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이쁜 연예인 대다수는 북한에 있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문예봉 같은 미인계를 동원해 선전용 용도로 많이 써먹었다고 합니다.
그나저나 문예봉씨 어떻게 됬을지 궁금하내요...
문예봉은 공산당원 이었던 남편을 따라 월북 했고.. 전후 선전 선동에 동원 되다가, 남편이 김성주 일파에 의해 숙청되면서 본인도 숙청되어 지방을 전전하다가 비참(?)한 말년을 보낸것으로 압니다... 2008-07-16
안덕래
문예봉 뿐만 아니라 월북한 많은 연예인 (배우 가수 작곡가 커미디언 작가 등)이 주로 남로당 계열 일 수 밖에 없었고 박헌영 일파의 숙청때 거의 숙청 되었고, 남은 사람들도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없어서 남쪽에서 했던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극적 활동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07-16
신목정
1917 서울~1999. 3. 26. 북한의 배우. 1931년에 조직된 극단 '연극시장'에 참여하는 등 처음에는 연극배우로서 활동 했으나, 1932년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뱃사공의 딸 배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최초의 발성영화인 이규환의 〈춘향전〉(1935)과 홍개명의 〈아리랑고개〉(1936)·〈장화홍련전〉(1937), 나운규의 〈나그네〉(1937), 안종화의 〈인생항로〉(1937), 김유영의 〈애련송 愛戀頌〉(1939)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해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영화배우로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해방 후 1946년 남조선영화동맹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남편 임선규와 함께 월북했다. 1949년 북한 최초의 극영화인 〈내 고향〉에서 주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수십 편의 주요 영화에 출연했다. 1952년 영화 〈빨치산 처녀〉로 공훈배우 칭호와 함께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1961년 5월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에 취임했다. 그러나 1967년경 대두되기 시작한 주체사상·주체문예운동의 와중에서 종파주의자로 몰려 1970년대말까지 사실상의 숙청생활을 했다. 1980년대초 복권처분과 함께 〈춘향전〉(1980)의 월매역으로 재출발해 〈생명수〉·〈은비녀〉 등에 출연했다. 1982년 4월 북한배우의 최고 영예인 인민배우가 되었고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저서로 〈라운규와 그의 예술〉(1962)이 있다. 2008-07-16
찡찡
원래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예술공연쪽으로 무척 발달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선동하기에 가장 뛰어난 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영화나 연극, 공연등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는 것이구요. 또 문화계사람들이 좌파가 많은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들의 입지가 가장 돋보일 수 있는쪽이 그쪽이라 그런겁니다.2008-07-16
곤양이
같이 월북한 배우로 남한여우 문정숙의 언니 문정복이 있지요. 그의 아들이 배우 양택조씨지요. 그들 문씨들은 왜정때 동양극장에서 활동한 동시대 여배우들입니다.2008-07-16
dkndr
사회주의에서 문화예술 분야를 선전선동에 잘 이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계 사람들이 좌파가 많은 이유는 참 생뚱맞군요. 그러려면 서방 진영 문화계 인사들이 사회주의 진영에 망명을 많이 했어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2008-07-16
출처 :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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