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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조선시대의 회화

우리의 기록역사 - 조선왕조의궤



돌아오는 조선왕조의궤
[중앙일보] 뉴스클립 2010.11.18 박정호기자

왕실 행사에 쓰인 못 하나, 동전 한 닢까지 기록 … 투명 정치 유도했죠

최근 문화재 관련 희소식 두 건이 잇따라 날아들었습니다. 먼저 일본 궁내청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의궤’ 등 150종 1205책의 도서가 연내 반환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됐던 ‘외규장각 의궤’ 191종, 297책도 돌아올 예정이죠. 외국에 빼앗긴 우리 문화재의 환수라는 측면에서 반갑습니다.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대체 조선왕조의궤는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요. 흔히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의궤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봤습니다.


중국·일본에도 없는 국가 행사 종합보고서

1795년 화성 행궁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모습

‘의궤(儀軌)’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이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 일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 뜻은 비교적 간단하다.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각종 의식의 틀을 정리한 책이다. 두고두고 참고할 만한 국정의 교과서쯤 되겠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낱낱이 기록해 후세 사람들이 참고하도록 했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다.

의궤는 요즘으로 치면 백서(白書)에 가깝다. 그런데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국왕의 명령서, 관청의 공문서, 업무 분장 등 왕실 행사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담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조선왕조의 주요 사건을 편년체(編年體·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방식)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우리 기록문화의 고갱이로 꼽힌다. 익히 알려진 대로 둘 다 유네스코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의궤는 무엇보다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문화재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의궤는 우리나라에서만 작성된 독특한 형식의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고 말했다.

왕실 안팎의 행사를 망라한 만큼 의궤의 양은 방대하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에 남아있는 것만 약 600여 종, 3000여 책에 이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도 300여 종, 500여 책이 보관돼 있다. 조만간 한국에 반환될 일본 궁내청 소장 81종 167책, 프랑스 소장 191종, 297책도 있다. 프랑스에서 흘러나간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 1종도 영국 대영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의궤의 상당수는 임금이 직접 보았던 어람용(御覽用)이라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크다. 의궤는 보통 5~9부 내외로 제작됐는데, 크게 ‘어람용’ 1부와 나머지 ‘분상용(分上用·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으로 구분됐다. 어람용은 고급 종이에다 사자관(寫字官·문서기록 관원)이 정성 들여 글씨를 썼고, 표지·장정도 호화롭게 해 책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일, 조선왕조의궤 포함 1205책 반환 확정 [중앙일보] 2010.11.09
    제실도서·경연은 제외돼 / 연내 돌아오기는 힘들 듯


일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국장(國葬) 모습을 기록한 국장도감의궤의 표지(왼쪽). 오대산상(五臺山上)은 이 의궤가 오대산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운데 사진은 명성황후의 국장 모습이 기록된 국장도감의궤의 내부 모습. 총을 메고 칼을 찬 병사들이 호위하는 모습과 가마 행렬 등 국장 당시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오른쪽은 고려와 조선시대 왕들의 교양도서였던 ‘경연’, ‘경연’은 일본이 이번에 돌려주기로 한 반환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日 소장 주요 한국문화재 어떤 게 있나 - 부산일보 2010.08.11
일본내 한국 문화재 얼마나 있나 - 매일경제 2010.11.09
    소장처 확인한 것만 6만점…개인소장까지 합하면 30만점

 


강제병합 100년 맞춰 ‘명성황후 국장의궤’ 돌아오지만 … 
석조·건축 문화재 반환도 적극 추진해야 [중앙일보] 2010.11.09

사라진 ‘조선 국보’ 일본 왕실에 있다 [중앙일보] 2010.03.24 
'조선왕실의궤'는 왜 국보가 아닐까?



