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0
제 1 편 . 명적(鳴鏑)의 수수께기를 밝힌다.
_______무용총 수렵도________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고구려 무용총(舞踊塚)에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는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무용총은 서기 400년경에 축조 된 것으로 짐작 되어 지고 있다. 위에서 보는 서쪽 벽면의 수렵도는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비록 많이 훼손되었지만 1600년을 훌쩍 넘는 긴 시공을 뚫고서 고구려 기마 무사의 웅혼한 기상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있다. 힘차게 말을 달리며 활을 겨누는 기마 무사 화살의 끝에 날카로운 화살촉이 아니라 끝이 뭉툭한 무슨 뭉치 같은 것이 달려있는 것이다
몽골의 명적- 동물의 뼈를 깎아서 만든 것
이런 것으로 도주하는 동물을 쏴 본들 맞아도 죽을 것 같지가 않다. 더구나 기마 무사가 맞아도 죽지 않을 이런 이상한 화살을 겨누고 그 무서운 호랑이도 쫓고 있는 것이니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고구려 벽화가 고고학계의 한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를 제공한 사례는 있었다.
고고학계는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이상한 금동 신발을 두고 이것이 무엇에 썼던 물건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신발 바닥과 신발 코 부분 전체에 바늘같이 날카로운 못들이 촘촘히 붙어 있는 이 청동 신발은 마치 고슴도치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 실상 어느 누가 신기에도 크기가 너무 크고 설사 신었다 해도 바닥에 못들이 잔뜩 붙은 이 신발을 신고 단 한 걸음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학계는 이 기괴한 신발을 그저 무슨 제례 의식에 쓰던 물건이라고 막연한 추측만을 하고 그저 전시만 해두었다. 그러다가 어떤 고구려 벽화의 한 조각이 이 고슴도치 미스터리를 단숨에 풀어 버리는 단서를 제공했었다.
그 고구려 벽화는 말을 탄 당당한 기마의 대장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대장의 발에 바로 위에서 말한 바늘이 삐죽삐죽하게 솟은 수수께끼의 고슴도치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이 괴상한 신발은 지상에서는 신을 수가 없어도 마상에서는 신을 수가 있었다. 그것을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놓쳤던 것이다.
그림은 신발의 용도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하는 모습이었다.
칼과 창으로 싸우던 고대의 기병들은 적 보병과 적중에 뛰어드는 육박 돌격도 해야 되고 때로는 정 반대로 기마의 적장을 먼저 죽이겠다고 쇄도하는 적병들에게 에워싸일 때도 있는 만큼 난전의 가능성은 무척 크다. 마상의 장수들 사방에 아우성치며 덤벼드는 적병들일 때가 많다는 말이다.
이때 기마 무사의 고슴도치 신발은 진가를 발휘 할 것이다.
앞차기 옆차기 발굽 차기든, 마상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을 마구 구사하면서 적들을 고슴도치 신발로 가격하면 마치 바늘 세운 고슴도치에게 이리들이 감히 덤벼들지 못하듯이 적병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기괴한 모양의 청동 신발은 그간 추측 해왔던 대로 제례 의식에 쓰이는 경건한 목적의 제기가 아니라 창이나 칼 못지않은 전쟁 무기였던 것이다.
고고학계의 오래 된 미스터리를 고구려 벽화가 풀어 버렸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벽화는 미궁의 숙제를 내놓은 반대의 상황을 제공한 것이었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널리 알려져서 각종 출판물은 물론 학교의 벽화나 인테리어의 테마로까지 사용되었지만 누구나 잘 드려다 보면 궁금증을 느낄 이 요상한 화살에 대해 의문을 공식적으로 제기하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었다.
국내 복제 생산한 명적
그러다가 몇 년 전 고구려 특집을 다룬 방송 ‘역사 스페셜’에서 이 화살이 명적(鳴鏑)이라고도 하고 효시(嚆矢)라고도 하는 신호용 화살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 방송 프로에서 다시 만든 명적을 직접 쏘아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모습까지를 보여주었다. 명적의 복제까지도 가능하니 이미 고구려 벽화의 화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문가님이 현대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 프로에서 위에서 제기했던 문제, 즉 살상력 없는 명적을 사슴은 물론 위험한 호랑이에게 까지 날리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고고학계의 오래 된 미스테리를 고구려 벽화가 풀어 버렸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벽화가 미궁의 숙제를 내놓은 반대의 상황을 제공한 것이었다.
사실 앞에서 소개한바있는 고슴도치 신발과 같이 많은 의문점을 남겨주는 이 명적이 사냥에서 사용된 이유에 대해서 학계에서도 정식으로 연구 주제로서 다루어진 일은 없었다고 했다,
어느 웹을 보니까 이 명적이 요란한 소리를 내어 짐승을 기절시켜 잡는 기능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이것은 요절 복통하게 황당한 소리다. 현대의 어떤 첨단 기술로도 소리로서 사람이나 짐승을 기절시키거나 죽이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다른 웹의 경우에는 수렵도의 둥근 화살 끝을 아예 없애 버리고 뾰족한 화살촉을 그려서 수렵도를 변형시킨 것도 있었다. 화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살상력 없어 보이는 둥근 명적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듯했다.
