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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세계의 미술

구스타프 클림트의 일생과 작품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 ~ 1918)


 

 



<구스타프 클림트는 누구인가>


시대를 초월한 에로티시즘의 전위화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황금빛 섬광으로 물들인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 황홀경의 그림으로 교접을 꿈꾼 화가다.
그가 새삼 주목받는 까닭은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에로티시즘의 화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1862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던 아버지의 수공예품을 보며 자랐다. 1876년 열네살에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과
이집트의 부조 등을 익히며 다양한 장식 기법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열여덟 이른 나이에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학교 친구 프란츠 마치와 빈 역사박물관의 장식을 맡아 이름을 알리며 뛰어난 건축 장식가로 손꼽히기 시작한다.


빈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1883년 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실을 열었다.
빈 시립극장(1888)과 미술사 박물관의 계단에 그린 벽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작품은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회화를 보여준다.


1897년 클림트의 성숙한 양식이 출현했으며, 그는 아르 누보 계열의 고도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화가들의 단체인 빈 분리파를 창설했다.
그뒤 곧 빈대학교 강당의 천장에 3점의 우의적인 벽화를 그렸지만 선정적인 상징적 표현과
염세주의가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이 벽화들은 거절당했다.


후기의 벽화인 〈베토벤 프리체 Beethoven Frieze〉(1902,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와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에 그려진 벽화들(1909~11)은 정확한 선묘, 평면적·장식적인 양식의 색채,
금박을 대담하고 자유롭게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클림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는 〈입맞춤 The Kiss〉(1908, 오스트리아 미술관)이 있고,
〈프리차 리들러 부인 Frau Fritza Riedler〉(1906, 오스트리아 미술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부인 Frau Adele BlochBauer〉(1907, 오스트리아 미술관)과 같이
빈의 상류층 부인들을 그린 일련의 초상화가 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인물 주변의 그림자를 생략하고 평면적이고 구성이 매우 화려한 장식들로
인물을 에워쌈으로써 건강하고 육감적인 피부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대표작에 《프리차 리들러 부인》(1906),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1907) 등 초상화와
《부채를 든 여인》《입맞춤》(1908) 등이 있다.




클림트 - 세기말의 황금빛 관능

대담한 주제와 현란한 색채, 그리고 혁신적인 화면 구성으로 세계의 이목을 끈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
신예술파(Art Nouveau) 혹은 분리파(Secessionist) 화가로 불리우는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화폭에 담겨진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과 장식성에 금새 매혹되고 만다.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이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자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클림트.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여인의 누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거장

인체 표현, 그 중에서도 다양한 연령층의 여인누드를 서양미술사 안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작가로 알려지고 있는 클림트는
유겐트스틸 운동을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거장이었다.
(유겐트스틸 운동이란 독일어 문화권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호칭한 것으로서
아르누보의 특징인 식물을 모티브로 하는 화려한 장식효과를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는 점이 색다르다.)


그는 여인을 사랑하고, 여체에 탐닉했던 자신의 성 의식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한편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시대정신의 나락과
자본의 발흥에 따른 인간(여성으로 대치되어)의 상품화를 죽음이라는 세기말적 분위기에 녹여 표현한 작품을 상당수 보여준다.


'다나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여체를 묘사해내는 독특한 작가의 개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클림트는
여성의 작은 심리변화를 절제된 표정으로 여인의 나신에 숨겨 둠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분위기를 즐기도록 배려한다.





다나에(Danae), 1907-8, 유채, 83 x 77 cm, 그라츠, 개인소장

구스타프 클림트의 연보

186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 바움가르텐에서 에른스트 클림트의 일곱 자녀 중 둘째로 출생.
1876년 '비엔나 장식 미술학교' 입학
1879년 동생 에른스트, 동급생 프란츠 마츠와 함께 공동작업 시작. 라우프베르거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1883년 '비엔나 장식 미술학교' 졸업. 에른스트, 마츠와 <쿤스틀러 콤파니> 설립.
1885년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유고슬라비아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작업.
1886년 시의회로부터 의뢰받은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장식작업 완료. '금십자공로상'받음.
1888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계단 장식 작업. <황제대상> 수상.
1890년 비엔나 미술가 협회(쿤스틀러 하우스)에 가입.
1892년 동생 에른스트, 부친 뇌일혈로 사망.
1893년 헝가리 여행. 토타스 극장 장식 작업.
1894년 문교부로터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 의뢰받음.
1897년 요셉 마리아 울브리히, 요셉 호프만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 회원으로 가입.
1902년 벽화 <베토멘 프리체>, <황금물고기>, <에밀리에 플뢰게의 초상> 완성.
1904년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의 벽화 작업 시작.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탈퇴. 베를린 여행. '빌라 로마나' 상 수상. <여자의 세 시기> 완성.
1906년 브뤼셀, 런던, 피렌체 여행.
1907년 <해바라기> 완성.
1908년 대표작 <키스>,<다나에>,<희망2> 완성.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
1911년 <여자의 세 시기>로 '로마 국제 미술전'에서 금상 수상.
1912년 '오스트리아 예술가 협회' 회장으로 추대됨. 비엔나 서쪽 농촌 지역인 히칭으로 작업실 이전.
1913년 뮌헨, 부다페스트, 만하임에서 작품 전시. <처녀>,<가르데 호수 주위의 말세진느> 완성.
1916년 <삶과 죽음>,<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 부인의 추상>,<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완성.
1917년 '뮌헨 예술 아카데미','비엔나 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출됨.
1918년 비엔나의 자택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 미완성 유작으로 <유람>,<신부>,<아담과 이브>를 남김.


클림트의 삶과 시대상황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나타내는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여성을 통해서 시대정신을 표출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선진문화라 자칭하는 유럽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젊은 시절의 클림트는 보수적인 이들에게 환영받는 화가로,
고대 고전기 미술을 모방하던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화풍으로 각광받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 그리고 작가 무질, 슈니츨러, 호프만스탈의 작품과 함께
상징의 몽환적 세계를 향한 문을 열던 세기말 빈의 분위기 속에서 그의 그림은 아르누보 양식의 우아함과
추상과 구상의 통합,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색채와 시공을 초월한 듯한 구성으로 바뀌게 된다.


비엔나 분리파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된다.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으로 둘러싸인 희망과 사랑

구스타프 클림트는 다혈질이었고, 살아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1918년 1월 11일 아침, 클림트는 자기 집에서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수가 되고 말았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고 한다. 그의 증세는 잠시동안 꽤 호전되었으나, 스페인 독감이 폐렴에 이르러 결국 2월 6일 아침 6시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고,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평생 자신을 죽게 만들 병으로 뇌일혈을 걱정했지만 그를 죽게 만든 것은 그런 뇌 출혈이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었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종합병원의 해부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의 저주였을까?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엽서와 주인이 떠나 버린 작업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는 사랑과 섹스를 철저하게 구분했다.
 

성적인 욕망을 생생하게 표현한 클림트는 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독신으로 살면서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분리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여자들과 자유로운 섹스를 나누기에는 어려웠겠지만 그는 정신적으로 결혼을 기피하는 성격이었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에밀리와는 평생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클림트는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모델들과의 자유분방한 섹스를 즐겼다. 모델에게 금전적 혜택을 풍족하게 해 주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손쉽게 해결한 것이다.

여성의 숨겨져 있는 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남긴 클림트는 모델의 자유분방한 모습에서 남성에 의해 종속되지 않는 여성의 존재를 예술가의 시선에서 본 것이다. 클림트가 표현한 수많은 여성상들이 에로틱하다고 지탄을 받았지만 그는 희망과 절망 우리 삶의 모든 진실을 표현했다.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생전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그는 동료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 '알마 쉰들러'(훗날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부터 에밀리 플뢰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다.

그 중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고, 마리아 우치키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두 여인 모두 첫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구스타프'라 지었다.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하다.

1918년 2월 6일 클림트가 56세의 나이로 죽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림트를 만날 당시 18살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생전의 클림트가 시시콜콜하게 적어 보낸 엽서들 (가령, "여기는 바르셀로나요. 이 곳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고 난 탓인지, 어제는 당신 꿈을 꾸었소." 같은 것) 만이 남겨졌다.

결국 에밀리 플뢰게가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 주어야만 했다.






◀ Gustav Klimt, Hope I, 1903, Oil on canvas, 189 x 67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의 사생아를 임신하고 있었다.



생명의 활력과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아버지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클림트는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킨다.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가면서 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1892년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다.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몰락해가는 유럽의 불꽃,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직 젊었고,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당시 비엔나는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유럽, 그 압축된 모순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다. 당시 비엔나는 늙은 대륙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아카데미의 권위로, 때로 상업적인 배려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엔나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더욱 옴짝달삭할 수 없게 틀어지었다.

비엔나의 화단은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다. 클림트는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다. 비엔나 분리파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하고,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한다. 바야흐로 낡은 세기는 가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기인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클림트는 비엔나 대학으로부터 대회랑 천장 벽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법학, 철학, 의학을 주제로 그린 3부작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에 대해 추상적 패턴을 도입해 복합적이고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엔나의 대중들과 심지어는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조차 발끈해서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평소 여인들의 자위행위 장면이나, 남녀간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풍문이 좋지 않았던 클림트의 작품을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예술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클림트는 천장벽화작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작품 제작비 일체를 돌려주었다.




황금빛 관능으로 세상을 주물렀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진실은 무엇일까.


‘분리파’는 아버지 세대 스스로가 불러들인 꼴이었다.
클림트와 동시대를 산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분석에 따르면 그렇다.


츠바이크는 “늙은 제국 오스트리아가 ‘안정’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서 ‘청춘’을 불신하고, 과격한 변화를 원하는
젊은이들을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차단하거나 압박해야만 하는 위험한 요소’로서 규정한 결과”라고 썼다.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상에 벌거벗은 진실을 담았다.
은폐돼온 성을 발가벗김으로써 20세기는 인간을 재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분리파’가 창간한 잡지 이름이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분리주의 운동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자신들에게 낡은 인간을 새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재생 기능이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정체된 채 고여 썩어가는 문화를 과거로부터 구해내려는 열정이 클림트에게는 성애로 나타났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한 세기가 끝나가는 늙은 대륙 유럽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욕정을 그림으로 노래한다.

저물어가는 구(舊)시대를 수밀도 같은 여성 육체로 밀어내고 찬란한 황금 비(雨) 속에 오는
세기의 희망과 환희를 그려넣었다. 발기 부전의 땅을 여체로 일으켜 세우려는 화가의 욕망은 본능처럼 보인다.
뿜어져 나오는 황금색 문양은 성기의 분출처럼 끈적인다. 몽롱한 환영은 19세기의 확실성을 거부한다.


클림트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라 할 ‘에로틱’을 탐구하면서 ‘잘난 체하는 아버지들을 괴롭혀온’ 죄의식을 없애버렸다.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와 창녀, 팜므 파탈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 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가? 어째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가.


현대예술이 이렇듯 요부상이나 창부상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 것과 관련해 예술사회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의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왜 한 시대의 여성 이미지가 바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창부의 상으로 압도돼야 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지적이다.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성(性)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그로 인한 고독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다. 이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황금률이었다.

부르주아와 같이 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뒤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근대의 예술가들은(예술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가치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주지하듯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이지는 그런 예술을 멀리하고 오히려 고전적 작품을 선호하는 등 급속히 복고적이 되어갔다)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또는 창부를 동경함으로써 스스로 창부가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특히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하고 절규할 수 있었다.