왕자 태어나면서 작성 … 혼례·상차림 등 궁중생활 망라

조선왕조의궤가 다루는 영역은 넓다. 왕실의 혼례부터 잔칫상 상차림까지 포괄한다. 일종의 백과사전과 같다. 조선왕조가 성취한 문화적 수준을 확인하는 시금석이다. 그 때문에 ‘궁중생활사 연구의 보고(寶庫)’로 평가된다. 당연,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사료가 된다. 국가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만큼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의궤는 왕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작성됐다. 왕자의 태(胎)를 보관할 장소를 정하고, 태실(胎室)을 만들어 안장하는 과정을 기록에 남겼다. 왕자가 왕세자로, 왕세손으로 책봉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16개의 철 조각을 매달아 소리를 냈던 타악기 방향(方響)

물론 혼인이 빠질 수 없다. 왕실의 혼인이 있을 경우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가 작성됐다. 왕비를 간택하는 절차, 각종 혼수물품, 국왕이 왕비를 맞으러 가는 모습 등이 소상히 적혀 있다. 국왕이나 왕비가 사망했을 때는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를, 왕세자나 세자빈이 타계했을 때는 『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를 만들었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 조성 공사를 기록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3년상을 치른 후 국왕의 신위를 종묘로 옮기는 과정을 적은 『부묘도감의궤(祔廟都監儀軌)』도 있다.

국가 행사를 다룬 것으로는 『종묘의궤(宗廟儀軌)』와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가 대표적이다. 종묘와 사직의 시설 증축, 제례 절차, 제사 기물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보고서다. 조선은 농경국가였던 만큼 국왕이 서울 전농동에 있던 적전(籍田·국왕이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설정한 토지)에 나가 시범적으로 농사를 짓는 과정을 기록한 『친경의궤(親耕儀軌)』,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인들이 궁중에서 누에 치는 행사를 따라간 『친잠의궤(親蠶儀軌)』도 눈에 띈다.

여기에 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실록청의궤(實錄廳儀軌)』를, 성곽 및 건물을 지을 때는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를 작성했다. 또 궁중에 잔치가 벌어질 때는 『진찬의궤(進饌儀軌)』『진연의궤(進宴儀軌)』를 남겼다.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제작하는 과정을 적은 『어진도사도감의궤(御眞圖寫都監儀軌)』, 국왕과 신하가 성균관에서 벌인 활쏘기 시합을 옮긴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도 있다.


글과 그림 어울려 당대 생활상 촘촘히 구현

의궤는 시쳇말로 ‘디테일(Detail)의 힘’을 구현했다.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국가나 왕실 행사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기록했다. 조선 사람들의 철저함에 혀가 내둘릴 정도다. 행사에 동원된 명단, 신상 자료, 물품의 크기와 재료, 심지어 못 하나, 동전 한 닢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조선시대의 행사를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게 됐다.

예컨대 정조가 수원 화성 성곽을 축조한 뒤에 작성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보자. 거금 80만 냥을 들인 대공사답게 의궤 분량도 많은 편이다. 총 10권 9책으로 구성됐다. 공사에 참여한 기술자 명단만 1800명에 이른다. 석수(石手)·목수(木手)·니장(泥匠·흙을 바르는 기술자)·와옹장(瓦甕匠·기와나 벽돌을 만드는 기술자)·화공(畵工) 등이 망라됐다. 안돌이(安乭伊)·유돌쇠(柳乭金) 등 신분이 비천한 사람의 이름도 보인다.

화성 축성 공사에 동원된 장인(匠人)들 명단

이들의 이름 밑에는 근무 일수를 하루의 반까지 계산해 임금을 지급한 기록이 나온다. 인부들의 작업량을 세밀하게 계산해 품삯을 치른 것이다. 1975년부터 3년 동안 진행된 화성 성곽 복원 공사에 『화성성역의궤』가 주요 자료로 활용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의궤의 가장 큰 특징은 글과 그림이 함께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각종 행사의 기념사진 혹은 기념영상 같은 역할을 했다. 건축·음식·언어·복식·음악 등 당대 생활상을 현장감 넘치게 재현했다. 화려한 궁중 의식, 그리고 그곳에 참여한 관원들의 늘어선 모습을 묘사한 ‘반차도(班次圖)’가 대표적이다. ‘반차’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도열하는 것’을 뜻한다. 행사 참여 인원, 의장기의 모습, 가마의 배치 등을 생생하게 담았다.