그러나 이 수렵도를 고고학이나 미술의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 벽화의 제목이 말했듯 수렵인의 눈, 다시 말하면 사냥꾼의 눈으로 보면 그간 학계나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숨은 사실들이 수렵도에서 발견 된다.
이 벽화는 비록 1600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오늘 현대 미술의 사생의 정확성이라는 수준에서 보면 너무 치졸하게 보일지 모른다.
원근법이고 뭐고 없을뿐더러 배경의 산을 아무렇게나 단순화 시켜 버린 것은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준다.
한마디로 요즘 미술학원에 다니는 유치원 나이의 어린이가 스케치 북에 낙서하듯 그린 그런 수준의 그림 같다고 이야기해도 뭐 별로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벽화를 그린 화가는 비록 고대의 그림 수준이기는 하나 그림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실성은 그린 화가가 사슴 사냥을 놀랠 만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설명해준다.
몇 가지 그 사실을 밝혀본다.
A.호랑이를 쫓고 있는 무사의 조우관(鳥羽冠) 에 꽂힌 깃털 모습을 보자
깃털은 비스듬히 휘어져 있다. 원래 깃털도 비스듬히 휘어져 있지만 이 경우는 그 만곡의 도가 더욱 심하다.
1965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에서 고구려에서 간 사신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의 그림이 발견된 일이 보도 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의 깃털도 이처럼 많이 휘어 있지는 않았었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유적지 고구려 사신도-오른쪽 두명
이것은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니까 깃털이 바람에 날려 휘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벽화 중앙에서 몸을 돌려서 사슴을 겨냥하는 무사의 깃털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니다. 바람을 깃털이 붙은 조우관의 후방으로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무사의 조우관은 깃털이 뒤로 약간 날려 있다. 앞으로부터 바람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가가 사냥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직접 보았다는 증명한다.
B.무사가 몸을 돌려 명적을 겨누고 있는 사슴들을 보자.
이 사슴들은 말 사슴이라는 대형 사슴이다.
고구려 수도가 있던 집안현 일대에는 두 종류의 사슴이 산다.
하나는 매화록(梅花鹿)이라는 작은 사슴이고 하나는 말사슴[馬鹿]이라는 큰사슴이다.
중국 동북지방의 매화록- 숫자가 적어 말사슴이 사냥표적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녹용의 가치는 더 쳐주었다.
말 사슴은 한국에서도 수입되어 키우고 있는 미국산 엘크 사슴의 사촌쯤 된다. 북한에서는 누렁이라고 부른다.
이 사슴은 몸체는 갈색이지만 엉덩이는 희다. 이것이 정확이 사생되어있다.
말사슴의 꼬리를 살펴보자 말사슴의 짧은 꼬리는 달리지 않을 때는 밑으로 내려 와 있지만 달릴 때는 바짝 들려있다. 벽화에 이것도 잘 표현 되어 있다.
미국에서 사슴 사냥을 오래 했던 미국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슴이 공포에 질리면 올린 꼬리를 둥그럽게 아래로 말고 달리기 때문에 그림과 같은 모양이 된다고 한다.
중국 동북지방에 사는 말사슴
마치 겁에 질린 개가 꼬리를 사리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니 이 사슴들이 얼마나 혼절해서 질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런 것까지 아는 것을 보면 벽화는 사냥에 직접 참가했던 화가가 그린 것을 짐작할 수 있다.
C.다음 사슴을 겨누고 있는 화살 끝, 다시 말해서 명적의 끝을 보자.
앞에 나팔처럼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있다 .
나는 여러 추리끝에 이것은 명적에 유입되는 공기의 양을 최대화해서 소리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나팔관 장치라고 추리했었다.
그러나 이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hypnodisc라는 id 분이 그것은 명적의 끝에 살상력있는 양갈래 화살촉이 붙은 화살이라고 지적을 해주셨다.
화살이 붙어있는 명적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았지만 설마 많은 명적중에 그런 명적을 썼겠는가 해서 그쪽으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밤새 자료를 찾아 보고 조사를 해보자 그것이 아니었다.
발굴된 여러 형태의 명적들
왼쪽 양갈래진 화살이 바로 수렵도에서 고구려 무사들이 쓰는 화살인 것으로 보여졌다. HYPNODISC님은 이런 화살이 신라 고분에서도 발굴되었다고 했다.
나는 먼저 명적이면 명적이고 화살이면 화살이지 왜 화살이 달린 명적이 있을 이유가 하는 의문부터 풀어봤다. 자료를 찾아보니 일본 전국시대에 그 의문을 풀어줄 답이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에 일단 접전이 시작되면 수 백명의 궁수부대가 화살촉 달린 명적을 적진에 일제히 요란하게 날려 보내며 기선제압으로 전투을 시작했다. 적에게 심리적인 공포감도 주고 살상 효과도 줄 수있다는 효능이이 화살 달린 명적들의 용도였다..