『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지음/ 학고재/ 2001년 중에서


 


식민지로 쌓아올린 부와 무너져가는 도덕

서구문명을 말할 때 단순하게는 서유럽에 구축된 문명, 좀더 넓게 보자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계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라는 미덕에 의해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상(그것을 계몽주의를 그 기원하는 사상으로 볼 수도 있고, '진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의 유럽은 마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고 있는 현재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런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독립된 국민국가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정치체제는 동시에 그로 인한 반동(향)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서구 문명의 정치 체제는 민족주의가 일어나 그 강한 힘으로 자기를 낳은 문명 자체를 파괴할 듯한 위기를 되풀이해서 초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유럽 문명은 이렇게 확대되면서 동시에 쇠퇴해갔다.

1882년 제국주의 국가 영국은 착실한 서구화의 길을 밟아 가고 있던 이집트에 함대를 파견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한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건설에도 한 몫 끼어 있었고, 철도도 부설하려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세계화'처럼 '근대화'라고 불리던 서구화를 앞당기기 위해 당시 이집트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들여와 유럽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이게 되었고, 이런 사실은 이집트 민중들의 강한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1882년 6월 이집트의 육군 대령 아흐메드 아라비는 민족주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수에즈 운하를 비롯한 이집트에서 자국의 이권을 보장받기 위한 영국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알렉산드리아를 포격한 뒤 군대를 상륙시켜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조치는 일시적인 것이라 변명했으나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했다. 프랑스 역시 이에 질세라 알제리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이탈리아는 대 터어키전에 승리하여 리비아를 획득한다. (영화 <바람과 라이언>, <사막의 라이언>, <아라비아의 로렌스>, <하르툼> 을 참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이런 정세를 방치해 두었다가는 국제적인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 하여 1885년 베를린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당시 독일은 식민지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었으므로 이 회의가 식민지 쟁탈전을 저지할 목적이었다기 보다는 독일도 한 몫 보자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1885년 이후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사하라 사막 이하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화되고 말았다.

강력한 군사력과 부를 원했던 왕들과 부자를 열망한 상인, 은행가들의 결탁으로 시작된 유럽의 팽창 사업은 16세기 동안 서유럽의 무역상인들을 통해 전유럽으로 흘러들었고, 이 시기에 지속된 서유럽의 인구 증가는 서서히 자본주의의 맹아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주었다. 클림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식민지 쟁탈과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부를 통해 유럽 대륙이 세계 제일의 문명이자 인류의 미래가 진보해갈 것이라 확신했다.


클림트의 작품감상


언제부턴가 클림트는 모네, 반 고호, 피카소 등과 함께 미술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작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구스타브 클림트 회고전에 이어, 1986년 뉴욕 모마(MoMA)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미술을 총정리한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19-20세기 전환기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은 다시금 미술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 힘입어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금빛찬연한 장식성과 관능성 짙은 회화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클림트 미술의 평생 핵심주제는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상류계급 귀부인에서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 미술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은 금색찬연한 장식과 화사한 색채를 한 몸에 받으며 캔버스 위에 재현되곤 했다.

방년 14세되던 해인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할 만큼 일찌기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 거부감을 지녔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미술인생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상당부분 규명되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체코계 중하급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모친과 친여동생들의 집에서 동거했다고 알려진다. 또 평생 미혼이었으면서도 14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여성을 향한 오묘한 애증과 긴장으로 갈등했던 인물이었을 것임도 짐작케 해 준다.

동시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분석학을 빌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여성 도상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가부장적 부르조아, 비엔나 사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여권의식이 크게 기여했다.

자아의식이 강해지는 신여성을 바라보던 당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증과 거세강박증을 토로했던 시대현상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후원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도 여성이었다. 클림트가 <철학>(1900), <의학>(1901), <법학>(1903∼7)이란 제목으로 비엔나 대학에 제시한 천정벽화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여류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과 패션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Emilie Floege)는 클림트의 충직한 후견인 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1901년 비엔나 대학 천정벽화 논쟁은 여성의 누드와 도덕성이라는 이슈를 겉으로 내세워 시작된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클림트의 근대적 미학을 지지하는 빌헬름 폰 하르텔과 미술사학자 프란츠 비코프 대(對) 보수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요들이 불붙인 미학적 논쟁은 곧 사회주의 대 보수 및 우익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예술가적 자존심과 독립성에 크게 상처입은 클림트는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클림트 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동안에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양식화된 장식성으로 중화된 작품이 주목할만 하다. 빈 분리파 운동과 발맞추어 공예분야에서 전개중이던 비엔나 공예운동(Wiener Werksttaete)에 참여하면서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금속공예 기술을 환기하게 되었던 한편,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면서 산 비탈레 교회당의 비잔티움 미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유딧 II>는 기하학적 문양의 아르데코 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 보다 이미 8년전 완성된 <유딧 I (유딧와 홀로페르네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뼈가 앙상한 얼굴과 올가쥔 손아귀를 한 살로메는 쾌락을 선사한 댓가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공포의 에로스로 정교하게 묘사된 한편, 인물 주변에 양식화되어 나타난 기하학적 장식은 금속공예와 비잔틴 양식의 산물이다.

한편 <다나에>(1907)의 여성상에는 복수심과 남성혐오적 이미지는 오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사랑과 온기에 목말라하는 감미로운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됐다. 클림트가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칼 E. 쇼스케는 해석한다. 이를 더 뒷바침이라도 하듯, 클림트의 말년작인 <아담과 이브>(캠버스에 유채, 1917-1918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는 에로스, 고통, 죽음을 향한 화가의 공포가 일시에 해소된 듯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만을 풍기며 2차원적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는 고귀한 명분속에 교묘히 숨겨졌던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세상밖으로 내놓은 최초의 화가였다. 그에 대한 당시의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의 상품화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제 현대사회에서 에로티시즘은 사회와 문화전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로서 자리잡았다.

우리는 부정적으로 왜곡 되지 않은 건강한 성문화, 건강한 에로티시즘은 그 사회에 건전한 문화성을 부여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에로티시즘의 횃불을 드높인 클림트의 관능의 이브들은 우리에게 당당히 말하는 듯하다.."나는 아름답다."고..


이제 연대별로 짧막한 설명과 함께 그의 작품들을 감상해보자.



1862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오늘날의 14구역)에서 7월 14일 출생.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1834-1892)는 보헤미아 출신의 금 세공사였고,
어머니 안나 핀스터 클림트(1836-1915)는 빈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가수였다.
클림트는 그들의 일곱 자녀(3남4녀) 중 둘째였다.


1864
클림트와 함께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될 동생 에른스트 탄생.


1867
가족이 빈으로 이사. 구스타프는 이듬해 학교에 입학.
클림트 가족은 빈곤한 생활을 했으며, 1873년의 경제 공황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로 몰아넣었다.


1874
8월 30일 에밀리 플뢰게 출생.


1876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본 친척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산업 박물관(현재의 오스트리아 응용미술 박물관)에서
새로 설립한 비엔나 미술공예학교(쿤스트게베르베슐레, 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1883년까지 수업한다.

동급생 프란츠 마치(1861-1942)와 일년 뒤 입학한 동생 에른스트(1864-1892)와 함께 2년간의 준비반을 거친 후
미술 학교로 옮겨가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1829-1881)와 빅토르 율리우스 베르거(1850-1902)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교회 창문 디자인,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미술 공예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1879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는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에게 자신이 맡은 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도왔고,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1840 - 1884)의 지휘아래
황제와 황후의 은혼식 축하연 준비작업에도 참가하였다.

 


Kunsthistorisches Museum (Museum of Art History 예술사박물관) / Hans Makart (1840 - 1884)


1880
극장 건축가 펠너와 헬머로부터 최초의 주문을 받아 카를스바드의 온천장에 천장화를 그림.






1881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학생 때부터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미술가 조합"은 최초의 주문으로 마르틴 게를라흐가 1882-84년과 1895-1900년에 편집한
작품선집 <알레고리와 상징(Allegorien und Embleme)>을 위한 디자인 준비작업을 했다.
그들은 다음해까지 계속해서 그 작품선집을 위한 작업을 했다.
또한 펠너와 헬머로부터도 극장 장식(천장화, 커튼, 등)을 위한 주문을 수차례 받았다.
 

그들은 세명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적인 양식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이 말은 서명이 되어있지 않은 작품이 그들 중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밝히는 일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1883
학교를 마친 그들 미술가 조합은 6구에 있는 Sandwirtgasse 8번지로 작업실을 옮겼다.
개인의 양식적 차이가 허용되지 않는 역사적 양식으로 작업하며 한쪽이 완성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쪽이 맡아서 해줄 수 있다는 그들의 특징은 더 중요한 주문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무렵부터 오랫동안 클림트 형제가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게 되었다.




Fable. 1883. Oil on canvas. 84.5 x 117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Idylle (Idylls). 1884. 49.5 x 73.5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1885
빈 예술가들의 왕자 한스 마카르트의 죽음 이후, 미술가 조합은 Lainz 교외에 있는
헤름스빌라에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그가 준비해둔 스케치들을 기반으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1886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에 새로 건설된 부르크 극장의 층계에
천장화를 그리는 최초의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누워있는 사람의 머리, 1886∼88년. 검정 색연필, 28 x 43cm


1888
부르크 극장 장식화들이 완성되었다.
미술가 조합은 오스트리아 제국 왕실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Altar of Dionysus
Ceiling painting, southern staircase,Burgtheater, Vienna 160X1200cm,oil on marble

클림트는 Burg극장의 남쪽 천장에 디오니소스와 아폴로의 제단 테마를 그렸다.
중앙에 디오니소스의 머리가 있는 spandrel이 있고 좌우로 디오니소스의 maenard들이 있다.
빛과 음악과 예술의 신인 아폴로는 왼쪽에 그려져 있다.
클림트가 알카익한 형식을 사용한 마지막 페인팅으로도 알려져 있다.





The Theatre in Taormina 1886-1888

Ceiling painting, northern staircase, Burgtheater, Vienna 750X400cm, oil on marble


클림트는 초기에 Hans Makart(1840~1884)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Hans Makart가 작업을 하던 것을 클림트가 완성한
Taormina의 Burg theater 천장에 남아있는 이 작품은 안정된 구조와 색감, 풍만한 분위기 등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







프란츠 마치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옛날의 부르크 극장 실내 전경을 그렸는데,
클림트는 무대에서 바라본 관람석의 모습을 그렸다.





The Old Burgtheater (구 부르크 극장 관람석) 1888-89.
Gouache on paper. 82 x 92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
2527 X 2271)




Allegory of Sculpture. 1889. (조각의 유화)
Pencil and watercolor heightened with gold on cardboard. 43.5 x 30 cm.
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s, Vienna,

1890
<빈, 구 부르크 극장 관람석>으로 400길더의 상금이 수여되는 상을 받아 그 돈으로 뮌헨과 베니스로 첫 여행을 떠났다.
그 후 미술가 조합은 빈 미술사 박물관 층계의 기둥 사이나 세모꼴 공간에 40점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그의 그림 <타나그라의 소녀>는 그의 양식적 변모를 드러내는 최초의 징후를 보여준다.
그림 중앙에서는 멀리 떨어져 왼쪽에 위치한 인물은 고대사 속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인물의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Ancient Greece) The Girl from Tanagra, 1890-91
intercolumnar panel from the stairway of th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스물 한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될 무렵인 이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Portrait of Joseph Pembauer. 1890. 69 x 55 cm.
the Pianist and Piano Teacher. Tyrolean Provincial Museum, Innsbruck, Austria.



