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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Talent

Marilyn Monroe




백치미, 3번의 결혼과 이혼,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 케네디 대통령 형제와의 염문, 36세라는 젊은 나이의 의문스러운 죽음...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에 따라 붙는 많은 수식어들 중 일부만 나열해 본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짧지만 굵게 살다간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 만 36세로 일기를 마감하기까지 모두 30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일생 동안 3번의 결혼과 이혼을 한 그녀를 두고 ‘팔자가 기구한 여자’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매 결혼마다 남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축복 받았다고 해야하나... 그러나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들여다 보면 가슴 한 쪾이 저려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 당시 공장 노동자였던 제임스 도어티를 첫 번째 남편으로 맞은 먼로는 20살이 될 때까지 4년간 결혼생활을 지속했다. 두 번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다. 그러나 이 결혼도 오래 가지 못했다. 불과 274일 만에 이혼한 그녀의 당시 나이는 겨우 29세!


마지막 결혼 대상자는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Salesman)으로 유명한 극작가 아서 밀러.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자마자 바로 그 다음해에 결혼했는데 3년 반 동안 부부관계를 유지했다. 이 결혼은 1961년 1월에 파경을 맞았고, 먼로는 다음해인 1962년 8월에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결국 먼로는 세 남자와 더불어 8년 안팎에 불과한 결혼 생활을 지속한 셈이다.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이다. 1926년 6월 1일 사생아로 태어난 이래 5년 동안 양부모 집에서 자랐다.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먼로는 어머니가 요양소에 들어갈 때까지 짧은 기간을 함께 보냈다. 그 후 오랫동안 친척과 친구 집을 전전하며 보내야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차가웠다. 그 차가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법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내게 등을 돌린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던 일이라곤 가상의 현실에서 즐거움을 꿈꾸는 일이었다."

그녀의 첫 남편 제임스 도허티와의 결혼은 양부모 집의 갑갑한 분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결혼이었다. 1944년 해군이었던 도허티가 외국으로 전출되면서 홀로 남게 된 먼로는 낙하산 제조공장 작업장에서 일했다. 먼로가 일하는 장면은 우연한 계기에 사진에 담겨 전시 여성의 기여를 상징하는 모습이 되었다. 먼로에게 매력을 느낀 사진가들은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각종 잡지와 달력에 실었다.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소설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생활은 격정적 사랑의 시기였다. 많은 영화에 출연해 주요 배역을 맡기도 했으며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1960년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6살이 되던 1962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의혹을 남기고 영원히 잠들었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원인은 아직도 불분명하다. 자살이나 약물과다복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암살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점이 있다. 20세기를 풍미한 스타로 그녀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기의 스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Marilyn Monroe(June 1, 1926 – August 5, 1962),
born
Norma Jeane Mortenson, but baptized Norma Jeane Baker, was an American actress, singer, and model.







가장 화려한 스타였으나, 한편으로 가장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던 마릴린 먼로는 그 출생부터가 비극적이었다. 1926년 6월 1일 먼로는 어머니 글래디스 펄 베이커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의 이름은 노마 진(Norma Jeane)이었다.

출생신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 마틴 E. 모텐슨은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실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직장 동료였던 스탠리 기포드였다. 훗날 먼로는 여러번 친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를 꺼려했다. 어린 시절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딸을 맡기고 가끔 들러서 그녀를 만나곤 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마 진은 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머니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에는 어머니의 친구 집에서 생활하다가 고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1942년 6월 19일, 마지막 보호자 그레이스 고다르의 주선으로 노마 진은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혼자 남은 노마 진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1945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버를 만나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1946년 8월 26일, 노마 진은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폭스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주로 모델로 활동했지만, 그것은 여배우로 성장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1947년 마릴린 먼로는 첫 번째 영화 <스쿠다 후! 스쿠다 헤이! Scudda-Hoo! Scudda-Hay!> (1948년 개봉)에 출연하지만, 편집과정에서 그녀의 연기는 대부분 잘려나가고 영화사와 계약도 연장되지 않는다.





Marilyn Monroe in 1947, publicity for "Scudda Hoo! Scudda Hay!".
Scudda Hoo! Scudda Hay! is a 1948 comedy film which is generally considered to be Marilyn Monroe"s "film debut" (although most of her footage was cut and she only has a brief one-line scene).


