격기들을 항공모함에서 이함 시키는 것이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더더구나 작전 후 귀환하여 착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 아놀드 장군은 해군의 제안을 적극 수용합니다 ] 


결국 한계에 다다른 해군은 라이벌 의식이 강한 육군항공대를 찾아가 협조를 구합니다.  비록 평시에는 자존심 경쟁에서 질수 없는 맞상대이지만 조국의 위기 앞에서 육군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해군의 작전안을 들고 찾아온 로우대령 일행을 맞은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 아놀드 ( Henry H, Arnold 1886~1950 ) 장군은 묵묵히 제안을 듣고 짧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이 작전은 반드시 실행되어야합니다."

 


비장한 임무


아놀드 장군은 즉시 부하인 두리틀 ( James Harold Doolittle 1896~1993 ) 중령을 불러서 해군의 제안을 설명하고 즉시 실행에 옮기라고 명령합니다. 

두리틀은 이 작전이 결코 승무원들의 생환을 보장 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미군 중에서 제일먼저 일본에게 복수를 가할 수 있는 기회가 자기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 명령을 받은 두리틀은 가슴이 뛰었습니다 ]


노련한 조종사 출신인 두리틀은 B-25 Mitchell 中型폭격기를 개조하면 충분히 항공모함에서 이함이 가능 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명령을 받은 그는 곧바로 비밀리에 대원들을 선발하여 B-25를 이용하여 150m 거리에서 이함 하는 훈련을 반복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선발된 대원들은 자신들이 비밀스런 임무에 투입 될 것뿐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 짧은 거리에서 B-25 를 이륙시키는 특별 훈련을 반복합니다 ]


1942년 2월 2일 노포크 Norfolk 해군지기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호네트 ( USS CV-8 Hornet )의 승조원들은 갑판 위에 있던 함재기들이 모두 치워지고 B-25폭격기 2기가 실리는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육군 항공대소속의 이들 폭격기들은 항공모함에 실리기에 덩치가 너무 컸는데 그렇다고 단순히 넓은 갑판을 이용하여 멀리 싣고 가기위해 실린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 B-25 Mitchell 中型 폭격기 ]


B-25폭격기와 이들을 조종할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들을 탑재하자마자 호네트는 인근 해역으로 출항을 나가 이함 훈련을 실시하여 설마 하던 호네트의 승조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시까지 B-25처럼 거대한 비행기를 항공모함에서 이함 시켜 본적도 없을뿐더러 더구나 그동안 해군 비행대와 상극인 육군 비행대가 항공모함에 탑재하여 훈련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선발된 두리틀 폭격비행대 요원들의 훈련모습 ]


호네트에 탑재 된 B-25는 좁은 항공모함에서 이함이 가능하고 항속거리를 최대한 길게 하기위해 우선 동체에 장착 된 자위용 기관포탑과 무전기는 물론 폭격조준기 또한 제거한 대신 연료탱크를 설치하였고 저공으로 침투하여 육안으로 폭격하도록 개조된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 오로지 항모이륙 후 장거리 폭격만을 위한 최소한의 장비 외에 모든 것을 제거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장거리 폭격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개조가 되었습니다 ]


두리틀이 B-25폭격기의 이륙 및 저공 침투를 통한 육안 폭격훈련이 완료되었음을 보고하자 미군 정책당국은 도쿄와 나고야의 도심과 공업지대 등 주요한 10곳의 타격지점을 선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42년 4월 2일 개조한 16기의 B-25폭격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호네트가 8척의 호위함을 이끌고 샌프란시스코항을 빠져나와 서서히 그러나 일본을 향한 역사적인 출항을 개시합니다.


[ 16기의 B-25를 탑재한 항공모함 호네트 기동함대가 출항을 개시합니다 ]


두리틀은 항모 출항 후에 그동안 훈련에 열심히 임하였던 승무원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앞으로 임하여야 할 작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귀관들 ! 우리는 이제 일본의 심장을 폭격하러 간다."

