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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패주 연산군


▲ 연산군 묘역 입구에서 종친들이 제사를 봉향하러 찾는 손님을 맞고 있다.


연산군의 제사를 보러 폐왕의 묘에 갔던 날은 4월임에도 쌀쌀했다. 다 물러간 추위가 다시 오는 듯 비까지 뿌리고 있어, 정리중인 겨울옷 중 오리털 파카를 다시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연산군(1476~1506) 500주기였던 지난 4월 2일, 청명제(淸明祭)를 지내던 그날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있어 어두웠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추운 바람이 불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도봉구 방학동)에 올라서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연산군 봉향회, 거창 신씨 대종회에서 참석한 문중 사람들로 붐볐다. 왕릉에서 치르는 왕이나 왕비 기신제에 여러 차례 다녀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석한 것은 처음 본다.


▲ 연산군 묘역은 연산군과 신씨 묘(위). 후궁 궁주 조씨묘(중간) 휘순공주 내외 쌍묘(아래) 등 5기가 있다. 이날 연산군 제사를 지낸 후 후궁 조씨, 휘순공주 내외 제사도 지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 쌍묘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 후궁인 궁주(宮主) 조씨 묘가 하단에는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묘가 있다. 연산군 묘는 폐왕임을 보여주듯 4200여 평 땅에 일반 묘와 다름없는 작은 규모로 조성돼 있다.

"'왕의 남자'는 오늘이 연산군 제삿날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제물을 차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종친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이렇지"

낮 12시가 되자 청명제가 시작됐다. 한 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제물을 올렸다는 폐군주의 제사는 이제 일반인 제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왕을 상징하는 황색의 봉등 대신 청사초롱을 든 제관이 들어서자 돌연 겨울을 연상케 하는 찬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 청사초롱 봉등을 앞세워 제관들이 청명제를 지내러 연산군 묘에 오르고 있다. 왕과 왕비는 황색 봉등을 쓴다.


제사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비교적 옷을 두툼하게 입었던 동행인들도 추위에 덜덜 떨기 시작했다. 계절을 무시하고 오리털 파카를 입은 용감무쌍한 패션감각으로 나선 나만 추위를 몰랐다. 아무리 날이 흐리다지만 4월인데 이렇게 추울 수가? 카메라를 든 손이 시려 번갈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녹여야 했다.

"한이 하도 깊어서 날씨도 그렇지."

누군가 혀를 찼다. 정말 연산군의 한이 깊어서 갑자기 추운 바람이 부는 것일까. 제물 중엔 백설기가 놓였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의 한이 많아 하얀 떡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

흔히 연산군이라 하면 폭군으로 대변되고 포악한 성품으로 정사를 그르쳐 쫓겨난 왕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등장한다. 아무리 창작이라지만 이런 영화가 나오는 배경은 연산군에 대한 선입견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폐비 윤씨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던가, 요부 장녹수, 백성을 몰아낸 금표, 황음무도한 행위 등이 부각되어 '연산군=폭군'이라는 등식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연산군 일기가 반정세력에 의해 편찬됐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494년 12월 29일 19세의 젊은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등극 이전부터 성종을 위해 불교식 제를 올리는 것에 거세게 반대하는 대신들과 충돌했다. 연산군이 공부를 싫어했다 전하나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을 사후 1백년 간 함구하라는 어명을 내려 다음 왕위를 물려줄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이는 세자로서 총명한 자질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명이 된다.

연산군은 명필로 이름을 날렸고 조선에 왔던 중국사신들은 왕의 글씨를 얻어 가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왕은 함부로 글씨를 내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얻지 못했다. 공부에 등한시했다는 연산군이 뛰어난 명필로 중국사신에게까지 인정받았다면 그 설의 진위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4월 1일 연산군 묘에서 봉향된 폐주 연산군 제사에서 종친들이 절하고 있다.