한 주에 65달러가 집세와 연기 수업료로 나갔고, 식사는 산타 모니카를 오가는 가로수길에서 때워야 했다. 60세의 아버지 같은 영화제작자 조 솅크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와의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그녀는 자신보다 열살 연상의 프레드 카거를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매우 행복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드 카거는 마릴린 먼로라는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랑하는 척 했던 것이다.

20세기 폭스는 마릴린 먼로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사실 누가 보더라도 마릴린 먼로의 연기는 그녀의 몸매만큼 볼 만한 것이 못되었다.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20세기 폭스사는 마릴린 먼로를 해고했다. 폭스사에서 해고된 뒤 컬럼비아로 영화사를 옮긴 마릴린 먼로는 이곳에서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한순간에 다시 맨 밑으로 떨어져 버린 마릴린 먼로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은 그녀의 나이 22세 때 심장병을 앓고 있던 늙은 에이전트 자니 하이드였다. 자니 하이드는 마릴린 먼로보다 30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금발 미녀를 얻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렸고, 20세기 폭스사에서 그녀와 다시 계약을 맺도록 힘써주었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를 위해 헤어드레서와 연기코치를 배정해주었다.

그러나 먼로는 영화 배우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으므로 하이드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마릴린 먼로에게 할리우드의 감독이나 영화 제작자들과 관계하다 원치 않는 임신은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에게 성공은 일순간에 찾아왔다.

1950년에 그녀는 <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이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조역을 맡으며 호평을 얻었고, <이브에 관한 모든 것>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마릴린 먼로에게 호응하기 시작하자 제작자들은 그녀의 매력이 관능적 백치미에 있다고 판단하여 이후 일련의 영화들에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관능적인 백치미를 한층 더 부각시켜 나갔다.


그러나 1952년 그녀에게는 예기치 못했던 장애물이 출현했다. 그녀가 아직 무명이던 시절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촬영했던 누드 사진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여배우의 스캔들은 치명적이었다. 미국 사회는 마치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국처럼 청교도적인 근엄한 얼굴을 한 채 뒤로는 욕망의 질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Marilyn's Famous Nude Calender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유명해진 뒤 누드 사진을 이용해 그녀를 협박하자, 오히려 자신이 직접 사진을 공개해버렸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자 성공신화에 목말라했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성공을 위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관대했다. 그녀는 "전당포에 맡긴 차를 되찾기 위해 50달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을 입지전적인 인물로 포장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에게 대중과 언론이 던져준 면죄부는 그녀가 청순미를 과시하는 배우가 아니라 섹스 어필 하는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이 논란은 결과적으로 마릴린 먼로를 스타덤으로 끌어올리는 지렛대가 되었고, 이듬해인 1953년에는 휴 헤프너가 창간한 <플레이보이>는 창간호 커버에 먼로의 지나간 누드 사진을 게재했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을 찍은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나이애가라>(1953)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How to Marry a Millionaire>(1953) <쇼비즈니스 만한 비즈니스는 없다>(1954) 등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스타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먼로가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한다.

1954년 먼로는 조 디마지오와 혼인한 후 <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1955년 개봉)을 촬영한다. 이 영화로 인해 먼로는 특별한 이미지를 세계에 선물한다.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드레스가 들리는 관능적이면서도 코믹한 장면은 그해 9월 15일 뉴욕에서 촬영된 것이다.

마릴린 먼로가 치른 3번의 결혼 중 가장 요란했던 것은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였고, 그 정점에 섰을 때 과감히 은퇴한 그는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보고 그녀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스포츠 스타와 연예 스타간의 화려한 만남을 보고 싶었던 대중의 욕구는 언론을 움직였고, 영화 제작사도 이벤트를 원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는 스포츠를 몰랐고, 디마지오는 영화를 끔찍하게 지겨워 했다. 더군다나 디마지오는 매우 엄격한 이탈리아 이민가정 출신으로 가정에 헌신적인 배우자를 원했다. 이 두사람의 만남이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릴린 먼로가 <7년만의 외출>에서 유명한 뉴욕 지하철역 장면을 촬영한 뒤 급기야는 디마지오가 마릴린 먼로를 심하게 두들겨 패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마릴린 먼로는 다음날 시퍼런 멍자국을 숨기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해야 했다.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사랑했으나 먼로는 한 사람의 아내일 수 없었고, 남편 조차 그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온전히 할 수 없었다.





