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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세계사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


출처: 중앙 SUNDAY



“중국화의 천박함 절정” … 쉬베이훙, 미술계에 폭탄선언
| Opinion |
2011-01-23
1917년 5월, 장비웨이를 데리고 도쿄에 도착한 쉬베이훙은 신주쿠에 숙소를 정했다. 수중에 창힐(蒼<9821>)의 초상화 값으로 받은 1600원과 캉유웨이가 준 400원이 있었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집 주변에 서점과 고서방들이 많았다. 러시아와 서구의 미술서적들이 널려 있었>>
성공한 반역의 시대 … 쉬베이훙, 일본으로 사랑 도피
| Opinion |
2011-01-16
쉬베이훙은 장메이성의 집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장메이성의 둘째 딸 탕전(棠珍)과 스칠 때가 많았다. 자태가 고왔다. 안 보는 척하며 힐끔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장메이성과 쉬베이훙은 한번 앉았다 하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
유희로 변한 포격전 … 마오쩌둥, 짝수 날엔 포격 중단
| Opinion |
2011-01-02
1958년 10월 13일 마오쩌둥은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샤먼 전선에 보내는 ‘국방부 명령’을 직접 기초했다. “오늘부터 포격을 다시 2주간 중지한다. 금문의 군민들이 식량과 군사장비 등 충분한 보급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병불염사(兵不厭詐)! 전쟁에서는 적을 속이는 것을 거리낄 >>
미 호위함, 국민당 보급선 공격받자 모른 척 줄행랑
| Opinion |
2010-12-26
마오쩌둥은 예페이를 통해 8·23 금문포격전을 지휘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마오의 의중을 파악한 예페이도 샤먼전선으로 복귀했다. 8월 하순, 푸젠(福建)군구 사령관 한센추(계급은 예페이와 같았지만 직급이 위였다. 한국전쟁 시절 서울을 점령했다.)가>>
마오쩌둥, 중동행 미 6함대 분산시키려 금문도 포격
| Opinion |
2010-12-19
마오쩌둥은 금문도와 마조도를 점령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8·23 금문도 포격 1개월 전인 1958년 7월 14일, 이라크에서 무장혁명이 발발했다. 왕정이 무너지자 미국은 중동 주둔 미군들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레바논에 출병했다. 미국에 이어 영국은 요르단을 점령했다. 소련과>>
장제스, 미국 말 다 들었지만 금문도 철수 요구엔 “NO”
| Opinion |
2010-12-12
1958년 8월 23일 시작된 중공의 금문도 포격을 거론할 때마다 견고한 지하요새와 군·관·민이 일치 단결해 금문도를 끝까지 사수했다며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을 떠난 당사자들이 쓴웃음을 지을 일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정작 감탄해야 할 것은 정치·군사·외교 문제가 얽>>
승리에 취한 해방군, 금문도 상륙 중 1만 명 전사
| Opinion |
2010-12-05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동북을 장악하자 장제스는 패배를 예견했다. 극비리에 최측근들과 머리를 맞댔다. 핵심은 “중공군의 압박을 피하려면 정부를 어디로 이동하느냐”였다. 항일전쟁을 지휘했던 서남쪽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지리학자 장지쥔(張其均)이 대만 천도(遷都)를 >>
“총칼 대신 입으로 싸워라” … 마오, 군 출신 대사 설득 작전
| Opinion |
2010-11-28
1950년 봄, 제3야전군 7병단 정치부 주임 지펑페이(姬鵬飛)는 외교부에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왕년의 직속상관 쑤위(粟裕)를 찾아가 군대에 남아 있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우리는 장군이다. 국가가 요구할 때 선택할 권한이 없다”는 답을 듣자 군말 없이 베이징을 향했다.>>
마오쩌둥, 외교관 망명 막으려 인민군서 대사 차출
| Opinion |
2010-11-21
1949년 1월 19일, 내전 승리를 앞둔 마오쩌둥(毛澤東)은 외교문제에 관한 세부사항들을 중공 중앙위원회에 서면으로 지시했다. 말미에 “중국은 독립국가다. 그 어떤 국가나 연합국(유엔)의 내정간섭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 중국 경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중국 인민과 인민의 >>
원폭·수폭 만든 중국의‘퀴리 부부’허쩌후이와 첸싼장
| Opinion |
2010-11-14
1932년 여름 칭화대 물리학과는 신입생 28명을 선발했다. 그중 열 명이 여학생이었다. 교수들은 “학과가 망하게 생겼다”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여학생들을 붙잡고 여자들이 하기에는 힘든 학문이라며 전과를 권했다. 성적이 상위권이던 여학생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작전을 >>

장제스, 귀국한 아들 몸에서 ‘붉은 물 빼기’ 작전
| Opinion |
2010-11-07
장징궈(蔣經國)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스물일곱 번째 생일날 고향으로 내려갔다. 소련 시절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나 변명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제스도 시시콜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생모 마오푸메이(毛福梅)는 법적으로 이혼한 상태였지만 저장(>>
장제스 “아들이 한 달 후면 온다, 이제 마음이 놓인다”
| Opinion |
2010-10-31
1936년 가을, 소련 주재 중국대사 내정자 장팅푸(蔣廷<9EFB>)는 퍼스트 레이디 쑹메이링의 호출을 받았다. “위원장은 장징궈의 귀국을 학수고대한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소련에 가거든 소재를 파악하고 귀국시킬 방법을 찾아봐라. 위원장의 유일한 혈육이다.” 소련 측과 협의>>
소련 머물던 장징궈 “내 조국은 소련” 어머니에게 편지
| Opinion |
2010-10-24
장징궈가 소련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신청서 원본이 최근 발견됐다. “나의 아버지 장제스는 중국혁명의 반역자다. 현재 중국에서 자행되는 흑색공포의 두목이기도 하다. 1927년 나는 그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적으로 대하겠다는 성명을 낸 적이 있다. 그 후로 장제스와 연락을 하거나 >>
장제스, 소련 코민테른 간부와 아들 교환 제의 거절
| Opinion |
2010-10-17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청당(淸黨)의 서막을 연 장제스는 혁명 근거지 광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쑤(江蘇)·저장(浙江)·후난(湖南)·장시(江西)·푸젠(福建)·광시(廣西)·쓰촨(四川) 지역의 중공당원들을 닥치는 대로 색출했다. 형장이 따로 없었다. 대로·골목 할 것 없>>
아버지 장제스와 틀어진 장징궈 “그는 나의 적이다”
| Opinion |
2010-10-10
신해혁명 성공 후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됐다. 쑨원(孫文)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군대가 없이는 통일과 민주공화제의 실현이 불가능했다. 독일·일본·미국과 접촉했지만 다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소련 쪽으로 눈을 돌렸다. 10월 혁명에 성공한 소련도 동방의 협력자를 물색하던 중이>>
혁명과 전쟁 소용돌이 거친 여전사 68명 한자리에
| Opinion |
2010-10-03
1960년 7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중공중앙공작회의’가 열렸다. 2년 전부터 몰아닥친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 피폐해진 국내 경제와 스탈린 사후 발생한 국제문제를 토의했다. 1년 전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지방정부 주석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
낙향한 저우 “권력과 폭력은 피하는 게 상책”
| Opinion |
2010-09-26
1908년, 세 살짜리 젖먹이가 황제 자리에 앉자 청(淸) 제국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렸다.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도 실각했다. 1911년 신해년 가을,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며 경험을 축적한 혁명세력들은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에 주둔한 신군(新軍)을 부추>>
중국 최초 총통·국무총리, 조선땅에서 묘한 첫 만남
| Opinion |
2010-09-19
1883년 2월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나라는 조선에 세관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리훙장은 묄렌도르프를 파견하며 저우서우천을 조수로 딸려 보내려 했다. 저우는 조선행이 내키지 않았다. 묄렌도르프는 톈진(天津)의 외국인 사회에서 소문난 저질이었다. 고향에 가면 뭔가 여지가 있을>>
마오쩌둥, 90세 ‘홍콩노인’ 저우서우천에게 손을 내밀다
| Opinion |
2010-09-12
1949년 5월 중순, 중국인들이 ‘香港大老’라고 부르는 태평신사(太平紳士:홍콩총독이 임명하던 명예직. 시민의 입장을 대변했다. 97년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된 후엔 행정장관이 임명) 저우서우천(周壽臣)은 낯선 우편물을 한 통 받았다. 발신지는 옌안(延安) 푸광(複光)로>>
옌바오항, 국민당 파티서 ‘독일의 소련 침공’ 첩보 빼내
| Opinion |
2010-09-05
항일전쟁이 중반에 들어서자 국민당은 반소(反蘇)·반공(反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소련 대사관의 중국 철수도 시간 문제였다. 코민테른 극동(極東) 정보국은 국민당의 군사·정치·외교·경제·문화에 관한 고급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중공 당원을 옌안에 요청했다. 전시 수>>