연산군에게 힘이 되어줄 외가가 궤멸했기에 젊은 왕을 지원해줄 정치세력이 없었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죽인 장본인이었고 당시 조정을 장악한 기득권의 대표적 집안의 인물이었다. 또한 성종대부터 등용된 사림은 성리학을 내세워 왕권에 정면도전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 건국 공신인 신진사대부들의 권력이 성종대에 지나치게 증대하자 이를 견제하려 등용한 지방 토호세력이었던 사림은 대부분 사간원과 사헌부 등 언론기관인 삼사에 배치됐다. 중앙 핵심권력은 여전히 훈구파가 독점하고 있었고 정계 진출을 노리는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한 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으로 일어난 무오사화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성종실록 편찬책임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 도중,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넣은 '조의제문'을 발견하고 연산군에게 고한다.

'조의제문'이란 김종직이 세조 3년(1457년) 밀양으로 가는 도중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하는 말을 듣고 서초패왕 항우를 세조에, 항우에게 죽은 의제(義帝)를 노산군(단종)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넣은 것은 예종, 성종, 연산군으로 이어 내려온 왕권의 정통성을 전면부인하고 나아가 왕위도전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연산군으로서는 이 사건을 절대로 좌시할 수 없었다. 정통왕권체제를 부인하고 나서는 신진 사림의 도전으로 간주하고 정계에 겨우 발을 디뎠던 사림을 제거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종묘사직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었기에 연산군이 아니라 어느 왕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일이었다.


▲ 연산군 제사를 지내기 전 제물이 한지에 싸여 놓였다.


훈구파인 이극돈의 고변으로 연산군 4년(1498) 일어난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의 추존세력으로 이뤄진 사림은 거의 초토화됐다. 이 사초 건으로 연산군은 역사의 기록인 사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집권 후반기에 3년마다 편찬하는 실록을 5년으로 바꿨고 사관이 개인적으로 사초를 작성해 사가에 보관하는 일을 금했다. 사초에 사사건건 간섭했던 연산군은 이로 인해 역사를 말살하려 했다는 비난과 연산군 시대가 역사암흑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잔치를 벌인 일과 흥청과 운평 등 기생과 여자들의 기록들로 도배질돼 있다. 왕은 절대 볼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는 사초를 가져다 감시했던 연산군이 이를 적어 놓는 것을 묵인했을까? 역사에 평가되는 일을 제일 두려워했던 연산군이었다. 그런 그가 사관들이 이런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패자의 기록인 <연산군일기>의 진위가 어디까지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연산군은 왕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에게 지급한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이를 보충하려 한다. 공신전이란 건국 초기 개국공신들에게 지급한 영구적으로 후손에게 상속되는 전답이었다.

사실 연산군 시대는 태평성대라고 평가받는 성종대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국방도 탄탄한 풍요로운 시대였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연산군이 백성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려 보충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기득권의 반발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해 임사홍이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공모해 일으킨 사건이 갑자사화다. 폐비 윤씨의 일을 들춰내어 피바람을 몰고온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궁중 세력,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힘의 대결이었다.



바람과 시와 여자

연산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와 여인과 풍류다. 조선시대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보다 많은 시를 쓰고 남긴 왕은 없다. 현재 전하는 130여 편도 왕조실록에 남은 것이고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의 시집와 문집은 전부 불태워졌다.

시를 중요시한 연산군은 과거제도까지 성리학의 경서 중심인 논술에서 시문(詩文)으로 바꿨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사회는 시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연산군의 이런 조치는 사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에도 당송대에 시문으로 과거 시험을 봤고 인재를 뽑았었다. 반드시 경학만을 고집해서 과거를 봐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경학 아닌 시문으로 시험을 봐서 인재를 등용해도 다를 것 없다는 그의 이런 파격적 조치는 연산군이 폐위된 후 갑자년 과거 합격자가 모두 취소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연산군이 즐겼던 연회는 사실 성종도 허구한 날 베풀었던 잔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종대의 태평성대는 잔치와 향락이 유행하는 풍조가 민간에까지 만연됐고 연산군 초기는 오히려 이런 세태를 경계했다. 연산군이 낭비한 국고는 문정왕후가 없앤 국고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왕의 향락을 구실로 반정을 일으킨 명분으로는 빈약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를 비난했던 사림이 주도권을 잡았던 조선 후기에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백성이 먹고살기 어려워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비교해 본다면 반정이란 것도 성리학의 도덕성을 구실로 일으킨 정권교체 쿠데타였을 뿐이다.


