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emil.chosun.com/brd/view.html?tb=BEMIL085&pn=1&num=108742
한국군 장성들중 유일하게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한 인물입니다. 일본군 대위 출신 입니다. 그의 부친인 유승렬 또한고위급 일본군 대좌 출신 이였고, 한국전쟁발발 당시 부자 둘다 사단장을 역임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에 관한 유명한 전적 2개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전쟁초 채병덕의 무능함에 항의하던 이형근 장군이 해임되고 이형근의 사단이 유재흥에게 넘어갔습니다. 유재흥은 2개사단 1만명 이상의 제일 많은 병력을 지휘하게 됬지만, 제일 먼저 북한군에게 괴멸 당하는 수모를 얻습니다. 거기에 더해 한강인도교까지 폭파되자 6월 29일 한강이남에 그에게 남은 병력은 10000에서 500명으로 줄어들고 중장비는 기관총 4정 밖에 안남아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한국군 최대의 패배중 하나인 현리전투의 책임자였다는 것입니다. 1951년 5월 그가 지휘하고 있던 국군 3군단은 완편 군단이였고 장비또한 신형으로 완편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공세에 단숨에 무너저버립니다. 혼란에 빠진 국군 3군단은 무질서로 후퇴를 감행하였고 중장비들까지 모두 버리고 패퇴하였씁니다 단 3일만에 70km를 밀려 동부전선에 대규모 돌파구가 생겨버립니다.
20일까지 수습된 3군단 병력은 30여%에 불과 했습니다. 이 패배에 분노한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유재흥에게 찾아가서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도대체 어떻게 됬겁니다?! 또 그 많은 장비들은..!!!"
이에 유재흥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민하다가...."저..자..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즉시 3군단 헤체와 국군 작전지휘권을 박탈합니다.
참고로 한국군 지휘권은 1950년 7월 미군에게 넘어간 상황이였지만 워커장군의 배려로 육군본부에게 제한적인 작전권을 인정해 주었섰습니다, 그러나 현리전투후 그나마 있던 그 작전권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전차마니아
2군단 붕괴 책임자도 이양반으로 기억합니다. 하여간.. 50~51년으로 타임슬립하면 가면 가장 쳐죽이고 싶은 인간중 하나에요. 현리전투의 폐인이 아무리 무조건 지휘관 책임이 아니라고해도 말입니다. 2008-07-17
드루이드
유능한 인재가 없어서 친일인사들을 중용했다는 변명이 무색한 인물이죠. 개인적으로 실무선에서는 능력이 있다면 친일여부에 상관없이 등용을 해도 괜찮다고 봅니다만, 최상층부는 도덕성을 무시할수가 없다고 봅니다. XXX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의 결과를 지금 보면서 느낀점이 서구 선진국가에서 국가 상층부의 도덕성을 철저히 따지는 이유를 새삼 알겠더군요. 2008-07-17
heinze2
좋은글 잘읽어보았습니다. 세번째 사진은 1953년 7월 금성지구 전투당시 사진같습니다. 2008-07-17
kooni
세번째사진이 제생각으로는 현리전투당시 사진인것같네요(?). 이때 조창호중위가 포로가 돼 40년동안 북에 있다가 탈북해 그리운 조국의 품으로 왔었습니다. 2008-07-17
막강심리
재미있는 것은 저분 후에 국방장관까지 역임하죠. 아무리 군부독재시절이라지만 후배 장병들이 좋아했을려나요? 2008-07-17
유용군사
August칼럼 '3군단 최후의 날' 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정말 어이없는 패전이었습니다. 정말 무능한 지휘관이 낳은 어처구니 없는 결과라고 봅니다. 그당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했어야 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 합니다. 2008-07-17
드루이드
무능했기에 역설적으로 국방장관이 되수 있었겠죠. 군부독재시절에 군은 곧 권력이었기에 군은 대통령이 직접 통솔했죠. 당연히 똑똑한 인물을 국방장관에 임명할 필요가 없었겠죠. 아무리 그대로 저런 인물을 국방장관이라니.. -_-2008-07-17