옌바오항, 장제스에게 세 번 퇴짜 맞고 국민당에 등 돌려
| Opinion |
2010-08-29
일본군의 만주 침략과 장쉐량의 연금은 국민당 고관 옌바오항을 중공 비밀당원으로 변신시켰다. 1929년 영국에서 귀국한 옌바오항은 추억의 ‘펑톈(奉天) YMCA’를 노크했다. 미국인 총무는 기독교도가 되어 돌아온 옌에게 총무직을 넘겼다. 부친이 일본군에게 폭사 당한 후 동>>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9>50여 년간 정체 감춘 ‘홍색 특수공작원’ 옌바오항
| Opinion |
2010-08-22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독일의 소련 침공, 소련 홍군의 만주 진입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무명의 중국인이 있었다는 얘기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1991년 봄, 54년 만에 자유를 획득한 장쉐량(張學良)이 뉴욕에 도착하자 온 중화권이 들썩거렸다. 아무리 사소한 말이나 행동도 그가 하>>
충칭·난징선 서울보다 닷새 빠른 8월 10일 승전 폭죽
| Opinion |
2010-08-15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사흘 후 나가사키에 두 번째 폭탄을 투하하기 10시간 전 소련도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150만 명의 소련 홍군이 만주에 진입하자 일본 관동군은 일주일 만에 8만3000여 명이 전사하고 59만4000명이 투항하는 등 >>
상하이 엑스포 중국관은 ‘애국노인’ 마상보 칩거 장소
| Opinion |
2010-08-08
마상보(馬相伯)는 1840년 강보에 싸인 채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 천주교와 천문학을 혼동했다. “하늘 천(天)자 때문에 해가 지면 하늘만 쳐다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일기에 적었다가 꾸중을 들었다. 상하이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학교가 있었다. 열두 살 되는 해에 입학>>
붉은 담장이 낳은 예술가, 47세에 감옥서 ‘요절’
| Opinion |
2010-08-01
중공 1세대 지도자들의 딸 중에는 재녀(才女) 소리를 듣는 사람이 많았다. 덩샤오핑과 뤄루이칭(羅瑞卿)의 딸은 부친의 회고록을 펴내 세상을 놀라게 했고, 마지막 보황파(保皇派) 타오주(陶鑄) 딸 스량(斯亮)은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글로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건국 공신>>
옌안의 홍색공주, 장칭·예췬과 악연을 맺다
| Opinion |
2010-07-25
1937년 겨울 우한(武漢)의 팔로군(八路軍) 연락사무소에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찾아왔다. 요구가 당돌했다. “옌안(延安)으로 가겠으니 빨리 안내해라.” 연락사무소 측은 나이가 어리고 믿을 만한 조직의 소개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날만 밝으면 찾아왔다>>
육군 상사 출신 선충원 ‘京派문학 영수’로 떠오르다
| Opinion |
2010-07-18
선충원(沈從文)은 1917년 15살 때 군대에 들어갔다. 정규군과 비적 중간쯤 되는 꼬마 군벌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지휘관은 고적과 고서화를 좋아했다. 제 돈 주고 산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수장품의 양과 질이 굉장했다. 글을 아는 선충원에게 분류와 관리를 맡겼다. 덕분에 5년간 >>
후스 “學歷보다 學力” … 26세 무학의 작가 선충원을 교수로
| Opinion |
2010-07-11
1928년 봄 상하이의 명문 중국공학에 학생소요가 발생했다. 이사회는 전 베이징대 교장 차이위안페이를 교장으로 영입해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학생들은 “도덕과 학문은 나무랄 데가 없는 분이지만 겸직이 많은 것이 흠이다. 학교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지 못 할까 봐 두렵다”며 거절했>>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홍군에 날개 달다
| Opinion |
2010-07-04
1936년 10월 중순, 베이핑(北平)으로 돌아온 에드거 스노는 미국 영사관 강당에서 서북기행(西北紀行)을 발표했다. 베이징대·옌징대·칭화대 학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스노는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12·9 학생시위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참석자들은 스노가 1>>
에드거 스노 만난 마오 “공산당원 될 줄 상상 못했다”
| Opinion |
2010-06-27
1936년 6월 말, 에드거 스노는 시안(西安)에서 조지 하템과 합류했다. 중공 보위국장이 두 사람의 호송을 지휘했다. 관광객을 가장해 옌안(延安)에 도착한 후 장쉐량(張學良)의 부관이 동승한 차를 타고 마지막 검문소를 빠져 나왔다. 옌안은 아직 국민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국민당>>

홍군 枯死 직전, 에드거 스노 기자를 불러들이다
| Opinion |
2010-06-20
마오쩌둥은 중국식 공공외교(公共外交)의 창시자였다. 1935년 10월 마오가 인솔하는 중앙홍군이 산시(陝西)성 북쪽 바오안(保安)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국민당은 물샐틈없이 봉쇄했다. “비적들은 소멸됐다. 극히 일부가 서북의 불모지에 들쥐처럼 숨어들었지만 소탕은 시간문제다”라는 >>
장제스·다이지타오, 일본여자와 한방서 살다 득남
| Opinion |
2010-06-13
다이지타오는 16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봄 일본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장제스를 만났다. 장이 네 살 위였다. 장은 동향 의식이 유난히 강했다. 다이는 본적이 장과 같았다. 옆모습도 비슷했다. 두 청년은 쑨원의 거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쑨은 우익단체 흑룡회(黑>>
장제스 “최고의 예술은 적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
| Opinion |
2010-06-06
중일전쟁 시절 임시수도 충칭에 머무르던 쑹메이링은 온갖 병마에 시달렸다. 충칭에 신통한 의사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쑹은 치료를 위해 홍콩행을 택하지 않았다. 민심을 자극할 소지가 많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혼자 있기를 싫어했다. 1940년 9월 장제스는 쑹메이링의 병>>
‘마오쩌둥 선집’ 찍으려던 종이로 대입 시험지를 찍다
| Opinion |
2010-05-30
1977년 봄 세 번째 정계 복귀가 확정된 덩샤오핑(鄧小平)은 베이징 교외에 머무르고 있었다. 5월 24일 “지식과 인재를 존중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교육과 과학의 발전이다.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현대화다. 국가 지>>
장쉐량에게 저우언라이 ‘16字 밀서’ 전달한 주메이윈
| Opinion |
2010-05-23
저우언라이는 장쉐량, 장제스, 쑹메이링과 함께 시안사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전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장은 “내전을 중지하고 국공 양당이 합작해 침략자 일본과 전쟁에 돌입할 것”을 촉구하며 최고통수권자 장제스를 감금했다. 장제스는 이들>>
장위안치, 황제에게 개혁의식 불어넣은 ‘출판의 황제’
| Opinion |
2010-05-16
장위안치(張元濟)는 25세 때 전시(殿試)에 합격했다. 6년간 경관(京官)으로 봉직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광서제(光緖帝)는 서구의 과학과 학술에 관심이 많았다. 툭하면 도서목록을 총리아문(總理衙門)에 건네며 구해오라고 했다. 베이징(北京)의 서점에는 황제가 원하는 책들이 >>
프랑스서 두부사업 성공한 리스쩡, 중국 혁명의 자금줄
| Opinion |
2010-05-09
1907년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리스쩡(李石曾)은 콩(豆)에 관한 연구서적을 프랑스어로 출간해 중국 두부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소개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자 파리 교외에 두부공장을 세우고 몽파르나스에 중국음식점 중화반점(中華飯店)을 열었다. 신문에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두부의>>
소설가 루스어, 100년 전 상하이 엑스포 예언
| Opinion |
2010-05-02
중국은 세계박람회(엑스포)와 인연이 많았다. 1851년 5월 1일 런던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당시 템스 강변에는 영국 상인들이 홍콩에서 만든 중국 범선 치잉(耆英)호가 정박해 있었다.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치잉호를 찾았다. 배 안에는 영>>
혁명가에서 매국노 된 왕징웨이, 암살 위기 7번 모면
| Opinion |
2010-04-25
일본은 군사와 정치를 병행해 중국을 침략했다. 점령지구마다 친일 정객들 중에서 일본의 대리인이 될 만한 사람을 선정해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후 중국은행 총재와 재정부장을 역임한 왕커민(王克敏)을 내세워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난징에는 몰락한 정객 량훙즈>>
반우파 운동의 狂風에 맞선 우쭈광·신펑샤 부부
| Opinion |
2010-04-18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정변이 발생했다. 주동은 생명과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다 요절한 민족시인을 추앙하던 지식인 조직 ‘페퇴피 서클’이었다. 공산당에서 축출당한 전임 총리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의 복벽”이라고 단정했다. 무력을 동원해>>