The Seven Year Itch <7년만의 외출>


이들 부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마릴린 먼로는 10대 때부터 거듭된 낙태 수술로 자궁이 엉망이 되었고, 몇 차례의 임신도 번번이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유명한 부부는 어딜 가나 자신의 팬들에게 휩싸여야 했다. 결혼한지 9개월만의 일이었다. 마릴린 먼로가 마약과 약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여자로서는 실패했다. 남자들은 내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들이 나를 가지고 만든, 또 내가 나를 가지고 만든, 섹스 심볼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남자들은 너무 많이 기대하고, 나는 그 기대에 맞추어 살 수가 없다."


1954년에 이르자 그녀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섹스 심볼로서의 역할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마릴린 먼로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심각한 것이었다. 대중은 불꺼진 극장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열광하면서도 대낮에 거리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창녀'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마릴린 먼로는 마르셀 프루스트나 에머슨 등 당대의 고전을 들고 다니며 자신의 지성 콤플렉스를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이 소유권의 51%를 갖는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설립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때 짖궂은 기자가 철자가 어떻게 되는 지를 묻자 "내가 말하는 이름의 철자는 하나도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도 인정받고 싶어했던 먼로는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리 스트래스버그로부터 연기를 배웠다. 탁월한 연기력까지 갖춘 그녀는 할리우드로 돌아와 <버스 정류장 Bus Stop>(1956), 로렌스 올리비에와 공연한 <왕자와 쇼걸 The Prince and the Showgirl>(1957),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 <부적합자 The Misfits>(1961)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화배우로서는 승승장구했지만, 그녀의 영광 속에는 늘 파멸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1956년 7월 1일 유대인 극작가 아서 밀러와 혼인하지만, 4년 만에 파경을 맞이한다.



아서 밀러와 먼로가 57년 4월 Waldorf-Astoria Hotel에서 춤추는 장면.
<세일즈 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한 먼로

아서 밀러와 마릴린 먼로가 결혼했을 때 세기의 지성과 세기의 미인이 결혼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파더 컴플렉스가 있던 마릴린 먼로는 결혼하는 남자들이 젊고 생생한 미남자가 아니라 (미남자가 지천인 헐리우드에서) 어른스럽다 못해 아버지스러운 남자들과 결혼했었다.
밀러의 친구인 엘리아 카쟌의 회고에 따르면 아서밀러가 춤을 잘추는 사람이라 그의 품안에서 마릴린은 행복했을 꺼라고 했다는군요. 아서 밀러와 사이가 틀어진건 먼로가 유산한 이후였으며 그녀는 자신이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느낄수 없다는 사실에 낙담했었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결혼하며 부부관계라기 보다는 '사제관계'에 가까운 관계이긴 했으나 그녀의 공식적인 관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결혼생활(3년 반)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프랭크 시내트라, 이브 몽땅과 염문을 뿌렸고, 곧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있는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남자가 바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였다.

훗날 먼로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자신의 주치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군인이에요. 나의 최고 상관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있는 남자지요. 군인의 첫 번째 임무는 사령관에게 복종하는 것이잖아요. 나는 그 남자를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자신의 생일 축하 파티에서 그 유명한 노래 <Mr. President>를 불러준 이 금발 미녀를 지겨워 했고, 자신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넘겨줬다.(일설에는 마피아가 케네디 형제의 약점을 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릴린 먼로를 붙여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From President Kennedy's birthday gala where Monroe sang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마릴린 먼로는 미국 대통령 형제에 의해 씹다 버린 풍선껌처럼 버려졌고, 곧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구소련의 한 신문은 "미국 문화를 생각할 때 뭐니 뭐니 해도 풍선껌과 마릴린 먼로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풍선껌에 비유된 마릴린 먼로. 벗겨서 씹다가, 단물 빨아먹고, 실컷 가지고 놀다가 뱉아 버리는 그 풍선껌.

세 차례의 공식 혼인 관계와 상관없이 자신의 누드 사진 작가, 음악감독, 후견인, 잡지 기자, 햇병아리 배우, 음성 코치, 동업자, 그리고 말년에는 자신을 태우고 온 택시기사, 식당 종업원 등의 즉흥적인 섹스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그녀 자신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의 일생을 고백했다.