1891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완료한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의 다른 화가들과 연합을 결성하였고, 빈의 유명한 화가들 중 일원이 되었다.
에밀리 플뢰게의 언니 헬렌이 구스타프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하였고, 구스타프는 에밀리의 첫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Emilie Flöge, Aged 17. 1891

Emilie Floge (1874-1952) was Klimt's lifelong companion, mistress and one of his principal heirs. She was born into the family of Hermann Floge, a prosperous pipe manufacturer. It is uncertain when she first met Klimt, but his first portrait of her dates to 1891. She would appear in many of his paintings as both subject and model. That same year Emilie's elder sister Helene married Klimt's younger brother, Ernst.

In 1895, Emilie's eldest sister Pauline Floge opened a school for dressmakers, in which Emilie worked as well. In 1899, the Floge sisters win a dressmaking contest and are commissioned to sew a cambric dress for an exhibition. In 1903, the Floge sisters opened their fashion boutique in Vienna.
After Klimt's death in 1918, Emilie inherited half of his belongings, the other half passing to his family. In 1938, after the German Anschluss with Austria, the Floge sisters had to close their boutique. Emilie died in 1952, at the age of 78.


1892
미술가 연합은 요제프슈타터스트라스로 작업실을 옮겼다.
풀이 우거진 정원이 있는 그 건물에서 클림트는 1914년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에른스트와 헬렌의 딸 헬렌 탄생.
12월 9일에 에른스트가 죽고, 구스타프는 조카딸의 보호자가 되었다.




Portrait of Emilie Flöge. 1893.
Oil on cardboard. 24 x 41 cm.
Galerie bei der Albertina, Vienna, Austria.



1894
구스타프 클림트와 프란츠 마치는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클림트의 양식적 변모는 미술가 연합의 점진적인 해체로 이어졌다.
클림트는 에른스트의 이젤화 <로텐부르크의 임시무대에 오른 광대>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 그림의 중심인물들 중 한명의 얼굴에 에밀리를 그려넣었다.




Portrait of a Lady.1894. 30 x 23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1895
새로 준비된 <알레고리와 상징> 시리즈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했고,
그의 그림 <사랑>에서 그가 상징주의로 변모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플뢰게 자매들의 장녀 폴린(1866-1917)이 의상 관련 교육기관을 열었고,
거기서 헬렌과 에밀리도 일한 것으로 보인다.





Love, 1895, oil on canvas, 60 x 44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커플의 애닯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사랑을 그려내었다.
자신을 포기한 듯 남성에게 매달린 여자의 표정에서 축복받지 못하는 사랑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클림트의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 마치 클림트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고, 신고전주의풍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가 확고해지지 않은 이 때에도, 클림트 특유의 은유와 상징이 살아 있다.
표구를 한 듯 그린 이 작품의 첫 인상은 팬시한데 어찌보면 그저 통속적인 사랑 타령쯤으로 보일 수도 있다.
몽환적인 느낌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 하고, 특유의 작품세계의 단서도 보인다.

그림 제일 윗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흐릿하게 그린 얼굴들은 어린아이부터 노파, 그리고 유령까지 등장한다.
그림 아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풍경이다. 그러나 사랑이 그저 두 사람의
반짝 만남이 아니라 오랜 인연과 과거, 그리고 미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이 부분으로 인하여
그림은 통속성을 벗어나고있다. 사랑을 보는 다른 시각, 아주 독특하고 통찰력 있는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Portrait of Josef Lewinsky. 1895. 64 x 44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Music, 1895, Oil on canvas, 37 x 45 cm,

Neue Pinakothek, Munich



1896
클림트와 마치의 작품이 더 이상 양식적인 공통점이 없었지만
여전히 빈 대학의 학과들을 다루는 그림을 함께 맡았다.
클림트가 의학, 철학, 법학을 맡고, 프란츠 마치가 그 나머지를 맡았다.





Sculpture. 1896. 41.8 x 31.3 cm (Painting details)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Junius. 1896. Black chalk, pencil and gold. 41.5 x 31cm.
From "Allegorien" Neue Folge, Nr.63, 1895-1901, Published by Gerlach & Schenk.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1897
클림트는 20여명의 다른 화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제체시온, Secession)를 결성하였고, 그 초대 회장을 맡았다.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전시 동인이라 할 수 있는 분리파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관영화 되어있던 전시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전시회를 기획하고 조직하였으며
이듬해부터 월간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란 뜻)>을 출간했다.

클림트는 세기말의 빈에서 청년 화가를 이끄는 개혁의 주역이자 유명 인사로 떠오른다.

동시대에 에드바르트 뭉크는 <절규>를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작곡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판하고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이 초연됐다.
프로이트와 말러는 클림트의 작품세계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이다.





Tragödie (Tragedy). 1897. 41.9 x 30.8 cm  Black chalk, pencil and gold.
From "Allegorien" Neue Folge, Nr.66, 1897 published by the Vienna Publishing Company Gerlach & Schenk.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Lady by the Fireplace. 1897-98. 41 x 66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1898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원들의 그림 뿐 아니라 뵈클린, 크레인, 클링거, 리버만, 로댕, 세간티니, 슈툭, 토마 등
잘 알려진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또한 클림트는 팔라스 아테네의 보호 아래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는 테세우스를 그린 전시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나,
테세우스의 나신이 공공 윤리를 해친다며 검열에 걸려 결국 테세우스의 성기를 식물을 이용하여 가리는 수정을하는 소동을 겪는다.



 


Poster for the 1st Secession exhibition, Theseus and the Minetaurs. 1898
Lithograph 62 X 43cm, Private collection



또한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해 제출한 스케치로 인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완성된 그림을 심사 받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에밀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Hallst Atter 호수의 St Agatha에서 최초의 풍경화를 그렸다.
(최근에 발견된 1881년작 풍경화 두점을 제외하고서이다. 이 그림들은 1992년 취리히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볼 수 있다.)







Pallas Athene, 1898  Oil on canvas. 75 x 75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은 클림트는 역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으며,
<팔라스 아테나>란 제목으로 아테네의 수호여신을 빈 남자들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이라고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바꾸었다.

팔라스는 타이탄족 크리오스의 딸인 지혜의 여신으로 아테나가 팔라스의 뒤를 이어서 지혜의 여신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팔라스 아테나라고 부른다. 팔라스 아테나는 트럼프에서 퀸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여신이다.
클림트는 <팔라스 아테나>에서 처음으로 황금을 색으로 사용했다. 예술을 후원하는 여신으로도 알려진 아테나를 클림트는
황금 갑옷과 투구, 그리고 창으로 무장하여 예술을 수호하는 강력한 힘을 상징했다.
그는 아테나의 갑옷에 메두사가 혀를 내밀며 적의 세력을 조롱하는 모습을 새겨 넣었다.






Fishblood. 1898. Original distroyed.
Pen and ink. From "Ver Sacrum" Nr 3.





Sonja Knips, 1898, 145 x 145 cm. oil on canvas,
Österreichische Galerie at Vienna, Austria


이 아름다운 여인은 육군 여단장의 딸이자 실업가의 아내였다고 한다. 클림트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붉은 가죽장정을 한 스케치북을 여러 권을 주었고, 그 중 하나에 자신의 사진도 끼워 넣었다고 한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균형 있게 나뉘어 있고, 어두운 배경에 의해 드레스의 색감이 돋보인다.





Portrait of Helene Klimt (His niece). 1898.
Oil on cardboard. 60 x 40 cm. Private collection.



1899
빈의 링스트라스에 있는 둠바 빌라의 음악실 실내장식 완성.
클림트는 이 음악실 장식을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슈베르트>를 그리기도 하였다.





Schubert at the Piano. 1899. Oil on canvas. 150 x 200 cm.
Destroyed by fire at Schloss Immerdorf in 1945





Mermaids, Water Nymphs (Silverfish).1899,
Oil on canvas, 82 x 52 cm, Zentralsparkasse (Private collection), Vienna



 


Nude Veritas, 1899, (벌거벗은 진실)
Oil on canvas, 252 x 56cm, Theatre Collection of the National Library, Vienna

분리파가 고안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예술의 거울을 현대인에게 갖다대는 '누다 베리타스'(벌거벗은 진실)다.
라울 루이즈 감독이 영화 <클림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거울을 쓴 것도 이 선상에 있다.

클림트는 1899년작 <벌거벗은 진실>에서 거울을 든 나체 여성을 그렸다.



화가는 현대인에게 텅 빈 거울을 갖다댄다. 화가는 그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욕망으로 들끓는 심리적 인간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클림트의 여성은 굴곡이 진 섹시한 몸매로 천천히 바뀌어간다.
이제 '누다 베리타스'가 아니라 '베라 누디타스'(진짜 누드)다.






After the Rain, 1899  80.3 x 40 cm.
(Garden with Chickens in St. Agatha).
 Neue Galerie des Stadt Linz, Wolfgang-Gurlitt-Museum, Linz, Austria.


1900

제 7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 <철학>을 선보였다.
이 그림은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87명의 교수들이 이 그림을 대학 대강당에 두는데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

클림트의 작품들이 자국에서는 그토록 천대받았지만 이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에 접어든
프랑스 등에서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그의 작품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고,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즈(1902)"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Philosophy (final state), 「철학」 1899 - 1907.
430 x 300 cm. Oil on canvas. Destroyed by fire in 1945.


아득한 우주 공간, 작은 불꽃들이, 수많은 에너지가 흘러내리는 현현한 공간에 벌거벗은, 허둥대는 사람이 모여 이룬 원주(圓柱). 그 속엔 천진한 아기,
나체의 연인, 머리를 감싸 안은 노인도, 저들은 쾌락과 출산, 노동과 늙음의 애환에 뒤엉켜 울고 웃고 신음하며 정처 없이 부유하는 육체들.
은하수처럼 흐르는 무수한 빛의 파편 속엔 우리 삶에 하 많은 수수께끼를 던질 것 같은 현무암 스핑크스를 닮은 미동 않는 얼굴이 보인다.
그는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을, 인간의 이성과 우주의 법칙, 그리고 또 절대자의 말씀을 우리에게 명정하게 일러줄 것일까.

아래, 부푼 머리카락으로 두상을 감싼 여인만이 뚜렷한 의식으로 나를 직시한다.
전시회 팸플릿에  '지식'으로 명기 되었다는 그녀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너희도 모두 저들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고~.

"영원히 반복되는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 그 혼돈에 따르는 고통과 환멸까지도 명이라면 사랑해야 한다"는
‘amor pati’,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 본다.



천장화 실제 크기의 「철학」이 미완인 채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대학관계자들은 경악한다. 그들은 절대 진리에 대한 꿈과 이상,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찬양하는
서술적 방식의 그림을 기대하였지만 아니었다. ‘철학’이라는 대명제에 걸맞지 않았다.
이 그림은 모호한 배경에다 불안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또 발가벗은 몸으로 어둠 속에
방황하고 부유하는 인간 군상들을 그대로 담았던 것이다.



1901

제 10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의학>을 선보였는데,
이 그림은 임신한 여인을 누드로 그렸다는 까닭으로 또 다른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클림트를 교수로 지명한 빈 순수미술원의 제안은 거절되었다.





 Medicine (final state), 「의학」1900-1907. Oil on canvas. 430 x 300 cm. Destroyed by fire in 1945.