궁시를 주력 전투력으로 쓰는 대륙 기마 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궁 이성계도 이 화설촉 달린 명적을 즐겨 사용했다는 사실이 HYPNODISC님이 보내 주신 정보에도 있었다.
그러나 양갈래진 그 이상한 명적의 화살촉의 용도는 무엇일까?
양갈래진 화살촉은 관통력이 없어보여 인마 살상용으로 부적합해보였다. 나는 밤새 궁리했다.
그러나 그 용도가 있어 보였다. 이 양갈래진 화살촉의 명적은 아래의 다목적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 요란한 소리를 내서 적에게 공포심을 주어야 했다.
- 동시에 적에게 치명상이 아니라 넓은 상처를 주어야 했다.
넓고 큰 상처는 더 큰 고통과 출혈을 가져 올 수있다.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 , 공포심 동시에 고통과 출혈을 최대로 주는 다목적이 이 양갈래 명적에 있었다.
다시 추리해보니 화살이 노리는 것은 적병이 아니라 적의 말이었다. 적의 기마 부대나 적장이 탄 말을 노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정통 화살을 맞아도 말은 잘 죽지도 않을 것이니 요란한 명적효과와 함께 고통을 최대로 주어서 적의 말이 공포심과 고통으로 미쳐 날뛰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추리가 되었다.
고대 전훈에 이런 말이 있다.
" 기마의 적장을 만나면 먼저 그 말부터 쏘아라"
그런 전술이 있던 이상 그에 필요한 화살도 있었다는 것을 짐작 할 수가 있다.
물론 이런 양갈래 화살도 관통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살상력이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적병을 만나면 사격을 주저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사냥에서 관통력 약한 양갈래 화살로 살상효과를 노리고 동물을 사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의 사슴사냥에서도 화살은 최대의 대형 화살촉을 쓴다. 엘크는 무스와 달리 총탄이나 화살에 강하다.
더구나 호랑이를 이런 관통력 취약한 활로 어설프게 쏘는 것은 부상당한 호랑이의 분기충천한 반격을 자청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수렵도의 화살은 양갈래 화살촉이 붙어 있어도 오로지 명적의 효과만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결론이다. 몰이에 살상이 목적이었다면 명적이 아니라 유엽전 같은 더 치명적인 화살을 썼을 것이다.
말이 길어졌다. 요지는 명적 끝의 양갈래 화살촉 묘사는 화가는 정밀 사생을 하기 힘든 그 무렵의 붓으로써 최선을 다해 사실성을 살렸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실들을 놓고 판단해 본다면 벽화를 그린 화가는 사냥을 직접 경험했었고 모든 것을 보고 파악한 사람이다.
1,600년 전이니까 직업의 분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시절이라서 벽화는 전문 화가가 아니라 말을 타고 사냥에 직접 참가했었던 무사들 중에서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사람이 그렸다고 추측해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듯하다.
앞에서 벽화의 구성과 사생이 정확하고 신뢰 할 수 있다는 몇 가지의 이유를 들어봤다.
벽화가 가진 정확성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몰랐던 숨겨진 사실들을 이 벽화에서 추출해본다.
1.왜 살상력 없는 명적을 쐈을까?
벽화의 고구려 무사들은 지금 몰이사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살상하기 위해서 활을 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명적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서 사슴들을 목적지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사슴을 겨누는 무사의 말머리가 도주하는 사슴 쪽이 아니라 계속 앞을 향하고 있슴을 유의하자. 사슴 두 마리보다 더 큰 무리를 쫓고 있다는 말이다. 이 무사는 사슴 두 마리가 방금 이탈해 나온 사슴들의 무리를 몰고 있는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슴이나 호랑이를 쏘아 잡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포획 할 수 있는 지점까지 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몰이사냥에서 몰이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적의 휘파람 소리 같은 파열음은 동물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소리다. 한 개도 아니고 여러 무사가 연발로 쏘는 명적이 계속 머리 위를 스쳐가며 사슴이나 동물들의 귓전을 울려 댔을 테니 겁을 엄청 먹은 동물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에서 명적이 내는 유사한 소리에 공포에 질려서 대피에 급급한 에피소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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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은 전격전이라는 최신전략을 구사해서 유럽을 단시간에 휩쓸었다. 진격하는 독일군의 공중에는 스투카라고 불리는 단발 급강하 폭격기가 엄호비행을 하면서 맹위를 떨쳤다.
이 폭격기는 그 때의 독일 항공 총감 에른스트 우데트가 미국 해군의 급강하 폭격기를 보고 개발을 제안해서 만든 것인데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폭격기에 요란한 소리를 내는 사이렌을 달고 투하하는 폭탄의 꼬리 날개에는 명적과 같이 낙하하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크게 나는 피리를 달았다.
스투카는 적의 지상 목표를 발견하면 먼저 거의 수직으로 급강하 하면서 사이렌을 울린다.
이 소름 끼치는 사이렌 소리는 ‘마이티 마우스’라는 디즈니 만화에서 슈퍼맨 복장을 한 믹키 마우스가 목표로 다이빙할 때 효과음으로 사용되어 큰 호응을 받았었다.