노마 진의 어린 시절에 대해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은 마릴린 먼로의 <마이 스토리> 서문에서 “이 어린 여자아이에 비하면 문학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 주인공들은 상황이 꽤 좋았던 셈이다. 디 킨스도 이렇게 강하고 재치 있고 무지하고 가엾은 아이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드워킨은 또 마릴린 먼로의 남자들에 대해 그들이 “그녀의 찢어지고 곪은 상처에 소금을 대고 문질렀다”고 말한다. 섹스 심벌로서의 먼로의 이미지는 어쩌면 남성 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먼로를 유명하게 했지만, 그것이 또한 그녀를 불행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 하면 ‘섹스 심벌’이라는 말과 ‘백치미’의 여인을 떠올린다.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치마를 펄럭이며 천진하게 웃는 모습,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도발적인 입술, 반쯤 감은 눈, 출렁거리는 금발 미인, 그것이 우리가 떠올리는 먼로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이면에서 그녀는 모순된 우리 사회에 대해 상당한 깊이의 문제의식을 가진 배우였다.





먼로가 가장 좋아한 미국인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었다. 링컨은 그녀가 아는 인물 중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던 작가 링컨 스테펀스의 작품을 탐독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 달리 먼로는 만만찮은 지성을 갖춘 배우였던 것이다. 그녀는 <라이프> 지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섹스 심벌’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의 심벌이 되었든 이 심벌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섹스 심벌이 사물화될 때 그렇다. 나는 물건 취급 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의 심벌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섹스 심벌이 되겠다. 어떤 여자들은 스스로든 스튜디오의 유혹에 의해서든 나처럼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전방이나 후방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중간에서 살고 있다.”

먼로는 스스로가 최전방 또는 최후방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영광의 첨단이자 불행의 심연일 수 있다. 이러한 발언은 백치미의 그녀가 결코 백치가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마릴린 먼로에 대한 발언은 그녀의 진가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던 배우, 반공을 애국적 광기로 몰아가던 매카시즘에 저항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던 용기 있는 배우, 인민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인민(people)이라는 말을 좋아했던 배우, 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전략적으로 남성 판타지 속에 투사하며 가부장적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생존을 시도했던 파워 페미니스트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여성, 연기를 통한 자아 실현의 의지를 갖춘 철학적 시인 같은 지성적 배우, 고독을 친구 삼아 철저하게 자기 준비를 했던 프로, 대중이 만들어준 스타의 공익적인 기능을 간파한 동시에 장식품이 되기를 거부했던 지성, 그러면서도 자아 도취와 자기 혐오라는 극단적인 인지 부조화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 정도로 순수하게 자신을 직면했던 마릴린 먼로!”
죽기 얼마전의 모습


1962년 6월 1일은 먼로가 20세기폭스 사와 마지막으로 작업한 날이자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인 최후의 날이었다. 이후 그녀는 극심한 조울증 증세를 보였다.

마릴린 먼로는 조 디마지오와의 두 번째 결혼을 불과 3일 앞두고 치사량의 약물 복용으로 세상을 등졌다. (1962년 8월 5일 이른 아침, 마릴린 먼로는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로 발표되었다.) 이때 그녀에게 남아있던 재산은 불과 5천 달러였다고 한다.

그녀는 생애의 마지막 1년 반을 장차 케네디가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망상과 하루 중 절반을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심한 약물 중독으로 보냈고, 사망한 뒤에 실시된 사체 부검 과정과 수사 과정에 많은 의문점을 남겨 케네디가의 개입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녀의 장례를 준비한 것은 조 디마지오였다. 이후 몇 년 동안 무덤 앞에 매일 장미꽃을 가져다 놓은 것도 그였다.

그녀는 갔지만, 그녀가 남긴 이미지는 우리에게 영원히 있다. 그 이미지 때문에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저승으로 무대를 옮겼다. 조 디마지오는 저승에서 마릴린 먼로를 ‘다시’ 만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을까?






마릴린 먼로가 치른 3번의 결혼 중 가장 요란했던 것은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었다.