장징궈를 ‘내 동생’이라고 불렀던 랴오청즈
| Opinion |
2010-04-11
1979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수교했다. 대만 문제에 여유가 생겼다. 무력통일 대신 화합과 대화를 통한 국공 문제 해결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불(不)담판, 불접촉, 불타협’의 3불(三不) 정책을 고수했다. 82년 7월 25일 전인대 >>
중국인이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매력남’ 왕스샹
| Opinion |
2010-04-04
우쭈광(吳組光)의 집 건너편에 쓰촨(四川)요리 집이 문을 열었다. 숙친왕(肅親王)의 막내딸이 주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이라면 친언니는 한간(漢奸)으로 총살당한 동양의 마타하리 진비후이(金璧輝), 일본명 가와지마 요시코(千島芳子)였다. 왕녀(王女)가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
극작가 우쭈광 집에선 저우언라이도 문화비평가
| Opinion |
2010-03-28
이류당(二流堂)이라는 말은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편했다. 기억하기도 좋았다. 전쟁 시절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충칭에 상주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린뱌오(林彪) 등도 자주 >>
남양화교 출신 탕위, 당대의 지식인 후원한 ‘맹상군’
| Opinion |
2010-03-21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의 일류 문화인들 거의가 전시수도 충칭(重慶)을 향했다. 공산당 근거지 옌안은 주로 젊은 축들이 줄을 이었다. 충칭은 도시 전체가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입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먹고 자는 문제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들 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구>>
하루 2000자씩 40년간 ‘셰익스피어’ 번역한 량스치우
| Opinion |
2010-03-14
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초·중·고교 교과서에는 루쉰(魯迅)의 문장이 5편씩 실렸다. 5년 전부터 3편으로 줄어들더니 올해부터는 자본가의 부활과 화해 사회의 건설 때문인지 아예 없애버렸다. 대신 ‘반동문인’ 취급을 받던 영문학자 량스치우(梁實秋)의 글이 자리를 차지했다. >>
杜氏사당 낙성식에 시대의 거물들 총출동
| Opinion |
2010-03-07
2년 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대형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노부인이 상하이를 찾았다. 두웨셩의 딸이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부친은 황진룽·장샤오린과 함께 상하이의 3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황과 장의 후예들과 연락이 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노부인은 >>
과일장수로 연명하다 ‘상하이 실세’로 떠올라
| Opinion |
2010-02-28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상하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었다. 마오쩌둥, 장제스, 장쉐량, 쑨원, 왕징웨이, 장칭 등 희대의 수퍼스타들도 이 도시에서만은 솜씨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상하이는 청방(靑幇)의 천하였다. 중국의 비밀결사는 연원을 헤아리기 불가능할 정>>
‘상하이 황제’ 두웨셩이 평생 사랑한 멍샤오둥
| Opinion |
2010-02-21
1917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맞춰 종합공연장 ‘대세계(大世界)’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문을 열었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 몰려들었지만 제대로 된 경극 배우들은 2년이 지나도 대세계의 무대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설립자 황추주(黃楚九)는 직접 경극 공연장들을 누비>>
"노동자들은 하늘 꼭대기에, 농민은 땅바닥에"
| Opinion |
2010-02-14
1946년 1월 국·공 양당이 정전협정을 체결하자 량수밍은 8년 만에 다시 옌안을 찾았다. 마오쩌둥은 영수급 10여 명을 황급히 모아 량의 말을 경청하게 했다. 량은 내전 반대를 주장하며 입에 침이 마르는 줄도 몰랐다. 이들이 내전에 승리해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리라고는 꿈에도 >>
량수밍과 마오쩌둥
| Opinion |
2010-02-07
중국의학원 설립자 위안훙서우(袁鴻壽)는 101세 생일에 제자들 앞에서 한마디 했다.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좌우했지만 영향력은 한계가 있다. 동시대 인물로 영원히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

량스이, 최대 파벌 교통계 등에 업고 나라 좌지우지
| Opinion |
2010-01-31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강타한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은 봉건왕조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중앙의 권위에 허점이 보이자 각양각색의 정치집단들이 출현했다. 정당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 존재했던 붕당(朋黨)과도 성격이 판이했다. 청(淸)황실은 이들에게 핵심 >>
량스이, 최대 파벌 교통계 등에 업고 나라 좌지우지
| Opinion |
2010-01-31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강타한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은 봉건왕조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중앙의 권위에 허점이 보이자 각양각색의 정치집단들이 출현했다. 정당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 존재했던 붕당(朋黨)과도 성격이 판이했다. 청(淸)황실은 이들에게 핵심 >>
중립 지키던 중국, 연합국 도왔지만 돌아온 건 배신
| Opinion |
2010-01-24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제국주의의 고통을 맛보았던 중국인들은 “열강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며 재미있어 했다.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쟁 같았다. 위안스카이 정부는 하늘이 준 기회라>>
조선의용대 ‘일본군벌 타도’ 깃발 들고 항일 전쟁 시작
| Opinion |
2010-01-17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일본군은 베이징 교외 완핑(宛平)현 노구교(蘆溝橋)에 주둔한 중국군에 선공을 퍼부었다. 8월 13일에는 상하이를 공격해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에 나섰다. 중국인들에겐 8년에 걸친 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개월 전 합작을 선언하고 내전을 종식했던>>
조선의용군 정예 1500명, 조국에서 쫓겨나다
| Opinion |
2010-01-10
20세기 초 한국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했다. “아예 이 땅을 떠나자”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강 하나만 건너면 중국이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었다. 엉뚱한 행동으로 모두를 욕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당당하게 중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장식해 아>>
취임식장의 장제스, 경쟁자 리쭝런을 바보로 만들다
| Opinion |
2010-01-03
1965년 7월 20일 오전 10시40분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태우고 상하이를 떠난 전용기가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착륙했다. 전인대·전국정협·국방위원회·민주당파·전국공상연합 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이들은 저우언라이보다 20분 늦게 상하이를 이륙한 비>>
루샤오만과 뜨거웠던 시인, 링수화에게 ‘비밀’을 털어놓다
| Opinion |
2009-12-27
1924년 5월 29일 타고르는 쉬즈모와 함께 상하이를 떠났다. 상황을 파악한 량치차오는 량스청과 린후이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아들과 며느릿감, 쉬즈모 모두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3개월 후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린창민이 흉탄을 맞고 숨졌을 때>>
타고르와 그림으로 대화한 ‘당돌한 才女’ 링수화
| Opinion |
2009-12-20
타고르가 베이징에 도착한 날부터 량치차오와 린창민은 린후이인에게도 통역을 부탁했다. 린후이인은 량치차오가 예전부터 점찍어 놓은 며느릿감이었다. 타고르가 가는 곳에는 영락없이 쉬즈모와 함께 린후이인이 있었다. ‘삼우도(三友圖)’라는 제목을 붙인 세 사람의 모습이 연일 신문에 실렸다>>
혁명이 움트던 중국, 타고르의 비폭력은 환영받지 못했다
| Opinion |
2009-12-13
1920년 북양정부 재정부장을 사직한 량치차오(梁啓超)와 전 외교부장 린창민(林長民) 등이 강학사(講學社)라는 학술 단체를 조직했다. 듀이·러셀·타고르·드리슈 등을 초청해 순회강연을 열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4대 명철(四大明哲)’이라고 불렀다. 특히 타고르는 1913년 노벨 >>
장선푸 “전쟁에 필요한 것은 충성이 아니라 문화다”
| Opinion |
2009-12-06
1935년 12월 9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발생했다. 공산당 탈당 후 10년간 칭화대학 연구실과 집을 오가던 장선푸는 펑쩐, 야오이린 등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지휘했다. 10여 년간 부부관계를 유지해 오던 류칭양도 적극 참여했지만 장은 베이징여자사>>

