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oldier of the ROK Army eating lunch in a war-destroyed house in Munsan-ni, Korea,
as a field ration made in Japan for the ROK Army is shown unpacked. July 17, 1951.
■ 한국전쟁 Colour 현장 비디오 사진 [Youtube 동영상 6편]
■ 한국전쟁 걸작사진전 [B급호러 Movie]
■ Remembering the Korean War, 60 years ago [The Big Picture]
■ LIFE紙가 공개한 한국전 당시의 서울의 생생한 모습 [고성혁의 역사추적]
■ 한국전쟁 미군 기록사진 [울프독]
■ 다시보는 6.25 한국 동란 60년전 [1] [2]
■ 한국전쟁관련 사진 600여 장 - Picasa
■ Photos of Korean War - 한 미군병사의 사진들
■ 1950년 북한지역의 모습들
■ 6.25 전쟁과 일상들 <1> <2> <3> <4> <5> 6.25 당시 희귀사진 8장
■ 6.25 동란 이후와 현재의 서울 풍경
■ 6.25 전쟁때 희귀 전단 [삐라 모음]
■ 미군을 잔인하게 묘사한 북한의 정치 선전화
■ 60년대 판문점의 모습들
● 美軍의 6.25 (동영상) - 한국전의 발발에서 부터 휴전까지의 역사적 자료를 담은 매우 귀중한 영상
● 미군정 시절의 사진들
아! 6.25 (Posted by Koreanwar60)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기념 사업단 아! 6.25 전시회 현장의 생생한 모습 웹툰 6.25 이야기 - 환쟁이의 블로그 | ||||||||||||||||||||||||||||||||||||||||||||||||||||||||||||||||||||||
1부 남침과 낙동강 방어 01. 비극을 알리는 신호 '폭풍' 02. 준비된 도발 0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04. 대한민국을 구한 춘천대첩 05. 수뇌부의 무능 그리고 한강교 06. 서울에서 지체한 북한군 07. 위기에서 빛난 해군의 용전분투 0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09. 침략자의 실책 10. 예상보다 빨랐던 미국의 참전 11. 스미스부대의 붕괴 12. 어둠속에서 빛을 발한 승전보 13. 미 제24사단의 굴욕 14. 제17연대의 복수전 (화령장전투) 15. 그냥 내어준 호남평야 16. 누가 빠른가? 17. 동해안의 지연전 18. 맥아더의 의지 19. 최후의 선택 낙동강 20. 북한군의 기도 21. 북한군의 8월공세 22. 기회로 승화시킨 위기 23. 포항에서의 일진일퇴 24. 피로 지킨 다부동 25. 그해 9월의 마지막 혈전 26. 부산을 향한 마지막 발악 |
■ 미스테리 속에 숨어있는 그시절의 자화상<상> <하> 1950년 6월 24일 0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경계령 해제의 연유는? - 군번 제1호로 유명한 이형근(李亨根) 예비역대장은 199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이른바 ‘6·25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 1950.6.25~28 가장 길고 처절했던 역사의 나흘(JP회고) - 중앙일보 [6·25 61주년 기획] <1> <2> <3> -. 6.25 전쟁 관련 이상한점들... 장병의 절반이 휴가나 외출... -.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 백두산함의 대한해협 해전 (1950.6.25) ■ 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대한해협전투 ■ (웹툰) ■ 동해안 18포병대대의 진내[陣內] 혈전 ■ 한강철교는 알고있다(August) <1> <2> <3> <4> <5> <6> <7> <8> ■ 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 [1] [2] [3] (채병덕 총참모장 2, 7사단장에 역습을 명령. 1950.6.26) 전반적인 전황을 고려하지 못한(후방에 충분한 기동 예비전력이 확보되지 않는 등) 채병덕 총참모장의 반격작전은 전선에 크나큰 파국을 불러 일으키고 결국 6월 28일,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사연은 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상> <중> <하> ■ 대한민국을 수호한 혈전, 춘천전투 <1> <2> <3> ■ 호국의 干城(August) ■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계인주대령의 비겁한 도주 ■ 최초의 반격대첩 '동락리전투' ■ 한반도 최초의 전차전 (1950.7.10 전의전투)<상> <하> ■ 화령장 전투 (울프독) ▷ 위기속의 낭보 화령장 전투(웹툰)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1950.7.17일과 7.