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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조선시대의 회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김홍도는 1745년에 태어나서 1806년 이후 어느 해엔가 죽었다. 최근의 학자들은 1806년 경에 죽은 것으로 추측한다.
김홍도는 지금 그의 그림으로 전하는 그림만 500점에 육박하고 그 중에도 다수의 진작과 걸작이 있다. 김홍도는 한국 회화사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양과 질 높은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김홍도의 부인이 누구이고 김홍도가 말년을 어떻게 보내다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다만 정조가 돌아간 이후, 불행하고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운명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게 전부이다. 우리는 김홍도의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무수히 많은 서양화가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사대부가 아닌이상 스스로의 초상을 남기는 일이 없었으므로 김홍도는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려내면서도 자신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다.


조선시대 화원에 대해서 알길은 막막하다. 요즘 사람들이 신윤복이 단 두줄 남긴 화가라서 여자일지도 모른다고들 말하지만, 조선시대 화원 화가 중 누가 2줄이상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김홍도만 해도, 비교적 자료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미비하기만 하다. 최소한 부인이 누구이고, 언제 죽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1745년 ~ 1806년?

이 물음표를 볼때마다 안타깝기만 하다.
당시의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화가의 죽음을 왜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화원을 존대하는 시대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인가. 

현재 김홍도에 관한 기록의 시작은 1765년 21살 때이다.
궁중의 의궤병풍인 경현당수작도를 이때 주관하여 그렸는데,
김홍도가 이미 21살 때에 도화서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이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이므로
이미 21세 이전부터 정조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작품은 망실되었다.

김홍도는 이후 1773년 29살 때 영조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을 그린다.
주관화사는 변상벽,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신한평,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 등이었다.
변상벽, 신한평 등과의 나이차이를 생각했을 때에 김홍도가 얼마나 이른 시절부터
이름이 났고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이 때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같은 해에 그려진 신언인도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김홍도의 신언인도(愼言人圖)


1773년, 종이 수묵, 114.8x5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해지는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29세에 그린 것이며 그림과 표구상태가 좋지 않은 게 단점이다.

말을 삼가는 옛 사람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스승인 강세황이 그림 위에 예서로 글을 썼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은 정범조.


이는 옛적에 말을 삼가한 인물이다.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일을 많이 벌리지 말라. 일이 많으면 우환이 많다. 안락하면 반드시 경계하라.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 무슨 다칠 일이 있으랴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장차 오래 갈 것이다.
무슨 해가 있으랴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장차 크리라.
듣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신령이 장차 사람을 엿보느니라.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멸하지 않고 큰불처럼 분명하니 어쩌겠는가?
졸졸 흘러서 막힘이 없나니 끝내는 큰 강물을 이루느니라.
혹은 면면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서 (그대를 얽매는) 그물이 되리라.
터럭끝만큼도 어그러짐이 없어야만 장차 도끼자루(권한)를 잡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능히 신중히 할 수 있어야만 복의 근원이 된다.
무슨 다칠 일이 있으랴고 말하지 말라. 재앙의 문이다.
강함으로 밀어부치는 자는 (온전한) 죽음을 얻지 못한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그 적수를 만난다.
도적은 주인을 미워하며, 백성은 그 윗사람을 원망하는 법이다.
군자는 천하가 (자신의) 위로 올라설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아래쪽에 처한다.

뭇 사람이 (자신보다)앞설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 뒤쪽에 자리한다.
따뜻하고 공손하며 신중한 덕성으로 사람들이 경모하게 하며
암컷의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고 아래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람들이 모두 저쪽으로 달려갈 때 나는 홀로 이쪽을 지킨다.
사람들이 모두 혹하여 있을 때 나는 홀로 상관하지 않는다.
안에 품은 덕을 내가 알지만 사람에게 기예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존귀하고 높아도 사람들이 나를 해하지 못한다.

대저 큰 강이 비록 아래에 있기는 하지만 모든 개울보다 긴 것은 그것이 낮은 때문이다.
하늘의 도는 알지 못하나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경계할 지어다!
1773년 8월 표암 강세황이 써서 좌청헌에게 드린다.


화면 상단에 강세황(姜世晃)이 예서(隸書)로 적은 화제를 풀어서 적은 것이다.

표암 강세황 姜世晃 ( 1712 ~ 1791 )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했다.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다.
단원김홍도의 스승이었다.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는 헌정(憲靖).





강세황 자화상. 1782, 비단 채색, 88.7x51cm, 개인소장

강세황(1713-1791)은 18세기 서울의 예단의 총수로서,
소위 태서화법으로 불리는 서양화법을 중국에서 배워 소개한 개척자이다.
뛰어난 글씨와 그림을 남긴 서화가로서, 좋은 글을 남긴 문장가로서,
한성판윤을 지낸 관리로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 자화상의 찬문에 대한 자세한 글



필자미상 강세황초상(姜世晃肖像)

강세황의 초상화는 모두 8점이 전해지고 있다.
강세황 초상화의 특징은 얼굴의 분명한 육리문(肉理紋), 음영법을 쓴 입체묘사,
명암법으로 처리된 옷주름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작품도 그러하다.
이 작품은 극사실 기법에 의한 정면 관복상이다.


 

김홍도의 군선도[郡仙圖]


신언인도 이후의 작품이 1776년 32살 때에 그려진 유명한 군선도이다.

군선도는 김홍도가 이른 시기에 그린 대표작이면서도, 한국 회화사에 손꼽힐 만한 대작 인물도이다.
이른 나이에 이만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29살에 어진을 그린 김홍도의 이름이 과연 허명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오도자가 즐겨 썼다는 난엽묘를 써서, 수묵을 주로 하여, 신선들을 그려내었다.
옷이 모두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은 표현을 오대당풍이라고 한다.
이 것 역시 말로만 전하던 오도자의 수법으로 당시에는 이미 오도자의 그림이 전하지 않았으므로
과거 이름이 높이 나있던 오도자의 그림을 추측하여 김홍도가 그린 듯 하다.
당시 중국과의 영향은 별로 없어보이는게 당시 중국에서는 이런 형식의 인물도가 유행하지 않았다.



김홍도의 군선도[郡仙圖]. 1776년, 지본수묵담채, 132.8 × 575.8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지금 남아있는 김홍도의 <군선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139호 <군선도> 병풍이다.

길이가 무려 5m 75cm나 되는 대작이다. 원래는 8폭의 병풍 그림이었으나 현재는 3폭의 족자로 되어 있다.
이들은 지금 신선들의 여왕 서왕모 생일 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중이다.



이 작품은 단원(檀園)의 나이 31세에 그린 역작으로서 소장기<小壯期>의 넘치는 작품 의욕<意慾>이 드러나 있다.
전체 팔련폭(八連幅)으로 된 대병(大屛)으로 꾸며졌던 대작이며 부인형(否仁形)으로 두드러진 눈과 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앞으로만 나부끼는 듯 싶은 의습(衣褶)의 표시 등 단원(檀園)의 신선도법이 지니는 특색과 주저없는 필세(筆勢)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일찍이 신선도를 잘 그리는 도석인물 화가(道釋人物畵家)로서 화명(畵名)을 날리기 시작하였는데, 단원이 40대 이전에 그린 그림 중에는 도석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도석인물화란 불교나 도교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인물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병신춘사(丙申春寫) 사능(士能)"이라는 관지가 있어 단원의 기년명 작품중 가장 이른 것으로, 서왕모(西王母)의 반도회(蟠桃會)에 초대를 받고 약수(弱水)를 건너는 군선(群仙)의 파상장면(波上場面)을, 배경을 생략한 채 그린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19명의 신선들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뉘어져 화면 왼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꽃바구니를 맨 하선고(何仙姑)와 마고(麻姑) 등의 여선(女仙)들이 맨 앞에 있고, 이어서 하얀 나귀를 탄 장과노(張果老), 딱따기를 든 조국구(曹國舅), 어고간자(魚鼓簡子)를 든 한상자(韓湘子)의 모습이 보이며, 맨 뒤에는 외뿔소를 탄 노자(老子)와 종이를 펼쳐 들고 붓을 든 문창(文昌) 등이 따르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대부분 중국의 신선전(神仙傳) 화본에 나오는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활달하고 거침없이 묘사한 필치와 생동감 있는 인물 표현에서 신선도에 대한 단원의 확실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호암미술관 소개>


군선도의 부분도


김홍도의 군선도[郡仙圖] 1폭 ~ 4폭

꽃바구니를 맨 남채화< 藍采和 >, 복숭아를 든 하선고< 何仙姑 >,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있는 장과로< 張果老 >,
딱따기를 치는 조국구< 曹國舅 >, 악기< 樂器 >를 든 한상자< 韓湘子 >








김홍도의 군선도[郡仙圖] 5폭 ~ 8폭

외뿔소를 타고 「도덕경< 道德經 >」을 든 노자< 老子 >를 선두로
복숭아를 든 동방삭< 東方朔 >, 두건< 頭巾 >을 쓴 종이권< 鍾離權 >, 두루마리에 붓을 든 문창< 文昌 >,
깎은 머리의 여동빈< 呂洞賓 >, 호리병을 든 신선(神仙) < 이철괴 >를 그렸다




 

김홍도의 규장각도



1776년, 비단 채색, 144.4x115.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76년 정조가 즉위하고, 즉시 규장각이 설치된다. 규장각은 대단한 기관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도서관이다.
당시 조선 땅에서 나온 모든 서책과 자료들을 보관하고 정리하여, 논쟁하고 전국적인 담론을 이끌어가는 기관이었다.
정조 대왕은 규장각을 정치와 학문의 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삼십대 초반의 화원 김홍도에게 이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정조가 김홍도의 재주를 높이 샀음을 반증하는 그림이다.

현재 창덕궁의 비원에 있는 주합루건물이다. 그림의 창덕궁 뒷산은 응봉이다.
정조 시대에는 1층을 규장각, 2층을 주합루로 썼지만 지금 규장각은 서울대학교로 옮겨진 상태다.

김홍도의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제2폭 <취중송사(醉中訟事)> 부분도
1778년 작. 비단 바탕에 담채. 세로 90.9㎝, 가로 42.7㎝.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서른네 살 때 작품으로 화면에 제작연도 및 강세황의 화평
그리고 한 세트를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회화사적 의의가 자못 큰 그림이다.