<141> 잊혀졌던 사상가
| Opinion |
2009-11-29
유럽에 공산당 소조를 설립한 장선푸는 1923년 말 소련을 경유해 귀국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에서 군사 시찰단으로 와 있던 장제스와 안면을 텄다. 서로 호감을 느꼈는지 자주 어울렸다.리다자오의 소개로 광저우의 광둥대학 철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정치부 >>
저우언라이·주더를 가르치고 입당시킨 장선푸
| Opinion |
2009-11-22
1962년 3월 광둥성 광저우의 한 회의에 참석한 저우언라이는 “나는 장선푸(張申府)와 류칭양(劉淸揚)에게 감사함을 잊은 적이 없다”며 장선푸를 회상했다. 총리의 입에서 14년간 금기시되었던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자 참석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우는 계속했다. “그>>
“총소리가 콩 볶듯 해도, 꽃은 피고 또 아름다웠다”
| Opinion |
2009-11-15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전면전을 피했다. 동북을 송두리째 일본군에 내줬다. 항일 분위기가 팽배했다.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이듬해 1월 일본군은 상하이를 공격했다. 상하이사변은 왕런메이의 결혼과 함께 니에얼>>
國歌 작곡한 니에얼, 한국인 ‘영화 황제’에게 연인을 뺏기다
| Opinion |
2009-11-08
중화인민공화국 국가(國歌)의 작곡자 니에얼(<8076>耳)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의 이름 없는 한약방 집 막내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청력이 뛰어났다. 서우신(守信)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다들 니에얼이라고 불렀다. 부친은 근엄한 것 외에는 말주변도 의술도 신통치 못했다. >>
조선 혁명가들, 중국 북벌에서 독립을 꿈꾸다
| Opinion |
2009-11-01
중국 역사에는 총 30차례의 북벌(北伐)이 등장한다. 모두가 명분은 그럴 듯했지만 투기성이 강한 군사행동이었다. 성공했다 하는 날에는 천하를 한 손에 휘어 잡을 수 있었지만 결과는 한결같이 정반대였다. 제갈량(諸葛亮)은 다섯 차례 북벌을 시도하느라 골병이 들었고, 강유(姜維)는 >>
77세 노구의 이홍장, 서태후의 목숨을 구하다
| Opinion |
2009-10-25
기독교는 중국인의 종교가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가장 중요시했다. 사대부들은 ‘만세(萬世)의 사표(師表)’라고 존경하는 공자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 7세기 초 천주교와 비슷한 종교인 경교(景敎)가 중국에 들어와 200년을 꾸역꾸역 버텼지만 당(唐) 왕조의 배불 >>
루쉰, 사망 22개월 만에 20권짜리 '전집'을 얻다
| Opinion |
2009-10-18
루쉰(魯迅)은 생전에 전집(全集)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손수 목록을 작성하고 분류까지 했지만 출간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국민당 정권은 출판에 대한 규제가 엄격했다. 특히 개인의 전집은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부는 '루쉰전집'의 출판에 대해 가타부타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장>>
新중국에 맞장구 쳐준 ‘팔방미인’ 황제, 푸이
| Opinion |
2009-10-11
1959년 9월 중공 중앙위원회 주석 마오쩌둥은 신중국 건국 10주년을 앞두고 전쟁범죄자와 반혁명범에 대한 특사 요청안을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건의했다. 청(淸)의 마지막 황제이며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溥儀)도 10년 만에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서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감옥은 >>
지도부 입주 앞서 1000명이 5개월간 대청소
| Opinion |
2009-10-04
베이징을 대표하는 맥주의 상호를 1200여 년 전에 만들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에 ‘서울 경(京)자’를 붙인 최초의 인물은 돌궐족의 후예 사사명(史思明)이었다. 당(唐) 현종(玄宗) 시절인 755년 안록산(安祿山)이 조정에 반기를 들자 그의 추천 덕에 병마사(兵馬使) 자>>
마오 “자산계급이 만든 삼권분립, 염두 두지 마라”
| Opinion |
2009-09-27
1949년 6월 15일 신(新)정치협상회의 구성을 위한 주비회의가 베이핑에서 열렸다. 중국공산당과 각 민주당파, 무소속, 사회단체 등 23개 단위를 대표해 134명이 참석했다. 6개 소조를 둬 신정협에 참가할 단위와 대표 명단을 작성하고 ‘공동강령’ 초안과 신중국의 국기, 국휘(>>

국민당 사령관 무장해제시킨 공산당원 딸
| Opinion |
2009-09-20
베이핑(北平:현재의 베이징)과 톈진(天津) 지역 전투는 랴오선(遼瀋)·화이하이(淮海)와 함께 국공전쟁의 3대 전역(戰役)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의 국민당군 총사령관은 항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푸쭤이(傅作義)였다. 그의 병력 50만이 베이핑과 톈진을 포함한 사방 500㎞에 포진해 >>
공산당, 도시를 내주고 농민의 마음을 얻다
| Opinion |
2009-09-13
1945년 8월 9일 소·만국경을 넘어 동북에 진입한 소련 홍군은 일본 관동군에 총공세를 퍼부어 15년간 일제 치하에 있던 동북3성을 해방시켰다. 대도시에 장제스와 함께 레닌·스탈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렸다. 아무리 해방군이라도 소련 홍군은 남의 나라 군대였다. 중국 영토에서 나>>
아버지 원수 갚기 위해 스스로 자객이 된 여인
| Opinion |
2009-09-06
1925년 가을 안후이(安徽)·장쑤(江蘇)·저장(浙江)성 등을 장악한 대(大)군벌 쑨촨팡(孫傳芳)은 동북 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불만을 품은 군벌들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두 세력은 안후이성 쟁탈을 위해 일전을 벌였다. 동북 계열인 장쭝창(張宗昌)은 쑨에게 대항할 인물로 스충>>
신문화 운동의 기수, 문맹 아내를 섬기다
| Opinion |
2009-08-30
후스의 부인 장둥슈(江冬秀)는 전족을 한 문맹이었지만 친정은 진사를 줄줄이 배출한 안후이의 명문망족이었다. 후스·장제스·쑹메이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집안이 번듯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후스와의 인연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14세 때 하인들 거느리고 장보러 나갔던 모친이 평>>
장제스, 인상 찌푸리면서도 후스의 비판 견뎌
| Opinion |
2009-08-23
1933년 초, 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은 산하이(山海)관을 점령한 후 러허(熱河)성을 향했다. 장제스는 내버려뒀다.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일본과의 무력충돌은 피하자는 주의였다. 후스는 “성 하나를 다시 일본군에게 내어 준다면 책임을 면키 힘들다”는 전보를 장에게 쳤다.>>
권력과 문학, 둘은 만나기 전부터 통했다
| Opinion |
2009-08-16
후스(胡適)는 중국의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지만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대놓고 말들은 못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 몰라라 하는 얌체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장제스(蔣介石)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왕래가 빈번했다. 최고 통치>>
세 차례 웃음으로 며느릿감 점찍은 린뱌오
| Opinion |
2009-08-09
장닝을 찾아낸 사람은 총참모부 부(副)총장 추후이줘의 부인 후민(胡敏)이었다. 후는 한때 장쑤(江蘇)성의 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예췬은 선비(選妃)공작이 지진부진하자 “하는 것들이 뭐 이래. 장쑤성엔 미인이 널렸다던데”라며 후민에게 투덜댔다. 후는 불안했다. 난징(南京)에 >>
처녀 1억 명서 골라라, 린뱌오 며느리 간택 작전
| Opinion |
2009-08-02
1969년 4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는 문화혁명과 린뱌오(林彪)의 지위를 합법화시키는 잔치였다.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당장(黨章)에 명기했다. 당의 유일한 부주석이며 국방부장도 겸했다. 총참모부와 후근부, 공군과 해군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부인 예췬(葉群)>>
국민당 심장부서 활약한 마오의 눈, 우스
| Opinion |
2009-07-26
우스(吳石)는 16세 되는 해에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인들의 천하가 분명했다. 학생군으로 지원했다. 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자 일본 유학을 보내줬다. 일본 포병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공인된 일본통이었다. 1936년 2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항일전쟁을>>
지셴린 “국가 찬양만이 아니라 불만 표출도 애국”
| Opinion |
2009-07-19
1920∼30년대, 대학 졸업은 곧 실업이었다. 무슨 수를 쓰건 밥그릇을 꿰차야 했다. 유학생들은 사정이 달랐다. 귀국과 동시에 몸값이 100배로 치솟았다. 전국에 유학병 환자들이 많았다. 지셴린(季羨林)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도 당연히 유학열에 시달렸다. 증세가 심했다”고 훗>>

