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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 Health/음식정보

일본 '라면神' 의 라면집 다이쇼겐(大勝軒)

일본 최고의 라면 만드는 '라면신'의 귀환

염동호  호세이대 겸임연구원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lyk3390&folder=13&list_id=9751907


 
2007년 3월 20일. 도쿄 북부의 부도심 이케부쿠로(池袋) 하늘이 아침부터 요란스럽다. 방송사 취재 헬기들이 한 라면 집을 빙빙 돌며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그 행렬은 골목골목으로 이어졌다. 헬기로 촬영된 영상을 통해 겨우 그 행렬의 꼬리를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는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도 있었다. 행렬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돼 저녁 9시가 넘는 한밤중까지 계속됐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폐점하는 다이쇼켄(大勝軒)의 라면 한 그릇을 마지막으로 먹는 것.
 
그날 오후 NHK를 비롯한 방송 각사는 이 모습을 생중계했고, 주요 방송사의 저녁 톱뉴스는 폐점하는 라면집의 마지막 하루를 중계하는 뉴스로 시작됐다. ‘일본의 대표적인 식문화, 라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라면의 신이 은퇴했다’ 등 찬사와 아쉬움을 아끼지 않았다. 라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평일에도 6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라면집 ‘다이쇼켄’을 창업해, 라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다고 평가받는 이가 바로 올해 일흔넷의 야마기시 가쓰오(山岸一雄)다. 사람들은 그를 ‘라면의 신’이라 부른다.
 
건강을 이유로 한평생 걸어온 라면 인생을 접었던 그가 10개월 만에 은둔을 풀고 지난 1월 제자와 함께 다시 라면집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았다.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마치 작은 부처처럼 느껴진다. “라면의 원조집을 살려야 한다는 제자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주방에 다시 섰어요”라며 반기는 그의 얼굴은 시종 잔잔한 미소로 가득하다.
 
제자들이 가게에서 2분 거리에 있는 월세 30만 엔(한화 300만 원 상당)이나 되는 아파트를 얻어 스승을 모신 것이다. 등 떠밀려 지난 1월 제자와 함께 다시 문을 연 그는 하루 4~5시간 주방을 지킨다. 아침 10시에 출근해 수제자가 아침 6시부터 준비한 수프의 맛을 보고 면발의 강도를 체크하는 게 그의 일과. 11시 개점부터 5시 폐점 때까지 네 번이나 갈아 끓이는 수프의 맛에 한 치의 오차가 없도록 이것저것 지시를 하며 미세한 맛의 차이를 조정한다.
 
“물 수십 그램 차이로 맛이 달라지거든요. 바깥 날씨에 따라 끓이는 시간과 불의 강약도 조절을 해야 해요.”
 
그의 라면의 특징은‘쓰케면’. 라면 하면 수프에 담긴 라면이 일반적이지만, ‘쓰케면’은 라면 수프에 면을 담가 먹는 스타일이다. 쉽게 말해‘따로 라면’이다. 면과 수프가 따로따로다 보니 면발도 좋아야 하고, 수프 맛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면을 직접 만들어 ‘쓰케면’에 적절한 면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800엔짜리 라면 한 그릇 먹기 위해 6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50년 인기 비결의 레시피를 물었다.
 
“닭뼈, 돼지뼈, 야채, 해산물, 간장, 물, 그리고 배합 농도와 시간이지요. 모두 공개하고 있으니 비결이랄 것도 없지만, 굳이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우리 레시피에는 ‘마음’이라는 재료가 들어가요.”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富士夫) 일본 경단련 회장은 그의 라면 맛을 ‘麥面絆心の味(면을 통해 인간을 연결하는 마음의 맛)’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가게 현관 위에는 미타라이 회장이 쓴 ‘麥面絆心の味’라는 글이 걸려 있다. “미타라이 회장과는 라면집 견습생 시절 팔씨름하면서 지낸 막역한 사이지요” 라고 한다. 미타라이 회장이 대학생 때 같은 집에서 자취를 했다. 배고팠던 젊은 시절, 라면 한 젓가락을 서로 나눠 먹으며 우의를 다졌던 사이. 그 후 미타라이 회장이 미국으로 가면서 30여 년간 소식이 끊겼지만 캐논의 사장이 된 후 수소문해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가게 곳곳에 라면집 견습생 시절, 라면 배달하는 모습, 창업 초기의 점포 사진 등 그의 50년 라면 인생 흔적이 가득하다. 1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병약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그는 열여섯 살 되던 해 도쿄에 상경해 일 년간 선반공으로 일했다.
 