▲ 왕릉은 무인석 한 쌍과 문인석 한 쌍이 상설되지만 폐군주의 무덤은 문인석 두 쌍이 왕위를 잃은 연산군을 보필하고 서 있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20일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죽는다. 연산군의 도덕성에 후세까지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일이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겁탈했다는 일이다. 박씨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나이가 연상인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풍조로 보아 월산대군보다 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1454년생인 월산대군(1454~1489)이 1476년생인 연산군보다 22년 위이고 박씨의 나이는 연산군보다 23년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폐위되던 해 죽어 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박씨 나이는 53세 이상일 것이다. 53세 전후라면 여자로서 폐경기에 달하고 상식적으로도 그 나이에 임신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손수 길러 어머니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실록에도 십여 차례 연산군이 쌀과 노비 등을 박씨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조실록에 이 사건은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연산 12년 7월 20일)'는 단 한 줄 기록밖에 없다. 여기서 사실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사람들이' 그랬다는 '카더라'식으로 슬쩍 비켜간 글 행간을 주목해야 한다. 반정 이유에서도 박씨가 양모(養母)라는 이유로 금내(禁內)에 머무르게 했다며 아리송한 소문을 부추기는 말뿐이다.


▲ 연산군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은행나무는 수령 830년 거목이다. 저 나무는 폐왕이 이곳에 묻히는 장면을 목격했으리라.


박씨가 죽고 두 달이 못되어 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폐위됐다. 그리고 역사도 그들의 손에 편찬됐으니 터무니없는 소설이나 소문까지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패주 연산군 2

연산군은 독살 당했다.


▲ 폐왕이 죽은 500주년 청명제에서 제관이 술잔을 올리고 있다.


12년 간 왕위에 있던 연산군이 여자와 사치, 향락을 일삼은 것은 사실이며 정치를 잘했던 통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정에 굶주린 정신장애자로 강조돼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중종반정 이후 조선의 절대 왕권은 약해졌고 성공한 쿠데타에 맛들린 신권이 입맛에 안 맞으면 왕을 갈아치우거나 독살하는 일이 벌어진다. 신권이 커지면서 기득권을 이루자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매관매직을 일삼고 탐관오리들로 인해 백성들의 고초가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중종반정은 민초들과 상관없는 지배층의 정권 다툼이었고 연산군은 실패한 왕이었을 뿐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연산군을 성군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승자에 의해 기록된 실록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은 철저하게 적용된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돼 위리안치 됐고 9월 24일 폐세자와 창녕대군, 양평군 등은 반정 공신들의 주장에 의해 사사됐다.



겨울에 학질에 걸려 죽은 연산군

반정이 일어난 이틀 후부터 반정세력들은 중국에 보낼 사신에게 왕이 바뀐 연유를 고하는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9월 21일 병으로 인해 연산군이 중종에게 양위했다는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만약 전왕(연산군)의 병 증세를 물으면 어릴 때부터 풍현증(風眩症)이 있었는데, 세자가 죽은 뒤 애통과 상심이 정도를 지나쳐서 전의 증세가 다시 도져 심신이 안정되지 못하며, 공연히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혼미하고 현기증이 나며 방안에 깊이 거처하면서 창문도 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만약 세자의 병 증세를 물으면 창진(瘡疹)으로 요사(夭死)하였다고 대답한다. 만약 전왕의 소재를 물으면, 별궁에 있다고 대답한다. 만약 전왕의 아들이 몇 사람이냐고 물으면 다만 딸 하나가 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대답한다.(중종실록 1506년 9월21일)


폐세자에게 아직 사약을 내리지 않은 때이지만 이미 죽이기로 계획한 게 이 기록에서 드러났다. 이로부터 2일 후 폐세자는 사약을 받고 죽는다. 반정 세력의 시나리오는 치밀했고, 연산군은 상국인 중국에서 쿠데타의 전모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어야 할 존재였다.