조 디마지오는 베이브 루스와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위대한 야구선수다. 그의 56경기 연속안타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 이태리계 야구선수는  2차대전이 시작되어 뒤숭숭한 미국을 다잡아 주는 희망의 아이콘 같은 역활을 할 정도로 대단했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만남은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두 세계’의 절묘한 결합이었다. 1950년대 영화산업은 최고의 절정이었고, 미국의 프로야구는 모든 미국인들의 공통된 화제였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는 세계를 유혹하는 섹스 심벌로 명성을 더해가고 있었고, 조 디마지오는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1951년에 은퇴한 조 디마지오는 메이저리그 56경기 연속안타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고 통산타율 3할2푼5리 홈런 361개를 친 전설의 메이저리거로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 소식을 들은 전 세계 사람들은 설레는 가슴으로 두방망이질했다. 1954년 1월 14일,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와 프로야구의 상징적인 강타자 조 디마지오는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두 사람 모두 두 번째 결혼이었다.

이렇게 28살에 전 야구선수 죠·디마지오와 결혼한 직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초대를 받고 신혼여행을 겸하여 일본을 방문했지만 야구 일을 겸하고 있던 디마지오는 체제 중 바쁘게 밖으로 나가는 날이 많았다. 야구에 흥미가 없었던 먼로는 혼자서 호텔에서 기다리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때, 한국 전쟁으로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을 위문해 주었으면 한다고 하는 의뢰가 왔다. 시간을 주체 못하고 있던 먼로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지 말라는 디마지오와 싸움을 하고 끝내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그녀는 고생하는 자국의 군인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1954년 2월 12일 공연을 앞두고 대구 동촌비행장에는 먼로를 환영하기 위해 배우 백성희와 최은희가 마중을 나갔고, 세계적인 여배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인해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대구 K-2 비행장에서 팔공산을 배경으로 전투기 위에서 포즈를 취한 마릴린 먼로.
(이 사진은 2009년 7월 31일 부산의 배기복씨가 공개한 것이다.)

'마를린 먼로 한국에 오던 날' 보기


향수병에 걸려 있는 군인들을 상대로 한 미군부대에서의 공연이 더욱 열광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먼로가 직접 쓴 <마이 스토리>에 그때 공연 모습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로가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한 장교가 당황한 모습으로 다가와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무대에 오르셔야겠어요. 더는 군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무대 위로 돌을 던져대고 있어요.”


그때 많은 미국병사들이 환호했지만, 한국에서 돌아간 먼로는, 감기에 걸려 버린다. 그래서 먼로는 감기치료를 하기 위해, 일본의 지압창시자인 “나미코시-토미지로우”를 불러들여 완전 나체로 지압을 받았다고 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두 스타의 결혼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두 사람의 불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먼로가 만인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다면 디마지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뭐든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9개월 만에 파경을 맞게 된다. 10월 4일 먼로의 변호사가 이혼을 발표한다.

Joe DiMaggio and Marilyn Monroe staying at Imperial Hotel in Tokyo on their honeymoon.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이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니었다. 디마지오는 먼로가 세 번째 결혼에도 실패하고 약물중독에 빠졌을 때 다시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 재결합을 목전에 둔 1962년 8월 5일, 먼로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디마지오는 20여 년 이상 매주 장미꽃을 그녀의 무덤에 바쳤다.

1999년 디마지오는 숨을 거두기 전 “이젠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군”이라고 말했단다.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화제 만발했던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영원할 것이다. 2006년 5월에는 그들이 함께 사인한 야구공이 19만1200달러(당시 약 1억80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조 디마지오가 먼로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그녀가 죽은 뉴욕의 아파트 관리자들은 마땅히 연락할 곳이 없어서 당시 재결합을 위해 한참 사귀고 있던 조 디마지오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은 그는 모든 이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그녀의 장례를 준비한다. 장례식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슈퍼스타의 장례식이니만큼 최소한 영화사 관계자들과 동료 배우들만이라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마릴린은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있었을 것이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장례식이 끝나고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라고 몇 차례나 흐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 중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뭉클하게 하는 대목은 조 디마지오가 죽기 직전까지 그녀의 무덤에 매주 두 번씩 장미꽃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마릴린 먼로는 세계 패권 국가로 등극한 미국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순수(때로는 어린이와 같은 천진스러움과 백치미)와 자유(때로는 성적 방종)로 치장하고, 대외적 이미지를 누그러뜨릴 대중문화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남성의 성적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소녀적 순수성,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하는 복합적 캐릭터였다.

원래 마릴린 먼로의 머리 색은 갈색이었는데 이런 글래머와 백치 미녀의 아이콘화에 부합되기 위해 금발로 염색했다. 원래 그녀의 이름이 노마 진이었듯이… .