이 말을 들은 80명의 대원들은 순간 술렁였습니다. 그들은 뭔가 중요한 임무에 투입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 두리틀은 대원들에게 비장한 브리핑을 합니다 ]


두리틀의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우리가 탑승한 호네트는 최대한 일본 본토까지 접근할 것이고 우리는 여기서 이함하여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폭격한다. 그러나 함대는 비행대 이함 후 곧바로 회항 할 것이고 우리는 폭격 후 일본을 횡단하여 중국으로 날아간다. 만일 요격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도 알아서 귀환하도록 하여야 한다. 귀관들의 안전을 절대로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작전이므로 이 임무에서 빠지기를 원한다면 빠져도 좋다."

 

복수혈전
  
이러한 두리틀의 비장한 작전 브리핑을 받은 승무원들은 항공모함이 떠나갈 만한 환호로써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드디어 진주만의 복수를 한다 !" 

두리틀이 지휘하는 비행대는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며 귀환까지 보장이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복수의 선봉에 자신들이 나서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위험한 임무인줄 알면서도 대원들은 사기가 충천 하였습니다. ( 기동함대의 함장 할지제독과 함께 한 두리툴 비행대 ) ]


미 함대는 은밀한 항해를 계속하여 최대한 일본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던 4월 18일 오전 인근 해역을 순시하던 일본 초계함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간단히 격침시키면서 호네트 전단은 항해를 계속하였지만 함대 위치에 관한 정보가 이미 일본 측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판단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머지않아 일본 함대와 마주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 일본에 가까워지자 함대가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


일본 동쪽 1,100km 까지 근접하자 미 함대의 할지 ( William F. Halsey Jr. 1882 ~ 1959 ) 제독은 두리틀에게 의사를 타진합니다. 

"현재 예정했던 곳보다 300 Km를 덜 왔지만 적의 감시망에 우리 함대가 포착된 것으로 판단된다. 함대의 안전을 위해 이 이상 전진한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은데 이 시점에서 비행대가 출격 할 수 있겠는가 ? 귀관의 생각은 어떠한가 ?"


[ 할지제독은 비행대의 출격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


두리틀은 잠시 지도를 보고 결정을 합니다.

"제독님, 우리 육군항공대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지금 출동하겠습니다. 운이 따른다면 폭격 후 중국까지는 충분히 날아 갈 수 있을 만 한 거리라고 판단됩니다. 이 시점에서 회항이나 작전취소는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네트는 탑재 된 16기의 B-25를 발진시키기 위해 부산해졌습니다.


[ 출격이 결정되자 갑판 위가 분주해졌습니다 ]


호네트의 많은 승무원들은 무슨 말을 그들에게 하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육군항공대원들의 비장한 출격장면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공모함 호네트는 B-25 이륙을 위하여 선수를 맞바람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전속력으로 항진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발함신호가 떨어지고 B-25 들은 차례차례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합니다.




[ 호네트의 수병들은 육군항공대의 비장한 출격준비를 숨 죽여 지켜보았습니다 ]


조마조마하게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할지 제독휘하 해군 승무원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으로 그들의 출격을 성원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라이벌 육군항공대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비장한 출격을 감행하는 동료이며 전우들이었을 뿐이었고 이러한 용감한 육군항공대원들의 무사귀환을 해군들은 진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 B-25들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용감한 출격에 나섭니다 ]


두리틀 특공대는 고도 50m의 초 저공 비행고도를 유지하며 예정된 일본 본토의 목표지점으로 서서히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비행 중 이들 비행대는 수차례 일본 정찰기들과 마주치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으나 이를 아군기로 오판한 ( 중형 쌍발 폭격기가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였으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함 ) 일본군의 결정적 실수로 별다른 요격 없이 비행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  Tokyo Raid에 나선 B-25에서 촬영한 동경만의 극적인 모습 ]


만일 그들이 일본 전투기의 요격을 받는다면 대항 할 자위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속절없이 죽음의 길로 빠져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행운이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긴장어린 장시간의 비행 끝에 예정대로 13기의 B-25 비행대는 도쿄에 접근하였고 나머지 3기는 나고야로 비행경로를 바꾸었습니다. 