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 ■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대표적 전투, 오산전투 (1950.7) ■ 스미스부대의 오산전투(죽미령) 20세기 이후 전투 중 아무리 강한 나라도 순간의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과 함께 철저히 준비한 군대 앞에서는 아무리 첨단무기를 갖춘 군대라도 패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전투가 바로 1950년 7월 벌어진 오산전투(Battle of Osan)입니다. ■ 전멸한 북 싸이카부대 ■ 해군의 해상 북진작전 ■ 포항의 학도병들 (웹툰) - 영화 '포화속으로'의 무대 ■ 전멸을 각오한 사투 '다부동 전투' 6·25 전쟁 중 가장 격렬한 전투는 바로 낙동강 방어 전선이 유지되던 1950년 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가 꼽힌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한국군과 북한군 양측이 사활을 건 대규모 격전을 벌이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 점령을 끝내고 통일을 경축하고자 했고, UN군과 한국군은 차후의 반격(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죠. ● 美, 1950년 9월 한국戰 핵사용 분석 착수 - 당시 美 극동 공군사령관 `전쟁 일기' 공개(2011.06.23 연합) | |||||||||||||||||||||||||||||||||||||||||||||||||||||||||||||||||||||
2부 유엔군의 반격과 북진 27. 운명의 그날 (인천상륙작전 1950.9.15) 28. 맥아더의 집념 그리고 반대 29.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이었나? 30. 다시 쓴 상륙작전의 역사 31. 낙동강아 잘있거라 32. 감격적인 합류 33. 치열했던 서울탈환 (9.28 수복) 34. 38선 돌파에 대한 논쟁 35. 감격스런 북진 36. 북진 그리고 실책 37. 적의 심장부를 향한 경쟁 38. 전쟁 종결에 대한 전망 39. 김칫국부터 마신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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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중공군의 개입과 반격 40. 낯선 군대의 등장 41. 중공군의 준비되었던 참전 42. 예상하지 못한 적의 공세 43. 만용의 대가 44. 비호산에서 빛난 칠성 45. 수렁으로 빠져 들어간 최종공세 46. 죽음의 계곡 47. 후방을 향한 공격 48. 미련없이 내어준 평양 49. 흥남 철수작전 50.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 51. 통한의 1.4후퇴 (1951.1.4) 52. 예상을 벗어난 위기 53. 알려지지 않은 적 54. 철군이냐 확전이냐 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56. 다시 한강으로 57. 간파된 적의 약점 58. 다시 앞으로 나가다 59. 결전의 장소로 떠오른 지평리 60. 용기로 얻어낸 대승 61. 도살작전과 절단작전 62. 다시 탈환한 서울 (3.15 수복) 63. 다시 38선으로 64. 어디까지 진격할 것인가 65. 거인의 퇴장 66. 다시 서울을 노린 중공군 67. 적을 좌절시킨 서부전선의 혈전 68. 굴욕 그리고 그것을 막은자 69. 두려움을 극복하다 70. 매봉 및 한석산 전투 71. 예견된 대전투 72. 국군을 노린 공세 73. 피의 공세가 개시되다 (중공군의 6차공세와 벙커힐전투) 74. 아군의 실책과 북한군의 무능 (현리전투) 75. 국군 3군단 최후의 날 (오마치) 76. 운두령에서의 역전타 77. 최대의 패배를 감수한 중공군 78. 국군 제6사단의 와신상담 79. 용문산의 승전보 (파로호전투) 80. 불승불패의 전략 81. 개시된 휴전회담 |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있다. (위키백과) -. 장진호전투 그래픽과 함께 간략한 소개 -. 장진호전투를 아십니까? -. 장지호전투 사진들 | |||||||||||||||||||||||||||||||||||||||||||||||||||||||||||||||||||||
4부 전선의 교착과 휴전 82. 시작된 줄다리기 83. 뜨거운 감자, 개성 84. 고지 쟁탈전의 시작 85. 무적해병의 신화 86. 희생을 필요로 한 고지전투 87. 피로 얼룩져간 능선 88. 너무나 혹독한 댓가 89. 또 다시 재현된 악몽 90. 피로 얻은 승리 그리고 교훈 91. 파로호를 장악하다 92.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93. 전혀 새로운 난제 94. 해방구가 되어버린 포로수용소 95. 휴전반대로 얻고자 한 것 96.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7차 대공세) 97. 멈추어진 전쟁 98. 전쟁이 남긴 것 99. 세계에 영향을 끼친 전쟁 00. 끝나지 않은 전쟁 |