마릴린 먼로의 전성기는 한국전쟁과 냉전, 핵폭탄의 공포, 미국 사회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여 마녀 사냥 같은 빨갱이 사냥으로 수많은 지식인들과 영화인, 예술가들을 궁지에 몰았던 때이자 전통적 도덕이 붕괴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남성 사회의 저항을 뚫고 솟아나던 시기였다.

양차 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은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젖어들었고, '섹스를 통한 구원'을 꿈꾸었다. <플레이보이>가 창간된 것은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의 일이었고, 소련의 핵 실험으로 촉발된 미국의 어이없는 매카시 광풍은 대중들에게 골치 아프고 위험한 정치보다는 좀 더 안전한 섹스의 쾌락, 배설에 빠져들게 했다.


마릴린 먼로의 포즈는 옆의 사진처럼 상체를 드러내고, 양 발을 모아 자연스레 허벅지가 벌어지는 열린 듯 닫혀있는 자세가 많다. 그녀는 농염한 육체로 우리들을 유혹하면서도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의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녀는 손쉽게 허물 수 있고, 손대면 톡하고 단물을 쏟아낼 것처럼 보인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그의 책에서 이 시기의 미국을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보수 반공국가들의 리더이자 세계 최고의 '슈퍼 파워'로서 그 어두운 그림자를 국제 사회에 덮기 시작하는 시기", "더이상 과거의 사춘기적 순수함을 유지할 수 없었"던 미국이 "패권 국가로서의 미국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는 대중문화의 상징"으로서 마릴린 먼로를 필요로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 - 케이트 밀레트

유명한 여성학자이기도 한 '케이트 밀레트'는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만인(대중)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을 예수의 삶에 비유하는 불경(?)스런 발언을 하기도 한다. 마릴린 먼로가 정말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미국의 죄를 대신해 죽은 것 처럼 보이기는 한다.



<마릴린 먼로, My Story>는 마릴린 먼로가 스스로 쓴 책이다. 1954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책은 먼로의 어린 시절부터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까지 자신의 일생을 솔직담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미완의 자서전은 그녀의 사업 파트너였던 밀턴 H. 그린(Milton H. Greene)에게 전해진 원고를 책으로 낸 것이었다.

조 디마지오와 먼로는 성격적으로 꽤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먼로는 두 사람이 닮은 점이 많다고 말한다. “스타가 되는 것은 회전목마 위에 서는 것과 같다. 여행을 할 때도 회전목마를 가지고 간다. 그 지역 사람이나 낯선 풍경은 볼 수 없다.”(본문에서). 이 책에 담긴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먼로의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출처 : 오늘의 세계인물,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먼로가 남긴 유명한 말들>

"배우는 기계가 아니다. 그러나 돈을 찍어내는 기계처럼 취급당한다."
"섹스 심볼이 된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이다. 지치고 상처받고 혼란스러울 때는 더욱 그렇다."
"할리우드는 한 번의 키스연기에 수천 달러를 준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서는 50센트를 내놓는다."
"가정주부가 되기에는 환상이 너무 많다. 나 자신이 환상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아무 것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라디오를 켜고 그 선율을 걸친다."
"오직 대중이 스타를 만든다. 영화사는 대중 속에서 스타 시스템을 만들려 한다."
"모든 게 꾸밈이다. 그렇지 않은가?"

 




1926년 노마 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할리우드의 필름편집자이던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기 전에 이미 남자로부터 버림받았고, 어린 딸은 어머니에게 드나드는 남자들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

마릴린 먼로의 외증조부는 팔순의 나이에 자살했고, 그녀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노마 진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양부모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녀를 맡았던 법적인 후견인 양부모가 동부로 떠나기 위해 합법적으로 그녀를 처분하기 위해 결혼시킬 때까지 마릴린 먼로는 10여 개의 보육원과 2년의 고아원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Mrs. Norma Jeane Dougherty,
Yank Magazine, 1945

1944년 그녀는 군수품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내세운 선전 사진에 나가게 되었고(▲ 위의 사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전문적인 사진 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델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진작가 앙드레 드 디앙과 바람을 피웠고, 그의 조수인 윌리엄 번사이드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때 그녀는 대륙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레일러 기사들을 위한 달력의 누드 사진 모델이 되었다.