흘러가는 강물일까. 망망대해일까. 벌거벗은 남녀들이 수직을 가른 원주에 모였다.
인간기둥 속엔 아이들, 황홀경의 여인들, 나체로 웅크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해골바가지도...
生老病死에 뒤엉켜 강물처럼 흘러 흘러가는 얼굴들, 풍만한 가슴에다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고
알 수 없는 공간에 떠있는 음산한 춤사위의 누드 여인은 이제 막 멀리 사라질 것만 같다.
얇은 포대기에 쌓인 아기는 여자의 발 언저리에 매달려 있다. 그녀에게 저 아기의 의미는 ~.

이승에서 마지막 마시는 레테의 강물, 팔에 뱀을 감고 그 망각의 물을 들고 있는 여신 '히게이아'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삶이란 탄생과 성애,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임을. 의학마저도 저 大河를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철학」 맞은편 천장에 자리하기 한 「의학」은 구도가「철학」과 비슷하지만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클림트는 의학의 최대 목적인 질병 예방과 치료는 생략한 채,
인간의 삶과 죽음, 에로티시즘을 과감히 드러냈다. 의사들 또한 분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의사인 아스클레피오스의 딸, 즉 건강의 여신인 ‘히게이아’ 묘사에는 수긍하지만,
도발적인 여인의 나체와 의술의 무력함을 말하고 있는 듯한 죽음을 묘사한 해골은 의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포르노그라피라는 비난이 격해져 의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다.



 


Medicine (composition draft), 1897~98  Oil on canvas, 72 x 55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개인소장 - 유일하게 남은 구성 스케치 컬러 도판)




Hygeia. Detail of Medicine. 1900-1907. Oil on canvas. Destroyed by fire at Immendorf Palace, 1945.
<The only color photo.>

“의학”의 부분그림인 이 작품은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히게이아”이다.
이 여신 위에는 죽음의 신이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 서 있다.
그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의학을 무시했다는 의료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던 작품이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 그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니...






Jurisprudence (final state), 「법학」 1903-1907.
Oil on canvas. 430 x 300 cm. Destroyed by fire in 1945.


재판장에 끌려나온 등 굽은 노인, 나체의 남자는 머리를 떨어뜨린 채, 먹잇감을 찾아 기어 나온 심해의 연체동물 발에 휘감겼다.
노인을 빙 둘러싼 세 여인, 始原의 굴속에서 벌거벗은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농염한 몸짓으로, 법정에 선 노인을 희롱하는 듯, 고문하는 듯.

멀리, 화려한 장식적 배경 상단에는 진실과 법률의 여신과 가운데 정의의 女神이 서 있다.
세 여신, 엄숙한 재판관의 권위가 눈앞의 농락과 폭력 보다 더 작고 멀게만 느껴진다.
법 앞에서 정의보다 힘의 횡포는 부조리와 혼란, 무질서의 극치인 저 세계는, 더 큰 우주적 질서와 神의 섭리 아래에 존재하는 것일까.



「법학」은 상징 언어를 사용한 점 외에 양식상으로 앞선 두 그림과 전혀 다르다.
세부는 추상적이지만 명확하고 평면적이며, 색채 배치는 대범하고 단순하다.
애초에 당국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었던 구상스케치와는 상당히 다르게 제작되었다.

법학에서의 메시지는 법의 정의보다는 힘의 논리라는, 이른바 법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하겠다.
「법학」도 대학의 반발과 비난, 철회하라는 격렬한 요구를 면치 못했다.




Composition project for the University painting
비엔나 대학 대강당의 천장화 시리즈


Philosophy, Medicine, Jurisprudence
Gustav Klimt. 1894~1907 作.


구스타브 클림트는 암울한 세기말주의에 빠져있던 19세기 말의 유럽, 그 한가운데 우뚝 선 화가였다.
그는 전위예술의 탄생을 상징하는 ‘비엔나 분리파’를 이끌며, 모호한 꿈을 환상의 관능적 분위기로
이미지화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리고 시대정신을 미술에 투영하고자 했다.
클림트의 「철학」「의학」「법학」은 그의 예술의 정점인 이른바 ‘금색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분리파 시대’의 획기적인 걸작들이다.


1892년, 오스트리아 교육부는 새로 지은 비엔나 대학 대강당의 천장화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 구상안은 매우 고전적이었다. 중앙 패널화는 대 주제인 '어둠을 물리친 빛의 승리'에 대한 이미지를,
둘러싼 네 개의 화판에는 전통적 학문인 신학, 철학, 의학, 법학을 묘사하기로 하였다.
교육부 예술평의원회는 이 학부 회화 중 철학, 의학, 법학은 당시 장식화가로서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있던 구스타브 클림트에게 의뢰하였다.


이 세 작품의 구상스케치는 1894년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전체 구성이 교육부에 제출된 것은 1896년이었다.
완성에 가까운 최초의 밑그림 ‘철학’이 공개된 것은 1898년 12월 비엔나 분리파 제2회 전시회였다.
‘의학’은 1901년, ‘법학’은 1902년에 공개되었으며, 학부 그림 세 점이 나란히 전시된 것은
1903년 빈 분리파의 클림트 특별전에서다. 세 작품 모두 최종 완성은 1907년이다.


천장화 시리즈는 ‘진리의 명정’과 ‘학문의 권위’, 요컨대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인간의 이성적인 힘과 질서를, 그것으로 인한 세계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클림트는 교육부의 제작의도와는 달리, 벌거벗은 인간군상에 벌거벗은 진실을 담은
‘혼돈의 세계’를 퍼즐로 내놓았다. 더욱 이 회화들은 세밀한 장식성과 여성성, 파격적인 관능미로
묘사되어 당시 비엔나의 지식층과 권력층, 가톨릭 종교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이 세 작품은 당시 대학 측과 교육부의 극심한 비난과 반발로 인해 천장화에 사용되지 못하였고
얼마 동안 국립 근대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었다. 세계 제 2차대전 중에는 작품의 안전을 위해
오스트리아 남쪽 임멘도르프 성으로 옮겨졌으나 1945년 나치 친위대에 의해 불에 타 영원히 사라졌다.
현재 남아 있는 도판은 대부분 전쟁 이전에 촬영한 상태가 좋지 않은 흑백사진뿐이다.



클림트의 천장화는 철회되어야 한다는 거센 비난과 논란 속에
「철학」이 1900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받은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또 당시 미술비평가 루트비히 히베지는
"클림트의 회화「철학」은 … 의문을 갖는 철학적 정신에
그 비밀을 알려주는 들끓는 우주를 상징한 것"
이라 평했다.
 
동시대 상징주의 문학을 탄생시킨 헤르만 바르도
“위대한 예술은 필연적으로 엘리트의 소명, … 근대 위대한 미술가가
예술에 무지한 속물들과 맞서 싸우는 좀 더 넓은 의미의 투쟁 … ”

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비엔나 대학교수들은 전시회가 개막되는 동안 교육부에 천장화 제작 의뢰를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제출한다.
클림트의 학부 회화에 대한 리터 폰 하이텔 교육부 장관의 지지와, 또 교육부 예술평의회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
이 그림들은 본래의 목적대로 대학 강당에는 걸 수 없었지만, 1903년 11월, 국립 근대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되었다.


교육부와 천장화 제작 계약을 파기한 후 클림트는 절규한다.

"나는 벗어나고 싶다. 다시 자유를 얻고 싶다. 나는 국가의 어떠한 지원도 거부한다. …
무엇보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에서, 그리고 교육부에서, 예술이 다뤄지는 방식에 항거하고 싶다.
틈만 나면 진정한 예술과 진지한 예술가들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
보호받는 것은 늘 모자라는 것들이거나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이후 클림트는 천장화 제작을 위한 계약금을 반환한 후 1906년,
10년 만에 빈 분리파와 결별하며 전위 그룹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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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학부 회화의 특징은 한마디로 어떤 틀과 형식에 전혀 얽매여 있지 않는다.
누구나 아는 상징을 소재로 삼지 않았고, 위대한 진리에 대한 찬양이나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는 사람이 밖으로 드러내기를 극구 꺼리는 ‘벌거벗은 진실’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이 작품 제작 시기에 그가 남긴 각종 스케치와 수십 장 세부 드로잉 습작에는
대부분 인간집단의 ‘진실’에 대한 추구와 비유가 제시되어 있다.
그는 "진실은 정열이며 진실을 말하는 것은 빛처럼 타오르는 것”이라며,
그 진실을 불꽃 이미지로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속성을 훤히 꿰뚫어 본 천재 화가 클림트는 위 학부회화 세 작품에서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근원적인 고통과 불안, 연민을 신비로운 회화언어로 한껏 풀어놓았다.


그뿐 아니다. 그는 유럽의 산업혁명, 프랑스의 시민 대혁명을 계기로
19세기말의 급속한 정치적인 변화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한 부르주아지 등으로 파생된
총체적인 무질서와 부조리, 빈부의 격차, 인간의 탐욕 등,
더할 나위 없이 혼란스럽고 퇴폐적인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이를테면 고전적인 숭고한 理想 저 너머, 물욕과 권력에 사로잡혀 공포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기존 세력의 막강한 횡포를 통렬히 비판하고 희롱하였던 것이다.
100여 년 전, 먼 나라에서 자기만의 회화언어로 사회적 모순에 처절하게 저항하며 투쟁했던
한 고독한 거장의 시대정신이 요즈음 새삼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Goldfish. 1901-1902. Oil and gold on canvas. 181 x 66.5 cm.
Swiss Institute for Art Research, Zurich, Switzerland. 


이 그림의 몽환적이고 도발적인 자세는 앞에서 언급한 빈 대학 천장화의 논쟁에 대해
클림트가 보여준 일종의 대응, 혹은 대답차원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그는 이 그림의 제목을 < 나의 비방자들에게 >라고 지으려 했다가 가까스로 억눌러 참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Farmhouses with Birch Trees. 1900. 80 x 8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Fruit Trees. 1901. Oil on canvas. 90 x 90 cm. Private collection.




Avenue in Schloss Kammer Park (컴머성 정원의 산책로)
1902. Belvedere, Vienna 오스트리아 비엔나 벨베데르궁 미술관





Cows in a Stall. 1900-1. 75 x 76.5 cm.
Neue Galerie des Stadt Linz, Wolfgang-Gurlitt-Museum, Linz, Austria.





Portrait of Rose von Rosthorn-Friedmann. 1900-01. Oil on canvas. 190 x 12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Judith I
쾌락의 세상으로 안내하는 팜므파탈




Judith and the Head of Holofernes. 1901. Oil on canvas. 84 x 42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오스트리아 비엔나 벨베데르궁 미술관


클림트가 사랑한 요염한 여성상의 대표 인물. 화가가 자신의 '황금 시기'를 열어젖힌 1901년작이다.
연인을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고혹적 이미지가 드러나 있다. 살짝 들어올린 얼굴, 반쯤 감긴 유혹의 눈길,
주춤하게 벌어진 입술, 풀어헤쳐 가슴이 드러난 옷섶 등이 팜므파탈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을 “낡은 보석 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응축된 사악함”이라 표현했다.

홀로페르네스는 구약 성서 외전(外典)의 유디스서(書)(Book of Judith)에 나오는 Nebuchadnezzar왕을 섬긴 장군으로서
이 그림의 주인공 유디트 Judith에게 목이 잘려 살해되었다.