■ 귀신잡는 해병신화 '도솔산 전투' ■ 도솔산 전투(웹툰) <1> <2> <3> <4> <5> <6> 1951년 6월 북한군 2개 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이곳을 미군의 정예 5연대가 공격했지만 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자, 이어 투입된 부대가 한국군의 해병대 1연대. 해병대는 허를 찌르는 대규모 야간 공격과 1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도솔산 일대 24개 목표 진지를 모두 탈환해 내고야 말았다. 도솔산전투의 24개 목표와 펀치볼 ■ 남한 포로가 지켜 본 승호리 철교 폭격(1952.1.15) ■ 불굴의 감투정신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白馬高地)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철원 북방 395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한국구 제9 보병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약 10일 동안의 혈전 끝에 고지를 굳건히 지켜낸 승전(勝戰)입니다. 제9 보병사단이 이 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중공군 참전 이후 걸핏하면 야습과 인해전술에 말려들어 연전연패를 면치 못했던 한국군이 마침내 적의 전술을 간파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해내고 반격에 성공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 피로 쓴 신화, 백마고지전투 <1> <2> <3> | |||||||||||||||||||||||||||||||||||||||||||||||||||||||||||||||||||||
※ 6.25전쟁 연표 I (1950.6.25~9.15) ※ 6.25전쟁 연표 II (1950.9.16~12.31) ※ 6.25전쟁 연표 III (1951.1.1~6.30) ※ 6.25전쟁 연표 IV (1951.7.1~12.31) ※ 6.25전쟁 연표 V (1952.1.1~12.31) ※ 전쟁직전 남.북 전쟁 지휘부 ※ 전쟁직전 육군의 편성 및 배치 ※ 전쟁 발발시 남.북 전력비교 <I> <II> ※ 6.25전쟁 포로사건 일지 1편 (1950~51년) ※ 6.25전쟁 포로사건 일지 2편 (1952년) |
-. 메뚜기로 시작한 도전의 역사 (한국 공군의 창설 과정) ▷ 한국전쟁 때 우리는 이 전투기로 북괴군과 싸웠다.... (무스탕...) -. 국군 유일의 기갑연대 예하 장갑대대의 M-8 정찰장갑차의 활약 (국군 기계화부대의 시초) -. 전차 육탄 공격은 어떻게 했을까? - 울프독의 War History -. 길목에 남겨진 역사 (미군과 인천항) -. 음지에서 승리를 이끈 사람들 (전쟁 노무자들) -. 미군의 전사자유해 발굴 (전장정리조) -. 그녀의 이름으로 불려진 고지 (Jane Russel 고지) -. 한국 전선의 마리린 몬로 [울프 독] Marilyn Monroe's Visit to Korea -. 돌출부에 대한 단상 (강원도 고성지역의 점령과 백선엽장군 & 알레이 버크제독) -. 6.25때 강화도를 사수한 특공대원들의 분노 -. 항명으로 팔만대장경 지켜낸 두 군인 - 동영상 및 인터뷰 아름다운 항명(웹툰)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1> <2> <3> <4> <5> <6> <7> <8> <9> <끝> ● 6.25전쟁 참전으로 중국은 무엇을 얻었나 ... 또한 중국이 6.25 한국동란으로 이익 본 것 중에는 오늘날 시짱 자치구라고 불리는 티벳 지역을 중국 영토로 완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것도 있다. 중국은 당시 한반도 전란에만 신경쓴 게 아니라 국토의 동서 양 끝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렀다. ●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참전의 진짜 이유 - 중국군 기밀 인용 ‘한국전 논문’ … 11년 옥살이 추이 박사 마오쩌둥은 언제든 자신의 정권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스탈린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10여차례에 걸친 스탈린의 파병압박과 당시 만주지역에 득세하고 있던 친소파들을 소진시킬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신중국 재건의 지원을 소련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중국으로선 참전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 |||||||||||||||||||||||||||||||||||||||||||||||||||||||||||||||||||||