양융타이 침 튀는 열변 속, 장제스는 제갈량을 봤다
| Opinion |
2009-07-12
양융타이(楊永泰)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난세이다 보니 쓸모가 없었다. 서구 정치사상에도 한때 심취했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리투성이였다. 쑨원을 지지한 적도 있었다. 보면 볼수록 실속 없는 사람이었다. 국회의원도 해보고, 군벌들 덕에 성장(省長) 노릇도 해봤지만 결국은 쫓>>
궁펑의 외교 “左右 구별은 하되 가리지는 마라”
| Opinion |
2009-07-05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한반도와 월남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48년 동서 냉전이 시작된 이후 23개국의 대표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대형 국제회의였다. 20세기의 전설적 인물들이 각국을 대표해 총출동했다. 공산정권 수립 후 국제무대에 >>
궁펑의 재혼, 마오쩌둥 “아름다운 인연” 축시
| Opinion |
2009-06-28
1939년 3월 독일에 유학 중이던 차오관화(喬冠華)는 항일전에 참전하기 위해 귀국했다.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광저우(廣州)에 주둔하던 제7전구사령부의 참모로 초빙을 받았다. 서구의 군사정보와 국제관계를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렸지만 읽는 사람이 없다 보니 칭찬이나 질책 >>
세계를 매료시킨 ‘중공의 청춘’ 궁펑
| Opinion |
2009-06-21
궁웨이항(<9F94>維航)은 부모를 잘 만났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딸들을 세인트 마리아 여자중학에 입학시켰다. 세인트 마리아 여자중학은 상하이의 명문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학비가 비쌌다. 궁은 기숙사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 밥 먹는 시>>
가슴에 대나무를 품은 언론인, 대륙 속으로 사라지다
| Opinion |
2009-06-14
1948년 4월 하순 허베이(河北)성 구석에 머무르고 있던 중공 중앙위원회 앞으로 “5월 1일이 곧 다가온다. 방귀를 갈길 엉덩이가 없다. 빨리 엉덩이를 보내라”는 전보가 한 통 날아들었다. 국제 노동절을 앞두고 신화사 사장 랴오청즈(寥承志)가 보낸 전문이었다. “말할거리가 있어>>
정파 초월한 잡지 하나로 ‘지식인의 주말’ 사로잡다
| Opinion |
2009-06-07
1945년 8월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용감한 사람들은 죽고 도망 잘 다닌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나라가 크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납작 엎드려 있던 지식인들은 한동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이들은 무책>>
마오쩌둥이 유일하게 관을 멘 동지, 장하오.
| Opinion |
2009-05-31
1942년은 중일전쟁이 가장 치열할 때였다. 같은 해 3월 9일 중국공산당이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정한 이래 가장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 주인공은 장하오(張浩)였다. 장하오와 마오쩌둥은 1921년 후난성 창사(長沙)의 방직공장 노동자 숙소에서 인연을 맺었다. 2년 후 >>
“왕자의 형벌도 서민처럼” 손자 구명 안 한 주더의 아내
| Opinion |
2009-05-24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은 모든 분야에 변화를 초래했다. 범죄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흔치 않았던 강도·살인·절도·총기 탈취 등 강력범죄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도시가 심했다. 상하이에서는 불량배들이 백주에 경찰들을 습격하고 부녀자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고 베이징>>
직접 인분 뒤져 ‘굶는 농촌’ 밝혀낸 국가주석, 류사오치
| Opinion |
2009-05-17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겸 국방위원회 주석 류사오치(劉少奇)는 현장조사를 중요시 여겼다. 석연치 않은 사안이 발생하면 직접 현장을 찾아 의문이 풀릴 때까지 조사를 멈추지 않았다. 현지 관원들이 길바닥에 나와서 영접하거나 배웅하지 못하게 했고, 밥 먹는 자리를 만들어 훈시 따위를 >>
소년들 ‘참새의 추억’이 10년 뒤 홍위병 완장으로
| Opinion |
2009-05-10
1955년 한 농민이 “참새들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는 탄원서를 중앙에 보냈다. 농업부는 동물 연구의 권위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참새의 식성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한 적이 없다. 박멸이 필요한지 감히 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나 며칠 후 마오쩌둥>>

중국에 새 시대정신을 전한 프로메테우스, 陳獨秀
| Opinion |
2009-05-03
1915년 9월 ‘신청년(新靑年)’이라는 잡지가 상하이에서 첫선을 보였다. 일본에서 갓 돌아온 36세의 천두슈(陳獨秀)가 주편이었다. 신청년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 국민성의 폐단, 전통에 대한 체계적 비판, 개성의 해방, 교육의 목적 등에 대한 토론의 공>>
棺을 짜던 목수, 구시대의 棺을 짜다
| Opinion |
2009-04-26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이래 수많은 풍파가 있었다. 집권과 동시에 시작된 권력투쟁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의심벽이 가장 큰 이유였다. 건국의 원훈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곤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두 번 실각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아슬아슬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군의 아>>
최고 권력자가 딸에게 “무슨 일 있어도 연애결혼해라”
| Opinion |
2009-04-19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리민(李敏)과 리너(李訥)라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리민은 마오와 허쯔전(賀子珍)과의 사이에 태어났다. 리너의 생모는 장칭(江靑)이었다. 리민은 1936년 겨울 산시(陝西)성 바오안(保安)현의 동굴에서 태어났다. 중국 공산당 중앙이 옌안(延安)에 정>>
청렴 부르짖던 ‘대만의 아들’이 ‘대만의 치욕’으로
| Opinion |
2009-04-12
소년 천수이볜(陳水扁)의 점심은 항상 고구마였다. 친구들이 볼까 무서워 두 팔로 가리고 얼굴을 파묻은 채 먹었다.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빈농이었다. 천의 모친은 문맹이었지만 현명한 여인이었다. 돈을 빌린 날과 갚을 날을 벽에 분필로 적어 놓았다. 갚아야 할 날이 다가오면 또다시>>
色에 빠진 雜技의 달인 … 사형장서도 ‘사진 잘 찍어달라’
| Opinion |
2009-04-05
1927년 북벌에 성공한 국민당은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희망과 욕망을 분간 못 하는 국민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지방도시에 당 중앙위원이나 각료들이 나타나면 온 도시가 들썩거렸다. 제1의 도시인 상하이(上海)도 마찬가지였다. 왕징웨이(汪精衛)의 심복이던 추>>
부패한 관료자본의 상징, 죽은 뒤 ‘청렴’ 인정받아
| Opinion |
2009-03-29
1971년 4월 쑹쯔원(宋子文)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계 최고의 부호가 사망했다며 유산이 30억 달러에서 5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예금을 한꺼번에 인출하면 월가의 금융시장이 40여 분간 마비된다고들 했다. 쑹쯔원의 부친은 성경을 쑤저우(蘇>>
살아선 가장 성공한 모략가, 죽어선 혁명열사릉서 쫓겨나
| Opinion |
2009-03-22
1980년 가을, 문화혁명 시절 4인방과 그 추종자들이 절취해 간 문물들이 외부에 공개됐다. 5년 전 세상을 떠난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전국문혁소조 고문이었던 캉성(康生)의 것들이 양과 질에서 단연 1위였다. 천보다(陳伯達),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이 그 뒤를>>
燕京大 설립한 미국인, 추방 60년 만에 항저우에 묻히다
| Opinion |
2009-03-15
쓰투레이덩(司徒雷登·1876∼1962)은 미국인 존 레이턴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의 중국 이름이다.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중국 친구들과 골목에서 뒹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모도 중국인이었다. 순수한 미국인이었지만 할 줄 >>
‘신문도 기업’이라며 新民報 키운 여걸
| Opinion |
2009-03-08
덩지싱(鄧季惺·1907∼95)은 중국 언론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이다. 48년 7월 국민당에 의해 무기한 정간 처분을 받을 때까지 난징·충칭·청두·상하이·베이징 등 5개 도시에서 8종의 신문을 발행한 ‘신민보(新民報)’ 그룹의 실질적인 설립자이며 현대화된 신문 경영>>
쑨원도 장제스도 혀 내두른 ‘퍼스트레이디의 강짜’
| Opinion |
2009-03-01
말레이시아 페낭에 천(陳)씨 성을 가진 화교 거상이 있었다. 혁명을 지지했다. 쑨원(孫文)에게 돈을 송금하면 쑨은 일본에서 발행하던 동맹회(同盟會) 기관지 민보(民報)를 보내주곤 했다. 어린 딸 비쥔(璧君)은 민보를 읽으며 모국어를 깨우쳤다. 왕징웨이(汪精衛)의 글을 좋아했>>