이 역시 황금색을 사용한 작품으로, 액자에는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라고 독일어로 새겨져 있다.
이 그림의 금빛액자 및 바탕의 장식을 비롯하여 유디트의 목의 장식, 의복 장식은 금빛 시대를 예고한다.
이 작품은 8년 뒤인 1909년 <유디트 Ⅱ>와 나란히 유디트를 주제로 그린 '키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클림트의 요부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그림은 뭐니뭐니 해도 '유디트' 연작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된 아델레 블로흐는 남편이 그녀의 초상화를 클림트에게 의뢰하기 이전, 이미 1901년 화가 앞에서 이 그림을 위해 포즈를 잡았다. 화가는 부인을 대상으로 남편이 눈치재지 못하게 그린 여인상 중 가장 에로틱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 인물은 에로틱한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여성으로, <구약 성서>의 한 애국자 유디트였다. 유디트는 이스라엘 베툴리아 출신의 여인으로 남편과 사별한 과부였다. <구약 성서>는 그녀가 매력있고 대단히 아름다웠다고 전하며, 또한 하나님을 무척 공경하여 그 누구의 비난도 산 적이 없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당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아시리아 총사령관 홀로페르네스(Holofernes)를 없앨 계획으로, 그와 만찬을 함께하며 만취하게 만들었다. 이후 그녀는 하녀를 데리고 홀로페르네스의 막사로 들어가 골아 떨어진 그의 목을 단박에 잘라버렸고, 하녀에게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루에 담도록 해서 밖으로 빠져나온 유디트는 그 목을 망대에 걸어두자 그것을 본 아시리아 적군들이 겁을 집어 먹고 도망갔다고 한다.

유딧과 홀로페르네스의 이야기는 중세 이래의 서양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녀는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하나님편에 서있다는 미덕의 관점에서 재현되었는데 클림트의 유디트는 이런 미덕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뒤로 젖혀진 얼굴, 아래로 내리깐 두눈, 듣기 민망한 무슨 신음 소리가 나올듯 살짝 벌어진 입술, 드러난 가슴, 영락없는 성적 쾌락을 누리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는 승리의 희열을 느끼듯, 남자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다. 유딧이 어떻게 이런 성적인 이미지로 재현되었을까.

클림트의 <유딧과 홀로페르네스>는 액자에 분명히 그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도 1905년 베를린에서 <살로메>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살로메는 유디트와는 정반대되는 여인으로 <신약 성서>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오도록 의붓아버지 헤롯왕 앞에서 요염한 춤을 춘 여인이다.
클림트의 유디트 모습에서는 성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팜므 파탈, 살로메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녀에서 팜므 파탈로 변화해 가는 Judith

유디트는 서양 미술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주제 중 하나였다. 주로 패덕과 욕망을 단죄하는 겸손과 순결, 믿음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한 기독교적인 미덕의 소재로 다루어지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살인과 폭력의 흥분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실제 19세기 중반부터 유디트는 원래 애국적이며 영웅적인 여자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840년 프리드리히 헤벨은 연극에서 유디트를 세속의 평범한 여인으로 묘사했다. 유디트와 사별한 남편 므나세가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유디트가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에게 성적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다. 헤벨에 따르면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했지만 마치 그에게 강제로 능욕당한 듯 사건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복수하기 위해 목을 베어버렸다는 해석이다. 이때 부터 서양 예술사에서는 정숙한 유디트가 갑자기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 파탈'로 변신하고 말았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헤벨의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처녀성을 앗아간 남자게에 복수하기 위해 그의 목을 벤다는 것은, 바로 그를 거세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벨은 유디트를 본래의 텍스트에서 떼어내어 악녀로 둔갑시킨지도 모른다. 이렇게 남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된 클림트의 유디트는 성적 만족을 채웠든, 만족을 준 남성을 제거해 어떤 우월감을 느꼈든, 새도매저키즘이 섞여 잔뜩 도취된 모습이다. 클림트는 바로 헤벨과 같은 맥락에서 여성 안에 팜므 파탈의 특성이 내재한다고 보는 것이 진리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유디트나 살로메나 마찬가지 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변해가는 유디트의 모습




Alessandro Botticelli (1445- 1510), The Return of Judith to Bethulia, 1472,
Oil on panel, 31 x 2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화가. 보티첼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이미 적장의 목을 베어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한 손엔 적장 홀로페레느스의 목을 베었을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하녀가 이고 있는 것은 적장의 목이고, 그녀의 손에는 적장을 취하게 만들었을 술병이 들려 있다. 유디트가 돌아가는 발 아래로 장군의 죽음에 놀란 앗시리아 병사들이 허둥지둥 패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살인의 장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Vecellio Tiziano, (1490-1576)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1515,
Oil on canvas, 89,5 x 73 cm, Galleria Doria-Pamphili, Rome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를 보자. 원래 성서에 의하면 유디트의 하녀 아브라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받아 곡식자루에 넣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마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받아든 살로메의 구도로 보인다. 얼핏 보아서 드러나지 않은 적장의 목은 마치 유디트의 연인이 편안히 누워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디트의 하녀 역시 매우 어린 소녀로 나타나고 있으며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벤 당찬 여걸이라기 보다는 부끄러움에 살며시 고개를 숙인 순결한 처녀의 형상에 가깝다.




Caravaggio (1573-1610),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
Oil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dell'Arte Antica, Rome


카라바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홀로페르네스는 편안히 잠들어 있다가 유디트의 불의의 일격을 당해 눈을 치켜뜨지만 이미 목은 절반이 잘려 나갔고, 피는 분수처럼 침대를 적시며 빠져나가는 그의 생명처럼 보인다. 그런데 적장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손을 보자. 적장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는 더러운 듯 한껏 몸을 뒤로 젖히고 있으며 칼을 쥔 손은 파리 한 마리도 잡아보지 않은 듯 보인다. 그녀를 뒤따라온 하녀 역시 매우 늙은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아무 하는 일없이 떨어지는 목을 냉큼 주워 담으려는 듯 포대를 들고 있다.




"Judith" by 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
Capodimonte Museum


17세기에 이르러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진 유디트를 볼 수 있게 되는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의 작품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듯한 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생생함은 카라바조와 비교할 수도 없다. 유디트는 매우 건강한 팔뚝을 지닌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처럼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도 않다. 그녀는 매우 결연한 표정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털을 힘센 팔뚝으로 움겨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단단히 틀어잡고 있다. 성서에는 밖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된 하녀 역시 저항하는 적장의 양팔을 내리누른다.

보티첼리, 티치아노, 카라바지오와 아르테미시아의 차이는 단 하나 아르테미시아가 여성 화가였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에 있어 여성이라는 대상은 그야말로 꽃의 역할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관음증의 대상이었거나 아니면 남성을 위한 뮤즈가 되어 자신들의 창조적 재능을 소진하는 것만으로 그 역할이 한정되어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발견된 화가였다. 그녀는 여성에게 제한된 역할을 뛰어넘은 최초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위험천만한 적진 한 가운데에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르테미시아의 뼈아픈 과거가 숨어 있다. 

그녀는 19세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일로 인해 법정에 섰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7개월이나 계속된 재판에서 상대 남자인 타시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아르메시아를 음란한 여자로 매도한다. 결국 아르테미시아는 법정에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았고,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 아르테미시아가 맘껏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을 강간한 남자에 대한 복수심을 발현시킬 수 있는 소재는 유디트였던 것이다.





Michelangelo. Judith and Holofernes.
1508-1512. Fresco. Sistine Chapel, Vatican.
미켈란젤로가 이탈리아 바티칸의 시스틴성당에 벽화로 남긴 유디트의 모습이다.




19세기에 갇힌 여성, 유디트와 이브

클림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몇몇 여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그의 그림과 직접적으로는 별상관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화폭에 담은 젠더(gender)로서의 여성들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 - 1964)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남성들의 꿈과 악몽을 동시에 구현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넘치는 재능이 있었지만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로 일생을 보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편에 속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마리아 레하라가(Maria Lejarraga, 1874 - 1974)는 20세기 초 유명한 극작가인 그레고리오 마르띠네스 씨에라의 아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명한 극작가인 그녀의 남편은 단 한 줄의 희곡도 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녀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극작가, 수필가, 여성운동가, 사회주의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망명생활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 - 1943)이 있다.

앞서 아놀드 하우저와 이주헌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창부라고 절규했다지만, 단언컨대 이때 말하는 예술가들 속에 여성은 없었다. 클림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여인들의 시선은 몽환적인 아름다움과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1865년)에 등장하는 창부의 직설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은 다소곳한 자세로 시선을 내리깔지도 않았고, 틀림없이 남성들이 더 많았을 관객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다.




올랭피아 Olangpia.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83)


19세기는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페미니즘의 시기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 무렵의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절대적(가부장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속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또한 페미니즘이 그 탄생을 알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무렵의 여성들은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남성적인,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시기였음에도 이 무렵의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의 등장은 엄청난 공포이자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19세기에 여성이 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것(말이나 행동 모두)이든 남성들에게는 공포가 되어 나타났다.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에서 남성인 아담은 흑빛으로 질려 있고, 생기발랄한 이브 뒤에 숨어 있다. 아담이 마치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반면에 이브는 마치 볼테면 맘껏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 당시의 여성들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Gustav Klimt, Adam & Eve


일순간이나마 시간을 내서 자아를 주장하는 여성,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 여성은 이미 위험하고, 죄를 저지른 이브이다. 물론 당시 실제 생활 속의 남편들은 예술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적은 상처를 받았을 터이지만 말이다. 공포는 바로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19세기의 문학 속에는 종종 경제적이던 문화적이던 허울만 남은 가정, 외도, 알콜 중독, 결핵, 온갖 사회악에 무풍지대로 노출된 가정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바람 피우는 남편이나 알콜 중독에 걸린 남편, 결핵에 걸리거나 병약한 아이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헨리크 입센은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라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새로운 인간형을 탄생시키니 그가 바로 『인형의 집』(1879년)의 '노라'였다 (물론 입센이 반드시 여성해방을 염두에 두었다고만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1902

5월에 요제프 호프만(1870-1956)과 콜로만 모저(1868-1918)는 빈 공방을 설립하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설립된 빈 공방은
재료의 존중, 구조의 간소화, 기능성을 기본 조건으로 삼아
분리파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예품의 생산과 기술자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가을에 빈 분리파는 그때까지 열린 클림트의 전시회 중 가장 대규모인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이 전시회는 분리파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열었는데,
이때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즈를 제작하였다.(프리즈란 벽의 띄 같은 것을 말한다.)
이 그림은 열광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회가 끝난 후 개인 수집가에게 매매되었다.
(현재에는 다시 분리파 전시관에 있다)




The Beethoven Frieze 1902.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아르누보 상징주의의 걸작으로도 꼽힌다.
교향곡 제9번은 베토벤이 자신이 존경하는 실러가 사랑과 평화, 기쁨을 테마로 쓴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것이다.
실러가 송가를 쓴 것은 베토벤이 열여덟 살 때였고, 베토벤이 이 곡을 처음 연주한 것은 1824년 5월 7일
그의 나이 55살 때로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였다.


베토벤의 창조성을 기리는 것을 테마로 한 <베토벤 프리즈>는 추상적 디자인이란 점에서,
디자인의 단순성이란 점에서, 그리고 응용미술의 극치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미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사고는 19세기 응용미술에서 잘 나타났고,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의 응용미술은 이런 점에서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제14회 빈 분리파전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매우 의의 있는 전시회였다.