사진이 없던 시대, 도화서(圖畵署)란 전문기관에 소속된 당대의 유명화가들이 의궤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렸다. 일례로 정조가 생부(生父)인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경모궁 의례를 정비하면서 만든 악기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에는 편종·편경·장고·생활 등 여러 악기의 세밀화가 실려 있다. 풍속화가로 유명한 김홍도는 ‘김홍도 사단’이라 불릴 만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다양한 기록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실록과 함께 왕권 견제하는 기능도

의궤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세종 때의 기록을 보면 의궤 관련 대목이 나온다. 또 성종 때 발간된 궁중음악 서적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은 의궤에 있는 악보들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각종 행사를 치르는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을 설치했고, 행사를 마치면 관련 문서와 기록을 수집해 의궤를 작성했다.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는 의궤는 모두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이란 두 차례 큰 전쟁으로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대부분 소실됐기 때문이다. 의궤는 국가의 문물과 제도를 재정비했던 18세기에 많이 제작됐다. 왕조의 국정 운영을 보다 널리 알리려는 목적에서였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계승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 했던 고종 때에도 다수 편찬됐다. 가장 나중에 나온 의궤는 1926년 순종 황제의 국장을 기록한 『순종효황제어장주감의궤(純宗孝皇帝御葬主監儀軌)』와 1929년 순종황제와 순명황후의 삼년상을 치른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을 기록한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다.

이 같은 조선 고유의 기록문화는 정치적 장치로도 작동했다. 국가 행사 모음집인 의궤는 왕이 죽은 뒤에 편찬된 실록과 함께 국왕의 독단적 국정 운영을 예방하는 기능을 했다. 국왕이 스스로를 단속하는 자극제가 됐다. 김문식 교수는 “국왕의 동정에 대한 철저한 기록은 정치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였다”며 “행사 관련 경비·물품 등을 공개함으로써 공적 자금이 사사로운 곳으로 유용될 가능성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가의 재정이 낭비되거나 전용되는 것을 줄일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의궤에 숨겨진 조선의 통치원리다.


의궤는 ‘의식(儀式)의 규범(規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정부가 치른 각종 행사와 공사(公事) 등을 기록한 일종의 ‘결과보고서’다

의궤(儀軌)는 조선 왕실에서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훗날 참고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문서를 가리킨다. 조선 왕실에서 주관하는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 기구인 도감(都監)을 두어 이를 주관하게 했는데, 행사를 마치면 도감을 해체하고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여 의궤의 편찬을 맡아보게 하였다.

의궤는 조선 건국 당시 태조 때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많은 관련 기록이 전하나 현재 조선 초기 의궤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전(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1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 기록을 남기기 위해 편찬된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이다.

보통 필사하여 제작하였으므로 소량을 제작하여 특별 제작한 1부는 어람용(御覽用)으로 왕에게 올리고 나머지는 관련 기관과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300여 책의 문서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는 일반 의궤보다 재료나 장식이
뛰어나 누구라도 한눈에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 과정을 기록으로 정리한 책이다. 필요하면 그림을 첨부하여 행사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게 하였다. 한자로 풀이하면 의식(儀)과 궤범(軌)을 합한 말인데, 궤범의 軌는 바퀴, 範은 모범이란 뜻으로 바퀴의 궤도를 따라 가듯이 유교 이념에 따라 이전 행사를 잘 이어받고 그것을 정리하여 후대에까지 전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참고하여 선왕의 법도를 계승하는 한편,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것이 의궤를 만든 주요한 목적이었다. 후대인들이 앞 시기에 편찬된 의궤를 참고하여 혼례식이나 장례식, 궁중 잔치 등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원활하게 치르게 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조선왕조 문화 절정기의 대역사를 기록한 <화성성곽의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의궤는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가 끝난 후에 제작하는 행사 보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과 같이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련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행사에 끝난 뒤에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했다. 국가적 행사를 추진 할 전담기구 설치, 의궤라는 행사 보고서 작성,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행사를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의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림이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나 각종 건물 또는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을 수록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통상 천연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는 행사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문자기록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 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의궤로 보는 왕실 문화

조선왕조의궤 : UNESCO 세계기록문화유산에 2007년 6월, 한국의 6번째 유산으로 등재. 6백여년에 걸친 조선왕실의 행사,건축물조성,문화 등을 3,895권의 그림과 해설과 기록.