주유를 연상시킨 35세 ‘공화제 영웅’의 요절
| Opinion |
2009-02-22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황제에 즉위하려 하자 전국이 요동을 쳤다. 차이어(蔡鍔)도 군주제 복귀에 찬성했다는 소문이 돌자 윈난의 군인들 사이에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쌀값이 폭등하고 뭐든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차이어가 쿤밍에 돌아오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차이는 윈난 전>>
황제 꿈꾸는 총통, 공화제 꿈꾸는 호랑이를 풀어주다
| Opinion |
2009-02-15
1913년 가을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제2차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쑨은 또다시 망명했다. 국회는 정식으로 위안을 대총통에 선출했다. 얕잡아 보아도 좋을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 의원들이 속출했다. 위안은 “민주와 자유를 남용하는 유치한 수준의 집단”이라며 국회를 해산시키고>>
쑨원을 ‘暴亂 세력’으로 규정한 30대 장군
| Opinion |
2009-02-08
차이어(蔡鍔)는 16세 때 2원을 들고 고향을 떠났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무일푼이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1000원을 빌려 일본 유학을 떠났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년이 어떻게 북양신군을 지휘하던 위안스카이를 만났는지는 추측조차 불가능하다. 학비로 300원을 지출했고 나>>
‘10년 대란’ 방아쇠 당긴 45세 여인
| Opinion |
2009-02-01
1966년 5월 16일 ‘중공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문화혁명의 기본강령을 발표하기 이틀 전 베이징대에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문혁 진행 상황을 파악하러 왔다고 통보했다. 집에서 점심을 먹던 당 서기 겸 교장인 루핑(陸平)은 밥그릇을 내던지고 달려갔다. 초로의 부인이 버티고 앉아>>
‘버마王’ 망언에 장제스 격노 … 주력부대 대만 철수
| Opinion |
2009-01-25
윈난(雲南)성 내에 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장제스의 희망이었다. 리미는 무슨 수를 쓰건 병력을 이끌고 윈난에 진입해야 했다. 매일 밤 소수민족의 족장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장군 계급장과 권총을 한 정씩 선물했다. 국민당 군적에도 없는 장군과 장교들이 금삼각 지역에 무더기로>>
병력 4배 많은 버마군에 大勝 … 대만 3배 땅 지배자로
| Opinion |
2009-01-18
당시 버마는 독립된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다. 민족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무장한 중국의 패잔병이 떼거지로 들어와 있는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1만2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멍싸(孟薩)에 지휘부를 설치한 후 리궈후이(李國輝)에게 “10일 이내에 버마를 떠나라”는 최후 통>>
국공내전 뒤 ‘잊혀진 군대’ … 아편 장사로 귀국 꿈
| Opinion |
2009-01-11
1949년 봄부터 국공(國共) 양군은 전력의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승세를 잡은 중국인민해방군은 전군을 4개의 야전군으로 재편해 국민정부군에 총공세를 퍼부었다. 11월을 전후해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鄧小平)이 지휘하는 제2야전군은 구이저우·광시·쓰촨을 장악한 뒤 윈난(雲>>
大漢奸으로 처벌받고도 古典번역의 재주를 펼치다
| Opinion |
2009-01-04
1937년 7월 베이징이 일본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각 대학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형인 루쉰(魯迅)과 함께 중국 문화와 문학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저우쭤런(周作人)은 집안에서 번역이나 하겠다며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다. 일상용품을 잔뜩 구입해 쌓아놓고>>
업자 뇌물과 세도가 방해 뚫고 4년 만에 징장철도 완공
| Opinion |
2008-12-28
민족철도 건설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길을 내고, 쇳덩어리를 얹고, 침목을 깔고, 터널을 뚫고, 각종 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눈먼 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잔톈유는 자금을 농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온갖 유혹에 시달렸다. 잔톈유가 화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자 귀한 화목을>>
중국 전통 공법으로 ‘민족철도’ 뚫은 유학파 엔지니어
| Opinion |
2008-12-21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패했다. 대놓고 중국을 깔보기 시작한 일본과 서구 열강은 철도 건설과 경영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중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를 헤이룽(黑龍)·지린(吉林) 두 성(省)까지 연결한 후 지선을 다롄(大連)으로 확장했고, 영국은 광저>>

이홍장, 서태후 호기심 위에 ‘철도시대’를 놓다
| Opinion |
2008-12-14
1863년 상하이에 와 있던 서양 상인들이 장쑤순무(江蘇巡撫) 이홍장(李鴻章)에게 쑤저우(蘇州)에서 상하이까지 철도를 놓자고 제의했다. 그는 외국인이 내지의 영토를 사용하는 것은 국가에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했다. 철도 연변에 조상의 분묘가 있는 지주들의 반발을 감당할 수 없다며>>
‘帝王의 기상’ 칭찬에 취해 마오쩌둥에게 버림받다
| Opinion |
2008-12-07
1949년 8월 21일부터 6일간 각계 대표 303명으로 구성된 동북인민대표회의가 선양(瀋陽)에서 열렸다. 인민정부위원회 구성에 합의해 41명을 위원으로 선출하고 폐막했다. 이들은 다음날 열린 위원회 1차 회의에서 가오강(高崗)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만장일치였다. 부주석은 리푸춘>>
국민정부 무능 드러낸 상하이 ‘댄서 시위’
| Opinion |
2008-11-30
1948년 1월 말 국민정부는 ‘댄스 금지령’을 발표했다. 상하이(上海) 시장 우궈전(吳國楨)은 행정원에 재고를 요청했다. 행정원장도 공감했지만 이미 법령으로 반포한 후였다. 상하이의 댄스홀 주인들은 일부 업소를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추첨을 통해 문 닫을 업소를 선정한>>
77일 만에 끝난 4인방 재판 … 마오쩌둥의 착오 인정 계기
| Opinion |
2008-11-23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27일 만인 1976년 10월 6일 화궈펑(華國鋒)·예젠잉(葉劍英)·왕둥싱(王東興) 등은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을 교묘한 방법으로 유인해 체포했다. 장칭(江靑)도 마찬가지였다. 10년간 전 중국을 광란에 휩싸이게 했던 4인방은>>
항일운동 자금 늘 스스로 마련 … 장제스가 보낸 뭉칫돈도 거부
| Opinion |
2008-11-16
1925년 8월 20일 허샹닝은 랴오중카이와 함께 국민당 중앙집행위 회의에 참석했다. 중앙당부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5발의 총성이 울렸다. 랴오중카이는 “국가와 당을 위해서라면 누가 무슨 반대를 하건 두렵지 않았다. 나를 때리고 죽인다 해도 내 몸이 아깝지 않다”라는 유언을 남기>>
여섯 살에 전족 거부 … 혁명가 남편엔 “죽음 두려워 말라”
| Opinion |
2008-11-09
쑨원(孫文)의 오른팔이었던 제1세대 혁명가 랴오중카이(廖仲愷: 1877∼1925)는 샌프란시스코의 부유한 화교 가정 출신이었다. 부친은 광둥(廣東) 커자(客家) 출신으로 두들겨 패며 고전을 외우게 하는 중국식 전통교육의 신봉자였다. 샌프란시스코 한복판에 마음에 드는 선생이 있을 >>
중국의 산하를 화폭에 … 69년간 ‘한 우물’ 판 거장
| Opinion |
2008-11-02
둥서우핑(董壽平:1904∼1997)은 베이징동방대학 경제학과 졸업 후 군벌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상인으로 변장하고 베이징을 탈출해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산시(山西)성 훙둥(洪洞)현의 서향세가 출신이었다. 역대 명인들의 서화와 도서 문물 10여만 점이 집안에 있었다.>>
장징궈 사망 뒤 대만 떠나 … 91세에 얻은 ‘평민의 자유’
| Opinion |
2008-10-26
항일전쟁에서 중국은 승리했다. 장제스를 압박해 거국적 항일운동을 가능케 했던 장쉐량은 여전히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각 당파와 동북문화협회·동북정치건설협회 등이 그의 자유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감금한 것은 그를 아끼기 때문”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
장제스 父子와 따로따로 의형제 … 항일전쟁 참전은 좌절
| Opinion |
2008-10-19
1937년 1월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은 90년 6월 1일까지 계속됐다. 53년6개월간 17곳을 옮겨 다녔다. 연금 장소는 한결같이 깊은 산속이었다. 50여 정의 권총과 박격포, 자동소총,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한 특무와 헌병들이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산책과 운동은 가능했지만 특별한 >>
천하를 3分했던 장쉐량·장제스·마오쩌둥
| Opinion |
2008-10-12
시안사변(1936)과 항일전쟁(1937), 항일전쟁의 승리(1945)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은 하나로 연결된 사건들이다. 출발점은 시안사변이었다. 발생에서 수습까지 2주가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진동은 중국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한때 천하를 삼분했던 장쉐량(張學良), >>