“먹을 게 없어서 힘들었어요. 월급의 태반은 여동생 학비며 집안 생활비로 부쳤지요. 그러다 보니 남는 게 없었어요. 쉬는 날 30엔짜리 라면 한 그릇을 사 먹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지요. 양이 많으니까 포만감도 있었고요.”
 
지금도 그의 라면은 다른 라면 집보다 양이 많다. 보통 라면은 면이 180~190g이지만 그의 라면은 300g이 넘는다.
 
“양도 맛’이라는 게 제 식문화 철학이 되었어요. 양이 푸짐하면 눈이 푸짐해지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잖아요.”
 
그 후 친척 형의 권유로 라면집 견습생이 되었다. 그의 라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주방 일을 거들며 배달까지 했다. 월급은 선반공 때의 절반으로 줄었다. 비 오는 날 배달하면서 입을 비옷 살 돈이 없어서 비가 오면 항상 흠뻑 젖었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일했다. 면 만드는 기술을 익히고 수프 맛을 철저하게 익히기 시작했다. 그를 ‘라면의 역사’로 만들어 준 ‘쓰케면’도 그의 식문화 철학과 가난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손님들이 남기고 간 면을 모아 물로 씻은 다음 그것을 수프에 담가 종업원 식사로 먹기 시작한 것이 ‘쓰케면’의 효시가 된 것.
 
“종업원들이 먹는 것을 보고 단골손님이 먹고 싶다며 달라고 하더니, 맛있다면서 메뉴로 만들라고 하는 거예요.”
 
 
맛있는 라면의 기본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

이런 권유에 힘입어 연구를 거듭해 완성한 것이 바로 ‘쓰케면’이다. 1955년이었으니 53년 전의 일이다. 결혼 후 그는 독립을 결심했다. 자금이 많지 않아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교도소 인접 지역에 점포를 얻었다. 모두가 안 될 거라고 했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얼마 되지 않아 새벽 1시까지 문을 열어야 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게 지나쳤던 것일까?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위암으로 죽은 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폐인처럼 지내던 그는 우연히 셔터가 내려진 자신의 가게 앞을 지나다 휴업 안내문에 적힌 메시지를 읽고 뜨겁게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하루라도 빨리 영업을 재개해 주세요’, ‘라면이 그립습니다’라는 메시지들이 붙어 있었어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남기고 간 거였죠. 그때까지는 이렇게 먼 곳에서도 손님들이 왔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는 머리에 터번처럼 하얀 손수건을 동여 매고 다시 주방에 섰다. 그동안 받아들이지 않던 제자들도 받기 시작했다. 제자 가운데는 한국인도 있고, 뉴 오타니 호텔 등 일류 호텔에서 10년 넘게 수행한 일류 요리사도 있다. 짧게는 일 년, 길게는 4년까지 그의 수하에서 라면을 배운 제자들은 일본 전국은 물론 하와이까지 진출했다. 그는 그들이 모두 독립해 자신의 가게를 차리도록 지원한다. 점포 이름을 따르라거나 맛을 고수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라면의 기본인 마음을 가르쳤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지요. 그것만 잃지 않는다면 제 라면은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일본에서는 노하우를‘장인의 재산’이라고 하는데, 그는 라면집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레시피를 거리낌 없이 공개한다. 누가 물어오면 밀리그램까지 정확하게 알려준다. 심지어 먼 지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라면집을 하고 싶다며 전화를 걸어온 사람에게 전화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맛은 나누는 것입니다. 더욱이 맛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나눠야지요. 나누면 기쁨이 배가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니까요.”
 
‘무심의 경지’라고나 할까? 그의 모습에서 인생을 달관한 작은 부처의 모습을 느낀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무욕’을 느꼈기 때문일 게다. 그는 지금 정맥류, 신장, 관절, 호흡기 질환 등 다섯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지병을 앓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도 한 번에 20m조차 걸을 수 없는 그를 지금도 주방에 서게 하는 힘은 바로 라면에 대한 열정. 그런 그에게 라면 철학을 물었다.
 
“맛있는 라면을 배불리 먹고 만족하는 고객을 보며 행복해하는 것.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맛있는 라면을 만드는 것. 바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아닐까요.”


글쓴이 염동호님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일본 호세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NHK 국제방송국, 닛케이 라디오 캐스터로 활동 중이며 《아시아의 금융위기와 시스템 개혁》(일본서적.편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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