스투카의 사이렌 소리
상공의 적기가 사이렌을 울리며 기수를 내리 꽂고 접근해와 날카로운 피리 소리를 내는 폭탄을 투하하면 지상의 적군들은 조직적으로 대공 사격으로 대처할 엄두도 못 내고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도주하며 지리멸렬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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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나는 피리소리에 이렇게 놀라 자빠졌는데 하물며 사슴이나 호랑이야 경기가 나게 놀라서 달렸을 것이다.. 고구려 무사들은 계속 명적으로 몰아대며 얼이 빠져서 달리는 짐승들을 미리 작정했던 목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2. 앞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면 사슴을 어디로 몰고 가느냐가 중요한 의문이 떠오른다. 달려가는 사슴의 앞에 무엇이 있을까?
먼저 몰이사냥을 하고 있다면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것은 사냥꾼일 가능성이 100 % 확실하다. 그러나 그림을 더 잘 들여다보자.
무사들이 맹 스피드로 달리고 있다. 사슴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전속으로 도주하고 있다.
목 사냥이라면 몰이는 이렇게 급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말(馬)까지 동원해서 사슴을 몰이 한다면 이것은 장목(대기한 포수로부터 멀리 목을 잡는 것)을 잡은 것인데, 장목일수록 몰이는 천천히 해야 한다.
급히 몰면 쫓기는 동물은 엉뚱한 곳으로 빠져서 도주해버리고 예상했던 포수 앞으로는 가지 않는다.
장목 잡을 때 더욱 급한 몰이는 금물이다. 몰이 거리가 길어서 중간에 옆으로 빠질 기회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냥 지식을 밑에 깔고 보면 말도 사슴도 정신없이 뛰는 이 몰이가 사냥꾼이 대기하고 있는 목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3.사냥꾼이 아닌 다른 것은?
수렵도의 짐승이나 말들이 오로지 오른쪽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자.
화가가 경험한 이 몰이사냥에서 무사들이 항상 사슴, 또는 다른 동물들을 몰아가고 있는 종착지, 더 자세히 이야기해서 확실하게 고정 된 함정이나 틀 같이 형체가 있는 그 무엇이 화가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 되어 있었던 탓에 이런 구도가 나왔다고 본다.
그렇다면 보자.
사람과 짐승이 달려가는 앞에는 기다란 목책(木柵)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사슴들이 뛰어 넘을 수가 없는 긴 나무 울타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무 울타리로 동물의 진로를 막아놓고 함정으로 몰아넣는 사냥방법을 목책 사냥이라고 한다. 목책 사냥은 20세기까지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널리 행해져 왔던 사냥 방법이다.
그 사냥의 모습은 이렇다.
사슴들이 잘 다니는 길목을 가로 막고 긴 나무 울타리를 설치한다. 울타리 길이는 짧게는 수 십 미터에서 길게는 수 백 미터까지 된다.
사슴은 뛰어 넘을 수 없는 울타리는 밑으로 기어서 통과해 나가는 재주가 없으므로 울타리를 따라서 걷게 된다. 울타리를 돌아서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촘촘하게 만들 필요가 없는 울타리 구조는 간단하다. 띄엄띄엄 세운 기둥에 긴 나무 두 서너 개만 가로 질러서 길게 연결해가면 된다.
그리고 그 울타리 양쪽 끝에는 함정이나 덫, 그리고 줄총이라는 장치를 한다. 줄총은 장전한 총의 방아쇠에 긴 줄을 걸어서 건드리면 발사하게 만든 일종의 부비트랩이다.
사슴은 울타리를 만나면 울타리를 따라 걸어서 돌아가는 습성이 있어서 대개는 울타리 끝에서 이들 함정에 걸려든다.
나는 만주인들이 이 목책으로 사슴 사냥을 한다는 말을 이상오씨가 쓴 ‘한국 야생 동물기’라는 책에서 처음 접했었고 중국 동포이며 백두산 포수인 최 석도 씨에게서 이 사냥에 줄총이 동원 된다는 말을 직접 들었었다.
말했듯 사슴은 그 끝을 돌아 나가 원래 가려고 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바로 이곳에 함정이나 덫이 설치되어 있어 사슴을 잡아 버린다.
19세기말에 후창 군수가 압록강 북방에 밀파한 정보원 최종범, 김태흥, 임석근들이 쓴 압록강 이북의 ‘강북일기’라는 책에 잠입해 들어간 지역에서 이 울타리 함정을 본 사실을 생생히 기록해 놓았다.
이 강북일기는 걸핏하면 국경을 넘어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는 강북의 호인(胡人)지역을 은밀히 조사하고 쓴 보고서라고 할 만한 진귀한 자료이다.
수렵도에서 설치한 고구려의 목책은 수 백 병의 병사를 동원하여 엄청나게 길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수 백 미터에서 일 키로까지 되지 않았을까 한다.
만주는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끝없는 수풀이 펼쳐져 있던 곳이다. 1600년 전에는 더욱 더 숲이 깊었을 것이고 사슴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밀림지대에서 사슴들은 밤이나 새벽에 먹이를 먹고 낮에는 깊숙한 숲속에서 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숲속의 사슴들을 먼저 도보의 병사들이 숲에서 개활지로 몰아 낸 다음 대기 했던 무사들이 목책으로 사슴들을 몰아쳤을 것이다.
