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릉. 이 사진은 지난 4월 개성 고려박물관 소장 흑백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
조선 왕릉은 모두 42개가 있다. 그 중 40개는 남한에 있으며 나머지 2개는 북한 개성에 있는 정종의 후릉(厚陵)과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齊陵)이다.
▲ 공민왕릉 무인석. 왕릉 석물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
북에 있기에 직접 찾아갈 수 없는 현실도 안타깝지만 자료 또한 드물다.
지난 4월 21일 개성에 취재차 갔을 때 공민왕릉이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개성 고려 박물관에 있는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기에 주로 고려시대의 유적이 집중돼 있다. 그래서인지 공민왕릉(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이 국보로 지정됐지만 조선 왕릉은 2기밖에 없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제릉은 북한에서 문화재로도 지정돼 있지 않아 사진 한 장 구할 길이 없었다. 조선 왕릉은 공민왕릉의 상설제도(象設制度, 산릉도감에서 능역에 설치하는 모든 시설물)를 계승했기에 고려의 왕릉은 조선왕릉의 모태가 된다.
공민왕은 1365년 난산으로 세상을 떠난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건설을 지휘, 7년간 두 개의 쌍분을 건축했다.
호화판으로 노국공주의 묘를 조성하면서 백성의 원망을 샀지만 공민왕릉은 고려시대의 수학, 건축, 예술 등이 집대성돼 있어 왕릉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를 총지휘한 사람이 환관 김사행이다. 김사행은 조선건국 후 정릉과 흥천사를 화려하게 지어 아첨했다는 비난을 듣는다.
그의 제자 박자청이 계승한 왕릉 건축의 특성은 후릉에서 나타나지만 직접 답사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신의왕후의 제릉
신의왕후(1337~1391)의 제릉에 대해 자료를 구하려 애썼지만 북한 유적을 답사한 대학의 학술자료에서도 제릉의 흔적은 볼 수 없었다.
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이며 증문하부사 한경의 딸이다. 안변 한씨라 하지만 파주 한씨 등도 모두 실제로는 청주 한씨이다.
▲ 공민왕릉 문인석. |
그 바람에 신덕왕후 강씨가 정식 왕비로 책봉되는데 이는 왕자의 난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신의왕후는 개풍에서 죽었기에 개풍에 있는 제릉(개성직할시 개풍군)에 묻혔다.
태종은 정종이 개성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제릉에 고했으며 제릉의 재궁(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을 수리하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난간석과 석장승을 세운 박자청에게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제릉은 왕릉 규모를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릉은 유달리 송충이 극성에 시달린다. 실록에 제릉 송충이 잡기를 여러 번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종 3년(1403년) 4월 21일 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해 송충이를 잡기도 했고, 그 뒤에도 송충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세종 3년(1421년) 4월 16일에는 송충이 때문에 바깥 산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그 전해 겨울부터 봄까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서 이루 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불을 지르고, 안쪽 산은 백성을 동원해 송충이를 잡았다 한다.
신의왕후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절비(節妃)와 제릉으로 추존됐고 태조 7년(1398년) 11월 11일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숭된다.
신의왕후의 경우를 보면 역시 아들은 잘 두고 봐야 한다. 아들 태종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제릉은 조선 왕조에서 역대 왕의 능 참배 때마다 포함됐으며 왕실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존경을 받는다.
신의왕후 소생 중 정종과 태종 둘이 왕이 됐으며 이후 송시열이 신덕왕후 강씨를 복위시키기 전까지 조선의 태조의 유일한 왕비로 종묘에 부묘됐다.
▲ 정종의 후릉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
정종의 후릉
개성직할시 판문군 영정리 백마산 기슭에 있는 후릉은 제2대 정종(1357~1419)과 정안왕후(1355~1412)의 쌍릉이다. 태조와 신의왕후의 둘째아들 방과가 정종이다.