6.25전쟁시 참전국들의 활약상 국별 유엔군 파병 및 전사자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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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오피아 -. 그때 그가 다시 왔었다. (마라톤의 영웅 아베베의 참전과 1966년 한국육상대회에 참전) ■ | |||||||||||||||||||||||||||||||||||||||||||||||||||||||||||||||||||||
6.25전쟁 중 일어난 에피소드들 YTN의 한국전쟁 60주년관련 기사 ① 전쟁터로 간 소녀 해병 "우리 친구가 야 우리 지원하자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진짜 그럼 나도 지원할까 해서 지원했지 그래서 그냥 어머니는 기절하시고..." ② 중국-타이완 한국전에서 격돌 육군정보부대 인천18지구대 서울-차이니즈 지대 ③ 타이완으로 간 중국포로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포로가 된 2만 여 명 가운데 만4,000여 명이 타이완행을 선택했다. ④ 미군 실종자 가족 '생사만이라도' 6.25 전쟁에 참가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은 미국 전역에 8,000명이 넘는다. 60년이 흐른 지금, 실종자의 부모는 대부분 숨졌고 형제 자매들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⑤ 미국, '잊혀진 전쟁'을 알리다 미국에서 6.25 전쟁은 흔히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전쟁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있다. ⑥ 호주군, 가평을 기억한다 가평 504 고지는 1951년 1차 춘계공세 당시 중공군이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호주군 700여 명은 10배에 달하는 중공군을 맞아 사흘에 걸쳐 백병전을 벌였고, 이에 미군은 강력한 수비벽을 만들어 서울이 적에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호주에는 '가평'이란 이름의 길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중국, 호주 총리의 6·25 기념식 참가도 문제 삼나 |
-.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 3.8선 돌파후 무제한 쾌속 전진과 개고기의 추억 -. 개전당일 문산 32연대 1대대의 탄약불출 에피소드 -. 박격포와 57mm무반동총 (이봉조선생의 '분대장' 중에서...) -.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슈레이만과 아일라_김은자씨의 이야기) -. 지리산계곡의 까마귀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김지회와 비운의 여인 조경순 이야기) -. 여순사건의 어느 교장 '송욱' -. 보도연맹의 정체를 증언한다. 보도연맹이란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거나 전향한 사람들을 모아 정부가 조직한 단체이다. -. 두 간호 여고생의 적진 탈출 1 천리 [울프 독] <1> <2> <3> -. 구국의 영웅, 소년 전차병 -. 워커 중장의 비극과 불운 -. 남북 포로 조우(遭遇)때 생긴 돌발 상황 ■ 백인엽대령의 희생정신 - 사단장을 역임한 후 다시 연대장으로 임명된 백선엽장군의 동생 백인엽 대령 개전 직전에 발발한 여수·순천 제14 보병연대 반란사건 당시 제12 보병연대를 지휘해 진압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후에 수도사단장에 임명된 백인엽대령은 8월 한달 동안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인 안강~기계 방면에서 포항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온 북한군 제 12사단과 766유격대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해당 지역을 사수한다. 이 북한군 부대가 바로 영화 '포화 속으로' 에서 학도병들이 포항여중에서 결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던 부대이다. 