김홍도가 34세 때(1778년, 정조 2), 강희언(姜熙彦, 1738~1782년경)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린 것으로,
바로 이 해에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등을 남기는 등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취중송사(醉中訟事)>는 <평생도>에서도 엿볼 수 있는 구도이며,
대장간ㆍ타작ㆍ노상과안 등 《풍속도첩》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울러 이 그림에 등장된 소재들은 여러 풍속화 병풍에 있어 견본격적인 내용이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상사를 따뜻한 시각으로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김홍도의 천재성이 빛난다 하겠다.


구도는 근경·중경·원경을 갖춘 평원법으로 이루어졌고, 인물들은 가늘고 균일한 필선으로 묘사되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가운데 초기작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양식적 특징과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강세황은「단원기우일본(檀園記又一本)」에서 김홍도가 조선 400년 만에 파천황(破天荒)적 솜씨라 극찬하고
풍속에 크게 뛰어남을 언급하며 구체적으로 그가 즐겨 그린 길거리ㆍ나룻터ㆍ가게ㆍ놀이등 구체적인 내용까지 밝히고 있다.


이는 강세황 자신의 풍속화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데, 김홍도가 풍속화에만 뛰어난 것이 아님을
이에 앞서「단원기(檀園記)」에서 고금의 화가들이 한 가지만을 잘하고 여러 가지를 다 잘 하지는 못하나
김홍도만은 모든 분야에 능함(妙品)을 천명하고 있다.



모두 8폭으로 이루어졌으며, 여행중에 목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세속사를 묘사한 것으로
각 폭의 상단에 강세황(姜世晃)의 화평이 적혀 있다.





제1폭  노새에 탄 나그네가 좁은 다리 위에서 날아가는 물새에 놀라는 모습
다리 아래 물새는 당나귀 발굽소리에 놀라고 당나귀는 날으는 물새에 놀라네.
사람은 당나귀가 놀라는 것을 보고 놀라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 입신의 경지에 들어갔다.

제2폭  지방수령이 백성들의 송사를 듣는 장면, <취중송사(醉中訟事)>

물품을 공급하는 이들이 각기 자기 물건을 들고 가마의 앞뒤에 있으니 태수의 행색은 초라하지 않다.
시골사람이 나서서 진정을 올리고 형리가 판결문을 쓰는데 술 취한 가운데 부르고 쓰는데 오판이나 없을런지.

제3폭  타작하는 장면

벼타작 소리 들리는데 탁주는 항아리에 그득, 수확을 지켜보는 이 또한 재미있어 보이네.

제4폭  주막과 대장간의 광경

논에서 해오라기 날고 높은 버드나무에 시원한 바람불고 풀무간에서 쇠를 두드리고
나그네는 밥을 사먹는데 시골주막의 쓸쓸한 관경이나 오히려 한가로운 맛이 드네.






제5폭  어촌 아낙네들이 시장가는 광경,
밤게.새우.소금으로 광주리와 항아리에 그득 채워 포구에서 새벽에 출발한다.
해오라기 놀라서 날고 한 번 펼쳐보니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듯하다.

제6폭  나루터 장면,

백사장 머리에 나귀를 세워 놓고 사공을 부르네,
나그네 두세 사람 같이 서서 기다리는 강가의 풍경이 눈앞에 완연하다.

제7폭  촌아낙네를 부채 너머로 훔쳐보는 나그네의 행로 광경,

소 등에 올라탄 시골 노파를 나그네가 말고삐를 느슨히 하고 응시하는가.
순간적인 광경이 웃음을 자아내네.

제8폭  나귀를 탄 길손이 목화따는 아낙네를 바라보는 모습. (파안흥취)

헤진 안장에 여윈 나귀 행색이 심히 초라해 보이네,
무슨 흥취가 있어서 머리를 돌려 목화 따는 시골 아낙네에게 머리를 돌려 바라보는가.




행려풍속도 8폭, 파안흥취


풍속화의 개념과 김홍도가 주로 그린 풍속화 


김홍도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중국 송의 왕진경(王晋卿)이 서원(西園)에서 선비, 도사, 스님 등과 더불어
아회(雅會)를 갖은 서원아집(西園雅集)은 고사인물의 한 주제로 즐겨 그려졌다.


조선시대 이 주제의 그림은 18세기 이 후 것들이 유존되고 있는데 김홍도의 경우 알려진 것만도 <선면서원아집도>를 비롯해,
8폭병으로 된 것 등 3점에 이른다. 선면 서원아집도에는 강세황이 등장인물 모두를 열거하고 있다.


시종드는 인물 10명을 포함하여 모두 26명이 등장되는 이 <서원아집도>는 강세황의 화평에서 중국의 이공린이
이 주제의 그림으로선 첫째이나 김홍도가 그와 우열을 다루기 힘들며 오히려 더 훌륭하며,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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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중국의 이 분야 그림은 도판에 의한 이해이나 알려진 몇 그림과 비교할 때
주제의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화면의 구성 및 구도 그리고 묘사에 있어서도 김홍도 나름의 독자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도석인물이나 고사인물화에 있어서는 중국에 연원을 둔 내용이기에 중국의 한 아류로 보기 쉬우나
이 분야에서도 화풍에 있어 적지 아니한 차이를 감지하게 된다.


6폭을 하나의 화면으로 하여 대각선 구도로 안배하여, 담장 안을 비스듬이 드려다보는 시점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버드나무,오동, 파초,소나무,타작나무,대나무 등을 비슷한 비중으로 배경에 등장시켰고,
인물은 다소 우측에 치우친 몇 단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동작과 자세, 표정마저 읽을 수 있도록 나타냈다.


한 쌍의 학과 사슴도 각기 인물군과 문쪽으로 향하게 하여 시선을 양분케 하는 듯 조화를 꾀하고 있다.
바위와 수목처리의 자신감이 있는 강한 필선과 인물 표현의 고른 선 등 여러 측면에서 기량과 격조를 읽을 수 있다.
김홍도의 고사인물화 중에 대표작에 드는 수작이다.


강세황의 화평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전에 본 아집도(雅集圖)가 수십점에 이르는데 그 중에 구영(仇英1509~1559字 十洲)이 그린 것이 첫째이고
그외 변변치 않은 것들은 지적할 가치가 없다. 지금 김홍도의 이 그림을 보니 필세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배치가 적당하며 인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미불(米 1051~1107 字 元章)이 벽에 글씨를 쓰고, 이공린(李公麟 1054~1105 字 伯時)이 그림을 그리고
소식(蘇軾 1036~1101)이 글씨 쓰는 것 등에 있어 그 참된 정신을 살려 그 인물과 더불어 서로 들어 맞으니
이는 선천적으로 깨친 것이거나 하늘이 가르쳐 준 것이다.


구영의 섬약한 필치에 비교하면 이 그림이 훨씬 좋다. 이공린의 원본과 우열을 다툴 정도이다.
우리 나라 지금 이러한 신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그림은 원본에 떨어지지 않으나
내 글씨가 서툴러 미불에 비교할 수 없으니 훌륭한 그림을 더럽힐까 부끄럽다.
보는 사람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1778년 설날 표암이 제하다.

 

김홍도의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한 사람의 선비를 위해 자리를 잡아주는 힘센 선접군(先接軍)과 답안을 지어주는 거벽(巨擘),
글씨를 써주는 사수(寫手), 심부름하는 노비가 햇별가리개(日傘·햇볕가리개) 마다 한 접(接)을 이뤘다.


과거시험장에 끝없이 잇닿은 햇볕가리개(日傘) 아래서 무언가 쑥덕공론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과장(科場)에 갖고 들어갈 수 없었다는 책을 스스럼없이 펼쳐들고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잠에 곯아 떨어진 사람도 보인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초정 박제가(1750∼?)가 '북학의(北學議)'에서 묘사한 과장의 혼돈이 그대로 화면에 포착됐다.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가 최근 미국에서 발굴해 국립국악원이 발행하는 '국악누리' 4월호에 공개했다. (2007).
6·25전쟁 당시 미국 해군에 근무하던 진 J 쿤이 구입해 캘리포니아 프레스노에 있는 자택에 보관하고 있었고,
2005년 패트릭 패터슨이 다시 사들여 지금껏 현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림 상단에는 단원의 후원자였던 표암 강세황이 쓴 제발(題跋)이 별지로 붙어 있다.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에서 만마리 개미가 전쟁을 벌인다.'는 뜻의 '공원춘효만의전(貢院春曉萬蟻戰)'으로 시작한다.
공원은 당나라 시대에 과거를 치르던 시험장을 이른다.


이 그림은 단원이 1778년 화가 강희언의 담졸헌에서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려풍속도병'과
비슷한 형식과 화풍을 보이고 있어 같은 시기 제작된 것으로 정 교수는 추정했다.
정 교수는 "김홍도의 그림으로 그동안 기록으로만 간간이 접했던 난장판 같은
과거 시험장의 실상을 실감나게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역사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그동안 조선시대 과거시험 장면을 담은 풍속화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9세기 작품으로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평생도' 가운데 '소과응시'가 유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작자미상의 소과응시


과거제도와 조선시대 과거장의 풍경

김홍도의 <모당 홍이상 평생도>



<평생도 8곡 병풍>, 1781. 비단에 수, 99*34*8


여덟 폭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세 폭은 출생, 결혼, 회혼식 즉 삶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장원 급제부터 영의정까지의 벼슬살이에 관한 것이다. 바로 <평생도>라는 것이다.

"회혼식" 상단에는 "신축9월 사능화우와서직중(辛丑九月 士能畵于瓦署直中)"이라 적혀있어, 1781년 김홍도가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시대풍속화≫ (서울, 한국박물관회, 2002) 297쪽)



평생도란?

대천화랑의 웹페이지에서는 평생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게되는 생활과정을 단계적으로 정형화한 그림이다.

보통 八曲 十曲 十二曲으로 꾸며 주며, 그 내용은
1. 돌잔치 2. 글공부, 3. 장원급제, 4. 혼인 (新行길) 5. 감사부임, 6. 2품관 승계(전쟁출전), 7. 환갑잔치(회혼식),
8. 1품관 승계후 은퇴 (늙어서 왕의 예우를 받는 奉朝賀)의 순서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 도식이다.