과거의 인도에서 이런 대형 목책을 설치해서 야생 코끼리를 잡았었다. 목책은 완만한 팔자(八字)형으로 설치해서 코끼리들이 점점 몰려가다 보면 팔자 꼭대기 부분인 깔때기 입구같이 좁은 곳으로 쫓기게 되고 그 곳을 통과하면 바로-뒷문이 닫히면서 코끼리 떼는 더 이상 도주할 곳도 없는 테니스 코트 장 같은 우리에 갇히게 된다.
고구려 무사들이 설치한 목책이 인도의 목책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본다.
여기서 추리를 더 해본다면 그만한 대형 목책을 설치해놓을 만한 병력을 동원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목책을
한 곳에만 설치하지 않고 자기 영역내 서너 곳에 더 추가로 설치했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사냥철이 아닌 때는 목책의 중간 중간을 터서 사슴이나 나무꾼들이 어려움 없이 드나들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 놓아야 사슴들이 목책에 경계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다시 그림을 보자.
명적을 날리는 무사들과 사슴들은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쫓고 쫓기는 자의 전속 질주는 몰이가 막바지에 이르러 깔대기 주둥이로 사슴을 몰아넣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슴들이 깔대기 입구로 뛰어들면 사방이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우리가 나올 것이고 뒷문이 소리 없이 닫혀서 오갈 데 없는 사슴들은 몽땅 다 포획되는 것이다.
영리한 사슴들은 자기들이 달리는 전방에 이상한 구조를 보고 당연히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심의 틈을 주면 안 된다. 이때의 전력질주는 사슴들을 정신없이 몰아대서 앞 뒤 생각 없이 좁은 깔대기 입구로 몰려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있다.
이 몰이 단계에서 명적(鳴鏑)도 연발로 다량 사용되었을 것이다.
정확한 사실을 데이터로 해서 그린 수렵도에서 고구려 무사들이 목책사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슴을 쫓는 맨 위의 가장 큰 그림이 잘 묘사하고 있다.
갑자기 뒤로 튀어서 도주하는 사슴들과 등을 돌려서 이들의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서 명적을 날리는 무사가 그림의 순간이 목책 바로 앞의 몰이 단계라는 것을 말해준다.
영리한 미국 엘크의 사촌 되는 고구려의 말 사슴도 영리하다. 한두 번 몰이를 당해본 놈은 목책의 깔대기 입구로 들어간 식구들이 그 뒤에 돌아오지를 않은 것을 봤고 그 것이 저승문이라는 이라는 것을 본능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명적이 빗발치는 중에도 뒤로 돌아서 죽을 힘을 다하여 탈출하고 있는 것이다.
사슴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두어 번 몰이를 당하고 사냥꾼의 불질을 당해본 노련한 멧돼지도 몰이를 당하면 납작 엎드려서 몰이꾼이 지나간 뒤에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교활한 재주를 부린다.
돼지가 부리는 노련한 재주만큼은 되지 않아도 사슴도 생사가 걸린 순간에 생명을 걸고 탈출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명적이 살상이 아니라 몰이를 위해 발사되는 것이며 이들 고구려 무사들이 목책사냥을 하고 있고 그림은 몰이사냥이 마지막 단계임을 그린 것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몇 달 전 정치인 강재섭 씨가 복잡한 국내 정치 현상을 비유하는데 한자의 고사 성어를 사용했었다.
축록자 불견산(逐鹿者 不見山) 이라는 말이다. 사슴을 쫓는 자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슴은 사슴을 사냥한다는 엽록(獵鹿)이라는 말 대신 사슴을 쫓는다는 축록(逐鹿)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면 과거에 사슴사냥은 목책사냥이 주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앞에서 사슴을 전속을 다하여 목책으로 몰아넣는 대목을 상기해보자.
산이고 뭐고 볼 틈이 있겠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적어도 동물에 관해서 하신 옛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는 진리가 여기서도 통 할 듯하다.
제 2 편 - 수렵도 의문점의 추가 분석
앞에서 수렵도가 현장의 사냥을 자주 직접 해보았거나 본 사람이 사실에 근거해서 정확히 그려 낸 것이라 했다. 그 정확한 사생이라는 가정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수렵도는 명적의 비밀 외에도 풀어야 할 여러 정보를 품고 있다.
1.어느 철에 한 몰이 사냥인가?
고구려 화가가 모르긴 몰라도 평소 모시고 다시며 같이 사냥하던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이 수렵도에서 한 궁금증이 떠오른다.
과거 고구려 땅인 지금의 동북지방에서 하던 사슴 사냥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한 시기가 사슴의 녹용이 탱탱하게 (?) 영근 하지 무렵이다. 다른 시기는 11월경인 사슴의 교미 철이다. 이 때 녹용 다음으로 비싼 수사슴의 생색기(鹿尾)의 약효가 최고조에 달해 잡을 시기가 된다.