<베토벤 프리즈>는 관람자가 바라보는 정면 벽에

인간의 <행복의 열망>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해
<나약한 인류의 고통>, <고통 받는 나약한 인류는 강하고 잘 무장된 외부인에게 행복을 간청한다.
그의 강력한 무기와 내면에 있는 연민과 야망은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원동력이다>
등을 장식했으며,

측면 벽에는 투쟁의 결과를 나타냈는데 다음과 같다.


<행복에 대한 열망은 시에서 달성된다>,
<예술은 우리 스스로 순수 기쁨과 순수 행복 그리고 순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이상적 영역으로 인도한다>,
<파라다이스의 천사들의 합창, ‘기쁨·가장 순수한 활기의 거룩하신 당신’, ‘전 세계를 위한 키스’>.


정면 벽과 측면 벽 사이에 이 주제들과 연계해서 <적대적인 힘>이 묘사되었다.
<신들의 싸움조차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거인 타이푼, 그의 딸들인 세 고르곤 질병·광기·죽음>과
<정욕·음탕·무절제·통렬한 슬픔 ― 인류의 갈망과 욕망이 인류 위를 높이 난다>.



The Longing for Happiness. <행복의 열망>




The Hostile Powers <적대적인 힘>




Beethoven Frieze, Central narrow wall: Unchastity, Lust and Gluttony,
1902, Casein paint on plaster, 220 cm high, Austrian Gallery, Vienna


The Longing for Happiness Finds Repose in Poetry
<행복에 대한 열망은 시에서 달성된다>






전시회 당시의 사진

 





Beethoven Frieze

클림트는 8년 동안 23회에 걸친 빈 분리파전을 이끌면서 일본화전, 인상파전 등
훌륭한 국외의 작품들을 소개하여 빈을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고,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미술의 씨를 뿌리는 데 기여하며, 이 같은 영향이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그 중에서도 1902년에 개최된 제14회 빈 분리파전은 분리파 사상 가장 중요한 전시회로 기록되고 있다.


21명의 미술가가 참여하고, 관람자의 수가 5만8천 명으로 여태까지의 분리파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 한 전시회에 5만8천 명이나 다녀갔다는 것은 빈 분리파의 위상,
더 나아가서는 클림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보여준다.
전시회의 특징은 각 미술가가 순수한 동기에서 자신의 미학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전시장 내부 디자인은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다.


이 전시가 열린 분리파 건물 중앙 전시장에는 독일의 조각가, 판화가 막스 클링거(1857-1920)가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위대함을 나타낸 조각 <베토벤>이 놓였다.
이상주의와 자연주의 중간에 위치한 클링거는 1894년에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원에 선정되었다.




A reproduction of the Beethoven Frieze


중앙 전시장 양편 벽은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인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로 장식되었다.
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베토벤을 주제로 한 전시의 출품작임에도 인물로서의 베토벤이 잘 안 느껴진다는 것인데
클림트 자신의 색채가 워낙 강해 베토벤은 그 뒤로 가려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예술과 사랑의 중재를 통한 가련한 인류의 구원, 행복을 희구하는 인류의 갈망과
적대적인 세력으로서의 괴물과 요부, 그리고 시와 예술속에서 행복의 갈망"
이 채워지는 결말로 그림들이 구성돼 있는데,
클림트 특유의 장식성과 관능성이 매우 절제된 톤으로 세련되게 표현 된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가 끝나면 지워 없애기로 한 벽화였으므로 클림트는 싼 재료를 사용했었다.
그는 격자로 된 나무 위에 바른 석고에 그리면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석 도금한 압정·거울조각·색유리 단추와 가짜보석 등을 사용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분리파전의 가장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되면서 이를 재현하고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7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구입하여 많은 경비와 시간을 들여 복원하고
1984년 ‘빈 1870-1930, 꿈과 실재’란 전시회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했고,
또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원작 크기의 복제화를 제작하여 여러 전시회에서 소개했으며
원화는 현재 분리파 전시관 지하전시장에 있다.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 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미술문화) 중에서...





또한 이 1902년의 분리파 전시회에
빈 대학 대강당을 위한 세가지 "학부" 그림이 최초로 다같이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당연히 그 그림들이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야 할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플뢰게 자매는 11월에 카사 피콜라 건물로 이사했고, 이듬해 그곳에 패션-하우스를 열었는데,
그 가구와 장식은 빈 공방에서 맡아 제작하였다.
그리고 에밀리의 마지막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Portrait of Emilie Floge, 1902. Oil on canvas  에밀리 플로게의 마지막 초상화.
181 x 66.5 cm.
Historisches Museum der Stadt Wien, Vienna


에밀리 플로게.. 평생 클림트와 플라토닉 사랑만을 나누었던 그의 애인이다.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작품 속 에밀리 플로게는 고고하고 정숙해 보인다.
여성편력과 성욕이 강했던 클림트에게.. 그녀는 여성 그 자체를 뛰어넘은 사랑의 대상이었다.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리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이다.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상호간의 정신적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고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반자로서 때론 여행의 동지로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글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클림트가 400회가 넘는 서신을 보냈다고 하니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알만하다.


1903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의 초기 기독교 모자이크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것이 그의 "황금빛 양식"에 반영되었다.


라벤나성(Ravenna)의 모자이크 벽화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안 주교와 사제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확대) /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벽화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으로 치장한 장식화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아 그는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이른바 "황금 시대"를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클림트에게 있어서도 황금기였다.
그는 <다나에>, <세기의 세 여자>,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희망Ⅰ(Hope I) 1903,
유채, 67 x189.2 cm, 오타와 국립미술관, 캐나다


임신한 여자를 모델로 썼다는 것에 대해, 당시에 음란하고 관능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희망>은 가까스로 미술전시회에 전시되었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미치 침머만'이라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클림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지만 아이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희망'이라는 작품이 탄생할 당시 미치는 그의 두번째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이 시기 클림트의 작품속에는 임산부의 모습이 자주 출현한다.
처녀들의 어떤 모습보다도 임산부가 옆으로 선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기도 했다고...



 



클림트에 있어 여성은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 여인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난다.
클림트의 작품세계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는 미치 침머만, 에밀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다. 




임산부에게서 남자의 기쁨과 절망을 보다
2007 10/23   뉴스메이커 746호

남자가 남자다움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섹스다. 일상에서 최상의 쾌락을 선사하는 섹스는 남자라는 존재를 증명해주면서 한편으로는 어떤 남자라도 인류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사명감을 부여한다. 남자는 섹스를 통해 아이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임신은 인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임신은 남자의 위대함을 확실하게 증명해주지만 남자로서 책임감을 절절히 느끼게 해준다. 아이는 인류를 구원해주지만 인류는 그 아이를 위해 해주는 일이 없다. 인류는 오로지 남자에게 쾌락에 대한 책임만 강조할 뿐이다. 결국 남자에게 아이의 탄생은 남성다움의 상실이다.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아이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뿐이다.

임신한 여성을 통해 남자의 기쁨과 절망을 표현한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희망1’이다. 미술사상 보기 드문 소재인 임산부를 주제로 대담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임신이 인류의 희망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임산부를 표현했음에도 클림트의 에로틱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붉은 머리의 임신한 여자는 벌거벗은 채 당당하게 임신한 몸을 드러내놓고 있다. 임신은 남자의 성적 승리를 암시한다.

클림트는 임신한 여인의 벌거벗은 몸을 보여줌으로써 완벽한 여성상, 생명과 육체의 찬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임신한 여성의 얼굴은 타락한 요부로 묘사했다. 요부의 얼굴은 남자를 유혹하는 악의 화신을 암시한다. 임신한 배 위에 깍지를 낀 여자의 양손은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희망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현실적인 주제와 비현실적인 주제가 한 화면에 나타나는 클림트만의 구성요소가 지닌 특징을 보여준다. 죄, 질병, 죽음, 빈곤, 탄생할 생명 등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데 임신한 여성은 희망을, 여성의 머리 뒤로 보이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면서도 성욕의 치명적인 올가미를 암시한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클림트는 모델이자 자신의 정부였던 미치 짐머가 두 번째 임신 중이었다. 클림트는 그녀의 임신한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고 마침 모델들 가운데 헤르마라는 여인이 임신 중이었다. 임신한 헤르마는 모델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그만둘 수 없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임산부였던 그녀는 클림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파격적인 포즈로 화폭 앞에 서게 된다.

클림트는 임신은 남성의  성적 승리의 증거지만 그녀가 낳을 아이는 남자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다고 생각해 새 생명을 잉태한 작품 속 여성 주변에 고통과 번뇌, 죽음을 담았다. 그는 이 작품이 비난에 휩싸일 것을 걱정해 실업가 프리츠 베른도르퍼에게 팔렸을 때 교회 제단화처럼 그림을 덮개로 가리라고 충고했다. 

박희수〈작가·아트칼럼니스트>









Portrait of Hermine Gallia. 1903.
Oil on canvas. 170.5 x 96.5 cm. National Gallery, London, UK.




The Big Poplar II. 1902-03. Oil on canvas. 100 x 100 cm. Private collection.





Pear Tree. 1903. 100 x 100 cm.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Cambridge, MA, USA.




Farmhouse with Birch Trees. 1903. 110 x 11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Birch in a Forest. ca 1903. Private collection.

1904

요제프 호프만과 빈 공방은 실업가 아돌프 슈토클레트의 주문으로 브뤼셀에 저택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클림트는 그 저택 식당에 설치할 대리석 벽화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Watersnakes. 물뱀Ⅰ(Water Serpents I) 1904-1907.
Watercolor and gold on parchment. 50 x 2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법을 걸어 바다 속 푸른 침실로 유인하는 인어는 유혹적인 창조물로 클림트가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다.
물 속에서 수초처럼 물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는 물의 정령들은 성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작은 화폭에 황금빛 머리카락과 상아빛 피부를 지닌 가녀린 두 육체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물뱀1"은
물의 여신을 가장 고혹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클림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값비싼 그림에 속하는 작품이다.




물뱀Ⅱ(Water Serpents Ⅱ) 1904-7 유채  145 x 80cm, 개인 소장   




1905

클림트는 학부 그림들을 완성했지만,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비용을 지불하고 전시를 포기했다.
빈 분리파 회원들을 인상주의와 아르누보라는 서로 다른 양식으로 나누어 놓았던 오랜 의견 대립 끝에
아르누보 계열의 예술가들이 분리파를 떠났다.





여자의 세시기(The Three Ages of Woman), 1905  유채, 180 x 180 cm, 로마 국립갤러리

1905년에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하고 <여자의 세 시기>를 완성한다.
뒤에 1911년 이 그림으로 '로마 국제 미술전'에서 금상을 수상한다.


탄생, 희망, 회한, 죽음.., 삶은 결국 '절망'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반복.. 태어나고 꿈꾸면서 성장하고 회한으로 늙어가고 고통 속에 죽는 것.., 그게 삶인 것을.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움에도 사람들은 애써 죽음을 외면하려 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은 또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토록 끈질기게 존재함(살아있음)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고요히 눈을 감고 잠든 어린 아이(아마도 여자 아이겠지)와 아이를 안은 젊은 여인. 그녀는 마치 꿈꾸듯 세상을 향한 두 눈을 꼭 감은 채 서 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늙은 여인 하나가 서 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마치 죽음이 바로 목전에 와있는 사람처럼.., 늙음, 절망, 어둠,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으며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고스란히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이 작품을 난 참 좋아한다.
비록 삶을 절망으로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그건 엄연한 사실이고 나도 그 과정들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으니까.