의궤에는 조선시대에 행해진 다양한 왕실 행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이 왕조국가인 만큼 주로 왕실 행사와 관련된 것들이며, 왕실의 일생을 보여주는 의궤들이 많다.
왕실의 태(胎)를 봉안하고 주변에 석물을 조성한 과정을 보여주는 '태실의궤'를 비롯하여, 왕이 자라면서 죽을 때까지 겪는 삶의 과정 대부분이 의궤의 기록으로 구현되었다.

먼저 왕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왕세자의 책봉 의식과 선왕을 이어 왕이 되는 책봉 과정에 관한 의궤가 있다.

왕비도 왕과 함께 왕비 책봉식을 하는데 이에 관한 행사는 ‘책례도감의궤(冊禮都監儀軌)’로 정리하였다. 대개 왕세자 시절인 15세 전후에 이뤄지는 왕의 혼례식도 꼭 의궤로 정리하였다. 왕실의 혼례식을 가례라 하였는데, 혼례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 왕실의 최대 축제였던 만큼 그림도 많이 첨부되었고 내용도 풍부하였다.

의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의궤이다. 유교사회인 조선사회는 왕부터 백성까지 조상의 장례를 잘 거행하고 이후의 제사 의식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왕비가 사망하면 장례식이 엄숙하게 행해졌고, 장례식의 전 과정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로 편찬하였다. 이어 왕의 무덤을 조성한 과정을 정리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편찬되었고, 왕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은 ‘부묘도감의궤(祔廟都監儀軌)’로 정리되었다.

이제 왕이 되면 주관하는 행사가 많아지는 만큼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의궤가 편찬되었다. 왕이 친히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의궤(宗廟儀軌)’와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를 비롯하여,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왕이 친히 농사를 짓는 과정을 정리한 ‘친경의궤(親耕儀軌)’가 편찬되었다. 여성이 옷감을 짜는 것이 중시되었기에 왕비는 누에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짜는 친잠 행사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행사의 전 과정은  ‘친잠의궤(親蠶儀軌)’로 편찬되었다.

왕실 행사 중 잔치의 비중도 컸다. 대왕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의 최고 여성을 위해 벌이는 잔치 행사, 왕이 40세, 50세, 회갑이 되는 것 등을 기념하는 행사가 추진되었고, 잔치가 끝난 후에는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 ‘진연의궤(進宴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등 잔치 관련 의궤가 만들어졌다. ‘진연’은 ‘잔치를 베푼다’는 뜻이며, ‘진찬’은 음식을 대접한다는 뜻이며, ‘진작’은 ‘작위(爵位)을 올린다’는 뜻으로 모두 경사를 맞이하여 잔치를 베푸는 의식을 말한다. 왕실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 후에는 ‘존호도감의궤(尊號都監提調)’가 만들어졌다.


1. 왕실의 태를 봉안한 기록 『태실의궤』













2. 조선시대 왕실 결혼의 이모저모 『가례도감의궤』







『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1759년 영조가 계비 정순왕후를 맞이할 때의 혼례절차를 기록.

(중)제41~42면_영조의 가마행렬
(하)정순후의 가마행렬
『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

1866년 3월 고종이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정리한 의궤.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중 제일 오래된 것으로 1627년 (인조5년)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45)의 결혼식 장면이다. 그림의 가마 속에는 지금 소현세자의 세자비가 될 강석기의 딸 강빈이 앉아 있다.