내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백두산 명포수 최 석도 씨의 말씀에 의하면 젊은 시절 사냥 할 때는 연중했지만 최고의 수확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여름과 가을 두 철이라고 했다.
사실 녹용 철에는 숲이 우거져서 사슴 떼를 발견하기 쉽지 않고 추적도 어려울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녹용이 원체 비싸기 때문에 여름 몰이사냥도 배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 맨 위 사슴을 돌아 쏴 하는 사람이 가죽 덧 상의를 입고 있다. 이런 것은 더운 여름철에 입을 리가 없다. 가죽옷은 수렵도의 사냥이 가을철에 하는 몰이 사냥임을 말해준다.
역시 가을철은 사슴들이 교미하느라 수놈 인솔 하에 떼를 지어 다닐 것이기 때문에 몰이사냥을 하기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엄동 설한은 아니고 겨울이 오기 전이다. 사슴의 교미철인 11월이 정확할 듯하다. 겨울이 오기전 부하들까지도 포함해서 겨울 양식으로 쓰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사슴을 포획하기 위해서 열심히 사냥을 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2.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분명 이 벽화는 무용총의 주인을 그렸을 것 같은데 수렵도만 보면 누구인지가 분명하지가 않다.
주인공은 당연히 중앙에 위치해야 하고 호랑이를 쫓는 사람이 되어야 갰으나 그 그림은 작고 오히려 주변격인 위의 사슴을 쫓는 무사가 제일 크게 그려져 있다.
주제와 크기가 서로 상반되어 누가 주인공인지를 알기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또 보자 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맨 위 사슴에게 할을 겨누는 사람과 호랑이를 겨누는 사람, 두 중요 인물의 얼굴에 한 특징이 있었다.
머리(頭高))가 낮고 뒤통수가 나온 짱구 머리의 특징이 있었다. 나는 이런 인물 묘사가 고구려 시절 인물 모사의 한 화법적(畵法的) 특징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잘 보니 수렵도 중앙 왼쪽에 있는 한 사람은 그런 짱구 머리가 아니었다.
이 그림의 인물은 사냥에도 참가하지 않고 조용조용 움직이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남긴 것이 아닌가 한다. 현대 그림에서도 대작에서 자기의 얼굴을 은근히 남기려는 화가들의 드물지 않은 욕구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추측한대로 이 수렵도를 그린 사람은 주군과 같이 수렵을 다닌 무사이다.
나는 관심을 가지고 수렵도뿐만 아니라 무용총에 그린 모든 그림을 다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각 장면마다 한 사람만 빼고 그런 뒤짱구의 인물은 없었다. 인물을 짱구머리로 그리는 것은 절대 고구려 미술의 화법(畵法)이 아니라는 판단이 나왔다.
그러니까 한 결론이 나왔다. 그림 장면마다에서 짱구머리의 인물은 그림 중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1.수렵도의 두 인물.
2.무용도의 말 탄 인물.
3.스님과 대화하는 오른쪽 인물.
4.혼자 탁자에 앉아서 파안대소하는 인물.
결론적으로,그리고 상식적으로 이 무용총의 각 주요 그림들의 중심인물들은 낮은 머리(頭高)에 뒤통수가 튀어나온 주인공이 모델이었다.
나는 이 정도로 밖에 파악이 되지 않지만 위의 발견을 바탕으로 전문지식을 가진 분이 무용총 그림을 분석,특히 복식을 분석해보면 주인공의 직위나 실체가 들어 날지도 모른다.
3.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의 극동지방 등장
방향의 돌려 도주하는 사슴을 명적을 발사하는 주인공의 ‘돌아 쏴’ 자세는 평범한 사격 자세가 아니다.
이 자세의 사격은 기원전 3세기경 지금 이란 땅 북부에 존재하던 파르티아 왕국의 기마 무사들이 쓰던 사법(射法)이다
그들은 공격 할 때는 낙타에다가 화살을 잔뜩 싣고 기병을 물량 지원케 하여 기마 부대로 적을 파상 공격하게 하였다. 기병들은 파도처럼 적진에 육박하면서 화살을 퍼붓고 다시 돌아서면서 화살을 퍼붓는 무제한의 화력으로 적을 붕괴 시켰다.
파르티안 샷 - 옛 페르시아 화
적에게 쫓길 때는 두 다리로만 말을 다루면서 뒤로 돌아 쏴의 연사로 추격하는 적을 제압했다.
파르티안 사법은 역사학자들이 그 북방 스키타이 족들의 땅에서 탄생했다고 말하는 등자(橙子)와 복합궁(復合弓) 때문에 가능했다. 두 개 다 역사의 기병전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등자는 발로 디디고 설 수 있는 기구이고 복합궁은 활짱을 나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겹의 얇은 나무와 뿔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몽골 활과 한국 활도 여기에 속한다. 복합궁은 활을 더 강하면서도 짧고 작게 만들 수가 있다.
등자가 없이는 두 손으로 사격하면서 두 다리로 말을 다룰 수가 없다. 활을 짧게 만들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유럽 활이나 일본 활처럼 너무 길면 말 잔등에 활 밑 부분이 거치적거려 마음대로 방향 전환을 하며 사격을 할 수가 없다.