1차 왕자의 난으로 1398년(태조 7년) 왕위에 오른 정종은 다음해 개경으로 다시 천도한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종을 왕세제로 삼고 그 해 11월 태종에게 선위했다.
이후 상왕으로 개성 백룡산 기슭 인덕궁에서 격구와 사냥과 잔치를 즐기며 20년 간 유유자적 하다가 63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정안왕후와 사이에 소생이 없으나 후궁들에게 15명의 아들과 8명의 옹주를 둔다.
▲ 2대 정종의 후릉 문인석.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
▲ 3대 태종의 헌릉 문인석은 후릉 문인석과 닮았다. |
정종보다 앞서 승하한 정안왕후는 후릉이라는 능호를 얻었고 나중에 묻힌 정종은 정안왕후의 능호를 이어받는다. 조선 초기에 왕비가 먼저 죽고 능호를 받으면 왕이 나중에 죽어도 능호를 이어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는 왕릉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조선 초기의 일이다.
세종도 소헌왕비가 먼저 죽어 영릉(英陵)이라는 능호를 쓰자, 이를 함께 쓴 경우다. 훗날, 왕은 왕비의 능호를 따라 가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립됐다.
정종은 묘호가 없었고 죽은 후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만 받았다. 역대 왕 중 정종에게만 유독 묘호가 없었다. 정종에게만 묘호가 없었던 것은 정종에 대한 푸대접, 즉 태종이 일으킨 왕자의 난 때문에 허수아비 왕으로 지냈던 정종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 봐야겠다.
공정대왕으로 불리던 정종은 260년이 지난 숙종 7년(1681년)에서야 영의정 심수항 등의 상소로 비로소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받게 된다.
▲ 정종의 후릉 무인석.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
▲ 태종의 헌릉 무인석 |
정종의 후릉은 박자청의 작품으로 태종의 헌릉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두 쌍의 문인석과 두 쌍의 무인석 모습도 헌릉과 다르지 않다. 후릉도 공민왕릉과 비슷해 조선 왕릉이 고려의 왕릉제도를 계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병풍석을 둘렀으며 면석에 12지상을 새겼고 왕과 왕비의 묘 앞에 각각 장명등을 세운 것과 혼유석의 받침돌이 5개인 것도 조선 초기 양식이며 이는 고려왕릉 제도에서 나왔다.
왕릉 연재를 마치며
2004년 9월부터 시작한 왕릉연재가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자료를 찾느라 기록을 뒤지고 왕릉을 답사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북한의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조선 왕릉 40개와 광해군묘, 연산군묘를 모두 답사했고 77회에 걸쳐 조선 왕릉을 연재했다. 조선 왕릉을 빠짐없이 모두 다뤘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문화재청은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소외됐던 조선 왕릉의 역사적 사료 가치와 중요성이 이제 인정받게 됐다. 왕과 왕비의 삶의 공간이 궁궐이라면 사후의 대궐인 조선왕릉은 한 시대를 주도한 그들을 둘러싼 또 다른 역사의 의미와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500년 역사 동안 만들어지면서 각 왕의 성격을 품고 있는 조선 왕릉의 매력에 빠져, 왕릉을 답사하고 밤새워 글을 쓰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500년 동안 내려온 왕들의 개성을 고스란히 느껴 볼 수 있는 공간이 왕릉 말고 어디에 또 있을까. 조선왕조는 사라졌지만 왕과 왕비의 모습은 지금도 왕릉에서 숨 쉬며 살아 있다.
덧붙이는 글/
오랜 시간 <한성희의 공릉 숲 이야기>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며 왕릉 연재를 마칩니다. 77회를 쓰는 동안 조선의 능.원.묘 제도와 조선의 역사를 연재했습니다.
연재에서 다루지 못한 원(園)은 기회가 되는대로 기사 올릴 것을 약속 드리며 다시 한 번 독자들의 깊은 애정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2676
2006-05-22 10:06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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