‘사람 말이 두렵다’며 자살한 상하이 톱스타
| Opinion |
2008-10-05
1935년 3월 8일 부녀절 새벽, 중국 무성영화의 톱스타 완링위(阮玲玉)가 25년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신문마다 호외를 발행했다. 평소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미모에 경탄하던 상하이인들은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 신보(申報)는 “나는 세상을 떠난다. 사람들은 내가 >>
漢語병음 표기법 만든 경제학자 … 90세 넘어 책 10권 저술
| Opinion |
2008-09-28
2007년 11월 1일 제5회 우위장장(吳玉章奬) 수여식이 열렸다. 언어문자학자 저우유광(周有光)이 5년에 한 번씩 수여하는 사회과학 부문 특등상을 받았다. 20년 전 궈모뤄(郭沫若)가 처음 받은 이래 다섯 번째 수상자였다. 저우는 102년 전 두부와 과거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
외로운 鶴이 되고 싶었던 ‘전쟁의 천재’
| Opinion |
2008-09-21
린위룽(林育容)은 16세 때 한 살 위인 동네 여자아이에게 노골적인 정서(情書)를 보냈다. 말주변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모욕적인 답장을 받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형들을 따라 광저우에 왔다.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원래의 이름으>>
가벼운 ‘명품’은 타이베이, 무거운 ‘국보’는 베이징에
| Opinion |
2008-09-14
수십 년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은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였다. 변두리 표구사 한번 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한 바퀴 돌고 나서 “중국의 진짜 보물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곤 했다. 중국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실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
18년간 피란 다닌 1만3491상자의 國寶들
| Opinion |
2008-09-07
1925년 10월 10일 오후 2시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선포식이 베이징 고궁의 건청문 광장에서 열렸다. 첫날 1만여 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휴일인 까닭도 있었지만 개관 기념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열된 유물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양손에 든 음식물을 번갈>>
80년 회화 인생 “세속 안 따르려니 정말 힘들었다”
| Opinion |
2008-08-31
1919년 중국 최초의 미술전람회가 쑤저우(蘇州)에서 열렸다. 전국에 산재한 화가들의 작품 30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엄청난 규모였다. 젊은 서양화가 옌원량(顔文樑)의 기획이었다. 관람객들은 중국화 외에 200여 점의 서양화를 볼 수 있었다. 쑤저우에 서양화가 유행하기 시작했>>
중국 현대사 영웅들 농락한 ‘무서운 천재’
| Opinion |
2008-08-24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오척 단구였다. 다리가 짧고 상체는 통통했다. 항상 팔자로 걸었다. 서 있을 때나 걸을 때 모두 두꺼비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표정이 풍부하고 몸놀림이 민첩했다. 툭하면 화를 냈지만 생각은 합리적이었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을 굳게 >>
배짱과 기개로 ‘마지막 황제’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다
| Opinion |
2008-08-17
1924년 10월 21일 서북군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은 출정 중이던 22여단장 루중린(鹿鍾麟)에게 회군을 지시했다. 루중린은 교외에서 베이징경비사령관과 회합했다. 다음날 밤 성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루중린은 모두가 꿈속을 헤매는 시간에 총 한 방 쏘지 않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왼손에 찻잔 20개 … ‘청두 茶박사’ 올림픽선수촌에 등장
| Opinion |
2008-08-10
기원이 불분명할 정도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차를 마셔 왔다. 그러나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극소수의 기호품이었다. 당대(唐代)에 와서야 생활문화의 한 축을 차지할 수 있었다. 혼례 때 차를 신랑집에 예물로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급 소비품이었다. 당 태종도 딸을 출가시>>
간첩사건 연루, 10년 복역한 자유주의자 레이전
| Opinion |
2008-08-03
1895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한 학자가 자유주의(自由主義)라는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중국과 서구의 차이는 자유의 유무에 있다.” “자유는 서구 부강의 근본이다.” “부강해지려면 자유주의를 신봉해야 한다.” 자유에 관한 말들이 난무했다. 서구의 강권에 대처하려면 그들이 강>>

民國 최고의 미남이 ‘漢奸의 길’을 걷다
| Opinion |
2008-07-27
왕징웨이(汪精衛)는 가는 곳마다 미남 소리를 달고 다녔다. 그것도 그냥 미남이 아닌 민국(民國) 최고의 미남이었다. 장쉐량(張學良)·후스(胡適)·저우언라이(周恩來)·추안핑(儲安平)·왕정팅(王正廷) 등도 미남 소리를 들었지만 왕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1918년 가을 시인 쉬즈>>
대만 2·28 무장투쟁 주도 … 은행원 월급 200배 현상금
| Opinion |
2008-07-20
1928년 4월 15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 사진관 2층에서 대만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참가자 9명 중 7명이 대만인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중공 대표와 조선인 여운형이었다. 이들은 7개월 전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셰쉐훙을 회의 주석으로 추대했다. 5명의 >>
“첩 출신이…” 수모 딛고 모스크바 유학길 올라
| Opinion |
2008-07-13
1921년 일본에서 귀국한 셰쉐훙은 대만문화협회에 가입했다. 자산가와 중산층 출신 지식인들이 결성한 대만 최초의 정치결사였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후예들이 아직도 간혹 사용하는 계몽·의식·각성 등의 용어가 강령을 도배하다시피 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그나마도 >>
바나나 팔던 6세 소녀 ‘무장한 여인’되다
| Opinion |
2008-07-06
대만처럼 역사 해석이 복잡한 곳도 없다. 만주인과 일본인의 해석이 있었고 중국인의 해석이 있었지만 대만인에 의한 해석은 아예 없었다. 1970년대 말 전후 세대에 의해 대만 역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계엄령 치하의 교실에서 들었던 것처럼 깜깜했을 >>
국가 건설로 ‘황금 10년’ 연출 … 마오쩌둥도 평가
| Opinion |
2008-06-29
장징장(張靜江)의 행적은 여불위(呂不韋)를 연상케 한다. 세상이 뒤죽박죽이던 전국시대, 인질로 버려진 한 왕손을 본 상인 여불위는 거금을 투자하며 온갖 지혜를 동원해 세상을 한번 들었다 놓은 진시황을 만들어냈지만 결국은 버림받았다. 2000여 년 후 장징장도 한눈에 쑨원(孫文)>>
“건설 없는 혁명은 정치 불량배들이 하는 짓”
| Opinion |
2008-06-22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는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헤아리기가 부족하다. 그러나 ‘강남제이가(第二家)’는 저장(浙江)성 후저우(湖州)부 난쉰( )진(현 후저우시 난쉰구)의 장씨일가(張氏一家)가 유일하다. 19세기 중엽 오구통상(五口通商)이 실시됐다. 창장(>>
스승 이름으로 장학재단 세운 당대의 명필 치궁
| Opinion |
2008-06-15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일정 중에 ‘서예가 면담’이 있었다. 중국서법가협회 주석 치궁(啓功)과의 만남이었다. 애초에는 붓글씨를 즐겨 쓰던 대통령인지라 류리창(琉璃窓)을 방문해 벼루를 한 점 구입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치궁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上將 계급장 단 ‘붉은 간첩’ 리커눙<下>
| Opinion |
2008-06-08
한국전쟁 발발 1년 후인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이 시작됐다. 전투가 진행 중이다 보니 회담이나 협상이라기보다 담판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외교부 상무 부부장 겸 중앙군사위 총정보부 부장 리커눙(李克農)을 담판의 중국 측 총지휘자로 지명했다. 당시 리커눙은 천식>>
上將 계급장 단 ‘붉은 간첩’ 리커눙<上>
| Opinion |
2008-06-01
1955년 9월 27일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마오쩌둥(毛澤東) 주재하에 인민해방군 계급 수여식이 열렸다. 28년 전 8월 1일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의 무장봉기를 기점으로 장정(長征)과 항일전쟁, 국공전쟁, 한국전쟁 등 무수한 전쟁터를 누빈 사람들이었지만 30년 가까이 >>
<61>‘민국 4공자’의 으뜸, 大수장가 장보쥐
| Opinion |
2008-05-18
장보쥐(張伯駒)는 난쉰의 팡쉬원과 함께 대(大)수장가였다. 두 사람을 일컬어 ‘난팡베이장(南龐北張)’이라고 부르지만 장보쥐 이름 앞에는 ‘민국 4공자(民國四公子)’ 중 한 사람이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늘 붙는다. 2000여 년 전 전국시대에 맹상군(孟嘗君)·신릉군(信陵君)·>>
<60> 학교교육 불만 때문에 되살아나는 私塾
| Opinion |
2008-05-11
학숙(學塾)은 청(淸) 말인 1905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2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육기구였다. 대도시에서 벽촌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었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했지만 규범이 획일적이지 않고 명칭과 종류가 다양했다. 가숙(家塾)과 사>>
<59>중국 근대화 앞장선 120명의 官費 유학생
| Opinion |
2008-05-04
1870년 청나라 조정은 미국에 파견할 소년 관비 유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유학총부(留學總部)’를 창설했다. 쩡궈판(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예산 100만 달러를 확보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1847년 미국 예일대에 한 명의 중국 학생이 입학한 지>>
<58>‘통일 중국’ 목표 같았던 장제스와 마오쩌둥
| Opinion |
2008-04-27
장제스(蔣介石)는 시종일관 중국공산당을 적대시했고 대만으로 나온 후에도 완고하다 할 정도로 ‘반공복국(反共復國)’을 견지했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一個中國)’이라는 문제에 대해선 중국공산당과 생각이 같았다. 대만으로 쫓겨와 있으면서도 ‘두 개의 중국(兩個中國)’ 혹은 ‘하나의 >>
위안스카이에게 청 왕조 헌납한 룽위
| Opinion |
2008-04-20
룽위(隆裕)는 서태후(西太后)의 친조카였다. 19세에 자금성에 들어와 이듬해 광서제(光緖帝)의 황후가 됐다. 수줍어하고 부끄러움을 잘 탔지만 서태후를 믿고 우쭐거릴 때가 많았다. 광서제는 툭하면 서태후에게 달려가 일러바치는 룽위를 서태후의 밀정으로 여겼다.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세상 일이 궁금하면 회현당에 가라
| Opinion |
2008-04-13
중국 근현대의 정치사나 문화사에 등장하는 유명 인물 거의가 미식가였다. 음식의 맛과 향기와 모양새에 예민하고 까다로웠다. 요리 이름의 적절함 여부를 놓고 논쟁을 하는 경우는 허다했고 심하면 의절까지 했다. 이들에게는 눈앞에 닥친 정치·외교 현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었다>>
<55 >변절했던 조강지처 지킨 4인방 장춘차오
| Opinion |
2008-04-06
장춘차오(張春橋)에게는 원정(文靜)이라는 한 살 연상의 조강지처가 있었다. 본명은 리수팡(李淑芳)이었다. 학생시절 공청단에 가입했고 항일전쟁 발발 후 공산당 중앙당교를 졸업했다. 진차지(晉察冀)일보에 필명으로 투고하곤 했다. 하루는 그의 글을 읽은 당 선전부원 장춘차오의 호출을 >>
<54> 두부 장수 출신 만주국 총리 張景惠
| Opinion |
2008-03-30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무력으로 중국의 동북 3성을 점령했다. 이듬해 3월 만주국(滿洲國)이 탄생했다. 만주와 내몽고를 중국에서 분리하려는 일본 군부와 혁명으로 몰락한 청조(淸朝) 유신(遺臣)들의 합작품이었다. 톈진(天津)에 있던 청(淸)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데려>>
<53> 루쉰 형제의 絶交 미스터리
| Opinion |
2008-03-23
베이징의 북양정부 교육부에 근무하던 루쉰(魯迅·周樹人)은 1919년 전형적인 사합원 한 채를 구입해 고향의 가족들을 올라오게 했다. 루쉰은 중간채에 살았고 모친은 큰며느리 주안(朱安)과 바깥채에 살았다. 큰동생 저우줘런(周作人)과 일본인 부인은 막내 젠런(建人)과 함께 뒤채에 살>>
<52> 狂人 류원덴과 향토작가 선충원
| Opinion |
2008-03-16
서남연합대학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마르지 않는 샘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원인 제공자는 교수들이었다. 개성 강한 사람들이 객지의 작은 도시에 뒤섞여 있다 보니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괴팍한 행동들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이 한두 가지 일 화를 남겼다. 그러나 류원덴(>>