수동식 육안 폭격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던 비행대는 공장으로 보이는 산업시설을 골라 분노의 폭격을 개시합니다.




[ 두리틀 비행대는 일본의 심장부에 분노의 폭격을 개시합니다 ]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마른하늘에 번개를 맞은 일본인들은 순식간에 공황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러나 1기당 단 4개의 폭탄을 일본에 떨구는 것만으로는 커다란 전술적인 폭격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비행대는 그들의 임무가 심리적인 면에서 일본에 충격을 주고 미국민과 미군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전설로 남은 80인의 용사들


폭격을 무사히 마친 비행대는 곧바로 중국을 향해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필사의 탈출 길에 오릅니다. 

이런 계획은 항공모함에서 이함은 가능하나 착함이 어려운 지상발진 폭격기의 구조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으나 결과론적으로는 그들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 두리틀비행대는 폭격 후 기수를 돌려 머나 먼 탈출 길에 오릅니다 ]


진주만의 미국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얼떨결에 폭격을 당한 일본은 상당히 놀랐으나 곧바로 요격기를 출동시켰는데 폭격을 마치고 도망간 미군기들이 항공모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태평양방향, 즉 동쪽으로 도망갔을 것이라 판단하여 두리틀 특공대가 달아난 정반대 방향으로 대거 요격에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 일본의 전투기들이 허겁지겁 요격에 나섰으나 오판을 합니다 ]


요크대위가 지휘하는 1기의 폭격기가 일본의 요격에 피해를 입었으나 다행히도 격추를 면하여 예정된 중국이 아닌 가까운 소련의 연해주로 피신하게 되었었습니다. 

행운을 거듭하며 서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나머지 15기의 두리틀 비행대는 연료가 모두 소모되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 동중국 해안지역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 두리틀비행대는 행운이 계속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여기도 결코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해안지역 대부분의 주요거점은 이미 중일전쟁으로 대륙 깊숙이 진출한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최대한 내륙 깊숙이 날아간 비행대는 기체들을 불시착 시키거나 추락 전 승무원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하였습니다.


[ 승무원들 탈출 후 추락한 B-25 잔해 ]


당시까지 비록 동맹국은 아니었어도 일본과 항전중인 중국인들에게 발견된 많은 승무원들은  현지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무사히 탈출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안전하게 귀환한 것은 아니고 작전 중 3명이 전사를 하였고 탈출 도중 8명의 대원이 일본에게 체포되어 그중 3명이 처형되고 1명이 옥사를 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 일부 승무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하였습니다 ]


이들 16기의 B-25 들이 투하한 폭탄은 총 64개에 불과하여 사상자 363명, 건물파괴 300여동의 미미한 전과만 얻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전세가 곧바로 역전 된 것 또한 아니었고 오히려 너무 무모해 보이는 이 작전을 위해서 일부 승무원들과 16기의 폭격기를 소모하고 이들을 이륙시키기 위해 그때까지 최대한 안전하게 보존하여야 할 항공모함을 위험지역까지 출동시키는 모험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 탈출 과정 중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는 두리틀비행대원들의 모습 ]


하지만 이들의 전과는 결코 숫자로만 계량화 할 수 없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합니다.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지금까지 전해온 참담한 패전 소식이 아닌, 적에게 그것도 일본이 가장 안전하게 여기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고 온 놀라운 소식을 전하여 모든 미국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것은 곧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폭제 노릇을 하였습니다.