▲ 제를 올리기 전 손을 씻는 제관.


연산군이 역질(疫疾)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이 괴로워 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1506년 11월 7일. 중종은 의원을 보내라고 했으나 다음 날인 8일 "연산군이 6일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유배된 지 겨우 두 달만에 30세 젊은 나이의 연산군을 죽음으로 몰아간 '역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정체는 12월 9일 기록에서 드러났다. 언제 장사를 지냈는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으나 왕자의 예(3달)로 장사를 치르게 했으니 장례를 마쳤을 때거나 아직 땅에 묻지 않았을 시기였다.

사위사(辭位使) 김응기와 승습사(承襲使) 임유겸을 중국으로 보낸 후인 12월 9일 혹여 중국 사신이 와서 폐주의 일을 물을 경우를 다시 대비하려는 논의가 벌어졌다.

공조 참의 유숭조가 중종에게 "폐주가 교동에 내쫓겨 죽었으니, 만약 중국에서 와서 그 이유를 묻는다면 미리 의논하여 대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뢴다. 연산군을 내쫓은 이유를 그럴 듯하게 조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숭조는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지난날 총애를 받는 뭇 계집은 안에서 고혹하고, 아첨하는 자는 밖에서 비위를 맞춰 임금을 도(道)로써 인도하지 아니하였기에 크게 인심을 잃고 거의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연산군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민심이 쏠리는 중종에게 스스로 양위했다는 작위된 내용이다. 그리고 유배된 폐주에게 찬에 정성들여 몸을 봉양했다, 시종과 여자를 보내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호위까지 붙여 불의의 변을 막게했고 옷과 물품을 들고 연산을 찾아가는 사람이 줄을 늘어설만큼 보살폈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도 연산이 병으로 죽자 중종이 밥도 먹지 않고 애통해 했다는 삼류소설이었다.

유배된 집은 몹시 좁고 열 자(3m) 떨어진 사방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 막아 해를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음식 구멍만 뚫어 밥을 넣어줬던 유배, 이런 곳에 위리안치 당해 죽은 연산군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관에서 벌떡 일어날 노릇이었다.

그런데 중국으로 보낼 모범답안인 소설 여기서 연산군이 독살 당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발언이 나온다.

"복어(服御)·물선(物膳)을 받들고 가는 자가 줄을 잇게 하였으되, 불행히 학질(虐疾)에 걸려 죽으니, 전하께서는 애통하고 슬퍼하여 수라를 거두고 정지했으며…."

학질(虐疾)이란 무엇인가. 학질모기에 물려 발병하는 말라리아를 학질이라 한다. 한방에서 말라리아를 학질이라 하며 이는 여름철에 걸리는 병이다. 연산군이 죽은 것은 11월 6일이고 실록은 음력으로 기재됐으니 대충 12월 초순이라 보면 추운 겨울에 돌연 나타난 학질모기에 물려 병에 걸려 죽었다는 말이다.

학질모기에 물리면 1주일에서 2주일 정도 병원체 잠복기간이 지난 후 증세가 나타난다. 학질에 걸렸다 해도 젊은이가 하루 이틀 사이에 죽지는 않는다. 학질의 특징은 하루아침에 돌연 급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동의보감에도 나와있다.

겨울철에 학질이란 터무니 없는 병으로 젊은 연산군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었다는 기록은, 폐세자와 왕자들을 성급하게 죽여버린 반정세력들이 눈엣가시인 연산군을 독살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 지난 4월 2일 연산군 제사를 지내는 내내 추운 겨울바람이 손 시렵도록 불었다.


다음 해인 2월 15일, 연산군이 병으로 아우에게 양위하니 허락해 달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중국에 갔던 김응기와 임유겸이 돌아왔다. 왕(연산군)이 죽기 전까지 허락해 줄 수 없다는 중국의 답변을 가지고 돌아온다.

연산군을 이미 죽인 후라 이에 걸맞는 핑계를 대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중종과 반정세력들에게 연산군은 죽어줘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그날 김응기와 임유겸은 조선출신 태감(내시)들을 언급하며 뇌물을 주자고 청하고 중종은 이를 허락했다.