18세기경 판서(判書)를 지낸 홍현보의 평생도 팔곡병(김홍도 필(筆))과
김홍도필의 또다른 평생도 十二곡병이 유명하고, 이조 후기에는 서민용의 민화 병풍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시대풍속화≫에는 5종류의 평생도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도편 23 김홍도의 <모당 홍이상 평생도>로
"한림겸수찬시" "응방시" "혼인시" "초도호연" "회혼례" "좌의정시" "병조판서시" "송도유수도임식" 8폭으로 되어 있다.
어떤 근거에 의해 이렇게 배열해 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도편 24 필자 미상의 <담와 홍계희 평생도>로
"회혼" "치사" "좌의정행차" "평양감사부임" "수찬행렬" "삼일유가"의 6폭입니다.
옛 책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보게 되어 있으니, 나이순으로 배열한 듯 합니다.
"삼일유가" 전에 "결혼" "초도호연"이 있었을 듯 싶다.


세 번째는 도편 25 전 김홍도의 <평생도>로
"한림겸수찬" "삼일유가" "혼인식" "초도호연"  "회혼례" "정승행차" "판서행차" "관찰사부임"의 8폭으로
<모당 홍이상 평생도>와 그림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 이 또한 배열 순서의 기준을 추측하기 쉽지 않다.


네 번째는 도편 26 필자미상의 <평생도>로
"회혼례" "회방례" "정승행차" "판서행차" "관찰사부임" "한림원수찬시" "삼일유가" "혼인식" "소과응시" "초도호연"의 10폭이다.
"소과응시"와 "회방례"가 추가된 것이다. 배열 순서가 나이 순으로 맞다.


다섯 번째는 도편 27 필자미상의 <평생도>로
"삼일유가" "혼인식" "서당" "초도호연" "회혼례" "치사" "회갑" "관찰사부임"의 8폭인데, 역시 배열 순서가 맞지 않다.



김홍도의 담와 홍계희 평생도 6곡병 (淡窩 洪啓禧平生圖 6曲屛)







김홍도의 사녀도



1781년, 지본담채, 121.8 x 5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가 37세 되는 해에 그린 그림이다.
필선은 한층 여유롭고 부드러워졌다.

과거 화원들의 그림이 주로 이상화된 중국식의 얼굴을 그린 반면
김홍도의 그림에는 담백한 한국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비록 머리모양새나 복식은 중국식이지만 눈고리와 눈썹, 콧매가 과장된 중국식의 얼굴이 아니라
조선의 백자항아리같은 얼굴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형체는 난엽묘를 써서 거의 감필법에 가깝게 인물을 그려내고 있는데,
선이 상당히 침착한 듯 여겨지면서도 율동적이다.

김홍도의 그림들은 옷주름에서 상당한 음악적 율동감이 나타난다.



김홍도의 과로도기도



견본담채, 134.6 x 56.6cm, 간송미술관 소장.

사녀도가 그려지던 즈음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으로, 굵은 옷주름은 상당히 팽팽하여 긴장감있다.

아마도 김홍도가 30대에 완성한 신선, 인물도는 이 정도에서 절정을 맞는 듯 하다.
어떠한 흠도 찾을 수 없이, 이미 완성된 회화를 보여준다.
당나귀 역시, 고정되지 않은 운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초년작에는 주로 사능이라고 낙관되어 있는데 사능은 김홍도의 자이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견본수묵담채, 90.4 x 43.8cm, 호암미술관 소장.

이 송하맹호도 역시 30대 후반 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한 공필을 들인 것으로 수만번의 붓질이 왔다간 작품이다.


역시 사능이라고 낙관되어 있고, 위에는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고 낙관되어 있지만,
소나무는 이인문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이 부분은 의견이 분분하다.)


이인문은 김홍도의 동년배 화원친구로서 김홍도의 그림에 이인문의 글씨가 있고
이인문의 그림에 김홍도의 글씨가 있는 경우가 여럿있다.
당대 쌍벽을 이루었고, 정조에게 둘다 총애를 받은 지금 말로하면 베프였다.


조선의 호랑이 그림에는 어느 정도 도식이 있어서,
16세기 호랑이 그림부터 20세기 호랑이 그림까지 어느 정도 양식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은 그러한 양식적인 면에서 이탈해 있다.


우리가 이렇게 보기에는 상당히 규범적인 호랑이 같아도
실제로 이그림이 그려질 때는 상당히 이색적이었을 것이다.



소나무는 누가 그렸을까 (참고사이트)


오른쪽 위를 보면 한자로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 써있다. 소나무는 표암이 그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표암’이라는 글자와 그 아래 ‘화송’은 다른 필체다. ‘표암’이라는 글자를 누가 위조했다는 말이다.

오주석은 <한국의 미 특강>에서 이를 지적했고, 유홍준은 <화인열전 2>에서 강세황의 솜씨로 밀어붙였다.
이건 누가 봐도 확실한 위조다. 그런데 이게 더 이상하다. 어떤 바보가, 세 살짜리 애가 봐도 탄로 날 그런 엉터리 장난을 쳤을까?

정말로 속아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그림에 대한 오주석의 ‘감동’은, 정말 ‘감동적’이다.
일찌감치 세계 최고의 호랑이 그림으로 선포하고, 자신의 책 『한국의 미 특강』 표지 그림으로 찍어 버렸다.



이 작품의 생명은 바로 ‘사실성’이다. 그냥 '사실성?' 어림도 없다. 앞에 한 글자 더 붙여야 한다. '극(極)’ 사실성.
섬세한 초미립자 나노 nano'의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림의 진위에 대해 시시비비하던 유홍준과 오주석도 이 점만은 일치했다.

한번 호랑이를 확대해 보라. 바늘처럼 꼿꼿하고 섬세한 수만 개의 털이 일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놀라지 마시라.
그냥 두터운 붓으로 색칠한 게 아니다. 터럭 한 올 한 올을 일일이 가는 붓으로 직접 그렸다.
그 꼼꼼한 ‘붓의 터치’ 그걸 보고도 멀쩡하다면 당신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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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의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109.3×57.4


1805년 61세의 이인문이 제작한 만년작품의 하나로 그의 구도상 특징과 활달한 운필법이 잘 드러난 대표작이다.
이인문 작품을 여기에 소개한 것은 작품의 제시(題詩)와 관지(款識)가 김홍도 글씨로 되어 있고
이인문이 김홍도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제시는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701~761)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이라는 오언고시(五言古時)이다.

중년에 이르러 자못 불교를 좋아하여, 늙어서 집을 남산가에 터잡았네.
흥이 오르면 매번 혼자 떠나가니, 뛰어난 경치를 그저 나만 알뿐이네.
걸음이 다다르니 물이 끊긴 그곳이오, 앉아서 바라보니 구름 이는 그 때로다.
우연히 숲의 나무꾼 늙은이를 만나, 
이야기하고 웃느라 돌아갈 줄 모르네.


관지는 “을축년(1805) 정월에 도인 이인문과 단구 김홍도가 서묵재에게 글을 쓰고 그림 그려 육일당주인에게 드린다“인데
서묵재는 화원 박유성의 화실이름이다. 육일당주인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송하담소도>는 동갑의 친구인 이인문과 김홍도가 갑년(甲年)이 되는 감회 깊은 해 정월을 맞아
역시 동갑인 동료 박유성의 집에 모여 슬을 한참 마시고 즐긴 후에 그린 작품이다.

그것은 김홍도의 필적 자체가 매우 여유롭고 느슨한 필세를 보이고 있으며,
또 위에 제시한 고시(古詩)의 원문을 3,4구와 5,6구를 바꾸어 쓴 점이라든가,
‘좌간우기시(坐看雲起時)에서 가운데의 기(起) 자(字)를 빼먹고 썼다가 나중에 덧붙여 쓰는 등
실수를 연발하고 있는 점에서도 짐작되는 것이다.

한편 이인문의 그림도 그의 작품 가운데서 유난히 호방한 필법을 보여주는 것인 바,
특히 소나무 끝가지를 좌우로 갈지 자(之)로 뽑아낸 부분과
거기에 친 커다란 묵점이 특히 그러하니 역시 취중작으로 짐작된다.

두 사람은 정조 연간의 회화를 대표하는 동갑의 화원으로서 먼 친척뻘이기도 했으며 평생의 지기였다.
그러한 두 사람의 우정이 작품으로 확인되는 예이다.



김홍도의 단원도



단원에서 벗들과 어울려 놀다. 1784
단원은 김홍도의 이름이면서 김홍도의 집 이름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단원에서, 김홍도의 집에 찾아온 정란, 강희언과 함께 놀던 때를 회상하며 그린 그림이다.
그림 위에 적힌 글에 그날을 회상하는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1781년 봄에 모임을 가졌으며, 그림을 그린 건 1784년으로
정란에게 옛 일을 회상하며 그려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정란은 백과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창해 정란(1725~?), 당대의 기인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림에 보이는 네 사람 중 수염을 기른 이가 정란으로 추정된다. 거문고를 타는 이가 단원 김홍도이고.









김홍도의 풍속화첩(風俗畵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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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527호.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28㎝, 가로 2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풍속도하면 바로 이 화첩에 속한 <씨름>, <무동>, <서당>이 연상되리 만큼
지금까지 이 분야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화첩은 1918년 조한준(趙漢俊)에게서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年) 원 화첩의 수미(首尾)에 위치한 〈군선도(群仙圖)〉2점은
별도의 족자로 만들고 풍속도 25점만 새롭게 화첩으로 꾸몄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 중 4점이 1934년(年)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되었다.
1970년(年) 〈군선도(群仙圖)〉를 제외한 이 화첩은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란 명칭으로 보물 제527호로 지정되었다.

이 화첩의 게제순은
1)서당, 2) 논갈이, 3) 활쏘기 4) 씨름, 5) 행상, 6) 무동, 7) 기와이기기, 8) 대장간, 9) 노상과안,
10) 점괘, 11) 나룻배, 12) 주막, 13) 고누놀이, 14) 빨래터, 15) 우물가, 16) 담배썰기, 17) 자리짜기,
18) 벼타작, 19) 그림감상, 20) 길쌈, 21) 편자박기, 22) 고기잡이, 23) 산행, 24) 점심, 25) 장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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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작품이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과 일상생활의 여러 정경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화면의 배경 묘사를 생략한 채 풍속 자체에 역점을 둔 인물중심으로 다루었으며,
원형 구도와 X자형 구도를 이용한 짜임새있는 구성의 묘로 회화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씨름도〉의 경우 두 무리의 구경꾼들을 화면의 상하단으로 둥글게 배치하여 가운데 공간을 긴장시킨 다음 그곳에 서로 맞붙어
힘을 겨루는 2명의 씨름꾼을 그려넣어 그림의 핵심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정경의 상황을 훨씬 실감나게 표현했다.