[ 비행대의 성과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


반대로 그동안 승전만 거듭해온 일본과 일본 국민들에게는 백주대낮에 그들의 중심부가 폭격을 당하자 언제 어디서 또 다시 미군의 폭격기들이 날아오지 몰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진주만에서 미국의 항모세력을 제거하지 못해 찜찜해 하던 일본군 수뇌부는 미국의 잔존세력을 없애기 위한 건곤일척의 싸움을 준비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 된 1942년 6월의 미드웨이해전 Battle of Midway 은 일본의 괴멸로 막을 내리고 이를 기점으로 결국 일본은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 일본의 조급함을 유발시켜 미국은 미드웨이의 승리를 이끌어 냅니다 ]


비록 국민들과 정치인들의 요구에 따라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이룩한 어쩌면 너무나 무모한 작전이었고 전술적 효과도 극히 미미하였지만 두리틀비행대의 용기 있는 도전은 전략적으로, 심리적으로 엄청난 대성공을 거둔 획기적인 특공작전이라 할 것입니다.


[ 그들은 용기 있는 투사들이었습니다 ]


조국이 위기에 빠지자 돌아올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서운 용기를 내어 결연히 일어나 맞은바 임무를 다한 두리틀비행대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며 이들을 안전하게 이함 시킨 미 해군의 용기는 두고두고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80명의 위대한 용사들에게 국적과 시대를 초월하여 진심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 부록 ] 두리틀 특공대 전설의 80인








순서대로 - ( 폭격목표 ) 기장 / 부기장 / 항법사 / 폭격수 / 사수 

1호기 ( 도쿄 )
James H. Doolittle / Richard E. Cole / Henry A. Potter / Fred A. Braemer / Paul J. Leonard

2호기 ( 도쿄 )
Travis Hoover / William N. Fitzhugh / Carl R. Wildner / Richard E. Miller / Douglas V. Radney

3호기 ( 도쿄 )
Robert M. Gray  / Jacob E. Manch / Charles J. Ozuk Jr. / Aden B. Jones / Leland D. Faktor ( 전사 )

4호기 ( 도쿄 )
Everett W. Holstrom / Lucian N. Youngblood / Harry C. McCool / Robert J. Stephens / Bert M. Jordan

5호기 ( 도쿄 )
David M. Jones / Ross R. Wilder / Eugene F. McGurl / Denver V. Truelove /  Joseph W. Manske

6호기 ( 도쿄 )
Dean E. Hallmark ( 생포 후 처형 ) / Robert J. Meder ( 생포 후 옥사 ) / Chase J. Nielsen ( 포로 ) / William J. Dieter ( 전사 ) / Donald E. Fitzmaurice ( 전사 )

7호기 ( 도쿄 )
Ted W. Lawson / Dean Davenport / Charles L. McClure / Robert S. Clever / David J. Thatcher 

8호기 ( 나고야 )
Edward J. York / Robert G. Emmens / Nolan A. Herndon / Theodore H. Laban /  David W. Pohl

9호기 ( 도쿄 )
Harold F. Watson / James N. Parker Jr. / Thomas C. Griffin / Wayne M. Bissell / Eldred V. Scott

10호기 ( 도쿄 )
Richard 0. Joyce / J. Royden Stork / Horace E. Crouch / George E. Larkin Jr. /  Edwin W. Horton Jr.

11호기 ( 요코하마 )
C. Ross Greening / Kenneth E. Reddy / Frank A. Kappeler / William L. Birch / Melvin J. Gardner

12호기 ( 요코하마 )
William M. Bower / Thadd H. Blanton / William R. Pound Jr. /  Waldo J. Bither / Omer A. Duquette

13호기 ( 요코스카 )
Edgar E. McElroy / Richard A. Knobloch / Clayton J. Campbell / Robert C. Bourgeois / Adam R. Williams

14호기 ( 나고야 )
John A. Hilger / Jack A. Sims / James H. Macia Jr. / Jacob Eierman / Edwin V. Bain

15호기 ( 나고야 )
Donald G. Smith / Griffith P. Williams / Howard A. Sessler /  Thomas R. White / Edward J. Saylor

16호기 ( 나고야 )
William G. Farrow ( 생포 후 처형 ) / Robert L. Hite ( 포로 ) /  George Barr ( 포로 ) / Jacob D. DeShazer ( 포로 ) / Harold A. Spatz ( 생포 후 처형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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