한편 종전후 귀국한 남편은 평범한 아내와 아이들을 원했으므로 1946년 9월 노마 진과 이혼했다.
노마 진이 마릴린 먼로란 이름을 사용하고, 머리칼을 금발로 물들인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하지만 마릴린은 일당 5달러짜리 모델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진짜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영화 쪽은 훨씬 더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할리우드에는 자신의 몸을 무기로 여배우가 되고 싶었던 수없이 많은 소녀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드 모델 출신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사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연예 매니지먼트사의 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스타가 아니었다.




Marilyn Monroe in Scudda Hoo! Scudda Hay!. (1948)



in
The Asphalt Jungle (1950)



A young and unknown
Marilyn Monroe (Miss Caswell) in a scene from All About Eve (1950)



with
Keith Andes in Clash by Night (1952)





As Rose in
Niagara
Monroe sings from the trailer of Niagra



Performing "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in Gentlemen Prefer Blondes (1953)






Monroe as Pola, Grable as Loco and Bacall as Schatze
in How to Marry a Millionaire,(1953)



Marilyn Monroe
and Jane Russell putting signatures, hand and foot prints in cement at Grauman's Chinese Theater on June 27, 1953



First issue of
Playboy (1953)



River of No Return. 1954

The action takes place in Northwest Canada, during the period of the Gold Rush.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 -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로버트 밋첨은 마릴린 먼로의 첫 남편의 동료였다. 마릴린 먼로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Marilyn Monroe, appearing with the USO, poses for Soldiers in Korea after a performance at the 3rd U.S. Inf. Div. area during the Korean War. February 17, 1954.






The Seven Year Itch <7년만의 외출> 1954
뉴욕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마릴린 먼로의 치마가 바람에 올라가는 유명한 장면. 촬영장에서 군중은 먼로의 치맛자락이 올라갈 때마다 환호를 질렀다.

마릴린 먼로가 <7년만의 외출>에서 유명한 뉴욕 지하철역 장면을 촬영한 뒤 급기야는 디마지오가 마릴린 먼로를 심하게 두들겨 패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마릴린 먼로는 다음날 시퍼런 멍자국을 숨기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 자존심 강한 이탈리아 남자 조 디마지오는 이 일을 계기로 마릴린 먼로와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Marilyn Monroe in Bus Stop trailer. 1956

Monroe's dramatic performance as Chérie, a saloon singer with little talent, marked a departure from her earlier comedies.



In
The Prince and the Showgirl (1957), Monroe co-starred with Sir Laurence Olivier, who also directed the film.



in
The Prince and the Showgirl (1957)




in
Some Like It Hot (1959)



Monroe in her final completed film,
The Misfits (1961)


Happy Birthday, Mr. President



From President Kennedy's birthday gala where Monroe sang "Happy Birthday, Mr. President"
and "Monroe dress birthday".


On May 29, 1962, she attended the birthday celebration of President John F. Kennedy at Madison Square Garden, at the suggestion of Kennedy's brother-in-law, actor Peter Lawford. Monroe performed "Happy Birthday" along with a specially written verse based on Bob Hope's "Thanks for the Memory." Kennedy responded to her performance with the remark, "Thank you. I can now retire from politics after having had 'Happy Birthday' sung to me in such a sweet, wholesome way.



Marilyn Monroe Lipstick Kiss

It's an
autograph signed by Marilyn Monroe during her tour entertaining US troops in Korea in 1954.  "To Lou, a great soldier, Luck and Love Marilyn Monroe," is the inscription. But look, Maz also gave the page a smacker of a kiss, leaving a marvellous imprint. Maybe a great happy birthday gift for the Mr President in your life, as long as you don't mind blowing $4,000 or more on it.



The crypt of Marilyn Monroe.


나이 30살(1956년)에 극작가 아서·밀러와 결혼하지만, 다음해부터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어, 수면제를 과음하거나, 정신 병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유명한 꿈의 분석가 프로이드의 딸인 안나-프로이드는, 먼로를 경계성 인격 장해라고 진단했다.