옷주름의 필선은 끝이 날카롭게 빠지는 정두묘(釘頭描)를 부분적으로 사용했지만 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무명옷의 질감에 맞추어 다소 투박하면서도 강하고 힘찬 일종의 조핵묘(棗核描)에 가까운 필치를 구사하였다.
이러한 필선은 마치 종이를 구겨놓은 듯 짧고 구불거리도록 방향의 전환을 심하게 주어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기여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둥글넓적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눈매를 지닌 소박한 모습으로 다루어 조선 후기 서민상의 한 전형을 창출했으며,
이와 함께 당시 일반백성들의 생활정서와 진솔한 삶의 분위기 등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은 1778년 김홍도가 34세 되던 해 강희언의 집에서 그렸던 〈행려풍속도 行旅風俗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비해
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필치와 묘사력 등도 한층 능숙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져 있어 이 그림들은 40세(1785)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최고의 풍속화가였던 김홍도의 탁월한 기량을 대변하고 있는 이들 그림의 화풍은
김득신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 중 <점괘>는 <시주>로, <고두놀이>는 <윷놀이>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이 화첩에 대한 이와 유사한 그림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는 사실, 그림사이에 기량과 격조에서 차이를 보이는점,
부분적으로 감지되는 표현의 미숙함, 보수와 가필(加筆) 등의 요인으로
이 화첩에 대해 일각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금강사군첩 [金剛四郡帖]


김홍도(金弘道)가 1788년 정조의 어명으로 그린 화첩.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라는 명칭은 널리 알려진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 壺山外史≫에 나오는
‘명사금강사군산수(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화첩이 포함하는 지역은 4개 군(郡)뿐 아니라 남으로 평해(平海) 월송정(越松亭)에서
북으로 안변(安邊) 가학정(駕鶴亭) 그리고 금강산 접경 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60폭 화첩 이외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40폭 금강산화첩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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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첩의 제작 경위, 전래 등은 강세황(姜世晃)의 〈유금강산기 遊金剛山記〉와
〈송김찰방홍도 김찰방응환서 送金察訪弘道 金察訪應煥序〉,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서유본(徐有本)의 ≪좌소산인문집 左蘇山人文集≫, 홍현주의 형(兄) 홍석주(洪奭周)와 홍길주(洪吉周)의 문집 등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김홍도의 금강산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김홍도의 금강산화첩을 임모한 수많은 작품들이 전하여 김홍도가 후대에 미친 영향의 크기를 잘 보여 준다.
이중에는 강세황의 ≪풍악장유첩 楓岳壯遊帖≫중 몇 폭, 이의성(李義聲)의 ≪해산첩 海山帖≫,
이풍익(李豊翼)의 ≪동유첩 東遊帖≫, 필자미상(筆者未詳)의 ≪금강와유첩 金剛臥遊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관동명승첩 關東名勝帖≫과 ≪해산도권 海山圖卷≫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위의 작품들을 상호 비교하여 검토해 보면 김홍도의 사경(寫景) 여정(旅程)과
당시에 그렸던 금강산도의 내용을 복원(復元)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김홍도의 여정은 ‘한양(漢陽)→영동 9군(嶺東 9郡)→진양(淮陽)→내금강(內金剛)→외금강(外金剛)
→회양(淮陽)→한양(漢陽)’의 순(順)이었고 당시 그린 75곳 이상의 지명(地名)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강세황의 〈유금강산기〉에 의하면 김홍도와 김응환은 당시 각자 100여 폭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들 내용은 장차 김홍도의 금강산도와 임모작들이 더 밝혀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홍도의 송하취생도



지본담채, 109 x 55cm, 서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늙은 소나무 아래에서 신선이 생황을 부는 화면이다.
화면을 가르고 있는 소나무에 구불구불 내려오는 선들은 율동적이고 변화롭기 그지 없다.
김홍도의 50세 전후하여 그려진 작품으로 추측되는데, 이미 그의 회화에 禪적인 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한다.



김홍도의 삼세여래체탱



1790년경. 견본채색, 440 x 350cm, 화성 용주사 소장.


김홍도는,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다녀오고 북경의 천주당에서 서양화법으로 그림을 보게 된다.
정조는 서양화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으므로 김홍도 등의 화원에게 특명을 내린 듯 하다.
그래서 그려진 그림이 현재 용주사에 소장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은 김홍도가 주관하고, 이명기 등 당대 최고의 화원이 동참한 그림으로 김홍도의 46세 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아주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서양화법이 도입되어 있고,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기이하게 보였을 듯 싶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松石園詩社夜宴圖,  32×25.5cm,  종이에 수묵담채


檀園’이라는 관서 아래의 도서는 주문방인(朱文方印) ‘弘道’와 백문방인‘士能’이다.
그 우측에 마성린(馬聖麟:1727~1798 이후)이 1797년에 추서(追書)한 화제는 다음과 같다.


“6월 더위 찌는 밤에 구름과 달이 아스라하니, 붓끝의 조화가 사람을 놀래켜 아찔하게 하는구나"

화제 머리에 찍은 백문타원인은 ‘游藝(예술에 노닌다)’ 이고 아래는 백문방인 ‘馬氏’와 주문방인 ‘景義’이다.
화제를 1797년에 썼다는 점은 마성린의 다음 기록에서 짐작된다.


내 어느날 김의현(金義鉉)의 유죽헌(有竹軒)에 들러 보니 책상에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한 권이 있었다. 펼쳐 보니,
단원 김홍도가 맨앞의 그림을 그렸고 고송유수관 이인문이 이어서 그렸으며, 그 다음은 여러 군자가 각기 시를 짓고 썼는데,

무릇 그 화법의 신묘함과 시와 글씨의 맑고 참됨이 난정수계(蘭亭脩계)나 서원아집(西園雅集)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71세 미산옹 마성린이 쓰다.


작품의 소재는 당시 중인들의 문학운동을 주도하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광경으로서 이 모임은 1791년 6월 15일에 있었다.
무더운 여름밤에 펼쳐진 시인들의 雅趣있는 모임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모임의 장소가 천수경의 후원인 松石園이었으므로[松石園은 천수경(千壽慶)의 집을 가리킨다] 그러한 명칭이 붙었고
또 송석원은 서울 서쪽 인왕산 옥류동(玉流洞)에 있었으므로 玉溪詩社, 西園詩社 또는 西社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은 9인의 모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구도상의 대담한 생략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그림의 주문이 詩社의 夜會에 있던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9인의 모인 뜰 주위는 잎이 무성한 울타리로 감싸고 넓게 열린 왼쪽은 보름달, 밤안개, 냇물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모임의 장면으로 유도하면서 그윽한 雅會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古松流水館 李寅文,  松石園詩社雅會圖,  32×25.5cm,  종이에 수묵담채




김홍도의 환어행렬도



1795년경. 견본채색, 156.5 x 65.3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정조 재위 동안, 줄곧 아주 중요한 국책사업에만 참여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세자 릉의 이전이었고, 거기에 관한 많은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이 환어행렬도는 정조의 어머니인 해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면서도,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지극히 보여주는 사업의 일환으로
사도세자의 릉이 있는 화성에서 홍씨의 환갑잔치를 열고 거기에 대해 남긴 기록화이다.

그 동안의 기록화가 상당히 까다로운 격식하게 제작되어서 매우 경직된 화면을 보여줬던 것에 비해,
이 그림은 매우 율동적인 행렬장면을 보여준다. 행렬장면은 변화무쌍하고, 장렬하다.

아마도 밑그림은 김홍도가 그리고, 김득신 등의 당대 최고 화원들이 투입되어 완성한 그림인 듯 한데,
단원이 51세가 되던 해의 작업으로 그의 인생에 둘도 없이 영광되고 거대한 작업이었다.



을묘년화첩(乙卯年畵帖)

밑의 병진년화첩보다 1년 앞서 그린 화첩이다.



김홍도. 을묘년화첩 중 해암호취도. 1795년, 지본수묵담채, 23.2 x 27.7cm, 개인 소장.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으로, 단원이 완숙기에 이르렀을때의 작화력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붓질이 꼼꼼하기 그지 없으며, 구도나 세부묘사가 상당히 세련되어있다.
바위나 매의 당당한 모습은 완숙기의 이르른 단원 붓질의 당당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작품은 이른바 [을묘년화첩(을묘년화첩)]에 들어 있던 것으로 이 화첩에는 이외에도
[취화사(醉畵史)] 圖印이 있는 松鹿圖 등 8~10점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이 화첩의 그림들은 모두 같은 지질의 고급 중국 화선지로 되어 있는데
전하는 바로는 화첩 자체가 당시의 중국식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을묘년화첩은 단원이 연풍현감(延豊縣監)에서 퇴임하여 50대에 막 들어서면서 그린
記年이 확실한 작품으로 그의 화풍이 편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화첩과 그 이듬해에 그린 병진년화첩에서 그의 50대 초반 화풍을 보면
단원은 이 무렵부터 그의 개성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암호취는 해안의 괴암 위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응시하고 있는 독수리를 그린 것인데
바위의 위용에 초점을 맞추어 동세가 강한 파도를 힘찬 필치로 구사하고 있다.
운필이 빠르고 농담의 변화가 능숙하며 설채(設彩) 또한 선결하여
50대 초 단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명작이라 할 수 있다.
('9인의 名家秘藏品展' 도록에서 발췌)

 



김홍도의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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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52세 作), 수묵담채, 가로 31.6cm X 세로 26.7cm


김홍도는 40대 후반에 이르러 일상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속이나, 인물, 화조의 소재를
산수배경 속에 그려내는 '사경산수(寫景山水)'의 경지를 보여주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사경산수'의 대표작이다.

산수를 배경으로 영모(翎毛)를 나타낸 것인지, 아니면 산수화에 부분으로 새들을 등장시킨 것인지 구별이 힘든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단원에게 있다. 52세때 그린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앞선 바로 전해의 그림
<을묘년화첩(乙卯年畵帖)>의 <해암호취도(海巖豪鷲圖)>에서도 이 점을 엿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즐겨 그린 학(鶴)이 등장하는 화면은 대체로 유사한 양식들이라 하겠다.