클림트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삶에 대해서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과정 흔적으로서 이 그림이 그려졌다고 한다.
사람은 이렇게 뭔가 아픔을 하나씩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걸까




1906

슈토클레트 저택을 보기 위해 브뤼셀로 여행했고, 이어 런던을 여행함.
최초의 사각형 초상화 제작. 클림트는 새로 설립한 화가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Portrait of Fritsa Reidler (1906) 프리차 리들러 부인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



1907

"학부 그림"이 완성되어 베를린에 전시되었고, 에곤 쉴레와 만남.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Oil and gold on canvas 138 x 138 cm/Austrian Gallery, Vienna

★ 2006년 7월, 외신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기록'이 경신됐었음을 긴급 타전했다. 그동안 최고가를 유지했던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을 가볍게 뛰어넘은 작품은 클림트의 1907년 作「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었다. 매매가는 놀랍게도 1억 3500만 달러 (한화로 약 1천 8백억원 정도..흐..),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철학」「의학」「법학」의 완성 시기와 거의 맞물린다. ★ 




Adele Bloch-Bauer I (detail)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만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을 듯...
클림트를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을 서줄만큼 그를 신봉했으며 꽤 오랜동안 육체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디트'와 '키스'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다나에(Danae), 1907-8, 유채, 83 x 77 cm, 그라츠, 개인소장

<다나에>는 주피터(제우스)를 상징하는 쏟아지는 황금 빗줄기를 받아들이려고 몸을 도사리고 있다.
제우스와 다나에의 그 쾌락적 합일과 열락을 관능적으로 포착한 그림이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에로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다나에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고전적으로 다루어지는 소재중의 하나이다. 그 그림 중에는 <황금의 비>의 이미지를 재화와 결부시켜 다나에를 물질적 탐욕의 화신으로 묘사한 것도 있고 그녀가 남자를 모르는 쳐녀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순수의 전형으로 묘사한것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클림트처럼 다나에가 제우스를 맞아들이는 순간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만족감을 포착한 적은 없다.

'키스'이후 클림트는 더욱 대담해 졌다. 이 그림은 황금의 정액과 뒤섞인 황금비를 맞고있는 다나에의 절정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육감적이고 관능적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던 여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사이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가 다나에의 풍만한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들어가 그녀를 방문하는 장면이다.

태아처럼 웅크린 다나에의 자세만이 그녀가 이 기이한 성교로 영웅 페르세우스를 잉태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림속에는 신화적 배경이나 사건 전개를 지시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그림은 오직 신들의 신인 제우스의 정액, 인간의 그것과 달리 황금빛으로 빛나는 생명수를 다나에게 풍만한 넓적다리 사이로 받아들이고 있는 순간만을 클로즈업했다, 그래서일까? 황금빛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다나에의 도취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여인을 휘감는 유혹, 몸의 일부를 가리는 엷은 비단은 그녀가 온몸을 내던져 뛰어든 강렬한 쾌락의 물결처럼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다. 여인은 몸을 내 맡기고 꿈 같은 세계에 잠겨 드는데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감지한것일까? 신화속 여주인공이 완벽하게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며, 황금빛이 깊은 곳에서부터 출렁이며 솟아오르는 관능의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황홀경의 색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쯤되면 쾌락은 어떤 행위의 단순한 보상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경험이 된다. 아마 누구도 이토록 적나라한 장면에 이 만큼의 신성을 부여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신화적 소재와 금색 덕분이다, 장식과 금의 적절한 사용으로 자칫 잘못하면 퇴폐적인 느낌만을 줄 장면이 성스러움이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세속적인 관능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을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가 그림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나에>에는 성적 도취에 온몸을 내 던진 여자만 있다. 신화에 입각해서 보면 그녀의 도취가 제우스의 승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되겠지만 신화의 흔적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면 남자는 사라지고 오직 여자만 있는 성교 장면인데, 잘 찾아보면 제거된 남성의 흔적이 없는것도 아니다. 황금비 속에 숨겨진 사각형을 보라. 그녀의 허벅지가 끝나고 엉덩이가 시작하는 지점에 하얀  테두리로 강조된 사각형은 클림트의 수많은 다른 그림속에서 남성성의 상징으로 남자옷을 장식하던 것이다.



운명의 힘보다 강한 욕망의 굴레..

그리스 신화의 한 토막.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골리스 지방을 아크리시오스가 통치하던 때의 이야기다. 풍부한 물자와 후한 인심, 천혜의 땅이다. 선량하고 부지런한 시민, 왕은 행복했다. 시민은, 대지마저도 기꺼이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 하나. 미모의 여왕 에우리디케가 공주를 출산했다. 공주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쏙 빼어 닮았다. 아니 그것을 능가했다. 바로 다나에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탁은 장차 다나에가 낳을 아기가 왕을 시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비극은 늘 그랬지. 고귀한 신분을 저주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시켰지. 아크리시오스는 절망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주가 장차 나의 목을 따는 친손주의 어머니라니. 그러나 신탁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이다.

왕은 예언의 실현을 막으려면 차라리 다나에를 절해고도에 유폐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의 접근도 허락해선 안 됐다. 왕은 다나에를 눈물로 감금했다. 무쇠를 통째로 녹여서 완벽한 철탑을 완공하고 그 속에 공주를 가두었다. 식수를 제공할 조그만 구멍을 철탑의 천장에 냈을 뿐이다. 육중한 철탑은 견고한 요새로 한 치의 틈도 없이 우뚝했다.

딸을 가둘 수밖에 없었던 왕의 가슴은 찢어졌다. 갇힌 이유를 나중에 유모에게서 들은 다나에 역시 자신의 운명과 부친을 원망하고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슬픔도 철통 같은 무쇠 탑을 녹일 수 없었다. 설령 눈물이 쇠를 부식시킬 수는 있어도, 철탑은 저 홀로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제우스가 이 철탑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탑 주위를 맴돌던 그가 순간, 천장의 틈새로 아름다운 다나에를 발견했다. 다나에를 가둔 청동탑이 아무리 견고하고 쇠창살이 튼튼해도 신의 눈길을 어떻게 막을수 있으랴. 특히 그 신이 아내 헤라의 질투를 피해 여기 저기서 연애 행각을 벌이던 바람둥이 신 제우스였다면...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그러나 견고한 철탑은 요새 중의 요새.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의 아버지 제우스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앞에서 절망했다. 그는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했으나 실패했다. 밤마다 전전반측했으리라.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이때 눈물로 시간을 흘리던 다나에가 하늘의 제우스를 발견했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랑의 신은 순식간에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잠자던 다나에의 정열을 깨웠다. 이제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타오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야릇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흐벅진 넓적다리가 제우스를 향해 절로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어할 수도, 아니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제우스는 눈부신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 역시 욕정을 참지 못하고 황금의 정령을 그녀의 다리를 향해 마음껏 벌컥벌컥 쏟아냈다. 다나에는 황홀경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제우스의 정랑을 갈증 난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니 빨아들였다.

절제할 수 없는 쾌락은, 그녀가 재앙을 잉태한다는 것조차 망각케 했다. 그랬다. 쾌락이 최고조에 도달할수록 비극은 가깝다. 그것은 죽음의 유혹 같은 것이다. 그결과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게 되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다나에와 그녀의 아이를 궤짝에 가두어 망망대해로 띄워 죽음으로 보냈다. 다나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세리포스섬에 표류하여 그곳 왕의 형제이자 어부인 덕티스에게 구출받았다.

한편 성의 왕인 폴릭덱테스는 번번히 거절 당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다나에를 아내로 삼고자했다. 그로서는 방해자인 성장한 페르세우스를 쫓아낼 필요가 있었기에 그는 페르세우스에게 이 섬의 귀족이 마땅히 지급해야할 세금 대신에 고르곤들의 하나인 메두사의 목을 잘라 오라고 명령했다.

페르세우스가 떠나 있는 동안 폴릭덱테스는 다나에를 신전에 가두고 결혼을 승락할 때까지 음식을 주지 않았다. 1년후 페르세우스는 아내로 맞은 안드로메다를 데리고 돌아와 고르곤의 머리를 보임으로서 왕과 대신들을 돌로 변하게 하고 하마터면 죽을뻔한 다나에를 구했다.

페르세우스는 덕티스를 왕으로 앉힌뒤 다나에와 안드로메다를 데리고 아르고스로 돌아와 우연한 일로 아크리시오스를 죽이게 되는데...










Hope 희망Ⅱ (HopeⅡ), 1907~8, 110x110 cm, Oil and gold on canvas (유채), 뉴욕 현대미술관

추상적인 바탕에 가슴을 드러낸 임산부가 그려져 있습니다. 임산부의 옷은 화려하고 무늬는 추상적입니다.
아래쪽에 상념에 잠긴 듯한 여인 세 사람이 보이는데 화려한 무늬에 묻혀 그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임산부의 불룩한 배 위에 해골이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임산부와 해골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해골은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새로 태어날 아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아야 하므로 새로 태어날 아기라도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아이와 관련해 클림트는 큰 슬픔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들 오토가 태어난 이듬해 죽고 만 것이다.
죽은 아들의 얼굴을 섬세하게 스케치한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클림트는 아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죽음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람의 운명이지요.

클림트는 임산부 배 위에 해골을 그려 넣어 그 깨달음을 영원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작품에 특이하게도 ‘희망’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날 때부터 죽음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인간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 깨달음 속에 있는 사람은 주어진 날 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삽니다.
그렇게 사노라면 진정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가꿔갈 수 있지요. 삶도 죽음도 모두 고맙고 귀한 선물로 여기게 됩니다.
희망은 그런 감사하는 마음에서 피어납니다.



 



1908

"클림트 그룹"은 쿤스트 쇼를 기획하였고, 여기서 다양한 유형의 아르누보 작품들이 54개의 전시실에 전시됨.
전시의 중심은 <키스>를 포함한 16점의 그림이 전시된 클림트의 전시실로서 이 그림은 현대 미술관에 팔림.
클림트의 도움으로 아직 신인이던 오스카 코코슈카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었다.





The Kiss 1907 -1909, 유채, 108×180㎝,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화려한 황금빛 색채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 작품은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이다.



이제 막 성숙에 눈을 뗀 어려보이는 여자와 그녀에게 키스하고 있는 한 남자의 정열을 화려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남자는 강한 팔로 여자를 감싸고 있고, 여자는 표정으로 감미로운 키스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벌써 한 세기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서 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그림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키 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서 있다. 짧은 순간에 도취하여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여인 하지만 그 순간의 감흥이 얼마나 큰지는 말려들어가는 손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가운은 마치 후광처럼 짧은 순간의 감흥을 더해주고 두 사람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나인듯 하지만 결국 엄연히 다른 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패턴화된 장식을 통해서다.
남성의 옷에는 직사각형의 장식을 넣어서 남성성을 드러냈고 여성에게는 둥근 원형의 장식을 넣어서 여성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 큰 가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의 상징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남성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남성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통해서만이 진정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화해의 이미지는 입맞춤인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통한 영원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클림트 자신과 에밀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 그림은 분명히 사랑을 통한 화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결코 따뜻하거나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관자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매몰차게 돌려져 있는 남자의 머리와 창백한 얼굴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 듯 꼭 감은 두 눈의 여자의 얼굴에서 오히려 소외감과 우울함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이 작품을 통해 남녀의 얼굴을 먼저 그린후 자연스럽게 구불구불한 선으로 장식했는데.. 이처럼 다이나믹한 선이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성격이라 볼수있다. 이것은 동물이나 식물등 자연의 곡선을 그대로 본뜬것으로 이런선을 표현하면서 감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을 환기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클림트는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의 19세기 양식을 응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법을 보여주며 정교한 장식성으로 아르누보를 발전시켜 나갔다고 볼수 있다.