BC53년 카레의 전투에서 이 파르티안 사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던 10,000만 명의 파르티안 기병대가 당시 크라서스가 지휘하던 세계 최강군인 로마군인 43,000명을 공격하여 20,000만 명을 사살하는 대 전과를 올렸다,.
파르티안 사법은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이를 다시 천 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세계에 떨 친 것은 오직 궁술에 의지한 기병만으로 세계 정복에 나선 몽골족이었다.
말이 길어졌는데 파르티안 사법이 서기 400년에 극동의 고구려에 나타난 사실을 이 수렵도가 증명해준다. 광개토 대왕의 정복사업에 이 파르티안 샷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구려 기병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부 역사학도들이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을 보았다.
수렵도가 나타 난 것이 서기 4백년, 몽골족이 역사에 그 이름을 처음 나타 낸 것이 훨씬 뒤인 서기 800년, 그리고 파르티안 사법으로 유럽까지 뒤흔든 몽골 기병대가 대륙을 뒤 흔든 때가 1200년대다,
그래서 단순히 시대적으로 훨씬 앞선 수렵도의 그림만 보고 또 긴 역사의 간격만 보고 몽골의 ‘돌아 쏴’ 파르시안 사법이 고구려에서 전해 줬다고 하는 편협한 소리를 하는 일부 아마추어 역사 학도가 있다.
이건 곤란한 이야기다. 몽골족 이전에 이 중앙아시아 스텝 지방에는 흉노족이니 돌궐족이니 하는 막강한 유목 기마민족이 있어 후손인 몽골 인들이나 고구려인들에게 파르티아 사법의 동방 전파의 매개자가 되었을 것이다.
4.맹견 라이카의 최고 오래된 그림
수렵도를 보면 호랑이를 쫓는 말 옆을 검정개가 열심히 같이 뛰고 있다.
수렵도 화가는 역시 정확했다. 호랑이를 등장 시킬 때 바늘에 실 가듯 개를 등장시키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호랑이를 몰이 할 때는 개가 꼭 있어야 했다. 주간의 호랑이는 먹이를 잡아 놓고 근처 무성한 덤불속에서 쉬기 때문에 개가 이를 말이 쫓을 수 있게 밖으로 튀겨 내야한다.
또 말들 중에 호랑이에게 겁을 먹고 쫓지 않으려고 하는 허약한 놈들도 다수 있다.
잔등에 사냥해 잡은 사슴만 얹어도 기겁을 하고 길길이 뛰는 것이 말(馬)이고 이렇게 덩치 값을 못하는 것은 황소도 마찬가지다. 고로 이런 목적에 쓰는 말이나 소는 특별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러나 개떼가 짖으며 앞장서면 말은 비로소 안심하고 쫓는다. 이래저래 개들은 필요하다. 호랑이를 쫓기 위해 개는 수십 마리가 떼가 필요하다.
그림을 보니 구도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서 단 한 마리만 그린듯하다. 말의 옆에 바짝 붙어서 달리는데 이는 지도견인 썰 개일 것이다. 호랑이를 쫓는 말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의 옆에서 뛰도록 특별 훈련을 받은 썰개 일 듯 한 생각이 든다.
이 고구려 무사들은 그 무서운 호랑이를 개를 동원하여 숲에서 튀겨내어 역시 꼭 같은 목책 함정으로 몰아넣고 있다. 즉 호랑이와 사슴을 같은 지역에서 잡았다는 이야기다.
지난 2월 28일 포스팅한 ‘내가 마지막 본 삽살개 추정 검정개’ 의 글을 보시고 답 글 주신 통키라는 분은 참으로 박학하시고 고전 실력과 한문 실력이 대단하셨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을 주셨다.
옛 고전『박물지 (博物志)』에는, '한국에는 까만 개가 있는데 이름을 '로'라 한다(韓國有無犬名盧) ." 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로(韓盧)는 한(韓)의 로(盧)로서, 한국(韓國)의 명견(名犬)을 가리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물지의 쓰여진 연대를 여쭙자,
중국最古의 백과사전 박물지(博物志)의 저자는 서진시대(西晉 265~316年) 장화(張華 232-300年)이며 쓰여진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약 265~300년 사이에 쓰여 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한로(韓盧)는 서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으로 사료 되며 박물지에 고구려에 관한 기록이 많고,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에 호랑이를 사냥하는 검정개가 그려져 있는데 이 개가 바로 한로(韓盧)입니다.
나는 수렵도에 나오는 개로서 지금 무용총이 있는 압록강 지역에서 고구려인들과 살았을 한로라는 개,귀가 바짝 서고 검은 색에 말을 따라 달릴만한 주력을 가진 개는 라이카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여러 독자 분들께서 내가 썼던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를 기억 하실 것이다.
우리의 진도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전설, 국견 진돗개의 조상이 몽골 개라는 것, 진도의 흑구가 진짜 진돗개라는 것이라는 두 사실을 바탕으로 20년의 세월에 걸쳐 수집한 자료로 쓴 글이어었다.