모두 20점 중 9점이 영모로 분류되긴 했지만 계수나무에 등장시킨 새를 제외하곤 예외없이 배경산수를 갖춘 것들이다.
비교적 크게 등장된 독수리인 ‘호취(豪鷲)’나, 유조(柳鳥)‘에 있어서도 폭포나 시내가 등장 된다.
9점의 그림 가운데 독수리, 꿩, 까치, 구욕새를 제외하곤 오리, 해오라기 등 하천과 더불어 등장된 물새들이며
물가정경이 주류를 이룬다 하겠다. 이 외에  <해암호취>처럼 넘실대는 파도 등 바닷가를 배경으로 물새를 그린 예도 적지 않다.

이 일련의 그림이 보여주듯 김홍도의 영모화는 타인에게서 찾기 힘든 독자적인 양식으로, 그의 실경산수처럼 우리 산천의
한 자락을 배경으로 경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끔 새들을 등장시킨 고유색 짙은 독자적인 화풍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병진년화첩은 단원의 대표작들이 모아진 화첩으로, 회화적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작품들이다. 최근에 위작 논란이 불거졌지만,
위작이라고 하기에는, 필치가 소탈하고 구도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 현재까지 단원의 기준작이면서 대표작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 화첩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옥순봉도가 꼽힌다. 완숙기에 이르른 중년의 단원의 솜씨를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아래의 그림들은 이 화첩의 대표작으로 단양의 실경을 그린 것들이다.



1. 옥순봉(玉筍峰)


『병진년화첩』중 <옥순봉도>. 종이에 담채, 26.7×31.6cm, 1796년(52세), 호암미술관 소장.

지금은 충주댐에 허리춤까지 잠긴 옥순봉의 준수한 봉우리를 해맑은 필치로 잡아냈다.
『병진년화첩』에는 산수 10폭, 화조 10폭이 들어  있고 각 폭마다 구룡산인 김용진의 소장인이 찍혀 있다.



평민으로 돌아온 50대의 단원은 이제 구속받을 것 없이 맘껏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단원은 산수. 화조.인물 같은 일반 감상화에서 전과는 다른 명작을 쏟아낸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51세의 『을묘년화첩』과 52세의 『병진년화첩』이다.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바로 그 해. “을묘년 가을에 김경림(金景林)에게 드린다” 는 관지가 들어 있는 『을묘년화첩』은 본래 8폭 화첩이었으나 지금은 낙질되어 <총석정도(叢石亭圖)>와 <해암오취(海巖豪鷲)> <송록도(松鹿圖)> 3폭이 이 화첩을 대표하고 있다. 

『을묘년화첩』은 이제까지 단원의 화풍과 달리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화상의 묘사에 생략이 많고 붓길이 빠르며 강약의 리듬이 강하게 구사되어 달인의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필묵과 화면 구성 모두에서 대가다운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구체적으로 『을묘년화첩』의 <총석정도>와 45세에 그린 『금강사군첩』의 <총석정도>를 비교해보면 과연 이것이 같은 화가의 그림일까 의심이 갈 정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40대까지 단원의 그림에는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성이 있었다. 그러나 50대 단원의 그림에는 이처럼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의 구사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겸재 정선이 50대에 들어와 일으킨 자기 변신과 똑같은 과정이다. 40대까지는 수련과 연찬을 성실힌 수행하다가, 50대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가들의 이런 모습은 이 시대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옥순봉의 전설;

『……충북 단양군에 있는 봉우리로 희고 푸른 바위들이 대나무의 筍 모양으로 천여 척이나 힘차게 치솟아 있다. 마치 절개있는 선비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으므로 옥같이 깨끗한 지조를 지닌 대나무 순이라는 의미로 옥순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옥순봉은 원래 청풍군에 속해 있었는데, 조선 명종 때의 퇴계 이황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자, 그 때 관기인‘두향’이가 이 아름다운 산을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퇴계선생이 청풍군수에게 부탁을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봉우리를 내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퇴계선생은 옥순봉 석벽에 <단구동문>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을 단양의 관문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 도담삼봉(島潭三峰)


『병진년화첩』중 <도담삼봉도> 종이에 담채, 26.7×31.6cm. 1796년(52세), 호암미술관 소장.


<도담삼봉도>는 마치 헬기를 타고 가며 찍은 듯 먼 부감법에 삼봉의 움직임이 나타나 있다. 그 능숙한 구도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을묘년화첩』을 그린지 6개월 뒤인 병진년(1796) 봄에 그린 『병진년화첩』은 두 권으로 각 권에 산수화 10폭, 화조화 10폭이 들어 있다. 낙관은 <옥순봉도(玉筍峰圖)> 한 폭에만 되어 있지만 재질과 필치, 화첩 구성으로 보아 원래는 한 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화첩의 그림 중에는 <옥순봉도> <도담삼봉도(島潭三峰圖)> <사인암도(舍人巖圖)> 같은 단양의 실경이 들어 있어 연풍현감 시절에 인근 단양을 즐겨 유람했거니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의 이런 진경산수들은 한결같이 온화하고 서정적이며 조용한 文氣가 흐른다. 이는 박진감 넘치는 겸재의 진경산수와는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겸재는 남성적이고 단원은 여성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사인암(舍人岩)



사인암(舍人岩)의 경관은 경탄을 자아낼 만하다.
자색(紫色)의 수직벽에 가로 세로로 불규칙한 절리(節理)가 비구상(非具象)의 화폭을 펼쳐 노송을 멋지게 그려냈다.
그리고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솟아 오른 절벽이 남조천에 반영되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사인암이란 이름은 우탁(1263~1343년)이 '사인' 이란 벼슬을 지낼 때 이곳에서 노닐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암벽에는 우탁의 친필 감회가 새겨지고, 시비에는 우탁의 탄로가(嘆老歌)가 전한다.










김홍도의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



김홍도 추정, 18세기 작품, 종이에 채색, 21.7cm x 14.7cm, 호암미술관 소장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고 기록에 나오는 바
김홍도의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중앙박물관소장

 


김홍도의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



1800년, 견본담채, 125 x 40.5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우측 그림이 제8폭 가가유름도 (家家有凜圖)



김홍도가 56세 되던 해에 그린 작품이다.
주자의 시의 뜻을 담아 올린 작품으로 정조는 이 그림을 받고 매우 감동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이미 김홍도의 식견이 주자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일개 화원을 도학자로 인정을 한 것이다. 이런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 그림에는 김홍도 회화의 개성이나, 수법의 완결적인 면모가 보인다.
조선의 풍속이 가득한 뒤로, 마치 금강산 같은 조선의 산천이 펼쳐져 있다.

정조는 이 그림을 받은 뒤 얼마 안되어 서거하고 만다.
김홍도가 이러한 걸작을 정조에게 올릴 때만 해도, 감히 생각지 않았을 일. 정조는 붕어하고 만다.
정조는 그의 일생에 있어서 최대의 후원자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를 잘 이해하는 벗이기도 했다.
그러한 사람이 돌아갔으니 김홍도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후의 사정은 김홍도에게 비참하게 돌아가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때부터 그에 대한 기록도 적어지게 된다.

김홍도는 정조의 특별 배려를 받아 화원이 치뤄야 했던, 자비대령화원 시험에도 정조년간은 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장 최고의 중요한 작업들만 김홍도는 맡았다.
하지만 순조 즉위 이후 비참하게도 단원은 자비대령화원 시험을 보아야 했고
자신보다 수십년 어린 화원들과 경쟁해야 되었다. 단원의 신세는 그렇게 처량해졌다.



김홍도의 삼공불환도



1801년, 견본수묵담채, 133.7 x 418.4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57세 되던 해에 그린 그림



단원의 풍속, 산수 모든 것이 축약된 기념비적 걸작이다.
'삼공의 자리를 주더라도 초야에 묻혀사는 즐거움과 바꾸지 않겠다'는 뜻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 사후 고단해진 김홍도는 더욱 도가적, 선적인 세계에 침착하게 되는 듯 하다.
삼공불환은 중국의 시(詩)이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이나 가옥은 모두 조선의 것이다.
그림은 화재를 입어 다소 손상되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김홍도의 고사인물도



김홍도. 고사인물도 중 '융봉취하'




김홍도. 고사인물도 중 '무이귀도'
지본담채, 111.9 x 52.6cm, 간송미술관 소장.



50대 후반에서 거의 60이 다되서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산수를 그린 필선이 거칠기 짝이없다. 점묘는 지극히 불규칙하며 그림 전반적으로 상당히 매마른 느낌을 준다.
겨울 풍경이라서 더욱 그렇겠으나, 먹을 극도로 아껴써 뻑뻑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보며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온통 비운 듯한 화면 속으로 그 뜻이 가득하여, 보는 사람의 가슴을 가득채운다.
말년의 대교약졸의 경지는 바로 이런 그림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대교약졸 大巧若拙 - 매우 공교한 솜씨는 서투른 것같이 보인다는 뜻으로,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은 뽐내거나 과장하지 아니하므로 도리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지본담채, 164 x 76cm, 개인 소장.


'늙은 나이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네'라는 두보의 시구를 두고 그린 그림이다.

화면은 대부분이 여백이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변의 토파와, 배 한척 그리고 매화가 피어있는 산등성이이다.
산등성이 아래와 위로 자욱이 안개가 피어올라 있다. 모두 선적인 화경에 무르익은 노인 단원의 수법이다.

이러한 그림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그가 만약 겸재처럼 80을 살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대한 걸작들을 보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노경의 그림이 더욱 무르익으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지 궁금한 일이지만 그 궁금증을 안타깝게도 풀 수 없다.

정조는 불시에 단원을 불렀다가 때마침 조윤형, 유한지 등 당대 최고의 서예가들과 단풍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거꾸로 궁중의 술과 안주를 보내어 다시 가서 놀게 하였다고 한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지본담채, 117.2 x 52cm, 간송미술관 소장.


녹음방초(綠陰芳草) 무성하고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백화(百花)가 만발하는 늦봄 어느 화창한 날에
젊은 선비가 춘정(春情)을 이기지 못해 문득 말에 올라 봄을 찾아 나섰다가 길가 버드나무 위에서
꾀꼬리 한 쌍이 화답(和答)하며 노니는 것에 넋을 빼앗긴 채 서서 바라보는 장면을 사생(寫生)해 낸 그림이다.