어린 세자를 성급하게 죽인 이유

연산군은 부인 신씨(1471~1537)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금슬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이 죽을 때 남긴 말은 "폐비 신씨가 보고싶다"는 전언밖에 없었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 출생한 7남1녀 중 살아남은 아들은 폐세자 황과 창녕대군 이다. 연산군이 폐위되자 22일 만에 폐세자(10세)는 유배지 정선에서, 창녕대군(5세)은 황해도 수안, 양평군은 제천에서 각각 사사당했다. 서자 이돈수까지 그날 사약을 먹고 죽었다.

1506년 9월 24일, 영의정 유순·좌의정 김수동·우의정 박원종·청천 부원군 유순정·무령 부원군 유자광·능천 부원군 구수영 및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왕자들을 죽이자 하자,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는 중종에게 반정 공신들은 우리의 뜻은 정해졌으니 차마 못하겠다고 하면 안된다고 거의 협박수준으로 왕에게 압력을 가해 일어난 비극이었다.

폐세자 이황이 죽자 중종은 장례라도 후하게 치러주자 했으나 공신들은 이마저 '관곽이나 써주면 후한 것'이라며 묵살했다.


▲ 연산군(오른쪽)과 부인 신씨(왼쪽)가 잠든 묘.


반정 세력들이 나이 어린 세자와 왕자들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발 빠르게 사약을 내려 죽여버린 일은 조선조에서 유래없는 사건이었다.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도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4개월 만에 사약을 내렸고,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천수를 누렸다. 광해군의 폐세자는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가 들키자 자살한 것이지 사약을 내려 죽은 경우가 아니었다.

왕이 병으로 아우에게 양위한다는 구실을 댔으니 세자가 살아있으면 중종은 왕위를 지킬 수 없었고, 반정세력의 쿠데타도 들킬 우려가 있었다. 폐세자와 왕자들을 황급히 죽여버린 반정 공신들이 젊은 연산군을 살려둘 리 없었다. 왕자들의 죽음으로 연산군의 죽음은 예정됐다.

▲ 연산군 묘 입구의 샘. 차고 강한 맛이 났다.
신씨는 연산군과 달리 반정 세력에게도 현숙하고 바른 왕비였다고 인정받았다. 연산군이 죽어 강화도에 묻히자 신씨는 1512년(중종 7년) 현재 자리로 이장하게 해달라고 중종에게 청했다. 중종은 죽은 형을 위해 콩과 쌀 100석, 면포 150필, 정포 100필, 참기름 2석 등을 내려주고 이장하게 했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9일 전인 8월 23일,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감지라도 했는지 이를 예고하는 시 한 편을 남긴다.

그날 후원에서 나인들을 거느리고 잔치를 하며 초금(草琴·나뭇잎·나무껍질·풀잎으로 만든 피리)을 두어 곡조 불고난 왕은 시를 읊으며 눈물을 흘린다.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
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會合不多時)


왕으로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누렸던 연산군이 눈물을 흘리며 인생을 풀과 이슬 같은 것이라고 탄식하게 만든 이유는 인생의 무상함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예지했기에 그랬을까.


▲ 수령 800년이 넘은 은행나무(길이 25m)는 폐군주가 묻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지금도 연산군의 제사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130여 편의 시를 남긴 연산군은 30세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도 '왕의 남자' 주연으로 나올만큼 풍자되는 연산군의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셈이다. 왕의 묵은 한이 그리도 깊어 이렇게 500년 지난 제삿날인 4월에도 손 시린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것일까.

청명제가 끝나고 연산군 묘를 내려오자 구름이 걷히며 햇볕이 쏟아졌다. 이른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는 밝은 햇빛이 눈부셨고 이내 4월의 기온으로 돌아갔다. 4월의 더위에 제사 내내 시린 바람에서 몸을 따뜻하게 보온해줬던 오리털 파카를 벗으며 '정말 연산군의 한이 그렇게 추운 바람을 제사에 몰고 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2006-04-20 16:5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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