1962년 8월 5일(36세), 먼로는 돌연 자살했다. 자살 직후, 매스컴은, 사인(死因)은 수면제의 대량 복용에 의한 급성 바르비트르(Barbiturate) 중독이라고 했다. 이 소식은 세계를 충격 속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나 1980년 이후는 먼로의 자살설은 그림자를 감추고, 누군가에 의한 모살(謀殺)설(說)이 뿌리 깊게 주장되고 있다. 현장에서는 자살에 사용해야할 물 컵이 발견되지 않았다.

또 그녀가 사체로 발견되었을 때, 손에 수화기가 들려 있었지만, 전화국에 통화기록은 없고, 방에는 그녀의 일기(붉은 수첩)가 없어졌다. 만일 모살(謀殺)이 사실이라면, 전화통화 기록을 은폐할 수 있는 권력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존·F·케네디 대통령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사후(死後) 복수의 증언으로부터 폭로되고, 두 사람을 소개한 사람은 마피아에 관계하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 이 모살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남동생이며 당시의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F·케네디도 먼로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소문이 있고, 항상 대화의 내용을 메모하고 있던 먼로의 붉은 수첩에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먼로를 사법해부 한 감찰-의(醫)는 토마스 노구치(Thomas Nokuchi), 일본계 2세라 오인하지만 그는 순수한 일본인 1세다.

그녀의 묘소는 고향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우드-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사후(死後), 전 남편 야구선수 “ 조-디마지오”의 조치로, 정기적으로 붉은 장미(품종:아메리칸·뷰티)가 놓여진다. “조-디마지오”의 사후는, 먼로의 팬-클럽 등의 자원봉사자의 손으로 계속되어, 지금도 장미가 끊어지지 않는다.










마릴린 먼로 섹스 비디오 상대는 존 F 케네디?




마릴린 먼로의 흑백 '섹스 비디오'가 최근 은밀히 거래됐다.

14일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마릴린 먼로의 오럴 섹스 테이프가 뉴욕의 한 사업가에게 150만 달러(약 15억원)에 팔렸다. 유명한 기념품수집가인 키야 모건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기밀자료로 분류돼 공개되지 않은 ‘먼로 테이프’의 원본을 이 사업가에게 팔았다고 밝혔다.

모건은 “먼로에 대한 자료를 모으던 중 ‘먼로 테이프’가 FBI 기밀로 분류되기 전에 담당 요원이 복사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며 “이미 죽은 담당 요원의 아들이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것을 찾았다”고 밝혔다. 모건은 연방수사국의 테이프가 복사본이며, 자신이 찾은 테이프가 원본이라고 말했다.

195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15분짜리 테이프에는 먼로가 한 남자에게 오럴섹스를 해주는 장면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먼로는 옷을 입은 상태이며 테이프 속 남자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케네디 대통령과 깊은 관계라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에드가 후버 연방수사국장은 동영상 속 남자가 케네디임을 증명하기 위해 영상 분석에 매달리기도 했다.

익명으로 먼로의 비디오를 산 사업가는 "먼로가 조롱거리가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인터넷 등에 공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해졌다.

2008.4.16


이처럼 사후에도 여러 가지 화제를 만들고 있는 당대 최고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 그녀의 생전의 육감적인 몸매를 맨홀러들에게 공개한다.





















































마릴린 먼로 미공개 사진 공개

2009.06.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20대 초반이었던 50년대의  미공개 흑백사진이 미국 라이프지의 온라인 사이트(www.life.com)에 공개됐다. 당시 라이프의 사진작가였던 에드 클라크는 "당시 신인배우였던 먼로가 무명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뉴욕에 있는 라이프지에 사진을 보냈지만 '먼로가 대체 누구냐'라는 반응과 함께 사진이 되돌아 왔다"고 사진에 얽힌 일화를 밝혔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Marilyn Monroe's Funeral
from "Marilyn: A Hollywood Farewell"

 



1962 Cadillac Eureka hearse carrying Marilyn Monroe’s body leads the funeral procession from Westwood Village Cemetery Chapel to the crypt.


Brief clip of Marilyn Monroe's funeral. Eulogy given by Lee Strasberg. Narrated by John Huston.









In the northeast corner of this tiny cemetery you'll find the crypt of Marilyn Monroe, perhaps the most famous blonde in history who became the ultimate symbol of Hollywood glamour, sex appeal and, ultimately, tragedy. (It's almost impossible not to find Monroe's crypt. If there aren't several people standing in front of it, as there usually are, just look for the fresh flowers, cards, letters and other mementos left by her f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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