제주도에 몽골인들이 가져온 라이카가 한반도 남해안 연안의 사슴들을 쫓아서 척박한 제주도를 떠난 사냥꾼들에 의해서 남해안에 퍼진 것들이 그 조상이 되었다는 결론을 냈었다.
몽골에서도 키우는 러시아 이스트 라이카 견
반응이 매우컸다. 긍정적인 답글이 압도적이었지만 내가 소설을 쓴다는 악의적인 답글 들도 많았었다. 한심하게도 대부분의 악풀러들은 무슨 조사나 연구로 얻은 개인 의견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악플을 달았었다.
악플러들의 전반적인 흐름은 한국의 자랑스러운 국견의 조상이 외국개(몽골 라이카)라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국수주의적 편협 된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정서는 어떤 독자가 보낸 우리 진돗개가 시베리아나 몽골로 가서 그 곳 라이카의 조상이 되었다는 어거지 답글로 대표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라이카를 보면 라이카가 몽골의 개가 아니라 고구려의 개였었고 우리 민족의 개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나의 글에 대한 어거지 의견들에 대해서 이 수렵도 한 장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6.고구려 무사의 관모 깃털
동물에 관심이 있다보니 이런 것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머리에 새 깃털을 꽂는 것은 동이족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나는 참 할 일없다는 핀잔을 들으며 수렵도에 나오는 주인공 모자의 깃털이 무슨 새의 털인가를 한참을 연구했었다.
먼저 발견한 사실은 이 관모에 꽂힌 털들이 새들의 날개 깃털이 아니라 꼬리털이라는 사실이다. 꼬리털들이라야만 이 관모를 꾸밀 수 있는 길이가 나온다. 그리고 꼬리털이 끝이 좁아져 멋이 난다.
날개의 깃털은 끝이 뾰족하지 않고 넓고 짧다. (용맹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머리 장식에 독수리 날개깃을 애용한다.)
여기서 한 가지 사족으로 첨언하자면 몸을 돌려 후방 사격을 하는 무사와 아래 또 다른 무사의 조우관은 단 한 개가 아니라 한 묶음의 휘어진 깃털로 장식되어있다.
이런 곡선을 가진 깃털에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장닭의 꼬리 털 밖에는 없다.
행여 이런 치장이 우리의 건국신화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난생신화, 다시 말하면 주몽의 탄생이나 김알지나 계림이라는 지명등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나하는 의구심도 들어 수탉에 대한 높은 평가가 그 무렵에는 있었나 하는 추측도 해본다.
다음으로 뾰족한 깃털은 무엇일까 ?
나는 주변에서 찾아보아도 꿩 꼬리털 밖에 관모에 꽂는 길이가 나오는 새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꿩 꼬리털로 단정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주인공이 쓰는 모자가 벽화에 그려진 대로 해도 여러 개였다. 그러니까 그때에도 그만큼 모자의 패션 감각이
대단했다고 보아야 했다. 고구려 무사들은 자기 패션 센스대로 여러 깃털들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 종류로 잘라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생각해보는 것을 중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자 나의 관심이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 주인공이 쓴 관모의 깃털, 바람에 많이 구부러졌다고 한 관모의 깃털은 무엇이었을 것인가로 좁아졌다.
즉 높은 직급의 벼슬아치들은 확실히 다른 아래 사람들과 다른 고급스러운 깃털을 썼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였다.
그 관모의 깃털은 검정색에 약간 곡선이 된 긴 꼬리털이었다. 그런 꼬리털을 가진 새를 찾아보기로 했다.
수렵도를 보니 이 깃털은 아무래도 검정색 같았다. 검은색에 곡선을 가진 깃털을 가진 새를 한참을 걸려서 찾아보니 세 종류로 압축되었다. 두루미, 황새, 백로였다. 특히 두루미와 황새는 꼬리 털 색이 검어서 가장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나는 이중에서 자연히 강한 브랜드 파워를 가진 두루미 쪽으로 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뭔가 그 재료부터 고급의 이미지가 있는 새의 것을 머리치장에 쓸 것이었다. 두루미, 즉 학이야말로 고래로 이 고급 이미지에 꼭 맞는 새였다.
신선이 타고 다녔다고 말해지기도 하고 장수의 심볼이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고고한 자태를 나타날 때 형용사로 등장하는 새는 학밖에 없다.
더구나 학익선이며 학창의며 또 상상의 학 날개 하늘 마차며--- 학은 고급 상품으로 고대민족의 의류생활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나는 학의 사진을 구해서 꼬리 부분을 확대경으로 유심히 보았다. 그 커다란 놈의 꼬리에 바로 고구려 귀족의 관모를 꾸며줄 길고 우아한 곡선을 가진 검은 깃털들이 있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그 때는 학도 많았을 것이니 실력자 정도 되면 학 꼬리털을 구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먼 사마르칸트에서 발견 된 고구려 사신들, 환도대도를 차고 머리에 관모를 쓴 이 고구려 무사들은 학의 꼬리 깃털로 한껏 치장하고 국제 외교에 나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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