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혁의 역사추적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20270 2008/09/16
핵심내용 :
백제 개로왕이 중국의 북위로 보낸 국서이다. 내용은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는 내용이다. 백제의 대외관계나 당시 국제정세를 알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로서 이 내용은 우리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전과 중국 위서에 함께 나오는 기록이다. 신라만이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믿고 있는 학생이나 일반인들은 꼭 읽어봐야 할 역사자료이다.
삼국시대는 모두가 자국의 안위를 위해서 외국과 동맹을 맺던 시기였다. 그것을 오늘날의 민족주의 잣대로 재단하면 외세를 끌어들인다는 폐쇄적인 왜곡된 역사관을 갖게 된다. 그래서 백제 개로왕의 국서는 다이나믹한 국제역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신라폄훼자들이 늘 말하는 외세를 끌어들인다는 부분에서 볼때 개로왕의 국서가 전해주는 의미는 무척 크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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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전에 나오는 개로왕의 국서 전문
18 년(472)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고구려]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고구려]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魚肉], 대신(大臣)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假手]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首丘之心]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왕법[王略]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채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고구려]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
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안했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고구려 왕]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십시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본 바이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입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경영(經營)하고 공략(經略)하는 요체는 별지(別旨)에 갖추어 있다.』
[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나라·월(越)나라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
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지만 다만 고구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치는 것이 오래 되었다. 그 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가 있었지만 나라[魏]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범한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 데 사정과 기회[事會]를 검토하여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상주하여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 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 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
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
[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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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의 국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
역사를 봄에 있어서 국가단위의 그리고 그 생존을 위한 투쟁을 보지 않고 현재의 잘못된 민족이라는 개념하에서 삼국시대를 조명하는 것은 마치 지금의 민주주의 논리로서 세종대왕의 독재를 운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좌파적 선동적 역사관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과연 삼국시대에 신라만이 외세를 끌여들였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의 반증을 일깨우고자 한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독립된 국가조직으로서 자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삼국간에는 물론이고 각기 주변국과 연합도 하고 전쟁도 하던 시기였다.
북위에게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는 내용이며 백제개로왕은 고구려를 승냥이로까지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개로왕은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 딸까지 북위의 노비가 되도록 하겠다는 맹약까지 하고 있다.
내용으로만 보면 매우 굴욕적이다. 이것을 가지고 현재 시점과 관점으로 백제 개로왕을 민족관념이 없는 민족의 반역자라고 매도하면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 개로왕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국제역학의 불변의 법칙에 따라서 백제의 안녕을 위해서 백제의 적국인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의 수단과 국익을 도모하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에 하등에 비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독 신라에 대해서만 현재의 민족개념을 적용해서 동족을 당나라에 팔아넘겼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의 역사인식에 커다란 장애요소가 아닐 수 없다. 엄밀히 따지면 만주를 상실한 것은 고구려도 아니라 발해인데도 말이다.
더 문제는 이런 신라죽이기 신라폄훼의 역사관을 북한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었다. 불완전한 통일이었을 망정 통일자체를 부정하지 않었었다. 오히려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를 높이 평가하였었다.
북한의 역사서 조선전사와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의 기막힌 공통점
북한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새롭게 쓴 "조선전사"와 일본이 백제 패망후에 쓴 "일본서기"엔 기가막히게 똑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의 핵심은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다.
북한 역사서인 "조선전사"에도 보면 신라에 대해선 신라라고 하지도 않고 "신라놈들"이라고 표기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서기도 그런식으로 표현한다. 그 배경엔 신라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심이 있다.
설명하자면 일본서기는 백제가 망하고 나서 대규모로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지식층들이 일본에서 지도층이 되면서 일본서기 집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니 백제유민들이 집필에 참여한 일본서기이다보니 신라에 대해서 욕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구조다. 물론 그 배경엔 신라에 대한 질투심도 서려 있다.
그리고 신라에 망한 백제와는 구분되어서 일본열도만의 새로운 역사를 서술하다 보니 왜왕인 "일본천황"중심으로 새롭게 "각색"해서 쓸수 밖에 없었다.
"백제"가 주도적으로 한 것도 일본 왜왕이 한것처럼 서술하는 소위 "천황중심사관"이 바로 일본서기이다.