<51>대학은 큰 스승이 있는 곳
| Opinion |
2008-03-09
서남연합대학에는 총장이 없었다. 세 대학의 총장이 상임위원이었다. 베이징대와 난카이대 총장은 임시 수도 충칭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칭화대 총장 메이타이치(梅胎琦) 혼자 대학을 끌고 나갔다. 그가 총장이나 다름없었다. 판잣집에 양철 지붕을 덮은 기숙사와 교실·실험실 등 82채>>
<50> 서남연합대학<上> 戰時에 8년간 문 연 중국 최고 학부
| Opinion |
2008-03-02
1937년 7월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중국 국민정부는 일본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 대학들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이징대학 지하실은 일본 헌병대의 고문 장소로 변했다.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톈진의 난카이(南開)대학은 한 채를 제외>>
<49> 칭화대학이 배출한 최고의 才子
| Opinion |
2008-02-24
칭화(淸華)대학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재자(才子) 소리를 듣는 사람은 세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뤄룽지(羅隆基·1896∼1965)였다. 학생 시절부터 고문(古文)을 적재적소에 인용한 예리하고 미려한 문장과 연설은 필적할 자가 없었다. 그가 연설할 때 그림자가>>
<48> 靑幇 두목 황진룽의 배짱과 굴욕
| Opinion |
2008-02-17
1949년 5월 26일 국민당군 25만 명이 상하이에서 투항하거나 철수했다. 이틀 뒤 공산당은 상하이시 인민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장제스의 후견인으로 공산당원과 노동자 도살에 앞장섰던 청방(靑幇) 3대형(大亨) 중 장샤오린은 이미 암살당했고 두웨성(杜月笙)은 홍콩으로 피신>>
<47> ‘대만의 사마천’ 언론인 롄야탕
| Opinion |
2008-02-10
푸젠(福建)성 룽지(龍溪)현의 롄(連)씨들은 명(明)이 만주인에게 멸망하자 대거 대만으로 이주해 타이난(臺南)의 닝난팡(寧南坊) 마빙잉(馬兵營)에 정착했다. 고목이 울창한 곳을 지나자 안개 속에 끝없이 펼쳐진 연꽃들이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역 특산물인 사탕수수의 즙을 >>
<46> 마오쩌둥의 '영어 교사' 장한즈
| Opinion |
2008-02-03
1963년 12월 26일 마오쩌둥의 70회 생일잔치는 조촐했다. 몇 명의 친척과 장스자오(章士釗) 등 네 명의 동향 노인을 초청한 게 전부였다. 마오는 이들에게 자녀 중 한 명을 데리고 오라고 사전에 통보했다. 부인은 절대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 장스자오는 영어교사를 하던 장>>
<45> 황제 놀이 했던 유대인 모험가 허퉁
| Opinion |
2008-01-27
20세기 초 상하이가 모험가와 투기꾼의 낙원이었던 시절 아브라함 하둔(Abraham Hardoon), 중국 이름 허퉁(哈同)은 이곳에서 가장 성공한 모험가였다. 허퉁은 상하이 개항 3년 후인 1850년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사춘기 무렵 형이 한 잘못 때문에 엄마>>
마오쩌둥 형제와 결혼한 여걸 자매<하>
| Opinion |
2008-01-20
옌안을 떠난 허쯔전은 시안(西安)에 몇 달간 머물렀다. 마오는 인편으로 소식을 전했다. 말로는 ‘돌아오라’면서 나무상자에 허쯔전의 일용품을 가득 채워 보냈다. 허쯔전은 상자를 던져 버렸다. 상자가 박살 났다. 없는 돈에 새 상자를 사서 물건들을 돌려보냈다. 시안에 머무르는 동안에>>
마오쩌둥 형제와 결혼한 여걸 자매<상>
| Opinion |
2008-01-13
1927년 봄 징강산(井崗山) 동쪽 언저리인 장시(江西)성 융신(永新)현에 중국공산당 임시위원회가 성립됐다. 지역 명문가인 허(賀)씨 집안의 민쉐(敏學)·쯔전(子珍)·이(怡) 3남매가 모두 위원에 당선됐다. 사람들이 ‘융신산허(永新三賀)’라고 불렀다. 얼마 후 우파가 융신현을 장>>
<42> 국적 속인 어느 여배우의 親日
| Opinion |
2008-01-06
리샹란(李香蘭)은 1920년 랴오닝성(遼寧省) 펑톈(奉天, 오늘의 瀋陽)에서 태어나 12살까지 탄광지대인 푸순(撫順)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滿洲)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문화적으로는 전형적인 만주인이었지만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혈통상으론 완전한 일본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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