NATE 한국학
『순종가례의궤』

1906년(광무 10) 마지막 가례도감

'왕실 혼례의 기록' 가례도감의궤와 미술사(소와당 펴냄)
가례, 가례도감의궤의 구성,




3. 국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 『국장도감의궤』







정조국장도감의궤 중 반차도부분 정조국장도감의궤 중 반차도부분

※ 국장 행렬을 그린 반차도는 발인하기 열흘전까지 완성되어야 했다. 발인은 엄숙하고 장중하게 치러야 하므로 반차도를 통해 미리 연습하고 행렬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숙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표지 명성황후국장도감 발인반차도 명성황후국장도감 반차도




4.『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에 관한 기록 『실록청의궤』















5. 왕조의 통치 질서를 표현하는 제사 기록 『종묘의궤』ㆍ『사직서의궤』















6. 왕실에서 사용한 도장에 관한 기록 『보인소의궤』















7. 국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활쏘기 시합 『대사례의궤』















8. 정조의 화성 행차, 그 8일간의 장대한 역사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의 의례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혜경궁의 회갑연은 1795년(정조 20)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화성에서 벌어졌다. 노량진 앞 한강에 배들을 잇대어 다리를 놓은 주교(舟橋)를 설치하여 100리길을 행행(行幸)하여 화성행궁에서 8일 동안 잔치를 벌였다. 회갑연 외에 행성조(行城操)·어사(御射)·사미(賜米)·양로연(養老宴) 등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정조가 이렇듯 거창하게 행사를 치른 이유에 대해 1795년이 정조 재위 20주년에 해당하는데 다 자전(慈殿)의 나이가 육십을 바라보고, 사도세자의 구갑(舊甲) 이며 혜경궁 홍씨의 주갑(周甲)에 해당하는 뜻깊은 해이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의도는 화성 건설의 명분을 높이고 화성을 통한 왕권강화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의궤의 글씨는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로 찍었고, 그림은 목판화를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 의궤로는 맨 처음 활자와 판화를 함께 갖춘 인쇄의 체제로 제작한 점에서 서지학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책의 구성은 권수 1권, 본편(本編) 5권, 부편(否便) 4권이고 모두 8책으로 나누어졌다. 권수 에는 택일(擇日)·좌목(座目)·도식(圖式)으로 구성되고 있고, 이전의 의궤와는 달리 그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의궤는 정교한 새김기술을 바탕으로 당시 도화서(圖畵署)를 주도한 김홍도(金弘道)식의 화풍을 표현하여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용주사부모은중경(龍珠寺父母恩重經)』·『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과 더불어 정조시대 판화양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특징을 지녔다. 이전의 의궤도가 마치 지도처럼 일종의 표시에 가까운데 비하여, 이 의궤에서는 판화로 제작되고 당시의 새로운 화풍을 반영하여 회화성이 풍부하여 회화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만든 것이다. 이 의궤는 체제·기법 등에 있어서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하여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진연의궤(進宴儀軌)』·『진작의궤(進爵儀軌)』등에 영향을 미쳐 후대에까지 계승되었다.


● 정조반차도 [正祖斑次圖] - The Big Parade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그림. 조선 22대 왕 정조가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顯隆園)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1795년 음력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 동안 진행된 정조의 화성 행차에는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정조의 두 누이인 청연군주(淸衍君主)와 청선군주(淸璿君主)가 동행하였고 우의정 채제공 비롯한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000여명이 동원되었다. 정조반차도는 이들 가운데 1천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총 63매의 사진 중 일부이다. - 사진 전부보기)

훈련대장 이경무 우의정 체제공 경기감사 서유방 정조 금군별장 유호원 청연군주,청선군주 혜경궁 병조판서 심환지


●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
정조대왕(正祖大王)의 능행도(陵幸圖) 8폭 병풍. 1795년경. 견본채색, 156.5 x 65.3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화성능행도병>는 정조 19년(1795) 윤2월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고 화성(華城)에서 모친에게 진찬(進饌)한 사실을 그린 8첩의 병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같은 제목의 그림이 의궤에도 목판화로 실려 있다. 이 그림을 실제로 그린 화원은 최득현, 김득신, 이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이며 김홍도는 감독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성능행도병>은 그림의 내용을 살리는 다양한 구도, 장대한 광경을 연출하는데 효과적인 공간구성, 사실에 기반을 둔 정확한 묘사와 치밀한 필치, 원근법 등 서양화법의 반영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궁중행사도의 대표작으로서 손색이 없다. (사진 출처 및 자세한 해설 DYMAXION's VOYAGE)
봉수당진찬도
(奉壽堂進饌圖)
득중정어사도
(得中亭御射圖)
낙남헌방방도
(洛南軒放榜圖)
낙남헌양로연도
(洛南軒養老宴圖)
노량주교도섭도
(鷺梁舟橋渡涉圖)
서장대성조도
(西將臺城操圖)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화성성묘전배도
(華城聖廟展排圖)