꾀꼬리의 화답 장면과 넋 나간 선비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려는 듯 버드나무는 간결하게 처리하여 길섶 한곁으로 몰아놓고
선비 일행을 큰길 가운데로 내세운 채 나머지는 모두 하늘로 비워둔 대담한 구도를 보이었는데,
선비와 말을 모는 떠꺼머리 총각의 의습선(衣襲線)은 단원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철선묘(鐵線描)로 처리하여
조선옷이 가지는 넉넉하면서도 예리한 옷맵시를 유감없이 표현해내었다.

반면 갓과 말 그리고 길섶 풀들은 먹의 번짐만을 이용하였으니 철선묘와 대조를 이루어 조화를 얻게 하려는 의도일 듯하다.
이런 봄냄새 물씬 풍기는 그림에 단원과 동갑인 그림 친구인 고송유수관(古松流水觀) 이인문(李寅文, 1745~1824)은
이런 제화시(題畵時)로 춘정에 공감한다.

아리따운 사람이 꽃 밑에서 천 가지 소리로 생황을 부는 듯하고, 시인의 술동이 앞에 황금귤 한 쌍이 놓인 듯하다.
어지러운 금북(북은 베짜는 도구)이 버드나무 언덕 누비니, 아지랑이 비섞어 봄강을 짜낸다.



김홍도의 절로도해도



지본담채, 105.5 x 58.3cm, 간송미술관 소장.



기로세연계도 (耆老世聯契圖)



1804년, 견본담채, 137 x 53.3cm, 개인 소장.


발문 내용

송도는 예로부터 이름난 고을로 산수와 인물이 출중한데, 만력 정미 년간(1607)에 송도의 장로들이
낙사(洛社) 기영회(耆英會)와 서경(西京) 구로회(九老會)의 고사를 본받아 계를 조직하고
신의와 화목을 도모한 일을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어 왔는데, 이번에 또 계원 중의 후손 집에서
그 유도(遺圖)를 보게 되어 그때의 즐거움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그 계가 결성되었으니 갑자년(1804) 늦은 가을이었으며,
계가 끝난 다음 김홍도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하였다.
단풍이 든 뒷산은 송악이고 그 아래가 만월대이며, 여기 모인 사람이 모두 64인이었는데,
그 계원 중 한 후예인 장모군(張某君)이 서(序)를 부탁하여 적었다.



발문의 내용을 통해 보면 계 모임이 고려 시대의 기로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모임을 기념하고 그 내용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화공 김홍도를 시켜 이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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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세연계도>는 개성 만월대에서 문인들이 계 모임[契會]을 하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1804년에 김홍도에 의해서 그려진 이 그림은 비단에 옅은 채색을 사용하였으며, 계축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의 계회도는 대체로 위쪽에 전서체로 계회의 명칭을 적고, 중간의 넓은 화면에 산수를 배경으로
계회 장면을 도시하며, 아래에는 참석자들의 성명, 생년, 과거급제년도, 위계, 관직 등을 적은 좌목을 마련하는 식의
매우 독특한 이른바 계축(契軸)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거쳐 후기로 넘어가면 이 계축은, 보다 편리하게 볼 수 있고 기록이 쉬우며
보관이 손쉬운 계첩(契帖)으로 점차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기로세연계도>는
조선 후기에 그려졌으면서도 형식은 조선 초기와 중기 이래의 계축의 전통에 따르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 하다.

<기로세연계도>의 화면 위쪽 여백에는 장문의 발문이 적혀 있는데, 이 글은 쓴 이는 당대의 문신 홍의영(洪儀泳)이다.
그 아래 ‘耆老世聯圖’라는 그림의 제목을 쓴 사람은 전서와 예서를 잘 써서 당대에 이름이 높았던 유한지(兪漢之)라는 사람이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기로회(耆老會)에 참석한 64인의 성명과 관직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계회는 기로회에 등록된 사대부들의 친목과 예우를 위해 벌이는 잔치이고,
계회도는 그 행사의 내용을 기록하여 대대손손 전승하기 위해 그려지는 그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사에 참여한 기로들의 주문에 따라 권위와 위엄과 기교가 앞선 그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같은 목적에서 그려진 <기로세연계도>는 김홍도의 붓질을 만나 그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다.
고상하다든지 권위가 있다든지 하는 느낌보다도 구수하고 익살스러운 표현이 앞서 있다.

화가 김홍도의 그림도 산수화나 신선도 같은 본격적인 작품에는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익살이나 구수함보다는 높은 품위와, 그의 영감에서 오는 세련된 아름다움이 앞서 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그림의 대상을 이러한 흥겨운 잔치의 생태 속에서 잡으면 익살과 흥겨움이
붓끝과 그의 가슴 속에서 용솟음쳤던 것이다.
이것은 단원이 서민 사회의 생태를 너무나 잘 보고 잘 알고 또 사랑했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로세연계도>의 화면 위쪽에 보이는 산이 개성의 송악산이고, 그 앞쪽에 높직하게 차양을 덮어 친 곳이 만월대이다.
대(臺) 중앙에 큰 잔칫상이 하나 놓여 있고, 이를 중심으로 계원들이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앉아 있다.
발문(跋文)에서는 계 모임에 참석한 계원의 수가 64인이라고 했지만 그림에는 66인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 중 2명은 계원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 인물이 어느 인물인지 그림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저마다 일인용 술상을 받고 앉아 있는 계원들 앞에 시중 들고 있는 동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앞쪽 계단 위에는 잔치의 흥을 돋우는 풍각쟁이들이 일렬로 앉아 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그들 앞쪽에서 두 명의 무동(舞童)이 풍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회장 오른쪽에는 음식을 장만하는 가건물이 보이고, 그곳에서 음식을 내어 오는 아녀자들의 걸음이 바쁘다.
주변 마당에는 계원을 태우고 온 것으로 보이는 말, 그리고 계원을 따라온 것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서성이고 있다.
왼쪽 소나무 아래에는 계회에는 관심이 없는 듯 따로 춤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모를 둘러싸고 자기네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는 술꾼들도 보인다.

전체 화면에 등장하고 있는 250여명의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어린이, 마부, 그리고 저 혼자 술에 취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취객, 심지어는 벙거지를 쓰고 밥 빌러 온 거지의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는 연회장 주변 풍경은 동네 잔치를 방불케 한다.




기로연의 성격과 행사풍속

기로연은 기로소(耆老所:조선 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등록된
나이 많은 문신들을 위해 국가에서 베풀어주는 잔치를 말한다.
기(耆)는 ‘나이가 많고 덕이 두텁다(年高厚德)’는 뜻을 지녀 나이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기로연은 매년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 그리고 중양(음력 9월 9일)에 베풀어 졌다.

조선 시대의 기로연 잔치 풍속을 보면, 연회에 참석한 문인들은 먼저 편을 갈라 투호놀이를 한 뒤,
진 편에서 읍하고 서서 술을 마시는데, 이때 풍악을 울려 술을 권하였다 한다.
이러한 의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잔치를 열어 크게 풍악을 울리고 잔을 권하여
모두 취한 뒤에 끝냈고, 날이 저물어서야 부축하고 나왔다. 기로연은 조정이 사대부들을 위해 베푸는
일종의 경로잔치이지만 풍류적인 성격이 짙게 풍기는 모임이었다.

연회를 치르고 나면 그 모임의 내용을 기록하고 전승시키기 위해 화공을 시켜 그리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참가자 수만큼 계회도를 그려서 각자의 가문에 대대손손 물려 가며 보관토록 했다.
그렇다고 하지만 64명의 기로들을 포함해서 무려 250여명의 인물을 그린 〈기로세연계도〉의 경우도
참석한 기로들의 수만큼, 그러니까 64장의 그림을 그려 계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김홍도의 미공개 화첩


단원이 60세 전후의 말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10폭의 수묵담채화로 이뤄진 미공개 화첩이
2007년 7월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일반에게 공개됐다. 일본의 개인 소장자가 내놓은 것으로 각 그림의 크기는 37.8×33.8cm.

이 화첩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를 곁들여 생생하게 표현해냈으며
단원의 절정기 화풍의 경향과 특색이 고루 반영된 명작이다. 그림마다 ‘단구’, ‘단노’ 같은 말년 호를 낙관한 경우가 많고,
담담한 조선풍 인물 표현과 자유로운 묵법 등이 원숙기 화풍임을 알려준다.

기존에 알려진 단원의 말년작 대부분의 주제가 산수, 화조인데 비해
이 화첩에는 인물위주의 풍속화가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또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던 단원의 행서, 전서 화제까지 함께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화폭마다 관지(款識)와 도서(圖書)를 달리해
단원 연구에도 특별한 자료적 가치를 갖는 작품이라고 서울옥션측은 설명했다.

기존 단원 화첩으로는 50대 작품인 병진년 화첩(호암미술관), 단원 일품화첩과 금강산 사경화첩(이상 간송미술관) 등이 전하는데,
이번 미공개 화첩은 문헌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어서 단원의 그림 세계를 연구하는 데 좋은 추가 자료로 평가된다.





수보리구경[須菩提究竟]

석가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수보리가 험난한 산행을 통해
참선하는 가운데 포말이 이는 물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

수보리는 바라문 최고 출신으로 천방지축 망나니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다가, 석가모니를 만나서
불문에 귀의하여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종국에는 석가모니 제자중에 으뜸이 되었다고 한다.




수차도[水車圖], (가로32.9cm,세로28.6cm)

수차를 힘차게 밟으며 밝은 표정으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인물을 그린 것.
물줄기를 퍼올리는 수차의 두 바퀴 사이 수로를 등짐 진 젊은이가 지팡이를 짚은 채 올라가는 모습이다.
짙은 필선으로 그려진 수차 바퀴가 화면을 가르고 돌아가면서 그 옆 옅은 묵선의 물줄기와 대비되는 구도를 보여준다.




구년면벽좌선(九年面壁坐禪)

달마의 면벽좌선 모습을 그린 것.
인내와 각고의 수행을 대표하는 모습을 빠르고 거침없는 필선으로 회화미의 절정을 보여 주고있다.