북한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김일성 중심의 역사서와 일본서기는 그 맥을 같이한다. 일본서기와 똑같은 구조가 바로 김일성중심의 역사서가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이다.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한미동맹하에 대한민국이 세계무대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자 그때부터 북한의 김일성의 역사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주체사상을 근거로 해서 북한은 김일성 중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조선전사"라 이름붙였는데 내용중 3분의 2가 김일성일가에 대한 역사서술이다. 마치 백제가 신라에 망한 후 왜로 건너간 백제 지식층이 왜왕 중심으로 역사를 왜곡해서 쓴 일본서기와 그 맥락이 똑같다.
일본 서기도 그렇고 북한의 조선전사도 그렇고 그 시작은 신라에 대한 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김일성은 박정희대통령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인 경상도와 신라를 연결하여 매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를 높이 평가하던 김일성 북한은 이승만대통령집권때만 하더라도 그렇지 아니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민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외세배격을 케치플레이즈로 내걸었다.
지역감정과 정치목적이 왜곡하는 신라와 백제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더 나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이런 북한과 좌파의 역사인식이 지역감정과 결부되어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정치구도가 경상도 전라도로 대별되다 보니까 어이없게도 신라와 백제로 연결짓고 있는데 이것은 통탄해 마지 않을 일이다.
전라도에 산다고 백제후손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은 뇌내망상일 뿐이다. 김해김씨나 경주최씨가 전라도에 산다고 백제후손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환부역조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경상도에 산다고 신라후손이라고 여기는 것도 정신나간 생각일 뿐이다.
통일신라 200년, 고려시대 500년 조선시대 500년을 거치면서 썩일대로 썩어서 신라 백제의 구분은 완전히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영화탓일까? 아니면 정치인 탓일까? 김대중도 자신은 김해김씨 후손이라 하거늘...
다른 것은 몰라도 지역감정을 백제나 신라로 연결하는 것만큼은 없어져야 한다.
각설하고 ...
원래 북한 공산주의에선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뱉으면 "반동분자"로 낙인찍였었다. 공산주의 강령자체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전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막스레닌의 사상이 그 배경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는 오히려 분열주의자로 치부되었었다. 그런 북한이 민족을 내세우는 것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이렇게 민족주의를 죄악시하던 북한이 오히려 민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선동하는 모순적 행동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라에 대한 역사인식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서 동족을 쳤다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나온 주장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인데 현실은 남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 빌어먹는 체제다.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맹관계를 외세라고 치부하는 그런 사상에 쩔어 있으니 굶어 죽는 북한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또 북한 말을 십분 발아들인다 하더라도 "당"나라 후신인 중국에게 현재에도 전적으로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김정일의 북한 자신 아닌가? 그러면서 외세배격이라고 하는 웃지못할 촌극이다.
그런데 이런 세부사항을 알지 못하면서 신라 폄훼의 신라죽이기의 신라공정이 부지불식간에 대한민국 일반 국민에게 널리퍼져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북한의 역사관은 한국내 좌파역사관에 그대로 주입이 되어서 현재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다. 하루 속히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국가간의 동맹을 외세를 끌어들인다는 북한식 선동역사관에서 탈피하지 않고선 국가통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음은 삼국시대 생존경쟁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외교를 활발히 벌이던 백제 개로왕시절 개로왕의 국서내용이다.
이내용은 중국 수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우리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북한식으로 본다면 백제는 뭐라 해야 할까?
************************ 개로왕의 국서 삼국사기 원문 ******************************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2)和天休 不勝係仰之情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3) 遣進萬一之誠 冀4)神祇5)垂感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好 親率士衆 凌踐臣境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力竭轉自孱 若天慈曲矜6)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7)女 執8)後宮 幷遣子弟 牧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9)之期 假手之秋也 且馮10)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有征無戰 臣雖不敏 志效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藩卑之辭11)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共相脣齒12)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見屍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13)隔路 以沈14)于海 雖未委當 深懷憤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撮放鳩信陵不食 克敵立名 美15)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況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 跨塞天逵16) 今上所得鞍 一以實驗』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甚17)善18)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欣嘉至意 用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親所聞見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讐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比校19)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又詔曰 『知高句麗阻疆 侵卿土20) 修先君之舊怨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21)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惠則保境 故羈著於前典 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況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句麗卽敍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協22)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23)』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遇風飄蕩 竟不達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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