봉수당진찬도 봉수당진찬도 연희당진찬도 처용무 김홍도 환어행렬도 金弘道 水原行幸図 청계천의 정조반차도



정조의궤 :
조선왕조의궤의 꽃이라 할수 있는 것이 정조시대의 의궤 인데, 이 중 김홍도 등이 그린 화성행차 의궤인 ‘원행을묘정리의궤(整理儀軌)’와 화성건축을 그린 ‘화성성역의궤’가 있음.

정조 반차(正朝 班次) :
조선 22대 왕 정조의 화성행차 행렬을 말함.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수원에 이장(화성 현륭원,顯隆園)한 후, 재위 24년간 약 13여회에 걸친 능행을 하였다. 이 중 가장 큰 능행이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1795년(정조19년 을묘년) 능행이었던 을묘원행이었는데, 이는 작게는 어머니의 恨을 풀어주는 효성의 표현이었지만, 크게 보면 재위 20년간 쌓아놓은 위업을 과시하고 내외 신민의 충성을 결집시켜 정치개혁의 박차를 가하려는 거대한 정치적 시위이며, 당대 최고의 토목.국방.농업과학이 총 집결한 철옹성 계획도시 화성 건설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문화적으로는 조선조 최고, 최대의 신명 나는 잔치이자 사건이었음.

乙卯園行 (단일 행사명으로는 당시 ‘을묘원행’이라 했고, 추후 의궤는 ‘원행을묘정리의궤’라함)
1)기간 : 1795년 윤 2월 9일 ~16일 (8일간)
2)동원인원 : 11,000명 (원행길 6천명, 말 779필 + 화성 장용영 군사 5천명) 
3)주요 행사 : 배다리 통과-시흥 행궁- 화성행사 (회갑잔치, 문무과 별시, 군사훈련 등) 
4)통과지점 : 노량진-장승백이-남태령-과천-시흥대로-수원 (역순 귀경)  * 반차 이동 소요시간은 왕복 만 4일(시흥에서 2박), 화성에서 행사체류 4일 일정



9. 조선왕조 문화 절정기의 대역사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화성성역의궤 표지와 내용 화성 행궁 화성전도 수원 화성 관람도 화성 장안문

※ 궁궐의 건축이나 성곽의 건축을 한 후에 꼭 의궤를 만들었다. 건축 관련 의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조가 지금의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고, 건축의 전 과정과 각 건물의 도면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이다.



10. 궁중잔치의 화려한 멋 『궁중찬치의궤』















11. 조선시대의 악기 만들기 『악기조성청의궤』















12. 국왕의 초상화 제작 기록 『어진 의궤』 





















<정조국장도감의궤 중 반차도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
국장 행렬을 그린 반차도는 발인하기 열흘전까지 완성되어야 했다. 발인은 엄숙하고 장중하게 치러야 하므로 반차도를 통해 미리 연습하고 행렬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숙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청계천(광교~삼일교 사이)에 그려진 정조반차도 벽화. 혜경궁 홍씨가 탄 자궁가교의 모습(右).
















 




일본 왕실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온 조선왕조 희귀본 고문서의 존재를 확인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궤(儀軌)·제실도서(帝室圖書)·경연(經筵)을 촬영했다. 제실도서에는 상단부에 규장각과 대한제국 제실도서관에 있었던 도서임을 뜻하는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이란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일 궁내청 도서에서 ‘제실도서’의 직인이 확인돼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명성황후의 국장 모습이 그려진 의궤. 총을 메고 칼을 찬 병사들이 호위하는 상여와 가마 행렬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명성황후의 국장 모습을 기록한 이 『국장도감의궤』는 오대산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조, 우리의 자랑스런 기록문화 … 의궤

흔히 우리의 약점 중 하나로 기록문화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훌륭한 기록문화의 역사가 존재한다.
조선 시대, 국가나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바로 '의궤' 다.