유상독조[柳上獨鳥]

중국 명대 절파풍의 화조화가 여기(呂紀)의 필법을 본떠
버드나무에 앉은 새 한 마리를 그린 그림




무인식성명[無人識姓名]

한적한 들길에 동자 1명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있는 인물을 그린 그림



계색도[戒色圖]

웃통을 벗고 부채를 든 남자가 잡은 물고기를 응시하는 장면을 포착한 그림



지팡이를 든 두 맹인

호방하고 원숙한 필치가 돋보이는 그림.



낙타를 탄 몽골인

당시 중국풍물을 다룬 이색적인 풍속화



묘길상[妙吉祥]

북한 금강산에 있는 마애불좌상인 국보 제46호 묘길상의 주변을 그린 실경산수화



화조도[花鳥圖]

중국 명대 절파풍의 화조화가 임양(林良)의 필법을 본떠 그린 그림

 



김홍도의 추성부도(秋聲賦圖)




朝鮮 1805年  종이·水墨淡彩 /56.0×214.0cm  寶物 1393 號


이 작품은 단원 김홍도의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작품 중 가장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중국 송대(宋代)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지은 '추성부(秋聲賦)'를 그림으로 나타낸 시의도(詩意圖)이다.

'추성부'는 어느 날 밤 글을 읽던 구양수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동자에게 알아보라고 하니,
동자가 밖에 인적은 없고 나무숲 사이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자, 구양수는 이 소리가 가을의 소리임을 깨닫고,
산천이 적막해지는 가을의 자연현상과 인간사를 연관시켜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이는 단원의 불우했던 만년과 연결되어 작품에 처연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으며,
화면 우측 집에 조용히 앉아 있는 구양수의 모습은 단원 말년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김홍도의 몰년(歿年)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이 그림을 그린 직후인 1806년경 사망했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화면 중앙에는 초옥(草屋)에 앉아 있는 구양수와 마당에 서서 숲을 가리키는 동자가 보이고,
좌측 위에는 '추성부' 전문(全文)이 단아한 행서체(行書體)로 정성스레 쓰여 있다.

화면 우측에 회갈색의 설채(設彩)로 메마른 가을산을 그리고, 산 능선 위로 갈필(渴筆)로 음영을 주어
스산한 가을밤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왼쪽 위의 '추성부' 전문(全文)은 김홍도가 직접 쓴 것이다.

군데군데 지두화법(指頭畵法)을 겸용한 꼿꼿한 필치와 삼각형의 산의 형태, 가지가 몇 개로 정돈되고
불규칙하게 꺾인 나무의 모습 등은 갈필과 함께 김홍도 만년기의 특징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김홍도의 '月下聽松圖'


月下聽松圖  34.7 ×  29.2cm  종이에 수묵담채

단원 김홍도의 월송파석실(月松芭石室)은 송은 이병직 구장품으로 
그림의 소재나 정경에서 소박한 선비의 삶과 철학이 구김살 없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처음으로 일반 공개되는 이 그림의 화제에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요, 부귀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기도 어려운 일이라. 
작은 창 고요한 밤에 향 피우고, 단정히 앉아 솔바람 소리 듣느니만 하리.’
라 하여 
강직하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선비의 소박함을 드러내어 마치 소동파의 귀거래사를 연상시킨다.

전 소장자 송은의 소장인이 찍힌 이 작품들은 이미 간송미술관이나 호암미술관으로 옮겨져 그 빛을 발하고 있거니와 
이 그림 오른쪽 하단 소인에도 ‘이병직보진장’이라는 금인이 찍혀있어 명작의 기쁨을 더해준다.













김홍도의 걸작소품전


김홍도의 총석정(叢石亭)




관서 우상(右上)의 두인(頭印)은 백문타원인(白文楕圓印)으로 인문(印文)은
心醉好山水(좋은 산수에 마음이 취하네)’이고 말미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은‘金弘道印’이다.

관동의 천하 절경인 총석정을 자그마한 화폭 속에 무한한 공간과 독특한 시정이 느껴지도록 그려내었다.
그 공간감의 확보는 구도상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 그어지는 대각선의 아래편에
주요 경물을 몰아붙이고 윗편을 상대적으로 탁 트이게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주제인 총석을 화면의 정중앙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전혀 옹색해 보이지 않는다.

우변 전후의 소나무 크기의 현격한 대조는 원근의 깊이를 시사하며,
나란히 선 총석들의 농담의 변화 역시 절묘하게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좌변의 파도가 뒤로 가면서 점점 작어지고 흐려져서 백면화(白面化)하는 데에서는
무한한 공간감과 시정이 느껴진다. 바위에 부딪는 물보라 위로 날아가는 두 마리 물새 역시
드넓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시사하면서 화면에 생동감을 준다.

<총석정(叢石亭)>은 단순한 진경산수화라기보다
보는 이에게 한 편의 아름다운 사경시(寫景詩)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김홍도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



종이 채색, 30.1x46.1cm, 간송미술관 소장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갖고 노는구나.
놀랍기만 하다. 고양이도 살아 움직이고 나비도 훨훨 날아 다닌다.
그러면서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풀 한 가닥에도 정성을 담았고 패랭이꽃 마른 잎사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누가, 단원을 따를 것인가. 산수, 인물, 풍경, 동물, 곤충, 꽃... 못 그리는 게 없다.
못 그리기만 하나? 할 말을 잃게 해서 탈이다.






김홍도의 해탐노화도



종이 수묵담채, 23.1x27.5cm, 간송미술관 소장


바닷게가 갈대꽃을 탐하다.
게 두 마리가 갈대꽃을 서로 먹으려고 다투는 중이다.

게는 무슨 뜻일까? 갈대꽃은...

과거 급제를 축원하는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고 간단한 그림이나, 그림의 필치나, 붓의 필치가 자유분방하고 경쾌하기 그지없는,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그림이다.
딱딱한 뜻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격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서, 볼때마다 느끼는 산뜻함이 대단하다.
 



김홍도의 염불서승도



저본담채, 28.7 x 20.8cm, 간송미술관 소장.


비록 소품이나, 단원회화의 신경지이며, 한국 회화의 신경지를 보여주는 초월적 작품이다.
비록 작은 소품이나, 그 가치가 국보로 지정되기에 아깝지 않다고 여겨진다.

노스님이 뒤돌아 좌선을 하고 있고, 달은 크게 떠서 불광을 월광이 대신하고 있다.
동양화단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유연해진 노화가의 붓질 속에서 극도로 창의적이고 초월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스님 밑으로 연꽃이 무리무리 피어있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어,
말년 선불교에 심취했던 단원의 취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김홍도의 하화청정도



지본채색, 32.4x47cm,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이 중년에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작품으로, 알록달록한 색채가 가미되어 있는 작품이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상당히 연꽃그림이 인기를 끌었는데,
청나라의 연꽃그림들과는 달리 상당히 담백한 조선적인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한 연꽃 위로 푸르고 빨간 잠자리 한마리가 음양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더더욱이 양을 뜻하는 빨간 잠자리가 상승, 파란 잠자리가 하강하는 듯 하여  태극상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화사한 그림이 아닌, 태극적 원리를 내포한 그림인 듯 싶다.



김홍도의 창해낭구도



지본담채, 38x49.2cm,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의 노년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매우 무르익은 구도와 자유롭고 소탈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이 많이 변색하여, 원래의 맛은 많이 잃은 듯 한데,
본래에는 널리 차지한 여백이 상당한 깔끔함과 품격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보니, 변색되고 벌레가 먹은 듯 한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거침없고 힘있는 필치며, 단원이 얼마나 자유자재로 붓을 놀렸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그림 중에 하나이다.



김홍도의 범급전산도



지본담채, 28.7x37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단구 낙관의 말년 작품으로, 파도의 표현이 상당히 제멋대로이다.
노년에 이룩한 대교약졸의 경지를 보여주는 소탈한 작품이다.

인물은 단원이 이룩한 조선풍속화풍으로 단순하지만 상당히 운치있고 절묘한 작품이다.



김홍도의 쌍치도



견본담채, 23.4 x 17.8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아마도 더 큰 그림에서 잘려나온 부분인 듯 한데, 그렇다 보니 구도가 약간 이상하다.
노년의 작화풍을 보여준다.



김홍도의 해학도



견본담채, 21.3 x 18.2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모구양자도
어미개가 새끼를 돌보다



종이 수묵담채, 90.7x39.6cm, 간송미술관 소장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야 사람이나 동물, 모두 한 가지일 터.
그림 위에 탈 없이 잘 자라 달라는 글이 적혀 있다.

김홍도도 강아지를 좋아했나 보다.

귀가 축 늘어지고 꼬리가 풍성한 저 어머니 개는 무슨 종인가?
옛 화가들의 그림을 볼 때마다 요즘 보기 힘든 개들이 등장하는데, 까닭을 모르겠다.
흔한 개였는지, 아니면 수입개가 그때도 있었던 건지...



김홍도의 습득도



비단 수묵담채 21.5x15.2cm 간송미술관


이 그림은 습득도, 습득이란 사람을 그린 그림이다.
습득은 중국의 행각승. 구걸하면서 도를 닦던 사람이었다.

김홍도가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 불교와 관련된 그림이 많다.

나이를 먹으면 종교에 기대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면 도를 깨우치고 싶어지는 걸까?
그도 아니면 인생을 되짚어보고 싶어지는 걸까?

등을 보인 채 쪼그리고 앉은 남자. 무슨 생각에 잠겨 있나 궁금하다.



김홍도의 묵죽도






김홍도의 부상도(負商圖)



18세기 말 ~ 19세기 초, 종이에 수묵담채, 가로 38.5cm 세로 27.0cm


김홍도의 풍속화는 일상적인 서민 생활의 단면을 흥미롭고 실감나게 표현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작품은 무거운 봇짐을 지고 성벽 밑을 지나가는 두 사람을 묘사하여
단원이 만년에 이룩한 시정 넘치는 풍속화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쓰여진 "단구(丹邱)"는 김홍도가 만년에 단원(檀園)과 함께 즐겨 사용한 별호(別號)입니다.



김홍도의 선인야적(仙人夜笛)



중앙박물관소장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인물이 비교적 크게 부각된《선인야적(仙人夜笛)》은
오른쪽 상단을 비운 변각 구도이다. 세선(細線)으로 윤곽선을 긋고 그 아래 담청(淡靑)을 입혔다.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태점(苔點)과 짧은 직선을 거듭 그어 양감을 낸 바위는 좌측 상단에 무게 중심을 준다.
마치 이 무게를 줄이려는 듯 인물의 표현은 완만하고 고른 필선을 사용해 30대에 그린 신선들과는 차이를 느끼게 한다.