1909

두 번째 쿤스트 쇼에서는 당대 유럽 회화에 대한 탐색이 행해졌다.
코코슈카의 그림뿐 아니라 에곤 쉴레의 그림도 포함되었던 이 전시는 클림트가 기획한 마지막 전시회였다.
가을에 그는 파리로 여행했고,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갔다.
클림트의 "황금 양식" 시기가 막을 내렸다.



크림트는 대표작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황금시대를 종료한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 새로 발표한 작품이 Judith II. 전형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최후의 순간까지 관능성과 장식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Judith II (Salomé)
1909, Oil on canvas, (178 x 46 cm), Galleria d'Arte Moderne, Venice

클림트는 1909년 또 한 번 아델레를 모델로 <유디트2>를 제작했다. 세로로 긴 그림인데 이런 형식은 일본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극동적인 요소는 그의 서명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치 그림에 낙관을 채우듯 화면 왼쪽 하단에 금색 네모 안에 두 줄로 'GUSTAV KLIMT'가  새겨져 있다.

작품에서는 금색 바탕은 최대한 줄어들었지만, 좌우로 두껍게 짠 액자를 금색으로 칠해 여전히 '황금 양식'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에서와 같이 모자이크 형식이 나타난다.

가슴을 드러낸 유딧은 경직해 있는 듯 하지만, 옷자락을 쥔 손이나 흰색 곡선은 그녀가 춤을 추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왼손으로 목이 베어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다. 이렇게 춤을 춘다는 것은 세례 요한을 죽이기 위한 살로메에 관한 내용이지 유딧과는 상관이 없다.

완력으로 자신을 겁탈한 남자의 목을 벤 후, 그 머리를 들고 승리의 춤을 추는 유딧의 얼굴 표정을 보자. 두 눈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보이며, 손가락은 희열의 경련이라도 난 듯 잔뜩 구부러져 있다. 사실 아델레는 사고로 손가락 하나를 펼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곧잘 손가락을 모아 쥐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서양화에서 잘려진 남자의 얼굴과 칼을 든 여인의 그림에서는 그 주인공이 유딧인지 살로메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두 인물이 도덕적으로 서로 반대편에 서 있지만 클림트는 왜 살로메와 같은 일반적인 팜므 파탈을 그리면서 굳이 유딧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바로 유딧이 직접 행동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국심에서 비롯된 살인이지만, 얼마나 단호했으면 직접 대검으로 한 사내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 대목에서 유딧이 '치명적인 여인'이 된다. 그래서 유딧의 미덕인 정숙함과 높은 신앙심이 베일 뒤로 가려지고 마는 것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자신을 대상으로 그려진 두 점의 유딧 그림에 스스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들은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끌어가는 부유한 엘리트였으니까. 그녀는 그 외에도 클림트가 그린 <키스>의 여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고도 한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1925년 1월 24일 마흔넷의 나이로 남편보다 일찍 사망했다. 그녀는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지만, 당시 서양은 여자의 교육과 권리에 매우 인색했다. 그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지만 남자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재력이 풍부했던 그녀는 자신의 저택을 개방하여 문학과 예술, 정치계 명사들을 초대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배우며 스스로 깨우쳐가던 중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죽을 때 카톨릭의 전통적인 장례를 거부하고 화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며 자신이 소장한 클림트의 그림을 사회로 환언하겠다며 빈의 현대 갤러리에 기증했다.

- 홍진경 저,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 중





Seal for Gustav Klimt, 1907~09 Josef hoffmann이 클림트에게 선물한 도장이다.
금박을 살짝 입힌 은과 공작석으로 만든 이 도장은 호프만의 디자인과 비엔나 워크샵의 세공술의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군데 군데 벗겨진 금박에서 클림트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하다.










1910

클림트는 제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했고, 프라하에서 독일의 화가연맹과 함께 전시했다.
슈토클레트 저택(Palace Stoclet)의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완성하였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하였다.



Palace Stoclet Frieze


     무희(기다림)                          Tree of Life                              포옹                              Dekor   

Cartoon for the Frieze of the Villa Stoclet in Brussels:
1905-1909. Mixed Media.193.5 x 115 cm. 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s, Vienna, Austria.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더불어 그만의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말년에 찾아든 명성은 그의 호반 생활과 더불어 분명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무렵 수많은 풍경화들을 남겼는데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작품들이 이 무렵의 것들이다.

클림트는 모두 22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1/4이 풍경화이다. 대부분 클림트가 1900년에서 1916년까지
플리게 자매들과 함께 여름을 보냈던 오스트리아 북부의 아터 호숫가의 풍경을 담고 있다.








Malcensine on the Garden Lake (1913) <가르덴 호수 주변의 말세진느>






그는 초상화작업도 매우 열심이었다.

여러 파문에도 클림트를 오스트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손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원했고, 클림트 역시 기꺼이 이에 응했다.

그는 장식성을 '진보할 수 없고, 지진아적'이라고 말했지만
초상화에는 그 현란한 장식성과 색채를 통해 비엔나의 상류층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환상적이며 섬세한 디테일을 돋보이게 하는 금박을 입힌 초상화는 부르주아 층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이태리 성당의 화려한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비잔틴 예술에서는 신비적 금욕을 유도하려던 것에 반해
클림트는 관능적 황홀감으로 변화시켰는데 이는 금 세공사의 아들로 자라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 받는 것이 당시 비엔나 상류층 여인들에게는 일종의 유행이었고,
금전적인 고민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클림트의 이해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클림트의 초상화들




















Portrait of a Lady





























Mäda Primavesi.
 1912. Oil on canvas.
150 × 110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Marie Moll


















Ria Munk On Her Deathbed






















1911

로마에서 열린 국제 미술전에 참가하였고, <죽음과 삶>으로 일등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실이 헐리게 됨에 따라 빈 13구역의 Feldm hlgasse에 새로운 작업실을 얻었다.








Death and Life, 1916,
Oil on canvas, 178 x 198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적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1908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 뒤에는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으며
1912년에는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 등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1912

드레스덴에서 열린 미술 대전에 참가하였다. 에곤 쉴레는 자화상을 그렸고, 클림트는 <은둔자>를 전시했다.
Arpad Weixlg rtner가 클림트에 대한 장문의 글을 썼고, 잡지 <> 35호에 실렸다.




처녀 The Virgins (Die Jungfrau) 1912-13, 유채, 190x 200cm, 프라하, 나로드니 미술관
<처녀>는 잠재적 성욕을 내포하는 여인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라고 평론에 되어 있다.



 




1913

부다페스트, 뮌헨, 만하임 등지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함.






1914

브뤼셀로 가서 슈토클레트 저택의 벽화가 완성된 것을 직접 봄.
거기서 콩고 미술관을 방문하였고, 원시 조각에 강한 인상을 받음.

말년의 그는 1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낮에는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아터호반에서 에밀리 플뢰게와 함께



1915

바르바라 플뢰게의 초상화를 그림.


1916

쉴레, 코코슈카, Faistauer와 함께 베를린 분리파 전시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전시회에 참가.







 


The Friends, 1916-17.



1917

뮌헨과 빈 순수미술원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됨.






Baby, 1917-1918


1918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한 해 앞둔 1918년 전유럽을 강타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바로 얼마전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던 클림트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1월 11일 발작을 일으킨 후 회복되지 못하고 비엔나의 자택에서 2월 6일 사망, Hietzing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비엔나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실레도 갔다.




Gustav Klimt in His Blue Working Smock. Around 1912
Egon Schiele. Pencil, gouache, 52.5 X 28 cm.



그의 작업실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미완성 유작으로 <유람>,<신부>,<아담과 이브> 등을 남겼다.

클림트 사후에 그의 재산은 클림트 자매와 에밀리 플뢰게에게 나누어졌다.
에밀리는 그에게 부친 편지들을 대다수 태워버렸다고 한다.




1938

플뢰게의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여 클림트의 스케치북 50권이 소멸되었다.





클림트의유작들


 


부채를 든 여인




The Bride (unfinished) 1917-18 신부





Adam and Eve (unfinished)



마치며......

클림트가 사망한후.. 그의 기법을 추종하는 기파가 생기지 않았고..
그가 생존했을때는 염쇄적이고 퇴폐적인.. 문란한 작품이라고까지 비판받았던.. 그의 화법이
미술사적 입장에서 그리 대단하게 전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대단한 사랑을 받고있는 것을 보면.. 

현대의 클림트는 분명 환영받고 있다.

그가 살았던 오스트리아는 그의 작품 덕을 톡톡히 보고 있을 뿐더러,
그의 그림들은 여러 패션 디자인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또한 그의 그림은 카페나 술집 등에 그 모조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문구류에도 등장하고 있다.





‘벌거벗은 진실’을 찾아서

몇개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클림트는 황금빛 누드의 그림으로 오스트리아 화단의 정상에 섰다.

클림트는 여성을 관능적 존재로 보았다. 벌거벗은 모델이 늘 화가 주변을 에워쌌다.
그는 철저하게 여성의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의 잠재력을 발가벗겼다.
워낙 과작인데다 전쟁으로 작품이 파괴돼 남아 있는 그림이 적은 클림트이지만
그가 남긴 스케치와 드로잉은 엄청나게 많다. 그만큼 클림트는 끊임없이 인간을, 특히 여성을 탐구했다.
그가 모델들과 몸을 섞고 10여명의 아이를 둔 까닭도 본능적 여성 연구의 결과였다.


작품을 통해 본 그의 우주관은 ‘쇼펜하워적’이다.
의지로서의 세계, 무의미한 출산, 사랑과 죽음의 끝없는 윤회에 묶인 맹목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클림트가 숭배했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1896년에 완성한 철학적 교향곡 3번의 노랫말은 그대로 클림트 그림의 이론이 된다.

“아, 인간이여! 귀기울이라!/ 깊은 한밤중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난 잠들었다. 잠자고 있었다./ 깊은 꿈에서 깨어나서 알게 되었노라./ 세계는 깊다고,/ 대낮이 알았던 것보다 더 깊다고./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다./ 세계의 슬픔은 깊다./ 욕망은 고통보다 더 깊다./ 슬픔이 말한다, 사라져라, 죽어라!/ 하지만 욕망은 영원하고 싶어하지./ 깊고도 깊은 영원성을 원한다네!”

클림트가 말년에 여성 초상화에 몰두했던 것은 순수하면서도 영원히 자신의 의지 속에 담아둘 수 있었던 것이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오감이 충족되어 행복하게 웅크리고 있거나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있는 여성에게서 클림트는 평화를 찾았다.


기존 질서에 맞서 그림으로 새 시대의 자유와 희망을 부르짖었던 ‘철학’, ‘의학’, ‘법학’ 연작으로 스캔들에 휩싸였던 그는
오래 불화했던 세상과 타협한 듯 보였다. 자궁을 연상시키는 타원형의 꽃무늬 속에서 여성들은 안온하다.


가장 여성적인 것이, 가장 관능적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클림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Gustav Klimt sketch postcard













 






클림트 회화의 에로티시즘 '도자기로 재탄생' (2009.1. 9 머니투데이)
한국도자기가 9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 1층 아케이드에서 롯데 센터점 오픈을 기념해 '구스타프 클림트' 도자기를 공개했다.
오스트리아의 초기표현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화가 담긴 도자기 식기는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한정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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