한국군 장성들중 유일하게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한 인물입니다. 일본군 대위 출신 입니다. 그의 부친인 유승렬 또한고위급 일본군 대좌 출신 이였고, 한국전쟁발발 당시 부자 둘다 사단장을 역임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에 관한 유명한 전적 2개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전쟁초 채병덕의 무능함에 항의하던 이형근 장군이 해임되고 이형근의 사단이 유재흥에게 넘어갔습니다. 유재흥은 2개사단 1만명 이상의 제일 많은 병력을 지휘하게 됬지만, 제일 먼저 북한군에게 괴멸 당하는 수모를 얻습니다. 거기에 더해 한강인도교까지 폭파되자 6월 29일 한강이남에 그에게 남은 병력은 10000에서 500명으로 줄어들고 중장비는 기관총 4정 밖에 안남아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한국군 최대의 패배중 하나인 현리전투의 책임자였다는 것입니다. 1951년 5월 그가 지휘하고 있던 국군 3군단은 완편 군단이였고 장비또한 신형으로 완편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공세에 단숨에 무너저버립니다. 혼란에 빠진 국군 3군단은 무질서로 후퇴를 감행하였고 중장비들까지 모두 버리고 패퇴하였씁니다 단 3일만에 70km를 밀려 동부전선에 대규모 돌파구가 생겨버립니다.
20일까지 수습된 3군단 병력은 30여%에 불과 했습니다. 이 패배에 분노한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유재흥에게 찾아가서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도대체 어떻게 됬겁니다?! 또 그 많은 장비들은..!!!"
이에 유재흥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민하다가...."저..자..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즉시 3군단 헤체와 국군 작전지휘권을 박탈합니다.
참고로 한국군 지휘권은 1950년 7월 미군에게 넘어간 상황이였지만 워커장군의 배려로 육군본부에게 제한적인 작전권을 인정해 주었섰습니다, 그러나 현리전투후 그나마 있던 그 작전권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전차마니아
2군단 붕괴 책임자도 이양반으로 기억합니다. 하여간.. 50~51년으로 타임슬립하면 가면 가장 쳐죽이고 싶은 인간중 하나에요. 현리전투의 폐인이 아무리 무조건 지휘관 책임이 아니라고해도 말입니다. 2008-07-17
드루이드
유능한 인재가 없어서 친일인사들을 중용했다는 변명이 무색한 인물이죠. 개인적으로 실무선에서는 능력이 있다면 친일여부에 상관없이 등용을 해도 괜찮다고 봅니다만, 최상층부는 도덕성을 무시할수가 없다고 봅니다. XXX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의 결과를 지금 보면서 느낀점이 서구 선진국가에서 국가 상층부의 도덕성을 철저히 따지는 이유를 새삼 알겠더군요. 2008-07-17
heinze2
좋은글 잘읽어보았습니다. 세번째 사진은 1953년 7월 금성지구 전투당시 사진같습니다. 2008-07-17
kooni
세번째사진이 제생각으로는 현리전투당시 사진인것같네요(?). 이때 조창호중위가 포로가 돼 40년동안 북에 있다가 탈북해 그리운 조국의 품으로 왔었습니다. 2008-07-17
막강심리
재미있는 것은 저분 후에 국방장관까지 역임하죠. 아무리 군부독재시절이라지만 후배 장병들이 좋아했을려나요? 2008-07-17
유용군사
August칼럼 '3군단 최후의 날' 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정말 어이없는 패전이었습니다. 정말 무능한 지휘관이 낳은 어처구니 없는 결과라고 봅니다. 그당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했어야 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 합니다. 2008-07-17
드루이드
무능했기에 역설적으로 국방장관이 되수 있었겠죠. 군부독재시절에 군은 곧 권력이었기에 군은 대통령이 직접 통솔했죠. 당연히 똑똑한 인물을 국방장관에 임명할 필요가 없었겠죠. 아무리 그대로 저런 인물을 국방장관이라니.. -_-200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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