왕실의 태를 보관한 태실의 기록인 <태실의궤>를 비롯하여 왕실 결혼의 이모저모를 담은 <가례도감의궤>,
화성 성곽 축조의 모든 것은 담은 <화성성곽의궤>, 정조의 화성 행차 8일간의 장대한 역사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다양하고 섬세한 의궤의 면면을 알아 보자.



1) 철저한 기록정신과 뛰어난 현장 기록화, 반차도

왕실의 각종 행사는 임시 기구인 도감(倒監)에 의해 총지휘되었다.
도감의 임무는 행사 전반의 진행을 지휘하고 의궤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먼저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날짜 순으로 정리한 자료를 만든 후, 이를 바탕으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의 기록들은 그 시대에 제작되었던 물품들을 바로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을 만큼 치밀하다.
입었던 의상이나 장식품들의 품목만이 아니라 그 재료의 소재와 색깔, 크기 등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행사에 참여한 관리와 장인들도 양민과 천민의 구별 없이 실명을 모두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의궤에는 '반차도' 라 불리는 현장기록화도 함께 실려 있다.
마치 그 당시의 행사에 직접 참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반차도는 행사 전에 미리 참여 인원과 물품을 배치해 봄으로써 행사 당일에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최대한 줄이려는
일종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반차도 제작에는 도화서에 소속된 당대의 유명 화가들이 참여했다. 




조선왕실의궤 명성황후국상도감 발인반차도.


2) 왕실의 태를 봉안한 기록, <태실의궤>

<태실의궤>는 왕실의 태를 보관한 기록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왕위를 계승할 원자로 탄생하는 순간부터 그 존재가 신성시되었다.
특히 왕실에는 태가 국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여 더욱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왕세자나 왕세손 등 왕위를 직접 계승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태는 석실을 만들어 보관했고,
왕자녀들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태실은 명산에 묻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는 조선 왕실의 태실 53위가 안치되어 있는데,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특정한 목적을 띠고 대부분 풍수지리학상 명당에 자리잡고 있던 태실들을
이곳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3) 조선시대 왕실 결혼의 모든 것, <가례도감의궤>

<가례도감의궤>는 왕실의 결혼을 기록한 것이다.
많은 자료가 분실되어 현재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1600년대의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이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을 비롯하여, 육례의 절차인 납채(納采: 청혼서 보내기),
납징(納徵: 예물을 보내는 의식), 고기(告期: 혼인 날짜를 잡는 의식), 책비(冊妃: 왕비 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
친영(親迎: 국왕이 친히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의식), 동뢰연(同牢宴: 혼인 후의 궁중잔치) 등
혼인 행사와, 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의 재료, 수량,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행사와 관련하여 각 부서간에 교환한 공문서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그린 반차도를 그려 넣어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의궤 중 가장 체계적이고 화려하게 정리된 기록이 <가례도감의궤>다.





4) 화성 축성의 기록, <화성성역의궤>

1793년에 정조는 수원이란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고치고, 이곳에 직할시 개념의 유수부를 설치했다.
조선 시대에는 화성 이외에 개성, 강화, 광주에 유수부가 설치되었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이들 4개 도시에 둘러싸인 지역이 조선 후기의 수도권이었다.

이어 정조는 1794년 화성 축성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기간만 2년이 넘게 걸리고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70여만 명,
공사비가 80만 냥에 이르는 거대한 공사였다. 화성 축성은 집권 20년이 다되어 가는 정조의 안정된 왕권을 과시하고
절정기에 이른 조선 왕조의 문화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대역사였다.




<화성성역의궤>는 그 대역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의 기술자 명단을 각기 석수, 목수, 니장(泥匠: 흙을 바르는 기술자),
와옹장(기와나 벽돌을 만드는 기술자), 화공(畵工) 등 직종별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 독특하다.
부록에는 화성에 관계되는 각종 건축물의 규모와 위치, 그리고 각각에 소요된 경비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일본 궁내청 소장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 가운데 옥새 제작 과정을 담고 있는
보인소의궤에 실린 어보(御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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