옷에 담청이 칠해져 있으나 옅어서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며, 앞으로 넘어질 듯 가파르게 반가부좌를 한
선인의 자세는 바위 아래에 제법 잔가지가 많은 나무를 그려 넣음으로써 보완하고 있다.
나뭇가지 끝에는 연두빛 새순이 돋아나 봄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제발(題跋)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얼굴 표현에 있어 도드라진 부분은 마치 햇볕에 반사되어 희게 보이듯 가채(加彩)하였고,
목이나 얼굴 옆부분의 살색은 그의 신선도에서 공통적으로 살필 수 있는 채색법이기도 하다.

약초를 캐러 산에 올라갔다가 잠깐 쉬는 듯한 모습으로 끈이 있는 바구니에는 영지(靈芝)가 보인다.
굳이 어떤 신선을 의식해서 그렸다기보다는 많은 도석 인물화를 누차 그리던 중에
자연스레 붓끝에서 나오는 선인(仙人)을 사경산수(寫景山水)를 배경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의 선인취소도(仙人吹簫圖)    김홍도의 선동취생도(仙童吹笙圖)



중앙박물관소장


선인취소도(좌측)는 전혀 배경이 없이 생황(笙簧)을 불고 있는 선동(仙童)의 모습으로
그 자세가 《선동취생도》와 비슷하고 필치도 같아서 김홍도가 비슷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허리를 조금 구부린 형태일 뿐 옷 모습과 등에 멘 호로병까지 동일하여 남본(藍本)으로 여럿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또한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의 한 폭으로도 추정된다.
인물 표현에 있어 의습(衣褶)의 유연한 필선은 난엽준(欄葉준)이며
바람에 나부끼는 형태를 몇 개의 단순한 선묘(線描)로 성공적으로 나타냈다.
설채(設彩)도 담채(淡彩) 위주이며, 호로병, 짚신의 앞 부분, 생황 부분, 입술 등의 붉은색이 돋보인다.

우측의 선인취생도 역시 화면에 배경없이 피리부는 선동(仙童)을 그렸다.
오른쪽 상단에 '사능사(士能寫)'라 묵서하였고, 백문방인 '홍도(弘道)', 주문방인 '사능(士能)' 2과(顆)가 찍혀 있다.

선동의 자세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폭병풍 <신선도> 중 선동취적도와 똑같으나 사슴은 생략하였다.
색깔은 선명하나 <신선도>보다 다채롭고 고아한 맛이 없으며 얼굴 및 세부에 있어 섬세함이 떨어진다.



김홍도의 하지장도(賀知章圖)



중앙박물관소장


《지장기마(知章騎馬)》는 문기가 있는 서화(書畵)가 일치된 작품으로,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편화로 생각된다.
배경을 도외시하고 마치 이즈음의 삽화와 같이 갈필(渴筆)로 간략히 나타낸 것으로
여기화가(餘技畵家)의 묵희(墨戱)같아 보이기도 한다.

간기(干紀)가 좌측에 있는데 '갑자랍념단구사우서묵재(甲子臘念丹邱寫于瑞墨齋)'로서
1804년 동지 후 12월 20일 서묵재(瑞墨齋)에서 그렸다는 것이다.

주문방인(朱文方印) '홍도(弘道)'에 이어 백문방인(白文方印) '취화사(醉畵士)'가 있다.

'지장은 말 타기를 배 타듯 한다. 취중 몽롱하여 우물 가운데 떨어져 잠드네'(知章騎馬似乘船眼花落井水底眠).

이 시는 두자미(杜子美)의 음중팔선(飮中八仙)의 첫 구절이다.
김홍도는 당시(唐詩)에 심취하여 그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와 화면에 나타냈다.
옅은 홍색으로 인물의 이목구비를 나타냈는데, 이 등장 인물들은 흔히 그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다.



傳 김홍도의 화조도(花鳥圖)



중앙박물관소장


화면 상단에 주제인 매조(梅鳥)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엇비슷이 드리워졌고, 하단에는 물가의 정경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
막 핀 매화와 새들의 지저귐에서도 언뜻 초봄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밑의 잔잔한 물가에서 송사리가 노닐고 있지만
아직은 춘수(春水)가 넘쳐 흐르지는 않고 있어서 계절의 운치를 절묘하게 나타냈음을 볼 수 있다.

엇비슷이 뻗어 내린 매화 가지와 그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도 초봄의 생기를 일깨우는 듯싶고,
그 밑 봄 물가의 차분한 표정이 단원이 나타내고자 한 계절감일 것이다.

필법(筆法)은 전부 몰골(沒骨)로 먹의 농담을 적절하고 능숙하게 구사하여 강하고 약하고 잔잔한 운치를 나타냈다.
흰 매화꽃과 거기 몇 점 찍힌 다홍, 담갈색의 새깃에서 생동하는 초봄의 기운을 보게 된다.

단원 김홍도의 화풍이 독창적인 전형을 이룩한 시기는 대체로 40대 말, 50대 초로 생각되는데,
이 그림은 이 때를 넘어서 좀더 노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대체로 50대 후반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傳 김홍도의 선객도(仙客圖)



중앙박물관소장


수로인도(壽老人圖)를 좀더 확대해서 그린 것이 삼성도(三星圖)이다.
장수뿐만 아니라 복(福)이 많아야 하고 여기에 녹(祿), 즉 관직까지도 겸비하면 최상의 행운일 것이다.

이 그림은 복, 녹, 수성을 오른쪽으로 휘어지게 배치하고, 각자의 동자(童子)를 반대편으로 휘어지게 그려
이른바 'L'자 꼴로 이루게 했으며, 삼성(三星)과 삼동자(三童子)를 각각 대칭되게 배치하는 구도의 묘를 보여주고 있다.

복성(福星)과 동자는 가장 위에서 나란히 수성이 들고 있는 복숭아를 내려다 보고 있으며,
녹성(祿星)과 동자 역시 이들 바로 아래쪽에서 나란히 서서 복숭아를 응시하고 있는데, 시선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수성과 동자는 아래쪽에서 수성이 들고 있는 복숭아를 올려다 보고 있는데,
말하자면 이 화면의 중심이자 악센트는 바로 복숭아인 셈이다.

이 복숭아는 동방삭(東方朔)의 복숭아로도 생각되지만 수성(壽星)의 상징인 천도(天桃) 복숭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며,
수성의 속성인 무궁한 수명을 보장해 주는 핵심으로 이제 삼성도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傳 김홍도의 해동명산도(海東名山圖)




"초본(草本)"은 정식으로 작품을 그리기전에 그리는 밑그림으로서 대개 먹만을 사용하여 제작된다. 
초상화(肖像畵), 불화(佛畵)의 초본이 많이 남아 있으나
이 작품처럼 산수화의 초본으로써 32면이나 되는 완성도 높은 것은 처음이다.

이 작품은 표지에 "해동명산도(海東名山圖)"라 묵서 되어 있는데, 경포대로 시작하여
낙산사, 청간정, 삼일포, 해금강, 만물초, 총석정 등 금강산의 절경 32군데를 고루 담고 있으며 피금정으로 마감하고 있다.

화면내에는 지명(地名)과 실사 순서를 나타내는 숫자를 묵서하였는데 마지막 화면인 피금정에
"육십종(六十終)"이라 묵서되어 원래는 60면으로 이루어진 화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해동명산도>는 김홍도의 <금강사군첩>과 구성, 필치가 똑같아서
이 초본이 김홍도필<금강사군첩>과 강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도 초본>을 보면, 나무를 그렸다가 고친 흔적, 색채의 농도와 종류를 기록한 "심청(深靑), 수묵색(水墨色)"등의 묵서,
나뭇잎군의 대체적인 윤곽을 설정하고 그 일부에 세부적인 표현을 그린 점은 초본으로서의 기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초본의 면모는 조선시대 회화의 제작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傳 김홍도 큰머리의 여인



19세기 작품, 종이에 채색, 24.7cm x 26.0cm, 서울대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화접도(花蝶圖)




둥글고 긴 선면(扇面)을 잘 이용한 이 《협접도(협접도(蝶圖))》는 오른쪽 하단에 흰 찔레꽃을,
왼쪽으로 조금 기운 중앙에 세 마리의 나비를 나타내 산뜻한 구성을 보인다.

바탕의 회색과 선명한 채색이 함께 어울린 색채의 아름다움과 석초(石樵) 및 강세황(姜世晃)의 평과
또 한 사람의 전서(篆書) 제발(題跋)을 화면 여백에 적절한 배치하여 운치를 더한다.

오른쪽 하단에 '임인추사능사'(壬寅秋士能寫)의 간기(干紀)와 관서(款署)가 있어 단원이 38세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金弘道)의 선인기우도(仙人騎牛圖)



지본 담채, 24×33.6 cm, 개인 소장



이명기(李命基)ㆍ김홍도의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조선 후기의 사대부 초상들은 대략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장(正裝) 관복본의 공신도상(功臣圖像) 형식을 취한 위엄 있는 상이며, 또 하나는 동파관(東坡冠)이나
정자관(程子冠) 혹은 복건(幅巾)본에 심의(深衣)나 학창의(鶴창衣)를 입은 야복본(野服本)으로서 유풍(儒風)이 감도는 작품이다.

이 《서직수상(徐直修像)》은 후자에 속하는 사대부상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리나라 초상화에서는 드문 전신입상(全身立像)이다.
화폭 우측 상단의 찬문(贊文)을 보면, 당시 어용 화사로서 이름을 떨쳤던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가 안면을 그리고,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가 몸체를 그린 합작임을 알 수 있다.

동파관에 주의(周衣)를 입고 흑색 세조대(細條帶)를 두르고 실내에 서 있는 이 초상화는 얼굴과 몸체간의 비례가
균형 잡혀 있을 뿐더러, 얼굴 모습도 약간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뜬 듯한 모습에서 다부진 선비의 품격을 읽을 수 있다.

안면 처리에 있어서는 18세기 말엽의 필법을 여실히 살필 수 있다. 즉 수많은 붓질의 가감에 의해
얼굴의 도드라진 부분과 오목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옷주름 처리에 있어서도 주름으로 인해 굴곡진 부위에는 옷의 색깔보다
약간 짙은 선염(渲染)을 삽입하는 후기의 초상화법이 적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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