그리고 크로마이트 작전, 즉 인천상륙작전에 스스로 사단장에서 강등하여 한국군 보병 제17연대의 연대장으로 참가하게 된다. ■ 김일성이 펼친 논리적 오류 1950년 12월 만포 북방 3km에 위치한 별오리에서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를 소집합니다. 남침 이후 6개월간의 작전 실패 요인을 결산하고 앞으로의 당면과제를 제시하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의 목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일성이 6·25 전쟁의 남침 작전 실패 책임을 김책·전우·김무정·김일·김열 등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 떠넘겨질 수 있는 책임을 회피함과 동시에 당 내부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군사·정치적 혼란을 타개하고자 ... ■ 한국전쟁을 미국이 'Korean Conflict(한국분쟁?) or Police Action(경찰행동?)'으로 표현한 의미는? 1980년 이전까지 미국에서 보는 전통적인 시각을 보면 김일성은 스탈린의 꼭두각시로서 공산주의를 대표하여 대리전을 수행했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국가가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장소에 일어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충돌..즉 'Conflict'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로 쓰던 '동란'이나 '사변'도 비슷한 시각에서 쓰이던 단어 입니다. 김일성 집단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고 소련의 사주를 받아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난리'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Korean Conflict은 '한국분쟁'이 아닌 '6.25동란', 혹은 '사변'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왜 'Police Action'이라고 표현했느냐? 이것은 미군이 참전할 시 소련도 같이 참전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국제사회로 부터 참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트루만 행정부의 고민이 담긴 단어 입니다. 만일 미군이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을 대 놓고 떠벌여 대면 미국내부의 반대여론도 두려워 지고 무엇보다 소련이 참전할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북한을 국가가 아닌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려는 세력'으로 규정한 흔적이 보입니다. 지금도 외신에서는 유엔군의 평화유지활동을 'Police Action'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유엔군이 '경찰'이 되지는 않지요. 이것은 '평화유지활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정부에 국가가 아닌 괴뢰도당이 침공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미군이 참여한다는 명분을 뜻 합니다. *,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법적으로 `전쟁'이라는 지위를 획득한 것은 한국전이 48년이나 지난 1998년이었다. | |||||||||||||||||||||||||||||||||||||||||||||||||||||||||||||||||||||
6.25전쟁 중 사용되었던 무기들 1951년 진해 전시육사와 그레이하운드 차륜장갑차 |
-. 6.25 한국전에 등장했던 전차들 [슈트름게슈쯔의 밀리터리와 병기] -. 6.25 전쟁의 수호신 M26 '퍼싱' 중전차 -. 6.25의 또 다른 영웅, M46 "패튼" -. 6.25 전쟁의 영웅, M1 개런드 -. 한국군 최초의 전차, M36 "잭슨" -. 한국군과 미군의 주력 기관총, M1919A4 -. 공포의 폭격기, 하늘의 제왕 B-29 -. 하늘의 구급차, 벨 H-13 "수" 헬리콥터 [上] [下] -. 서울수복의 상륙 돌격 장갑차(LVT-3C) -. 한국전의 미스테리 크롬웰 전차. -. 6.25 한국전에 개입했던 중국 공산군의 전차 -. 북한군의 주력 분대기관총-DP -. UN군의 제공권을 뒤흔들어 놓은 미그 15 -. 자유를 향한 북한 조종사의 비행 - 노금석 상위 미그15 몰고 귀순 (1953.9.21) -. 아군을 위협한 'KS-12 대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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